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7장 19절 (정오의 그림자) 2300606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7장 11절에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초점이 주께서 물으시는 것이 뭐냐? 9명 “어디 있느냐” 분명히 예수님이 볼 때 10명 왔어요. 10명 왔는데 9명은 없고 10명이 몇 명 됐느냐 하면은 1명 되었어요. 여기 빠진 사람이 9명이 빠졌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런 뜻이에요. 잃어버리고 난 뒤에 보이는 것. 이 9명의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게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건강한 자기 모습을 만나러 온 거에요.
그 말은 인간이 예수님을 그 현장에 같은 시대에 같이 있어도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는걸 방해하는 게 뭐냐 하면은 본인이 기대한 희망이 예수님 만나는 것을 차단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괜찮아진 자기 자신을 만나고 싶었던 거에요. 그래서 오늘 여기 17장 11절 12절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과연 만났느냐 하는 겁니다.
만나서 예수님한테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듣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언어를 듣는 거죠. 언어를 듣고 지시를 따랐는데 과연 예수님을 만났느냐? 잠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만은 만나고 곧장 헤어졌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0명의 문둥병자가 올 때 주께서 그들을 그들 자리로 돌려보냈습니다. 마치 나아만 장군이 왔을 때 엘리사가 안 만나고 그냥 돌려보내는 것처럼요. 나 만날 필요 없다. 그냥 가거라.
그러면 그 9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할 때 무엇을 원했는지. 어떤 것을 원했는지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안 만나주고 돌려보낼 때 그때 확실하게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 드러나는 거죠. 여기 19절에 보면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라고 되어있는데 예수님을 만날려면 그냥 못 만나요.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9명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병 낫고자 할 때 그게 믿음이 아니었다 라는 것을 한 명이 돌아옴으로서 들통나버린 거에요. 믿음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면 이 차이점, 9명과 1명의 차이점을 의도적으로 주님께서는 분리를 시켰습니다. 주님께서 조치를 해가지고 9와 1사이를 갈라낸 거에요. 주께서 갈라낸 거에요.
자, 갈라냈을 때에 1명과 9명의 그 차이점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왔을 때 그들은 무엇을 자인했느냐 하면은 자신이 스스로 병 고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찾아 도움 받으러 왔지요. 무능력자. 이 무능력함을 주님께서는 뭘로 바꾸느냐 하면은 불가능함으로 전환시킵니다.
어렵지요. 무능력하고 불가능하고 같은 말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같은 말이 아니에요. 이게 무능력은 불가능이 아니에요. 나는 안 되지만 주께서 가능할거라고 생각해서 찾아 온 것이 무능력함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 9명의 문둥병자가 무능력함으로 왔는데 주님께서 이걸 뭘로 바꿨다 했습니까? 방금 뭐로 바꿨다 했지요? 불가능함으로 바꿨어요. 내가 무능력한 자가 아니고 내가 불가능한 자라는 인식으로 전환되어버린 거에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능력함에서 불가능함으로 이것이 제물,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되는 거에요. 지금 여기 누가복음 17장 14절에 보면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했지요.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 하는 것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8장이나 이런데 보면 나오는 거 있어요. 레위기 14장 같은 경우에. 무능력함을 불가능함으로 전환시키면서 구약에서 이 불가능함을 어떻게 묘사하고 표현됐느냐 하면은 제물로 표현했고 그 제물은 피를 흘릴 제물이에요. 거기서 피를 생산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흘린 피, 제물의 피 또는 어린양의 피, 피라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 (인간은 무능력으로 시작하거든요. )내가 능력이 없으니까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 그 말 자체가 이게 어느 세계냐 하면은요 믿음 밖의 세계에요. 믿음 밖의 세계. 믿음 밖의 세계인 거에요. 하나님이 능력 있는 분이니까 어려울 때 도와주세요 이게 전혀 믿음이 아니었던 거에요.
그럼 믿음의 수준이 될려면 뭐냐? 무능력함에서 어디까지 나와야 해요? 내가 불가능함에 들어가야 해요. 불가능함이 되어버리면 무능력하면 “도와주세요”가 되잖아요. 불가능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도와주세요” 라고 할 입장이 안 되는 걸 발견하는 게 불가능함이에요.
믿음은 어디서 생기는가? 거대한 톱니바퀴. 엄청나게 큰 톱니바퀴. 톱니바퀴의 특징은 무정하다는 것. 감정도 없고 봐주는 것도 없고 무심코 그냥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톱니바퀴 속에 손가락을 이렇게 집어넣으세요. 그러면 기계가 주의하세요 손가락 들어갔습니다 이런 말을 해줍니까? 안 해줍니까? 안 해주지죠. 그냥 거대한 기계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는데 톱니바퀴는 인정사정 없이 그대로 들어간 손가락을 완전히 절단시켰습니다.
그때 생기는 것이 뭐냐? 믿음이에요. 믿음은 이 세상 모든 일이 일체 나의 일이 아닌 것을 발견하는 게 믿음이에요. 이 세상 모든 일이 나의 일이 아닌 거에요. 나의 일이 아닌데 인간은 주제넘게 하나님의 일에 끼어든 거에요. 인간은 불가능한 세계인데 자기 아쉬운 거 있다고 부탁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 무능력함을 불가능함으로 옮겨서 제물로 보여줬어요. 제물이 될려면 율법에 의한 제물이거든요. 율법이 있어줘야 돼요.
율법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율법이 피로서 이 땅에 등장하는데 제물을 보이라 할 때에 오늘 14절에 “주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무능력함을 호소하면서 도와달라고 하지요. 13절 14절에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했어요.
자, 제사장에게 몸이 보이라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제사장들은 율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문둥병자가 치료되고 난 뒤에 치료된 문둥병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있습니다. 흐르는 물 위에서 새 두 마리 잡고 한 마리 잡으면 피 생기죠. 피를 한쪽에 하면 새는 좋다고 피 바르고 그냥 창공으로 날라가는 그 모습이에요. 제물이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새가 두 마리에요.
자, 새가 한 마리 아니고 두 마리 되어버리면 처음에 있는 새와 나중 새와 처지가 달라요. 차이가 납니다. 왜 문둥병자가 문둥병 됐는데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깨끗하게 되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문둥병 되는 것도 본인의 잘못이 아니고 첫 번째 새에서 두 번째 새 사이에 절차가 과정이 발생돼요. 과정이. 이렇게 했는데 이렇게 된다는 그 간격을 보여주는 거에요. 간격 보여줄려면 한 마리가 되면 안 되고 두 마리를 보여줘야 되지요.
그러면 문둥병자가 나 문둥병 걸렸다 할 때 문둥병자는 뭐 생각하느냐 하면은 ‘나 나아야 돼. 이 저주 받은 병 이거는 나아야 돼.’ 자기 생각하겠지요. 자기 생각하는 거 믿음입니까? 믿음 아닙니까? 믿음 아닌 거에요. 믿음은 뭐냐 하면은 그 간격에 간격을 보여주는 기능자로서 하나님의 일에 편입될 때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용당했어. 내가 이용당했어. 주님한테 완전 철저하게 활용당했어. 뭐야 내 신세.
그러니까 남들은 멀쩡한데 본인은 문둥병 걸렸다. 그래서 자기는 답답했는데 하나님께서 문둥병 걸리게 해놓고 그 다음에 낫게한 거에요. 전도서에 나오지요. 3장에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 있고 태어날 때 있으면 죽을 때 있고” 태어날 때 죽을 때 간격 생기잖아요. 태어날 때 죽을 때 간격 뭐냐 하면은 나 태어났다 나 죽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살려줬다. 지금 본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모든 것이 누구 일이 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하나님의 일이에요.
그 거대한 톱니바퀴는 너무나 자체적으로 완벽해서 우리가 거기에 끼어들면 안돼요. 안돼요. 이게 믿음입니다. 믿음하고 난 뒤에 알지요. 우리가 끼어들면 우리는 손가락 부러집니다. 산재 신청해봐야 소용없어요. 그냥 들어가면 부러져요. 부러짐으로서 새삼스럽게 우리가 아는 사실이 뭐냐 하면은 내가 이 세상에 내가 할게 아무것도 주님께서 주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내가.
