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받은 심판주
2023년 7월 9일 디모데후서 4:1-2
(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사랑과 보호과 지켜주심과 인도하심을 기대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참으로 의아할 겁니다. “하나님 안 믿고 예수 안 믿는 나쁜 사람이나 심판하세요”라고 우리의 불만이 속에서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다 죽입니다’입니다.
즉 심판이란 “너 죽어. 너 의미 없어!”입니다. 인간치고 예외없이 다 심판받아 죽습니다.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심판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선악과 과실’에 담긴 의미를 온전하게 완성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조상이 선악과 따먹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선언하셨습니다.
“정녕 죽으리라!” 이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고 바뀌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엉터리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일관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가 심판받습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사도가 아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죽이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충성하는 일인 줄 알고 스데반 집사를 돌로 처죽이는 그 현장의 책임자처럼 행동했습니다. 그 뒤 사도 바울은 여전히 사람들을 죽입니다. 이번에는 돌이 아니라 복음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
‘복음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말은 새삼스럽게 죽인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모든 인간은 ‘죽어있음’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주변을 살피면서 세상을 심판합니다. 이는 자기 살기 위해 타인을 탓으로 돌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대단한 사람만 살아남는 게임판에서 자신을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대단한 사람’임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런 인간들을 사도는 복음으로 죽입니다. 죽이는 방법은, 악마가 현재 벌리고 있는 일들을 모방하는 방식입니다. 악마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자부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모든 말씀에 위반자임을 들추어내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은, 원래 하나님과 인간의 거처가 동일함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 과실을 따먹고 생명나무가 있는 곳과 생명나무가 없는 곳으로 완전히 구분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삶의 목표가 생겨버렸습니다. 그것은 고생많은 이 세상에서 떠나 죽어서는 편히 쉬는 천국에 가고자 하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파하고 집에 오면서 “나 우리집에 갈래”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 이 어린아이 같습니다. 영원한 안식처를 소지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안식처가 애초부터 허락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안식처를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 있다고 여기고 자기 유리한 식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직접 이 땅에서 오셔서, 멀리 보면서 상상하던 그 모든 것이 얼마나 거짓된 생각인 것으로 폭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벌써 ‘인간을 향해 심판하는 하나님의 행위’ 자체가 달갑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나름대로 아끼던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31-3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 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 17:31-
32)
자기 집에 불 났는데 안 돌아볼 위인이 누가 있는가요? 인간은 한 시도 쉬지 않고 분노하고 있고 한 시도 쉬지 않고 울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방법은 나의 판단과 결정은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말아야 한다는 식입니다. 엄청난 고집이지요. 이 고집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멀리서 지켜 보고 계시지만 않고 직접 인간과의 거리를 좁혔습니ㅏ다.
그들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인간들이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저 사람은 사이비다!” 심판주께서 친히 인간들에게 심판을 받으므로서, 자진해서 심판을 받지 않겠다는 식으로 몸부림치는 모든 이들은 그 어느 누구도 구원될 수 없는 자들임이 발각된 겁니다. 이것이 실은 하나님의 전략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3:52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그 어떤 것도 ‘옛 것’입니다. ‘새 것’아닙니다. 천국을 이룰려면 ‘옛 것’과 ‘새 것’이 나란히 대조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새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시작하시면서 장자(맏이)만이 상대하십니다. 어린양의 피는 ‘맏이’를 죽이기 위한 피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맏이 자리를 비워두시려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 완성에서 주어지는 상속은 오로지 맏이에게만 돌아가게 됩니다. 둘째 아들은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맏형에 의존적으로 살아야 상속분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맏이되시는 분이 오셔서 선악과 과실의 훼손에 대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맏이 자리에 들어서게 되면, 빈 자리가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로마서 8:29에 나오는 내용닙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맏이를 죽음에서 부활케 하시므로서 그분을 맏이로 받아들여지는 모든 자에게 새로운 자리, 곧 ‘새 것’의 효과가 주어집니다. 새로운 안식처는 인간이 고대한 시온성이 아니라 ‘아들의 나라’를 말합니다.(골 1:13) 그 안에서 심판은 이미 처리가 된 심판입니다. 곧 자기 백성의 모든 죄는 주님이 가져가시고, 주님의 의는 자기 백성과 하나된 공간을 형성합니다.
