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극단 맨

아빠와 함께 2023. 7. 4. 12:09

강남-누가복음 17장 29절 (극단맨) 2300620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7장 24절이요.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인자의 자기 날, 22절에서 제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전혀 다른 체계를 생각해야 돼요. 전혀 다른 체계. 인자의 날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인자의 날에 나타날 그 구성 요소가 지금의 구성 요소하고 완전하게 다르다는 뜻입니다.


인자의 날과 뭘 대비하느냐 하면은 사람의 날이죠. 사람의 날.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상 이상적인 체계와 인자의 날은 달라도 너무 달라요. 사람들은 이 누가복음 17장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상 사람의 날을 살다가 나중에 인자의 날이 오게 되면 인자를 맞이하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지 못한다고 하는 말은 달라도 너무 달라서 현재 사람의 날에 익숙한 그러한 입장에서라면 그 인자의 날에서 배제된다는 거죠. 인자의 날에 갈수가 없다. 그래서 인자의 날은 사람의 날하고 완전히 다른 요소, 다른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완전히 다른 요소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일상 속에 있으면서 완전히 다른 요소라면 인자의 날을 그럼 어떤 식으로 우리가 파악을 해야 되는가?


주의 날이 인자의 날 또는 다른 말로하면 주님의 날이 인간의 날에게 소급적으로 적용된다. 소급적으로 적용된다. 이런 말들이 강의에 나오니까 조금 이게 어렵지요. 사람의 날 살다가 인자 오시면 그냥 슥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소급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 뭐냐?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미완료 속에 완료가 이렇게 미리 앞당겨 와서 주입되는 겁니다. 주입되는 거에요.


완료된 것이 미완료에 주입되어버리면 이 세상 인간의 세상은 이건 미완료로 드러납니다. 살아도 소용없다 이 말입니다. 이 땅에서 산 것은 인자의 날에 짤린다는 그런 뜻이에요. 인자의 날에 완전히 이 세상은 거부당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24절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7장 24절에 나옵니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번개 특징은 사람들이 예상 못한다는 거죠. 우발적이고 우연적입니다. 번개가 없다가 아니라 있는데 예측 못한다 에요. 번개가 아예 없는 게 아니에요. 일상 속에 주의 날의 징후가 없는 게 아니에요. 있는데 번개 같아요. 뭔가 쓱 왔다가 쓱 가버렸어요. 쓱 왔다가 가버렸는데 뭐가 왔다 갔지? 왔다 갔는데 별일 없네. 우린 그냥 살던 대로 그냥 살자 하고 그냥 안일하게 가지요.


그런데 그 날이 되게 되면 인자의 날과 사람의 날이 인자의 날 오게 되면 현재 사람의 날 이거는 완전히 인자의 날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됩니다. 그 파괴되는 것이 어떤 식으로 파괴되는가? 29절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9장 29절 그 날은 어떤 날이냐? 하늘로서 불과 유황불이 비 오듯이 하여 나타나는 날.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한번 물어볼게요. 소돔과 고모라에 불과 유황불 내려왔잖아요. 누구한테 떨어졌지요? 그 불과 유황불이 누구한테 떨어졌습니까?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떨어진 장소가 저 사막에 떨어졌습니까? 저 깊은 산중에 아무도 없는 곳에 떨어졌어요? 누구한테 떨어졌어요? 불과 유황불이 나름대로 노림수가 있었지요. 누구한테 떨어졌습니까? 사람 살던 곳에 떨어졌지요. 사람 살던 곳.


그러니까 인자의 날은 그냥 나무나 산이나 바위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인자는 누구하고 상대한다? 사람을 상대해서 겨냥해서 쳐들어온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뭘 가지고? 불과 유황불을 가지고 쳐들어오는 거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사람이 있다는 말은 인자로부터 공격 대상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럼 그날 되면 그날 오겠지 라고 하는데 아니죠. 소급적으로 적용해요. 소급적으로. 그러니까 완전히 체제가 우리가 사는 발상, 일상을 살던 발상하고 완전히 다른 발상이 돼야 돼요.


예를 들면 두 딸이 독일 가는데 두 딸이 독일을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있으면서 나오는 발상이죠. 두 딸이 간다. 독일이 여기 오면 되지 않습니까? 이거는 완전히 발상이 완전히 다르지요. 독일이 여기로 오면 되잖아요. 그리면 우리는 그럴 수는 없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가 인자의 날이 오는 겁니다. 그런 일은 없다. 그럴 일은 없다.


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우리가 납득되고 예측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가? 너무 일상의 사람의 날에 길들여졌어요. 그런데 사람의 날에 길들여졌을 때 그 사람이 뭐냐? 별 다칠 일이 없을 거라고 여기는 사람들. 크게 문제없을 거라고 여기는 사람들. 불과 유황불로 떨어지는 것은 주께서 하늘에서 사람을 겨냥해서 이 사람의 일상을 겨냥해서 사람 세계를 겨냥해서 떨어지는 이유는 너희들이 평소에 인자의 날을 생각 안하고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인자의 날을.


지금 내가 사는 것하고 완전히 사고방식 체계가 전혀 공통점이 없는 달라도 너무 다른 그 세계를 너희가 상상하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하는 게 문제라는 거죠. 어떻게 바뀝니까?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는데 질문을 두 개를 해볼게요. 1. 인자의 날에 어떻게 바뀝니까? 라고 묻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바뀝니까? 질문은 던지지만 은근히 답을 얻고자 하지만 속셈은 이겁니다. 2. 꼭 바뀌어야만 돼? 그냥 살던 대로 살면 안돼? 꼭 바뀌어야 돼?


예를 들어서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온다 하면 사람들은 선뜻 나오는 질문이 “언제 옵니까?” 이거지만 속셈은 ‘꼭 와야 돼? 안 오면 안돼?’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그것이 그 정답은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17장 25절 “번개가 떨어지듯이 인자의 날이 오는데” 인간이 기다리든 말든 그냥 와요. 완전히 체계가 달라요. 상상도 못한 체계입니다 이거는. 인간은 상상도 못한 체계,


그 구성 요소를 가지고 그 체계가 이 땅에 등장합니다. 덮칩니다. 덮치는 방법은 불과 유황불로 덮쳐요. 상당히 극단적이죠. 그런데 극단적이라는 말조차도 전혀 다른 체계를 충분하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극단적이다 그 이상입니다. 달라도 그 세계가 너무 다릅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이런 거에요. 전혀 다른 세계에 인자의 날에 이미 포함이 된 그러한 존재가 여러분들이라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고 저주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들은 맛이 갔기 때문에. 그들과 견주거나 경쟁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에. 친절의 친절을 다 베풀어줍니다. 친절의 친절을. 직장에서 친절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날에 속했기 때문에. 사람의 날에. 우리가 저주하지 않더라도 지금 열심히 저주받고 있는 상태이게 때문에. 친절의 친절을 다 해주는거에요. 가라 독일로 뭐 이렇게. 아주 친절하게 독일로 보내주세요. 독일을 가든지 오든지. 그들이 예상하고 있는 체계 안이잖아요. 그들이 움직이는 것은 예상 안의 체제. 장충 체육관 안에서 이동하는 거에요.


그걸 가지고 여러분들이 잘 아는 용어 쓰겠습니다. 여행이라고 합니다. ‘여행’. 여행을 하는 이유는 내가 어떤 상황에도 내가 변하지 않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행가요 인간은. 여행하는 이유는 바깥 환경이 바뀐다할지라도 나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처럼 철옹성이고 변함이 없음을 내가 이렇게 굳건하게 살아감을 낯선 사람, 낯선 나라, 낯선 환경 속에서도 그걸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배낭 메고 해외여행갑니다. 자신감 있다 이 말이죠.


