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7장 37절 (새로움과 심판) 2300704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7장 31절부터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그 말씀 할 차례입니다.
상황이라는 것이 우리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상황은 하나님 쪽에서 이미 상황을 만드시는데 그 상황이 주께서 만드신 상황은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상황입니다. 특히 가리지 않고. 그 근거가 만일 어떤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살면서 세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집 지으면서 지붕 없는 집은 없잖아요.
지붕 있고 세간 있는데 그거 포기하라 이 말입니다. 그거 포기하라. 이거는 너는 믿음 좋으니까 세간 챙겨라 이게 안 되고 너는 믿음이 좋으니까 너는 그냥 집안에 가만히 있어도 내가 건져줄게 이런 게 안돼요. 그런 게 성립이 안 됩니다. 믿음 좋고 나쁘고 그런 게 없어요. 그날에는 모든 것을 똑같이 취급해서 똑같이 다 날려보냅니다.
이게 심판인데 이게 심판상황인데 자,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심판의 이유는 세간살이, 집의 문제,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밭에 가지러 가지 말라. 여기서 심판의 이유는 인간이 자기 것을 내버리지 않기 때문에 심판하신다. 인간이 모든 것을 내놔야되는데 내놓지 않아서 심판받는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그런 조건같은 게 여기 없지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은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애초부터 없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심판이 오게 되면 그냥 그대로 심판을 받으면 돼요. 신앙생활 굉장히 쉬워요. 심판 오면 심판 받으면 되는 겁니다. 다들 할 수 있지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지요.
어떤 경우에 심판 반항하느냐 하면은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 내가 뭔가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한테는 심판에 대해서는 상당히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심판에 대해서 그건 나쁜 것이고 그거는 섭섭한 것이다. 사람 섭섭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어떤 부류의 사람이냐 하면은 내가 뭐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에요.
모든 것이 무너졌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걸 무너지게 하는 것은 ‘너희는 처음부터 없었어 너는 아예 없는 존재야’ 라는 것을 각인시켜 주는 거에요. 새로움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아무것도 없는데서 나와야 이게 새로움이에요. 있는데서 나와버리면 그건 새로움이 아니고 그건 연속성이에요. ‘연속성’. 연결된 연속성이라고 하는 거에요. 아무것도 없는데서 나올 때 그게 새로움입니다.
“기존에 있는 거 더 키워줄까? 아니면 새로울래? 둘 중에 하나만 해봐” 할 때 사람들은 “기존에 있는 것을 더 키워주세요” 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기존의 있는 것이 ‘나 다움’이기 때문에. 내가 누구다 하는 것은 기존에 있는 것들이 있어줘야 나 이렇다 나 이런 존재야 라고 과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움을 선택한다는 것은 있어도 나는 없어도 괜찮다는 뜻이고 내가 할 수 있어도 사실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새로움이라는 것이 새롭게 기쁘게 받아들이게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께서 전면적인 모든 것을 몰살시키는 모든 것을 몰살시키는 주님의 이러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굉장히 반기고 고맙고 기뻐해야 돼요.
옛날에 우리 어릴 때 국민학교 다닐 때 그때 나무 목조 건물들이 있었잖아요 학교에. 권사님 아시지요. 목조 건물 있을 때 선생님께서 한 달에 한 번은 애들 바짓가랑이 전부 다 무릎까지 걷게 해요. 해놓고 “오늘은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물청소 날이다. 전부 다 가방 책상 위에 다 올려놓고 아래쪽에는 아무것도 없게 해” 하고 선생님께서 호수에 물 해가지고 밑에 교실 안에 물을 다 흥건히 다 적셔놔버려요. 물로 다 씻어내요. 빗자루로 씻어낸다고요.
애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귀찮아요. 상당히 짜증나고 귀찮은 겁니다. 먼지 좀 있으면 어떠냐 하지만 싹쓸이 다 한단 말이죠. 하고 난 뒤에 다시 냄새가 다르고 그 다음날 가면 깨끗하게 되어있어요. 새롭지요. 싹쓸이하고 다 없애니까 이게 새로운 거에요. 그 다음날은 양초 가지고 오라고 해가지고 집에서 헌 옷 기워가지고 걸레 만들어가지고 전부 다 한 줄로 해서 쓱쓱 뒤로 돌아 쫙~~~엎어지고 자빠지고 깨지고 미끄러지고. 광이 반짝 반짝 빛나게 했는데 미끄러져가지고 다치기도 하고 하여튼 반짝 반짝 빛나야 돼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시느냐 하면은 0에서부터 해요. 0부터 시작합니다. 모든 게 없었어요. 모든 게 없었기 때문에 심판을 통해서 모든 것을 없애는 것은 하나님으로서는 마땅한 당연한 조치지요. 인간이 섭섭해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명보험 5개 넣어놨는데 그거 따지지 마세요. 6개고 10개든 간에 다 날라간 거에요.
여기서 1이 나타납니다. 1. 1이 나타나죠. 하나님. 이 땅에 하나님 나타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그다음에 1이 나타나면 그다음에 2가 됩니다. 창조자와 1이 사라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해놓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파트너와 더불어 함께 있지요. 이 창조세계에. 적어도 만들어놨으면 본인은 은퇴하셔도 되는데 인간세계에 함께 해요. 짝을 이룬다고요. 하나님 창조와 하나님과 누구하고? 인간하고 여기서 대화를 해버려요. 대화. 이야기를 한다고요.
그럼 1이 뭐가 됩니까? 2가 되었지요. 2라고 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인간. 인간은 있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계셨다. 2가 있기 전에 1이 먼저 있었지요. 2라는 것은 1이 없는 2는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런데 새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방향이 이렇게 해요. 2에서 1로 1에서 0으로. 하나님만 계시고 하나님이 나타날 피조세계, 창조세계는 없어요.
천지를 창조했지만 인간이 나타나기까지 하나님께서 대화 상대가 없었단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했기 때문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피조물이 인간입니다. 그 인간에게 지시하기도 하고 명령하기도 해요. 대화하기도 하고 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대화했잖아요. 낙원에 하나님께서 거니시면서 아담에게 당부했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 2가 되게 되면 여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가 성립되죠. 그런데 이야기가 이렇게 2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여기서 뭐가 있느냐? 3이 되어 버립니다. 제 3의 인물, 존재가 등장해요. 물론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이게 마귀입니다. 마귀. 마귀가 등장해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는데 약속은 하나님 하나 약속 둘 여자의 후손 그 다음에 뱀의 후손. 하나님 하나, 여자 2, 뱀 3. 3의 요소가 등장합니다.
3의 요소를 통해서 뭘 나타나느냐? 약속을 성취를 하게 되지요. 약속을 성취를 하게 되면 이것은 방향이 3에서 갔던 방향이 이것이 다시 0으로 새롭게 돌리게 돼요. 0으로 새롭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나타나야 방향이 다시 0으로 할 수 있어요. 1로 2로 가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1,2,가 0으로 감으로서 완성을 시키는 겁니다. 처음에 하나님밖에 없었어요.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나와서 하나님께 돌아가면 그게 바로 만물을 새롭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요 하나님을 위한 피조세계지 인간을 위한 피조세계가 아닙니다. 인간 살기 위한 용도는 아니에요. 그 하나님을 위한 세계죠. 거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기에 그냥 들어가 사는 거에요. 남의 집에 들어가 사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 집이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 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그런 거 없어요. 내 집 새롭게 해주세요 하나님이 뭐 건축업자입니까? 인테리어업자 아니잖아요. 재개발업자 아니잖아요.