나의 빈 자리가 주님의 긍휼로 채워지는 겁니다. 따라서 평생 자기라는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가득 쌓아지게 됩니다. 나는 주님과 상관없지만 그 죄가 가득찬 쓰레기 통해 비우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남이 하실 일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40)
따라서 성도는 이 생을 살면서 온갖 수모와 모욕감을 감수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이 우리 속까지 파고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2강-디모데후서 4장 1-2절(심판당한 심판주)2307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4장 1절에서 2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4:1-2
하나님 말씀은 디모데후서 4장 1절에서 2절까지입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하나님께서 또는 예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까지 심판하신다고 되어 있어요. 죽음이 심판의 마감이 아니라는 거예요. 죽었다고 해서 심판을 끝장낸 게 아니라는 겁니다. 죽고 난 뒤에 본격적인, 본 게임에 들어갑니다. 심판게임, 저주게임에 들어가죠.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때는 하나님께 도움받기 위해서, ‘하나님, 저 사랑해달라’고 교회 나와요. 사랑해 달라, 지켜 달라, 도와주세요, 뭐 이런 마음으로 오는데 막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은 ‘내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것이다.’ 주께서 준비한 것은 심판이었습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이런 거예요. 아동이 학교 마치고 “아이고 덥다. 이제 집에 가자.” 하고 집으로 가는데, 부모가 집으로 오는 애 손목 잡고 “가자, 도로 학교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종교라 하는 것은 ‘고생할 만큼 고생했으니까 천국 가서 푹 쉬자.’ 이게 종교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자. 네가 고생했다는 그 자리에 다시 돌아가자.” 네가 이런 식으로 제대로 고생을 안다면 ‘내가 죽어서 이제 천국 가야지.’ 이런 생각이 나올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 땅에 살면서 뭔가 빼먹고 사는 거예요. 뭔가 누락 되고 놓치고 있었던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심판에 대비책을 강구해가지고 ‘교회 가서 성경 가르침대로 다 받아들이면 내가 심판에서 모면 되고 면제되겠지.’라는 생각을 가지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 믿으라고 하면 복음 믿고, 십자가 믿으라고 하면 십자가 믿고, 피 믿으라고 하면 피 믿고, 언약 믿으라고 하면 언약 믿고, 온갖 하라는 대로 다 하면서 ‘뭐 이 정도 하면 충분한 대비책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이제 남아있는 것은 천국 가서 편히 쉴 일만 남아있다.’ 경상도 말로 ‘단디’ 했다는 거예요. 자기 구원에 단도리, 단디, 대구은행 카드에 ‘단디 카드’가 있어요.
단도리, 제대로 이제는 미래 보험 하나 잘 들어놨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인간은 나름대로 판단하고 심판을 했거든요. 나름대로 자기 자신의 행동을 날마다 판단하고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그러나 그렇게 자기가 어떤 판단을 하고 이해를 하기 때문에 놓친 것이 뭐냐? 하나님의 심판을 놓친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 한다.’ 거기에 겁먹고 교회 가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대비책을 강구하고자 성경 전문가 목사한테 한 수 들으려고 왔지만 정작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자기 심판에 스스로 심판받았다는 사실을, 이것을 빼먹은 거예요. 그걸 빼먹은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것에만 겁먹었지 하나님이 내린 심판 속에 하나님 자신이 거기 포함돼 있다는 사실, 스스로 자기 심판 속에 자기가 들어갔다는 사실을 그걸 놓쳐버린 거예요.
집에 오면 안 되죠. 천국 못 갑니다. 하나님이 심판 한다, 할 때 하나님 자신마저……, 인간들은 자기 심판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 심판 속에 하나님 자신도 포함됐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그걸 상상도 못 했죠. 생각도 못 한 겁니다.
성경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한다고 이야기하니까 ‘하나님의 심술이 대단하네? 선악과 따먹었다고, 와, 하나님 참 뒤끝 작렬하네. 그거 따먹었다고 사람을 작살을 내시네. 그러니까 내가, 워낙 사람이 좋으니까 하나님의 심판도 받아줘야지.’ 이런 식으로 자기 가치를, 자기 값어치를 또 높입니다.
그래놓고는 ‘하나님이 심판하기 때문에 내가 그 심판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서, 남들은 다 심판받더라도 나만은 심판받지 않고 구원으로 빠져나가는 게임을 한 번 즐겨봐?’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원래 이 심판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냐면,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같이 살게 되어있어요. 거처가 두 군데가 아니고 하나였어요.
거처가 하나인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거처가 둘로 바뀌었습니다. 한쪽은 생명나무가 있는 거처와 생명나무가 없는 거처, 둘로 분리가 된 거예요. 두 개가 된 거처를 하나로 단일화시키기 위해서 한쪽 거처를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그걸 단일화하면서 그 두 개 거처를 통일된 거처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인간에게는 일을 맡길 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이 지상에 보내서 선악과 심어놓은 취지도 완성시키고 동시에 생명나무의 취지도 완성시켜서 이제는 사람이 사는 처소를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사는 처소를 만든 거예요. 그걸 골로새서 1장에서 ‘아들의 나라’라. 아드레날린이 아니고 아들의 나라, 아들의 나라로 만든 겁니다. 이 말은 심판에서 면제될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고가 없어요. 모두가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심판받고 심판받으면서 그 심판의 완성된 상태로서 기존의 하늘나라도 아니고 기존의 인간 나라도 아니고 제3의 나라, 아들의 나라로 통합해서 만드는 그 계획을 주님께서 생각을 해주신 겁니다. 선악과 따먹었다, 선악과가 훼손되었는데 그 일을 위해서 훼손된 것을 어떤 식으로 완성시키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한 관건이 돼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훼손시킨 선악과, 그 의미를 어떻게 완성시키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을, 그러니까 마귀를 흉내를 내요. 인간을 흉내내게 하는 겁니다.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내가 곧 생명이고 내가 곧 진리고 내가 곧 길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굳이 그 말씀 하기 전부터 이미 인간들이 본인들이 길이요, 본인들이 진리요, 본인들이 생명인 것처럼 이미 살고 있었다는 그 사실을 전제로 하신 거예요.
