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되기
2023년 7월 16일 디모데후서 4:3-5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현실화하기 위해 많은 스승들을 찾아 다닙니다. 이는 천국 가는 것도 이런 식으로 갈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흔하게 볼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당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십자가는 필히 조건이 있다는 겁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여기서 ‘자기 부인’이라는 것을 빼먹게 되면 그 십자가가 어떠한 십자가가 되었던 가짜 십자가인 것입니다. 사사로운 개인적 욕심들은 바로 이 ‘자기 부인’의 모습이 아닌 겁니다. ‘개인+스승=구원’ 이런 공식은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어떤 식으로 인간들이 구원을 시도하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는 유대 사회였습니다. 그 사회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천국을 염원하는 사회였습니다.
①지구가 물리적으로 변화한다.
②메시야가 지상에 와서 통치한다
③그 메시야가 예루살렘과 성전에 오신다
④ 그 때가 되면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메시야를 알아 모신다
⑤지구는 낙원이 되어 영원히 하나님 모시고 산다. 이스라엘이 대표적 왕적 특권을 행사하면서 말입니다.
바로 이런 정신에 팔려있던 자가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사람들의 ‘사사로운 욕심’이 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부인’이 없이 구원받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그러다보니 처처에 가짜 스승들이 활개치게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이러한 사사로움은 실은 어릴 때 가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에게 최초의 스승은 어머니요 그 다음이 아버지입니다. 이로서 주체는 자체적으로 아무런 내용은 없이 타인을 통해서 자신을 규정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또한 그 의식된 자기 의식을 본인이 의식하는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마귀에게 감염된 사고 방식으로 하나님의 관계에 수립하려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기 형상화를 안 받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오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 3:16) 문제는 인간들이 ‘비둘기’가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게 문제가 됩니다.
이는 곧 인간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육신이 자기 것임을 이미 익히 아는 데서부터 진리 찾기에 나선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동일한 육신으로 나타나신 영적 세계에 대해서 현 자신의 육신으로 건너 갈수 없는 한계에 봉착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24: 37-43에 보면,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주님께서 나타나시므로서 인간들의 세계에서 인간들은 자기 육신을 문제삼고 부정할 수가 없는 처지에 있음이 폭로되는 겁니다. 인간의 육신은 어미 어릴 때부터 사리사욕을 추구받게 됩니다. 인간 세계에서 이미 불변의 법칙 같은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발고 ‘가족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 자기 육신 추구, 바깥에 세계에 천국이 있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전체 말씀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몸을 찢어진 세계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영적 사람의 특징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①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가 찾는 넓은 길은 멸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②이 세상에 발 딛고 살지 못하게 합니다. 후딱 떠나게 하십니다. 기웃거리나 두리번거리지 못하게 합니다. 실적이나 업적이나 결과물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③ 구원받은 기쁨보다 말씀이 내부에서 폭발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가지런한 나의 인격성은 내부적으로 폭발하는 말씀에 감당 못하게 됩니다.
반면에 육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자기 뜻대로 되고자 고집을 부립니다.
②이 세상에 실적과 업적 남기는데 환장하고 있습니다.
③ 자기 구원받은 것 자랑질하고 싶어합니다. 쉽게 말해서 전혀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 겁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십자가 믿기’ 가 아니라 ‘십자가 되기’ 입니다. ‘십자가 되기’란 우리의 육신 자체가 묵직한 죄가 가득 차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은 고난은 죄로 인해 주어진 하나님의 저주 때문입니다. 마차가지로 성도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어지는 온갖 저주의 상황에 육신을 던져넣는 일입니다.
그 속에서 성도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즐거움, 즉 모든 말씀이 화려하게 날개짓하면서 마음껏 우주를 채우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더불어 850:1로 싸움게 됩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는 그들의 신을 깨우기 위해 자기 학대를 합니다.
반면에 엘리야는 불이 붙기를 고대하는 그 제단 위에 다가 물을 12양동이로 쏟아붓습니다. 그래서 제단 전체가 물로 흥건히 젖어 있게 됩니다. 이것은 곧 엘이야 내부의 들어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시는 불가능한 하나님’으로 일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나서 제단이 불이 붙습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제물이 되시고 하나님 자신이 그 제물을 태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자기 부인이 된 상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기 내부에서 죽음 세계의 속 단면들을 통과하듯이 이 저주의 세계를 뚫고 나오면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8:56에 나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고난당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친히 뽑으신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고난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성도 내부에 육의 노선에서 영의 노선으로 전환됩니다. 시작점을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한 그 노선이라야 그 끝지점은 천국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 위에 덮힌 세상의 화산재를 걷어내어 바닥에 고인 예수님의 피를 접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3강-디모데후서 4장 3-5절(십자가 되기)230716-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모데후서 4장 3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4:3-5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쉽게 말해서 수비하면서 박살 나지 말고 공격하면서 박살 나라, 그런 이야기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면서 ‘십자가 이렇고 주님 이렇고 하늘나라 이렇습니다’ 그냥 설명을 하면 사도 바울이 크게 비난받을 일이 없는데요. 괜히 남들 사는데 건드려요. 어떻게 건드리느냐면 “사욕을 쫓아 스승을 많이 두는데, 사적인 이유 때문에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스승들을 많이 찾고 있는 데……” 라고 시비 겁니다.
