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감동
2023년 7월 2일 본문 말씀: 디모데후서 3:16-17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사람은 자기 감동으로 삽니다. 그리고 고대하고 기대합니다. “나 참 잘 살았어” 라는 자기 만족을 품고 싶어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 본문을 보고 되면 ‘하나님의 감동’ 은 놓치고 성경을 지식으로 다가서게 마련입니다. 자기 감동을 채우려는 의도가 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의도를 다 아십니다.
그래서 인간 감동과 하나님의 감동이 얼마나 차이나는 지를 보게 하십니다. 성경이라는 말씀이, 인간들이 자기 감동을 채우기 위해서 말을 주변에다 내어놓는다는 사실을 연계해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들이 말을 누구에게 건넬 때는 필히 상대의 기세가 누그려뜨려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상대가 만만하고 고분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사물에 이름을 붙일 때에도 그 사물의 본질을 만만하게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해서 이름 붙입니다. 하지만 장맛비를 생각해 봅시다. 장마철에 비가 오는 것은 우리 인간 중의 누구의 지시를 따른 겁니까?
아무리 우리 중에 누구라도 명령을 내리지 않는 상태에서 내리는 것이 장맛비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둘러 싼 이 환경은 결코 인간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이 죽으라고 해서 죽는 것들이 아닙니다. 각자 고유의 것이 다 살아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사물을 대해서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할 때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여놓고 그 죽은 예수를 믿습니다. 믿는 나에게 고분고분한 예수로 만들어놓고 믿고자 합니다. 평소의 인간들의 행세가 그런 겁니다. 하지만 이 성경 말씀은 그런 인간을 싸잡아 평가해 버리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여기에 나오는 ‘모든’은 어느 누구 한 사람 예외없이 다 싸그리 포함됩니다. 즉 인간치고 하나님께 감동 줄 자는 애초에 없음이 확정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감동 차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고 그 육신으로 인한 완성된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입니다.
즉 성경 속에는, 오로지 예수님에 의한 충족된 하나님의 감동성이 그대로 성도에게 전달되는 식으로 작용합니다.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죽은 인간 안에서’ 주님이 말을 하십니다. 인간은 이 현실 속에서 자기 소리를 낼 자격이 없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땅을 떠나, 자기 땅 없이 하늘로 가실 것처럼 성도도 동일한 운명이라는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면서 완성을 보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다 이루심’이 성도에게 찾아오므로서 비로서 이 세상은 악마가 다스리고 있었음이 노출됩니다.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감동스런 인생을 사는게 인생의 의미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욥기에 나오는 말씀처럼 ‘황무지에 비내리는 내력’을 인간이 관심이나 두겠습니까? (욥 38:26)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다 이루심”이 천국백성에게 전달되는 방식으로 마귀와 그 졸개들이 이 세상 전체에 퍼지게 하셨습니다.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계 9:1-3)
즉 악마로 하여금 철저하게 자기 존재를 삭제하겠끔 하십니다. 자기에게 전적으로 실망하게 끔하십니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마 21:18-20)
예수님의 심판의 단호함에 제자들이 도리어 당황스러워합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면서 제자들은 자기 결정에 자신이 감동하고 싶어했다는 속마음이 들켜버린 겁니다. 나중에 뒤늦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찾아가십니까? 그리고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거처 말고 ‘사랑’이라는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주신 겁니다.
이 사랑 빼놓고서는 마귀를 통해서 다 삭제되게 하십니다. 이처럼 성도는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자신의 터전를 허락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옥에 갇혀있는 형국에 세상에 보내셔서 내부적으로 ‘말씀 다 이루심’을 성사시켰습니다. 이 내부로 인하여 그동안 외부로 알려진 이 세상 전부가 불바다로 날아가버리게 하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이처럼 ‘나의 자리 없음’으로 이해하고 설교한 분이 계십니다. 스데반집사입니다. 그는 사도행전 7장 내내, 성도(=교회)에게는 이 지상에 땅을 못 가지게 하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앞서 광야(=미디안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이 준비한 땅은 이곳에 두지 않았음을 미리 알게 하십니다.(행 7:29)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떠돌이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떠도는 인생을 보내는 자들을 ‘광야 교회’라고 호칭합니다.(행 7:38) 이 사실을 모르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위하여 이 땅에 떠잡을 수 있다고 경솔하게 하나님 뜻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땅에 거주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 모든 사실이 예수님이 오셨다가 가신 그 경로를 근거로 한 내용입니다. 즉 이미 죽은 자에게는 이 세상의 땅이 필요치 않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땅을 마련해 두셨다는 겁니다. 설교를 마치 스데반 집사님은 이 설교를 마치고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땅, 곧 ‘예수 안’ 에 합류되십니다.