내가 살던 집을 새롭게 하는 게 그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에요.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내 집을 부셔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합당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이 땅에 사라지기 위해서 살고 있는 거죠. 사라지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사라지는 것 없어진다 도 있지만 이걸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면 매사에 묵살당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매사에. 매사에 묵살당하는 거에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성질이 욱해서 층간소음 있어가지고 내가 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나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나님, 이런 큰 죄를 지었으니까 저 어떡하면 좋아요. 나 지옥 가죠? 그렇죠?’ 하면 하나님의 답변은 뭡니까? 뭐에요? 묵살하는 겁니다. ‘무슨 일 있었나?’ ‘저 성질나서 사람 죽였습니다’ ‘너 성질 안 내도 죽어’ 너 성질 안 내도 네가 잘했다는 것과 상관없이 전부 다 모두 묵살대상이에요. 묵살대상.
인간에게 뭐 할 수 있다는 것, 난 사람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묵살해버려요. 나는 거짓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묵살해버립니다. 인간에게는 뭔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나쁜 짓 할 수 있는 재주도 없고 그뿐만 아니고 선을 행할 재주도 없고. 나쁜 일할 수 있는 재주도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어떤 식으로 이 땅에 찾아오는가.
인간들에게 갉아 먹히는 방식으로 하늘나라에 넣어주십니다. 인간에게 갉아 먹히는 식으로.
예를 들면 하나님 나라가 치즈라면 인간들은 쥐새끼. 쥐가 치즈 보고 그냥 지나가는 거 봤습니까? 배불러도 갉아 먹잖아요. 천국은 인간에게 갉아 먹히는 쪽으로 자기 백성을 받아들여서 이루게 하십니다. 그게 마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치즈는 쥐한테 침노당합니다. 침노하는 쥐새끼들은 다 맛을 봅니다 이런 뜻으로 보면 되죠.
그러니까 천국은 인간들이 요구해서 성과 낸 사람이라 넣어주는 게 아니고 스스로 천국의 성과가 인간에게 죄인들에게 뜯어 먹히는 방식으로 천국에 넣어주는 거에요. 왜? 왜 그렇게 하느냐? 인간의 어떤 것도 천국에 들어오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스스로 어떤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결과물, 쓰레기입니다. 안 넣어줍니다.
다만 천국은 네가 나름대로의 노력해서 네 성과를 가지고 들어온 게 아니고 내 성과에 네가 피해를 입히는 방식으로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피해를 입히는 방식으로. 그러니 이러한 방식으로 이로운 나라가 아니라 새로운 나라입니다. 새로운 나라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데요 그 이유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기 때문에 기대를 아예 안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새로운 나라를 달성하는데 있어서 그 환경이 그런 환경이 조성되어야 되는데 그 환경 오늘 처음부터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인간을 몰살시킨다. 모든 인간을 몰살시키는데 그 전에 모든 인간을 묵살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런 큰 깊은 고민이 있습니다. 고민이 있습니다’ ‘한번 들어나 보자’ 이게 아니고 ‘집에 가. 나 네 이야기 안 들어’ 이야기 듣지를 않아요.
너는 네가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에만 관심 갖지 말고 이 땅에 온 치즈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봐라. 나는 내가 한 천국 외에 일체 인간에 의해서는 심판의 대상, 몰살의 대상, 묵살의 대상이기 때문에 너희 인간세계에서 무얼 하든지 간에 나는 관심 없다. 관심 두지 않는다.
칸트라는 사람 철학자인데 이런 말을 했어요. 진리는 인간 마음속에 있다. 이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법 이전에 인간 마음속에 누구든지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살인하지 말라 이건 나쁘다는 것을 모든 인간이 알고 있으니까 살인하는 것은 나쁘다 진리죠. 그 진리는 어린애든 어른이든 심지어 악한 자라 할지라도 살인자라 할지라도 자기가 나쁜 짓이라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 진리는 인간 마음속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 주장의 후대에 가면 이 사람이 나와요. 헤겔이라는 철학자 나옵니다. 독일사람. 진리는 공동체에 있다. 진리는 공동체에 있다. 어느 것이 복음적입니까? 헤겔이 더 복음적이죠. 이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기성세대입니다. 기존세대에요. 기존세대의 그의 선입관과 그 원칙을 우리는 그냥 계승자, 시대의 계승자로서 우리는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시대의 계승자.
내 것이 없어요. 내 것이 없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그것을 인수인계 받는 식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말라, 착하게 바르게 살라하는 것 이것도 뭡니까? 이것도 기성세대에게 있던 윤리 도덕을 그대로 인수인계 받아서 나의 자아성을 형성하는 거죠. 내 자아성, 양심이라는 것을 형성합니다. 물론 헤겔도 성경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 철학자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개인으로서 감당 못할 모든 것을 억압적으로 개인에게 강요하는 세계라는 것을 관찰하고 연구해서 알아낸 거에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성경에서 너무나 간단하게 가볍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공동체 = 짐승. 너무나 간단한 공식이 나와요. 느부갓네살 짐승 그 후에 바사 나라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로마가 마지막 모든 것이 짐승의 나라에요. 짐승의 나라이기 때문에 거기서 인간들은 짐승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게 무슨 관계냐 하면은 그 짐승의 나라에서 짐승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던 거에요. 하나님을.
유대교 있지요. 1. 그 유대교를 누가 압박했습니까? 1. 로마죠. 2. 제 3의 요소. 여호와 하나님. 세 요소로서 유대인들은 유대 나라를 지켜달라고 누구한테 빕니까? 여호와한테 빈 거에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오늘날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1. 나 돈 사기 친 사람 2. 3. 하나님이여 돈 빨리 이자부터 다 챙겨서 만회하게 해달라 이거잖아요. 내 세간살이가 어떻게 키운 세간살이인데 그걸 가져갑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고 새롭게 하는데 있어요. 새롭게. 새롭게 할려면 우리가 만든 1,2,3 다 작살나야 되지요. 다 작살나야 돼요. 다 무너져야 돼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누가복음 보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왜 인간은 심판 받는가? 그거부터 알아야 돼요. 어떻게 하면 심판에서 빠집니까? 자꾸 거기에 성급하게 거기 관심두면 안돼요.
주님이 1이지 내가 1이 아니잖아요. 주께서 심판을 내릴 때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2나 3에 해당되는 우리가 심판 모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심판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질문을 이것부터 던지면 안 되지요. 이 심판에서 면제해달라. 심판에서 만약에 면제된다면 심판 없는 그 다음 세계, 심판 이후의 세계, 그거 누구 아이디어겠습니까? 하나님 아이디어겠습니까? 살고자하는 인간 본인의 아이디어겠어요? 본인 아이디어죠.
그건 뭐 심판받아 마땅하지요. “아~ 살아야 될 텐데” 그럼 주께서 “왜 사는데?” “제가 할 게 많거든요. 애 시집도 보내야 되고 할 게 많거든요” 그게 새로운 겁니까? 할 게 굉장히 많았던 사람이 묵살 당하는 예가 있어요. 구약에서. 이름이 한 글자입니다. 누굽니까? 할 게 많았는데 갑자기 전부 다 묵살된 분. 무능하게 된 분. 구약에 나오는데. 욥이에요. 욥.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겠고 내가 뭐가 잘못된지도 모르겠고 그야말로 아까 표현한 것처럼 욥이 평소에 착한 것 하나님께서 일거에 다 묵살시켜버렸어요. 이유가 뭐냐? 새로움 때문에. 딸 세 명 새로 얻었지요 아들 얻었지요. 재산 다 새롭게 되었지요. 그 새로움을 위해서 욥이라는 매개자를 그 시대에 보낸 겁니다. 그럼 그 시대의 욥은 일종의 중보자가 되는 거에요.
