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일

220220 이하림님 녹취록 댓글

아빠와 함께 2023. 2. 10. 01:45

임청일 220220

감사합니다.

 

 

 

 

 

 

서울의존강의20220217a 베드로후서1장 21절(계시의 폭설)-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1장 17-2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오늘 여기까지 해보겠습니다. 21절에 보면 문장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아니요 ~이다’ 21절에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이 아니요’ 할 때 ~에 ▭를 집어넣는 거예요. ‘▭이 아니요 ▭이다’ 할 때 각각 해당되는 네모에 적당한 단어를 집어넣으세요, 이런 문제를 낼 수 있죠.

‘▭이 아니다’를 모르면 ‘▭이다’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바로 ‘▭이다’로 갈 수가 없어요. 여기 인간이 있다면 바로 ‘이다’로 갈 수 있는 길은 없어요. ‘아니다’를 경유해서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무엇이 아니냐? 21절에 ‘아니요’할 때 여기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사람들의 사사로운 뜻으로 된 것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럼 ‘아니요’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사사로운 뜻에 인간이 포함되나요, 안 되나요? 사사로운 뜻에 인간이 포함되죠. 본인이 인간이 아니고 개라면 포함이 안 되겠지만 자칭 자신이 인간이라고 여긴다면 인간의 사사로운 뜻 안에 우리 자신이 여기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제3의 중립지역에 있으면서 관찰하지 말고 이 나를 ▭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럼 ‘아니요’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사사로운 뜻 안에 우리를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으면, 우리 자신이 이 ▭안에 들어가게 되면 ‘아니요’라고 했으니까 이것을 가위표해보는 거예요. 찍 그어버리는 거죠.

그래서 내 구원을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것은 어디에 해당됩니까? ‘아니요’에 해당되는 거예요.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것은 ‘아니요’에 해당돼요. 성경을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성경은 우리의 사사로운 어떤 의도나 기대, 목표, 목적, 노림수, 뭐 챙기는 이런 것들을 전부다 ‘아니요’라고 처리해버린다면 그럼 계시는 왜 주셨는가?

이것은 사사로운 뜻보다 더 엄청난 능력으로 주신 거예요. 그냥 덮친 거죠. 그러면 이 ‘아니요’에 해당되는 사람, ‘나는 아니요, 나의 뜻은 아니요’에 해당되는 여기에 큰 폭설이 내리듯이 하나님의 계시가 옴팍 덮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어디에 함몰되었습니까? ‘나 아니요’가 어디에 묻혀버린 거예요? 지금 일본에 눈이 며칠 동안 4m 왔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 4m 온 거예요. 그 엄청난 폭설에 눌려버렸죠.

그럼 졸지에 ‘나는 아니요, 나의 뜻은 아니요’ 이것은 나의 죽음의 자리, 나의 무덤이 되는 거죠. 내가 있는 그 장소를 나의 무덤으로 만들어버리는 폭설같이 내리는 이 계시. 이게 계시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뭐냐 하면 ‘해석 필요 없음’. 중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성경은 해석이 필요 없다, 계시는. 해석을 하겠다는 것은 뭔가 사사로운 노림수가 있어요. 상대방의 구미를 맞춰가지고 그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려는 의도가 강렬하죠.

그래서 ‘해석 필요 없다’와 ‘나의 죽음, 무덤’과 연관성을 맞춰보면 이건 네 자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소용없다. 뭐가 소용없는지 모르겠지만 인생 사는 것도 소용없고 해석하는 것도 소용없고 다 소용없다. 이것과 유사한 말로, 이건 유행가에 나오는 단어인데, 부질없다. 훨훨훨. 다 부질없어요. 김용님이 불렀던 노래에 나오는데 세상사 부질없다. 소용없다.

