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8장 17절 (어른의 시간) 230905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8장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늘나라를 어린 아이로 커버해버리죠. 막아버리죠. 장벽. 어린 아이가 늘 어린 아이 되는 거 아니지요. 늘 어린 아이 되는 게 아니고 어린 아이도 언젠가 어른이 되잖아요. 그러면 어린 아이가 계속 어른 되고 있는데 어른 되고 있는 어린 아이는 천국에 들어가느냐 그런 문제. 못 들어가지요. 언제까지 어린 아이인데? 그런 건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것부터 생각하면 쉬워요. 하나님은 가차 없이 다 죽인다. 이것을 자꾸 놓쳐버리면 성경 말씀에서 예수님이 하는 말을 납득하기 곤란해요. 하나님은 다 죽이는 거에요. 다 죽이는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어린 아이 내세워서 다 죽여요. 누구든지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어린 아이같이 살아라 이게 아니고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오느냐 하면은 어디에 못 간다?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 들어갈 수가 없는 거에요.
이 점은 우리가 어린 아이같이 되면 내가 인격 성장에 도움 된다든지 어린 아이같이 되게 되면 나는 훌륭한 사람 된다든지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나 사적으로 얼마나 더 훌륭하게 될까? 아! 어린 아이같이 되면 그 정도로 훌륭하게 되겠구나 지금 그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은 의도를 갖고 있는데 가차 없이 다 죽이고 다 망하게 하신다. 어린 아이를 앞장세워서 어른의 질서를 정지시킨다. 정지시킨다. 천국에 까지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stop시킨다. 동결시켜버리는 거에요. 너는 거기까지가 너의 한계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이해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너희들 천국 못 간다고 하면 되는데 마치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왜 이야기했느냐? 못 가는데 가차 없이 다 죽이는데. 세상에 어린 아이로 멈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어른 되잖아요. 다 죽이는데 왜 다 죽인다 하면 될 텐데. 그냥 너희 다 죽어 천국 못가 하면 될 텐데 마치 어린 아이를 내세워서 안 되는데 어린 아이는 들어갈 수 있다고 그렇게 넌지시 제시함으로서 뭐를 강조하느냐 하면은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세계를 왜 다 천국에 못 가게 하느냐? 그 정당성, 하나님 쪽의 정당성 너희들을 못 가게 막는 정당성을 어린 아이로 내세운 거에요.
그리고 어린 아이를 이렇게 내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 앞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이 만져주시기를 원하고 이렇게 오니까 그걸 보고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애들은 가라 이렇게 했지요. 애들이 노는데 아니야 가라 했지요. 그러니까 그 말을 왜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축복을 받고 직접 안수를 받고 직접 사랑받는 것에 대해서 어른들이 약간 시기가 난 겁니다. 이거는 어른들처럼 성숙해야 주님께 안수받을까 말까 사랑받을까 말까 하는데 이 철딱서니 없는 저 어린 아이한테 사랑을 주니 이게 혹시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이 받는 내가 받는 축복을 가로채지 않을까. 물론 주님의 축복에 한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른이 된 보람이 없잖아요. 열심히 한 보람이 없으니까. 애들 빼냄으로서 애들아 이 어른처럼 되어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복 받을 수 있는 거야. 가서 엄마한테 더 배우고 와 뭐 이러한 자신의 평소의 생각을 밀어붙이는 것을 주님께서는 모를 리 있겠어요. 다 알지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 어려운 난제를 한번 파고들어가 봅시다. 예수님의 안목에서 보게 되면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어른과 대결합니다. 대조시키죠. 이 세상에서 어린 아이와 어른이 대결하면 누가 가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어린 아이보다 어른이 더 가치 있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어른 = 어린 아이+시간이죠. 이 공식이거든요.
그러면 공식대로 좌변 우변 하게 되면 어린 아이란 어른에서 시간 빼기. 어른은 시간을 빼는 겁니다. 이게 인간은 안 빠져요. 인간은 시간에 밀리기 때문에 시간에 떠밀려가기 때문에 이게 빠질 수가 없는 거에요 시간이. 그리고 심지어 어린 아이라고 고정된 존재가 아니에요. 어린 아이도 언젠가 시간이 덮쳐버리면 어린 아이는 어디로 이동 중입니까? 어른으로 예비 어른이죠. 예비 어른. 어른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뜻에 의하면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어른 쪽으로 가지 않는 자만이 하늘나라 간다는 말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다시는 어른이 되지 않고 반대로 가는 거에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하는 영화 있지요. 시간이 어린 아이 쪽으로 가는 자, 그런 자만이 천국에 간다면 도대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없지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함으로서 우리들 가운데 누가 천국 가느냐 라는 질문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파괴시켜버립니다. 그래서 뭐냐?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다 죽여버린다는 거에요. 우리 가운데 누가 천국 가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제시한 어린 아이가 어디로 소급되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 본인으로 소급되는 방식을 세상을 통해서 증명해내는 거에요. 어린 아이의 관점은 천국 보이는데 어른 관점은 천국에 못 갈 관점으로 그들이 자라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그만큼 컸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뭘 생각하겠어요? 어린 아이와 어른과의 그 차이가 뭐냐를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이 차이는 시간 요소의 개입으로 이 차이가 없어요. 어린 아이가 나중에 커서 어른 되니까 어른이나 어린 아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차이가 될려면 뭘 빼야 되느냐 시간을 빼야 돼요. 그런데 인간이 시간을 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은 시간이 안 빠져요.
자, 그렇다면 어린 아이가 천국 간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같은 자만 만들겠다 하는데 예수님 본인이 모델이죠. 그럼 예수님 본인을 모델로 하게 되면 예수님은 뭐냐 하면은 바로 이거에요. 성령으로 잉태한 분이에요. 성령으로 잉태한 분이거든요. 이게 마태복음 1장을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1장 18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라고 되어있어요. 성령으로 잉태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성령으로 잉태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이 말을 이해할려면 성령으로 잉태하지 않은 자들이 누구죠?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은 자들이 누굽니까? 여러분. 우리들이죠.
그러니까 주께서는 예수님 빼놓고 다 망하고 죽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에요. 인간들이 하나님한테 어떤 소리를 들어도 우리는 마땅한 거에요. 그래서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는 벌은 복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사랑이에요. 왜? 우리 주제파악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주제파악을. 성령으로 나지도 않은 게 어디서 천국을 갈라고. 이게 주제파악도 못하고 말이야. 봐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났잖아. 성령으로 나신 분이 어린 아이만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했잖아. 수근 대지마. 우리 중에 누가 구원받는지. 수근 댈 사항이 아니에요. 성령으로 잉태돼야 돼요. 성령으로.
성령으로 잉태돼야 되고 또 하나의 조건이 뭐냐 하면은 부활입니다. 부활. 부활에서는 어른과 어린 아이가 구애받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은 부활세계는 눈밭과 같습니다. 넓은 눈밭과 같아서 강아지가 뛰어놀아도 어른이 뛰어놀아도 어린 아이가 뛰어놀아도 어떤 책임을 그에게 지우지 않습니다. 그게 부활이에요. 부활세계. 어떤 의무를 묻지를 않아요. 어떤 책임을 묻지를 않아요. 왜냐 하면은 부활은 그 전에 무슨 사건이 있기 때문에 부활입니까? 이미 죽은 자로 간주했고 성령에 의해서 부활됐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서 임신 또는 성령으로 잉태한 자의 공통점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은 신기하게 잉태했다는 뜻이 아니고 뭔가 하나 죽고 난 뒤 죽음을 처리하기 위한 하나님만의 아주 단호한 결정적 방법이 성령이에요. 성령. 모든 인간을 죽여놓고 그 죽음을 통해서 이제는 책임을 묻지 않는 세계를 펼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자, 그러면 아까 처음에 한 강의 연결시키면 인간은 어린 아이 될 수 없습니다. 무슨 요소 때문에 그렇습니까? 시간 요소 때문에 그렇죠. 그러면 시간 요소가 이미 깃들여져있는데 그걸 어떻게 다시 어린 아이가 될 수 있다는 겁니까? 간단해요. 죽이면 돼요. 죽으면 돼요. 죽고 그 다음에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면 돼요.