성도는 땅에서 세례 받은 자가 아니라 물에서 세례 받고, 십자가 위에서 세례 받은 자입니다. 홀로 죽고 홀로 산 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이미 죽고 예수님과 더불어 이미 살아난 자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선(線)넘을 일도 없을뿐더러 넘어서는 아니될 선을 그을 수도 없는 자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고 있는 자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성도가 늘어뜨리는 것은 마귀의 긴 그림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긴 그림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해 그 어떤 의미도 챙기지 말고 도리어 삭제시켜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1강-디모데후서 3장 16-17절(하나님의 감동)2307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문자로 되어있어요. 말씀으로 되어 있는데 문자가 여기에 감동으로 된 것과 관련돼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자나 말이 감동과 관련돼 있는 것은 먼저 인간 세계에서도 인간들이 벌써 실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자기한테 감동을 주는 그런 삶을 목표로 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감동을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말하기’입니다. 자기가 남들에게 요청함으로 말을 하고 내뱉으면서 내가 나로 인하여 감동스럽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감동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어쩔 수 없이 태어난 이 세상에서 사는 괴로움을 스스로의 힘과 방식으로 위로해 보려는 그러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아요. 그걸 ‘억지’라고 합니다. 부자연스럽죠. 그래서 인간은 항상 자기 소리만 냅니다.
성경은 그것을 저지하죠. 제발 네 소리 좀 내지 마라, 이거에요. ‘이 세상은 네가 네 소리 낼 공간이 아니야.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내야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 감동이 되는 세상이지, 네가 네 감동 되라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자기 감동을 위해서 말을 내뱉는데 그 말을 내뱉을 때 상대를 어떻게 보고 말을 내뱉느냐면, 상대를 죽여요. 내가 내뱉는 말은 일단 상대를 죽입니다. 애들 호떡 먹을 때 호떡을 죽여요. 호~, 호~, 불어버리죠. 호떡이 왜 뜨겁냐 이 말이죠. “내가 먹는 데 네가 방해가 되잖아.” 훅, 훅 불어버립니다. 호떡 장수가 내줄 때 호떡은 뜨거웠는데 막상 어린애가 호떡 먹을 때는 호떡 장사가 내놓은 그 호떡이 아니고 내가 삼킬 만한 적합한 것으로 재조정된, 다루어진 그러한 호떡입니다.
인간의 모든 말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에게 다가갔을 때 그 대상의 본질을 죽여놓고 내가 다룰만한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다음에 말을 건넵니다. 우리가 누구한테 말을 건넬 때는 그 말 안에 뭐가 담겨있냐면, ‘너는 내 앞에 끽소리 말고 죽어.’라는 뜻이에요. 훅, 훅 부는 거예요. “이게 왜 이렇게 뜨거워?”
우리나라에 그런 시가 있어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한때는 뜨거웠던 적이 있다.’ 이런 시가 있어요. 뜨거운 연탄재 차버리면 자기 발에 불붙습니다. 자기 손해가 되죠. 그러나 이미 식어버린, 하얗게 된 연탄재는 만만합니다. 사람을, 대상을 다룰 때 친구를, 누구를 만날 때 만만하게 만들어 놓고 그다음에 말을 건넵니다.
이 말은, 사람이 말을 건넬 때 인사를 나누죠. 그런데 어떤 인간도 사람을 보든지 대상을 보든지 그 대상을, 사물을 죽여놓고 보기 때문에 사람이 누구를 만날 자격은 없습니다. 만날 자격도 없고 그 사람에게 말을 건넬 자격도 없습니다. 내 소리를 낼 어떠한 입장에도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남들에게 인사를 건넬 자격도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안녕하세요.” 인사하잖아요. 그것까지는 좋아요. 그 뒤에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안녕하세요.” 해놓고 그다음부터는 다 거짓말이에요. 왜 그러냐면 ‘나는 말로 당신 죽일 거야.’ 이런 뜻이거든요. 인간이 어떤 대상을 만날 때 말을 건네면서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이유가 뭐냐? 내가 안 망하고 싶어서 그래요. ‘나 망하면 안 되는데’ 하는 것이 모든 말 속에 다 담겨있습니다.
‘나 망하면 안 돼. 나 너 때문에 망하면 안 돼.’ 이런 게 들어있어요. 그렇게 해서 인간은 말을 하며 그 말을 통해 어떤 결과를 원하는데 그 결과가 뭐냐면, 돌아가는 세상이 나를 감동시키는 세상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말을 하면서. 말발이 먹히고, 남들은 내 말에 고분고분 해 질 때 비로소 나의 말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말씀이 되는 거예요. 내가 신의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성경 말씀은 이러한 인간들의 말들이 많다는 사실을 너무나 정확하게 아시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을 싸잡아서 싸매버려요. 싸잡아서 완전히 그것을 저격합니다. 오직 성경 말씀 많이 인간을 싸잡아서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간을 어떻게 싸잡아 공격하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끝났어요. 모든 인간입니다. 인품, 자격, 인격 이런 거 필요 없어요. 모든 인간은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영광이 없다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이 말이에요. 같은 뜻입니다. 인간은 죄를 범했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간을 싸잡아 완전히 정확하게 저격하는 거예요. 그럴 자격은 하나님의 말씀에만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를 특별 대우하지 않고 싸잡아서, ‘너희 모든 인간은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너희들이 싸대지 마라, 소용없다.’ 인간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도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살아 보려고 살아 보려고 그렇게 애를 써도 이미 성경에서 싸잡아서 이미 단정을 지었어요. 확정 지었습니다.