너희들은 네가 생각하는 그 자체에 네가 위반자가 되어 있다. 위반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심판의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심판의 말씀을. 심판이라는 것은 거처가 둘로 분리된 걸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심판이라고 했어요. 두 개다 없애고 새로운 하나를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심판하기 위해서는 “너 이리 와. 너 죽었어.” 이게 심판이거든요. “너 이리와. 네 존재 의미 없어.” 이게 심판이에요. 주께서 심판하신다는 말, 성경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한다는 말은 ‘인간 의미 없어.’라는 뜻이에요. 아까 기도하신 분이 중요한 이야기 했어요. 주님하고 우리하고 상관이 없다는 것, 대~단히 중요한 거예요. 상관없습니다. 상관이 없어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상관없다는 게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 40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38절부터 설명하면, ‘내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나 말고 다른 분의 뜻이 먼저 전제되어 있었고 나는 그분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 그걸로 끝입니다. 인간은 빠져주세요. 인간은 완전히 빠져주세요.
인간이 뭘 하든 주께서 관심도 없어요. 빠져주세요. 인간은 벌써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너 이리 와. 너 의미 없어. 죽어.” 이 대상에서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어요.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자기주장 할 수 없습니다. 구원? 나하고, 여러분하고 상관없는 이야기에요. 주의 일?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질 것은 심판의 대상이라는 그 자체로서 우리 의미는 끝났어요. 마감, 끝났습니다. “죽어, 인간아.” 끝난 거예요.
이것은 창세기 2장 17절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하나님의 취지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그 뜻이 뭐냐?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 말이에요.
그러면 구원에 관해서 이 구원은 누구 소관이냐면, 우리 인간 소관이 아닙니다. 구원은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나하고 상관이 없어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걱정할 권한도 없고 그럴 자격도 우리는 없습니다. ‘나 죽으면, 지옥 가면 어떻게 해?’ 그 자체가 시건방진 태도에요. 지옥이고 천국이고 네 소관이 아닌데 왜 네가 걱정을 하느냐는 말이지요, 네가!
그렇다면, 우리를 지워버리죠. 우리를 삭제해버리고 나면 남아 있는 일은 뭐냐? 이 세상에 이제 주의 일만이 나타나죠, 주의 일. 그러면 주의 일은 우리와는 손 털고, 악수도 하지 않고 ‘나에게 찾아오지도 마. 필요 없어.’ 우리를 제껴버리고 주께서 홀로 일하시는데 그 홀로 일하시는 내용이 마태복음 13장 52절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천국을 만드는데, 선지자들이 있는데 그 선지자들, 서기관들이라고 되어 있어요.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천국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가? 옛것과 새것을 나란히 가져오는 거예요. 매치를 시키는 겁니다. 대조를 시키는 거예요.
옛것은 인간들이 악마와 결탁해서 인간이 나름대로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 전체가 옛것이에요. 오늘 예배 참석하신 분들, 갑자기 현악기 소리가 막 들리니까 여러분들이 갑자기 옛 교회, 큰 교회 다니던 옛것이 생각나지 않던가요? ‘안 하던 짓을, 평소에 안 하는 짓을 왜 하지?’
옛것은 뭐냐면, 이겁니다. 학생이, 아동이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빨리 수업 끝나기를 바라고 난 뒤에 ‘이제 집에 가자.’ 하고 집에 오는 것, 그게 옛것이에요. ‘세상 사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죽어서는 호강하자.’ 하고 천국 가겠다는 것이 옛것이에요, 그게.
“힘들다. 이제 집에 가자.” 그 ‘집에 가자.’ 안식처.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안식처를 폭파시킵니다. 우리의 안식처를 용납하지 않아요. 편히 쉴 곳이 없어요. 찬송가는 아닌데 가스펠 송 가운데 유명한 곡 가운데서 가사가 수상한 가사가 있어 한 번 적어 봤습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밤을 세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그런 거 없습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없어요. 왜? 시온성이 두 개가 되기 때문에. 옛 시온성과 새 시온성이 이게 불연속적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완성, 선악과의 완성, 인간에게는 막혀있습니다. 끊어져 있습니다. 인간은 거기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이미 이 땅에서 자기가 살 궁리를 하고 행복을 추구할 권한이 있다고 착각해서 행복을 추구하는데 결국 그 마지막에 나오는 그 판타지, 환상이 뭐냐면, 저 멀리 보이는 시온성, 나의 영원한 안식처를 그리워하고 있어요. 뭐 했다고? 이 세상에서 뭐 했다고 안식처를 찾죠? 네가 교회 와서 뭐 했다고? 바이올린 이거 했다고 천국 보내줍니까? 뭐 했다고 구원해줘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이 땅에 종교를 만들어서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 그것은 바로 마귀가 스스로 자기가 생명이고 진리고, 그리고 길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은 티를 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악을 죽이고 선을 행하게 되면 누적된 선이 나로 하여금 질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새로운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인간은 새로운 것을 끄집어낼 자격이 못 됩니다. 인간에게는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저 옛것밖에 없어요. 옛 부대에 새 포도주는 담기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9장에서, 이 땅에 부자 청년보고 한 이야기인데요.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이유가, 가지 못하는 이유가, 부자가 천국 간다면 그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 구멍 속에 들어갔다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럼 부자가 왜 천국을 못 가는가? 그것은 넉넉하고 풍부한 그 재산으로 인하여 자기가 소유한 그것이 마치 자기의 어떤 쉼터, 안식처라고 오해하기 때문에, 그러한 집착을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 봉사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바르게 살게 해서 복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부자 되게 하셨다? 그 부자 되게 하셨다는, 내 재산이 많다는 그것이 옛것의 범주의 스케일에 속한다는 사실을 놓쳐버려요.