하나님이 무슨 계획을 갖고 있는가를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계획을 이 땅에 실현시킬 때 이 땅에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욥을 통해서 우리에게 투영해주었습니다. 그 방법은 뭐냐 하면은 그의 모든 것을 묵살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묵살이 안 되었던 거에요. ‘욥아 네가 무슨 나쁜 짓했지? 나쁜 짓해서 네가 벌 받는 거야. 한번 생각해봐라. 어디서 잘못 되서 이런 벌을 받는지 생각해봐라’ 계속해서.
하나님은 묵살하는데 욥의 친구들은 자꾸 욥의 과거로 만회할 생각을 아이디어를 준다고 나름대로의 충고를 하고 있는 거에요. 물론 욥도 ‘과거가 좋았다 과거가 더 나 다웠어’ 라고 계속 생각을 했지요. 그러나 과거라는 것은 다 묵살당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점을 알아야 돼요. 요한계시록은 미래사가 아니라 과거사입니다.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과거사에요.
미래를 살아도 미래를 우리가 앞으로 더 산다고 할지라도 주께서는 그걸 미래에 살았다고 보지 않고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다 과거 중에 하나로 다 집어넣어요. 과거 중에 하나로. 인간이 더 살아봤자 묵살 당할 것만 계속 늘어날 뿐이에요. 따라서 우리 자신을 뭐로 봐야 되느냐 하면은 우리 자신을 컴퓨터 바탕화면에 이런 거 나오지요. 이게 뭡니까?
쓰레기통. 우리 자신을 쓰레기를 배출한 쓰레기를 우리 자신에게 다 집어넣어버려요. 도로 가져가. 우리 인생을 한평생 우리가 쓰레기만 내놨으니까 도로 가져가게 하시는 겁니다. 어느 먼 지역에 가서 새로운 쓰레기를 봤어요. 흑돼지구이 집에 갔는데 한 번도 그런 데를 가본 적이 없는데 드라마에 나오는 거 있잖아요. 양철로 된 동그란 탁자, 앞에는 연탄 피워놓고 동그랗게 나 거기 술집인줄 알았어요. 술집이 아니고 흑돼지 굽는 데에요.
굽는데 우리 손녀가 쓰레기통 어디 있냐고 하니까 잠깐 일어나보세요 쓰레기통. 쓰레기통에 뚜껑 해놓고 뚜껑 위에 앉아있는 거에요. 들춰보면 거기가 쓰레기통이에요. 참 복음적이다. 내가 살던 고향은 쓰레기 고향. 너무나 복음적이에요. 내가 살던 고향은 쓰레기 고향. 꽃피는 산골도 쓰레기통. 쓰레기로 태어나 쓰레기를 인수받아서 쓰레기를 또 후손들에게 나눠주는 거에요. 전부 다 쓰레기 집어넣게 만들어요. 어디 나온 쓰레기. 법대 나온 쓰레기.
모조리 전부 다 내가 뭔가 할 수 있다 를 못 버리고 있어요.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그것 때문에 심판받는데. 그건 새로운 게 아니거든요. 내가 할 수 있다 나는 이 정도는 가졌다는 것은 그건 새로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이야기에요. 주께서 하시는 새로움은 그것을 인수인계하지 않습니다. 그걸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 첫 번째 어려운 게 나옵니다. ‘주께서 세상을 심판한다’가 아니라 그 앞에 있어요. ‘주께서 성도를 만든다’가 순서상 먼저에요. 주께서 성도를 만들기 때문에 성도의 그 본질 성도가 갖고 있는 함유하고 있는 그 내부에 필요해서 심판이 필요한 거에요. 심판이 성도 만드는 요소가 되게 한다 이 말이죠. 마태복음 10-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방금 이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보내시는 것은 세상이 심판을 해야 12제자의 윤곽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2제자.
그럼 12제자가 뭐냐? 지금까지 강의에 의하면 12제자가 뭡니까? 세 자로 하면 뭡니까? ‘새로움’이에요.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새로운 거에요.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축하기 위해서 숫자로 몇 명? 12명.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는 몇 명? 12명. 유치원 애들도 알겠다. 12명. 새로운 이스라엘 만들기 위해서 기존에 있는 모든 것의 심판이 꼭 필요했던 거에요. 꼭 필요했던 거에요 심판이.
그럼 12명이 갖고 있는 그 본성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8장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슬슬 요한계시록 해석에 들어가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8장 13절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다 듣도록 온 땅이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이야기 하는데 독수리가 땅에 거하는 자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여기서 이 심판받는 온 천지가 심판받는데 유일하게 살아있는 게 누구지요? 유일하게 살아있는 게? 요한계시록 8장 13절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 독수리죠. 독수리. 살아있는 안목이에요. 살아있는 시선. 세상이 심판받는 이유를 유일하게 아는 그 안목은 독수리 안목이에요. 독수리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이사야 40장 31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독수리라는 이 개념을 성경에서 사용할 때는 땅에 대비된 땅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는 새로움의 존재, 이걸 독수리. 요새 말로 하면 드론. 그러니까 성도는 뭐냐? 드론 부대. 드론 부대가 성도에요. 땅에서 무슨 일이 나는 것에 대해서 미리 감 잡은 거에요. 땅에서 일어나는 그 심판은 심판이 없이는 오늘날 본인들이 성도가 못돼요.
성도의 특징을 성도의 차이남을 위해서 성도는 뭐냐 하면은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게 아니고 관점이 위의 초월적 관점을 가진 자가 성도입니다. 초월적 관점. 초월적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미래마저 과거사로 받아들이는 안목, 자기 인생관을 갖고 있는 사람. 그게 성도에요.
제가 어제 장례식에 갔는데 친구 모친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갔는데 그 장례식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보통 사람은 죽은 사람 입관하고 산 사람이 와서 조문하고 돈 좀 내고 밥 먹고 집에 이렇게 오잖아요. 오랜만에 이야기도 하고.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관에 있는 사람만 죽은 사람이 아니고 거기 조문 온 사람 다 죽었어요. 내가 보기에 다 죽었어요. 이게 억지해석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다 죽었어요.
왜 다 죽었느냐 하면은 어떻게 단정하느냐? 본인이 죽은 사람을 조문 옴으로서 본인은 안 죽었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죽은 거에요. 죽은 사람과 자기의 죽을 시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거의 시간이 없다고 보면 돼요. 왜냐하면 진리는 공동체에 있기 때문에. 같은 공동체라면 이미 죽은 거에요. 그 공동체에서 못 벗어난 이상은 다 죽은 겁니다. 공동체 자체가 심판받으니까. 공동체 중에서 누구 잘난 사람 있고 없고 그 공동체 짐승이라는 공동체에 대해서 주께서 일관 심판을 해버리는 거에요.
이번 주일날 설교 성경본문 하나 하고 끝내고 싶었어요. 뭐냐 하면은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방금 몇 초 걸렸어요? 7초. 설교 끝났습니다. 설교 끝이에요. 그거에요. 결국 그게 7초짜리 설교라면 거기서 핵심이 뭐냐? 그 7초의 설교의 핵심은 ‘너 자신을 알라’ 우리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목사님 저 예수 믿겠습니다” 하면 “본인이 누군지 혹시 아십니까? 본인이 누군지 알고 예수를 믿어요?” “하나님 살아계신 것을 믿습니다” “아니 하나님 살아계신 거 말고 본인이 누구십니까? 본인이. who are you? 본인이 누구시죠?” 정답은 뭐였습니까? 본인이 누구죠? ‘죄를 지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나’. 그게 정답입니다. ‘죄를 지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나’. 죄를 짓고 싶어서 진 게 아니고 태어난 자체도 죄가 돼요. 태어난 자체가. 아담의 연속성 때문에. 태어난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렇게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자아가 쎕니까? 그걸 알게 한 로마서 3장 23절이 쎕니까? 어느 것이 우세해요? 말씀이 우세하죠. 말씀이 우세한 것이 바로 그게 말씀의 사람, 그게 바로 천국 백성이잖아요. 참 쉽지요? 굉장히 쉬운 거에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을 지켜요. 그 말씀이 말씀을 지키는 대상자로 뽑혔을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가 거기서 채택된 거에요. 말씀이 말씀대로 지키는걸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냥 채택한 거에요.