그런데 이게 불교나 세상 같으면 좀 찡그리면서 이야기해요. 막 짜증내가지고 ‘아이고, 살라고 애써보니 다 부질없는 거 내가 뭐 때문에 살았지?’ 이거 뭔가 허탈하다든지 좌절했다든지 낙담이 되는 그런 관점이라면 지금 폭설이 내린 입장에서 이 ‘부질없다. 소용없다’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상태에서 ‘소용없다’가 되는 거예요. 신난다. 앗싸! 기쁘다. 이런 거죠. 계시가 주어졌으면 폭설이 내렸으면 하얀 폭설을 그냥 받으면 되잖아요. 뭐 목마르면 흰 눈 녹여서 먹어도 괜찮고... 폭설이 내리잖아요, 폭설이.

폭설이 내리는데 아... 이걸 눈사람을 만들어, 말아? 그런 쓸데없는 고민은 할 필요 없어요. 눈사람 만들어놔도 폭설이 더 와버리면 내가 만든 눈사람조차도 더 추가적으로 온 폭설 앞에 흔적 없이 날라가 버리겠죠. 그게 뭐냐 하면 소용없는 거예요. 내가 만든 모든 것이 소용없을 정도로 내가 평생 일구어낸 그 모든 것이 하등 소용이 없는 거예요. 금메달 2개, 은메달 3개가 하등 소용없어요. 쇼트트랙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고 노벨상도 소용없는 거예요.

소용없다는 말에 대해서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짜증이 확 난다’ 뭐 이런 반응. 다른 하나는 ‘속이 다 시원하다 이제’. 그동안 ‘인생의 해답이 뭐냐? 주여, 인생의 해답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거 알려고 철야기도하고 산기도하고 돈도 교회에다 갖다 바치고 그렇게 애썼는데 뭐 뜻 끝났네요.

이걸 더 발전시키면 이렇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한테는 이 쌓인 폭설이 보이지 않아요. 폭설이 보이지 않고 폭설 내린 것에 대해서 계시 주신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이것만 보이죠. 그렇다면 사람들한테는 내린 폭설은 안보이고 그냥 ‘나는 아니요’만 보이니까 계시는 뭐냐? 계시란 내가 사는 것, 이게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냥 사는 것. 이게 밋밋해요? 진짜 밋밋한 겁니까? 그냥 사는데 어떻게 사느냐? 내가 누구냐 해석할 필요 없이 그냥 사는 것. 그리고 남하고 경쟁하는 것도 부질없이 그냥 사는 것. 더 확실하게 노골적으로 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사는 것은 나의 무덤 안에서 내가 죽은 채로 사는 것. 나의 무덤을 짊어지고 가고 결국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라는 것이 계시로 밝혀져요.

모든 인간은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이 계시로 인하여 밝혀졌습니다. 성도는 이것이 반갑고 기뻐요. 왜냐하면 인간은 해석하기를 원합니다. 해석해야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분간해서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을 채택하고 취득하고 이익이 안 되는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거예요. 왜 그런 결정을 하고 해석을 해야 되는가? 나한테 유리하기 위해서.

본인이 왜 유리해야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죠. 글쎄. 내가 왜 유리하게 살아야 돼? 나한테 이익이 되는 식으로 왜 살아야 돼? 가만 보니까 그게 이유가 없네요. 이유가 없는 거예요.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아주 구차한 이유인데, 지금 내가 살아있으니까. 이게 구차한 이유거든요.

그런데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옴팍 뒤집어씌워지면 ‘나는 아니요’ 이것이 나의 무덤이죠. 숨 끊어지기 전에 산 채로 무덤이 됐다는, 진솔하고 확실한 나의 모습을 미리 체험한 이런 기쁨과 한번 대조해보세요.

나는 지금 살아야하니까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해석을 해야 되고 해석을 하려면 여기 뭐가 필요하냐 하면 축적된 지식이 필요해요. 지식이 필요한데 지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건 뭐 다 알죠. 공부를 해야 되죠. 공부를 하는데 자기 혼자 자습해서 되겠어요? 어디를 가야 되는가? 수학 학원에 가야 돼요. 영어 학원을 다니고 학교를 다녀야죠. 어느 학교? 좋은 대학에 가야죠. 좋은 대학 가려면 부모는 돈을 더 벌어야 돼요. 좋은 대학 가고 유학까지 보내려면. 왜 그런 짓 하느냐? 지금 내가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되면 계시가 없는 티가 확 나버려요. 그래서 해석이 되고 내가 좀 더 살아 있어버리면 무슨 성경의 원칙이 날라가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는 것이 무산돼요. 이게 좌절되어버린다고요. 공부한 사람은 인간답고 공부 못하고 비리비리한 것은 인간도 아니다. 이렇게 되어버린다고요, 이게. 동일한 게 아니라. 성경에 공부한 사람은 똑똑하고 안 한 사람은 뭐 비리비리하다, 인간도 아니다, 그런 게 있습니까? 없죠.