사도의 뜻은 뭐냐면, 인간의 개인적인 사욕을 안 없애고 무슨 십자가를 믿는다고 할 수 있냐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씀, 십자가 질 때는 반드시 조건이 있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라 했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그 십자가, 자기 부인 할 때 무엇을 부정해야 하는가? 바로 개인의 사사로운, 사적인 의도와 기대를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사사로운 사욕, 인간들의 개인적 의도를 건드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걸 건드리다 보니까 ‘너는 모든 일에 고난을 받아라.’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전도를 복음 가지고 하면 고난을 받게 돼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증거 하게 되면 비로소 주변의 종교인들 또는 신을 믿는 자들이 자기가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상태에서 구원을 얻고자 시도한다는 그 현실이 확 다가오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구원을 얻고 싶다, 생명을 얻고 싶다, 영생을 얻고 싶다, 천국 가고 싶다, 누가 그걸 마다하겠습니까? 지옥에 갈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근본적으로 그들은 자기 부인이 안 된 상태에서 그런 것을 시도하고 있으니까 진짜 사도가 전하는 복음의 차별성, 차이성이 거기서 나온다는 거예요. 지금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 할 상황도 유대인 사회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그것도 유대인 사회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오라.” 이렇게 할 때 그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 말하신 건지 우리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름대로의 천국관이 있었어요. 유대인들의 ‘천국관’.
첫째는 물리적으로 지구에 변화가 일어나야 천국이 온다는 거예요. 물리적인 변화. 그 물리적인 변화는,
두 번째,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통치하면 세상 지구도 깨끗한 지구로 바뀐다는 겁니다. 불에 타는 것이 아니고요. 세상이 불에 타는 것이 아니고 더럽던, 환경오염이 심한 지구가 깨끗하게 청소가 되는데 그것이 누가 오기 때문에? 메시아가 왔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와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유대인들의 천국관이에요.
세 번째가 뭐냐, 메시아가 어디로 오느냐? 예루살렘에 오는 거예요. 그 예루살렘도 가보니까 구 예루살렘이 있고 신 예루살렘이 있는데 어느 곳으로 오는가? 예루살렘의 성전에 온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어디 있는데? 감람산에 온다는 거예요. 예루살렘 성전에 지금은 황금 돔으로 만들어놨어요. 거기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메시아가 오게 되면 모든 인간이 메시아에 대해서 모든 지식을 보편적으로 알게 된다는 겁니다. 메시아가 올 때 메시아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모든 인간이 다 알고 있다는 거예요. 불신자도 알고 있다는 거예요.
다섯 번째, 메시아가 오게 되면 그다음부터 이 지구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의 낙원의 상태, 깨끗한 상태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하나님과 메시아가 함께 영원히 거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제사장 나라는 이스라엘이 되고 그 이스라엘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 이 팔레스타인 약속의 땅, 현재 이스라엘이 접수하고 있는 땅에서 이스라엘은 왕처럼 그렇게 살게 된다는 거예요. 이게 유대인의 천국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의 천국에 의해서 누가 돌아가셨냐면, 진짜 오신 메시아가 죽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반드시 그때 그 당시에 사람들의 아이디어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은 구약을 근거로 하는 겁니다, 구약 성경에 근거해서 그들이 고대하고 고대하고,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 천국이 어떤 천국인가를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겸해서, 결합해서 해석이 돼야 된다 이 말이죠.
도대체 예수님은 그들의 부활을 왜 건드리십니까? 왜 예수님은 화를 자초했죠? 주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기에 이 다섯 가지 조건으로 구비된 천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부정적인 발언을 했다고 그 당시 유대인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이 말이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구약 성경에 근거해서 예수님 말이 맞나? 아니냐, 틀리냐를 비교한다면 오늘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입장은 “나 예수 믿어.” 할 것이 아니고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냐면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천국과 구약 성경을 전제로 해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보는 겁니다. 보게 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화가 나고 예수님을 거부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돼요.