여러분 이 이야기 듣고 속이 시원합니까? 아니면 찝찝합니까? 이게 속이 시원해야 돼요. 그동안 여러분 뭐 했습니까? 용을 썼지요. 무슨 용? 9명 문둥병자처럼. 저 무능합니다 부족합니다 온갖 겸손의, 들은 멘트는 다 해가지고 낮추고 또 낮춰가지고 하나님 제 형편이 이 지경됐는데 어떻게 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낫게 해주실 수 있잖아요. 안합니다.
“네가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
제사장이 뭐라고 합니까? 당신들 여기 왜 왔습니까 하면 예수님이 가라 했어요. 그분이 왜 가라고 했지? 혹시 문둥병자와 관련된 어떤 제물 있습니까? 아! 그 대목이구나. 레위기 14장 문둥병자가 병 들었는데 누가 와서 하나님의 긍휼이 낫게 해줬을 때는 깨끗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두 마리 새를 잡아라 하는 아 그 제물과 관련해서 예수님이 그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라는 것을 기대하면서 예수님께서는 10명 보고 가라고 한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문제 낼게요. 10명이 다 제사장에게 갔습니까? 아니면 한 명이 돌아왔습니까? 한 명이 돌아왔지요. 왜 돌아오지요? 한 명이 왜 돌아옵니까? 뭘 발견했느냐 하면은 이걸 발견한 거에요 한 명이. 진리는 우리 행위들을 통과하면서 우리 자신을 철거한다. 철거한다 이거 별표 두 개. 진리는 우리 행위들을 통과해요. 통과. 통과하니까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우리는 배관이 되겠지요. 배관. 수도관 배관 있지요.
우리를 통과하면서 우리가 구멍이 뚫리지요. 통과하면서 진리가 통과하는 거에요. 통과하면서 우리 자신을 뭐하느냐 하면은 철거해버려요. 철거가 안 된 사람이 몇 명? 9명. 철거된 사람은 몇 명? 1명.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누군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9와 1을 나눠요. 분리를 시켜버립니다.
그리고 돌아온 1명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믿음이라고 이야기했어요. 믿음. 그렇다면 9명이 문둥병 걸렸으니까 도와주세요 라는 이것은 믿음입니까? 믿음 아닙니까? 이건 믿음이 아니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게 아니고 괜찮게 나아져버린 철거할 필요 없이 철거를 왜 해 더 좋게 됐는데. 병 나은 괜찮아진 자기 자신을 예수님을 통해서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거에요. 본인이 철거당해서 온 게 아니고 더 훌륭해진 나를 예수님을 통해서 건지기 위해서 그들은 예수님 만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게 아니고 더 훌륭해진 자기 자신을 만나고 바라보고 싶은 거에요. 그걸 얻고 싶은 거에요 인간은.
방금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1번과 2번으로 나누어보겠어요.
1번 나에게 손해되는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2번 주님 나는 어떻게 해야 무너질 수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무너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철거될 수 있습니까?
1번과 2번 문장. 1번과 2번 문장이 확연하게 차이나지요. 어느 것이 좋다고 묻지를 않겠습니다.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걸 묻지 않겠어요. 제가 차이 나냐고 물어보는 거에요. 분명히 차이 나지요.
세상 사람들은 2번을 통해서 1번이 되고자 하는 거에요. 세상 사람들 특징은. 9명의 특징은 2번을 통해서 1번이 되고자 하는 거에요.
그런데 1명은 1번을 통해서 2번이 되는 거에요. 여기 1명이에요.
이 방향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해서 19절에 뭐라고 합니까? 구원. 구원은 내가 주님이라는 진리가 통과하는 배관통이 되는 거에요. 배관통. 하나의 통로가 되는 이게 구원이에요.
나는 어떻게 하면 무너질 수 있습니까? 주님의 대처는 뭐냐? 너에게 손해되는 일이 일어나면 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내가 문둥병 환자가 되는 거에요. 문둥병 환자가 되는 것. 물론 10명 다 예수님을 만난 줄은 몰랐어요. 둘 다 똑같이 1번에 관한 거에요. 나에게 손해되는 일 일어나면 안됩니다. 무너져서라도 나에게 이익이 돼야 됩니다 라는 이런 계산. 내가 무너지더라도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일어나야 된다.
무너지는 것이 고난이라고 한다면 고난 감당하지 뭐. 결과적으로 나한테 잘되면 되지. 숫자 보세요. 9:1입니다. 9는 거의 대부분이고 1은 거의 드물다는 아까 이야기한 무능함에서 불가능함을 표시한 거에요. 불가능함.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거에요. 불가능함이 예수님을 경유하니까 주께서 불가능함이 가능해졌는데 이것은 처음에 우리가 생각한 불가능함이 아니고 애초부터 우리는 불가능함 속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예수님을 통해서 발견한 거에요.
너무 어렵게 했는데 쉽게 하겠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있는데요 인간 주변에 배치 물건, 집, 사물 여러 가지 가구 사람들 이 배치는 이 모든 배치는 나를 증명하기 위함이에요. 인생 살아오면서. 우리 집에 저런 가구가 있어.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다. 이런 내 배치를 통해서 나란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고 내가 누구냐를 다지기 위해서 배치를 해요. 인간은 그래요. 그러면 이렇게 인간이 자기를 증명하면서 배치를 하다보면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 주변의 배치를 우리가 가로막는 거에요. 예수님이 예수님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냥 예수님 찾으면 되지.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 찾아버리면 멀쩡한 잘난 나를 위해서 멀찍이 예수님을 여기에 배치를 해버려요. 이것은 내가 설치해놓은 구조에 예수님은 숟가락 하나 놓는 식으로 그냥 이런 일인데 이런 일은 예수님의 일이 아니지요. 이건 나의 일이죠.
우리가 나 하나 증명하고 변론하기 위해서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주변에 배치하는데 온 신경을 여기 다 쓰는데 그거 신경쓰다보니까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배치되어 있지? 이거는 우리가 지금 관심이 없어요. 여기 누가 있느냐 하면은 바로 한 명의 문둥병. 제사장에게 가라고 했는데 말도 되게 안 들어. 제사장에게 가면 되는데 안가고 누구한테 왔습니까? 예수님께 와버리죠.
‘제사장한테 갈 거 뭐 있노. 예수님이 죽은 제물이잖아’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 이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래. “제사장에게 가라.” “예.” 가는데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신 그 말씀, ‘왜 가라고 했지? 혹시 가라고 하신 그분이 바로 진짜 오시리라 하는 그 율법의 완성된 제사장이 아닐까’ 하고 고상한 말로 빠꾸해가지고 돌아온 거에요.
돌아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는 당신의 배치물이 되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배치물로 나는 내 인생 더 이상 끝내겠습니다. 예수님의 한 일에 나는 손가락 하나 들어갈 필요조차 없다는 사실, 내가 문둥병 되도 주의 일이고 그걸 낫게 해도 주님의 주님 되기 위한 간격을 보여주는 일에 저희를 사용해주신 것에 대해서 고맙고 감사하고 기쁘고 그래서 온 거에요.
그러면 9명과 1명의 차이는 뭐냐 하면은 다른 사람은 자기 원하는 대로 ■1 몸 나았다고 기뻐하며 돌아갔고 이 한 명은 ■2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께 고맙고 주님께 기쁘고. 고마운 분이 나타났고 나는 그 고마운 분 옆에 있기만 해도 좋은 배치물이 되었다는 이 사실. 이게 바로 믿음의 관계입니다. 이게 믿음의 관계에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미리 보게 되면 20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2절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라고 되어있지요.
지금 까지 이야기한 것을 이것과 연관시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인간끼리의 어떠한 삶의 조건은 아무 문제거리가 안돼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빌딩에 사는 사람이나 낮은 쪽에 사는 사람이나 지금 이게 아무 문제가 안돼요. 안되고 재림해서 주께서 인자의 날, 재림의 날 바라보면 이게 이 사람이 어떤 조건에 있던지 어디서 전세 사기를 당했던지 월세 살던지 상관없이 이 조건은 문제될 게 없습니다. 문제될 게 없잖아요. 이게 인자의 날이란 말이죠.