‘인간은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과 합류할 수 없다. 끝!’ 이미 성경에서 땅, 땅, 땅, 판정을 내버린 거예요. 그리고 그 모든 인간 속에 이미 우리는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내가 남한테 먹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인사해가면서, 사귀어 가면서, 돈 써가면서 “너 나 아는 사람이잖아. 우리 친구 아이가!” 이런 모든 시도가 다 허무하게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이 단정 지을 수 있느냐?’ 사람들은 참 이걸 무서워해요. 인간은 인간들을 싸잡아서 단정 짓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합니다. ‘남들은 그렇더라도 나는 아니잖아.’ 그런 식으로 자기 피신처를, 자기 숨 돌릴, 숨 쉴 구멍을 찾아요.
나를 남들과 싸잡아 같은 존재로 좀 안 봐줬으면 좋겠다는 거. 성경은 그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예가 바로 장맛비입니다. 장맛비 올 때에 누가 오라고 했습니까? 장맛비가 내릴 때 장맛비가 오는 이유에 대해서 인간치고 아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욥기에도 나와요. 욥이 그렇게 자기를 특별하게 봐 달라고 하소연할 때 하나님은 비 내리는 것 가지고 그 욥을 강타해버립니다. “욥 너 이리와. 이리와. 네가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질문이 그거였어요. “네가 황무지에, 사람이 개간하지 않은, 채소밭이 없는 황무지에 굳이 비가 내려야 하는 이유를 알아?”라고 묻죠. 욥이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말에 할 말을.
황무지에 비 왜 내립니까? 몰랐던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욥이 평소에 어떤 비가 내리는 것, 햇빛이 비치는 것, 달빛이 비치는 것, 여기에 대해서 욥은 그 달빛, 햇빛 자체를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것을 아주 개무시 해버린 거예요, 장맛비 오는 것을. 자기만이 의미 있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완고함 때문에, 고집 때문에. 근거도 없는 고집이거든요.
내가 왜 살아야 됩니까? 무슨 근거가 있어요? 근거가 없습니다. 근거도 없는데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완고함 때문에 욥은, 친구가 자기 욕하는 것에는 되게 예민하면서도 장맛비 오고, 황무지에 비 내리고, 하늘에 별빛이 내리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기를 지적한다는 사실은 감히 상상도 못 했습니다.
달빛과 햇빛과 별빛이 나를 지적하고, 나를 싸잡아 지적한다는 사실,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사실은 생각도 못 했어요. 정신을 온통 자기 정당성에 쏟아부은 겁니다. “제발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주여, 좀 의미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내가 교회 나와 줬잖아요. 하나님 믿어 줬잖아요.” 그렇게 우깁니다. 주님 말합니다. “너 예수 믿는다고 했어?” “예.” “네가 예수 죽여놓고 믿잖아?” 살아있는 예수를 안 믿었어요. 왜? 예수 믿는 내가, 예수 믿는 그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나의 미래에 대해 내가 감동받겠다는 계획 때문에 그래요.
예수도 아니죠. 내가 죽여 놓은 예수가. “주님 끽소리하지 말고 내 믿음에 대해서 동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예수를 믿은 거예요. “예수님 안녕하세요?” 그래놓고 나머지는 다 거짓말이에요. 기도할 때 ‘하나님 거기 하늘나라에 잘 계셨습니까?’ 랄라룰라라~, 나오는 기도 내용 다 거짓말이에요. “주님 우리하고 아는 사이잖아요?” 주님이 “왜 너하고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막혀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진리에 막혀있다는 증거가 뭐냐? 지식을 추구한다는 거예요. 지식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진리는 그 지식 때문에 막혀있게 되는 겁니다. 진리를 알려면 우리가 끌어모은 모든 성경 지식, 삶의 요령이고 지식이고 전부 다 그 지식들을 떼어 내야 돼요. 지식에서 떨어졌을 때 비로소 진리가 보이는 겁니다.
하루는 어깨 아파서 파스를 붙이는데 요즘 파스가 그런지 파스를 약국에서 사서 그냥 붙이면 되는 게 아니고 뭔가 반짝이는 게 있어요. 보니까 파스 액이 붙은 얇은 비닐이 딱 있다고요. 하루는 급해서 혼자 붙인다고 그걸 안 떼어내고 붙였더니 효과가 온종일을 가도 안 나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딱 중간에, 내 피부와 파스 액 사이에 얇은 비닐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 말이죠. 내가 진리를 가로막고 있었던 거예요. 아내가 와서 “이게 있었네.” 하고 떼어내요. 돼요. 떼 내니까 그제야 시원한 거예요.