그리고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천국,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신학을 누가 핵심적으로 완전무장하고 있었냐면,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그때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모든 천국관과 신앙관, 여호와 믿는 그것을 어떻게 보았냐면, 바로 사욕, 개인적인 희망과 기대를 얻기 위해서 성경 전문가를 스승으로 많이 두고자 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그런 것은 기껏 자기의 길을 가려고 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뽑아내려는 예수님의 십자가 원수들이 하는 짓거리다, 라고 이렇게 평한 거예요. 사울 본인이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너무 잘 아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이제 예수님 만나고 새삼스럽게 복음 노선으로 들어왔는데, 복음 노선으로 오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그 해석, 유대인들이 그렇게 싫어했던 예수님 말씀의 본뜻을 이제는 사도 바울이 꿰뚫어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제자가 스승을 찾는 것이 아니고 스승이 제자를 채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제자가 천국 가고, 구원받고, 영생 얻고 싶어서 어디 훌륭한 스승님 없나, 찾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스승 대신 주님께서 직접 자신의 뜻을 담을 제자들을 채택하는 거예요. 선택한 겁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세례 요한이에요. 세례 요한을 선지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선지자의 특징, 그리고 열두 제자의 특징은 미리 주님께서 그들에게 조건을 부여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지킬 자기 것이 더는 없다. 지킬 자기 것이 더는 없다.’ 아예 싹을 잘라냈다, 개인적인 욕심을 싹을 잘라 버린 거예요. “하나님 저한테 이거 주시면 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그런 거래나 협상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은 바로 생명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밀쳐버린 그 모든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여호와를 안 믿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안 믿는 것도 아니고, 성경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도 아니고, 성경 말씀을 열심히 쫓으면서 그게 다 어디로 집결되느냐면, 개인적인 구원에 대한 사욕으로 전부 다 한데 모이더라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이걸 알게 된 게 사울도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과 정보를 많이 획득할수록 내가 구원받는데 보다 유리하다는 그런 생각으로 하나님을 믿었고, 바리새인을 스승으로 모셨고, 서기관의 말을 들었던 거예요. 그들이 예수님 죽였던 주모자들인데.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 지식을 끌어모으는 그 한계를 알아야 하죠. 그 한계 모르면 십자가 믿어도 소용없죠. 그 한계 모르면 자기 부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져라, 했는데 어디까지를 자기 부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느냐 그 문제. 그 문제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부인이 되죠. 그러니까 자신만만하게 ‘다들 자기 사욕을 챙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자기 부인을 넘어섰던 그 한계, 그 한계에 대해서 누가복음 24장 36-43절의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누군가 전했어요.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 인간의 한계를 아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부활을 영으로 나타내신 것이 아니고 육신으로 나타냈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인간은 육신을 가짐으로써 인간은 자기 육신을 보고 있는 그 한계를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다 같은 육신인데 위치하는 장소가 다른 세계에 속한 그 한계, 인간은 그쪽 세계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왜냐면 거울 보면 자기 육신이 보이니까요. 내가 육신으로 있다는 자체가 내가 영생 얻을 수 없는, 영생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것 쉽게 말씀드릴게요. 돌려서 하지 않고 쉽게 이렇게 합니다.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는 거예요. 나를 구원할 스승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는데 ‘나+스승=구원’, 이런 공식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좋은 스승 만나서 구원받는다, 이거 없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을 이미 마태복음 23장에서도 주께서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7절, 8절에 보면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스승이죠.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의 지도자는, 너희 스승은, 너희 랍비는 오직 예수님뿐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사람들이 추방시켰잖아요. 온 스승을 인간들이 자진해서 거부한 거예요. 다른 가짜 스승만 찾아다니는 겁니다. 왜? 인간은 자체 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한계, 이 점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받는 대목이 나와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성령이 내려오는 것을 뭐라고 하냐면 ‘비둘기같이’라고 되어있어요.
인간은 어디서 막히느냐? 인간은 비둘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거 비둘기네?” 이게 인간이 내린 결론입니다. “저거 비둘기네?” 비둘기는 비둘기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옛날 노래에 이런 것이 있어요. <목포는 항구다> 제목이 굉장히 의미 있어요. 목포는 항구다, 그래서? 목포가 항구지 그러면 항구 아닙니까? 목포는 항구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나는 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저건 비둘기네.’ 비둘기다. 비둘기 넘어서지를 못하는 거예요. 왜? 비둘기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주께서 성령이 비둘기 되어서 온다는 것을 막아버리는 겁니다. 네가 아는 것을 우리한테 되돌려줘요. ‘비둘기가 비둘기다’ 학교에서 많이 배웠고 학교에서 배운 그것은 내 육신을 지키기 위해서 지식으로 확보한 거예요. 이 ‘비둘기는 비둘기다.’ 하는 것은 그게 그냥 비둘기 의미가 아니라 그게 어디 한 곳에 모입니다. 어떤 구심점을 형성해요.
그게 뭐냐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나’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아무리 교회 다녀도 나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애들 말장난하다가 꼬리 물고 하면 짜증 나면 뭐라고 합니까? 상대방 말 다 듣고 나서 “반사.” 네가 말한 거 도로 너한테 가져가라 이 말이죠.
이 비슷한 이야기가 사도행전 2장에도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3절 보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절에 보면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쪽에서는 뭐냐? 성령은 불이라는 거예요. 차라리 불로 안 왔으면 좋겠어요. 불로 왔기 때문에 인간은 ‘불이다, 성령은 불로 왔다.’는 그것이 자기 폐쇄 구조로 되돌아가게 만들어 버렸어요. 인간에게는 이미 자기가 육신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이걸 형상화라고 하는데 형상화가 된 입장에서 무엇을 자꾸 찾느냐면, ‘나는 형상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어떤 형상이 이 내 형상을 구원할까?’ 이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시작점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은 시작점이 있고 도달점을 생각해요. 항상 시작점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도달 지점에 자기 형상을 지닌, 육신의 형상을 지닌 자기 자신이 도착 지점에 멀쩡하게 도달되기를 원하고 있는 겁니다. ‘어제도 나는 사진 찍었다. 나는 형상 있었다. 오늘도 형상 있다. 내일도 형상 있겠지. 그러다 천국 문의 형상 있겠지. 천국 문에 들어갔다. 천국 안에 내 형상 있겠지.’ 형상과 형상의 연속으로서 계속 가는 겁니다.
하나의 동심을 형성하죠.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 돌아오는 그런 동심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주께서 “십자가를 믿어라.” 하는 거예요. 그 말씀은 십자가를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십자가 되어라’는 뜻이에요. 십자가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믿으려고 시작하니까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형상, 나라는 형상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라는 형상을 거기에 보탠다, 붙인다? 실패입니다. 십자가를 믿어라, 가 아니라 ‘십자가가 되어라’라는 말은 네가 움직이는 십자가의 형상이 되라는 뜻이에요. 그럼 십자가의 형상화가 되려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의 십자가가 자신의 몸을 가지고 저주속으로 들어갔거든요.