문제될 게 없는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닦달하고 우리 자신에게 시비 겁니까? 이게 뭐야 내 인생. 이게 뭐야. 남들은 저렇게 잘 사는데 왜 우리 자신에게 화를 내고 분노하고 왜 시비 걸어요? 지금 믿음이 없어서 그래 믿음이 없어서. 주님의 옆에 배치물로 있으면 되는데 자기가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그 고집이 있어요. 예수님 이용해서 자기가 획득할 것 얻겠다는 식이에요. 그거 얻어서 뭐 할 건데?
오늘 유투브 두 번째 강의, 강하게 될려는 자와 약하게 될려는 자 그것에 대해 말씀드렸어요. 세상 전부가 못 강해서 환장을 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고 날마다 예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죽은 내 몸에서 뭐가 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피어난다. 이것은 방향이 약해져도 괜찮다는 거에요. 동영상보면 나올 겁니다. 유현상 씨가 불렀던 ‘여자야 약해지면 안돼’ 해놨어요.
왜 예수님이 인자의 날에 주님께서는 인간들끼리의 조건은 묻지도 않는데 왜 우리가 이 조건을 우리에게 묻느냐 이 말입니다. 자, 거기에 대해서 쉬운 듯이 어려운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과거에서부터 내려온 모든 기억들이 층에 쌓여서 현재가 되어버리면 과거는 기억 속에 사라지니까 현재 기억만 표피처럼 있어요. 현재 기억 밑에 과거 기억 들어갑니다. 그런데 과거, 더 과거, 더 더 더 과거 어디 쌓이느냐 하면은 이 밑에 쌓여요. 더 더 더 과거는 이 밑에 쌓이는 거에요. 계속 쌓여나가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들은 지금까지의 축적된 기억에 바탕을 둔 욕망으로서 세상을 읽는다. 이게 세상관, 현실관, 인생관입니다. 인간들은 지금까지 축적된 기억에 바탕을 둔 욕망으로 그 자기 시대를 읽어버려요. 그러니까 12살 때 옛날 집에 살던 천막에 앉아 살던 그걸 여러분들이 지금은 기억 안 나지만 꿈속에 보면 나와요. 그때 삼촌과 같이 까불고 놀고 강아지 키우면서 있을 때 그때 여러분들 꿈속을 놓치지 말고 한번 찾아보세요. 물어보세요.
너 지금 존재 의미가 무엇이며 너 사는 목적이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가 그걸 물어보세요. 물어보면 나옵니다. 나 공부만 열심히 할래. 또 물어보세요. 왜 공부 열심히 해? 공부 열심히 하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나 공부 잘한다고 굉장히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칭찬해 라고 할 거에요. 그게 성경에 나오는 존재의 의미입니까? 아니지요. 아닌 거에요 이거는.
인간은 자기가 살아온 만큼만 봐요 세상을. 요새 20대 30대 살아가는 거 보세요. 복음 전해도 안 받습니다. 누적된 게 있어요. 유투브 보면서 컴퓨터하면 게임하면서 누적된 자기 희망사항이 있어요.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욕망. 외부에 흐르는 욕망인데 그 욕망은 뭐냐? 남한테 인정받는 거라고 했지요. 내가 수백 번 이야기했어. 내가 남한테 자랑거리가 되고 인정받는 욕망을 본인이 거부를 못해요.
그러면 문둥병자 10명 왔습니다. 그냥 마음속이 비어있겠어요 아니면 그 사람이 살아왔던 모든 과거의 축적된 것이 담겨서 예수님을 찾는 욕망으로 작용했겠습니까? 예수님 찾을 땐 자기 욕망 있을 거잖아요. 욕망이라는 것을 나쁜 의미로 생각하지 마시고 나는 세상 이렇게 사는데 그 세상 예수님이 좀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단 말이죠. 12살 애가 교회 갈수도 있어요. 여러분 가운데 기독교 가정 같으면 갔잖아요. 가서 기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어서 제 목을 치세요 이런 거 안했잖아요. 그런 거 안하잖아요. 이번에 시험 반에서 1등 하게 해주시고 이런 거 좋은 옷 입게 해달라 하고 그런 거 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요 인간의 현재 속에 지금 나에게 체험된 것이 기껏 여기 쌓여요. 여기 쌓인 이 체험 이걸 누가 마중을 나오느냐 하면은 밑에 있는 과거의 기억이 이걸 딱 붙들어요. 그래서 둘이 결합을 해요. 둘이. 그런데 이걸 붙들면 뒤에 여기에 발목 잡듯이 그 과거의 과거 더 과거 욕망을 또 붙들어요. 그걸 또 옆에서 붙들고 있다고요. 마치 시추하듯이. 옛날에 있었던 것이 다 기어나오는 것처럼. 다 나오는 거에요 이게.
그래서 제 말은 인간은 자기를 못 벗어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못 벗어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 일만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 일만 생각한다. 그러면 이게 아까 이야기한 무능력함이죠. 무능력함이 불가능함. 너무 말이 비슷해서 어려워요. 제물 십자가의 피로다 완성하거든요. 그러면 어디까지 오느냐 무능력함에 머물고 있습니다.
무능력함에서 불가능함으로 들어가버리면 여기서 뭐냐? 인간은 자기 일만 생각한다 이 자체가 손가락이 절단됩니다. 손가락이 절단될 때 이 브릿지 이 다리가 뭐냐 하면은 믿음이에요. 내가 내 자체 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거에요. 이런 식으로 12살 30, 40, 50, 70이 되도 그건 시간만 보냈을 뿐이지 다 부질없는 것, 아무 소용없는 거에요.
내가 소용 있어버리면 내가 의미가 있어버리면 내 안에서 내가 무능력함은 보이겠지만 이건 겸손이거든요. 불가능함이 내 속에서 내게서 발현되지를 못합니다. 불가능함이.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일만 생각하니까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들은 변하는 것들만 해석한다. 인간들은 변하는 것들만 해석한다. 자기 해석이죠. 문제가 뭐냐? 인간은 자꾸 해석한다는 거에요.
20대 30대, 걔들 고민 많습니다 지금. 왜 고민 많은 줄 알아요? 해석을 하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욕망과 현실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고민 되게 많이 합니다. 집에서 논다고 노는 게 아니야. 고민 늘어지게 고민. 얼마나 고민했던지 밥도 못 먹고 야위어가요. 그런데 이 고민은 뭐냐 하면은 이 무능력함에서 불가능함으로 들어갈 생각 안하고 무능력함에서 드디어 능력 있음으로 돌리는 거에요. 능력 있음으로. 이게 9명이에요. 9명. 봐! 나 이제 문둥병자 아니잖아 하고 돌아갑니다.
자, 그러면 지금까지 문제만 이렇게 했는데 해결책을 지금부터 제시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해결책을 어떻게 제시하는가. 일단 그림을 하나 그릴게요. 십자가에서 칸막이 쳐져있고요 여기서 뭐가 뿜어져 나오느냐 하면은
㉮세상에 있는 모든 연관된 모든 관계망들이 결국은 십자가 하나와 보이지 않는 막을 통해서 배후에 십자가와 연결되어있어요. 모든 게. 이 땅에서 어떤 심지어 마귀조차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다 연결되어있어요. 다 연결되어있다고요. 여기 007 영화나 미션 임파서블 보면 그 주인공이 레이저 피한다고 막 용을 쓰잖아요. 금고 터는데. 촘촘하게 막이 되어있습니다.
㉯여기 걸리면 이제 감전되는 거에요. 걸려드는 거에요. 자, 걸릴 때 어떻게 걸리느냐? 여기서
㉰한방치료가 시작됩니다.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말씀을 가지고 침을 놔요. 그러니까 복음이 침입니다. 침을 놔가지고 우리 마음속에 딱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을 때 뱅글뱅글 돌리면서 집어넣어요. 침을 딱 넣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틱틱 하고 뭔가 침을 넣는데 여기서 구라 들어갑니다. 구라. 한방 구라 들어갑니다.