창세기 2장, 3장에 보세요. 모든 인간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5장에 보세요.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은 똑같은 거예요. 전부다 죄가 왕 노릇해서 모든 사람은 죽음에 이른다. 계시라는 게 간단합니다. 여기서부터 죽음에 이른다 하지 말고 죽음에 이른다하거든 자리를 여기 앉아있지 말고 내가 죽는 자리에서 뒤돌아보면서 계시를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 맞구나. 모든 사람이 죽는 게 맞구나. 죽게 되면 그동안 내가 아등바등 살라고 애써놨던 이 땅에서의 모든 내 업적과 성과는 부질없죠. 소용없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열두 제자잖아요. 열두 제자에 뽑혔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계시의 권역 안에서 가룟 유다는 인간이라는 것이 주님의 계시 앞에서 인간은 어떤 본성을 드러내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에 의해 선택된 자가 가룟 유다에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그가 그냥 자살한 것이 아니고 뭔가 나름대로의 갈등과 반항 짓을 했죠. 그냥 혼자서 ‘아이고, 인생 뭐 아무것도 아니네. 믿음 있다 해도 믿음 없구나.’하고 그냥 홀로 산 속에 가서 죽은 게 아니고 어떤 짓을 하고 죽었잖아요. 어떤 짓을 했습니까? 스승을 팔아넘겼죠. 스승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이 알았던 겁니다. 통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결코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느끼면 느낀대로 자기 갈 길로 가면 되잖아요. 예수님의 세계와 자기 세계가 다르다고 전부다 자살해야 됩니까? 그럴 필요가 없죠. 그런데 가룟 유다가 스스로 죽었다 이 말이죠. 그것은 자체적으로 ‘예수님의 세계와 내 세계가 다르다’라고 하는 데서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이 멈춘 게 아니고 예수님의 세계와 내 세계가 다르다고 한다면 따로이 내 세계의 끝은 아무런 희망도 없고 해답도 없고 진리도 없다는 사실에 본인이 스스로 절망한 거예요.

주님 세계와 내 세계가 확실히 다른데 다르면 독자적으로 자기의 의미를 추구하면 되는데 다른 순간 내가 따로이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어떤 대안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하고 자살해버렸습니다. 그 가룟 유다를 가지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바로 사탄의 마음이다. 악마의 마음이다. 주님과 따로 놀면서도 자체적인 해답은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런데 가룟 유다와 일반 불신자의 차이점은 뭐냐? 차이점은 그 사실을 불신자는 모르고 있고 가룟 유다는 주님께서 이리 와. 이리 와. 내 제자 돼. 주님 앞에 강제로 호출되어서 주님의 뜻을 알고 다시 네 자리로 돌아가. 네 자리로 가버려.

주님의 뜻을 알고 가버렸을 때에 아무 낙이 없고 희망 없다고 자살했다는 말은, 그것은 가룟 유다의 개인적인 운명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 밖에 있는 모든 인간의 공통적이고 그들의 보편적인 운명입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 중 하나가 가룟 유다. 그중 하나는 사탄이라고 요한복음 6장에서 그렇게 언급하신 거예요. 주님께서.

그러면 이 대목에서 해석이 필요 없다는 말은 계시 주신 분이 인간을 무덤으로 몰아세웠잖아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이 아니요’라고 했죠. 강의 처음 할 때 ‘나는 ~이 아니요’라고 했죠. 그 말은 이미 죽은 자로 확정된 상태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결론 나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굳이 해석을 할 이유가 전혀 없죠. 죽었는데 해석 잘해서 혹시 사는 수 없습니까? 이럴 경우에는 해석을 해야 되지만 이미 결론이 났어요. 죽어버렸는데......