내가 살기 위한 그 나가 진리 앞쪽에 턱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내 행동과 모든 말은 내가 잘나기 위해서, 내가 나한테 감동 주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자꾸 하나님께 말 걸고, 타인에게 말을 걸고, 강아지에게 말을 걸고, 모든 사물에 대해서 거기다 의미를 주고 본질을 죽여놓고 내게 필요한 식으로 가져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된 거예요. 나의 감동하고 전혀 상관없어요. 하나님이 감동하기 위해서 주신 성경입니다. ‘인간은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이런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스스로 얼마나 감동스러운지. 하나님이 감동스러우면 됐지 뭐, 거기에 가담하면 되지 굳이 우리의 개인적, 사적인 감동을 찾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왜 성경에서 준비한 하나님의 감동 속에 들어갈 생각은 안 하고 왜 따로 내 인생 내 감동에 내가 미치기를 원하느냐, 이 말이죠. 누굴 또 잡으려고? 누굴 또 죽이려고 그런 행동 하느냐 이 말이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경이 네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수억 명이 봤고요, 수억 차례 이상으로 이 성경을 되풀이해서 읽었습니다.
읽으면 뭐합니까? 파스에다 비닐을 갖다가 붙여놨는데. 파스 액에 비닐을 딱 덮어놓고, 성경의 지식을 딱 비닐로 붙여놓고, 자기한테 자기가 감동되기 위해서 자기 안목을 거기에 딱 붙여놓고, 노림수가 있어 놓고 그걸 수억 명이 보면 무슨 소용이 있고, 수십억 명이 봤고요, 수천수만 번을 봤어도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가기는커녕 영광에 튕겨져 나와 버립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이 말은 공식이 있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고요, 육신이 성경이 되는 겁니다. 말씀이 예수님이 되고, 예수님이 또 말씀이 되신 거예요. 앞에 있는 말씀은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이루기 위한 말씀이라면 뒤에 있는 두 번째 말씀은 그 다 이룬 말씀을 하나님께서 자기 성도에까지 포함 시키고 거기 참여시키는 그러한 영광과 감동이 거기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될 때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계약이기 때문에 이것은 어느 누구도 몰랐고, 그냥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하셨던 일입니다. 그다음에 그 예수님의 육신이 어떤 식으로 나밖에 모르는 지옥 갈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감동이 전달될 수 있느냐, 그 작업이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먼저 처음에 말씀이 육신이 되면서 주께서 ‘다 이루었다.’ 하는 그 지점이 십자가 지점이에요.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버지께 감동이 된 겁니다. 우리는 내가 살아있어야 나에게 감동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나만 손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누구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그 말 속에, 그 바닥에 ‘나 망하면 안 되는데, 나 망하면 안 되는데……’ 벌벌 떨고 있는 그 내부 마음이 담겨서 말씀을 보게 돼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고요. ‘죄를 지었으매 누구도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 말씀에 우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거예요.
‘나 이제 망했다, 망했어.’ 여전히 자기가 자기한테 감동되는 존재이기를, 매달리고 아등바등하고 있습니다. 몸부림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다 이루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있는 그 현장에 비로소 마귀가 들추어진다는 것, 악마가 거기에 등장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지식수준이 아니고 진리 수준의 내용입니다.
인간들이 마귀라고 하면 굉장히 무서워하는데, 인간들이 무서워하는 마귀는요, 마귀가 아니에요. 진짜 마귀는 예수님이 불러일으킬 때, 예수님의 요청에 의해서 드러나는 마귀들이 마귀입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고, 다 이루신 것을 인간 속에 말씀으로 그대로 성취한 것을 제공해서 하나님의 감동이 그대로 인간에게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여기에 마귀가 필요한 거예요. 그 점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동네가 평화롭잖아요? 그런데 그 평화로운 동네에 누가, 개 키우는 업자가 들어와서 개를 키웁니다. 그 평화로운 마을이 한순간에 쑥대밭 되는 방법은 간단해요. 그 개 주인이 키우는 도사견을 풀어놓으면 돼요. 줄도 없이 풀어놔서 온 동네에 대낮에 노인들이 있는 마을 회관까지 문 열고 다 들어가는 거예요, 도사견이.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 예수님의 죽음을 바탕으로 다 이루신 그 감동이 우리에게 오려면 하나님께서 그동안 무저갱에 묶어놓은 악마와 졸개들, 귀신들을 풀어주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지옥의 힘을, 이 땅의 모든 인간이 지옥의 힘을 접촉할 수 있도록, 만나도록 주께서 조치하는 그것이 진짜 천국 백성과 가짜 천국 백성을 가름하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자기 감동에 미쳐서 천국 간다고 애쓰는 그 인간들, 가짜거든요. 그거 풀어놓은 마귀 만나면 전부 다 가짜로 들통 날 사람들이에요. 마귀가 활동하지 않으면, 오지 않으면 그걸 알 수가 없어요. 인간이 자기 감동에 속하는지, 속하지 않는지. 요한계시록 9장 1절에서 3절에 보면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이 연기가 사실은 황충이거든요. 하도 숫자가 많아서. 마귀의 졸개들이 연기처럼 온 세상에 퍼져버려요. 오는 세대에 모두 퍼져서 마귀를 안 만나는 사람 없고, 귀신 안 만나는 사람 없게 만들어버려요. 이 세상 자체를 지옥의 세상으로 만들어버리게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그래야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가 살아나기 때문에. 다 이루심이 뭔지가 살아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감동이 인간의 감동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가 알려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옥의 힘에 대해서 누구나 이걸 마주해야 해요. 지옥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한번 들어가면 못 빠져나오는 폐쇄적 힘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5장 26절에 보면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25절에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화해하라 이 말이거든요,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그 옥이 어떤 옥이냐?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그 마지막 하나라도) 남김없이 갖기 전까지는 결단코 그 옥에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게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냐면 마귀보고 이야기 한 거예요. 마귀보고 이야기 한 겁니다. 이거 이 말씀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요, 사람이야 마귀 졸개니까 마귀보고 이야기하는 게 맞아요. 마귀보고 이야기하나 인간 보고 이야기 하나 마찬가지예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이 지옥, 옥(獄), 지옥이거든요, 그 옥에 갇힘, 옥에 갇힌 상태에 인간 세계가 놓여 있다는 것, 이것을 주께서는 산상설교로, 말씀으로 준 거예요.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과 연관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감동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예수님이 누구냐는 진리를 알 수 있느냐면, 예수님이 찾아서 나를 건지지 않으면 어떤 경우라도 나는 내 힘으로 이 지옥에서 못 벗어서 난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감동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받아들인 사람에게 이 말씀과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과, 그 관련성에 눈을 뜨게 되는 겁니다.