㉱침을 넣게 되면 치료가 되는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그 맥 또는 기 구조의 혼돈과 무질서를 침을 통해서 감지해내는 거에요. 감지하는 것. 어디서 지금 조화가 안 된다. 뭔가 삐걱거린다는 것을 침을 집어넣어가지고 파악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아프기 때문에 병원 왔거든. 아프기 때문에 병원 왔지요. 건강한 사람은 병원 안 올 거 아닙니까. 딱 집어넣어가지고 이쪽에 깨어져버린 구조, 체제. 건강체제가 깨어졌잖아요. 깨어짐과 침이라는 그 물질 사이에 만남을 통해서 능숙한 의사는 그걸 감지해내는 거에요. 영화에 보면 나와요. 걸음걸이만 봐도 아 저 사람은 임신했다. 임신 안했다 대번 알데요. 영화니까.
주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아까 그림 봤지요. 십자가에서 다 이뤘어요. 다 이뤘는데 우리는 과거의 욕망에 있어가지고 우리는 다 이룸이 멀었어요. 우리는 내 욕망이 무한이에요. 이거는 세상 전부해도 욕망 채우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내 선에서 해결할려고 끙끙 앓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 다 이루었다에서 여기 베일이 있어가지고 안 보여요.
모르는데서 오는 말씀의 관계망에 딱 걸린 겁니다. 걸리면 침이 말하죠.
㉲네가 문제 많다. 너 안에 철판 들었네. 안돼 그거 뽑아내야 돼 라고 진단 들어가죠. 진단. 그 진단 누가 하겠습니까? 침을 집어넣은 말씀을 주신 예수님이 하신 거에요. 예수님이. 그러면 건강한 사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건강한 사람이 없어요. 이게 중요해요. 예수님의 말씀을 집어넣으면
㉳아무도 건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십자가 졌다는 것은 그 누구도 나 이렇게 착실하게 살았어요 내세울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행복은 뭐냐? 우리에게 축복은 뭐냐? 십자가와 연결된 말씀이에요. 자칫하면 이 성경 말씀이 사람은 해석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도로 나한테 가져와요. 이건 본인이 본인을 치료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이거든요.
베일에 가리웠다. 가리워진 그 뒤에 숨어있는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 대해서 뽑아져나온 여기에 감전이 되어버리면 우리 속에 있는 죄가 먼저 반응을 나타냅니다. 관절에 반응하는 것처럼. 우리 속에 있는 반응을 나타내요. 아주 극렬해요. 그걸 제가 교재에 이렇게 했어요. 대항력. 대항력이라는 말을 어디서 배웠느냐 하면은 바로 경부울 물건 나오는 동영상에 나와요. 먼저 선점했던 쪽이 경매 받으면 대항력이 있어가지고 해야 한다는 그 이야기.
㉴대항력 반응을 나타내요. 걸려들었어 너는! 침을 딱 놓으니까 거기서 격렬한 반발이 탁 일어나죠.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참 이 세상의 책들을 다 수집하고 압축해서 진리를 뽑아 놓으면 딱 이 진리에요. 예수는 나와 상관없다. 원초적으로. 이게 바로 우리의 본심이었어요. 이게 본심이었습니다. 모든 인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이 죄인 되지요. 성경에 나와 있잖아요. 그러면 그걸 아 성경 믿습니다 하지 말고 말씀을 가지고 침을 찌를 때 그 티를 내야 돼요. 우리 죄인 됨의 티가 나야 돼요. 그 티가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은 그냥 나 도와주면 되지 근원적으로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입니다 라는 본심이 말씀에 의해서 낚아채야 돼요. 걸려들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진짜 내 얼굴을 봐야 돼요. 진짜 내 모습, 내 얼굴을 봐야 돼요. 나는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했지 예수는 예수고 나는 나였구나 하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본의 아니게 주의 하시는 일에 내가 시건방지게 목사라고 하면서 장로, 집사라고 하면서 내가 주의 일 한다고 손가락 집어넣은 거에요. 목사가 일합니까? 안합니다. 집사가 일합니까? 안합니다. 장로가 일합니까?
㉶어느 누구도 주의 일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하면 안돼요. 왜? 우리는 무능하고 또 무능에서 머물지 말고 우리는 주의 일을 하고 싶어요 해도 이게 주의 일에 보탬이 안 되는 불가능한 자에요. 이게 믿음이에요. 이게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수십 년 오십 년 신앙생활해도 이거 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진짜 신학자 중에 물론 없고요 목사 중에 이거 아는 사람 없어요. 당신 목사인데 뭐합니까? 나 내가 아무것도 안 해요 이런 발언할 수 있는 목사 물론 여기 그런 목사 몇 명 있어요. 있습니다. 사회생활 해야 돼요.
㉸내가 쓸모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옆의 배치물이기 때문에 그런 고백이 나오는 거에요. 주께서 자신의 일만 일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무 일도 안함을 알고 있는 자들을 배치물로 자기 주변에 둠으로서 예수님이 예수님 다 이루심을 만끽하면서 드러내시는 거에요. 뭘 주의 일을 해요. 뭘. 주의 일을 못하는데.
자, 지금까지 한 것 다시 정리해봅시다. 다음에 인자의 날은 너무너무 어려워가지고 이것 정리하고 10분 쉽시다. 병 고치러 왔다 주께서는 죄 사함. 이 원리입니다. 병 고치러 왔다. 왜 네가 병 고쳐야 되는데?
㉹주께서는 병 고치러 온 사람을 죄 사함으로 이끕니다. 무능한 자를 불가능한 자로 만들어버려요.
㉺그럼 내가 구원받은 것을 남한테 이야기할 때 너 어떻게 구원받았어? 하면 이 이야기하면 돼요. 불가능함 이야기하면 돼요. 나 불가능했어. 그럼 어떻게? 그냥 주님의 다 이루심에 감전됐지요. 치익 치익 감전됐다는 순한 말이고 내 손가락 날라갔지요. 내 모든 자존심, 자존감 다 날라가버렸어요.
㉻아무것도 못하고 불가능한 자로 주께서 말씀으로 이어지게 했을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그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7장 19절 (정오의 그림자) 2300606b-이근호 목사
오로지 쓸모없는 일만 하라. 더 강조한다면 놀지 말고. 상상도 못해요. 쓸모없는 일을 부지런히 해야 돼요. 부지런히.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쓸데없는 소리하는 게 아니고 그 이유가 있어요. 나의 이야기가 화살표로 가요. 나의 이야기 → → → → → 주님의 이야기. 아까 이야기했지요. 나이 들면서 계속 욕망으로 자기가 그렇게 살았던 욕망으로 자기를 해석한다 했지요.
자기를 해석하고 내년은 몰라요. 지금 내가 욕망하는 것은 이거다. 내 욕망 그것 뿐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점점점점 해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이게 주님의 이야기로 변해요. 얼마나 신기한지 몰라요. 인간은 열심히 자기 일을 했는데 점점 더 나중에 보니까 주님의 이야기로 변하는 거에요. 이게 긍정적인 게 아니에요. 이게.
주님은 9명과 1명을 분리시키는 분이잖아요.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에 대해서 주께서 철저하게 이걸 놓치는 법이 없어요. 인간은 천국 지옥보다도 지금 눈 앞에 있는 현실 삶에서 자기의 욕구와 욕망, 다 다른데 욕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있던 파충류적인 본능을 욕구라고 하고요. 요구는 타인이 세상에서 날 요구하는 것이 요구고 그 욕구와 욕망의 마이너스 빼기가 욕망이라는 거에요. 남이 요구하는데 내 능력은 안 되고 내 능력에 비어있는 그 결핍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허덕이는걸 욕망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재벌 집에서 요구한 것과 어려운 사람이 요구하는 욕망이 다르겠지요. 너는 미국에 유학 갔다 와서 경영학해가지고 회사를 물려받아라. 이거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거에요. 나는 김밥 장사하겠습니다. 이러면 아버지의 욕망과 첫째 아들의 욕망이 완전히 어긋나잖아요. 그 빈틈을 막내아들이 채워요. 재벌 집 막내아들이 채우는데.