젊은 애들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생 만나서 유원지 가서 놀고 자기들끼리 웃으면서 놀 때 게임 하잖아요. 게임 벌칙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게임 해서 틀리면 벌칙으로 친구 하나 엎어놓고 등 짝을 마구 치죠. “인디언~ 밥!” 하고 치죠. 우리가 십자가 들어가는 방법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일점일획도 취소되지 않는 모든 말씀에 예수님이 저주를 받는, 자진해서 저주 속으로 들어간 게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저주로부터 “인디언~ 밥!” 모든 저주가 다 쏟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 형상된다는 것은 우리가 자진해서 모든 말씀의 저주속으로 우리를 던져넣는 거예요. 그러면 저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십자가 빠바박! 빠바박! 해서 우리에게 저주가 주어집니다. 십자가가 묵직한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우리 죄가 묵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진해서 십자가의 저주 길로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4장 5절에 나오는 고난의 길로 가는 것, 십자가의 형상화 되는 거예요. 그걸 갈라디아서에서 뭐라고 하냐면, 그걸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이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 말이죠.
내 이 눈에 보이는 육신은 저주 안에 있어서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이게 기쁘다는 거예요. 이게 감사하다는 겁니다. 수련회 얼마 안 남았으니까 한 번 광고 비슷하게 해야죠. 이번에 갈라디아서 하는데 저녁에 하는 1강, 2강에 중점적으로 하는 것이 뭐냐? 사욕, 인간의 죄가 어디에서 발생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할 겁니다. 왜냐면 죄인이 아니면 천국에 못 가기 때문에 그래요.
죄를 피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죄가 아니면, 그리고 더 깊이 있게 죄를 아는 즐거움에 깊이 빠지지 아니하면 그것은 방향이 천국 가는 방향이 아닙니다. 그래서 첫째 시간에 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 죄가 어디서 나오는가? 그 죄, 우리를 지옥을 이끄는, 영원한 저주와 죽음을 이끄는 그 죄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가정에서 나오는 거예요, 가정에서. 가족 중심주의에서 나온 겁니다.
최초의 스승이 가족이기 때문에 그래요. 최초의 스승은 바로 어머니고, 그다음에 스승이 아버지예요. 아버지 어머니가 아이가 원치 않더라도 이미 스승 노릇을 해왔던 겁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주체 그 자체는 없고 타자를 통해 자기를 규정해 나가기 시작하는 인간이 된 겁니다.
나 자체는 없어요. 그러나 남이 나에게 뭐라고 원하고 있는지, 남이 나에게 뭘 원하고 있는지 그걸 채우면서 나라고 이 세상에 나서는 게 바로 인간입니다. 내 안에 내 것은 없고 전부 다 남이 응시하는 것이고 남의 시선들이에요.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셔도 여전히 나는 그 아버지 어머니의 자식으로서, 스승이 돌아가셔도 그 스승의 제자로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누가 되지 않게 살아가는 것, 이건 가족 중심이에요.
그런데 그 가족이, 그 아빠 엄마나 스승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를 못 한다는 사실. 그것은 이미 대대로 아담의 자손들은 악마의 정신에 감염된 거예요. 오염된 겁니다. 그 감염된 육적인 안목, 그들의 육적인 안목이 행동 하나하나에 다 나옵니다. 가정에서의 불변의 원칙 같은 것이 수립돼요.
가정에서 만든 불변의 법칙이 뭐냐? ‘가족사랑’입니다. 이걸 제가 서울 강의에서 언급했어요. 모든 인간의 행동과 생각은 모조리 다 복잡하지만, 모든 수천수만 책이 무슨 소리를 해도 전부 다 압축시켜 보면 이렇게 단출하게 나와요. ‘엄마 보고 싶어. 나 집에 갈래.’ 이거예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엄마 보고 싶어. 나 집에 갈래.’ 왜 엄마 보고싶어 하는데요? 엄마가 어렸을 때 날 가르쳤잖아요. 아빠가 날 사랑해줬잖아요. 그때 그 시절 그 사랑이 그리운 거예요. 동화 같은 세계.
그러면 아빠, 엄마 돌아가셨으니까 대체물이 필요하죠? 하나님, 예수님, 성령이 바로 아빠 엄마의 대체물이에요. 나를 지켜주고, 나를 보호하고, 나를 건사해주고, 내가 자빠졌을 때 일으켜주고, 차 사고 날 때 크게 다치지 않게 해주고, 이렇게 모든 내 마음속에 다가온 말이에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했거든요. 무조건 엄마 아빠가 날 지켜주니까.
지금 어른이 되고 40, 50이 되고, 70이 되어도 늘 움직일 때 나오는 것은 ‘누가 날 위로해줄까?’예요. “여러분!” 윤복희나 찾아라. ‘누가 날 위로해주지? 누가 날 참 자랑스럽다고 옆에서 칭찬해주지? 그런 분 없습니까? 아, 우리 주님 계시구나. 우리 하나님 계시네. 우리 예수님 계시네!’ 미쳤어요, 미쳤어. 그게 바로 그대로 사욕이 그대로 있으면서 자기 부인이 안 된 상태에서 천국 가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이런 사욕, 악마에 오염된, 감염된 사고방식이 꽉 차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죠.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했는가?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말씀 바구니에서 뚜껑을 확 열면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나비들이 날개짓 하면서 갑자기 확 튀어나오며 온 우주를 말씀으로 파닥거리면서 다 덮어버리죠. 바로 그 시도를 주님이 하신 거예요. 말씀의 세계로 바꾼 거예요. 사욕만, 자기의 개인적인 욕심만 있는 이 세상에서, 이 죽음의 세계에서.