아까 기도하신 분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십자가 은혜를 알 수 있습니까?” 했는데 조만간에 마귀 찾아갑니다.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를 쑤시는 방법은 뭐냐면, 열심히 하라는 겁니다. 최선의 노력을 하고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네가 너에게 실망스러운 존재가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누가? 마귀가!
그러나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은 이미 십자가와 함께 죽은 자에요. 죽은 자라는 말은 뭐냐? 성도한테는 그 어떤 마지노선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네가 이 선을 넘어가면 안 돼.’라는 것이 이미 죽은 자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선 넘어가면 안 돼.”라는 이 말……. 마귀라고 하면 막 흉측하고 뿔 달려서, 붉은 뿔 달고 이런 게 마귀가 아니고 마귀라는 말은 평소에 우리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스스로에게 주지 않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 마귀에 가장 근접한 하수인이 바리새인이에요. 사두개인입니다. 옛날 조선 시대 때는 아녀자 예법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아녀자 예법은 맵시, 솜씨, 마음씨, 이 3씨를 갖출 때 가정교육을 제대로 잘 받아서 시집가도 좋은 며느리가 된다고 하는 거예요. 말을 할 때도 조신하게 말을 해야 돼요.
만약에 남편 되시는 분이 아내보고 말하기를, 같은 선비급이죠, “아이고, 잘 잡수는 게 참 보기 좋습니다.” 이렇게 할 때 맵시 있고 마음씨 좋은 아녀자 예법은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아녀자가 먹성 좋은 것도 흠입니다, 서방님!” 그리고 시어머니, 시아버지 계실 때는 밤에 그냥 혼자 이불 덮고 덜렁 자면 안 돼요. 가서 “밤 문안드리러 왔습니다.” 이렇게 해요. “그래. 너도 잘 자거라.” 또 그냥 가면 안 돼요. 여기서 멘트를 날려야 돼요. “편안하게 길몽을 꾸세요.” 이렇게 하고 와야 돼요. 그리고 부부간 이야기할 때도 함부로 쥐어박듯이 이야기하지 말고 서방도 아내한테는 “마음을 예쁘게 쓰니까 얼굴도 곱습니다.” 이렇게.
그런데 그렇게 마음씨, 맵시 좋던 그 남편이 어느 날 자다가 죽어버린 거예요. 인간이 죽어버렸어요. 인간은 왜 죽습니까? 맵시, 솜씨, 마음씨 좋은데 왜 죽죠? 인간은 성경에 의하면 이미 죽었습니다. 성경에서 모든 것을 싸잡아 이야기한다고 했죠? 인간을 죽임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옥에서 빼내는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이 지옥에서 자기 백성의 자리가 일체 사라지게 만드는데 사용하신 겁니다. 이게 성경 내용이에요.
로마서 9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다.” 이건 천천히 읽어야 돼요. 좀 빨리 읽으면 안 들었다,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이게 얼마나 하나님께 감동적입니까? 하나님의 감동이 없이 자기 인생에 자기가 감동 먹을 사람들은 항상 바탕에 ‘나 망하면 안 되는데, 나 지옥 가면 안 되는데’ 이런 것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지옥 가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었던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또 죽이는 짓이에요. 예수도 모르면서 내가 원하는 예수, 내게 필요한 예수를 내가 예수 믿는다는 말을 함으로써 예수 믿는 내가 나에게 감동먹는 식으로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요, 다 이루었다는 진짜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일단 그 말씀이 일단 굉장히 실망스럽습니다. 크게 실망해요.