그러면 부활의 세계인데 이 부활의 세계는 전부 다 어린 아이 같아요. 왜? 시간 요소가 가미되지 않기 때문에 너 부활된 지 몇 년 됐어? 10년 됐습니다. 10년 됐는데 너는 왜 그것밖에 안돼? 라고 물을 게 없어요. 부활의 세계는 성령 세계고 성령의 세계는 시간이 없는 세계에요. 시간이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시간 따라 발전한다든지 성장한다든지 진화한다든지 그런 요소가 덧붙일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여러분이 이해해야 될텐데 지금 제자들이 어른들이잖아요. 이 제자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철저하게 어른 되면 돼요. 철저하게 시간을 짊어지면 돼요. 시간을 짊어지고 가면서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야를 혹독하게 느끼는 거에요. 그래서 이 세상 방법은 두 가지 있지요. 어른이 어린 아이 될려고 하는 방법, 이게 뭐냐? 다른 사람 되는 거에요. 오늘 제목을 이걸 할까 싶은데 방법은 하나에요. 어른이 어린 아이 되는 방법은 첫 번째는 내가 이 어른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시도를 하는 거에요. 다른 사람. 아주 돌발적으로 다른 사람 시도.
두 번째는 철저하게 어른으로 죽고 망하는 것. 철저하게 철저하게 제대로 제대로.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죽인다고 했으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이유를 알고 죽어야 될게 아니겠습니까. 어른이기 때문에 죽는 거에요. 시간을 듬뿍 담았기 때문에 죽는 거고 시간에 담다보니까 작년보다 더 나아졌고 성숙했고 성화됐고 훌륭하고 도덕적이고 이게 계속해서 떨어지지 않는 거에요. 어린 아이는 커녕 점점 더 어른스러움의 자기 한도까지 밀어붙이는 겁니다.
여기 평소에 안하는 짓을 했는데 여기 교재 있지요. 노래 세 개를 했는데 노래 세 개를 왜 했는지 여러분들이 이제 아셔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은 철저하게 어른 되기에 곡 두 개, 철저하게 다른 사람으로 시도해보는 노래 하나. 그게 첫 번째는 실로암. 실로암은 세 번째로 하고 이승훈의 마지막 편지 가사 있으니까 볼펜 들고 제가 동그라미 치라는 부분에 동그라미 치시면 돼요. 노래교실. 가사에 동그라미 쳐보세요. 자세히 한번 봅시다. 노래교실.
믿어지니 우리 사랑 끝내야 할 운명이 눈 감아도 내 가슴속엔 항상 너뿐일 텐데
알고 있니 끝내 우린 남이 될 수 없기에 가슴속에 내 남은 사랑 묻어두고 가는 걸
해질녘 노을 보며 함께 수놓은 꿈들은 스치는 바람처럼 다 부질없는 꿈이었나
보고 싶은 마음도 아름다운 추억도 고이 접어 간직하려해 이별 뒤에 그 약속까지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할 수 없지만 영원보다 더 오랜동안 사랑하겠노라고.
어떻습니까? 강의 재미있지요? 보세요. 이게 어른들의 세계에요. 어른들의 세계. 결국 인생은 시간과 더불어서 가요. 시간과 더불어 가면서 희망을 가져요. 나도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자. 나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사람답게 살아보고 그래서 이 세상을 이 짧은 인생이지만 후회 없이 행복하게 한번 살아보자 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편지 이승훈 씨의 가사에 보게 되면 끝내야 될, 얼마나 헤어지고 답답했으면 여기서 자살해버릴까. 끝내버릴까. 끝내야 될 남이 될 수 없는데 이미 남이 되어버렸다는 그 모순. 그 다음에 해질녁 노을, 해질녁 노을이 무슨 뜻이에요? 강의 핵심이 이겁니다.
인간 자체가 하나의 팬케익처럼 쟁반이거든요. 해질녘하면 해가 어떻게 됩니까? 지지요. 시간의 뭡니까? 언저리. 노을이 져버린다고요. 해지는 거 보면서 이 가사의 주인공은 해질 노을처럼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내다보지요. 이게 바로 어른들의 결말입니다. 어른들 세계의 결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하나도 낯설지가 않아요. 왜? 쟁반보세요. 이 언저리 절벽이잖아요. 절벽. 결국 절벽으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게 시간의 언저리, 그것을 노을로서 표현한 겁니다. 노을로서. 저 해질녘 노을 보니까 내 신세를 닮았구나. 아 슬프다 이거요.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게 꿈이죠. 해지는 거 보니까 이게 꿈인가? 그동안 뭐였어? 도대체 뭐였어? 서로 사랑한다는 게 뭐였어? 꿈인가? 보고 싶은 마음도 아름다운 추억도 고이 접어 간직하려해 이별 뒤에, 이별은 상상도 못했지요. 사랑하면서 이별까지 생각하는 사람 어디 있어요. 간 보는 거지. 이별 뒤에 약속까지 할 수 없다. 이미 끝났다. 내 인생 끝났다. 그러면 결국 어른으로서의 이 땅의 삶이라는 것은 어른으로서의 삶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난다는 겁니다. 이게 어른이에요. 그럼 어린 아이 되는 방법은 철저하게 이것을 경험해야 돼요. 철저하게. 하나 더. 그 다음에 슬픔 그 뒤에 오는 고독.
비 오는 가로등 밑에 갈 곳을 몰라서 헤매는
가엾은 여인의 모습이 내 눈에 비춰질 때
우리의 슬픔도 그것과 똑같으리라
갈 곳을 몰라서 헤매는 비 젖은 나의 영혼아
바람이 불어와서 잎새는 떨어지고
떨어진 그 잎새가 바람에 굴러도
우리네 슬픔도 그것과 똑같으리라
갈 곳도 모르는 여인아 어디로 걸어가나.
여기까지. 자, 한번 보세요. 이게 어른들의 세계의 내장되어 있고 잠복되어 있고 잠재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되 이미 자기가 생각한 모델이 있고 그 모델 때문에 버티다가 에이 안 되면 이거하지 이런 식으로 선택을 하는데 항상 모델은 뭐냐 하면은 자기 이상향은 어른들 세계 어디 가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으로 만났는데 6개월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이상향에서 변합니다. 인간은. 본인이 변해요. 그런데 다른 사람보고 변했데. 자기는 자기가 변한 건 모르고. 자, 이렇게 되고 그 다음에 또 중요한 게 있어요. 그렇다면 이렇게 어른은 철저하게 어른이에요. 어른에서 어린 아이 갈 수 없어요. 그러면 그것 말고 직접 우리가 어린 아이 되면 되지 않겠는가. 그게 실로암.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자율성이에요 자율성)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는 차가운 새벽이었소 (기존의 다른 사람 되기 그 경계선입니다.)
당신 눈 속에 여명 있음을 나는 느낄 수가 있었소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나에게 영원한 이 꿈속에서 깨이지 않게 하소서.
여기까지. 자, 한번 보세요. 실로암의 특징은 뭐를 아느냐? 미리 알아요. 지금의 나와 달라진 나를 미리 캐치해요. 반칙입니다. 이런 것은 종교에요. 이것은 예수님의 뜻하고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 죽일려고 하시는 거에요. 망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망치는 방식대로 더 철저하게 어른답게 해지는 노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돼요. 그게 합당하고 그게 맞고 그게 감사해야 됩니다. 내 소원대로 내 뜻대로 되는 일 하나도 없을 때 그게 주의 뜻입니다. 그게 징벌이라면 그 징벌조차 사랑해야 되고 징벌조차 복인 줄 알아야 돼요.