그래서 제가 영적 사람의 특징과 육적 사람의 특징을 구분해봤습니다. 영적 사람의 특징과 육적 사람의 특징을. 영적 사람의 특징 1, 2, 3, 그리고 육적 사람의 특징 1, 2, 3, 한 번 정리해봤습니다. 이것 정리해 봐야 내일 되면 또 달라져요.
영적 사람의 특징은 첫 번째, 내 뜻대로는 안 되게 하심. 뭐든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심. 왜? 사욕이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노림수가 있기 때문에. 그걸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넓은 길로 가지 말라. 좁은 길로 가라.”
수학에서 숫자를 그래프로 그리면서 일직선으로 쫙 그어 놓습니다. 그리고 중간에다가 영을 놓죠. 영을 놓고 오른쪽에는 +1, +2, +3……, 1, 2, 3, 4, 5……, 0을 기점으로 저쪽에서는 -1, -2, -3……, 하고 직선으로 쫙 그려놓는 거예요. 놓고 그 수에다가 -1을 한 번 곱해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쪽에 있는 자리는 왼쪽으로 가버리고 왼쪽에 있는 자리가 다 오른쪽으로 와 버려요.
천국에 있던 예수님께서 지옥에만 있는, 지옥에서 못 빠져나오는, 자기의 사욕에서 못 빠져나오는 거기에다 주께서……, 그러니까 인간의 개인 사욕으로 있기 때문에 자꾸 달라고, +1, +2를 달라고 해요, 지금 가지고 있는 내 양의 두 배, 세 배, 네 배 자꾸 능가하기를 바라는 거기에다가 주께서는 –1을 곱해버려요.
수학에서는 ‘-’와 ‘-’가 만나면 이게 ‘+’가 돼요. 자리 바꾸기가 일어나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는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시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의인이지만 죄인의 자리로 온 그 방향성, 그 속성, 그 성격, 그걸 우리한테 곱하기를 해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한 그 자기 부인만이 우리에게 자기 부인으로 들어와서 십자가라는 게 무엇이라는 것을, 십자가는 믿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는 가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돼야 된다는 사실, 십자가의 형상화로서 우리가 죄인 중의 괴수가 되어야 한다는 이 사실이 바로 천국 가는 모습인 것을 발견하게 하는 겁니다.
왜냐면 아무도, 자기를 저주받은 죄인이기를 원하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면서 자기가 찢어졌어요. 손과 발이 찢어진 거예요. 이 찢어진다는 말은 해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자아 구성이 아니고 반대로 자기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거예요.
왜 예수님은 이렇게 찢어져도 괜찮으냐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산에서 그렇게 기도했는데, 찢어지는 게 그렇게 힘들다는 걸 아시고 세 번 기도 했는데, 말씀이 내부적으로 폭발해버리니까……, 어벤져스 헐크가 런닝구 입었잖아요? 안의 근육이 폭발적으로 팽창해버리니까 런닝구 다 찢어졌어요.
안에 있는 말씀이 자체적으로 폭발해버리니까, 진짜 성도한테 성령이 와서 말씀의 완성이 폭발해버리면요, 성도 스스로가 자기 사욕, 개인적으로 남들 보기에, 우리 엄마 아빠 보기에, 내 가족 보기에 나는 이정도 하면 가지런하고 나는 괜찮은 존재라고 우겼던 외부적인 질서 체계, ‘나 이 정도야.’라고 자랑질했던 것이, 그 가지런한 무늬 타일이 전부 다 툭, 툭 다 떨어져 나가죠.
그러면 듣는 게 뭐냐? “너 미쳤구나?” 이렇게 되죠. 그런데 그 본인은, 성도 본인만 알죠. ‘말씀이 폭발하는데 내가 감당을 못하겠다.’ 내가 어떻게 자제가 안 돼요, 말씀의 폭발이. 그러니까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이 이게 슬픈 이야기가 아니고, 이게 짜증 나는 이야기가 아니고……, 마태복음 7장에 ‘넓은 길로 가지 마라. 좁은 길로 가라.’라는 그 말씀을 우리가 개인적인 생각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지키게 할 수가 없어요. 못 지켜요.
못 지키는데 그 말씀 자체가 우리 안에서 폭발해버리면 우리는 말씀의 형상화가 되어 버립니다. 넓은 길로 가면 멸망의 길이고 지옥이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좁은 길로 내가 선택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내 안에서 좁은 길로 가는 자체를 실현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이게 좁은 길이 되죠, 가는 길이.
영적 사람의 특징 첫 번째,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시고, 두 번째는, 이 세상에 발 딛고 살 생각을 못 하게 만들어요. 후딱 떠나라는 거예요. 자꾸 기웃거리고 두리번거리지 말라는 겁니다. 어떤 실적과 업적의 결과를 포기하라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자식 잘 키웠다, 이만큼 우리 교회 부흥시켜놨다, 그런 대단한 업적과 실적을 잊어버리라는 겁니다.