탄자니아 거기 가도 나는 내 자신의 동질성을 나는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에요. 내가 사는 환경에서 맞춤 내가 아니라 나는 글로벌한 세계적으로 어딜 가도 나는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존재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행갑니다. 그러니까 아휴 참 돈만 날리고 건강 날리는 거죠.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그렇다면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그런 사람에게 “나는 어딜 가도 변하지 않아. 나는 확정되어있어.” 하면 그 확정된 정체성은 동일성 당신은 언제 구성했어? 언제 만들었어? 지금! 이렇게 하거든요. 지금 나는 여행가기 전에 나는 어디 가도 나는 나다움을 나의 개성을 잃어버리지 않을 거다. 주일날 설교 했잖아요. 인간의 행복은 개성을 살리는 게 행복이라고요.


돈 없고 몸이 아파도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이 ‘나는 나다’ 할 때, 나의 개성을 유지할 때는 행복하고 아무리 돈 많고 아무리 잘 살아도 개성 잃어버리면 사람은 악!!!!! 하고 고함지릅니다. 절규. ‘절규’ 그 그림처럼 미쳐버려요. 영화배우로 여배우로 인기 있다가 재벌 집에 시집 가보세요. 못 견딥니다. 재벌 집에 잘난 체하는 전통 가문에 1년에 제사 10번 지내고 이러면 미쳐버려요. 차라리 내가 너하고 이혼하고 다시 영화배우 할래. 뛰쳐나왔어요. 꼭 누구라고 고현정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이 개성 잃어버리면 다 잃는 거에요. 그래서 20대 30대가 개성 하나 믿고 살아가는 거에요. 여행 다니면서. 말 안 듣지요. 부모 말 안 듣지요. “얘~~밥은 먹고 사나?” “엄마 밥 먹고 사는게 중요해? 나다움을 잃어버리는 게 나에게는 불행이야” 이러고 달려드는데 뭐. 엄마 때하고 달라 이러거든요. 그러면 묻고 싶어요. ‘그 개성은 언제쯤 구성했어? 완료했어요?’ 물으면 ‘지금!’ 이러거든요.


아까 장로님 노트에 있던 campus mate 노트 있지요. 그걸 왜 물어봤냐면 어릴 때 노트에 한국말로 써 있는 노트. 옛날에 초등학교 없고 국민학교 있었거든요. 국민학교 때 그 노트를 하면서 희망사항이 뭐냐 하면은 삼촌 고모들이 영어로 써있는 노트를 쓰고 있는 것이 그게 희망사항이었어요. 왜? 꼭 대학생 된 기분이거든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 반에서 선생님만 바뀌는 그러한 환경에서 대학교는 자기가 캠퍼스 찾아가서 강의실을 찾아간다는 그게 얼마나 낭만적인지요. 캠퍼스 낭만인가. 그게 그렇게 낭만적이고 그게 부럽고 노트도 영어로 된 노트. 누구나 아는 한글 말고 배워야 아는 영어. 그거 끼고 그것도 가방에 넣지 않아. 옆에 끼고 흘러도 끼고 가야돼. 버스 타면서도 막 흘려. 우리한테는 그게 희망이었습니다. 대단했지요.


인간은 얼마나 일방적 해석을 하고 있는지. 나의 개성, 나의 나답다가 얼마나 이거는 편향적인지요. 그래도 대학 졸업하고 백수 되고. 오라고 해도 회사 안 간다하고 나의 개성을 살려주는 직장 간다고. 그런 직장이 어디 있어요. ‘나는 돈에 얽매이는 그런 사람 아니야’ 그거는 집안이 좀 살 때 하는 짓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여기 25절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그다음에 인자의 날이 와요. 자, 그러면 인자의 날과 사람의 날 사이가 왜 벽이 되었으며 왜 그게 끊어져 있는지를 또 의도적으로 끊게 하신 이유가 어디 쪽에 있느냐 하면은 주님 쪽에 그 이유가 있는 겁니다.


자,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것만 알면 돼요. 사람의 날과 인자의 날이 왜 이어지지 않고 끊어졌느냐? 왜 인자의 날이 오는 것은 아무도 모르느냐? 왜 번개같이 오느냐? 예상도 못하느냐? 어떻게 해서 그런가? 그 사이에 뭐가 끼어있기에 인자의 날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뭐냐? 사람들은 인자의 날이라고 하면 이천 몇 년도에 옵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서기 이천 몇 년도 몇 월 달에 옵니까? 1998년 10월 18일에 온다고 하다가 사단난 거. 본인은 안 믿었죠. 왜냐하면 적금을 넣었으니까. 재림 이후 것까지 미리 넣었어요. 한복입고 그때 한복장사 대박 났어요. 한복입고 마지막 날이라고.


인간의 날에서 시간 계산해서 인자의 날까지 관통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시간계산 징후계산 전부 다 차단시키는 것, 도대체 그 차단의 위력이 어느 정도기에 그걸 모르느냐? 그 이유는 인자가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으심이 칸막이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칸막이로 되어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런 뜻이에요. 사람의 날 속에 있는 그 어떤 인간도 주님이 용서할 생각이 없다. 용서할 생각이 없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죄와 용서를 고대하는데 인간이 생각하는 용서와 사죄마저도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해요. 누구 좋으라고 용서해요. 인간은 뭐를 모르느냐 하면은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기도와 간구와 갈구도 본인이 안고 있는 죄를 취소할만한 선행이 되지를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인간의 날, 이 세상 우주지요. 이 우주를 불바다로 아주 갈아먹어야 그래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죄 값과 이게 같이 상쇄가 돼요. 너 같은 거 갈아먹어도 속이 시원치 않다 이런 거 있지요. 하나님께서 불과 유황불을 내리는 이유는 인간들이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인간들이 적극적으로 죄만 계속 생산해오고 있었던 거에요.


그 죄를 생산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신이시여 용서해달라는 거에요. 불쌍히 여겨달라는 겁니다. 제가 처음에 했잖아요. 완전히 체제가 다르다고. 인자의 체제는요 인간의 체제와 완전히 달라요. 인간이 이 세상이 문제되는 것은 그게 인간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있을 때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계속 죄를 만들어내요. 끊임없이 만들어낸다고요.


25절에서 먼저 고난을 받으면서 이 세대에서 예수님이 먼저 버린바 된다는 이 말은 이 세대가 세상의 날 또는 사람의 날이 인자를 버린 거죠. 그래서 인자의 날과 세상의 날은 완전히 벽이 쳐져있지요. 그런데 주께서 말씀으로 인자의 날에 온다고 했어요. 소급적으로. 소급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주께서 십자가 죽기 전에 먼저 말씀을 던진 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입장에서 인자의 날 입장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인자 입장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인자하고 인간하고 완전히 대치되어있다는 것은 아시지요. 로마서 5장에서 한쪽은 아담 출신이고 한쪽은 마지막 아담이기 때문에. 기존의 아담 출신들은 마지막 아담을 내치게 되어있어요. 모든 인간은 아담에 소속되어 있고 예수님만 아담에서 벗어났거든요. 아담의 죄가 아니고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그래서 인자의 날. 진정한 사람이다 이 말이죠. 오늘 동영상 두 번째 그거 들어보시면 알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행적의 행함은 인간이 이해됨과 전혀 상관없이 움직여버립니다. 전혀 상관없이 미리 이야기한 거에요. 21절에 보면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분명히 있다고 해놓고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분명히 있는데 보지 못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이제부터 그 뜻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여기 문장을 몇 개 쓰고 제가 질문을 한번 던져보겠습니다. 1. “얘야 문 좀 열어줘.” 엄마가 짐 들고 들어갈라고 하는데 손이 모자라서 문 좀 열어달라고 했어요. 2. “오늘 날씨 덥지요?” 3. “늦기 전에 빨리 가자.” 네 번째 “김치 볶음밥에 스팸 넣어줄까? 오뎅 넣어줄까?” 자, 질문합니다. 이 네 가지 문장 중에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게 있습니까? 다 이해되지요.