자, 그렇다면 이제 가요교실은 끝났으니까 차분하게 들어가 봅시다. 해결책 한번 보겠습니다. 물리학에서 곡선 v와 곡선 t에서 인간의 모든 물체를 물리학에서는 운동으로 봐요. 운동. 가속도. 속도 말고 가속도. 가속도는 속도의 변화율을 가속도라고 해요. 여기 속도 vο에서 v로 갔을 때 기울기가 이렇게 됩니다. t할 때 이때 면적은
x=xο+vοt+½at²
시간 요소, 시간 요소가 t가 돼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사물을 볼 때 물리적으로 보면 반드시 무슨 요소가 필수적이다? 시간 요소를 집어넣는 거에요. 그러면 자아, 나는 반드시 뭐가 들어간다? 시간이 가미되어서 나에게 가속도가 붙으면 나는 날마다 보다 나은 쪽으로 변화한다는 의식을 갖습니다. 이게 무슨 의식이냐 하면은 어른 의식이에요. 이게 어른 의식. 이게 물리적으로도 딱 나오거든요. 나를 하나의 질점이라고 하는데 질점, 실체, 또는 물체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은 시간이 주어지면서 나는 과거에서 현재 이만큼 시간이 투입되었으니까 투입된 만큼 나는 이 현실 속에서 점점 더 뭔가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제가 주일날 설교에 했지요. Epoxy Resin. 아십니까? 공예품. 공예품 알아요? 어떤 장미같은 거 이런 거 집어넣고 갑작스럽게 찐덕찐덕한 거 그거 부어가지고 굳혀놓으면 투명하게 그게 보이잖아요. 그게 뭐냐? 공예품이에요 공예품. 알지요? 투명한 공예품.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은 시간 요소가 있으면 자아를 뭘로 보느냐? 자신이 만든 공예품으로 만드는데 일생을 다 보냅니다. 평생을. 내가 만든 공예품을 내가 보면서 그걸 즐기는 거에요. 아 나 인생 나 진짜 너무 아름답게 산 거 같애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 본인이 본인을 제작하는 거에요. 이것이 잉태치 못한 자의 출생하고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잉태한 것과 인간의 육신에서 태어난 것과 차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만든 공예품을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들어가지 못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네가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라고 할 때 그 어린 아이를 어른의 세계에서는 어린 아이가 하나의 과거사에 본인이 있었던 vο죠. 처음 태어났을 때 시간이 흐르기 전에 처음 태어났을 때 어린 아이지만 이 어린 아이의 내부에 어떤 잠재성이 있느냐 하면은 점점 더 시간을 통해서 내가 생각한 내 공예품을 내 인생이라는 공예품을 만들은 그 속성을 내가 그것을 지울 수가 없어요.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슬픔 뒤에 고백이라든지 그 다음에 마지막 편지에 나오는 다 부질없는 꿈이었나, 끝내야 될 운명, 이게 두 가수가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모두의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가. 그래서 가사 절절하고 노래도 참 좋잖아요. 좋지요? 꼭 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것을 교회에서는 뭐로 극복하느냐 하면은 실로암으로 극복하는 거에요. 실로암으로. 문제는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진흙 발라서 눈 뜨게 했다는데 눈 뜨게 하면 뭐합니까? 뭐가 작동하는데? 시간 요소가 멈추지 않고 계속 주어지는데요.
내가 다른 사람 만드는 그것도 나의 공예품이에요. 이전까지는 내가 예수님을 몰랐는데 이제는 예수님과 알게 되었다라고 시작하면 여기 뭐가 주어집니까? 시간 요소가 주어지니까 가속도가 붙는 거에요. 가속도가. 계속해서 가속도가 붙어요. 이거는 자기가 자신의 공예품으로서 나중에 천국 갈 때에 자기 자신을 가지고 갈라고 그렇게 시도할 수밖에 없지요.
자,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신 것은 약이나 올릴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기어이 뭐로 만들겠다? 어린 아이로 만들어주겠다는 거에요. 어린 아이로 만들어주고 시간이 아무리 가미해도 어린 아이가 어린 아이, 어린 아이가 어린 아이 계속 어린 아이로 남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 빼놓고는 전부 다 성령으로 잉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가 될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성령으로 잉태했다 이 말은 잉태된 자는 나로 인하여 되어질 일은 더는 없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해가지고 예수님 혼자 일했습니까? 아버지와 더불어 일했어요? 아버지와 더불어 일했죠. 예수님이 아버지와 더불어 일할 때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뭐가 있었어요? 성령이 있었어요. 성령으로 잉태한 게 잉태로 손 터는 게 아니고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은 계속 성령에서 계속 관계를 맺은 거에요.
성령 관계 맺은 것이 바로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사다리가 나와요. 사다리 할 때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지요. 연락책이죠. 연락책. 계속해서 연락책으로 활동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때는 신적인 놀라운 능력을 행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너무 약한 모습을 보여요. 너무 약한 모습을. 물 위를 걸을 때는 대단하지요. 그러나 십자가달릴 때는 어떻습니까? 너무나 약하디 약한 모습을 보이지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지요. 이게 성령께서 계속해서 조절하시는 거에요. 성령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부활하실 때까지는 철저하게 성령에 의해서 조정 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런 말은 뭐냐 하면은 내가 한 것은 다 아버지께서 하신 것이라고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버지가 내 안에서 활동하는 거에요. 아버지가.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왜 자꾸 아버지를 보라 하느냐. 나를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다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이게 아버지의 영이에요. 아버지 영. 나중에 주의 영. 이때는 아버지의 영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영 지시에 따라서 계속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하는 말이 뭐냐?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하면서 기도를 한 거죠. 기도 처음 할 때는 이것이 내 것이 양보되지 않았는데 기도를 세 번씩 드디어 이제는 완전히 내 뜻을 완전히 굽힐 수 있는 때까지 오기까지 예수님은 땀방울이 뭐가 됩니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된 거에요. 성령의 일은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소위 천국에 갈수 없는 어른들의 그 마지막 최후의 망한 모습을 저주 받은 모습을 예수님이 몸소 다 보여야 되는 거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른으로 죽으셨다면 우리는 뭐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은 우리야 말할 것도 없이 육신으로 태어난 우리는 마땅히 비 오는 가로등 밑에 갈 곳을 몰라서 헤매는 헤매야죠. 비 젖은 나의 영혼아. 푸욱 젖었어요. 우산도 안 쓴 모양이네. 바람이 불어와서 잎새는 떨어지고 떨어진 그 잎새가 바람에 굴러도 우리네 슬픔도 그것과 똑같으리라. 너도 슬프지만 나도 슬프다 그런 뜻이잖아요. 슬퍼한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할 일이에요. 인간이 슬퍼한다는 것은. 왜냐 하면은 백날 해봐야 슬픔만 올 거 내가 나를 믿느니 차라리 내가 죽겠다 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대를 걸지 않는 거에요. 그게 어린 아이란 말이죠. 그게 어린 아이거든요. 눈밭에 뛰노는 어린 아이. 아무 계획도 없이 뛰어노는 거에요.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한 자는 바로 나로 인하여 되어질 일이 더는 없다는 거에요. 그 중에 또 한 사람을 뽑으라면 바로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죠. 마리아. 마리아 + 성령해서 나온 게 뭐냐 예수님이 사람 된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인간은 누굽니까? 인간은 마리아1, 예수님2죠. 마리아는 성령을 이렇게 빼버리면 예수님의 사람 되는 거에요. 예수님의 사람 되는 거. 예수님의 사람 된다는 말은 예수님의 내뱉은 말씀에 의해서 새로 잉태된 자, 새로 지음을 받은 자가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이 방금 누가복음 18장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누구도 천국에 못가지요.
그러면 어린 아이같이 되면 뭐 된다? 천국에 무조건 들어가지요. 그럼 어린 아이가 되면 무조건 들어간다는 이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마리아처럼 우리에게 들어와버리면 우리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내뱉은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공식이 간단하지요. 그러면 그거하고 부활하고 무슨 관계있느냐? 부활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시간에 구애받을 필요 없고 구애받지 않습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니까 새로 태어났으니까 그들이 뭐다? 천국의 어린 아이같다. 어린 아이. 아무리 나이가 90이 되도 80이 되도 괜찮아요. 어린 아이. 시간의 변천과 아무 상관없는 신분을 보장 받습니다. 조건이 있지요. 뭐냐 하면은 늘 내가 말씀을 지키면 안 되죠. 내가 말씀을 지키지 말고 말씀이 나를 덮치는 덮쳐진 그 말씀 안에 있다는 조건하에. 주께서 주신 말씀 안의 조건 하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럼 삶은 어떤 삶이냐? 마치 동화 같은 삶인데. Epoxy Resin입니다. 투명한 공 같은 스노우볼 같은 그런 공 같은 곳에 있다면 이 안으로 뭐가 들어오느냐? 말씀이 들어오죠. 말씀이 안에 들어온다고 해도 되고 말씀이 이렇게 삐라처럼 또는 딱지처럼 붙어있다 하게 되면 이 어린 아이 같은 성도는 뭐를 보느냐 하면은 말씀을 보는 거에요. 말씀을 보면 넒은 길로 가는 것은 멸망이고 좁은 길로 가는 것은 영생이다 그 말씀을 확인하는 거에요.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이미 이 세계 속에 말씀이 들어붙고 말씀이 들어오는 거에요.