세상은 왜 날 가만두지 않습니까. 왜 가만두지 않아요?? 나는 있는데 이 아버지가 네가 내 명예를 위해 욕망을 위한 배치물 속에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이미 합류되어 있다는 거에요. 이거는 억지죠. 억지고 강압적이에요. 아버지 나 독립할렵니다. 독립하면 너 뭐 먹고 살래? 아파트 내놔라. 차 내놔라. 왜 세상은 이렇게 얽히는 거에요. 얽혀있어요.
어린 초등학교 소녀들 보면 옷 입히는 인형 있지요. 그건 가위가지고 잘르면 되잖아요. 왜 세상은 가위로 안 찢어집니까. 제가 지어낸 말이지만 이런 말이 있어요. 인간의 모든 끝은 슬픔으로 마감된다. 나의 이야기 점점점 이거 슬픔입니다. 이래 살아도 슬픔이고 저래 살아도 슬픔이고 기쁨은 없습니다.
그런데 슬픔으로 끝난다 이건 뭐냐 하면은 허무주의가 되겠지요. 그런데 성경은 보니까 슬픔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슬픔 끝나는 그 뒤 이야기 또 있어요. 그게 뭐냐? 주님의 이야기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다 나를 위해서 이미 확정적으로 만들어놨다. 그 중에 내 백성이 있다. 내 백성은 나는 놓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그러면 어떻게 돼요? 나는 내 욕망대로 해요. 불가능해요. 무능력해요. 그런데 주님의 이야기가 말씀을 통해서 나한테 이렇게 미리 찾아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나의 이야기는 일찌감치 주의 이야기로 지금 이 순간부터 교체가 되겠지요. 교체가 되지요.
자, 첫째 시간에 했던 어려운거 다시 한번 여기서 또 나왔으니까 정리해봅시다. 주님과의 만남 어떻게 성사되는가? 9명의 문둥병자가 주님을 만났지요. 만났는데 못 만났지요. 만났는데 자기 생각만하고 주님을 만난 거에요. 주님을 만날려면 주님 생각이 내 속에 들어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 만난 사람은 9명이 아니고 1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 만나라 한 그 이야기를 제사장 만나라는 그 말씀을 하신 분이 옴으로서 올 때 이미 병이 나았잖아요. 자기 원래 목적은 병 낫는 건데 병이 나아버렸단 말이죠. 나아버리면 자기의 욕망은 발생했으니까 다시 옛날처럼 괜찮은 나로 돌아가면 그만인데 괜찮은 나라는 것이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았던 거에요. 내가 예수님이 누군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 문둥병이 생겼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면 그건 자기 이야기 입니까 주님 스토리에요? 주님 스토리에 내가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게 지금이라면 그럼 내년에는? 후년, 3년 후에는? 주님한테 또 가야하는가? 그럼 맨날 주님한테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그러면 곤란하지 않느냐. 그래서 오늘 두 번째 시간은 뭐냐 하면은 주의 날이 있습니다. ‘주의 날’. 아 주의 날 이거 어렵습니다. 주의 날 어렵기 때문에 쉽게 하는 방법은 정오의 그림자. 정오의 그림자는 pole 막대가 있는데, 어제 대구강의 때 pole 했지요. pole. 하만이 세웠던 장대. 그 pole에서 태양이 정오에 12시 있을 때 그림자가 없어요. 그림자가 없어요.
그림자가 있을 때 가장 태양이 있어요. 해가. 해가 가장 빛날 때 이 땅에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쪽에 없음의 순간이 가장 주님다운 순간으로 있음이 돼요. 없음의 순간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사람들 여러 사람들 만났잖아요. 만나고 사라져버렸어요. 없어졌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말하길 그래 큰소리칠 게 아니지 어디 함부로 율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메시아라고 우겨. 그런 사이비가 한 두명이 아니었어. 시체 있는지 잘 지켜봐라. 군인 보내가지고. 그들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없어졌어요.
그런데 그 없음 그 순간이 주님이 가장 주님다운 순간이에요. 있을 때는 기회였습니다만은 없을 때는 심판밖에 없어요. 주께서 만나게 해줄 때는 믿음이 아니고 만남이에요. 주께서 만났다는 사실이에요. 지금 10명의 문둥병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신학교에서 연구했다가 아닙니다. 직접 만났어요. 만났는데 10명 만났는데 9명은 안 만난 게 되어버리고 1명만 제대로 만난 게 돼요. 주님 품 안에 안긴 게 돼요. 그게 만남이에요. 그런데 그게 예수님 있을 때나 성립이 되거든요. 예수님이 사라져버렸어요.
20절 봅시다. 17장 20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이게 뭐냐?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습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나라는 없다. 없음으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 이것이 예수님의 인자의 날이 완성이 되게 되면 없음으로만 나타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없음으로만 나타나는 주님’. 없음으로만 나타나는 주님이라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은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끝났어요. 시간은 끝났다. 시간은 끝. 시간은 끝났어요.
자, 시간이 끝났으면 그럼 뭐가 남아있겠어요? 시간이 끝나면 공간이 발생되지요. 시간은 인간이 사는 세계에서 과거, 현재, 미래 해와 달과 별이 있으니까 계속 시간은 짹각 짹각 짹각 가요. 내일 있으면 모레도 있을 거고 측정이 되지만 시간이 끝나버리면 끝났다는 말은 예수님이 빠져나간 이 시간은요 측정해봐야 40, 50, 70, 80 살아봐야 활명수 먹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시간이 지나간다고 기회가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끝났어요. 시간 속에 있습니다.
그럼 시간 속 말고 어디 들어가야 되느냐? 공간 속에 들어가야 돼요. 이것이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뭐냐 하면은 ‘예수 안’입니다. 이 어찌 어렵지 않으리요. 지금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할라고 해요. 시간은 지금 흘러봐야 소용없어요. 목사님 아직 시간 안 끝났는데요 하지만 시간이 끝났기 때문에 공간이 찾아온 거에요. 성령 안.
저 보고 어렵다고 하지 마세요. 비난하면 안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어요. ‘십자가 안’.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말했어요. ‘예수 안’. ‘성령 안’. 이게 어려워도 너무 어려워요 이게. 왜 공간으로 오시느냐. 왜 공간으로. 주님으로 오시지 않고 왜 공간으로 오시느냐 이 말이죠. 기다려봐라. 재림이 있지요. 기다려봐. 하지만 그 기다림은 공간 속에서의 기다림이죠. 기존의 시간은 기다려봐도 소용없어요. 시간은 끝났어요.
주님이 없는 이 세상 이 공간, 주님이 사라진 이 공간은 사라진 주님의 공간으로 그대로 유지해요. 그럼 공간이 몇 개 되었습니까? 한쪽 공간은 예수님을 죽여서 그것도 때려죽였지요. 죽여서 예수님이 없는 공간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시간은 잘 흐르지요. 벌써 2023년도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2023년도만 계산하지 예수님이 안 계시는 공간에 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의 심각함은 그들은 전혀 몰라요.
그럼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님 없잖아. 맞아요 예수님이 자기 공간에 없어요. 그런데 왜 예수님이 있다고 하느냐. 사도 바울을 통해서 알려주기를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성령을 통해서 등장했다는 순간 이 인간에 속한 세계는 예수 없는 세계로 규정을 지어버린 거에요. 예수 없는 세계.
자, 공간은 뭐냐 하면은 동그란 거에요. 폐쇄. 출구가 없습니다. 오늘날 젊은 사람들 삶의 특징이 출구가 없어요. 배낭 메고 유럽가고 백날해가지고 취직할려고 애를 쓰다가 들어갔다가 튀어나오고 들어갔다가 튀어나오고 유투브하고 도대체 탈출구가 없어요. 탈출구가. 출구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동그란 거에요. 로마서 5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아주 매정하게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세상에 탈출구가 없는 이유는 한번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천국 바깥으로 못 나갑니다.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가혹하게 표현하느냐 하면은요 지옥의 조건, 지옥의 성격을 똑같이 쌍둥이처럼 박아놓은 것이 천국의 성격이라는 겁니다. 둘 다 쌍둥이에요.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이듯이. 이스마엘과 이삭처럼. 한쪽의 조건과 똑같은 조건으로 한쪽은 지옥이고 한쪽은 천국이 돼요. 지옥에서 못 벗어나잖아요. 천국가면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거지 나사로는 상담할게 없어요. 아브라함님 저 어떻게 하면 더 가난하게 될 수 있습니까? 안돼요. 소용없어요. 지금보다 더 아프게 하는 방법? 없어. 없어. 내가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라 이 공간을 위해서 네가 거기 필요한 현상이 벌어진 거에요. 예수 안이라는 공간을 위해서. 제주도 가면 그런 거 있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게임인데 놀이인데 투명한 튜브에 사람 집어넣고 굴려버린대요. 여기 물을 좀 넣어야 돼요. 물 좀 넣고 이 사람 수영복 입어야 돼요.