‘하나님께서 나를 부자 되게 했다는 것은, 내가 착하다는 뜻이고 내가 착하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더는 심판을 행하지 않고 복으로만 줄게’라고 한다고 스스로 그렇게 잘못 해석 하고 있는 거예요. 큰 교회 가면 그런 게 많아요. “우리 교회 장로님은 열심히 봉사했더니만 복을 주셔서 이번에 회사 10개를 또 인수했다. 세상에, 저게 하나님 살아계신 모습이 아니고 뭔가? 찬양하라, 찬양하라.”
그리고 “그 장로님이 또 입 싹 닫지 않고 이번에 교육관 짓는다고 한 3억 내어놓았데. 역시 하나님은 복을 주셔서 그 복을 주신 바를 통해 교회가 성장해서 온 천하에, 온 지구상에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늘나라 전파하도록 하나님은 살아 역사한다.” 뭐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곡해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구약에 나와 있어요. 신명기 28장, 유명한 말씀인데 여러분이 옛 교회 갔을 때는 심방 받을 때마다 여러분이 많이 들었던 거예요. 신명기 28장 1절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3, 4절에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특히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네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는다.’(13절)는 구절. 와~, 심방 갈 때마다 따라다니는 전도사는 지겨워 죽겠어요. 똑같은 소리 이 똑같은 본문 하나로 심방 다 때우고 있어요. 그런데 이걸 알아야 해요. 그렇게 신명기 28장 하면서 왜 14절 15절, 그쪽으로는 안 넘어가냐 이 말이죠.
‘네가 내 말을 다 지키지 않으면 어디 가도 저주가 너를 따를 것이다. 너는 머리는커녕 꼬리가 될 거다’ 이 말씀은 왜 안 하는 겁니까? 심방 헌금 안 나올까 싶어 걱정돼서 그렇죠. 이게 이 말씀을 딱 주시면서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면, 너희들은 처벌을 먼저 받고 규칙을 나중에 발견하는 처지라 이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기 위해서, 심판받기 위해서 태어난, 처벌받은 자로 태어난 거예요,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심판받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뭘 해도 저주가 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처벌을 먼저 받고 ‘왜 우리가 이렇게, 갓난아이까지, 왜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아이가 냉장고 냉동실에서 죽어야 되는지, 왜 우리가 뭘 해도 지지리 고생만 해야 하는지’ 저주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을 발견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이걸 율법화 시킨 것을, 율법을 코 앞에 들이댑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 율법을 보는 순간 ‘내가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 모든 아이디어를 코앞에 둔 성경 말씀을 해석함으로써 어떤 내 나름대로의 규칙을 뽑아내려고 애를 쓰는데 그 뽑아낸 규칙이 옛것입니다. 그게 마귀의 아이디어입니다.
그 아이디어로 돌아가신 분이 있어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경솔하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게 아니에요, 경솔하게. 심사숙고해서 재판 내렸고, 혼자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에서 양평까지 그 고속도로는 혼자 의견이지만……, 갑자기 정치적 발언을, 예수님 죽인 것은 혼자 의견이 아니에요. 잠복 돼 있는 우리 전체의 일치된 의견이었습니다. ‘안 맞다. 맞지를 않다. 예수의 주장은 맞지가 않다.’
우리가 그 당시 예수님을 모르니까 예수의 주장을 포장 했지만 그 당시에 사람들은 생생하게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생생하게 그분의 얼굴을 보았고, 그분의 행동도 직접 보고 그래서 내린 결론은 “아니다.” ‘아니다.’에요. 유대인들이 뭐 아이큐가 낮아서, 공부를 못해서 그랬습니까? 그들 아니면 우리도 아니에요.
우리가 가짜 예수를 믿으니까 예수, 예수, 하지만 진짜 예수 왔을 때는 우리가 내리는 결론은 동일합니다. ‘아니다. 당신은 아니야. 당신은 제거 대상이야.’ 그중에 그 인간들의 악마성의 일관성, 또는 인간들이 내린 인간의 자기 판단, 자기 심판이죠, 인간의 자기 심판, 그 일관성을 보여준 사람이 누구냐면 사울이었던 사람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사울은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설교를 마치고 7장 끝에 보면, 58절에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스데반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의 취지가 한 곳에서 나왔다는 뜻이고요, 그 한 지점이 뭐냐? 사울이라는 지점이에요. 돌 던지는 사람이 옷을 벗어 그 사울 앞에 둔 거예요.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고 처단하는 것에 대해서 그 지역의 하나의 책임자로서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사울입장에서는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찬송과 영광이 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을 본인은 마음에 두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였는데요, 그것은 사울이 돌로 쳐 죽인 것과 동일해요.