그래서 성도의 삶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성령께서 자기가 활동하게 하지요. 일어난 모든 일 뭐와 관련시킨다? 주께서 이미 다 이루어진 모든 말씀과 연계해서 살아가는 사람. 아 현재 이 사건이 이 말씀을 이야기하는 구나. 이런 일은 이 말씀을 이야기하는구나. 그래서 이 말씀 속에는 뭐가 필요하느냐 하면은 바로 바리새인이 주장. 굉장히 강조해서 중요합니다. 바리새인의 주장을 들어야 되고 다른 부분도 들어야 되고 이게 전부 다 말씀이에요. 마귀의 말도 들어야 되요. 아 저게 마귀의 말이구나. 저게 바리새인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 자세구나. 다른 복음이구나 하고 쭉쭉 다 수용하는 거에요. 전부 다 수용하는 거에요.
그러면 뭐를 이해할 수 있느냐 하면은 두 가지의 상반된 이야기를 알 수 있어요. 어린 아이와 어른의 차이를 이런 주어진 말씀을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되풀이해서 깨닫게 되는 거에요. 제가 주일날 설교한 것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일날 본문이 뭐냐 하면은 감독 된 자들은 또는 장로 된 자는 이러이러해야 된다는 것이 쭉 나오지요. 믿는 자녀를 두어야 되고 술 취하지 말고 나그네를 뭐 해야 되고 참고 구타하지 않고 뭐 쭉 나오지요. 그러면 이 말씀이 어린 아이 이미 부활 속에 성령 속에 우리에게 스노우볼 속에 들어붙는 거에요. 들어붙는다 이 말이죠. 붙으면 여기에 해당된 사람이 어디 있는지 찾아본다. 찾아보지요.
보니까 저기 떡 하나 있단 말이죠. 예를 들어서 목사님 있단 말이죠. 있는데 여기 뭐가 투입되느냐 하면은 아까 무슨 요소입니까? 시간 요소가 투입되지요. 시간 요소가 투입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아이 셋 낳고 난 뒤에 아니야 이거. 어떤 시간을 통해서 바로 왜 예수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 아니고서는 어떻게 왜 구원받지 못하는가를 주위에 이런 말씀에 입각한 사람들 후보감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가 소멸하고 나타났다가 실망하는 거에요. 완전히 큰바위 얼굴하고 똑같은 거죠. 우리 마을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지도자가 나타났다. 그 지도자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본인이죠. 나중에 그 단편소설 보면 막 사는데 자기를 지도자로 했단 말이죠. 마을 사람들이 나를 당신이 감독해라. 당신이 장로해라. 그런데 내가 했다고 칩시다. 했다고 치면 어떻게 되겠어요? 본인이 알지요. 내가 왜 장로감이 못되는지를. 그 장로되기 전까지는 몰랐고 감독되기까지는 몰랐지요. 내가 목사감이 안 된다는 걸. 장로감이 안 된다는 걸.
그러면 집사님이 “아 목사님, 진짜 목사님같애요.” 이게 뭐냐 하면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거에요. 평생을 내가 나한테 사기를 치고 있고 전부 다 시간 요소이기 때문에 전부 다 어른스러워요. 어린 애로 못 돌아가요. 못 돌아간다고요. 전부 다 자기 공예품이에요. 자기를 스스로 포기 못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다 죽여버리는 거죠. 그 죽음에 대해서 박수치는 거에요. 박수치는 거에요.
자, 어떤 목사가 목사해가지고 존경받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져가지고 짤렸다. 그럼 짤리면 목사가 부를 노래는 뭡니까? 비 오는 가로등 밑에 갈 곳을 몰라서 헤매는 가엾은 그때는 나죠. 가엾은 나야. 우리의 슬픔도 이럴 줄 몰랐다는 것. 그 다음에 마지막 편지에 해질녘 노을 보며 함께 수놓은 꿈들은 목사 이거 다 부질없는 꿈이었나. 이 세상에 어른들이 너만 어른이냐? 나도 어른이다 다 같이 욕하면서 다 같이 어른들, 발전된 어른들을 시도하는 그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꿈이고 다 나와 내가 나와 이별해야 돼요. 주께서 우리를 죽고 망하게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주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들락날락이라고 했지요. 들락날락. 그래가지고 나는 장로 감도 안되고 목사 감도 못됩니다. 성경구절 맞는 거 내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도 맞는 게 없네요. 바로 그 자가 뭐만 증거하겠어요? 하나님의 피만 증거하겠지요. 그걸 가지고 사도행전에서 뭐냐? 감독이죠. 감독. 실패한 자만이 증거 될 수 있는 게 예수님의 피죠. 주께서 하신 일, 어린 아이 되는 것도 주께서 하신 일, 십자가도 주께서 하신 일, 성령 보내주신 것도 주께서 하신 일, 내가 성령으로 잉태하고 싶어서 기도한 게 아니고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주께서 하신 일, 부활도 주께서 하신 일, 천국도 주께서 하신 일, 바로 그 사람이 바로 진짜 목사고 감독이죠.
그렇게 사람들 우르르 감독시켜놨습니다. 2개월 지나고 어떻게 됐습니까? 마찬가지죠. 역시 감독은 주님의 말씀이 감독이고 장로가 이래야 된다는 이 말씀에 모든 교인들이 다 매일같이 지적 받아야 되고 받아들여야 돼요. 그래서 대구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이렇게 했지요. 한번 성경을 다 봤다. 다시 보고 다시 보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한번 보고 다시 한번 보고 하면서 바로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내 속에서 이 썩어빠진 인생을 통해서 말씀이 말씀되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이게 바로 주의 증인인 겁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8장 17절 (어른의 시간) 230905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18장 17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받든다는 말은 작아진다는 뜻이거든요. 자기 생각을 전혀 하지않을 때 받든다는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내 계획 내 의도 말고 이미 온전한 완전한 어떤 공간속에 포함이 될 때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속해있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 그걸 어린 아이처럼 받든다는 거에요.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천진난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얼마나 이게 자유로웠으면 구애받지 않는 모습이에요. 내가 속해있는 이 세계에 대해서 일절 책임, 의무감을 주지 않아요.
그게 아까 무슨 세계? 부활의 세계에요. 왜 우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느냐 하면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사는 게 죽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주의 이름으로 삽니다. 그게 천국이에요. 그래서 이미 나한테 이미 실망한 이상 나한테 기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아까 그걸 눈밭에 뛰노는 강아지처럼 그냥 마음 놓고 뛰노는 거에요. 마음 놓고 뛰어논다는 말은 그 조정은 누가 하느냐?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뭐든지 자기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성령께서 그때그때마다 하게 하시는데 들락날락.
왜냐 하면은 자칫하면 구원받는 자기가 주인공 되면 또다시 자기를 생각하거든요. 시간 요소가 개입되면 어제보다 더 나아진 나, 앞으로 더 나아질 거야. 구원받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나, 그 시간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거는 십자가의 효과를 완전히 훼방하게 돼요. 받든다는 말은 더 이상 챙길게 없다는 뜻이거든요. 내 것을 챙길 게 없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 말씀은 뭐냐? 주께서 반드시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어린 아이 되게 해주겠다는 것을 말씀으로 약속하신 거에요. 이 말씀을 그 당시 제자들이 이 말씀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모르지만 자기 나름대로 알았다고 보겠지요.
예수님 십자가지기 전에 제자들이 알았던 주의 말씀, 십자가지고 난 뒤에 부활한 후에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는 거에요. 그러면서 제자들은 늙어죽지요. 죽고 난 뒤에 말씀을 남깁니다.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그 뒤에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그들도 똑같이 자기 위주로 하다가 성령께서 계속 스캔하니까 결국은 나 라는 것은 점점 더 점선으로 희미해지고 나 있는 자리가 바로 말씀의 자리가 되지요. 말씀의 자리. 이걸 대구강의에서는 뭐냐 하면은 일인용 침대에 두 사람이 들어온 거에요. 일인용 침대에 두 사람. 내 자리에 이 더러운 자리에 누가 들어온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들어오시고 성령이 들어오시는 거에요.