그러면 이 문장을 해결해 볼게요. 성경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너무 안일하게 봐요. 히브리서 11장 3절, 제가 지어낸 게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겁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볶음밥에 스팸 넣을까? 이거하고 전혀 다르지요. 성경에서 뭐냐? 보이는 것은 뭐고 나타나는 것은 뭐냐 이 말이죠? 이게 보이는 것과 나타나는 것을 구분했잖아요. 같이 안 봤다 이 말이죠.?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개역한글)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universe was formed at God's command,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what was visible.(NIV)

 Through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worlds were framed by the word of God, so that things which are seen were not made of things which do appear.(KJV)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worlds were prepared by the word of God,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things which are visible.(NASB)

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왜 합니까? 보이는 것이나 나타나는 것이나 동일하게 생각할 때 그게 아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이걸 풀이하면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것에 의해서 나타났고 보인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럼 사람들은 그럼 보이지 않는 것은 뭡니까? 보이지 않는 것은 뭡니까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에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막혀 있으니까. 그러면 믿으란 말인지 믿지 말라는 뜻입니까? 왜 네가 예수를 믿고자 하느냐 이 말이죠. 그게 죄다 이 말이죠. 네가 알아서 안다고 해서 네가 불과 유황불에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목사님은 너무 극단적이라고 하는데 극단적이라는 말도 모자라요.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극단이라고 하는 것은 한계 끝까지 절벽 끝까지 가는걸 극단이잖아요. 끝까지 가봤자 십자가에 막혔는데 그 극단조차도 말이 안돼요. 오늘 제목을 극단맨으로 할까. 그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보고 어쩌라고” 바로 그 말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해서 주의 날을 소급적으로 본다. 이미 나중에 그게 과거 지나면 현재되고 현재 지나면 뭡니까. 미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시간에서는 미래에서 과거를 미리 본다 할 수 있잖아요. 그 미래는요 과거 현재와 연결된 미래이기 때문에 그것도 틀린 말이에요. 인자의 날은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자의 나타남 자체가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를 적용할 수 없는 식으로 오는 거에요.


우리는 그러면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이렇게 하지요. 우리가 그렇게 극단에 대해서 반발하지요. 다 아는 이야기만 주저리 주저리 다 아는 이야기만 주고받는 거에요. 미리 이야기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주의 날에서 이 사람의 날을 보는 안목이 있으면 돼요. 주의 날에서. 그럼 주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제가 말씀드렸듯이 인간의 날과 주의 날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예수님의 고난으로 막혔다 했지요. 벽이 있어서 통과를 못하잖아요.


그러면 주의 날의 안목, 그 관점에서 본다면 그 사람은 지금 어디 가있는 거에요? 뚫지 못하는 벽을 뚫어버리죠. 그런데 인간은 이 벽을 뚫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의 집단이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에. 딴 사람은 버려도 저는 안 버렸습니다란 말하면 안돼요. 베드로가 지금 자기도 모르는데 그런 이야기했어요. “다 버릴지라도 저는 버리지 않습니다” “아니야 다 버려야 돼” 그래야 내가 주님의 일이 성공이 돼요. 베드로마저 버려야 돼요. 가룟 유다도 물론 버리고. 다 버려야 돼요.


그러면 다 버리는 상태에서는 내가 벽을 통과해서 주의 날에 또는 천국에, 예수 안에 또는 성령 안에 내가 있어가지고 내가 봐야지 라는 그러한 계산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치 나는 빼주세요 라는 것 밖에 안 되니까 그런 건 없어요. 그러면 뭐냐?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져야 되지요. 재료는 죄인입니다. 죄인을 가지고 주께서 의인을 만들어줄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를 새로운 피조물로 주께서 만들어버리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나는 인간의 세계에서 죽었고 주의 날에 새로 살았다는 안목을 갖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에요.


나를 어디서 출발합니까? 새롭다 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고 어디서 출발해요? 나는 죄인으로부터 출발하지요. 죄인으로부터. 내가 파악하지 않는 죄인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죄는 인간세계에서 파악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주님의 안목하고 전혀 상관없습니다. 지가 스스로 훌륭하게 잘되고자 하나의 계속 변증법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일보후퇴가 이보전진 이런 의식에서 나온 거에요. 반성하면 뭔가 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그런 사고방식은 인간세계에요. 인간세계에서 나온 겁니다.


사도 바울 표현대로 ‘성령 안’, 같은 말이 ‘십자가 안’ 또 같은 말이 ‘예수 안’ 또 같은 말이 ‘언약 안’. ‘다 이루었다 안’. 똑같은 거에요. 그 안에서 “예수 안에서 너희는 의인이 되었나니” 이 말이거든요. 한번 적어볼게요. 너희가 의인된 것은 예수 안에서 라는 구성요소 안에서 뭐냐 하면은 의인이 되는 거에요.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의인 되니까 이 의인은 어디의 통제를 받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안목과 예수님의 생각에 통제를 받고 지배를 받는 그러한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겁니다. 전에 내가 세상에 살았던 그 안목은 여기 완전히 죄 된 것으로 드러나지요. 주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여 죄가 많습니다. 죄를 용서하소서. 이건 다 뭐가 돼요? 아직까지 살아볼라고 주님 덕분에 죄 용서받고 천당 갈라는 그 얄팍한 심보를 가진 그런 사고방식은 예수 안에서 용납됩니까? 용납 안 됩니까? 어디서 수작질이야. 어디서 요령 부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내 일은 내가 결정한다. 내 의지로 결정 한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어린애들이 철딱서니 없을 때 철없는 어린애 특징이 뭐냐 하면은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전혀 이해 못한다는 거에요. 자아가 생성하고 어른 되고자 시도할 때 계속 자기 아픈 것만 생각하고 자기 불편한 것만 생각했지 자기 돌보는 어른들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은 몰라요.


지난 주일 오후에 손녀가, 날씨가 좀 더웠거든요. 그래서 제 아내가 오늘 날씨 덥기 때문에 국수 안하고 냉면 한다 하니까 손녀가 하는 말이 할머니 싫어! 분명히 약속했잖아. 주일날 오후에 국수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딸내미 가정 위해서 된장찌개하고 냉면하고 국수하고 세 가지를 했어요. 왜 더울 때 국수 못하느냐 하면은 열기가 확 올라오거든요. 그런데 손녀는 약속대로 하라는 거에요. 약속대로. 어른 약속을 지켜야 된다는 의식이죠. 물론 그것까지 따지지는 않지만. 제 아내가 내가 많이 참는다.


어린애의 특징은 타인의 고통을 몰라요. 젊은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자기 아픈 것만 생각하고 주의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희생하고 고통하는 것을 전혀 몰라요. 이 말은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몰라요. 내가 내다버린 자의 고통을 몰라요. 그거 아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 고통의 값은 불과 유황불로 온 천지를 불바다 만듭니다. 인자의 날은 우주 철거하는 날이에요. 우주를 철거해버려요. 죄 생산 공장을 철거해요. 불과 유황불로.


그런데 거기서 용서해달라? 네가 너를 알아? 네가 너를 뭔지나 알고 용서해달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네가 너 자신 지키고자 하는 얄팍한 수작이잖아. 그거 수작이거든요. 극단까지 가보지를 않은 거에요 사람들은. 극단을 피해가버려요. 극단 가다가 stop 해버려요. 멈춰버려요. 아 이러다가 내가 망할 수 있겠다. 아니 인간은 태어난 그 자체가 이미 저주에요. 그 자체가. 욥 이야기 있잖아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고요.