물을 왜 넣는가? 마찰 때문에 살이 탈 수가 있어요. 물 넣다 보니까 옷 젖으니까 수영복 입고 타야 돼요. 두 개의 공간은 서로 마주볼 수는 있으나 소통은 안 됩니다. 대화가 안돼요. 대화가. 그런데 투명하니까 살아가는 게 똑같아요. 사도 바울 살아가는 거나 옆집 살아가는 거나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하루 세 끼 먹고 두 끼 먹고 하든지 차이가 전혀 없는데 자꾸 사도 바울은 어젯밤에 천사가 와서 ‘너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라’ 이런 소리를 막 하는 거에요. 이런 소리를.
자, 이제 여러분께 뭐가 좋은지 묻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 네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면 다른 공간에서는 사도 바울이 속하지 않은 다른 공간에서는 무슨 소리를 듣겠습니까. 마귀의 소리를 듣지요. 잘 될 거야. 열심히 노력해봐. 잘 될 거야. 악마의 욕망의 소리를 우리는 수시로 듣게 되는 겁니다. 왜? 구조가, 거기에 대한 운영구조가 똑같기 때문에. 쌍둥이처럼 닮아있기 때문에. 이게 로마서 5장에서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면서 앞에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그 공간 자체가 저주가 온 것처럼 한 사람이 의가 됨으로써 그 의가 된 공간 자체가 온 천지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다.
사도 바울은 아무 상세한 설명 없이 그냥 복음이다 내가 예수님께 들었던 복음이다라고 툭 던져버립니다. 우리는 그걸 공부할려고 해요. 공부해서 이쪽 공간에 이쪽 공간으로 옮길려고 공부를 하는데 사도 바울은 아주 당황하지 않고 냉정하게 이야기합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면 이렇게 너는 이미 성령의 사람이 되었느니라. 성령의 능력에다가 그냥 가볍게 돌려버려요.
끝까지 뭐냐 하면은 우리로 하여금 무능력하고 아무 쓸데없는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규정해주시는 그 고마운 소식. 그러니까 열심히 사세요. 뭘 해도 쓸데없는 일을 우리는 열심히 할 뿐입니다. 여기 지옥 가는 공간에서는 아무리 해도 고통과 슬픔과 걱정만 늘어나지요. 여기 천국이라는 공간은 아무리 일을 해도 감사와 고마움과 즐거움만 가득 찹니다.
왜?? 자기 행동하는 게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에 뭐한다고요? 쓸데없고 쓸모없기 때문에. 오로지 쓸모없는 일에 열심히 하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요. 정말 여러분 감사해야 돼요. 일부러 쓸데없는 짓하지 마세요. 그건 노동이고요 그게 아니고 다 따져보게 되면 다 따지고 보면 정말 본인이 생각해도 전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은 아니었다는 사실. 그냥 답답해서 해본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아까 감전되는 전기선, 십자가 숨어있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거에요. 이쪽은 보이는 세계입니다. 보이는 세계에 복음의 연결망들이 쫙 이렇게 퍼져있지요. 이렇게 되어있는데도 왜 그렇게 하느냐? 그 말씀과 말씀 사이 연결시켜놨어요. 여기에 딱 걸리게 되면 걸린다는 건 성도거든요. 성도는 복음에 걸리게 되어있어요. 복음이 찾아가요. 성도는. 걸리게 되게 되면 성도는 내 뜻대로 안됩니다. 절대로 내 뜻대로 안되거든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좁은 길이라고 해요. 좁은 길. 길은 인간은 몰라요. 길은 모릅니다. 모르는데 내 뜻대로 안되도록 계속 조치하게 되면 길이 열립니다. 어느 길로? 영생의 길. 천국 길이 열립니다. 내 뜻대로 계속해서 연결 연결 안되도록 해주는 거에요. 그렇게 되게 되면 세상에 있는 일어나는 내가 판단하는 일 있잖아요. 일은 점점 더 옅어지고 이 말씀의 굵기가 점점 말씀이 점점 실감나게 굵기를 키워가면서 다가와요.
이게 바로 뭐냐? 주님의 사랑의 높이와 넓이와 길이와 깊이. 주의 말씀이 세상에 점점 더 체계있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온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전에는 사람보다 말씀은 시시하고 내가 원하는 사람들, 바이어들 나한테 도움 줄 사람들 그 사람이 중요했는데 지금은 뭐가 중요하느냐 하면은 그 사람을 만나도 그 현장에 뭐냐 하면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내뿜고 있는 이 말씀이 그 현장과 함께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에요. 다 이루었다 라는 겁니다. 지금 제가 다 이루었다라는 이야기를 말씀 지키면 구원받습니까? 자꾸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게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에요.
그러면 내가 여기 있다 이걸 이항관계라고 합니다. 이항관계에서 말씀대로 하면 삼항관계가 돼요. 삼항관계. 말씀이 들어가서 뭘 하느냐 하면은 이 사람과 이 사람의 관계를 말씀이 훼방을 놔요. 훼방을 놓습니다. 당신 물품을 내가 구매해줄게. 아싸! 이번 달 작업성과 이루었다 할 때 좋디? 그게 그렇게 좋아? 인생 다 살았지? 그렇지? 막내 애 공부 못하게 한번 만들어줘? 둘째 교통사고 나게 만들어줘?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이항관계가 아니고 삼항관계로 나가는 거에요. 삼항관계는 먼저 사람과 사람이 만나자고 해요. 해놓고 이걸 가위표 쳐버리는 거에요. 그 어느 것보다도 세상을 얻은 것보다도 네 목숨을 얻은 것이 천하를 얻은 것 보다 귀하다는 마태복음 말씀처럼 순간순간 말씀이 이렇게 끼어드는 겁니다. 일종의 귀신처럼 유령처럼. 늘 끼어든 거에요.
끼어들면 특징이 뭐냐? 말씀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나에 대한 인식이 있고 저 사람, 저 사람은 나를 꼭 도와줄 사람이고 저 사람 아니면 이번 달은 내가 수익이 전혀 없는 사람. 나한테 중요한 사람. 중요한 고객. 둘 다 뭐가 되느냐 하면은 있음. 실체가 있음. 실체가 있어요. 분명히 실체가 있어요. 분명히 있습니다. 그게 뭐냐? 그들에게 그림자가 있어요. 그림자가.
이게 바로 이게 내 육신에서 뿜어 나오는 기존의 공간 속의 나의 삶의 모습이에요. 이걸 주께서 먼저 주선을 해요. 마련을 해요. 마련하고 난 뒤에 정오의 그림자. 말씀이 딱 와버리면 있음이 있음으로 결탁해서 뭐 할려는데 이것을 초를 치는 게 바로 없음이 초를 치는 거에요. 없음이.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잊어버린 생명, 영생, 구원, 십자가, 천국이 다시 한번 그 짧은 순간이지만 다시 기억나게 합니다. 다시 기억나게 해요. 여기까지는 이해되지요.
인자의 날은 주님께서 친히 생산하는 날. 뭘 생산하느냐. 분열을 일으키는 정점이 정오의 순간입니다. 분열. 분열은 뭐냐? 나눔이죠. 나눔을 일으키는 정점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미 확정되었어요.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원서내서 공부 잘한다고 합격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것은 다 오로지 쓸데없는 짓이에요.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게.