이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뒤에 나오는 사도행전의 성도들 모습들 사도 바울이 한 기적을 하나도 설명 못합니다. 사도행전 3장 16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지요. 그때 앉은뱅이가 나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베드로와 요한이 극구 말리는 게 있어요. “내가 한 게 아닙니다!” “에이~ 당신이 한걸 봤어.” “내가 한 게 아닙니다.” 이 격차, 차이남. 무슨 차이 나는 거에요? 바로 말씀에 의해서 지배받는 것과 내가 말씀 지키는가의 차이점이죠. 그렇게 정리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주께서 어린 아이 되게 해주신다. 주께서. 말씀되게 해주신다. 너희들은 아니야. 너희들 어른들, 제자들은 아니야.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 못가. 나중에 제자들이 성령 오게 되면 아 어린 아이라는 것이 성령으로 새로 잉태한다는 사실. 기존의 태어난 육신가지고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요.
자, 그 다음에 18절 봅시다. 18장 18절부터 이 말씀은 마태복음 19장에도 이 유사한 말씀이 나옵니다. 나오는데 여러분들이 다 아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부자가 왔는데 부자청년이 왔는데 잘난 체했지요. 난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습니다. 더 이상 뭐가 더 필요합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네가 부자잖아. 모든 걸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쫓으라. 그렇게 하니까 부자 사람이 근심하여 떠나갔더라.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자들이 깜짝 놀랬지요. 제자들 자기들의 견해하고 너무 다르니까. 천국이. “어떻게 합니까?” 하니까 여기 27절에 보세요.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이렇게 된 거에요.
그런데 28절에 베드로가 하는 말이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이렇게 하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베드로가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 오해의 극한이 뭐냐? 마치 위대한 영웅, 위대한 스타, 위대한 스승을 만나고 난 뒤에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 것을 다 바치고 스승을 따라가면 우리는 스승이 있는 그 세계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베드로의 인식,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는 아주 대표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지만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는 가장 극한의 모습이 뭐냐 하면은 희생입니다. 희생. 이거 안해야 되는데 자꾸 이거 하고 싶어요. 희생의 주인공은 물론 본인이죠 본인. 그렇다면 이 본문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본문과 이 본문을 달리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상식. 왜냐하면 베드로가 그 말씀 다 들었잖아요. 부자 청년이 와서 이야기를 다 봤잖아요. 다 보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 것은 그러면 우리가 모든 것을 내 것 가진 것을 포기하고 주를 따라오겠습니다라고 하는 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된다고 했어요? 안된다고 했어요?
29절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요 그런 식으로 해서 영생 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하는 거에요. 어째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느냐. 희생해도 소용없어요. 희생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힌트를 어디서 얻을 수 있느냐? 여기 18장 27절에 여기서 사람이 하는 것과 그 다음에 하나님 하시는 것을 완전히 예수님께서는 이걸 둘 다 분리를 시켜놨지요.
자, 그러면 분리시키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우리는 안할게요. 하나님 하시도록 맡기겠습니다라고 베드로의 내린 결론이 이 이야기듣고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 뭐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틀렸다 이 말이죠. 왜 틀렸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 하시는 것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을 공격해줘야 돼요. 공격받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내 선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게 뭐냐? 내 것 없어 나는 다 버렸어. 나 무소유, 나 다 버렸어. 자! 그 다음에 콜! 주님께서 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을 이렇게 이해한 거에요. 그게 아니고 인간의 일은 하나님을 죽여야 돼요. 하나님을 죽여야 소한테 받쳐죽고 개한테 물려죽으면 안돼요. 하나님은 사람한테 물려죽어야 돼요. 사람한테. 사람한테 맞아죽으셔야 돼요. 하나님이. 그리고 인간의 일은 희생이 끝이 아니고 하나님을 때려죽이는 게 인간의 일의 끝이에요. 그게 가장 인간다워요. 그래서 사람이 하는 것과 사람이 하는 것이 안 되고 하나님이 하신다 이야기할 때 사람이 하는 것에 대해서 그 사람인 제자들과 사람들은 그게 내가 하는 일이 뭔지를 본인이 몰라요. 지금 모르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모르고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지요. 지금부터 다시 한번 18장 18절부터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따로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게 아니고 사람한테 사람이 자기 하는 일에 충실해서 충실된 일에 얻어맞는 결과가 곧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 사람 없이는 하나님의 일이 안 된다는 사실이죠. 가룟 유다가 아니면 예수님이 팔릴 수 없다는 그거하고 똑같은 거에요. 이렇게 엮여져있어요.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그렇게 질문을 했지요. 내기 무엇을 하리이까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의 내용을 보니까 그 사람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은 법이 있어요. 법. 다른 말로 하면 율법. 그 사람한테 율법이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율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얻어맞는 또는 버림받는 배척당한 그 것을 예수님 쪽에서 실시하는 거에요. 예수님 쪽에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유도하도록 예수님을 배척하고 버리도록 유도하는 쪽으로 주께서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생, 인간은 반드시 뭐냐? 법의식을 가지고 접근한다는 사실을 주께서 아십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방적으로 제 말을 해볼께요. 법이란 뭐냐? 둘 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 보세요. 법이란 나를 보호한다. 2번. 법은 나 말고 공동체를 보호한다. 어느 쪽입니까? 법은 나를 보호한다, 법은 나 말고 공동체, 공동체는 가정, 사회, 교회, 국가를 보호한다. 어느 쪽이 맞아요? 질문은 간단하지만 상당히 어려운 문제지요. 상당히 어려워요. 이 어려운 문제의 답을 알려면 인간이 홀로 있느냐? 아니면 인간은 환경 속에 같이 있느냐? 라는 거에요. 인간은 환경을 보는 거에요. 인간은 환경을 보지만 환경이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서 인간은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고 있다고요.
하나의 예를 들면 쉬워요. 우크라이나 전쟁 일어났잖아요. 자, 러시아 청년에게 러시아는 뭐냐? 조국은 뭐냐? 러시아 청년이 하는 말이 조국은 나를 지켜주고 보호하고 나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그게 국가라 우리에게 해주는 혜택이라고 보는 거죠. 사람들 본능이 그렇잖아요. 나라가 나한테 뭘 해준다는 거에요. 그러면 전쟁이 일어날 때 너는 18세 이상이니까 전쟁에 나와가지고 총알받이 해라라고 나라에서 징집명령을 내립니다. 내릴 때 그 징집명령 받은 청년은 뭐를 생각하겠습니까?
도대체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국가와 달라요. 국가가 나한테 뭘 해줄 것이라 생각했지. 존.에프.케네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영화에 나오잖아요. 국가가 나한테 뭘해줄까 생각 말고 네가 국가에 뭘 해줄까 생각하라. 케네디가 한 연설, 영어로 했어요. 그 대목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는요 위주가 누구 위주냐 하면은 나 위주에요. 그래서 러시아 청년이 요트 타고 포항까지 오잖아요. 조국을 버리고. 이거는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겁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을 방해할 자가 국가가 되었던 가정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아무도 나를 이 나의 자유, 자율성 또는 자유의지 나의 자유를 훼방할 자격은 없다. 이게 철저한 겁니다. 법이란 나를 보호해야 하는 거에요. 법은 나를 보호해야한다.
이렇게 만약에 이웃집 아저씨가 흉기 들고 설치면 경찰 뭐하냐 이렇게 나오지요. 경찰이 잡아가야 내가 안전하니까요. 이겁니다. 그런데 아까 그 러시아 푸틴이 18세 이상 전부 다 군대 소집하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국가의 폭력이에요. 국가의 폭력. 너 말 안 듣지? 너는 적들한테 맞아죽을래? 안 그러면 너 우리한테 총살당할래? 총살당하기 싫으면 빨리 전쟁 나가. 젊은 사람은 진퇴양난이에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습니다.
이게 제가 국가라는 말 했지만 사실은 이걸 회사로 봐요. 회사. 마찬가지에요. 회사, 교회. 부목사 설교 시켜놨더니만 복음만 이야기한 거에요. 눈치코치도 없이. 담임 목사가 조용히 부르지도 않아. 조용히 불러요. 너 미쳤어? 너 계약할거야? 안 할거야? 왜이래. 네가 나이든 장로님의 심정을 알아? 집 두 채 바친 심정을 알아? 어디서 돈도 한 푼도 안 낸 놈이 교회가 어떻고 저떻고 너 입 다물고 있어. 안 그러면 너 계약 파기야. 은밀하게 불러가지고 그렇게 조치를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장로들이 당회장 목사한테 압력 넣어가지고 저 부목사 길 좀 들이라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똥군기라고 합니다.