여러분 알파고라는 말 들어봤습니까? AI 인공지능이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둑 프로그램인데 지금은 알파고가 많이 진화했어요. 재미있는 건 뭐냐 하면은 프로 기사가 둘이 앉아서 바둑을 두잖아요. 바둑을 두는데 여기 많은 해설자와 많은 사람들이 지금 어느 정도 유리한지 두 사람은 정확히 몰라요. 그런데 누구한테 물어보느냐 하면은 이 인공지능한테 물어본다고요. 사람은 자꾸 타인의 말을 듣고자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에 대해서 인간은 의존적이고 기댑니다. 인공지능아 지금 누가 몇 퍼센트 이기는데? 이런 식으로. 전지전능한 인공지능아. 그게 전지전능하거든요. 현재 누가 유리한데? 해설가가. 인공지능에 의하면 이렇게 둬야 유리합니다 이렇게 말한다고요 인공지능이. 이 말은 인간은 평소에 어릴 때부터 계속 커가면서 계속 누구의 말을 수집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말을 정제하고 듣지 않는 사람들이 간혹 있어요. 그걸 가지고 네 자로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정신병자의 특징은요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소통이 되는 말인지를 전혀 감을 못 잡아요 그냥. 그야말로 대구 경상북도 의성 말대로 주끼는 대로 해요. 욕 아닙니다. 사투리입니다.
주끼는 대로, 욕으로 막 들리는데



정신병자는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해요. 어떤 말도 듣지 않아요. 그런데 정신병자 빼놓고는 전부 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의 반응에 대해서 몸 사리고 바들바들 떨면서 늘 불안 불안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뜻은 너희들이 죄 용서해달라 긍휼히 여겨달라 그 소리할 때 배후에 너보고 그런 소리하라고 하는 그 괴물 나오라해. 그 괴물 나오라해. 이미 이 괴물이 이 세상을 장악했습니다. 지배했습니다.


그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하고 엘리야하고 모세한테 제안을 했지요. 제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이렇게 했지요. 모시겠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어떤 생각이냐 하면은 이 세상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이 세상에 불과 유황불로 완전히 철거된다는 사실을 전혀 감 잡지 못합니다. 왜? 이 세상 자체가 철거되면 극단적이라도 너무 극단적. 어느 정도 극단적이냐 하면은 내가 애 키우고 애 열심히 공부하고 뭐 직장생활 하는 이 자체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앙생활하는 자체가 아무 의미가 자체가 없어요. 너무 극단적이라서. 자체가 붕괴한다는데 그 안에서 뭘 무슨 내용을 담아서 기도하겠어요. 그저 50억만. 아무 소용없어요. 지금 불로 싸지른다는데.


하나님이 구약에서 분명히 출애굽 시내산에서 내가 인간을 만든 것은 인간이 나의 불쏘시개 되기 위해서 만들었다. 왜? 나는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에. 신명기 4장 24절. 신명기 5장 한번 봅시다. 지금 어떤 극단적인 말을 해도 지금 실제하고는 많이 거리가 있을 정도에요.


신명기 5장 24절에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직접 특정 공동체에게 한 것이 시내산에서 처음이고 마지막이에요. 집단적으로 보이지 않는 형태에서, 육신이 아닌 형태에서. 천사 보낸 거 말고 했단 말이죠. 그럴 때 말씀을 그냥 보낸 게 아니고 불에 담아서 보냈어요.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곧 뭐를 받는다? 불덩이를 받는 거에요. 이게 주의 날이 소급해서 먼저 도달한 거에요. 주의 날이.


주의 날은 주님 나타나는 날이에요. 어떻게 나타나느냐? 불로 나타나요. 불로써. 누가복음에도 그런 말씀 나오지요. 누가복음 12장 49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아직 불이 덜 붙어서 계속 하겠다 이 말씀이거든요. 불을 던지러 왔다. 불을 끄러 오신 분이 아니고 불을 싸지르려고 오신 거에요 주께서. 여호와께서 말씀을 던지실 때 불과 함께 불로 더불어서 말씀을 던지는 것처럼 예수님 말씀도 불과 함께 던진 말씀이었던 거에요. 왜? 여호와가 주님이시기 때문에. 불을 번지게 하시는 분이에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불같은 오순절 성령이 와가지고 그들이 성도들이 바빠요. 왜? 세상 불 싸지르기 위해서 바빠요. 빌립 집사가 바쁘고 스데반 집사가 바빠요. 불같은 성령의 말씀으로 그냥 싸질러버려요. 어떻게 할까요 하지 마. 왜? 의미 없다는 거에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 고넬료 만날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계시해줬거든요.


“먹어라” 베드로가 먹는 건줄 알았어요. 보니까 전부 다 못 먹는 거에요. 레위기 11장에 보면 못 먹는 항목 있지요. 레위기 11장에 보면 메뚜기는 먹을 수 있어요. 메뚜기하고 비슷하게 생긴 것들, 곤충. 날개는 있는데 기는 것은 못 먹어요. 부정, 가증해요. 그것처럼 가증한 것들만 담아놨어요. 이거는 뭐 베드로가 즉각적 반응해요. 주님이 날 시험하는 모양이구나. 안 먹습니다. 못 먹습니다. 체제 자체가요 완전히 달라야 돼요. 체제 자체가.


지금 하나님은 우리가 깝죽대는 우리와 상대해주는 분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상대하고 있다고 착각들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과 상대하지 우리하고 상대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제 행동 보세요. 행동이 지금 반듯하지요?! 어제도 제가 회개했습니다. 제 회개 어때요? 괜찮은 회개죠? 맨날 이러고 있어요. 자기 스타일 관리하고 있어요 지금 인간은. 천사야 불 질러라. 머리부터 홀랑 대머리 만들어버리죠.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 이런 말씀 하셨어요.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8장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는 곳에 왔어요. 그리고 머리 둘 필요도 없는 곳에 오셨습니다. 머리 안 둘 거에요. 떠날 거에요. 주님께서 떠날 거에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7장 29절에서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그런데 그 날이 이미 소급해서 앞당겨서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질 뿐이지 실제 인자의 날이 되면 그 소돔과 고모라의 맛배기로 보여줬던 그 순간의 날이 마지막에 우리가 믿던 안 믿던 기다리던 안 기다리던 관계없이 그냥 사그리 해서 다 옵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버렸으니까 너희들 불바다 되도 너희들은 할 말 없다. 이유는 딱 그거입니다. 하나님 뒤끝 있지요. 뒤끝 있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못 알아봤다. 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너희들은 보이는 거고 너희들은 나타나는 거고.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 것을 설명하거나 해석할 수 없다. 너희들이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 말을 그동안 내가 너희에게 해왔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불 타 없어질 이 세상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굉장히 쉽지 않습니까?


10 Minutes.

 

 

강남-누가복음 17장 29절 (극단맨) 2300620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과거는 미래와 대결하는 것이 아니고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와 대결하게 되지요. 그러면 미래조차도 과거와 연속성을 가진 과거의 것에 포함됩니다. 아무리 2030년 50년 돼도 과거는 과거에요. 주님이 떠나버리면. 오히려 반대로 그들이 주님을 밀쳐버린 속성이 2030년 50년 돼도 동일하게 거기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첫째 시간에 그렇게 모든 것이 주의 날에 불로 된다면 그러면 주님 쪽에서의 대책은 뭐가 있는가? 다 불질러놓고 다 태워버리고 그러면 뭐 천국은 전부 다 천국은 아무도 없는 게 되지 않느냐. 성경에서 죄인이 구원받는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죄인은 무슨 수로 구원 받습니까? 어떻게 그 천국에 갑니까? 그런 문제가 있지요.


죄인이 천국을 가는 게 아니고 우리가 독일 가는 게 아니고 독일이 오지요. 이미 완료된 인자의 나라가 완성의 의미로 이곳에 오게 됩니다. 그날이 뭐냐? 그것이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 ‘성령 안’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주께서 결국은 불로 다 싸질러버리는 이 세대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미리 앞당겨서 성령 받는 사람을 이 세상에 출현시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렇게 살아가면 되지요. 불 속에서 살면 돼요. 참 쉽지요. 불 속에서 살면 되지요. 불 속에서 산다는 말은 그냥 내 모든 일을 불과 관련해서 바라보는 거에요. 불과 함께 불과 관련지어서 모든 것이 불타버릴 수밖에 없음을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것들이라고 느끼는 것.