“네가 그 날이 되거든 세간을 가지러 가지 말라. 짐 같은 거 가져가지 말라. 밭에 뭐 가지러 가지 말라” 이건 분명히 글 자체 보면 그 당시의 미래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그걸 뭘로 봅니까? 우리의 과거사로 받아들이죠. 내가 앞으로 마지막 때가 되면 밭에 가축 있더라도 나 안 가져가. 왜? 그게 ‘나’니까. 그게 말씀에 입각한 ‘나’니까요. 그게 ‘나’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에 성도가 등장한다는 것은 주께서 말씀에 입각해서 등장하기 위해서 입각해서 말씀의 소재로서 성도가 등장하잖아요. 그 말씀 내용의 하나가 뭐냐 하면은 전 세계를 묵살하고 심판한다는 말씀이 오늘날 성도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되었으면 세상이 하나님께서 함부로 세상을 심판하는데 대해서 얼마든지 그거 당연하거 아니야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자들이 누구다? 독수리 같은 성도가 되는 거죠.
독수리 이야기 나왔는데요 왜 목사님 독수리를 사람에다가 그렇게 비유를 합니까 반칙 아닙니까? 이렇게 하는데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반칙 아닙니다. 출애굽기 19장 한번 보시고 창세기 32장 한번 봅시다. 19장 4절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무슨 날개입니까? ‘독수리 날개’죠. 독수리 날개에 실을 수 있는 것은 독수리 가족밖에 없어요. 독수리 오형제라든지. 독수리 가족 외에는 독수리 날개에 실을 수가 없습니다.
실어 나르는 독수리를 어미로 여기는 사람 외에는 독수리 업어 나를 수 없어요. 남성만 60만 많은 사람이 사막 길을 걷든 홍해를 건넜던 간에 하나님은 뭘로 본다? 독수리 날개로 그냥 드론 띄워서 그냥 넘어온 걸로 보신다 이 말입니다. 왜? 안목과 관점이 애굽 사람과 달라야하기 때문에 그래요. 일반 세상 사람과 달라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달라야 한다는데 지금 강의에서 다르긴 어떤 점이 다르냐? 세상은 쓰레기라서 그냥 심판하는 것은 당연한 그 다음 조치다. 그것을 마땅하게 여기는 안목요. 여러분들이 그냥 이 땅에 살면서 별 할 일도 없으니까 할 일도 없죠. 심심하니까 쓰레기나 많이 모으세요. 그것도 현찰로. 달러로. 한국 돈 말고 달러로 해가지고 미국으로 튈 생각. 급하면 미국으로.
독수리 날개, 계속 자기 백성을 독수리 관점으로 바라보고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이사야 40장 37절 말씀처럼 네 신앙이 독수리처럼 부요한. 뭔가 땅에 안 딛어도 안 딛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방식이 성도의 삶이라는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땅에 좀 딛으면 어떠냐? 묵살당하죠. 하나님은 심판 자체가 묵살이니까요. 땅에서 뭐 예배하고 교회 세우고 전부 다 묵살, 묵살. 시끄럽다. 묵살.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8장 13절에 독수리가 “화, 화, 화로다” 했는데 이것도 쉬운 질문이니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그 장면에서 유일하게 소리 내는 쪽은 어느 쪽이죠? 독수리. 유일하게 말하는 자가 누굽니까? 독수리. 나머지는 다 잠잠해요. 아무 소리 못합니다. 심판은 뭐냐? 인간의 모든 소리를 덮어버리는 게 심판. 인간이 재잘 재잘 재잘. 전부 묵살. 3시간동안 해도 아무 의미 없는 것들. 소리내지마. 모든 소리에 대해서는 일체 주께서는 의미주지 않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에요.
불 내는 것도 심판이지만 인간의 묵살하는 차원에서 보게 되면 인간의 입에서 내뱉는 모든 의미 있다고 여기는 모든 말과 행동에 대해서 일체 그것을 묵음으로 만듭니다. 무음으로 만들어요. 조용하게 만들어버려요. 조용하게 인간이 내는 소리는 죄밖에 안 나오기 때문에 주께서는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한 군데 더 보는데 구약에 창세기 32장 야곱이 약속을 받고 난 뒤에 벧엘에서 꿈에서 약속 받았지요. 약속받고 난 뒤에 야곱은 본인이 주인공인줄 알았어요. 언약의 주인공인라고 자부했습니다. 야곱이 어떻게 오해했느냐 하면은 내가 있고 나를 향하여 사다리가 있고 거기에 천사가 왕래한다고 본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 위에 천사가 왕래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위에 천사가 왕래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이스라엘 이름은 야곱을 찾아온 천사의 이름이 이스라엘이었어요. 축복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내 밑에 있어’ 라는 뜻이에요. 내 밑에 있어라. 복을 소유하는 게 아니고 복에 깔리는 게 복이에요. 복에 눌리는 게 복입니다. 굳이 내가 복을 안 가져도 되는 게 복이에요. 굳이. 복 가진 분에 예속이 되고 일원이 되고 지체가 되는 것이 복이에요. 그 복 관리 내가 안 해도 되는 겁니다.
집에 키우는 노년의 개가 전기세 걱정하는 거 봤습니까? 주인님, 전기세 오른다는데 에어컨 좀 끄시지요. 이렇게 에어컨 앞에서 멍멍 짖는 개 봤습니까? 없지요.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주인이 따로 있다, 개 주인 따로 있다고 하는 거에요. 그 관계가 복된 관계에요.
주인이 심판할 때 주인이 하시는 그 행위, 심판행위가 바로 새로운 자를 피조물을 만들기 위한 일환으로 심판이 주어진다는 것을 아울러 그것을 발견하면 되는 거에요. 0 -> 1 -> 2 -> 3 그 뒤에 인간은 누구를 만난다? 마귀를 만난다. 따라서 마귀와 한통속이 되었잖아요. 이 방향을 주께서는 새로움을 위해서 이렇게 방향을 0으로 돌려놓지요.
0으로 돌려놓고 1로 나올 때는 전에처럼 하나님 1, 인간 2가 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는 아버지 아들 성령 성도 여기서 0이 되어버려요. 심판 이후이기 때문에 제로가 돼요. 이때는 숫자도 헤아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0이 되는 거에요. 없는데서 새로 생겨요. 없는데서.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 없는 존재인데 예수님의 심판 때문에 말씀이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새롭게 생긴 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우리가 10분 쉬는 것도 새로움.
강남-누가복음 17장 37절 (새로움과 심판) 2300704b-이근호 목사
창세기 32장 2절에 보면 야곱이 자기 중심으로 언약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입니다.
제가 어릴 때 다녔던 교회에 청년회를 조직했는데 청년회 이름을 지었어요. 마하나임이라고. 하나님의 군대. 뜻도 몰라 하여튼 성경 나오니까 좋은 건줄 알고 했는데 하나님의 군대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군대는 하나님의 죽으심을 품고 활동하는 군대 또는 부대. 하나님의 죽으심을 품고 활동하는 군대.