똥군기 쎈 곳이 어디냐 하면은 바로 절이에요. 주지스님 밑에 너 승려 될려면 내 말 들어 이런 거. 똥군기 없는 데가 어디 있어요? 모든 곳에 심지어 형제간에도 있는데 형제간에도. 이게 장례식장에도 있어요. 장례식장에도. 장례식장에도 자기가 다 부모 섬기는데 혼자 미국가가지고 와가지고 아이고 어머니 하니까 군기를 누가 잡느냐 하면은 형님이 한 게 뭡니까? 어디서 부조금 손 댈려고. 똥군기 잡는 거 아닙니까 전부다.
사람이 본인을 몰라요. 본인은 분명히 이상하게 자기밖에 모르는 자유가 있는데 그게 먹히질 않아요. 이 세상에는 이 현실 속에서는 먹혀들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본인의 자유가 찢어져요. 힘들지요. 힘들면 불러야지요. 비 오는 가로등 밑에. 힘들어요. 왜 매사가 가는 곳마다 내 마음에 안 들어. 이 세상 현실 자체가. 주님 뜻은 뭐냐? 다루어진다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뭐냐? 현실은 주님이 쥐고 있어요. 주님이 다루신 자만 영생에 들어가요. 영생. 내가 나 영생 들어갈래. 천국갈래. 못 들어갑니다.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내가 아는 나 가 아니라 전혀 예상 못한 나로 바꾸어질 때 구원받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사람 뜻대로 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된다는 그 뜻이에요 그게. 제자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모든 것을 버리겠습니다. 모든 걸 버리더라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의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다라는 거에요. 심지어 자녀까지 형제까지 집까지. 하늘나라 성령이 와서 뺏어야지 네가 갖다 바친다고 네가 구원받고 영생 받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그래서 구제하지 말라고 동정하지 말라고 빼앗길 때까지.
이게 뭐냐 하면은 주님이 군기 잡는 거에요. 주님이 군기 잡는 거에요. 사람이 헌금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그 돈 드렸잖아요. 그거 빼고 나머지는 내 자율성으로 씁니다 이런 뜻이거든요. 본인이 본인을 군기 잡으면 그건 군기가 아닙니다. 빼앗기듯이 헌금해야 되요. 빼앗기듯이. 다시 말해서 헌금하고 갈 곳을 몰라 헤매야 돼요. 갈 곳을 몰라서.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하는 것도 주고받는 게 아니고 빼앗겨서 여러 배 받는 거에요. 마치 영생을 어떻게 받는다고? 주께서 빼앗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영생을 우리한테 집어넣어주고 그래서 받는 게 영생이에요.
그러면 가만있으면 빼앗으러 오는가? 아닙니다. 인간이 가만있어서 주께서 빼앗는 게 아니고 인간은 빼앗기지 않을려고 하기 때문에 빼앗기는 거에요. 인간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부자청년이에요. 부자청년. 부자청년 이 얍삽한 게 뭐냐 하면은 자기가 돈이 많잖아요. 돈이 많으니까 돈 일단 자기 꺼에요. 돈은 자기 꺼였고 더 중요한 것은 돈을 모을 때 자기 힘으로 모았어요. 거기는 관원이라고 되어있는데 부자청년은 부자죠. 여기 뭐가 있느냐 하면은 법이 있었고 그 법을 본인이 지켜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법을 지켜낸 보상을 받아서 부자 됐다는 거에요.
그럼 하나님이 한 게 뭡니까? 너 이대로 살아라 하고 법을 준 것만이 하나님이 하셨고 그 다음에 본인이 그 법을 지켜내는 것은 본인이 지켜냈고 그 결과로 자기가 부자가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고마운 마음이 있는 거에요. 그래서 법을 지키는 이 자율성이 자율적 순종으로 말미암아 이게 부자가 되었으니까 부자 더하기 무슨 빈자리? 부자는 살아있을 때 부자니까 죽고 난 뒤에는 어디 가야해요? 영생. 그럼 영생을 받는 법은 뭐냐? 자율적인 법에 대한 자율적 순종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같으면 부자가 그런 이야기했으면 예수님께서 좀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주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22절 굉장히 친절을 가장하지만 굉장히 과격하게 이야기했어요.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지요. 지금 예수님이 완전히 약을 올리고 있어요. 한 가지 부족하니까 듣는 부자 입장에서는 뭡니까? 지금까지 한 것은 정상이고 거기에 약간 미흡한 게 남아있는데 빈 게 있는데 그거 하나 마저 채우면 된다고 한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 뒷주머니 숨긴 거 내놔봐. 숨긴 거 가져와.
이 비슷한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 나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계속 뒤에 숨기고 그럼 예수님 어느 산에서 예배드리면 하나님 기뻐하겠습니까? 이렇게 나온 거에요. 종교적인 폼을 내고 있는 거에요. 어느 쪽에 예배드리면 됩니까? 그러나 이미 그 전에 그 여자는 이미 들통이 나버린 거에요. 다시 말해서 빼앗긴 거에요. 자기의 숨겨져있는 것을 빼앗길 때 비로소 주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가 되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잖아요. 주님께서는 십자가 이전에 먼저 주님께서 인간부터 건드리는 거에요. 시비 거는 거에요. 내놔. 완전 깡패에요. 내놔. 인간의 자비심에 대해서 주님께서 끝까지 시비 걸어요. 인간의 자비심, 배려심에 대해서. 배려같은 소리하고 있네. 자비? 어디서 순진한 척하고 있어. 내가 선악과를 따먹고 신처럼 되리라 하는 그 원칙에 대해서 인간은 조금도 발을 빼본 적이 없어요. 아니 발을 못 빼요. 뺄 수가 없어요. 왜? 환경 자체가 갇혀있으니까. 예수님을 죽이게 된 환경을 의도적으로 주님 쪽에서 그걸 인간에게 몰아세웁니다. 다들 점잖아요. 점잖은 것을 완전 폭도로 만드는 작업을 주께서 나선 거에요. 사람은 안 건드리면 점잖아요. 건드리면 자기 본색 나옵니다. 그걸 유명한 사자성어로 영웅본색. 이쑤시개 물고 나오는거. 주윤발. 기어이 자기 본색을 기어이 들추어내는 거에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지금 부자청년보고 이야기했지요. 놀래기는 누가 놀랩니까? 예수님 쪽에 있다고 여겼던 그 제자들이 너무 놀래버린 거에요. 이게 부자청년 보고 이야기한 게 아니고 우리 보고 이야기한 건가? 구분이 안 되는 겁니다. 21절 다시 봅시다. 이것을 어디서부터? 어릴 때부터죠. 시간요소. T요소. Time 요소, 시간 요소가 벌써 인간에게 포함되어있습니다. 인간은 시간 요소를 플러스 플러스해서 어디에 터치한다? 영생의 나라에 접촉하고자 하는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의 본성이죠. 계속해서 시간 시간의, 허튼 시간이 아니라 중요한 시간, 나를 위대하게 만든 시간에 터치하는 거에요.
예수님께서는 하시는 뜻은 이겁니다. 아주 과격해요. 돈이 있는 이상 훌륭한 자는 없다. 돈이 있는 이상 훌륭한 자는 없다. 이래가지고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를 거에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소유 없이는 주체 형성 안 된다. 자기가 소유가 없으면 주체 형성이 안 된다. 개뿔도 돈 한 푼도 없는데 무슨 내세울 게 없어요. 뭔가 돈이 있어야 롤스로이스도 타고 골프채 싣고 돌아다니지 아무것도 없는데 왜 해요. 돈 없으면 동창회 안 나옵니다. 안 나오지요. 돈 꽤나 있어 자랑질 해야 돼요. 사람은 왜 사느냐 하면은 타인한테 자랑할려고 살아요. 그래서 내가 내 자랑 할 사람 없으면 그 사람 살아도 죽은 사람입니다. 뭐 내세울게 있어야지. 사람이 말할 대상이 없으면 죽은 거에요. 말할 대상이 없으면.