그럼 불 속에서 산다는 말을 이걸 풀이해보면 이거는 종말이죠. 끝이죠. 불 속은 끝입니다. 심판입니다. 심판 속에서 살면 되지요. 불 속에서 산다는 말은 이미 심판을 다 완료 받은 받을 심판 다 받은 사람으로 살면 되는 겁니다. 갑자기 굉장히 수월해지지요. 불 속에서 살면 사람의 날에 살았던 기억이 반복해서 소환되고 반복해서 제거된다. 사람의 날에 살았던 기억이 반복해서 소환되고 반복해서 제거돼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은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주님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그 주님의 의가 죄 바깥에 있거든요. 죄 세계 바깥에 있는 주님의 의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그걸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내가 너희에게 해주는 것이 싸그리 불로 타버릴 이후의 없어질 이후에 새로 만든 거야 라는 새로 만든 가치를 위하여 그들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기억을 반복해서 소환시키고 반복해서 제거, 피로써 또는 불로써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제거해주는 거에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무의미하잖아요. 무의미를 뭘로 바꾸느냐? 탈의미로 바꿉니다. 탈의미라 해가지고 얼마 전에 제가 강의, 제가 언급한 적이 있어요.


무의미, 의미가 없는데 거기서 의미 없는 것을 다시 의미를 끄집어내버리면 기존의 의미체제에서 탈출했다. 탈의미가 생겨요. 탈의미. 왜? 주님이 탈출했기 때문에. 모든 의미는 최종적으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그 세계에서 모든 의미가 완료가 됩니다. 그 완료된 의미가 이 세상에 살게 되면 우리 같은 경우는 죄인인데 졸지에 의인이 되었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기존의 체계에서는 오는 체계를 상상도 못합니다. 예상도 못하죠. 그래서 “너 죄인이야? 그러면 너 지옥 가” “난 아니야. 나 의인이 되었어.” 할 때 “의인이 뭔데?” “나도 몰라.” 다만 중요한 것은 죄인 되었다는 것은 나쁜 짓해서 죄인 된 게 아니고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죄인 되는 거고 새로운 피조물이란 이유 때문에 의인된 거에요.


그러면 그 사람이 묻지요. “도대체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예수님이 만들었지.” “예수님이 누군데?” “몰라.” 예수님을 언어로 모르면서 어떻게 설명해요. 그분이 하셨는데요. 소통이 환장할 지경이에요. 저보고 닦달하면 안돼요. 이게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평소에 예수님께서 말이 안 되는 말씀을 계속 했는지요.


마태복음 17장에 보게 되면 17장 20절에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이게 극단맨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극단맨이에요.


네가 믿음이 있으면 동전을 옮길 것이요. 동전 옮기는 것은 사랑과 영혼에 나오는 그 영화 보면 귀신이 동전 옮겨요. 그 정도는 해요. 그게 아니고 동전이 아니고 산이라니까요. 산.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한다. 아니 말이 되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말입니까 막걸리입니까? 어떻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합니까. 바늘구멍 특수제작해서 커다란 구멍이면 몰라도 안 되잖아요. 안 되는 말만 하는 거에요. 안 되는 것.


멸망 대상이 알아서 뭐할 건데. 알아서 구원받는다 없습니다. 알아서 구원받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의 앎을 극단으로 하여튼 극단맨은 모든 게 극단이에요. 내가 안다는 것은 불 심판 받을 이 세상에서 알았던 거고요. 그러면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세계에서 안 것이 나를 구원한 거죠. 주님이 알아서 나를 구원한 거에요. 주님이 알아서.


열왕기상 18장 38절에 엘리야가 제단 쌓고 바알과 아세라 하고 배틀, 하나님 응답 배틀하는 그 장면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하나님 나타날 때 어떻게 나타납니까? 불로서 나타나가지고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증거가 뭐에요? 핥듯이 전부 다 태워버리는 게 여호와의 나타나심이에요. 인자의 날이 그래요.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베드로후서3장 있지요. 전에는 물로서 심판 받았지만 노아의 홍수때 물 지나가고 난 뒤에 살아남은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물 지나간 자국에. 답변해보세요. 노아 홍수때 물이 지나간 뒤에 살아남은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도 없지요. 노아 방주는 물 위에 떠있었으니까 해당사항 없고요. 물이 지나간 뒤에 살아남은 거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없애버리는 거에요. 하나님의 뜻은 모조리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말 궁시렁 궁시렁 하지 말게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7장 26절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온다는 말은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왜? 처음부터 없애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없어지라고 태어난 거에요. 그들이 나를 밀치고 나를 버리라고 그들을 만든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쏘시게 되기 위해서 만든 거에요. 인간이라는 것은.


그것 때문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겁니다. 형상 자체가 갖고 있는 심판, 그 심판에 인자가 하나님의 형상이 심판 대상이 되고 또 심판주가 되는 거에요. 참 이런 이야기가 기존 인간 세계에서는요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니까요. 체계가 완전히 달라요. 본인이 본인을 때리고 본인이 때린 본인을 구원하고 이게 말이 돼?! 그게 말이 되냐 이 말이죠.


진정한 저주라고 하는 것은 이겁니다. 내어버려두는 거에요. 그냥 살도록 내어두는 게 저주에요. 로마서 1장에 나오는 “내어버려두사”. 저주받아요. 그러면 주께서 천국의 자기 백성 할 때 내어버려둔다의 반대는 뭡니까? 기어이 간섭한다 이렇게 되겠지요. 기어이 간섭한다. 간섭하는 이유는 간섭하는 방법은 주께서는 이런 아이디어를 냈어요.


뭐냐 하면은 자신이 택한 백성 이마에 도장을 찍어놓고 본인이 특정 인간에게 도장 찍어놓고 이마에 도장 찍어놓고 자기가 찍은 도장 찾으면서 가만 놔두지를 않는 거에요. 여기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나옵니다. “내 다리 내놔.” 자신의 피로 이마에 표시를 해놓고 에스겔 9장 44절과 46절에 천사가 와서 이마에 표시를 해요. 십자가 모양 표시를 하는데 그건 뭐 큰 의미를 두시지 마시고 그걸 신약에 와서 요한계시록 22장 “그들의 이마에 주의 이름이 있느니라” 그들 이마에 주의 이름이 있느니라.


원래 이마는 레위기 13장에 보면 이마는 저 사람이 문둥병 걸렸다 안 걸렸다를 어떻게 표시하느냐 하면은 이마에 색깔이 좀 이렇게 변하면 대번에 제사장들이 “문둥병 걸렸다” 하고 선언해버려요. “나가 진 밖으로 나가. 나가. 나가. 이스라엘 살 자격 없어. 나가.” “그럼 언제 돌아오는데요?”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서 색깔이 없어질 때 그 때 들어오는데 그냥 못 돌아오고 문둥병자가 회복됐을 때 드리는 제사가 있어요. 율법의 제사. 율법 제사 드리고 들어와.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아시지요. 새 두 마리 잡아서 한 마리 죽이고 피 바르고 피 발린 새는 공중으로 날아가는. 너는 피 때문에 산거야. 다시 말해서 네가 피 때문에 고침을 받은 게 아니고 피를 내가 되찾은 거야. 피를 되찾는 하나의 매개체로서 어떤 멀쩡한 인간을 문둥병 만들었고 문둥병 된 인간을 하나님께서 치료시킨 거에요. 인간은 주의 일의 시다바리인데 자체적으로 인간은 아무 의미 없어요. 자체적으로.


사람들은 그러지요. 이 세상에서 더운데 참 열심히 삽니다. 열심히 사는 건 인정하겠는데 그게 의미가 없어요. 열심히 사는 게. 그러면 의미가 있을려면 어떻게 됩니까? 의미는 애초부터 없어요 인간은. 그러면 천국 가는 건 뭡니까? 탈의미. 기존의 의미에서 구멍이 나야 되죠. 탈의미. 기존의 인간체계의 의미체계에서 버림받아야 되지요. 누구처럼? 인자처럼. 예수님처럼 버림받아야 되지요. ‘미쳤구나. 돌아도 저렇게 미치는 수도 있구나’ 이런 식으로 욕 얻어먹어 가면서.