그러니까 하나님의 군대는 그들이 조직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조직했다는 말입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최고 사령관으로 조직을 해서 예수님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군대가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뭐냐?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이 성도의 원형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성도라는 것은 어디서 새롭게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품고 사는 자, 예수님의 피와 살을 품은 자가 하나님의 성도가 됩니다. 그 외에는 성도가 아니에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은 예수님의 성과, 아버지의 언약을 온전하게 이루었다는 그 성과를 성령이 와서 그것을 우리에게 안에다가 심어주는 거에요. 예수님의 것이 생소한 우리에게 심어주는 겁니다. 그 심어주는 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죽으심이에요. 초대교회 때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초대교회 때 사람들이 떡과 잔을 나누는데 예수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이라고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모임 단체들이 어떤 명분이 있는데 그 명분이 뭐냐? 예수님의 죽으심이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명분으로 모였다는 말은 이것은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스냅사진. 죽은 자의 특징은 더는 본인의 활동은 없다가 돼요. 본인의 활동은 없는 거에요. 주님의 사진기로 우리를 찰칵 찍을 때, 그것도 컬러사진이 아니고 흑백사진으로 찍었다고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계속 앞으로 살면서 어떤 활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뭐냐? 흑백사진 안에 다 들어있는 거에요. 우리가 어디 가서 사업을 하던지 출장을 간다 할지라도 어디 가더라도 예수님의 죽음을 품은 자로서 사업을 하고 장사를 하고 뭘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어딜 가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품기 때문에 이 성도의 특징은 흔들림이 없다. 흔들림이 없죠.
일종의 스노우볼 같은. 기념품 있지요. 플라스틱 안에 있어가지고 거기 산호초도 있고 있지만 딱딱하지요. 거꾸로 하면 눈이 막 쏟아지고 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안에 장면으로 확정되었어요. 평생 동안 확정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 안에 계속 있는 거에요. 그것도 흑백사진으로서.
제가 흑백사진이라고 하는 것은 내 나름대로의 휘황찬란한 그 어떠한 것이 그게 무채색 된다는 거에요. 색감이 살아날 수가 없지요. 예수님 죽으심 자체가 시커먼 흑백사진인데. 인간이 자기가 빨간색 파란색 분홍색 노란색 그거 색감이 나올 리가 없지요. 안 나오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흔들림이 없지요. 흔들림 없으니까 괴롭다 슬프다 이런 것에 대해서 거기 지장 받지 않습니다. 같이 휘둘리지 않지요. 괴롭다든지.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흔들림이 없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있기 때문에 본인의 구원이라든지 본인의 구원의 탈락 또는 지옥 가는 것을 그거는 본인이 결정합니까? 주님이 결정하는 거에요? 주님이 결정하지요. 주님이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지 제가 억지스럽지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청년들 사진 찍는데 여자 청년도 있고 키 큰 남자도 있고 사진을 찍는데 여기서 죽으신 주님도 찰칵 찍힌다 이 말이죠. 주님 죽으심도 같이 찍힌 거에요.
그러면 이들이 전부 다 공통적으로 성령을 받았다 칩시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을 주신 분이 죽으신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같이 계신 거에요. 그런데 이 여자청년은 시집가서 애가 둘 있다. 얘는 34살인데 아직 안가고 있다. 여러 가지 있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흔들림이 있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게 의미가 없지요.
누군 춘천 닭갈비 먹고 누구는 흑돼지 먹고 이런 거 거기에 대해서 아~ 나 그때 나 닭갈비 안 먹고 흑돼지 먹을걸 이런 마음의 갈등을 느낄 필요가 없지요. 갈등을. 본인의 선택이 아니고 여기 스냅사진, 동결된 스냅사진. 그 사람이 10년 뒤에 어떤 일을 하고 50년 후에 어떤 일을 해도 그건 스냅사진 확정된 거다 이 말이죠. 확정된 것. 흔들릴 필요가 없어요.
누가복음 17장 34절 보겠습니다.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라고 되어있지요. 여기 버려둠 된 자나 데려간 자나 둘 다 당했어. 버려두는 식으로 당했고 데려가는 식으로 당했어요. 따라서 33절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는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거는 우리에 있는 목숨에 대해서 자기 목숨이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목숨을 갖고 있다는 이런 뜻이에요.
내가 내세울 게 없는 목숨, 하고자 해도 그게 무의미한 그런 목숨을 우리는 애초부터 부여받게 된 겁니다. 왜? 모든 인간은 몰살당하고 심판 대상이기 때문에. 심판받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한다? 판단을 한다? 예리한 판단력 소용없습니다. 예리한 판단력도 마찬가지. 모조리 심판받게 되면 누가 구원받느냐 하는 것은 우리는 그냥 당해야 되지 내가 “여기 저 천국 가겠습니다!” “손 내려 손 내려 손 내려”가 되는 거에요.
이러한 누가복음에 17장에 이 이야기에 대해서 그 근거에 대해서 구약을 통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구약을 찾아보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게 좀 이렇게 여러분들이 힘드십니까? 왜 그러느냐 하면은 항상 우리가 힘들어도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자꾸 성경 보면서 출발점을 주님부터 출발 하는 게 아니고 나부터 출발해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 피해야 된다고요. 이걸 피한다고요.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 아 나는 데려감을 당해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할 권한이 없는데도 그런 생각이 나온다니까요. 구약의 이 될 뿐이지 거기 우리가 개입하거나 끼어들 입장이 안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목사님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게 없네요. 나는 아무것도 안 할랍니다. 누구 맘대로 아무것도 안 해요? 누구 맘대로. 본인이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고 숨 안 쉬고 나 이제 숨 안 쉴 거야. 그것도 숨 쉬지요.
우리는 지금까지 내가 한 게 없어요. 왜냐 하면은 내가 할 줄 아는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은 내가 일해서 월급타서 밥 먹었다 하지만 배고프고 밥 먹고 일하고 있는 튼튼한 두 팔, 두 다리 이런 것조차도 주께서 허락이 되니까 이게 지금 움직이지요. 차 사고 나가지고 목발 짚고 다녀보세요. 1년 동안 누워보세요. 교회도 못나갑니다. 우리 교회 그런 분 있어요.
우리는 내가 결정해서 내가 마음껏 휘젓고 산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요 담배도 안 피고 마약도 안하고. 누구 맘대로 마약 안했어요? 나는 술도 안 먹고요. 누구 맘대로? 그건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에요. 그야말로 우리는 구원 받는 것만 당하는 게 아니고 술 끊고 담배 안 피는 것도 당하는 거에요. 모든 것이 태어난 것부터 우리는 당한 겁니다.
태어나자마자 냉장고 들어가는 거 안 당한 것도.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에요.
너 같은 인간 태어나도 소용없다는 것. 태어나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자가 천국 백성이에요. 왜? 새로움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태어난다는 것은 옛 부대에 옛 술을 담는 식이에요. 옛 것에 태어나서 새 것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새 것은 예수님만 새 것이에요. 예수님만 새 것이고 예수님의 죽으심에 우리의 모든 신분과 우리 모든 미래가 확정돼야 됩니다. 그럼 우리 남은 인생은 과거사에요. 우리가 내일도 과거라니까요. 모레도 과거에요. 좀 독수리 눈알을 갖고 있어야 돼요. 독수리처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시간을 툴툴 털어버리고 시간 없는 그 공중으로 날라가버려요. 날라가버릴 때 위에서 보면 모든 것이 과거사입니다. 우리는 또 내일되면 또 열심히 과거를 살라고 싸매고 걱정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어차피 본인의 운명 본인이 결정할 사항이 아닌데. 무엇을 노리고 그렇게 열심히 고민하고 끙끙 앓고 눈물 흘리며 살았는지 다 부질없는 거에요.
일본에서는 화장할 때 이런 화장이 요새 뜬답니다. 풍선을 만들어가지고 조상의 유골을 풍선에 띄워버려요. 가격 200만원 되겠습니다. 그럼 풍선이 올라가서 터져버리죠. 그걸로 영원히 조상하고 빠이빠이. 조상의 뼈가 하늘에서 쏟아져요. 쏟아져서 샤랄라라라라~~. 조상의 뼈가 하늘에서 쏟아져요. 할렐루야 노래처럼. 땅에 묻을 자리가 없어가지고 풍선 띄워서 보내는 거 확실하게 보내버리는 거에요. 독수리가 쪼아서 중간에 터지던지 그건 내 소관 아니고.