그 사울에게 인간의 판단, 인간이 세상을 보는 판단의식, 심판 의식이 포함돼 있는데 선악 체계에서 판단하는 그 판단이 사울에서 어디로 이어지느냐면, 사도바울로 이어져요. 동일한 인물이니까. 사울이 이름이 바뀌어서 바울이 됐거든요. 그러면 사울의 역할이 뭐냐 하면, 돌로 스데반 집사님을 쳐 죽이는 거라면 사도 바울의 역할은 복음으로 사람을 쳐 죽이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특징은, 스데반 집사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마땅함을 알려주는 게 사도 바울의 그 역할이에요. 누굴 살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울과 사도 바울의 차이점은, 사도 바울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된다는 그 심판의 대상 속에 본인을 집어넣는다는 게 그게 차이점이에요.
예수님과 똑같아요. 예수님은 심판을 이야기하면서 그 심판 이야기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잖아요. “나도 심판받을 게. 됐냐? 구원 같은 소리 하네, 천국 같은 소리 하네. 나도 죽을게.” “하나님이여 저를 심판해 주옵소서. 하나님이여 저를 심판해 주옵소서.” 이게 복음입니다.
“하나님 하시고자 하는 일이 그 일 맞잖아요, 하나님. 이제 하나님을 알았고, 덩달아 나를 알았습니다. 구원받고자 천국 가고 예수 믿어서 천국 가고자 하는 이것이 바로 진리를 흉내내는 것이고, 생명을 흉내 내는 것이고, 마귀의 부추김, 마귀가 준 욕망에 의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나 살고자 하는, 내 시온성 찾고자 하는, 하나의 집착이고 몸부림인 것을 이제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나라에 내가 상관없는 존재라는 것을 제가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도 거기에 호응하는 말씀을 평소에 이 땅에 계실 때 하셨어요. 누가복음 17장 32절에 보면 나옵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 여기 31절에 보면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이 말은, 롯의 처가 뒤를 돌아봤어요. 그런데 여러분 같으면 집에 불났는데 뒤 안 돌아볼 사람 누가 있습니까? 자기의 과거가 홀라당 불타고 있는데요. 집에 있는 세간살이하고 나와 상관있어요. 관계가 있어요. 나의집은 나의 보금자리고, 나의 둥지요, 나의 안식처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힘들어도 쉴 곳은 뭐냐? 좁은 집구석이지만 내 한 몸 누일 수 있다면 그나마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숨이라도 틀 수 있잖아요. 하~, 하~! 숨 쉴 수 있는 곳은 한 곳밖에 없어요. 내 집밖에 없어요. 그런데 주님이 드론 가지고 그걸 폭격하다니, 드론 가지고. 롯의 처가 사람의 본심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사람은 자기 주변의 위험한 요소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어디에서 그걸 알 수 있냐면, 길을 건널 때, 횡단보도 아닌 곳에서 길을 건널 때 좌우를 살피죠. 아무도 없을 때, 차가 오지 않을 때 후다닥 건너죠. 나 혼자 있는 게 제일 편해요. 왜? 같이 있을 때는 왜 힘든가? 워낙 사기를 쳤으니까. 입만 떼면 사기를 쳤으니까, 사기 치는 것이 수월한 일이 아니고 너무나 힘든 일인데, 나 혼자 있으면 사기 안 쳐도 되잖아요.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헤어졌어요.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하면서 분명히 가정법원 앞에서 “우리 다시는 보는 일 없게 하자.”라고 했는데 여자도 쿨하게 “좋다. 너랑 헤어져서 속 시원하다.” 하고 갔는데 여자가 혼자 살기 힘들어요. 생활비가 자꾸 쪼달리니까 집에 있는 노트북을 팔려고 당근마켓이라고 하는 직거래, 카드 안 되고 현찰만으로 교환되는 당근마켓 통해서 어디 어디에서 만납시다, 해서 저쪽은 현찰들고 이쪽은 물건 들고 나왔는데, 이제 길에서 딱 만났어요.
저쪽에서 남자가 “당근?” 그래서 ‘어?’ 하고 딱 보니까 헤어진 옛날 전남편이에요. “어떻게 여기서 이렇게 만나? 우리 오랜만에 만나네.” 여자가 먼저 선수를 칩니다. “와 너 진짜 질척대네. 우리 주소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네가 채팅에서 메시지 보냈잖아. 이 주소라고.” “아, 맞지. 착각했다. 빨리 물건하고 돈하고 주고받고 헤어지자.”
그래서 “노트북 내놔라.” 노트북 보니까, 남자가 하는 말이 “야, 이거 오랜만이다.” 여자가 “질척대지 마라. 나 그렇게 보고 싶었어?” “어, 너 말고 노트북.” 노트북이 남편 노트북이었던 거예요. 여자가 상당히 난처하니까 우깁니다. “그 노트북 내 거야.” “바탕화면이 내 축구 동아리 사진인데?”