아까 제가 글 쓸 때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의 죄를 소환시키고 하는 말 했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인간의 모든 기억을 주의 말씀이 다 뜯어냅니다. 없앤다는 말이 아니고 탈의미라는 것은 덮어씌우는 거에요. 골로새서 한번 보겠습니다. 2장 14절, 15절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우리가 하는 것에다가 파스를 갖다 붙이지요. 죄보다 많은 털이 있는 거기에 파스를 딱 붙입니다. 그 다음부터 여러분 아시지요. 파스 뗄 때 파스만 떼어졌습니까? 털 뽑혔습니까? 탈의미. 나의 개성, 나의 나됨이라는 것이 완전히 다 뽑혀버렸죠. 다 뽑혀버린 거에요.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은 최후의 날 이후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게 성령이에요.


성령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 이미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시켰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영이에요. 일을 마무리한 성과를 듬뿍 담은 영이에요. 불이 내리는 곳에 성령이 내려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불이 내리는 것은 심판이잖아요. 그런데 심판 받아야 될 그곳에 성령의 불이 와버리면 어떻게 돼요? 심판도 완료되고 구원도 완료되지요. 나는 더 이상 너한테 물을 죄 값없다 이렇게 되지요.


그걸 골로새서 2장에서는 죄를 도말하는 거에요. 뽑아버려요. 완전히 우리를 대머리 만들어 버려요. 털이 홀라당~완전히 대머리를 만들어요. 대머리를. “이것 봐, 이 죄 없는 것 봐 반들반들 모습 한번 봐.” 지금 주님 뭐라고 하십니까? 성령의 파스를 갖다 붙여버리면 우리의 죄가 없는 게 아니고 어디 달라붙어 있어요? 성령 파스에 붙어있어요. 우리는 그 성령 파스 보고 “어! 내 죄가 저기 다 달라붙어 있네” 저기 다 붙어있어요.


매일같이 소환된다고 했지요. 매일같이. 계속 죄 생산되면 매일같이 성령 와서 매일같이 뜯어내는 거에요. 도대체 파스 몇 장이에요? 연세 많으면 파스도 많이.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도말하시고 도말하시고 도말하시고 뜯어내시고 뜯어내시고 제거하시고 제거하시고 계속 하는 거에요. 성경 공부도 죄고 기도하는 것도 죄고 선교, 전도, 헌금 다 죄거든요.


그 죄를 계속해서 극한보다 넘어서는 완료된 성령께서 와서 그것을 ‘이거는 내가 가져갈게.’ 왜? 예수님의 예수님의 피 됨을 증거하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주님 가져가셔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의의 관계 의를 생산하는 대상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의는 우리의 소망이다? 아니다? 주님의 소망이죠. 천국은 우리의 소망이다? 아니죠. 주님의 소망이죠. 내가 양이 되는 게 소망이다? 아니죠 목자의 소망이죠.


내가 나를 잃어버렸다? 아니죠. 요한복음 6장 39절 “아버지께서 택한 자를 주께서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억력이 별로 안 좋아 다 잊어버려요. 휴대폰도 잃어버리고 다 잊어버리는데 주께서 우리를 잊어버리지 않고 챙겨주십니다. 주께서. 문제는 불쏘시개 같은 이 세상에서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네가 왜 그게 믿어지니?’ 이 질문을 하게 되어있어요.


이렇게 답변하죠. ‘내가 해도 해도 너무 했지? 그렇지? 나도 이걸 못 믿겠어.’ 그게 정답이에요. ‘너는 어떻게 믿었어?’ ‘아니 아니 난 안 믿었어. 내가 믿어질 거 같으면 내가 믿었지. 이건 내가 믿지 못할 일이 나한테 일어난 거야.’ 믿지 못할 일이 나한테 일어난 거야.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장기판의 알입니다. ‘장기 알’.


장기판의 장기 알은 주체가 따로 있고 숨어 있는 주체의 활동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체로부터 움직여지는 거에요. 광주의 목포의 장로님이 질문한 댓글에서 질문한 유명한 말.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걸 내가 어떻게 지킵니까? 어떻게 지키는 게 아니고 우리가 누구의 장기 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장기 알의 특징이 있어요. 특징이 뭐냐 하면은 늘 달라요. 왜냐하면 장기 알은 그 놓여있는 지점에 의해서 전체 판에 배치도가 다 그때그때 다 달라요. 다 달라요. 분명히 주일날 국수 한다 했잖아요. 더워서 냉면 한다. 왜? 국수 한다 했는데. 배치가 달라.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고. 이 말은 뭐냐? 자기 행동에 내가 책임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내 행동에 내가 책임질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면 적절해요.


자, 불은 여호와죠. 여호와가 불이라는 것은 여호와가 뭐다? 심판주가 된다. 좀 더 깊이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는가? 그 정답은

■1 하나님이 창세전에 아들 되신 예수님이 심판받기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2 심판받는 아들이 하나님 형상이에요. 인간은 그 형상대로 만들어졌거든요.
■3 심판받고 심판받아야 되는 피조물로 만들어진 이유가 하나님의 아들, 세상을 통일하실 에베소서 1장 10절 통일할 그 분이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일한 그 모습이 심판이고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 예수님의 행하신 일어난 일이 원형이에요. 다른 원천은 없어요. 그분만이 원형이고 원천이고 형상이라는 거에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성령이라는 파스를 붙인 사람 외에는 몰라요 이게. 제가 파스라고 한 이유는 우리가 성령을 소유한 게 아니고 갖다 들러붙어서 떼이지도 않아요. 떼이지도 않아요 파스는 너무 단단해서. 시중에서 파는 파스 말고 병원 파스. 정형외과 파스는 되게 독해요. 그것보다 좀 못한 게 한방파스. 약간 약해요. 써보니까.


우리는 우리를 극단까지 몰아넣을 능력이 없고 극단으로 몰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요령껏 살고 싶어요. 적당하게 균형 맞춰서. 너무 밀면 자빠지는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를 그 규칙을 내가 정해요. 갑자기 장기 알 됐다가 자기가 장기판 자기가 잡아당기는 것과 똑같아요. 네가 장기판으로 한번 맞아볼래? 네가 구조로 한번 맞아볼래? 네가 이것 잘못했다 저것 잘못했다가 문제가 아니라 구조를 왜 잊어버렸냐고. 구조적 차원에서 맞는 수가 있어요.


그걸 우리는 세 자로 이야기합니다. ‘망했다’. 나 망했다. 개인적으로 잘못해서 망한 게 아니고 네가 속해 있는 영역, 환경, 그 구조를 왜 놓쳐버리느냐 이 말이죠. 이거는 미래의 구조가 아니고 새로운 구조에요. 새로운 세계의 구조. 물 심판, 불 심판 이후에 모든 심판이 끝나고 난 뒤에 생성되는 그 구조의 인물인데 왜 구조를 놓쳐버리니까 주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를 줄 수밖에 없지요. 장기판으로 맞아보세요. 퍼래요. 눈탱이 밤탱이 퍼렇습니다. 너 차 맞았나? 포로 맞았나? 말로 맞았나? 하면 판으로 맞았다. 구조로 맞았다. 구조.