그래서 배우자가 있다가 배우자가 암 진단을 받으면 정작 암 진단 받은 사람은 가만 있는데 옆에 멀쩡한 배우자가 울고불고 난리도 아닙니다. 굉장히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아 그거 아니에요. 나 너 없이는 만만한 사람이 없어. 그동안 얼마나 만만했어요. 그런데 새로 사귈라 하면 돈 들어요. 온갖 똥 폼 다 잡아야 돼요. 오늘 똥 자주 나오네. 온 아부 다 해야 되고요. 공들여야 돼요. 안 그러면 안돼요 그게. 그런데 아내나 남편은 이미 내 사람 됐어요. 무좀 걸린 발로 막차고 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죽는다. 그럼 다시 일을 새로 해야 돼요. 내 강아지를 새로 만들어야 돼요. 내 강아지를. 내가 무슨 소리 해도 다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새로 그 공예품을 새로 제조할려고 하면 이게 얼마나 힘들어요.
인간은 끝까지 자기뿐이에요. 남 생각하는 거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 이야기해봅시다. 우리 이야기. 질문해보면 알지요.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을 얻고자 하는데 지금 정작 영생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부자나 제자들도 마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으니까 영생 주어지겠지요. 아니! 영생을 지금 네가 안다고 여기고 지금 베드로가 그런 소리 하거든요. 영생이 뭡니까?
영생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영생은 인간의 해당사항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영생과 떨어진 존재가 영생이에요. 그런데 자꾸 영생 영생하니까 배후에 마귀가 뒷 조종하고 있는 겁니다. 영생은 없어요. 영생은 어디 있는가? 영생은 바로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의 죽음 자리. 죽음 자리고 예수님 자살하지 않으셨죠. 인간에 의해서 맞아죽는 죽음 자리가 영생의 자리입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 내 살과 내 피는 예수님 스스로 짱돌로 피 흘린 거 아니잖아요. 예수님을 때려죽이는 자들이 있어야 되지요. 사람이 없으면 죄인이 없으면 영생이 발생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사람은 인간도 영생에 못 들어온다는 창세기 3장의 그 취지가 살아있는 나라가 영생의 나라에요. 사람은 들어올 수 없었다. 그 나라에요. 하나님은 창세기 3장의 취지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끝까지 갑니다.
제가 어제 대구강의 한 거 잠시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꿨는데 신하들이 꿈을 몰랐지요. 그때 느부갓네살이 상당히 도발적인 행동을 합니다. 뭐냐 하면은 내 꿈을 해석하지 못하면 다 죽인다. 다 죽여버린다는 거에요. 이걸 제가 설명하면서 자기 근본을 모르는 자는 죽어도 할 말 없는 존재다라는 뜻이에요. 자기 근본을 모르는 자는. 살아도 살 가치도 없다는 거에요. 이것이 느부갓네살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이것을 바로 하나님이 이 이야기를 우리보고 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뭐라고 대꾸하겠습니까? 너 근본 알아? 너 영생 알아? 모르겠습니다. 그럼 죽어 마땅하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를 알아 란 말은 십자가 알면 다행이고 십자가 몰라도 살 수 있다가 아니라 십자가 모르면 내가 근본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다 죽여버리겠다는 거에요. 그러면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자, 여기서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돼요.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 물병이 있지요. 어떤 사람이 물병을 들고 이 물병이 참 이쁘지요. 이 물병 맛있게 생겼지요 하면 그걸 보고 복음 전하는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 저주 받았어! 이거거든요. 물병의 물이 맛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저쪽에 복음 전하는 사람이 너 저주 받았어 라는 이야기를 왜 황당하게 왜 쌩뚱 맞게 왜 합니까?
뭐냐 하면은 물이 맛있다는 것은 알지만 뭐를 몰라요? 본인의 근본을 모르지요. 근본은 몰라도 되고 알아도 되는데 아니고 복음 전도자한테는 뭐냐? 근본을 모르고 십자가 모르는 자는 그거는 하나님이 속히 죽여버려야 될 사람이라는 거에요. 그 심정이 주님의 심정이고 성령의 심정이고 하나님의 심정이에요. 너는 몰라도 네 대로 살고 나도 이대로 살고 이게 아니고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나 이번에 옷 좋은 거 사 입었어 이쁘지?” “죽어버려! 인간아!” “왜??왜??왜?? 약먹었어? 왜그래?” 하면 “너는 십자가를 모르잖아.” “그거 꼭 알아야해? 너는 십자가 알고 나는 모르고 살래.” 그런 선택의 여지가 인간에게 허용된 적이 없음을 복음 전도자는 거기에 완전히 푹 젖어들어 있어요. 평소에.
그래야 복음 전도자가 세상 부귀영화 때문에 기죽지 않아요. 예수 믿어도 갈수록 점점 어렵고 생활비도 안 나오고 이거 뭐야 이게 아니고. 그렇게 남하고 비교하는 게 아니고. 느부갓네살 입장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어요. 근본도 모르는 것들 여기에 대해서는 죽어 마땅하다는 그 인식이 오늘날 예수님 인식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8장 인식이에요. 아버지 나 열심히 회사 들어가서 돈 많이 벌어서 아버지 호강시켜드리겠습니다. 자식이 혹시 그런 이야기하면 죽어버려라. 대화가 될 수가 없지요. 그래 착하구나 자식 키운 보람이 있다 이렇게 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네가 십자가 알아? 지금은 바쁘니까 차츰 제가 알아가겠습니다.
그게 내 자식이니까 내가 용서해줄게. 내 자식은 내가 용납해줄게. 그게 바로 이 부자청년의 실수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사람의 일에서 본인이 벗어난 적이 없어요. 자기 일에서. 그리고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일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죽어버려라 과격한 말을 했지만 예수님은 더 심한 과격한 말이 뭐냐? 29절 30절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가 이 얼마나 과격하느냐 하면은 아무도 이것을 해낼 사람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영생을 거기에 갖다 붙였잖아요. 그러면 아무도 이 말씀을 행할 수 없는데 영생이 바로 이 말씀에 붙어있다는 것은 어떤 누구도 영생을 받을 자가 없고 영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살아도 소용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과격한 주님의 발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대목 보면 눈치 봐서 빨리 지나가요. 이 대목. 빨리 넘어가요. 이걸 새기자. 새기면 큰일 나요. 가만있어보자. 모든 걸 팔아서...우리 집에 아내는 얼마 전에 죽었지. 그럼 됐고. 지금 사람 일을 계산해요. 내가 얼마나 희생할까를 계산한다고요. 그렇게 말한 주님을 진짜 과격하게 격분해서 이 말씀하신 주님을 그 자리에서 때려줘야 때려주는 그것이 주의 일인데 때릴 생각하지 않고 주의 말씀 앞에 순종하고 맞출 생각하고 있다고요. 그러니 지옥 가지요. 그러니 지옥 가는 거에요.
우리는 돈도 없으니까 네 모든 걸 팔아라 이게 되지만 우리 같으면 너 모든 법을 팔아라. 네 양심을 팔아버려라 이렇게 나올 거에요. 우리가 감추고 고이고이 딴 것은 다 없어도 이것 때문에 이 소유 때문에 내 주체로서 내 내용물은 아직도 주체가 견고하다고 말하는 그 무엇이 있을 거에요. 그 무엇이. 사람 다 다르지만. 어쨌든 간에 그 최후의 것이 있을 거에요. 주께서는 그것을 건드리잖아요. 그걸 건드리니까 우리는 아무리 자비심과 배려심을 가져도 결국은 예수님 일은 우리는 고개 저으면서 제 할 도리를 다 했는데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교회 다니고 50년 교회 다녀놓고 장로 목사 할 거 다 해놓고 결국은 자기 갈 길로 가지요. 무슨 노래 부르면서? 마지막 편지 부르면서. 교회 다닌 것도 다 부질없는 꿈이었었어. 방금 50년 다녔다 했지요. 지금 5년 다니면서 한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6개월 다니고 교회 아무 소용없다는 사람도 한 둘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철저하게 어른이 돼야 돼요. 그리고 그걸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십니다. 네가 원수야. 네가 십자가의 원수는 바로 너야! 라고 성령께서 이렇게 지적해줄 때 얼마나 그게 고맙고 그게 감사한지요. 눈밭의 어린아이 같다니까요. 할 게 없어요. 하면 살아나니까. 하면 살아나요.
꼭 해놓고 그걸 자기 소유 속에 집어넣어가지고 자기 소유를 게워낼 수가 없어요. 어른은 집어넣고 어린아이는 토하고. 정반대에요. 어린아이는 맨날 토해버려요. 자기 손가락 넣고 토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와서 토해버려요. 성령이 와서. 토해버립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다만 네가 이걸 양심이든 도덕이든 내가 뭐 목사입니다 집사입니다 뭔가 갖고있으면 그것이 너를 망친다는 사실. 그 사실이 우리를 망쳐요. 오직 성령만 있으면 돼요. 왜? 주께서 성령하고만 이야기하니까. 우리보고 이야기 안합니다.