여자가 양보하면 되는데 끝까지 양보 안 해요. “여기 이니셜이 S.H.C인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위한 거짓말로 계속 우깁니다. “SHC? 내가 순천향대학 나왔잖아.” 남자가 하는 말이 “내 이름이 송치호야. 내 축구팀이 여기 왜 있냐?” 하니까 “당신 동생들이 귀엽다고 줬다.” 이런 식으로 또 거짓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끝까지 싸워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결혼은 끝났지만 이혼은 끝나지 않았어요. 인간은 끝까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게 인간 심판이에요. 여자가 남편하고 헤어지면서 또 약이 올라요. 자기가 패배했다는 게 기분이 나쁜 거예요. “너 왜 우리 순실이, 양육비 안 줘?” 남자가 하는 말이 “강아지한테도 양육비 주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맞지 참.’
그런데 “너 왜 내가 혼수 해 온 거 다 가져갔어?” 그러니까 남자가 하는 말이 “그거 때문에 우리 엄마가 완전히 화났어. 어떻게 혼수를 렌탈로 하냐? 원주인에게 다 돌려줬어. 네 건 없어.” 그래서 서로 갈라졌다는 이야기에요. 실제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코미디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사람은 남을 죽이지 아니하면요, 내가 나다움을 갖출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에요. 그것 때문에 사는 게 그렇게 피곤해요. 이 말은, 인간에게는 잘못된 만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 모든 인간은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 만나도 심판받고, 잘난 사람 만나도 다 심판 받아요.
그러면 왜 결혼을 하게 하는가? 혹독하게 나 자신이 누군지를 알기 위해서 결혼을 하게 하신 거예요. 결혼 좀 하세요, 결혼 좀. 결혼해서 제발, 내가 어느 대목에서 망가져야 되는지를. 망가졌다는 것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심판할 때에 내가 납득되는 식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나를 심판하거든요, 매일같이. “너 자신이 누구냐?”
그렇다면 주께서 준비한 안식처, 그 처소, 단일화된 처소, 그것은 어떻게 우리 성도에게 주어지는가? 그것은 상속입니다. 자, 상속으로 주어져요. 이게 구약성경에 계속 나와요, 상속으로. 그걸 성경 용어로는 기업(nachalah : Inheritance)이라고 해요.
그러면 상속해준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맏이에게만 줘요. 둘째, 셋째는 상속이 없습니다. 맏이에게만 줘요. 그래서 옛날에 모든 복은 맏이한테 다 가는 겁니다. 이삭의 복이 야곱에게 다 갔을 때 큰 아들 에서는 아무것도 없고, 너는 둘째 아들에게 빌어먹어라, 하는 것이 아버지가 첫째 아들 에서에게 내린 복이에요. ‘네가 둘째한테 빌어먹어라. 넌 이번에 졌어. 거짓말쟁이 동생에게 졌어. 이게 주의 뜻이야.’
자, 그러면 ‘첫째는 좋겠네.’라고 생각하겠죠. 이스라엘 나라의 특징이 뭐냐면, 맏이만 죽인다는 거예요. 맏이를 빈자리로 만들어요. 이게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상속하는 방법이에요. 유월절의 어린양 할 때 둘째, 셋째 아들, 첫째 누나, 둘째 여동생, 다 멀쩡해요. 상관하지 않습니다. 누구하고 상관하느냐?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 그 피는 그 집안의 첫째 아들을 죽이는 용도에요.
하나님께서 맏이를 죽임으로써 어떤 역할을 하느냐? 맏이 자리가 비어있게, 공터로 빈자리 만드는 거예요. 상관없는 자는 그냥 열심히 자기 구원받을 대책 세우지 마시고 그냥 나의 자아 자리를 비워두세요. 뻥, 하니 빈자리 만드세요. 거기에 안식처 들어옵니다. 안식처가 거기로 들어와요.
거기가 빈자리가 되게 되면 그 빈자리 된 맏이용으로써 옛것이 아니고 새것이 들어와요. 옛것이 아니고 새것. 그 새것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아까 마태복음 13장 52절 다시 보게 되면, 제가 다시 봅니다. 천국은 어떻게 만드느냐? 천국은 새것과 옛것을 한 곳간에 내어온다는 거예요.
자, 옛것도 가져오고 새것도 가져오는 거예요. 그러면 옛것은, 이스라엘 역사가 실패한 그것이 옛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실패한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가 실패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시온성이 불타버리고 없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왜 인간을 심판하시는지? 설교 다 들었다 치고 여러분께 묻고 싶은 거예요. 제가 다시 한번 묻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왜 심판하십니까?”
“그것은, 비어있는 장자를 상속하기 위해서 채워놓게 되면 그 장자의 나라에서 장자만 아들이 되고 나머지는 아들이 되지 않는 그 관계성 속에서 장자가 새로운 형제를 만들기 위해 뭔가 일을 해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아마 제가 설교를 앞으로 할 거예요. 끝날 때까지 할 겁니다.
그런데 그래놓고 “제가 하나님이 왜 심판하죠?”라고 물었을 때의 그 답변으로는 궁색해요. 그거 말고 다른 게 있어야 돼요. 왜냐면 저도 알고 제가 여러분들을 아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 있다고 생각해요. 멀리 있다고 생각하고 중간에 성경이 있기 때문에 성경 해석 바르게 알면 하늘나라와 합류가 된다, 거처로 할 수 있다 생각하는데 그거 잘못입니다.