제가 여기서 좀 어렵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왜 신약의 누가복음에 이런 식으로 구원 이야기 왜 나왔느냐? 이걸 질문을 할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구약의 예언대로 신약이 이뤄지고 신약의 예언대로 요한계시록에서 이뤄져요. 그 세 가지의 관계를 이제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말라기 보겠습니다.
말라기에 보면 4장 3절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5절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이렇게 해서 구약 끝납니다. 구약의 끝 지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가고 안 하고는 그건 엘리야 소관이다 라는 것이 나타나요. 엘리야가 그 사람 마음에 찾아가서 돌이키면 아버지께로 가고 엘리야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안 돌이키면 그 사람은 그걸로 끝이 나는 거에요.
말라기의 이 마지막 대목은 그 당시 이스라엘 유대교로 하여금 어서 엘리야라는 분이 왔으면 좋겠다. 엘리야를 고대하고 엘리야 와서 본인의 역할을 다 해야 될게 아닙니까. 본인의 역할을 다해서 그냥 엘리야의 공로만으로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자녀가 되기를 그들은 학수고대했습니다.
자, 유대인들이 이 엘리야 오기를 기다리는데요. 그들이 엘리야 일에 협조했습니까? 협조 안했습니까? 큰 협조했습니다. 엘리야를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뭘 몰랐는가? 죽는 엘리야를 몰랐던 거에요. 죽는 엘리야. 참 이게 보통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지요. 내가 여기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다 해버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 돼요? 살아있는 내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에요? 산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살아있어요. 살아있다와 살아있는 나와 관계 맺을 때 이걸 믿음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이미 살고자 하기 전부터 이미 죽어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내가 죽어있다면. 내가 죽어있다의 이 요소로 내가 되었기 때문에 죽어있다는 어떤 요소냐 하면은 하나님의 요소로서 내가 죽어있다가 돼요. 하나님의 요소로서. 죽는 하나님의 요소로서 내가 죽어있다는 관계로 나의 죽어있음을 이렇게 연결된다면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믿음인거에요.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내게 일어난 모든 것은 먼저 누가 있다? 하나님에게 먼저 있어서 그 다음 차례가 그 다음 순서가 나한테 주어졌다 이 관계가 믿음의 관계에요. 이 관계가 믿음의 관계라고요. 그런데 여기 말라기에 보면 여기 죽음 이야기 없어요. 죽음 이야기 없고 무슨 이야기 있느냐 하면은 그 대신 심판 이야기 있어요. 만약에 돌이키지 않으면 다 죽여버린다. 심판 이야기 나온다고요. 그러면 말라기에 나오는 엘리야가 활동하게 되면 자녀의 마음을 돌이키기 전에 무슨 이야기부터 먼저 운을 뗄까요? 심판 이야기부터 운을 떼는 거에요.
자, 아까 첫째 강의에서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일체 주님께서 다 묵살하는 거에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바로 심판이에요. 나의 가치, 나의 의미에 대해서 주께서 일체 듣지도 보지도 않는 거에요.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 자체를. 그게 심판이에요.
그러면 엘리야가 와서 활동할 때 심판을 언급하면서 먼저 활동한 분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엘리야보다 먼저 왔으되 너희들이 함부로 대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 어려울 게 뭐가 있느냐. 엘리야의 중첩이에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요. 엘리야의 중첩이라는 것은 여러분 아시지요. 세례 요한도 엘리야고 그 뒤에 오시는 분 예수님도 엘리야에요.
세례 요한은 실패한 엘리야고 말라기에 나오는 자녀의 마음을 돌이키는데 성공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엘리야의 중첩에 대해서는 별로 이렇게 어렵지 않은데 문제는 성도. 성도가 성경에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뭡니까? 성도는 예수님과 죄인이 뭐 됐다? 중첩됐다고 보는 거에요. 의인과 예수님이 중첩된 것이 아니고 죄인과 예수님이 중첩이 된 거에요. 중첩의 매개는 예수님의 죽음에 있습니다. 살과 피. “내 살과 피를 먹으면 네가 영생을 얻으리라” 중첩되어있는 거에요. 연결되어있어요.
그러면 성도는 뭘 해야 되느냐 하면은 자기 죽음을 품지마시고 예수님 죽음을 품고 살아야 돼요. 예수님의 죽음을 품고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품고 살 때 자기 죽음도 중첩되어서 같이 품게 되겠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하는 행위가 날 죽이는 행위인 것을 주께 감사하는 사람. 주님께서 내 이름을 지워버림으로서 그렇게 하시는 주의 이름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 그게 성도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사람. 주의 이름으로.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누구 이름을 안 부른다? 두 번 다시 내 이름 부르나 봐 이런 뜻이에요. 로마서 10장에 나오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나의 죽음과 주의 죽음을 품은 자에게는 다시 죽은 내 이름의 어떤 의미나 희망을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거에요. 내 희망도 주님의 희망이고 내 미래도 주님의 미래고 내 운명도 주님의 운명이지 따로 내 걸 가질 이유가 없다는 거죠.
지금 제가 말라기 가지고 설명했지요. 마태복음 10장 한번 보겠습니다. 제가 미리 어렵다고 운을 뗐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좀 견뎌주셔야 돼요. 마태복음 11장 보겠습니다. 11장 20절에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이 이야기를 누구 보고 전달하라고 합니까? 누구 보고? 지금 12제자보고 70명의 제자 보고 제자들 보고 이걸 전하라는 거에요. 그러면 제자 입장에서는 이미 심판이 이미 시행이 된 겁니까? 심판이 나중 것입니까? 제자 입장에서는 이미 제자가 등장했다는 예수님이 제자를 뽑았다는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는 이 심판 속에서 아무도 모든 인간이 심판 받는데 제자들은 무슨 빽이 있어가지고 심판에서 견뎌지는가? 제자들은 이 심판 속에 들어가야 돼요. 심판을 견뎌야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뭐냐 하면은 이 심판이 자기를 위한 심판으로 그걸 수용을 해줘야 돼요. 이게 어려운 거에요. 이게. 아이고 세상 망했다. 꼴좋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는 지켜주시겠지. 그런 건 없습니다.
노아 홍수 때 너희들 세상 물에 다 잠길 거야. 하지만 내가 가꾼 노아 집 채소밭은 물에 안 잠길 거야 이런 거 없잖아요. 노아도 마찬가지로 노아 살던 고향 어떻게 됐습니까? 깔끔하게 물에 다 잠겨버렸지요. 방주 아니면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아니면 우리도 마찬가지 입장인 것을 인정하는 자들이 제자들이에요. 제자들입니다.
이 땅에 당하는 이 모든 수난과 어려움은 우리도 똑같이 당하는데 그들은 찡그리고 짜증내지만 우리는 성도가 무어냐는 것, 예수님의 살과 피가 이 정도로 영생이었는가를 확인하는 그러한 계기가 되는 거에요. 이 어려움이. 기름 값 오른다. 물가 오른다. 다 힘들지요. 미국에 어떤 성도가 마트에 갔는데 강도를 만나가지고 애 하나 두고 부부 죽었다. 주위 사람들이 애도한다고 꽃 놓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무기는 자제해야 된다 이렇게 하잖아요.
죽은 사람이 성도인지 아닌지는 그건 모르겠는데요 만약에 성도라면 그렇게 주위에서 애석한 만큼 애석해합니까? 왜 강도가 저만 찾아옵니까 라는 말을 할 리가 있어요? 없어요? 그런 말 하면 안 되지요. 왜 물난리에 불자 집안 멀쩡합니까? 신자 집은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왜 떠내려가는가? 그렇게 반발하고 반항하면 아니지요.