이제는 말한다. 우리가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에요. 이거는 이 세상에 공간에서 흉내낸 거에요. 모방한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성경을 사심 없이 한번 보세요. 이미 결정 났어요. 합격자는 이미 결정 났습니다. 누가 천국가고 누가 지옥가는 건 이미 결정 난 상태. 그림자가 없으니까 없음이니까 우리 있음으로서 파악을 하지 못할 뿐이지 없음이 진정한 최종적인 있음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우리가 지금 얼굴에 인상 필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저 구원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우리는 그게 궁금한 거에요. 정오에 그림자 없음에서부터 있음이 조금 생기면서 균열이 일어나요. 균열 일어나면서 쟤는 아니고 얘는 맞고 얘는 아니고 얘는 맞고 가 주의 말씀을 통해서 계속 일어나는 거에요. 9명은 아니고 1명은 맞고.
19절 다시 봅시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이야기가 처음에 10명 왔을 때 이 이야기 안했어요. 주님께서. 왜? 해당사항이 없으니까. 그중에 한 명이 있는데 한 명 본인도 몰랐지요. 몰랐는데 정오의 그림자 없는 정오의 막대기가 결국은 이 한 명으로 하여금 네가 합격 했어라고 알려주는 거에요. 네가 합격했어. 말씀의 침으로.
주님과 만나야 되는데 주님은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만나는가. 말씀이 말씀을 오는 순간 만나게 되요. 말씀은 설교 시간에 맨날 듣지 않느냐. 말씀이 들어오면 여기서 나한테 말씀의 반응을 유발하면서 분열작업이 일어나요. 분열작업이 일어나가지고 너는 합격했어. 너는 아니야 라는 것을 말씀 자체를 통해서 분열시키는 거에요. 우리 속에.
한 20년 복음 들었다. 이건 주일날 설교 했는데 짧게 해볼게요. 주체가 확립되면 더는 말씀을 안 듣는다. 구원 받았는데 왜 말씀 들어요? 구원 받을려고 말씀 들었는데 이미 본인 자체가 구원 받았는데 말씀을 왜 들어요. 필요 없지요. 자기 하고 싶은 돈이나 벌고 하겠지요. 더는 말씀을 안 들어요. 이 사람이 뭐냐 하면은 분열된 사람이에요. 너 아니야 라고 한 사람이에요. 더 이상 말씀이 관여를 안 하는 겁니다. 주께서 침을 안 주는 거에요. 침을 쑤시지 않은 거에요.
그러면 성도는 합격했으니까 성도는 합격한 게 아니에요. 성도는 합격한 자가 아니라 주님의 침이 작용하는 사람이죠. 다시 첫째 강의로 돌아가겠습니다. 진리가 우리의 행위를 통과하고 난 뒤에 우리 자신을 뭐한다? 철거하는 거에요. 우리 자신을 철거하는 거에요. 내가 내 이야기가 아니고 주의 스토리고 주의 몸이라는 것을 철거해야 이게 주의 몸이 되는 거에요. 이 작업이 분열의 작업이고 분열의 작업 시작점이 뭐냐? 정오의 그림자에서 그림자 없는 정오의 태양에서 시작되는 거에요. 그게 인자의 날입니다.
자, 그 다음 문제 그게 왜 인자의 날입니까? 왜 평소에 하면 안 되고 인자의 날이어야 합니까. 그게 왜 지금 하면 되지 인자의 날이 기준이 돼야 되는가. 인자. 인자가 뭐냐 하면은 사람의 아들이에요. 실제로 히브리어나 헬라어도 사람의 아들이라고 되어있어요. 사람으로서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죄인 된 몸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은 생애를 끝내는 겁니다. 그동안 예수님 수고 많았어요. 죄 된 몸으로 사느라 참 수고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수고하고 있어요. 오로지 쓸데없는 일 한다고 수고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미래를 미리 봐야 되지요. 우리의 미래를. 주님께서는 인간의 시간이 끝나는 지점에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보여줍니다. 그게 마지막이라는 걸 어떻게 확정하느냐. 마지막 때 예수님은 아버지를 찾았거든요.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게 인자로서 죄 된 몸을 가졌으니까 그렇다면 바로 그게 끝날, 끝 지점이에요.
갈라디아서 3장 1절 한번 봅시다. 이 말씀을 내가 수백 번 봤는데 이번 수련회 갈라디아서 하는데 또 이 갈라디아서가 어려워요. 3장 1절 어느 대목이 어렵느냐 하면은 다 어렵지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어디가 어려우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이 대목이에요. 예수님 십자가 못 박힌 것이 너희 눈에 밝히 보이거늘. 어디서 봤는데? 다 촛점 바꾸니까 보이던가요? 십자가가.
십자가가 보인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십자가가 보인다는 말이. 사도 바울이요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해요. 좀 알아듣게 하지 않고.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 이게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게 십자가가 밝히 안 보이는 사람은 끝난 사람이에요. 그 다음에 2절이 뭐냐 하면은 성령 받았나 안 받았나를 결정하는 것이 뭐냐? 십자가가 밝히 보이면 성령 받은 것이고 십자가 밝히 못 보면 그건 뭐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이죠.
십자가 밝히 보이는 게 무슨 뜻이냐. 사람으로 오신 주님 봤잖아. 보았잖아 그 뜻이에요. 사람으로 오신 주님 보았잖아 뜻이에요. 사람으로 오신 주님. 왜냐하면 십자가는 사건이거든요. 사건을 본다 할 때는 그 사건의 주인공이 있어요. 너희들이 이미 들은 적이 있잖아. 어떤 분이 오셨는데 그냥 죽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왜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강조했느냐. 부활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에요.
십자가에서 부활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십자가부터 출현해야 돼요. 십자가 출현하면 예수님의 죄의 몸 돼야 돼요. 죄의 몸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인자라고 해요. ‘인자’. 신학자들은 이걸 가지고 고난 받는 주님이라 이렇게 표현해요. 말은 틀리지 않는데 이상하게 뭐가 진짜 본질 부분이 빠져있지요. 예수님은 고난 받았다고 하니까 그래 우리도 예수님 본 받아서 고난 받으면 되지. 지금 이런 식으로 유도한 느낌 들지 않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인자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너는 인간도 아니냐 라는 뜻이에요. 인간도 아니야. 인간도 아닌 게 왜 고민하고 인간도 왜 분노하고 인간도 아닌 게 왜 걱정하고 인간도 아닌 게 왜 염려하십니까 인간도 아닌데. 여러분 집에 키우는 개가 이렇게 고민해보세요. 꼴에 너 뭐야 너. 주는 사료나 먹고 있지. 아 더 맛있는 사료 없을까? 이게 말이 돼요? 안되잖아요. 이거 안락사 시켜버릴까 이렇게 되잖아요.
우리는 인간이 아니에요. 이걸 제 나름대로 쉽게 한다고 오후예배 때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조용필이 아닙니다. 우리는 조용팔이고 조영필이에요. 이거 실존인물 맞아요. 우리는 조영필이고 조용팔이지 조용필은 아니에요. 조용필은 몇 명밖에 없어요? 이 땅에 사람은 단 한명밖에 없어요. 사람은 율법대로 완성해야 사람이에요. 왜? 처음에 하나님 만든 인간이 바로 인간 속에는 자기 의가 없기 때문에. 처음에 자기 의가 없어요. 왜 사람도 아닌 게 고민을 해요. ‘아 더 살아야 될 건데’ 무슨 권리로? 무슨 권리로 더 살아야 돼요?
인자의 날이란 바로 십자가의 죽음으로서 돌입한 거에요. 왜? 사라졌으니까. 다시 누가복음 봅시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그들이 철없다고 나무랄게 아니고 바로 이들이 이런 말을 하는 마음을 우리가 여기서 분석하고 해야 됩니다. 오늘 배운 거 여기 적용시켜 봅시다.
자, 바리새인은 욕망이 있다. 바리새인은 이 욕망가지고 세상을 해석한다. 그렇다면 아까 말한 그 시간론,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데 과거는 이 현재 사라지지 않아요. 과거는 사라지지 않아요. 기억은. 꿈속에도 나올 수 있고 밑으로 빠져서 숨어버리죠. 현재 느낀 체험된 경험한 이런 것들은 교통사고 났다 바로 여기 기억이 바로 오래 남아요 하지만 몇 년 뒤 그 기억이 어디로 가요? 그 다음에 현재라는 그 밑에 그게 들어가게 돼요. 이걸 가지고 철학에서는 현상학적 시간론이라고 하는 겁니다.