멀리 있을 때는 하나님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어요. ‘하나님 이런 분일까, 저런 분일까?’ 그런데 하나님이 왜 심판했는지, “하나님 왜 저를 심판합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왜 저를 심판합니까?” 그 질문 자체의 뉘앙스가, 뭔가 낌새가 수상해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멀리서 웅웅, 말하는 게 아니고, 아예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거리를 좁혔어요. 바로 코앞에 등장한 겁니다. 코앞에 등장해보니까 인간들 속에 무좀균 같은 게 있는지, 악마의 균 같은 게 있는지 오신 하나님을 죽여 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왜 심판합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될 정도로 인간은 그 멀리 있는 하나님에게 매일 같이 분노 중이에요. 매일 같이 인간은 crying, 울고 있어요. 인생 90 평생 살면서 하루도 울지 않는 날 없고요, 하루도 분노하지 않는 날 없습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피에로는 웃고 있지.’
인간들은 타인에게 분노하고, 그리고 항상 혼자 있어도 울고 있는 것을 평생 살면서 애써 감춘다고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그 스트레스 쌓인다고 먹어대다 뒤룩뒤룩 살만 찌고 그렇게 살죠. 한순간도 crying 울지 않은 순간 없고요, 한순간도 분노하지 않는 순간 없어요, 인간은. 그걸 웃음으로 때우죠. “아이고, 잘 지냈냐?” “걱정이 없는 게 걱정이에요. 집에 남아도는 게 돈이라서 뭘 어떻게 쓸까만 걱정합니다.”
어떤 서른다섯 살 먹은 부부가 애 다섯 명 나았어요. 인간 극장에 나왔어요. 노인들이나 보는 거 있잖아요. 애 다섯 명 키워요. 애가 그렇게 좋고, 애 키우는 게 그렇게 재미있답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죽어 나가고 있어요. 그건 모르겠고, 애 많은 건 내가 좋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부모가 모르는 것은, 애 다섯 명이 전부 다 부모한테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리고 형제간끼리 서로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아, 그건 알아요. 누나하고 남동생하고 서로 매일 같이 분노하고 있으니까 그건 아는데. 모든 게 남 탓이에요. 모든 게 누나 탓이고, 모든 것이 엄마 탓이고 아빠 탓이에요. 다섯 명 낳아 놓으니까 복스러워 보이죠. 서로 투쟁중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형제는 형제끼리,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 꼭 이혼해야 이혼이 아니에요. 살아가면서 매일같이 ‘내가 덕이 많아서 참고 있는 중이다.’ 매일 이것, 이것을 배우자에게 터트리는 거예요. ‘참 남자 성질도 좋지.’ 서로를 죽입니다.
그러면 선악과 따먹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런 인간, 맏이가 해결해줘요. 어떻게 해결하는가? 그게 ‘깐부’ 정신이에요. 깐부라는건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건데요, 구슬치기 게임에서 오징어 게임을 만든 노인이 나옵니다. 그 노인이 서른세 차례나 오징어 게임을 계속해서 만들었고 자기가 번호 1번, 한 명의 선수로서 뛰어들었어요. 뛰어들면서 게임과 상관없이 살아남도록 하는 요소를 집어넣은 겁니다. 그게 깐부라는 겁니다. ‘동지’ 비슷한 말인데 네 것, 내 것이 없게 만들어요.
네 것, 내 것이 없게 만들면 그 없게 만드는 그분, 하나님 스스로 만든 심판게임에 스스로 심판당하는 자로 오신, 스스로 깐부 되신 분, 너와 내가 동질성을 갖고 있는 그분 되시는 분이, 그것을 자기 자신의 공로로 하기 위해서는 매일 같이 우리의 것을 제거해 줘야 돼요. 제거해주십니다. 그래야 네 것, 내 것이 없는 주님의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뭐냐? 제가 설교하면서 다 알려줬어요. 매일 같이 우리는 울어야 되고요, 매일 같이 우리는 분노해야 되고요, 매일 같이 남을 죽여야 되고요, 매일 같이 우리는 돈을 악착같이 벌어야 되고요, 매일 같이 우리는 집착하고 나만 챙겨야 돼요.
그게 우리한테 딱 맞습니다. 괜히 위선 떤다고 이것 말고 다른 짓 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를 게워내고, 토해내고, 비워내는 역할은 우리 깐부 되시는 주님의 역할이에요. 주님의 역할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걸 복음이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너는 네 할 일 해라.” 천하의 죄인, 나밖에 모르는 그 할 일에 게으르지 말고 충실해야 돼요. “하세요.”라는 말 자체가 우스워요. 하고 계시니까. 내 것을 챙기는 방법은 모든 남을 폐차로 보시기 바랍니다. 타지도 못하는 폐차. 그런데 우리는 내가 폐차라는 생각은 못 해요. 남은 폐차고 나는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남은 구닥다리고 나는 새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나기 때문에 예수님하고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상관없는데 저쪽에서,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실감 나게 우리의 것을 제거해주십니다. 우리 자체를 제거해주십니다.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단적으로 잘 묘사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11절입니다. 이 대목이 여러분들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다면 정말 여러분 복 받으신 거예요. 이렇게 운 던져놓고 읽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게 인간과 예수님 사이의 깐부 관계입니다.