요한계시록 한번 보겠습니다. 7장 14절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천국 갔는데 장로가 묻는 거에요. “흰옷 입은 자들 이리로 와. 초짜들아 어디서 왔어?” 하니까 “주여 당신이 알잖아요. 당신도 겪었으니까 알잖아요” 우리가 큰 환난에서 나오는데 “흰옷은 왜 흰옷이냐?” “어린양의 피로 씻었으니까 희지요”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유월절은 끝난 게 아니에요. 매일 유월절이에요. 매일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어린양의 피의 가치를 위해서 우리는 매일같이 주식이 폭락하고 물가가 오른다 내린다 뭐 대통령이 사교육을 어떻게 정한다 온 복잡한 뉴스 중에서 이 환난 중에서 우리는 거기서 뭐만 쳐다보느냐? 어린양의 피가 얼마나 대단한 효과가 있느냐.
우리 힘으로 이 세상을 헤엄쳐서 빠져나올 수가 있어요? 못 빠져나옵니다. 우리 힘으로 이 세상에서 물들지 않고 죄 안 짓고 살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남은 사재기해도 나는 사재기 안한다. 아주 배부른 소리죠. 힘들 때는 그런 거 없어요. 예배드리고 있는데 마트에서 마지막 소금 판다. 예배는 인터넷으로 드리면 되고.
산다는 것은 나만 산다는 뜻이에요. 우리 아는 사람만 산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것은 타인에 대한 강도짓입니다. 살인이죠. 남이 죽든 말든 그건 난 모르겠고 나만 행복하고 나만 즐거우면 그만인 거에요. 이게 산다 에요. 바로 그 지경 속에서 우리는 주께서 의인과 중첩되는 게 아니고 죄인과 중첩되는 거에요. 죄인과. 죄인이기 때문에 이 땅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시 받아야 될 우리의 삶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마태복음 11장을 다시 한번 봅시다. 11장에 보게 되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벌써 시돈과 두로와 가버나움이 이미 하나님의 멸망의 대상인 것을 이미 확정지었어요. 그러고 난 뒤에 오늘 누가복음 본문으로 돌아가봅시다. 37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라고 물었어요. “그날이 될 때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 대책이 없다는 뜻이에요. 어떠한 구원자도 싸그리 다 날라가버린 아무도 너도 나를 구원할 수 없고 나도 너를 구원할 수 없는 몰아세울 때에 제자들이 묻지요. “주여 언제입니까? 또 어디입니까?” 주여 언제 어디서 그런 일을 당하냐고 묻지요. 그럴 때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여기 누가 나옵니까? 여기 두 가지가 나오죠. 하나는 독수리 또 하나는 시체.
내가 모든 인간 시체 만들기로 작심을 했다는 거에요. 그리고 이 시체에 대해서 증인노릇 하는 것,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참으로 정당하심을 보여주는 증언자로 뭐냐 독수리. 독수리가 모여드는 그 곳에 시체 뜯어먹을려고 독수리 모여들겠지요. 주님께서 유일하게 활동하는 것, 독수리와 활동하는 것 이건 뭐냐 하면은 바로 심판성을 끝까지 살아남는다.
이 세상의 운명이 이렇습니다. 이 세상은 심판받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끝까지 하나님의 심판성은 세상 끝장낼 때까지는 계속해서 활기차게 활동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엘리야로 오신 분이 하신 일이에요. 우리 주님 하신 일이에요. 이 사실에 동의를 해줘야 돼요. 왜냐 하면은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가 알아서 아버지께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을 이 심판성을 통해서 모조리 시체가 되는 입장에서 어느 누구도 벌떡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갈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복잡하다고 하지만 복잡한 게 아니고 깔끔해요. 간단합니다. 다 죽여줄게 그리고 구원받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해줄게. 이렇게 되는 거에요. 아주 깔끔하게 다 죽여줄게. 다 죽여줄게. 여기 한명도 예외 없게 해줄게. 모조리 다 죽여줄게. 그리고 살리는 것은 내가 죽고 난 뒤에 내 백성 내가 알아서 살려줄게.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 여기 믿을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요.
이제 남은 시간 그 이야기를 합니다.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믿지 못할 이야기만 예수님께서 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 듣고 어떻게 살 궁리했던 사람들은 모조리 다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손을 들어버리죠. 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해서 주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것도 다 떨어지게 한다는 사실. 엘리야가 할 일을 우리가 협조한다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그 예수님을 못 믿어요. 왜냐하면 타인이기 때문에. 내 몸이 아니잖아요.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야 되는데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해야 되는데 지금 예수님 말씀은 너는 못하고 내가 타인지요, 예수님 내가 한다고 할 때에 그냥 하시면 되는데 믿느냐고 이야기하거든요. 뭔가 내 쪽에서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으로 또 뭔가 지시를 요청을 하는 느낌을 준단 말이죠. 그런데 네가 믿느냐 하는 요청까지 우리는 못 합니다 라는 말이 뻔한 거에요. 뻔한 거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한수 배웠는지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주도권을 그거는 “에이~ 아시면서. 주께서 아시잖아요. 내가 주님 찾아 갔습니까? 십자가 이후에? 주님이 찾아 왔잖아요” 주님이 찾아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미 나를 건졌다는 뜻이잖아요. 아시면서 이런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이야기조차도 우리에게 위로가 안 되는 이유가 안 찾아오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 점을 이제 한번 생각해봅시다. 구약에 나옵니다. 전도서 7장 어제나 오늘이나 주님이 나한테 온 적이 없어. 나는 주님 본 적도 없고 만난 경험도 없고. 권사님한테는 등만 보여주고 슥 지나갔다고 하는데. 우리가 예수님께서 오셔도 우리가 못 알아보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 하면은 육 더하기 영은 이게 성령의 사람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이게 틀렸어요.
육 더하기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육 더하기 죽은 육이 성령이 돼요. 죽은 육. 예수님이죠. 육은 우리고. 우리에게 자꾸 이 육을 예수님이 십자가로 찾아와야 되는데 우리는 이 육을 앞에다가 무슨 생각하느냐 하면은 살아있는 육이라고 본거에요. 살아있는 육. 살아있는 육이니까 영이 찾아올 때 살아있는 내가 확인 가능하다고 보는 거에요.
눈 달려있어서 뭐할 건데. 감각이 있다는 말은 누가 날 찾아오면 우리가 그 찾아옴을 느낀다는 말은 우리가 안 죽고 살아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 육을 살아있다고 보지를 않아요. 죽었다고 본거에요. 아무리 누가 다녀가도 죽은 자는 누가 다녀간 것을 감각이 없게 된 거에요.
그러면 주께서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죽음을 모르잖아요. 우리는 살았다고 우기기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생각을 죽어도 못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육으로 오셔가지고 합류가 되어버리면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죽음을 모르겠는데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나의 스냅사진, 확정된 내 모습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린 육에서 그걸 발견케 하는 거에요.
십자가 죽어서 부활해서 예수님 아는 게 아니고 십자가 달린 채로 메시아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백부장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부활되기 이전에 아주 사흘 안 지났어요. 되기 이전에 십자가 달린 거 보고 하는 말이 저 분은 우리의 메시아다. 저 분은 진정한 의인이다 라고 고백한 백부장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올 거에요. 전도서 보기 전에 한번 보고 갈게요. 저는 20년 전인가 그 대목을 공부하면서 놀래버렸어요.
마태복음 17장 54절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뭐였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지금 여기서 예수님 부활한 거 아니에요. 그냥 십자가 달려있어요. 십자가 달려있는 거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긴 사람이 백부장 있고 또 유명한 사람 있어요. 달린 강도.