그 대목이 마태복음 21장 19절에서 20절에 나옵니다.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열매 맺힐 때도 안 됐는데 열매 없다고 주님께서 제자들 눈에 보이는 앞에서 그냥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니까 나무가 바짝 말랐어요. 무화과나무가 아주 치욕스럽게 말라버렸습니다. 그걸 보고 20절에,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곧 말랐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그 무화과나무 저주한 이유를 분명히 알려줬어요. 열매가 없기 때문에 말려 죽인 거예요. 열매 없기 때문에. 그러나 제자들은 무화과 나무하고 자기하고 감정 이입을 해서 “아니 그 연약한 피조물인데 과일 없다고 그렇게 저주해버리면 그러면 우리 제자들은 뭐가 됩니까?”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 말이죠.
그것도 열매 맺을 때가 안 됐는데, 때 안 됐는데 열매 없다고, “목마른데 왜 열매를 네가 내놓지 못했어?” 하고 저주해 버린 겁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충격이죠. 제자들이 얼마나 예수님께 실망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너무 실망이 커서 현장에서 남들 앞에 예수님 욕하고, “나 예수님과 한패 아니다.” 하고 선언하고 자기는 7명의 제자들과 함께 고기 잡으러 간 거예요.
그런데 뒤늦게, ‘뒤늦게’가 중요해요, 뒤늦게 예수님은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베드로를 뒤늦게 찾아갑니다. 자기의 속에 있는 것이 다 들통 다 나고 예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차라리 자기를 사랑했다는 것이 뻔히 들통 다 난 연후에, 연후에 그다음에 예수님이 찾아오죠. 하나님께서 지옥의 문을 열어서 온갖 마귀와 귀신들을 전부 다 이 땅에 퍼뜨리는 이유가, 자기 제자들에게까지 퍼뜨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인간도 너 자신에 감동해서, 네 자신에서 벗어날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온 이유가 한때 제자였기 때문에 찾아온 거예요.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데 끝까지 내가 사랑할거야.’ 하는 약속을 스스로 지켜내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온 겁니다.
따라서 인간의 감동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는 방법은 뭐냐? 주님께서 엿 달이듯이 물기를 쪽 빼내고 쫄깃쫄깃한 사랑만 남길 때까지 계속해서 주께서는 마귀를 보내면서 그들로 하여금 나에 대한 나의 감동이 쪽 빠질 때까지, 주님에게 실망하기 전 내가 내 인생에 실망할 때까지 주께서는 마귀 보내시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니까 인간 감동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전되면서 주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다 삭제시켜버려요. 다시 말해서 선을 넘지 말라고 하는데 그 선을 그을 자리가 아예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것을 ‘세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례라고 하는 것은 내 자리를 박탈당한 상태입니다. 내 자리가.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 줄 때 땅 위에서 줬습니까, 물속에 들어가서 줬습니까? 물속에 들어가서 줘요. “난 물에서 안 사는데?” “그래 물에서 안 살지?” “난 땅에서 사는데.” “그래. 너 땅에서 살지? 땅에 네 자리 없다.” 물에 집어넣어서 “이제부터 너는 물로 태어난 인간이 되어라.” 이게 세례요한의 세례에요.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십자가로 데려가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물에서 실시한 세례라면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십자가로 데려갑니다. 대표적으로 강도죠. 강도의 특징은 이제는 이 세상에서 자기 자리는 끝이었어요. 끝났습니다. 이제 십자가가 그의 마지막 자리에요. 그런데 그 마지막 자리가 주와 함께하는 자리가 되면서 그게 처음 자리가 된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의 처음 자리가 된 겁니다. 그 자리는 자기가 마련한 자리가 아니고 옆에 계신 주님의 십자가가 같이 대신 죽어서 형성된, 마련된 자리, 그 자리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의로 교육하는 자리, 하나님의 감동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주님의 다 이루심에 편입시켜주는 그 자리. 주님의 다 이루심이 나의 자리가 삭제된 자리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버티죠. 내 거 삭제되는 걸 우리는 너무 싫어해요. 도사견 풉니다. 풀어서 내 인생 완전히 흩어놔 버려요. 큐빅하는 것 있죠? 색깔 다 틀리는데 맞추는 거, 어떤 사람은 눈 감고 맞추고 손 뒤로 해서 맞추고 다 해요. 56초 만에 다 맞추는 사람 있어요. 주께서는 우리 인생을 다 흩어버려요. 그런데 십자가에 가니까 다 짜 맞춰지는 거예요. 왜? 십자가 안에 에베소서 1장 10절에 들어있어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통일된 그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니, 내 위주로 살던 망가진 인생이 하나로 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창세 전 천국의 계획에 같이 합세하는 통일성을 우리가 갖고 있는 겁니다. 갖게 된 거예요. 그게 의로움으로 교육하기에 충분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거들 것은 없습니다. 내가 거들 것이 없다는 그 믿음의 자신감,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3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끊어져 저주 받는다 할 지라도 나 괜찮아요. 난 혼자 있는 게 아니거든.”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주께서 함께 있다는 것이 내 뜻이라 여겼다면, 내가 그리스와 끊어진다면 그걸로 지옥이에요.
그런데 내가 함께 있는 것이 내 뜻이 아니고 주님이, 하나님이 감동되기 위해 찾아온 주의 일이라면 끊어질지라도 나 괜찮아요. 왜? 이미 주도권이 주님한테 넘어가 있는 상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여기에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의 자리에요.