그러니까 회개한다는 말은 구조를 이해한다는 거에요. ‘다시는 안 할게요’ 가 아니고 내가 완전히 다른 체제인지를 모르고 ‘내가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았는데 내가 나쁜 짓해서 벌 받았구나’ 이런 체제 자체가 바로 우리가 지금 잘못, 이 자체에서 관계없는 사람이란 걸 잊어버린 거에요. ‘내가 그때 행동 똑바로 했으면 이런 사단이 없었을텐데’. 아닙니다. 행동과 관계없어요.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이죠.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식상하기 때문에 같은 예를 들지는 않겠습니다만 아싸! 호랑나비. 김흥국이 독실한 불교 신자거든요. 지옥 갔을 때 본인이 했으면 본인이 남긴 호랑나비 다 회수해서 가야하는데 자기는 죽었는데 호랑나비는 남아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본인이 호랑나비 부른 게 아니고 주께서 부르게 하신 거에요. 주께서 태어나게 해서 호랑나비 히트 치게 만들었어요.


지옥의 구조와 심판의 구조. 구조로 때리는데 구조로 때리는 장소가 그 공간이 바로 지옥이라는 겁니다. 구조적으로 맞아요 구조적으로. ‘네가 이렇게 불 뜨거운 세계에 올 줄 네가 왜 몰랐나’ 이 말입니다. ‘내가 분명히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떨어지게 했지. 알아 몰라?’ ‘창세기 19장 성경에서 본 적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안 믿었어?!’ ‘난 그때 뿐인 줄 알았지요.’ 그때 뿐인 줄 알았다는 거에요.


자기가 주체가 돼서 그래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소리 들었지?’ ‘네 들었습니다.’ ‘왜 그거 안 믿어?’ ‘예수님이 해당되는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이게 성령이 안 와버리면 그 구조에서 오는 파스가 오지 않으면 혼자 살아요. 사실은 혼자 사는 게 아니고 악마의 말을 들으면서 살지만.


자, 이제 더 나가봅시다. ‘탈의미’. 탈의미가 될려면 예수님을 심판주로 봐야 돼요. 심판주니까 재판관이죠. ‘재판관’. 재판은 이미 끝났어요. 재판은 알 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재판은 그걸로 끝났어요. 안 버린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아담 안에 있는 자는 다 예수님을 싫다고 내치게 되어있어요. 그건 죄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 재판 끝났습니다. 살려주세요.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재판을 했으면 이 세상 재판 있지만 집달리라고 하는 게 있지요. 집달리. 집을 차압했을 때 압류했을 때 빨간 딱지 이런걸 TV나 고가의 물건에 갖다 붙이잖아요. 그거 하는 법원 행정 직원이 집달리잖아요. 집달리. 이 사람들이 뭘 하느냐 하면은 죄인들 가운데서 이마에다가 딱지를 붙여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여버려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가장 큰 저주는 뭡니까? 딱지가 안 붙어있는 게 저주에요.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어차피 끝난 인생’ 어차피 끝난 인생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그 자체로 지옥가야 되지만 할 수 없지.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마에다가 주의 이름이 붙어있어요. 요한계시록은 이마에 붙어있지요. 그 사도 바울에서는 마음속에 성령이 찾아온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걸 성령의 인 받았다. 장소를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같은 구약적 표현을 썼기 때문에 이마에 탁해요. 이마.


그런데 왜 이마에 하느냐? 악마가 이미 선점해서 악마가 자기 사람 이름에다가 마귀 이름을 숫자를 전부 이마에다가 박아놨어요. 666. 숫자를. 찜한 거에요. 내 사람이라고. 찜한 거에요. 마태복음 24장인가 보면 24장 24절,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누구를 미혹하게 한다? “택하신 자들”, 택한 자들도 했다는 말은 이미 다른 사람들 다 수중에 넘어갔다는 뜻이에요. 다 넘어간 거에요.


베드로전서 5장에 8절에 봐도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그 다음에 뭡니까?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은 삼킬 자를 찾아서 삼키는 일을 하는 거에요. 이게 보이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는 거에요. 그러나 보이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고 배후에 있는 악마가 지금 이렇게 보이는 세계를 만들었고 나타나는 세계를 만든 거에요.


보이는 세계, 나타나는 세계 그 배후에 주님도 계시고 악마도 있는 거에요. 여자의 후손도 계시고 뱀의 자손도 있는 거에요. 주께서 말씀을 해줘야 알지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는 자기 일상 생활하는 거 외에는 없잖아요. 그것만 생각하지 뭐 다른 거 생각합니까? 오늘 날씨 덥지요? 그것만 생각하잖아요. 에어컨 좀 높이면 안 됩니까? 이런 것만 생각한다고요. 카메라 이거 불타는 카메라에요. 항상 불과 관련시키세요. 어떤 사람이 옷 잘 입는다 할 때 불 잘 타는 옷 입고 잘 가고 있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벤츠 타고 가거든 불타는 벤츠타고 불타는 밤을 즐기기 위해서 불타는 데로 가는 거에요. 나이트 가서 불타라.


이게 얼마나 극단적입니까. 극단적 사고방식이에요. 북한에도 이런 극단적 사고방식 없겠다. 얼마나 극단적이에요. 주님께서 성도에게 부탁하는 것은 모든 극단적인 건 다 끌어모아라. 모든 극단적인 것은. 왜? 너도 망하지만 남들도 같이 망하니까 위로 삼아라. 다 망하니까. 별로 섭섭지 않지요? 다 망하니까.


성령으로 인을 박아버리면 그 사람은 주의 것이 그 사람에게 도달했습니다. 고객님 하면서 오지요. 여기는 택배. 고객님 택배 문 앞에 놔뒀습니다. 고객님. 번쩍번쩍 이모티콘 막 날리지요. 우리가 주님의 이 땅에 보내는 택배 물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인 줄 알고 불덩이에 들어오는 거에요. 다니엘 세 친구처럼. 불 속인 줄 알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지요. 우리가 생각도 못한 일을 합니다. 그게 뭐냐? 원수를 사랑해요. 원수를. 다들 사랑해봤지요? 원수를 사랑합니다. 그래 많이 저주 짓 많이 해라. 너 끝났어. 너 끝났어. 원수를 사랑하라. 그걸 아주 실제적으로 표현하면 원수에게 친절을 베푸세요. 친절의 친절을. 심지어 어떻게? 원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고 그러면 원수 머리 위에 숯불을 피워올라가지고 원수가 미안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요.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이왕 나온 상견례 마음껏 사돈 내외를 칭찬해주세요. 어차피 저주받을 거. “딸내미를 어떻게 이렇게 잘 키워놨습니까. 세상에 머리 좋지 인물 좋지 착실하지.” 그러면 사돈이 미안해서 “아이고 우리 딸 그렇게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은 우리 딸이 교회를 안다니는데.” “아이고 교회 다니면 뭐합니까. 나는 교회 안다녀도 우리 며느리로써 최고입니다.” “아니 장로님께서 어떻게 그런 말을.” “아이고 장로고 뭐고 진짜 최고입니다.” “혹시 없는 소리하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어차피 맛이 갔는데 뭐. 극단적으로 맛이 가버렸는데 뭐. 당신 며느리도 같이 불 탈건데 뭐.


여기서 사람들은 이제 묻고 싶지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준비된 정답이 있습니다. 준비된 정답.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나머지는 누가 책임진다? 나머지는 내가 책임질게. 네가 몸이 아파? 몸이 아픈 것도 뭐다? 그 나라와 의를 위한 적절한 장기 알의 배치입니다. 네가 시험에 또 떨어졌어? 그것도 그 나라와 의를 위함이다.


구하라고 되어있지요. 이건 십자가 전에 산상설교에서 한 거죠. 그러면 십자가 이후는 뭡니까? 주께서 이 말씀을 우리 속에다가 성령 속에다가 그걸 박아서 우리 속에다가 파스로 발라버리죠. 너는 이제 그 나라 의 외에는 다른 의미가 너한테 없어. 그 나라 의를 위하여 예수님 이 땅에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갔다 어떻게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기존에 있는 이 세상의 의미는 탈의미가 되요. 다 그 의미가 불이라는 심판과 더불어서 그 현장에서 전부 다 탈락하는 겁니다. 탈락돼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좋은 일이 있으면 갑자기 뭐 목돈이 생긴다든지 갑자기 돈이 20억 생긴다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아이고 20억 생기면 뭐하겠노.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게 그 나라와 의라면 제가 마지못해 20억 받겠습니다. 그 나라 의라면.’ 그런데 반대로 20억이 날라갔어. ‘아이고 어떻게 살지. 아니지 그 나라 의를 위해서 필요한 조치라면 그것마저 제가 감사하겠습니다. 고마워하겠습니다. 죄인 주제에 그동안 밥 먹고 살아온 것만 해도 어딘데요.’