여러분이 강도라고 생각하고 한번 사고실험을 해보세요. 예수님 옆에 십자가 달렸고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도 강도 짓하다가 걸려가지고 같이 달렸다고 칩시다. 우리는 거기서 활짝 웃겠습니까? 아 이 대목이었구나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한쪽 강도가 “오늘밤에 너 낙원에 있으리라” 하는 바로 이 대목이었네. 아! 이런 시추에이션 얼마나 기다렸다고~ 하면서 기다립니까? 실제로 한번 당해봐요?! 몸서리칩니다. 주여 이 방법 아니면 없습니까? 이렇게 나와요.
우리는 장담 못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괜찮은 실습을 통해서 내가 뭔가 해낼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주께서 다 좌절시킵니다. 성령은 다른 게 아니에요. 성령께서 우리는 살았다고 우기는 가운데서 죽은 예수님을 그래서 갈라디아서 장 아닙니까. “십자가 눈 앞에 보이거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는 이야기, 그 십자가 못 박혔다는 그것이 내가 미처 경험하지 않는 진짜 내 모습을 미리 중첩해서 보여줬다고 받아들이도록 성령께서 오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주님이 이렇게 오시는 거에요. 주님이.
주님이 멋들어지게 오는 게 아니고 아 이미 나 죽었구나. 주님이 오시게 되면 살아있는 주님을 만났다가 아니라 내가 죽은 자구나 하는 사실. 내가 중첩해서 죽었고 만약에 산 게 있다면 내가 산 게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려내는 방식으로 하루 세 끼 주시고 일하게 하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과 시선을 같이 하는 거에요.
독수리 안목을 이 세상이 다들 죽은 자 맞구나 라는 것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식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남은 할 일은 뭡니까? 내 몸이 죽는 이유를 알리기 위해서 아직도 우리의 육신의 활동 목숨 주시고 활동을 계속 하는 거에요. 왜 내가 죽어야 되는가? 같은 말로 왜 예수님이 내 대신 돌아가셔야 되는가? 그거는 뭐 죄를 짓기 위해서. 죄를 내놓기 위해서고 그 죄를 주께서 어떻게 처리했느냐를 날마다 환란 가운데 어린 양의 피로 씻기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자, 그런 이야기하면 쉬운데 이 본문을 해석 한번 해봅시다. 전도사 7장 1절부터 2절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절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모든 인간 죽는다는 교훈 받으면 되지 뭐 어렵냐 하는데 문제는 뭐냐? 이게 구약에 있거든요. 구약에 초상집이라고 하는 것은 신약에 오게 되면 구약 전체가 완성이 되어버려요. 이 세상 전부가 다 초상집이 되어버립니다. 여기 초상집의 주인공은 역시 죽은 자가 주인공이죠. 이 초상집에 가는 게 낫다. 앞으로 잘 대비하라 구약입니다.
신약은 이미 네 초상은 치뤘어. 너는 장례 치뤘어. 신약입니다. 바로 신약성경의 완성이라는 것은 구약에서 마치 인간에게 어떤 육적인 가능성을 내비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지적하시고 인간의 힘으로서는 말씀을 지켜서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 생활하면서 이 전도서를 보고 또는 구약 성경을 우리는 대해야되는 거죠. 대하면서 우리는 뭘 느낍니까? ‘역시 파티보다 초상집 가야지’라는 생각을 가지지요. 그게 바로 죄가 된다는 거에요. 이미 초상 치뤘는데 무슨 초상집을 가요. 어떤 집에 가도 초상집에 가도 내가 죽은 자고 잔치집에 가도 내가 죽은 자라는 인식이 전도서 7장 1절과 4절에 이미 성취성이 이미 우리 안에 포함된 거에요.
왜? 그래서 예수님의 성취가 되니까요. 예수님은 엘리야로서 이미 우리를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께 이미 돌렸어요. 이미 돌렸습니다. 돌리고 난 뒤에 이미 우리를 거기에 합세시킨 거에요. 그러면 우리의 관점은 뭐냐? 우리의 관점은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12제자를 전도했다 하잖아요. 예수님이 12제자를 전도했잖아요. 마태복음 10장 11장에서. 이걸 바꿔도 괜찮아요.
우리가 예수님을 전도하라고 보낸 것하고 똑같은 같은 안목이기 때문에 이게 성립하는 거에요. 예수님. 왜? 세상 지옥입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주님 가서 좀 전도하시면 안 됩니까? 이 심정은 예수님께서 성령 오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심정으로 그걸 보낸 거에요. 그때 제자들은 몰랐어요.
세상이 이미 심판 속에 있어서 오직 내 백성 건지기 위해서 심판을 인정하는 자만 건진다는 이 사실을 차원에서 주께서 보내셨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나중에 성령을 받고난 뒤에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죽음이 내 죽음이고 십자가 죽음으로 내가 이미 주님의 스냅사진, 흑백사진 찰칵하는 사진에 이미 모든 시간이 동격으로 독수리 날개 함께 있음을 알 때 우리는 예수님 보고 지시할 수는 없지만 아 이 마음이었구나. 주께서 세상에 12제자 보낼 때 세상이 이미 맛이 갔다는 것을 뻔히 확정하시고 주께서 보내셨다는 사실을 이제는 아는 거에요.
목사님 이렇게 알면 우리한테 도움 되는 거 뭐가 있습니까? 그렇게 알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주눅 들지 않고 내 인생에 대해서 두려워하지도 벌벌 떨지도 않지요. 확정되었으니까. 제가 오후설교 때 액자 이야기 기억납니까? 액자 하나 만들라고 했지요. 액자에 내용이 뭡니까? 너 실수중이야. 어떻게? 단호하게. 가로 열고 기죽지 않고. 가로 열고 일체 부러움 없이. 너 실수 중이야. 너 인생 실수하고 있어.
이렇게 단호하게 지적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악마한테 약점 잡힐 일이 있다? 없다? 없지요. 주님과 사진 같이 찍었는데 뭐. 주님과 사진을 같이 찍어버렸잖아요.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악마로부터 약점 잡힐 일이 없다니까요. 악마한테 약점 잡힌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칸트 같은 사람. 계속 네 마음에 양심이 있다면 바르게 살아야지. 이게 약점이에요 이게. 이게 약점이라고요.
모든 것을 묵살해버리는데 뭐. 우리가 할 것도 없고 또 할 재주도 있다? 없다? 할 재주도 없어요.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기 나름이지 우리가 할 건 없어요. 이미 세상은 끝났어요. 그러니까 너는 실수중이야. 또는 제가 한 마디 더했어요. 너 실패하고 있어. 돈 잘 벌어가지고 룰루랄라 신바람 났는데 돈 잘 버는 그 현장에 가가지고 너 지금 실패하고 있는 중이야.
그럼 저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 뭐야!” 이럴 거 아닙니까. “나 성도야” 혼자 미쳤다 혼자 미쳤어. 욕 바가지 바가지 얻어먹지. 이게 왜 중요하느냐 하면은 우리 일상에 사람을 만나잖아요. 만날 때 기죽지 말고 주눅 들지 말고 부러워하지 말고. 부러워하면 지는 겁니다.
부러워하지 말고 아 나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지 말고 주일날 설교처럼 잠깐만 뒤돌아보세요. 꼬리 한번 봅시다. 여우 꼬리인지 예수님 복음 꼬리인지. 주님의 긴 꼬리 살랑살랑 흔들면서 마음껏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유일한 자유자는 이글(eagle), 독수리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자유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독수리 날개 업어서 이 세상 자체에서 우리를 구원했던 주의 말씀이 이제는 우리 자신에게 유일한 현실이 되고 실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말고 모든 일을 주께서 활발하게 벌리고 있는 이 심판에 대해서 박수치고 찬송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