그리고 죽어버렸다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에 부합되고, 본성에 부합된다는 사실을 죽기 전에 계시에 의해서 ‘나는 죽은 게 맞습니다’라고 알아버렸을 때 인간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은 다 알아버린 거예요. 인간으로서는. 해석이 필요치 않아요. 어떤 해석을 하든 그것은 동일한 결론에 도달됩니다. 그래서 너는 아니라 이 말이야, 이런 결론이죠.

어떤 성경구절을 해도 ‘그러니까 너는 아니야.’라는 해석은 나와버려요. 이건 뭐 실습을 할 수 있어요. 제가 잠시 눈 감겠습니다. 아무데나 펼치겠습니다. 아무데나 펼치겠어요. 내가 뭘 펼칠지 모르겠는데...잠시 눈 뜨겠습니다. 시편 119편 나오네요. 눈에 띄는대로 하겠어요. 시편 119편 142절,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해석은 어떻게 되느냐. 그러니까 넌 죽어야 돼. 아멘. 그것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성경의 계시를 주신 분만이 계시의 본뜻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분이에요. 출제자가 해답을 알고 있다 이 말이에요, 출제자가. 주님께서 어떤 율법을 주고 어떤 문제를 출제해도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것을 풀어내지 못하고 그 풀어내지 못한 결과가 우리는 죽어 마땅함을 계시를 알았기 때문에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그냥 받아들이면 굳이 연필가지고 문제 풀려고 ‘3번은 5번입니까, 3번입니까? 주여, 뜻을 이야기해주시옵소서. 주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면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런 부질없는 짓 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성경을 보면서 제일 잘못된 해석이 뭐냐? 그러니까 제가 그 말씀을 지키겠나이다, 이거에요. 지킬 것 같으면 주님이 왜 오셨습니까? 지킬 것 같으면. 내가 갑자기 성질나서 가만히 못 있겠네. 성질나서 가만 못 있겠어요. 글자 써야겠어요. 네 자입니다. 지키지 마! 지키지 마. 지키라고 준 말씀이 아니에요. 못 지킨다고 주신 말씀이에요, 못 지킨다고.

계시의 폭설이 내렸다는 말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최근에 일본 홋카이도에서 눈이 4m왔어요, 4m. 눈은 이렇게 쌓여있고 사진 보면 길이 요만큼 나있고 그 위에 높이가 4m라니까요. 완전 에스키모 이글루보다 더 심한 거예요, 이거는. 완전히 계시에 덮혀 버렸어요. 이 제목이 괜찮겠네. ‘계시의 폭설’. 계시의 폭설을 맞았어요.

계시의 폭설을 맞으니까 계시를 누가 보여달라 했습니까? 우리가 요청한 적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덮친 거예요. 그러니까 계시가 덮쳤다는 말, 이게 놀랍게도 계시의 자체적인 실현입니다. 이게 계시의 자체적인 실현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이 되면 우리보고 가리키면서 ‘너 죽었어.’ 이런 손가락질, 이게 계시의 실현, 완성이에요.

그래서 여기 계시의 폭설 안에 자기 자리, 자기의 무덤이라 했잖아요. 죽은 무덤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가 산 채로 있는 무덤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이 폭설이 안 보이니까 계시가 안 보이니까 우리는 길에 콩나물 사러가고 차타고 자기 딴에 움직이겠죠. 움직이는 것은 마치 거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의 거북이 같은 그런 양상이죠. 거북이가 가는데 뭘 뒤집어쓰고 왔다갔다 그냥 가는 거예요. 서울 대전 부산 찍고 목포까지. 어디를 가도 주님의 계시가 함께 따라가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모든 공간에 대한 점유. 계시가 모든 공간에 대한 점유입니다.