떠날 생각이 사도 바울의 소원이에요. 떠날 생각 하지 않고 자꾸 두리번거리면서 ‘어디 재미난 일 없나?’ 그것도 개인적인 사욕이죠. 어떤 내 소원대로 기도에 응답받을 수 없나? 기도 응답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찢어버린다.’ 이게 기도 응답이죠. 네가 지금 자아가 있으니까 부모로부터, 잘못된 스승으로부터 잘못 교육받은 그 죽음의 세계 그걸 찢어버려야죠.
이 세상의 모든 범죄인들의 특징은요, 본인이 안 찢어져서 그래요. 살인, 강도부터 사기, 모든 일들은 본인을 찢으면 되는데 전부 남 탓을 하고 있어요. 본인을 자꾸 단단하게 하려고 하니까 범죄가 나오는 거예요. 입만 떼면 사기 치고요. 떠날 생각도 없고, 자기는 단단히 굳히려고 시도하고요.
세 번째가 뭐냐? 구원의 기쁨, 내가 구원받는 기쁨보다 말씀이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으로 바꿔야 해요.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말씀이 내가 감당이 안 되네, 홍수 난 것처럼. 감당이 안 되죠. 이게 바로 하나님이 생각하는 자연스러움이에요.
이번에 강원도 정선에 있는 피암터널 옆에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방송국에서 보여줬는데 산이 완전히 반이 다 날아갈 정도로, 껍질이 확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주저앉았어요. 사람들은 산사태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그게 자연입니다. 자연스러움에 터널 뚫은 네가 잘못이에요.
뚫어 놓고 왜 걱정합니까? 왜 뚫어놨느냐는 거죠. 산사태는 중력에 의해서 무거워 내려앉는 건데, 성도도 자연스럽게 무너져 내리면 되지, ‘주여 내 뜻대로 왜 해주지 않습니까?’ ‘자기 부인이 아직도 안 됐구나. 네 뜻이 거기 왜 나와, 네 뜻이 왜 나오는데?’
우리가 모르는, 주님만 아시는 자연스러움은 말씀 안에 다 담겨 있어요. 말씀이 스스로 터져버리는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습니까? 감당 못 해요. 이렇게 세 가지에요. 내 뜻대로 안 되고요, 이 땅에 발 못 붙이게 만들고요, 실적 업적 다 포기하고요, 구원의 기쁨보다 네 속의 말씀이 터져 나오는 기쁨으로 살아라.
그러면 육적인 사람의 특징은 뭐냐면, 자기 뜻대로 되고자 고집을 부립니다. 두 자로 ‘억지’. 하루하루 사는 게 전부 억지로 살아요. ‘돼야 될 텐데, 돼야 될 텐데……’ 억지에요. 그다음에 이 세상에 실적과 업적 남기는데 환장합니다. 첫 번째 억지, 두 번째 환장, 세 번째 자기 구원 받은 거 자랑질하는 거, ‘자랑’ 첫 번째 억지, 두 번째는 환장하는 것, 세 번째는 자기 구원받은 것 자랑질하기, 남이 알아주기를.
그래서 주님께서 이러한 억지, 그리고 실적, 업적 남기는 것, ‘환장’하는 거, 다음에 자기 구원받은 거 남 안 알아줄까 봐 환장하는 거, 이게 어디서 나오느냐면 가정에서 그렇게 교육받아서 그래요. ‘넌 어디 가서 남한테 욕먹지 않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식으로 이미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첫 번째 수련회 강의 제목도 미리 지어놨어요. ‘정신병자들의 거리’ 모조리 정신병자예요. 가정 자체가 정신병자를 양성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러면 이 자연스러움에 대해서 예수님이 채택한 제자들, 선지자죠, 선지자는 어떤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는가?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인간 속에 하나님의 자연스러움이 누구나 들어있어요. 한쪽은 지옥 가는 자연스러움이 들어있고, 한쪽은 천국 가는 자연스러움이 들어있고, 그것은 우리가 관리 못 합니다. 그냥 터져 나오는 대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 둘 사이, 사람 속에 들어있는 것이 본인도 뭐가 들어있는지를 몰라요. 이 둘을 같이 나란히 만남의 장소, 만남을 주선하게 하는 것이 구약 성경에 나옵니다. 충돌의 순간이죠. 그게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바로 갈멜산의 대결이에요. 갈멜산의 대경. 850대 1입니다. 뭐 신사답게 1대 1로 황야의 무법자처럼 총으로 결투하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저쪽에 850명이 있어요. 왜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이 멸망의 길인가를 확실히 보여줍니다. 이쪽에는 오직 엘리야 한 사람이에요.
여기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내세우는 무기가 있어요. 게임을 하는데 제단 쌓아놓고 그 안에 서로의 무기가 있어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내세우는 그 무기가 뭐냐? 안에 들어있는 것이 바깥으로 그냥 튀어나오죠. 그게 자기 학대입니다. 자기 학대에요. ‘신이시여!’ 자기가 신을 안다 그 말이지요. ‘신이시여! 내가 이렇게 신을 위해 이 정도로 자기 학대를 하는데 우리가 믿는 신이 정당하다는 것을 좀 편들어 주세요.’