내 자살은 소용없어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매일 같이 우리를 공터로 만듭니다. 아무 의미 없는 존재로 만들어요. 아무 의미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충실하심이, 말씀이 주시는 하나님의 충실하심이 그 말씀이 살아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남한테 밑지지 않는, 못지않게 나만 챙기는 일에 열심히 몰두해야 돼요. 열심히 몰두해야 됩니다.
“뭐 선지자들은 다 훌륭하시겠지요.” 그렇게 이야기하시잖아요? 아닙니다. 우리하고 똑같아요. 이사야 6장 5절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는 말이 있어요. 본인 말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자, 이사야, 누가 봐도 훌륭한 신앙인 이사야가 남들 보기에는 ‘너희들은 다 구닥다리야. 나는 새것이야. 나는 신앙인이야.’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심판을 해서 남하고 차이를 드러내지만 막상 주님을 만나니까 이건 뭐 순식간에, 1초도 안 걸려요. 확 나와 버려요. “주님, 저는 망하는 존재입니다.” 이게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과거에 내가 이 땅에서 내가 무슨 짓을 했던간에 그것이 일거에, 내가 하는 추잡한 짓거리가 일거에 빈자리가 되어 버려요. 누가 우리의 죄를 사해줬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해놓은 것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심판받으신 주님뿐이에요.
새로운 안식처는, 심판이 이미 너한테는 완료가 되었다는 그 자리가 시온성이고, 그게 바로 안식처고,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네 자리를 내가 천국으로 만들어줄게. 그러기 위해 넌 많은 죄를 모아놔. 넌 쓰레기통이니까. 네가 살아오면서 경험할 수 있는 마귀란 마귀의 모든 죄를 다 끌어모아. 내가 쓰레기통 말끔하게 비워줄 때 이게 네 맏형님 덕인 줄 알아라.”
그게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성경 전체가 주님이 만든 게임이에요. 오징어 게임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 맏아들 되기 위해서 맏아들 아닌 자를 죄인 가운데서 깐부로서 “넌 나와 동질이야.”라고 같이 대신 죽으심으로써 껴안고 사랑으로써, 긍휼로 그들을 모집한 거예요.
그 모집하는 중에 하나의 과정이 누가복음 18장에 나옵니다. 바리새인이 옆에 있는 세리보고 ‘난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하고 자기 의롭다’ 고 주장하죠. 그런데 또 옆에 다른 세리가 하는 말이 13절에 보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알았다는 뜻이거든요. 남 볼 거 없다 이 말이죠.
내가 쓰레기통인데, 내가 남 못지않게 죄를 지었는데 뭘 남을 봐요, 얼굴 들고.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이게 주님의 재판, 주님의 심판입니다.
벌부터 받고, 벌 내리는 주님의 심판의 정당성. 주님은 저한테 벌 내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게 예수님의 의로움, 하나님의 의로움에 참여된 자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내가 잘해서 의인이 아니라 나에게 심판하시는 행위가 의롭다는 겁니다.
끝으로 출애굽기 33장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에서 20절 보면, 얼마 전에 했던 것 같은데요,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고 말씀을 했죠. 그런데 앞에 모세가 있잖아요. 모세는 인간의 대표잖아요. 인간한테 이걸 어떻게 적용시키느냐면, 주님께서 “보지 마.” 하고 “수그리!” 하지요.
왜냐면 ‘화로다’ 망하게 된 자는 망하게 될 자기 때문에 내가 주님 만나서 어떤 조치를 해서 구원받는 게 없어요. 그냥 수그리, 있으면 내 긍휼과 은혜가 지나가고 난 뒤에, 이미 죄의 용서를 받고 난 뒤에 다시 눈을 떠서 주께서 지나가면서 무슨 일을 벌였는가를 보면서 ‘아, 이게 사랑이고 긍휼’을 아는 관계, 이게 바로 천국 백성입니다. 이게 천국 백성이에요.
내가 뭘 했다, 가 아니라 이미 심판이 지나가고 난 뒤에, 심판이 끝나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지? 무슨 일을 했지? 내가 한 것이 아니잖아? 우리 주님께서 하셨잖아. 주님께서 네 것, 내 것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내 죄를 가져가시고 네 것, 내 것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자기 의를, 자기 거룩을 내 것으로 만들어 버렸네?’ 세상에 이런 게임이 어디 있어요? 이게 바로 주님이 준비한 게임입니다.
왜 스스로 선수가 되어 스스로 침범받는 게임 왜 합니까? 이 세상이 이미 악마의 천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악마의 종이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사느냐? 오늘 본문 말씀대로 ‘네가 그 모욕감과 그 수모를 평생 즐거이 감당하라.’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복음으로 참으라, 라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실컷 죄짓지 못해서 멈칫거려서 우리가 문제였습니다. 용감하게 망하지 못한 것, 아직도 자기가 괜찮은 존재라고 착각했습니다. 주여, 이 어쭙잖은, 어설픈 이런 신앙생활, 이제는 깔끔하게 빈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