다시 베드로후서 본문을 봅시다. 어떻게 야고보, 베드로, 요한 그 세 사람을 불러서 했던 변화산이라는 그 국소적인 어떤 특정 지역에 있던 계시가 어떻게 보편적 모든 공간을 점유하는 보편적 계시로서 확산되는가? 그걸 우리가 생각해봐야 돼요.

변화산에 계시를 줬단 말이에요. 그럼 이스라엘에 변화산 말고 다른 산들도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럼 변화산에게만 적용되고 다른 산에는 적용이 안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럼 다른 산에는 적용이 된다고 이야기할 게 아니라 되게 되면 어떤 논리에 의해서 특정 지역에 주어진 계시가 다른 산, 에베레스트라든지 북극, 남극에도 그 변화산 계시가 동일하게 적용되는지, 그 논리적인 근거는 어디 있느냐? 그걸 생각해봐야 돼요. 이건 해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 진행 상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는 전통적으로 천주교에서는 다볼산이 변화산이라 해서 다볼산 정상에 두 군데나 예배당을 지어놨어요. 그런데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6일 후에 산에 올라갔다 했으니까 6일 만에 굳이 다볼산까지 내려올 필요가 있느냐 라고 흔히 말하는 성경학자들이 그렇게 말해요.

서쪽에 지중해가 있고 갈릴리 바다 있고 갈릴리 바다의 남쪽에 사해있고 그 사이에 요단강이 흐르는데 그 거리가 100km입니다. 사해바다 북쪽 끝지점에 예루살렘이 있어요. 아셀 지파, 스불론 지파, 납달리 지파, 잇사갈 지파, 므낫세 서쪽 지파, 갈릴리 전체는 므낫세 동쪽 지파, 그 다음에 에브라임 있고 단 있는데 제가 가본 다볼산이 바로 여기(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의 경계선)에 있어요. 그런데 가이샤라 빌립보라는 장소가 어디 있느냐 하면... 골란 고원(Golan Heights)이라 하는데 동 므낫세 지파(갈릴리 바다의 동북쪽) 그 위쪽에 헐몬산(Hermon Mountain)이 있어요. 골란 고원 위쪽에 헐몬산이 있는데 2814m에요. 이게 지금 시리아 국경에 있는데 2806m는 이스라엘 쪽이고 2814m쪽은 시리아에 있어요.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역이 이 헐몬산 기슭에 있단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 좀 쉬고 올라가서 6일 만에 변화되었다는 거예요. 6일 만에 다볼산까지 오려면 힘들어서 못 온다. 그래서 요새 기독교 개신교 학자들은 헐몬산이 변화산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 성경학자들이라는 말을 할 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 뭐 이렇게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성경을 일본말로 오모짱(장난감), 이 사람들은 성경을 장난감 취급하는 사람들이에요. 앞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세요. 성경학자라고 하면 성경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이에요. 믿음은 물론 없고요. 믿음 있으면 개척교회하지 뭐하려고 이거 해요? 성경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사람이에요. 원어, 히브리어, 헬라어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이에요. 시간은 남아돌지, 교회 오래있다 보니까 별 할 짓은 없지, 그냥 외국에 가가지고 유학 가서 이런 거 하는 거예요. 변화산이 어느 쪽이냐.

변화산은 모든 공간을 점유했습니다. 어느 쪽이냐, 어느 국소 지역을 의미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이 ‘변화산 계시가 어느 쪽에 왔습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 안되는 게 계시가 인격화되고 말았어요. 예수님이라는 인격으로 이것이 흡수 통합되어 버려요.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온 지구상 온 우주에 다시 재림하십니다. 강림하십니다. 그럼 예수님의 인격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죠. 내가 올 때 어떤 자도 숨을 곳이 없다, 이 말은 모든 공간이 예수님의 권세로 이미 접수가 된 상태에요.

변화산에 나타났던 그 계시가 전 지구상을 다 덮고 있는 거예요. 다 덮고 있단 말이죠. 마치 노아 홍수가 특정 지역의 홍수가 아니고 전 지구적인 홍수인 것처럼. 이 말은 뭐냐. 내가 하나님의 계시에 해당되지 않는 어떤 특별한 중립지역, 특수한 지역을 하나님께서 남겨둔 적이 없습니다.