현상적으로 봤을 때 인간은 과거 중첩되어 있다는 것. 현재. 문제는 미래입니다. 미래가 현상적으로 미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으니까 미래에 대해서 뭔가 사람들은 기대하게 돼요. 기대. 이걸 가지고 소망이라고 합니다. boys be ambitious. 꿈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 소망과 꿈의 재료가 뭘까요? 재료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 현재의 느낌과 밑에 있는 기억에서 나온 욕망이 기억된 욕망, 욕망은 그냥 욕망이 아니고 기억된 욕망.
그래서 사람마다 다 달라요. 사람마다 다 다른 게 기억된 게 다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의 욕심이 다 달라요. 기억된 욕망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네 라는 미래 시점을 사용해서 그걸 미래로 기대하게 돼요. 욕망은 지금 없는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겁니다. 이 기대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욕망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거는 아까 공부한 거 다 적용하면 돼요. 이건 뭐냐? 나의 이야기에요. 끝까지 나의 이야기에요. 나의 이야기가 화살표로 화살표로 화살표로 점점 가다가 결국 어떻게 돼요? 몇 년 후 몇 년 후 하지만 50년 후 모르잖아요. 죽고 난 뒤에 모르지요. 그게 인간은 뭐냐? 결국 어디 빠진다? 허무주의에 빠지는 거에요. 허무주의에. 모르겠다는 허무주의에 빠지지요.
주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허무주의도 물론 전도서에 있어요. 헛되고 헛되고 있지만 신약에 오면 허무주의는 이게 누가 받느냐 하면은 이건 예수님의 이야기로 받아버리죠. 예수님의 이야기는 뭐했다? 분류하는 겁니다. 최종적인 것은 정오죠. 정오에 그림자 없는 여기서 한쪽은 지옥으로 한쪽은 천국으로 이미 확정 났습니다. 확정되어버렸어요.
확정된 그 사실이 미리 여기서 공간을 통해서 주어졌어요. 그런데 여기 바리새인들은 그 공간을 몰라요. 모르니까 방금 이야기한 현상 시간 속에 그냥 기대할 뿐이죠. 하늘나라 언제 옵니까? 목사님 예수님 재림 언제쯤 와요? 목사님 요한계시록 현상들 분석해가지고 체계 있게 하게 되면 예수님 오시는 날 우리끼리는 알아볼게 아니겠습니까. 이게 세대주의적 시간론이잖아요. 그거나 바리새인이나. 전부 다 누구 이야기? 나의 이야기죠.
그리고 그런 거 연구했다고 자기는 쓸모있는 일을 했다는데 아까 우리 공부한 것에 의하면 우리는 뭡니까? 인간은 어떤 일을 해도 다 쓸모없는 일이다. 왜? 인자는 내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우리를 대표한 인간이 모든 것을 결정지었습니다. 너는 지옥, 너는 천국이라고 그분만이 결정지을 권한이 있어요. 우리는 내 운명을 결정지을 권한이 없습니다. 이것을 감사히 기쁘게 고맙게 받아들인다는 말은 주님의 예수 안에 있는 공간에 배치물로 바로 주님 곁에 만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로지 쓸데없는 일만 하게 되면 좋은 점이 뭐냐? 쓸데없는 걱정 근심이 부질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뭘 해도 쓸데없는데 그냥 사는 대로 사는 거지 왜 부질없이 걱정 근심을 해요. 계속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 어느 때에 임합니까 시간 언급했지요 아까 시간 끝났다 했지요. 유일한 인간인 예수님께서 죽어버리면 시간은 끝나는 거에요. 왜? 모든 시간은 예수님 몸에서 나오기 때문에.
여기 나오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 듣고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내가 정신 차려서 공부해서 말씀 연구해서 해야 본인이 살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뭡니까? 보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해버리면 이거는 그 과거 현재 미래 기대 자체를 이걸 절단내는 거에요. 끊어버리는 거에요. 끊어버리면 내게 축적된 이 욕망, 기억의 욕망은 어떻게 처리해요. 어디에 갖다버릴까요? 이거 또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꿈에 막 튀어나오는데.
또, 21절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한다” 아주 눈을 빼고 눈 코 다 작살내는 거에요. 눈 있어도 소용없고 들어도 소용없고 봐도 소용없고 모른다 모른다. 왜? 없으니까. 어느 공간에서? 이쪽 공간에서 하늘나라는 없어요. 왜? 하늘나라를 추방했잖아요. 쫓아냈잖아요. 그러면 성도는요? 성도는 주께서 이쪽 공간을 철거시켰잖아요. 우리를. 이쪽 공간이 있는데 이쪽 공간에 있는 우리 흔적을 날마다 매일같이 지우지요.
지워도 우리는 한 고집해가지고 매일같이 또 오늘 뭐 먹고 내일 아침 뭐 먹고. 이항이 아니고 삼항에 있는 거에요. 네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거지. 이쪽 공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면 십자가 못 박힌 것을 본다는 거에요. 십자가 어린 양의 보좌가 여기 있어요. 그런데 십자가에 나오는 말씀에 의해서 느껴지는 거에요. 이게. 느껴지는 거에요. 제 삼항으로.
그래서 이 공간이 중첩되어 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떨어져 있다고 하면 곤란하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도 십자가 안에서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동일한 말로 네가 예수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고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만 자랑한다. 이미 너는 죽었고 그리스도 네 안에서 산다. 이상하게 이쪽 말 통하지도 않는 이 쪽 이야기를 계속해서 성경으로 편지로 적어 보내는 게 그게 갈라디아서란 말이죠.
22절에 봅시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인자란 분이 한 분인 동시에 그 날도 단 하루. 그럼 그 날은 무슨 날이냐? 그렇게 안 풀리던 재림이 풀리게 되지요. 재림은 보이지 않는 공간이 보이는 공간과 접선하면서 완전히 불로써 타버리는 그 접선하는 그게 하루에요. 한 날. 하루. 그날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는 그날.
이게 재림인데 이쪽 인간 세계에서 생각하니까 재림이 이쪽 인간 시간에 끝에 온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쪽 공간에서는 이미 주와 함께 있어요. 주와 함께.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주와 함께 있다고. 주와 함께 있는 게 뒤에 커튼을 재껴버리면 빰빠밤빰 하고 커튼 있을 뿐이지 커튼 있으나마나 같은 공간에 같이 있는 겁니다. 다만 지금은 초라한 소자, 성도들만 나왔지만 그 성도 뒤에 누가 있느냐? 영광스런 주님이 있어요.
사울이란 사람이 얕잡게 보고 성도를 잡고 죽이기 위해서 체포하니까 누가 나섰습니까? 주님이 영광스럽게 나타나서 눈 멀어버렸지요. 네가 내 사람 왜 건드리냐? 저 사람 건드린 게 날 건드린 거다. 왜? 함께 있기 때문에. 그 순간 사도 바울은 주님과 함께 있게 되었어요. 따로 나 혼자 따로 살던 사도 바울이 성령이 임하니까 이게 새로운 공간 예수 안에서 함께 있음을 느끼는 겁니다.
함께 있음을 느끼면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삽니까? 옛날 예수님이 죄의 몸으로 살았던 그 수난을 이제는 본인을 몸을 가지고 수난이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오늘 동영상 두 번째 강의, ‘약하게 살기’. 여자야~~~ 강해지면 안돼. 약하게 살기. 우겨쌈을 당하여도 답답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장 말씀처럼. 뭐 어때서. 처음부터 나는 사람도 아닌데 인간도 아닌데. 뭐 어때서.
23절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마지막 때에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마지막 때에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 고백입니다. 지금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다. 이거는 말씀이잖아요. 이제는 그 말씀의 윤곽이 제삼항으로서 여러분 매 인생 순간에 느껴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뭘 알겠습니다. 살아온 경험과 기억밖에 없는 우리를 철없는 우리에게 말씀이 실제가 되어서 다 이루었다는 차원에서 우리와 연결시켜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행여나 말씀을 읽는다 할지라도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기억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