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일

목사님께 투정부리는 80먹은 어린이

아빠와 함께 2023. 7. 11. 10:23

오늘은 다행히 비가 그쳐서 10시 넘어서 아침 산책을 나섰다. 1시경 귀가할 때까지 울산강의를 들었다. 책상에서보다 걸으면서 그리고 벤치에 앉아 듣는 설교는 너무 집중이 잘 된다. 주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체에 포함되지 않은 전체’ 가 있음을 말씀하시는 설교이었지만 나에게는 다윗의 인구조사하는 부분이 너무 마음에 와닿았다. 요압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데 오늘 말씀을 들으며 명확하게 정리가 되었다.

“신앙생활이란 차이를 나타내는 겁니다. 어제의 차이는 오늘의 차이가 아니에요. 의도적으로 차이를 수정케 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그런데 요압은 과거의 인물이에요. 사단이 격동해서 다윗이 일을 벌리는데 요압은 과거에 근거해서 충고하고 지적하는 거예요. 그 차이에 같이 합류되어야 합니다.”

사단의 격동마저도 구원에 꼭 필요한 일로 만드셔서 다윗을 오르난의 타작마당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아지못하는 요압의 행위가 바로 지금까지의 나의 모습이었구나를 알게 되었다.
항상 남이 갖지 않은 많은 질문들 때문에 그리고 얻지 못한 답 때문에 힘들어 했던 것들이 일시에 해결된 것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이상적인 성도의 모습만을 상정해놓고 그렇지 못한 모습들을 지적하는 거야말로 겨 묻은 개 나무라는 똥 묻은 개격이 아닌가. 상대방도 나처럼 허점 투성이의 죄인임을 먼저 알아야 주님의 은혜로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속에서 감사를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며 광주식구들이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 낯뜨거우면서도 너무도 중요한 깨달음이기에 기쁨이 먼저 앞선다. 마음에 들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주셨음을 잊지않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의 말로 설명이 되지않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본인에 일어난 일인데 설명할 길이 없는 일, 자신이 선택 결정한 일이 아닌 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생활입니다”

요즈음 설교는 자꾸 결심을 하게 만든다. 막 살라시는 설교임을 알면서도 결심아닌 결심을 하게 된다. 며칠전의 강남강의때 들은 스냅사진 생각이 난다. 점선으로 된 죽으신 주님이 함께 찍힌 광주(십자가마을)가족 흑백사진. 하나님의 죽으심을 품고 활동하는 군대 마하나임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사령관이며 예수님의 취지를 드러내기위해 움직이는 성도의 원형이라는 말씀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피와 살을 품고 사는 자가 성도다. 죽은 자의 특징은 본인의 활동이 없다. 하나님의 요소로서 죽어있는 관계가 믿음이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먼저 하나님께 있고 그것이 내게 주어졌다. 성도는 흔들림이 없다. ‘독수리 날개에 업어서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이 이제는 우리 자신에게 유일한 현실과 실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끝마치시는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었다.



기억력의 한계가 극에 달한 느낌이다. 계속 접촉하는 사람 아니면 이름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TV에 나오는 사람들 이름도 집사람과 한글자씩 나눠서 알아맞히는 식이다. 기억력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블로그 관리도 오타가 발견돼도 그냥 놔두고 고치고 정리해야 되는 것들도 그냥 버려둔다. 아직 치매는 안왔지 하고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형편이랄까. 작업하다 버려둔 것들도 많아져 가끔씩 와보는 분들껜 죄송하다 싶은데도 어차피 내가 참고하려고 만든 블로근데 하면서 그냥 놔둔다. 어린애가 돼가는게 아니라 정말 고려장을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없이 빨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솔직한 지금의 심정이다.

요즈음은 말씀이 점점 어렵게 느껴진다. 놀기만 좋아하고 책읽기를 싫어했던 탓인지 독해력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철학도 그렇고 미분 적분 수학도 어렵다. 젊어서 놀기만 한 걸 후회까진 하지않지만 그 댓가를 톡톡히 치루는 것 같다, 광주강의인 ‘70이레’가 특히 어렵게 느껴진다.

‘이레’의 의미가 아직도 명확치가 않다. 십자가마을 자유게시판 검색창에 ‘이레’를 넣고 찾아본다. 3페이지에 달하는 강의들이 나온다. 그 중에 70이레 논문 24쌍의 강의를 전부 블로그로 옮긴다. 다 읽어 볼 수 있어야 하는데 하면서.. 녹취자가 모두 이한례라고 적혀있다. 이렇게 열심 이셨는데 왜 지금은...

이한례, 유일자, ...그러다가 박윤진,이 준, 인상깊었던 분들.. 이 준씨는 얼굴도 본적이 없는데...본적 없는 사람이면 많지. 손무성 이장우 정낙원 조규현 강구만...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와! 구득영목사는 2001년에도 엄청 열심 이셨네... 그러다가 갑자기 한윤범목사 그리고 이하림씨 생각이 난다. 그냥 고맙고 감사하다. 이러는 것이 그 분들게 짐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감사한 마음을 자꾸 자꾸 전하고 싶다.