애굽 나라에 유월절이 있었죠. 자, 유월절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너희 맏아들이 죽는다는 계시가 주어졌을 때 그 중에 교도소에 있던 그 죄수의 맏아들은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애굽 나라 교도소에 갇혀있는 어떤 죄수의 나이가 한 50대면 맏아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맏아들이요. 맏아들은 자기 집에 있겠죠. 맏아들이 어린데 범죄할 리는 없고. 아버지는 교도소에 있고 아들은 자기 집에 있을 때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그 아들이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성경에 보면 죽었다고 되어있어요 (출애굽기 12장 29절,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애굽의 왕의 아들부터해서 심지어 옥에 있는 죄수의 맏아들까지 다 죽어버렸어요.

이것은 계시의 폭설이에요.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려버린 겁니다. 바로 왕은 바로 자신도 남자고 그리고 앞에 있는 늙수그레한 영감 모세도 하나의 인간으로 본 거예요. 그 모세가 계시의 인격화된 존재라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모세가 한 말이 모세에게만 해당되지, 나라는 바로 왕은 손톱만큼도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바로 왕이 그런 이야기를 했죠. 여호와가 누군데 내가 그 하나님을 굳이 알 필요가 뭐 있느냐. (출애굽기 5장 2절,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오늘날 전도하고 뭐 이렇게 해보면 세상 사람들이 하는 한결같은 이야기가 그거에요. 너나 믿으세요. 예수 너나 믿으세요. 내가 굳이 예수까지 믿을 필요 없다. 나 지금 다른 종교 있거든. 부처 있거든. 부처 믿고 있으니까 너나 예수 믿으세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예수라는 분이 특정 부분만 관여하지, 모든 지구를 다스리는 권세 있는 자라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 못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아까 처음에 했던 것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21절 말씀을 다시 보게 되면 예언은 언제든지 ‘~이 아니요’라고 했죠. 여러분들 이야기해보세요, 아시는 거니까.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난 게 아니라 했죠. 사사롭다는 것은 20절에 나와 있고. ‘사람의 뜻이 아니요’라고 했죠. 사람의 뜻이 아니요, 계시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냥 일방적이다 이 말이죠. 19절에 봅시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샛별, 새벽에 떠오르는 그 금성, 샛별이 떠오를 때 여러분들이 샛별보고 ‘떠오르지 마. 떠오르지 마. 오늘은 나 바쁘니까 너하고 상대해줄 시간이 없어. 내일 떠. 내일 떠.’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안되죠. 그냥 일방적으로 떠올라버리죠.

계시가 그런 거라 이 말이죠. 내가 요청해서 내가 필요할 때만 오는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그냥 공격하듯이 덮치듯이 오는 겁니다. 화산 밑에 있는 주민들이 화산의 용암이 터져버리면 그들은 아침 밥하다가 화산재에 그냥 뒤집어 씌이잖아요. 폼페이 유적보세요. 자다가도 화산재에 덮여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사람의 뜻이 무엇이냐’ 이것부터 한번 정리해봅시다. 사람의 뜻이 아니라 했는데 ‘아니다’를 알아야 되니까. 그건 이렇게 보면 돼요. ‘세상이 나를 심사할 권한을 갖는다’ 세상이라는 것은 그냥 고요히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심사해요. ‘너는 이정도 이정도 인간이야’라고 우리 삶의 환경이 나를 조사하고 탐색을 하고 심사를 하고 있어요.

심사할 때 그 심사방법이 뭐냐? 세상이 쏘아대는, 우리를 검사하고 조사하고 평가내리고 측정하고, 너는 금메달, 너는 은메달, 너는 동메달, 너는 스케이트 타다가 노선 벗어나서 예선 탈락, 이렇게 심사를 하는 세상의 무기가 뭐냐 하면 이런 말이에요.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

세상 모든 것은 이성적으로, 이성적이라는 말은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합치되는 이 체계를 그들은 진리체계라 하는 겁니다. 진리라는 것을 우리말로 하면 참되다 또는 올바르다. 인간들의 뭉치, 인간들의 그 모임에서 세상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하면 참되고 올바른 것을 모아서 그것이 나 자신을 명령하도록 하는 체제, 그게 이 세상입니다.