주님의 사랑의 자리, ‘이제 내 자리 없다’ 하고 설교한 사람, 신구약 전체를 내 자리 없다고 설교한 분이 계십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옵니다. 그 이름은 스데반 집사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구약 이스라엘 역사 전체와 신약까지,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긴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 하면서 핵심은 뭐냐? ‘과연 이 땅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할 땅을 주셨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 자리를 주셨는가? 결론은 내 자리를 뽑아버렸다는 게,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7장 5절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설교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절에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400년 동안 괴롭게 한다는 말은, 이스라엘 역사로 하여금 애초부터 땅이 없었다는 것과 땅이 한때 있더라도 그 땅이 영원한 땅은 아니라는 점을 스데반 집사가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땅에 관해서 언급할 때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면,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됐다는 것은 생명 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생명 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되어 버리면 이 땅에서 얼마나 호사스럽게 잘 살아도 그것은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감동의 수준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생명 나무와 만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이야기에요.
스데반 집사가 설교할 때 성령에 감동해서 설교한 거예요. 인터넷에서 베낀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 베낀 거죠. 성령에 감동해서 한 설교에요. 성령이 설교한 거예요, 성령이. 인간이 이 땅에서 자기 땅을 차지하려고 하는 이유는 뭐냐? 그 인간에게 어떤 그림자가 있는 거예요. 그 그림자가 자기 그림자가 아니고 마귀의 그림자에요. 마귀가 이 땅을 차지하고, 마귀가 이 땅이 지옥이 아닌 것을 우리에게 설득시키는 거예요, 우리한테.
“전에 땅 던져놨는데, 땅값 올랐잖아. 봐, 얼마나 좋은 세상이야.” 마귀가 항상 설득하는 것은 뭐냐? “이 땅에서 어쨌든 버티고 밥 먹고 살아남아야지. 그게 인간사는 의미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또 묻습니다. “장맛비는 왜 오는데?” “그런 것 좀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 살아. 장맛비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 살아.”
지금도 지옥문이 열려서 와르르 쏟아진 마귀들이 항상 “네가 잘 되면 잘 되는 거야.”라고 우리를 설득시키는 겁니다. “좋은 사람 만나야지. 그러려면 네가 말을 잘 건네야 해. 안녕하세요, 부터 시작하는 거야. 좋은 인상 가지고.”
인생을 조금 살면 알아요. 이 세상 자체가 전부 다 사기 집단인 것을. 모든 게 사기꾼들로 가득 차 있어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다 사기꾼들이에요. 자주 만나야죠. 그래야 나에 대한 나의 감동의 희망이 좌절될 수 있기 때문에. “나 망하면 안 돼.” 이 정도가 아니라 “나 망해도 괜찮아요. 주의 사랑이 쫄깃하게 있으니까.” 이 정도까지 가려면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마귀한테 시달려야 돼요? 얼~마나 많은 사기꾼을 더, 더, 더 앞으로 더 만나야 돼요.
그래서 나이가 적은 사람들 보면 불쌍해 죽겠어요. 몇 달 뒤에 또 어떤 사기꾼을 만나게 될지. 만나는 사람마다 다 사기꾼이니까. 전부 다 뒤에 보면 마귀의 그림자가……, 전봇대 보면 해 질 때 노을의 긴 그림자가 있죠, 해질 때. 전부 다 긴 그림자가 쭉 있어요. 앞에는 점잖은데 뒤에는 그림자가 입맛을 다시고 있어요. 동화에 그런 동화 있어요. 심지어 결혼도 마찬가지고요.
주께서는 성도 뒤에 주님의 그림자가 나오게 하십니다. 주님의 그림자가, 다 이루었다는 그림자. ‘너와 나는 함께 이미 죽은 자가 되었다는 사실. 죽은 자로 인정받는 것을 네가 복인 줄 알아라, 이것아.’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이 없다고 하잖아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잖아요. 너도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네 뒤에 주의 그림자가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네 소리 내지 말고 주님의 소리를 내라는 거예요.
그게 지금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설교하는 거예요. 조금 더 설교를 계속 이어 보겠습니다. 29절에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어떻게 가는 곳마다 나그네 생활, 다시 말해서 터줏대감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이 애굽에 400년 있다 나오니까 완전 애굽 사람이 다 됐습니다. 우리에겐 땅이 있어야 된다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주님이 함께 계실 땅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감동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감동만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는 광야를 지나오면서 나그네 되어 미디안 땅을 지나갑니다. 모세가 먼저 한 번 답사했고 모세가 틀어버린 그 방향 쪽으로 줄줄이 따라 쭉 내려오는데, 모세는 알죠, 이미. 우리가 갈 땅이 하나님이 계실 땅이지 내가 있을 땅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모세 따라 오는 그 사람들은 모세를 닦달합니다. 모세를 완전 부동산 중개사로 만들어서 막 닦달을 해요. “우리가 편히 쉴 땅은 언제 나타나느냐? 언제 들어가는데? 어디 있는데? 그 땅이 얼마나 좋은데? 빨리 인도하라.”