자기 부인이 안 돼요. 그렇게 복음 전해도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자꾸 하나님하고 자기하고 한패 먹으려고 합니다. 성경에 그게 나와요. 본인이 파괴될 정도로 계속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계속 때립니다. 엘리야가 약을 슬슬 올립니다. “왜? 더 때리지? 왜, 때리다가 지쳐? 계속 때리지. 아, 너희 신 지금 주무시고 있는 모양이다. 깨워야지. 빨리 도와줘야지.” 약이 오르니까 엘리야 한테 지기 싫어서 본인이 이제 환장을 합니다.
아까 환장, 억지, 고집부리는 거, 내 신앙생활, 구원받았다는 것 자랑질, 이거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신에게 ‘내가 원하는, 내가 사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을 주께서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게 나도 가오 살고 주님도 가오 살고 우리 예수님 뭐 하십니까? 좀 깨어서 내가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는 걸 남에게 자랑질하도록 좀 해주시면 우리하고 주님하고 한패 맞잖아요.’ 이런 식으로 애를 쓰는 거예요.
참 많이들 해왔죠, 많이들. 꾸준히 평생 동안 해 오고 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엘리야가 하는 방법은 뭐냐면, 자기에게 물을 끼얹어 버립니다. 자기가 만든 제단에 물 열두 통을 부어 버립니다. 열왕기상 18장 33절에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부으니까 물이 단을 흐르고 도랑에는 물이 넘쳐서 가득하게 되었어요. 불붙을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합니다. 거의 없습니다.
엘리야 내부에, 엘리야 속에 담겨 있는 것은 불가능성이에요. 불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요. 바알 종교는 내가 열심히 하면 된다는 거예요. 성경 공부를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전도를 하든지, 헌금을 하든지, 헌신을, 봉사를 하든지, 선교를 하든지, 목숨 바쳐 복음을 전하든지, 뭘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쪽은 아무것도 안 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 정도가 아니에요.
여러분은 이 두 문장의 차이를 알아야 해요. ‘나의 일을 모르게 해 달라.’가 아닙니다. ‘주여, 나의 일이 아예 없게 해 주옵소서.’에요. 나의 일이 없게 해 주옵소서, 그겁니다. ‘아예 내가 하는 일을 내가 모르게 하옵소서.’ 그런 게 아니고, 그렇게 수비적이 아니에요. ‘주여, 제 일이 뭐 있습니까? 없잖아요.’ 이게 바로 자기 부인이 된 상태에서 나올 말들이고, 행위고, 고백이에요. 나의 일은 없어요.
엘리야 속에 어떤 하나님이 들었는가? 이번 일은 엘리야 본인과 관계없는, 이게 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끄집어냅니다. 이 말을 더 깊이 있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제물이 되시고, 친히 제물이 된 하나님의 제물을 하나님이 스스로 자진해서 죽여 버리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할 인간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불가능한 거예요. 모든 개인들은 자기의 사욕을 가지고 있는데 이건 본인이 나빠서가 아니에요. 본인이 나빠서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부터 그런 식으로 자라났고 양육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어릴 때부터.
여기서 영적인 사람에게서, 아, 정말 우리 인간으로는 감당 못할 이야기가 사도 바울의 입에서는 편하게 계속 나와요. 우리로서는 감당 못 할 이야기가. 아까 말씀 다시 해보겠습니다. 비둘기가 와도 우리는 비둘기를 알기 때문에 비둘기 그 너머에 있는 영적 세계에 대해서 막혀 있습니다. 불이 왔기 때문에, 불이 와야 성령인 줄 알고 생각하는 그 잘못된 생각.
여기에다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를 하면 말 기절초풍할 순간이 찾아오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 이것은 우리만 기절초풍이 아니고 그 당시 그 말을 듣던 유대인들이 기절초풍했던 말이었죠. 요한복음 8장 55절에 보면,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그때 이제 유대인들이 등장하죠. 당연히 등장하죠. 마땅히 등장하죠. 그들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러려니가 안 돼요. 이것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고 인간이 믿을 수 있는 하나님, 모든 것에 대해서 일거에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발언을 예수님 쪽에서 한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치료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치료가 아니라 우리를 공격하고 있어요. 그 공격을 된통 얻어맞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아까 설명한 건데 또 설명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육신은 자기라고 형상화되어 있어요. 인간은 뭘 아냐면, 49와 50을 알고 50과 51을 압니다. 인간은 스무 살 먹은 애와 육십 먹은 노인을 구분할 줄 알아요. 이 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 아는 게.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이 나를 구원한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구원을 방해하고 주의 일을 방해하는 거예요. 자꾸 구원이 나의 일이 된 거예요. 자연스럽지 않아도 터널을 뚫는 거예요. ‘우리 터널 뚫었으니까 하나님 산사태 일어나게 하지 마옵소서.’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키운 자식 하나님이 안 다치게 해 달라, 매일 이런 식이에요.
‘네가 50도 못 되었는데.’ 알잖아요. 예수님 나이가 50도 못 됐어요.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예수님이 얼마나 늙어 보였으면, “네가 서른 중반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말해야 되는데 넉넉하게 50도 못 됐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참 고민은 많았던 모양이에요, 파삭 늙은 거 보니까. “50도 못 된 게 어떻게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 발언에 우리도 한 표 던집니다. 우리도 그쪽에 설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요? 십자가를 믿어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해요. 우리한테는 방금 유대인이 한 말이 백 프로 맞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이거 아는 것조차 부정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상상도 못 했죠.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이거 어쩔까요? 더 무슨 말을 하리요? 더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이 분을 믿는다 이 말입니까, 우리가? 이런 말을 하신 분을 우리가 믿어요? 못 믿어요. 믿지 마세요.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화 되면 됩니다. 방금 이 말씀이 우리는 불가능해요. 믿는 게 불가능해요. 믿고 천당 가는 게 불가능하고, 믿고 천국 가는 게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런 몸으로 태어났고 그런 몸으로 가정에서 양육 받았어요.