참되고 올바른 것. 그런데 참되고 올바른 게 이게 이성적이라 했죠, 이성적. 여기서 이성적이니까 진리체계라 하면 이성이 동의할 때만 진리가 되겠죠. 그러면 이성이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이성이 누적되고 축적되죠. 이성이 축적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 진리체계가 하나로 고정된 게 아니고 점점 더 흔히 말하는 발달을 하게 되는 거예요, 발달을.

고려시대에 있는 사람이 서울서 부산까지 자동차로 4시간 걸린다 하면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뭐 축지법 쓰나?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그쪽 세계에서 4시간 만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축지법입니다. 그 시대에 그런 걸 또 만들어놨어요. 도인이 도법을 사용하게 되면 4시간 만에 갈 수 있어요. 그럼 요새 사람치고 도인 아닌 사람이 없겠네. 4시간 만에 다 가니까. 만약에 오늘날도 그런 이야기하면 이걸 뭐라고 합니까? 미신이죠. 김건희. 무슨 법사. 미신이죠, 미신.

미신은 잘못 믿었다는 거예요. mistake. 뭔가 오류가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 오류를 측정하는 게 이성적이다. 오늘날 이성적이에요, 오늘날. 고려시대 때 이성적인 것 말고. 고려시대 때는 얼마나 이성적이었을까요? 그러나 오늘날 이성적으로 봤을 때 이것은 미신에 해당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진리체계란 변동이 일어나요. 변하니까 이것은 진리가 아니죠.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가지고 지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식.

방금 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은 나를 심사한다. 무엇으로 심사하는가. 얼마나 지식, 아는 게 많은가를 가지고 심사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성적으로. 그렇다면 교회에서 또는 교계나 교단에서 기독교 내에서 가장 믿음 좋다고 대우받는 사람은 누구게요? 성경가지고 오모짱 취급하는, 할 일 없어서 맨날 헬라어, 히브리어만 공부하는 인간들, 그것가지고 어떤 권위를 가지는 것, 그것가지고 남의 신앙을 심사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 목사를 해도 그냥 지방 신학교 말고 서울대학 나온 목사, 연고대 나온 목사, 미국 유학 갔다 온 목사, 그 목사가 큰 교회 후임자로 오잖아요. 보다 잘 심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바로 사사로이 푸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이 ‘아니요’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계시, 폭설 계시, 변화산의 계시는 그 앞에 뭐가 필요 없느냐 하면 직업이 필요 없다. 베드로의 직업이 뭐에요? 전에는 한때 전직 어부였죠. 지금은 직업이 뭡니까, 변화산 있을 때? 무직이죠, 무직. 의료보험 안 냈어요. 뭐 직업이 있어야 의료보험을 내죠. 직업 없어요. 놈팽이죠, 그냥.