그렇게 보시고 다시 한번 봅시다. 예수님께서 완전히 약을 올리는 거에요. 부자청년을. 네가 약간만 부족한 게 있는데 그게 뭐냐? 너의 모든 걸 다 팔아라.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은 예수님 말씀이 옳은 이유가 영생하고 큰 부자하고 어느 것이 가치가 있습니까? 예수님 보시기에. 영생이 있지요. 부자는 될 수 있지만 영생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했기 때문에 못 얻는 거에요. 영생이 더 크지요. 예수님은 네가 이걸 동의한다면 이 영생보다 지극히 작은 것, 7500억 재산. 지극히 작은 것 150억 재산, 빌딩 열댓 채. 지극히 작은 것만 영생을 원한다면 이것은 가볍게 푼돈, 껌 값으로 버려라. 이렇게 약을 올리시는 겁니다.
그런데 부자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떠났다는 말은 나 다시는 당신하고 말 안 해 이런 뜻이거든요. 그걸 가지고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걸 저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들어가지 못한 거죠. 영생이 없는 것을 가지고 죽음, 저주라고 하는 거에요. 가고 난 뒤에 부자는 부자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께서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잖아요. 제자들이 그걸 듣고 가라사대 이게 마태복음이 더 실감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죠.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러니까 예수님은 벌써 알고 계셨어요. 영생에 대한 곡해, 오해 돈은 돈대로 있고 영생은 영생대로 있고 이렇게 되어버리면 돈의 가치가 죽지를 않아요. 부자의 가치가 죽지를 않는다고요. 영생 앞에서는 천국 앞에서는 이 세상 어떤 이 우주 전체를 얻어도 이거는 쉽게 버려야 될 무가치한 것으로 드러나야 영생이 상대적으로 빛이 나요. 그런데 이 부자는 이걸 못 버렸습니다. 자기 목숨과도 같은 거니까. 자기 주체 안에 돈이 들어있으니까. 돈이 없으면 자기는 죽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냥 못 들어간다 하면 되는데 어렵다고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한테 시비걸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해볼라고 하니까요. 차라리 영생에서 짤렸다 하면 되는데 뭔가 아직도 자기에 대한 자기 미련이 있고 자기 자신을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지기 전 성령오기 전까지입니다. 성령오기 전까지 안돼요. 그러니까 뭔가 해볼라고 하는 거에요. 성령 받고 난 뒤에 이 대목 보면 우리는 싱글벙글 웃지요. 십자가 못 박아죽인 이유가 있었구만. 아예 우리 보고 뭘 시키는 게 아니고 못을 박아라. 죽어라 인간아. 그 못 박을 때 그게 최고의 영생의 영광 아닙니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낙타. 이걸 또 신학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여기서 바늘이라고 하는 것은 바늘귀가 아니고 원본은 어떻고 원어는 어떠니 두 가지 이론이 있어요. 하나는 바늘귀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 예루살렘의 작은 문이 있는데 그 문이 낙타가 들어갈 때 겨우 좁게 들어간다. 그래서 그 당시 제자들이 다 알아듣는 예루살렘의 문 있지? 바늘귀 있지? 그것처럼 어렵다. 이렇게 설명했다는 설과 두 번째는 뭐냐 바늘귀라는 것이 원래는 밧줄 동그랗게 하는 밧줄 원어와 유사한데 이게 오역을 해가지고 밧줄귀를 바늘귀라고 했다 이렇게 최근에 나온 논문에 보면 그렇게.
지금 그 말은 그 뒤에 사람은 할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에요. 언어를 듣고 납득을 해서 그 납득된 것 가지고 내가 어떻게 행동으로 변화시켜서 내가 새로운 변화, 아까 실로암 부를 때 뭐라고 했습니까? 왜 실로암 부르는지 알겠어요? 내가 무슨 사람 만든다?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하자 ‘다른 사람’. 내가 스스로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나를 내가 내 힘으로 하고 싶은 거에요. 이거는 아주 못됐어 정말 이거는. 러시아가 징집해버려야 해. 국가의 공동체의 폭력을 맛보지 못해서 그래요.
심지어 교회 다녀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당에서 부르고요 장로가 눈치주고 옆에 고참 집사가 뭐라고 하면요 기도도 함부로 못하고 헌금도 함부로 못하고 못합니다. 구역장이 보통 권력입니까? 해가지고 당신을 위해서 자녀위해 기도해드리겠습니다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우리 기도빨 끝나면 너 자녀 저주받어. 세상에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전부 다 폭력적 단체라고 보면 돼요. 그런데 그 공동체를 왜 원합니까? 누굴 보호하기 위해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애들 클 때는 자기 혼자 큰 줄 알지요. 나중에 커보세요. 여차하면 부모 옆에 와서 엄마 좀 도와줘. 아빠 도와줘 이렇게 하지요. 필요할 때마다 공동체 찾지요.
여기 보면 제자들이 하는 말이 제자들의 반응을 유도한 거에요.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거 무슨 뜻입니까? 나는 예수님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당신을 따라다녔다는 뜻이에요. 그걸 예수님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지금 이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최선을 다하여 당신한테 순종해서 따라다니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천국 영생 얻을 수 있다는 거에요.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 보고 하는 말이 뭐에요? 제발 너희들은 나를 떠나라 이 말이죠. 목자를 치니 그 다음에 뭐다? 양이 떠나니라. 그 절차 없이는 구원 못 받습니다. 내가 떠날 사람이다. 내 것 가진 것 주께서 빼앗기듯이 주께서 내 목숨을 빼앗아갈 때 우리는 구원을 얻는 거에요. 내가 주님을 피해서 도망쳐도 주님께서 내 인생을 빼앗아가가지고 너는 벌써 죽었어. 이제는 너는 내가 다룰 거야. 다루어줄 때 그것이 움직이는 천국이에요. 움직이는 천국.
주일날 설교 때도 했지만 천국은 이와 같으니 임금님의 혼인잔치지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임금님 아들 있고 혼인할 때 되면 혼인해야지 라고 생각할 때 무엇을 생각 못하느냐 하면은 의도적으로 임금님이 그 백성들에게 자기 중요한 날짜를 겹치게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에요. 자기 장가가고 본인 밭 사고 본인 소 살 때 본인 아프고 병날 때 그때 혼인 잔치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최선을 다해주겠다는 거에요. 임금님이 날짜를 기가 막히게 맞춰가지고 “참석해.” 사람들은 본색을 드러냅니다. 영웅본색이죠. “못가. 바빠. 못가.” 임금님이 “잡아 죽여.”
이게 뭐냐?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들을 잡아죽일 궁리만 하시는 분이에요. 그러고 난 뒤에 천국 백성을 성령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게 어린 아이. 그 어린 아이들은 진작 죽어야 될 백성이 천국에 와버렸으니까 주께서 새삼스럽게 어린 아이에게 무슨 의무와 책임을 부여합니까. 부여 안하지요. 그걸 지금 제자들이 모르고 있는 거에요. 앞에 어린 아이 말도 모르고 이것도 모르고 있는 거에요. 이제 십자가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알지요. 무슨 뜻인지를.
마지막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우리 같으면 저 같으면 구원 못 받아 인간들아! 그렇게도 못 알아들어! 이렇게 할 텐데 그게 아니고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이것은 희망을 주는 게 아니고요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고 희망을 가질 자격 자체가 인간에게는 하나님부터 시작해야 되지 너부터 시작하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라는 거에요. 네가 생각한 천국은 천국이 아니고 네가 생각한 영생은 영생이 아니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예수님 십자가 죽음부터 거기 합류할 때 비로소 뭘 알지 못했던 것이 보이지 않던 것이 성경 말씀이 한꺼번에 다 알게 되지요.
아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구나. 이 말씀이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고 안 되는 인간 다 되게 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 죽으시고 너도 죽고 나도 죽고 해놓고 부활의 영을 보내사 이제는 나는 너를 의인이라 하고 내 백성이라 하겠다 하는 그 소식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십자가 전이거든요. 부활 전이거든요. 이 말씀 남기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버리고 단독으로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 이제 성령 받고 난 뒤에 이제는 들려집니다. 우리가 진짜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만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이 이게 기쁨과 감사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