몇 년 전만해도 75키로를 오르내리던 체중이 58키로까지 줄었다. 위 내시경 시술을 두 번 하면서 위벽의 종양을 떼어내고 조직검사를 했지만 암은 아니라는 진단 뿐 설사와 변비가 오락가락한지 벌써 1년이 다 돼간다. 그 동안 소득이라곤 내가 얼마나 살려고 발버둥치는 존재인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는 존재인가만 확인된 것 뿐이다. 이젠 지쳐서 이러다가 죽겠구나 하고 체념 상태(?)가 되었다. 기다리던 수련회도 정말 참석할 수 있을까 겁이 난다. 아기오(변비약의 일종)를 먹은 후 부터는 밤에 소변보는 것도 일정치 않다.어떤 땐 한 두 번이면 되지만 심할 때는 대여섯번 일어날 때도 있다. 독방을 써야하나 가지 말까. 그 때까지 몸은 견디려나. 온갖 상념속에도 마치 중독증 환자처럼 무조건 가야된다는 확정된 느낌(?). 그래도 갈라디아서는 준비 좀 했으니까 하고 가야할 이유를 만들어보기는 한다.




‘이제 인생에 있어 욕 얻어 먹을 시간이 별로 많이 남지 않았음을 간파하시고 원없이 모든 욕과 오해를 받겠다는 것은 아직 자기를 아끼고 싶어하는 젊은 분에게는 근접할 수 없는 자유입니다.’ 이목사님께서 댓글로 달아주셨던 말씀에 힘입어 목사님 흉 좀 봐야겠다.

이근호 목사님은 독단적이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강의를 정해진 시간보다 항상 빨리 시작한다. 멀리서 오는 분들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듯 싶은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 모든 예의 범절을 마치 로봇처럼 외면하시는 모습도 그렇고 돌아갈 차 시간에 몇십분은 여유가 있겠다 싶은데 질문시간이라도 좀 주시면 안되나 투덜거리게 된다. 불친절(?)한 답변도 그 순간은 짜증 난다. 무슨 소린지 싶은 간단한 답 뿐이라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야 정말 제대로 된 답이었음을 깨닫고 감탄하게 되지만 하여튼 좀더 자세하게 답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강의 하시는 화법에도 이중 부정은 긍정이다는 법칙까지도 어겨버린다.

전혀 비복음적인 생각 뿐이지만 그런데도 말씀드려보고 싶었던 것은 그냥 내 생각을 알려드리고 싶어서이다. 나이는 딱 10년 내가 많은데 항상 범접할 수 없는 스승의 느낌이다. 아버지의 느낌이다. 그래서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려보고 싶은가보다. 12제자가 예수님을 전혀 몰랐는데 그게 전혀 흠이 아니었듯이 ‘갈색 추억‘이 본인의 잘못이 아니었듯이 지금 이 글도 내 글이 아니라고 우겨보고 싶다. ’목사님이 참 좋아요’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표현은 전혀 엉뚱하게 하게 되었다.

 

댓글

이근호

전체를 내부적으로 집어넣어서 다시 형성된 전체는 우리 자신도 바깥에 세워두지 않고 내부 존재로 함몰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좋아요'다 아니라 '전체 모두가 다 좋아요'가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외부인이 아니라 '좋아요'에 해당되는 내부인이기 때문입니다.

 

함숙경

‘할 수 있는 게 죄짓는 것밖에는 없어요.’라는 다소 식상한 표현이 늘 새로움으로 고백되는 자리가 있고 거기에 장로님의 죄 또한 쏟아져 나오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지시가 아니면 달리 무엇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장로님에 비하면 딸뻘에 불과한 저도 뜻대로 되지 않는 육체로 인해 하루에도 몇 번씩 ‘에이 씨’를 연발하곤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분노한다는 말씀은 참말로 맞습니다. 그런 제가 어떤 고백을 해도 흉이 되지 않듯 장로님이 어떤 의문을 품었고 또 어떤 말씀을 하셨다 해도 흉이 되지 않는 그 자리를 만들어 내시는 분이 주님이 아니시면 또 누구겠습니까? 주님의 죽으심의 영광을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낼 사명을 우리가 주께 받았음을 다시 상기하게 됩니다.

노령에 글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솔직한 고백을 올려주셔서 그 연세에 미치지 못한 저 같은 사람도 인생 전체를 약간이라도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습니다.

 

공은주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춤이라도 덩실 덩실 추어야겠습니다.

주님의 의가 들어오면 내 안의 더러운 죄를 끄집어 내어 보여주시지요.  옛 것이 나올수록 우리의 입에서 나올 것은 십자가의 의만 자랑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모든 것이 다 감사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입에서 십자가만 찾겠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효력이 나오지 않으면 넋두리일 뿐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오면 덩실 덩실 춤을 추게 됩니다. 이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가. 강한 부정은 끝입니다. 더 이상 없습니다. 이 얼마나 가벼운 새털인지요. 감격입니다.

새로운 하루, 춤추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