그래서 다 같은 인간이지만 주의 날의 의미가 우리한테 덮치는 거에요. 이걸 어떻게 총괄적으로 정리하느냐. 총괄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거에요. 자, 사람의 날과 주의 날이 대립되어있습니다. 사람의 날은 체계가 선악체계입니다. 선악체계. 선악체계는 사람의 날이에요. 그런데 인자의 날은 무슨 날이냐 하면은 선악체계의 반대말은 뭡니까? 나무 두 가지 있잖아요. 안 다친 나무 뭡니까? 생명체계입니다. 생명체계. 우리가 어느 장소에 어떻게 사는지 간에 하나의 생명과 연관된 생명에서 창조한 인물로서 그 현장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오늘 본문으로. 누가복음 17장 26절 “노아의 때” 라고 되어있지요. 노아의 때라는 것은 인자의 날. 노아의 날. 자, 노아의 날이 무슨 뜻이죠? 노아에게 언약이 주어졌는데 그 언약이 빈말이었다 농담이었다 장난이었다 아니지요. 뭡니까? 노아의 날이 발생된 거에요. 노아와 맺은 언약이 말씀대로 성공하고 성취된 날.


그러면 노아는 노아의 날 때 노아가 그전에 홍수 이전에 노아는 누구와 동행했습니까? 여호와와 동행했지요. 그걸 창세기 6장에서 그걸 의인이라고 합니다. 동행했다는 것 때문에 의인이에요.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의인된 것은 아 참 말 극단적인데 말 알아들으시고 의인된 것은 여러분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가만두지 않아서 그래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성도와 성도가 만날 때 왜 상대방을 존중 안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주님이 그 사람을 때렸기 때문에 그래요. 뭘로? 장기판으로. 장기판으로 때렸기 때문에 그게 최고의 성도입니다. 주님한테 얻어맞고 사는 사람 최고의 성도입니다. 주님이 손댄 사람이에요. 어디 감히 인간이 평합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맞을 때 나도 주께서 때려주는걸 영광인줄 알아야 되지요.


그래서 대구강의하면서 “자녀들아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할 때 그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뭐겠어요? ‘자식들아 내가 하나님한테 많이 맞았다.’ 많이 맞았다. 내가 너희에게 남겨줄 것은 내가 많이 맞았다는 이야기. 주님 살아계시다 이 말이에요. 맞았다는 말은 기존의 내가 의미가 있는 의미를 탈의미, 그 의미가 선악체계에서는 의미 있었지만 생명체계에서는 그런걸 아예 묻지도 않는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그래도 믿음이 있어요. 나는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그러다가 맞은 거에요. 나쁜 짓 해서 맞은 게 아니고 현재 본인이 속해있는 누구의 소속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주께 맞는 거에요. 내가 그런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 했어? 안했어?! 손 내. 맴매. 내가 너 잘잘못에 네가 초조해하라 했어 하지 말라 했어. 내가 다 이루었다 했어 안했어?! 근데 네 인생을 왜 네가 걱정하는데?!! 맞아. 2000만원 돈으로 맞아. 너 돈쭐 맞아야 돼. 추가 2000만원 더 때려. 보너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4000만원 준다. 주의해! 네 알겠습니다. 이런 거에요. 이게 완전 미친 거죠. 극단을 넘어서는 거에요. 극단을. 예를 들어도 극단을 넘어선 예를 들어요.


그 다음에 28절 봅시다. 노아 때 여러분들 이해하셨습니까? 노아는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함께 있기에 홍수 이후의 존재가 되는 거에요. 홍수 이후의 존재가 노아 홍수 이전의 존재에서 사람들에게 홍수 이야기를 선포한 거에요.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같이. 사람들 몇 명 설득 당했습니까? 단 한명도 설득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존 체계의 극단 넘어가기를 거부합니다. 망했지 뭐. 할 수 없지. 원래부터 인간은 망하게 되어있는데.


그 다음에 롯 봅시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여기는 운율을 맞춰야 돼요. 그게 재미있어요. 시작!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 짓고 얼쑤~~” 이렇게 돼요. 이게 뭐냐 하면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날씨 덥다. 얘야 문 좀 열어줘. 서로 다 납득되는 이야기들. 다 납득되는. 여름인데 옷을 한번 바꿔 입을까? 다 납득되는 이야기. 아줌마 이거 콩나물 얼마에요? 이러면 못 알아듣습니까? 보기는 보아도 못 깨달아요? 2천원입니다. 대번 이야기하지요. 다 알아듣는 이야기. 다 그렇게 순환되는 이야기.


의미가 탈의미가 아니고 있는 의미가 소통이 원활하게 잘 통하는 그 세계. 그게 뭐냐?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주택 집 짓고 농막 짓고 전원주택 짓고 여행가고 밥 먹고 사우나 하고 느그 서장하고 같이 다 했지요. 마 이 정도야. 허세 떨고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마약하고 그때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자, 질문 하나 들어갑니다. 롯이 유황불 오는 걸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어요. 왜 몰랐는가? 아직 유황불이 안 왔거든. 나갈 때 유황불이 안 왔어요. 그러니까 이걸 롯의 믿음이라고 하는데 롯의 믿음이 아니고 주님의 믿음이에요. 우리는 일체 믿음 없습니다. 동행하시는 분의 믿음이 우리 믿음을 대체하고 대신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장기 알이라니까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이 세상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소급해서 지금껏 내가 태어나서 어느 초등학교 어느 중학교 전부 다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뺑뺑이 부딪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손길이었어요. 옛날에 은행에서 이렇게 돌려가지고 당첨하듯이 중학교 학군 배분을 그렇게 했거든요. 그때 간절히 기도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간절히. 가까운데 되라고. 그거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주님 마음대로입니다. 마치 우리의 운명이 내 마음 선에서 떠난 것처럼.


지금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주의 날을 살고 있습니다. 박탈당한 탈의미된 운명. 그게 나의 운명이라는 말이 탈락 되서 주님의 운명으로 바뀌어버린 그런 탈의미된 상태에서 주와 살고 있습니다. 불과 유황불 오는 것 그거는 우린 놀랄 일이 아니지요. 왜? 말씀이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말씀을 믿어버리면 다른 것은 실제로 되고 안 되고 기다려보자는 게 성립이 안돼요. 기다려보자는 것은 말씀을 못 믿는다는 뜻이니까.


지금 성경말씀 기다리자 하지 말고 지금 내가 하루하루 감사하느냐 이 말입니다. 지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께서 파스 붙여가지고 주님의 가신 길 있잖아요. 죽고 부활하신 그 길로 주님이 어떤 길로 가서 어느 골목으로 가서 어디로 빠졌느냐 그 좁은 길로 이끄신다는 것이 새록새록 날마다 느껴지고 동시에 내버려둔 자들이 불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뻔해도 너무 뻔하게 보이는 것.


나타난 것 보이는 것 그 배후에 안목 가지고 이 나타나고 보이는 것을 이렇게 볼 수 있는 것 이거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고 내가 해명할 수가 없는 찾아오신 거저 주시는 생명, 영생의 효과입니다. 움직이는 영생 덩어리에요 구원 덩어리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을 주님의 공로를 증거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아쉬워서 내뱉는 말이 다 부질없는 의미 없는 말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아쉽다 하지 말고 뭐를 주셨는가를 찾아가면서 감사의 감사를 더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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