영생, 천국? 이거는 남의 이야기에요. 주님께서 우리 육신 맞은 편에 서 있어요, 맞은 편에. 건너갈 수가 없다고요. 그러면 절망으로 이 설교가 끝날 것인가? 그렇지가 않죠? 우리 내부에 육신, 방금 말한 유대인이 있어요. 유대인은 모든 인간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유대인이라고 보면 돼요. 유대인 안에 자기 육신을 붙들고 천국이라는 도달점에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 나름대로의 시작점이 있고 도달점이 따로 있어요. 우리 인간은 나부터 시작한 시작점과 그리고 그걸 천국에 집어넣는 도달점을 계산해서 교회 나가서 ‘예수님 믿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는 지식을 채움으로서 구원받고자 하는 겁니다. 자기 부인이 전혀 안 돼요.
그걸 이야기하는 스승을 자기 개인적 스승으로서 자꾸 취득을 하고 “성경 전문가니까 좀 배우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자기 부인이 안 된 상태에서. 주님의 시작점이 뭐냐 하면, 자기 부인부터 시작했어요. 십자가부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우리 속에, 이 요한복음 8장 56절을 가지고 우리 속에 들어와요.
들어오게 되면 우리 내부에서 무엇과 무엇이 충돌하느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우리죠, 엘리야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스스로 하시고 마감했다는 일과 우리 내부에서 만나게 해줘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런 일이 우리 내부에서 노선 교차가 일어납니다. 이쪽으로 가는 노선이 KTX가 선로 이탈해서 방향이 다른 방향으로, 천국 가는 노선으로 철로가 탈선해서 기차가 이 길로 가버려요.
그러면 넉넉하게 죄를 짓는 남은 일생이 기다리는 기차 노선이 있습니다, 넉넉하게! 돌아가시기 전에 지을 죄가 아직 많이 남아있는, 그 신나는 일이 많이 남아있는 노선으로 바뀝니다. 바뀌게 되면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절로 나와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아직도 나는 죄짓는 일이 남아있다.
그 죄는 뭐냐? 내가 짓고 싶어 짓는 것이 아니에요. 사사로운 욕망이고, 이 욕망은 내가 욕망 부리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이미 어릴 때 내 터, 내가 출생한 그 가정, 아담의 자손, 육신의 세계, 거기에서 습득된 죄가 육신이 있는 한 계속 발산되고 있습니다. 그 죄를 주께서 죄 사하심으로 예수님의 피로 이렇게 같이 만나게 됩니다.
만나면서 여기서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가? 박피현상이 일어납니다. 피부 껍데기를 잡아 땡겨서 들추어 내는것. 바닥에는 피가 보이는데 세상에 거친 삶을 살면서 돈벌이한다고 나이 서른도 안 됐는데 50대 얼굴들을 하시면서 계속해서 화산재 덮이듯이, 교회 왔다가 월요일 되면 또 화산재가 덮여있어요. 밥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거친 삶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아부를 하든지, 빌빌 기든지, 사기를 치든지, 이게 계속 덮여있는 거예요.
계속 덮여있는 것, 여자분들이 저녁에 잘 때 화장 걷어내죠. 화장은 뭐냐면, 대외용이에요. 집구석에서 화장을 왜 합니까? 바깥에 나갈 때는 안 꾸미면 게으른 여자가 돼요. 욕 얻어먹는 자기 할 일 안 하는 여자가 되니까 화장을 하고 나가야죠. 화장 안 하는 여자는 이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할 여자에요.
덮고 있는 이것을 주께서 매일 같이 박피, 뜯어냅니다. 뜯어내면 거기에 주께서 시작해서 알아서 주께서 다 처리하시고, 주께서 다 이루었다고 마감하시고 우리에게 영생 얻는, 십자가가 형상화된, ‘네 육신 속에 십자가 들었다. 네가 엘리야야.’ 하는 그것, 모든 것이 내 일은 없고 죄짓는 것조차 주의 일인 것을 드러내는 그 노선 교체가 매일 같이 일어나는 그 박피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게 남들 보기엔 고난이지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세상 살면서 생명을 가지고 죽음의 벽을 뚫고 가면서 죽음의 속 단면을 보며 평생을 보내라.” ‘아, 사람들은 저런 식으로 사욕을 쫓는구나. 사람들은 저렇게 자기 정당화를 하는구나. 저런 식으로 자기 자랑질을 하는구나. 저런 식으로 자기 행위로 천당 가려고 저렇게 부질없는 짓을 하면서 지옥 가면서도 천당 가는 줄 착각하고 있구나.’
그걸 뚫어 가면서, 그걸 보면서 더욱더 말씀의 풍요함, 말씀이 날갯짓하는 그것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그 기쁨이 이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게 만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말씀의 자연스러움이 뭔지를 제대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모든 것이 억지였고 모든 것이 미친 짓이었습니다. 우리 잘못은 아니지만 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생명이 미리 마중 나와서 이끌어 주시는 그 일에, 그 주의 일방적 일에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