446강-YouTube강의(안과 너머 예레미야애가 1:17)20231010-이 근호 목사
제446강, ‘안과 너머’. 어디 안에 있다는 것과 경계선 너머 있다는 것의 구분, 차이. 그것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구원이라 할 때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죠, 구약에. 구약 나라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아니죠. 어느 이방나라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대표나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고, 그들에게만 언약이 주어진 이유가 그들의 조상이 있었어요. 그 조상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사 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이미 아브라함을 내세웠어요.
그러니까 이 사실을 아는 이스라엘로서는 자부심이 대단하죠. 자기들만 아브라함의 자손, 복의 자손이기 때문에. 뭐 다른 이야기는 안 들려옵니다. 들려올 필요가 없고 듣고 싶지도 않고. 조상 잘 만나서 복된 나라 되었다, 철석같이 그들은 그걸 자기 믿음의 내용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몰랐던 게 있어요. 아브라함 안에서 구원을 받는데, 아브라함 안에서 구원을 받으면서 그게 다가 아니고 더 나아가서 그 안에서 너머로 또 가야돼요. 너머로. 안에서 너머로.
그러니까 안에 있고 안은 구원받고 바깥엔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안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당연히 구원받는 거 아니고, 안에 들어왔는데 안이 그게 전부라고 여긴 자는 탈락이에요. 안에서 그 너머 세계가 또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너머 세계는 바깥에서는 못 들어와요. 안쪽으로 들어와서 너머로 가야돼요. 단계가 두 단계죠. 아브라함 밖에 있던 자들이, 아브라함 밖에 있으면 이방나라죠, 이방나라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와야 되겠죠. 그럼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와야 구원이 되는 겁니다.
와보니까 그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어요. 우리가 택한 백성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줬고 우리 남자들은 다 할례를 행하고. 그런데 그 할례 행한 것이 사람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할례를 행했으니까 복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라고 의연히 살아가던 자들.
그런데 그 자들이 구약을 통해서 폭파해버립니다. 그 장면이 나와요. 예레미야애가 1장 17절에,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면에 있는 자를 명하여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저희 가운데 불결한 자 같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안에 두었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그들이 계속 탐구하겠죠. 탐구하나마나 뭐 뻔히 알죠. 이스라엘 땅 중에서 가나안 땅 중에서 하나님이 어디에 상주해있는가를 그들이 모를 리가 있겠어요? 어디에 상주했겠습니까? 성전에 있는 거죠. 그 성전 있는 장소가 바로 모리아 산, 예루살렘. 그게 시온이잖아요.
하나님이 시온에 성전 지어놓고 다른 데 다른 나라에는 성전이 없고 이스라엘 시온에는 성전이 분명히 있고. 분명히 있고. 그럼 성전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다는 뜻이고. 성전이 있으니까요. 그럼 ‘유일하게 복 받은 민족, 하나님의 백성은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밖에 없다.’라고 그렇게 철석같이 그들은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방금 읽었던 예레미야애가 1장 17절을 보게 되면 오히려 시온이 불타버리는데 그것은 어쩌다보니까 바깥에 있는 외국나라가 강해가지고 어쩌다보니까 시온을 치는 게 아니고, 누가 쳤다고 되어 있느냐 하면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면에 있는 자들을 명해서 야곱 이스라엘의 적이 되라고 여호와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라고 지시한 여호와는 이스라엘 안에 있습니까? 그 너머에 있습니까? 이스라엘 안에 없죠. 이스라엘 안에 없고 이스라엘 바깥에도 없어요. 그럼 어디에 있느냐? 이스라엘 시온 그 너머에 있는 거예요. 그 너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는 그 안에 하나님이 있고 그러면 바깥에는 하나님이 없다. 아주 단순한 논리, 간단한 논리입니다. 뭐 복잡할 거 하나도 없어요. 여기 하나님이 있으니까 저기 하나님이 없는 건 당연하죠.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있다는 여기에도 하나님이 없으면? 하나님이 계시긴 계시는데 어디 계시겠는가 하는 거죠.
하나님은 심판 너머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고 여기는 예루살렘, 이스라엘 시온을 하나님께서 다른 나라, 이방민족으로 하여금 공격하도록 명했습니다. 없애버리라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우기는 그 장소를 싹쓸이, 없애버리라 이 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면 되겠죠. 교회 안에는 구원 있고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죠. 교회 안에는 성만찬이 있으니까, 세례식도 있고 성만찬이 있으니까 예수님의 떡과 살을 떼니까. 어디 공장에서 뗍니까? 청와대에서 하겠어요? 요새는 청와대도 아니다. 용산 집에서 하겠어요, 뭐 대통령실에서 하겠어요? 어디서 하겠습니까? 교회에서 하잖아요. 교회가 성만찬하고 세례식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교회 안에 있다’라고 누가 주장하죠? 교회 운영하는 사람들이 주장하죠.
그런데 교회 밖에 있는 적들로 하여금 지상의 교회를 없애버리게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교회 사람들은 대번에 오해하죠. ‘이 이방민족들, 기독교도 모르는 것, 복음도 모르는 것들이 우리 교회를 쳤구나. 너희들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 교회를 핍박했구나.’ 이렇게 생각할 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선지자가 나타나서 “아니야, 그게 아니야. 예수님이 교회를 치게 했어.”라고 했을 때 교회가 그걸 받아들이겠습니까? 못 받아들이죠. “무슨 말이야?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야.”라고 우길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그대로 빼닮아요. 똑같이 하게 합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착각을 유발시켜놓고 하나님이 있다는 그 인간을 하나님께서 버리고 그 너머에 가요. 그 바깥에 가는 게 아니고요. 그 너머에 간다고요.
바깥은 왜 아니냐 하면 안 아니면 바깥, 인간의 생각은 달랑 이 두 개밖에 없어요. 이쪽 바깥 아니면 이쪽 안, 둘밖에 없다고요. 너머라는 것은 beyond, 너머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죠. 그런데 주님은 처음부터 그 너머에 계시는 겁니다. 처음부터.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 교회가 몇 군데 나옵니까? 1장, 2장, 3장 일곱 군데 나오죠. 그 일곱 군데 교회 가운데 촛대 안 옮긴 교회 있습니까? 다 촛대 옮겨졌죠. 그럼 촛대는 어디에 있어요? 그 일곱 교회에는 다 없는데 촛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주님 안에 있죠.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 못하고 교회 안에 주님이 있는 걸로 해서, 주 안에 있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으로 그냥 퉁 치자는 거예요. 그걸로 때우자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그래서 망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실제로 있는 하나님 믿는 이스라엘이 있는 걸로 하나님은 우리나라에 있는 걸로 치자는 겁니다. 정답은, 아니죠. 정답은,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모든 인간이. 심지어 열두 제자도 버렸잖아요. 그렇다면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 너머에 주님 계십니다.
따라서 누가 주 안에 있는 진짜 교회이고 백성이냐? ‘제가 주님 앞에 주님을 내 소유로 삼고 나를 구원하라고 주님을 붙든, 주님 덕분에 내가 천당 가자라고 여겼던 내가 바로 죄인이었습니다.’라는 거예요. 주님 내 자리에 오시고 우리 가정에 오시고 우리 교회에 와달라고 사정사정한 그 태도 자체가 바로 주님께서 그 너머로 가실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고 동기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 있는 곳에 주님 계신 것이 아니고, 주님 있는 곳에 우리가 죄인으로 있으면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