그들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40년 만에 그들은 다 죽었습니다. 42절에 나와요.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약속의 땅, 약속의 땅, 했는데 막상 도달해보니까 약속의 땅 Pass,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그렇게 봅니다. 약속의 땅에 머물렀다, 보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갔다고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의 성령 받은 설교에 의하면 이 땅에서 뿌리째 뽑혀야 되는 새로운 존재가 곧 천국의 백성이라는 그러한 십자가의 의미로 설교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성령에 의한 설교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잘 된다는 것은 스데반 집사에게는 용납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잘 되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미 죽어버렸는데. 죽은 자에게 잘 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안 죽었다고 티 내는 거예요. 아직 자기 뒤에 악마의 꼬리가, 그림자가 감춰져 있는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뒤에서는 마귀가 내뱉는 소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주여, 주여, 하는 게 마귀가 내는 소리와 진배없이 같은 거예요.
‘제발 저의 육신을 이 땅에서 철수해 주시옵소서. 언제 철거해 주십니까? 주여, 내 소유의 자리가 없게 하옵소서. 내 소유의 자리가 없게 하소서. 내 존재를 안정시킬 자리가 없게 하소서. 나그네 되게 하옵소서.’ 나그네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나라에 안정적인 자리가 마련되었음이 더 좋아 보이고 바로 그 모습이 성경을 주신, 교육하는 목적이 거기에 있어요.
‘네가 온전한 내 사람이구나.’ 그 전형적인 모델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왔다가 스쳐 지나듯 그냥 떠나잖아요. 왔다가 그냥 스쳐 지나듯 떠나버려요. 33년의 세월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거예요. 사도행전 7장에서 그 스데반 집사가 구약에 나오지 않는 표현을 합니다.
38절에 보면,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여기 ‘교회’라는 말이에요. 광야 교회. 교회라는 말은 하늘나라에, 생명 나무에, 천국에 이미 확정된 자들이 교회에요. 그런데 그 교회가 이 땅에서 광야 교회입니다. 그 광야 교회에 누가 함께 있었는가? 주의 이름이 함께 있었던 거예요.
사람들이 이스라엘 역사 실패한 것을 사도행전 7장 4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네가 나를 위해서 성전을 지어? 성전이 왜 필요한데? 너의 마음의 안식을 위해서 필요하지 내가 언제 성전 지으라고 한 적이 있는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십자가에서 주의 모든 성경 말씀을 다 이루시고 우리 내부로 들어와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안에 함몰되는 거예요. 함몰됐다는 것은 외부 따로 있고, 함몰된 것은 내부에 자리를 잡았는데 내부가 주께서 그것을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바깥의 외부도 모조리 다 박살난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주님이 이 땅에 와서 들어왔던 이 지구를 마지막에 불살라서 외부 자체가 다 박살 나고, 조각조각 날아가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박살 날 이 땅에 우리의 영원한 처소를 만들 이유가 없죠. 이제 끝으로 성령 충만한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마지막을 마무리 짓는가, 나옵니다. 그게 이렇게 나옵니다.
52절에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너희가 예수님을 이 땅에 죽여서 보냈다는 겁니다.
이게 설교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그냥 설교가 아니고 성령을 받은 설교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 설교에요. 예수님 죽였으니까 너 책임져라, 가 아니라 예수님 죽였다는 말은, 죽이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이 땅에 굳이 내 자리, 내 집, 내 터전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 성령 받은 스데반 집사 설교의 요지에요.
내 자리 없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55절부터 여러분 아시다시피 예수님 일어서서, 설교한 스데반 집사보고 “이리로 오라.” 하늘이 열리면서 스데반 집사를 자기 품으로, 영원한 처소로 반깁니다. 반길 때 그 지옥에서 풀려난 마귀의 하수인들은 짱돌 들고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을 보내줍니다. 돌 들고, 돌이 막 날아오는데 그들이 돌 던지려면 덥잖아요. 그들은 옷을 벗어놔요. 그 옷을 지킨 사람이 누구냐? 사울입니다.
이야기가 희한하게 되어 가죠? 사울이란 사람에게 옷을 맡겨놓고, 다시 말해 관리자로 맡겨놓고 ‘당신이 시킨 대로 스데반 집사 우리가 죽여줄게, 우리도 하나님께 한 열심 하니까’ 하고 “증인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 발 앞에 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 사울이 스데반 집사의 노선으로 똑같이 갑니다.
삼층천에 자기의 영원한 처소가 마련됐다는 것을 알고 이 땅에서 사도 바울은 어떤 기대와 미련을 갖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끊어져 저주받는다 할지라도 주의 그 남은 일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주님의 쫄깃쫄깃한 사랑이라는 처소가 마련된 여유고, 자신감이고, 자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감동이고 지금 오늘날 우리들의 감동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우리가 모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남들처럼 내 인생이 나에게 감동 주려는 어쭙잖은 그러한 마귀 짓은 이제 과거로 다 버리게 하시고 삭제되게 해주시고, 이제 남은 것은 마음껏 무엇이 마귀 짓인지, 무엇이 복음이 아닌지 만끽하다, 주님 증거 하다 주와 만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