이 세상은요. 지식의 레벨에 준해서 직업을 서열화 시킬 수 있는 세상입니다. 제일 위에 서울 법대부터 해서 쫙. 그건 인문계이고 자연계는 또 서울 의대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쭉 서열화 시킬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세상이 나를 심사할 권한이 있다. 세상이야 그렇게 되든 말든 예수님은 예수님 자기 일 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문제는 예수님이 이것을 건드렸다는 거예요. 이 속에 속한 누구, 아까 이야기한 가룟 유다를 자기 열두 제자들 가운데 집어넣은 거예요. 집어넣으니까 이 세상은 주님으로부터 이미 주님의 계시에 의해서 처벌받아야 될 대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렇게 가룟 유다를 집어넣었을 때 가룟 유다가 한 것은 예수님을 팔아먹은 거잖아요. 제발 죽어줘. 이 말이죠. 예수여, 당신 제발 없어져줘. 죽어줘. 이것이 이 세상에서 하나같은 그들의 뜻에 대한 마음을 대변해주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예수 믿으면서도 제발 부탁인데 예수님 좀 우리 교회에서 나가달라고. 교인들도 습관화되어서 교회 올 때만 주님과 함께 있고 자기 집에 가면 주님이 없어요. 어떤 공간의 점유에 대해서는 자기가 이성적으로 구축한 나만의 공간으로 따로 챙기고 있습니다. 집에 화장실까지 와서 예수님 챙기기에는 자기가 너무 많이 신경이 쓰인다는 거죠. 명절날 시골에 갔을 때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섬기겠지만 서울에 와서 자기 아파트에 있을 때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생각 좀 안하겠습니다, 하고 자기가 스스로 다짐을 하는 거예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게 있어요. 베드로가 이것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나왔다고 하잖아요. 21절에 사람의 뜻은 일단 아니고(X) 그다음에 O는 뭡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이 풀어준 것이라 되어있죠. 이 말을 할 때 항상 이 말을 누가 하는가를 보세요. 이 말을 누가 합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자기가 변화산에서 세 사람을 봤죠? 이 사람들도 사도니까 나중에 성령을 받을 게 아니겠어요. 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사람들을 성령 받았다 하지 말고 이 세 사람이 변화산에서 변화된 계시의 원형에 어떤 위치에 놓여있었는가, 그 본래의 자리를 찾아갈 필요가 있어요, 본래의 자리를.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 받은 것이다. 끝. 이런 게 아니라 내가 받았던 계시의 산, 아까 변화산 있죠, 지극히 큰 영광 중에 그 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가 직접 들었다 했죠. 직접 들었다 할 때 그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있었습니까? 그 현장에 또 누가 있었습니까? 예수님하고 네 사람만 있었습니까, 아니면 또 누가 있었어요? 모세, 엘리야죠. 그러면 모세, 엘리야가 이 베드로의 원형이 되는 거예요. 모세, 엘리야가.

예수님, 모세, 엘리야 세 분이잖아요. 그럼 세 분은 이렇게 묶어지는 겁니다. 세 분 다 영광스럽게. 세 분이 영광스럽다면 영광스럽지 않은 쪽은 어느 쪽입니까? 3 대 3으로 붙는 거예요, 3 대 3. 영광스러운 쪽은 세 명이죠. 다른 쪽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 붙는 거예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봤지만 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해같이 빛났습니까? 빛났어요, 안 빛났어요? 안 빛났어요.

자, 그러면 여기서 질문은 해같이 빛나지도 않는데 과연 그들이 예수님의 계시를 전달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되지 않았잖아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만나기 전에 해같이 빛났느냐를 물어보는 거예요.

모세와 엘리야가 해같이 빛났습니까? 누더기 걸치고 돌아다녔어요. 무슨 해같이 빛나요. 모세와 엘리야가 앞에 지나가면 아이고 눈부셔. 눈부셔서 못 보겠어. 이건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 때뿐이지 내려와가지고 함께 있을 때는요, 벌써 마찬가지 똑같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신기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실제로 모세와 엘리야가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와 동일한 육적인 사람이다 이 말이죠. 육적인 사람인데 육적인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계시를 전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느냐 이 문제를 생각해봐야 됩니다, 육적인 사람이. 그게 풀어져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해같이 빛나지도 않는데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 가 정립이 되거든요. 상당히 난해한 문제죠.

지금 보았다는 게 제 말이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겁니다. 우리가 그 음성을 들었다. 18절에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실제로 듣기만 한 게 아니고 보기도 했어요. 그래서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고 했단 말이죠. 보고 들었다는 이 자체가 과연 계시 전달자로서의 자격이 되냐 이 말입니다.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보고 들은 걸로는. 다른 게 있어줘야 돼요. 다른 요소가 있어야 돼요.

그것은 모세와 엘리야가 그 때 그 시대에 당한 현실을 우리가 파악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잠시 미루고요. 모세와 엘리야가 그 시대 때에 그들은 어떤 초월적 계시를 받았느냐 또는 계시에 의해서 움직여나갔는가. 그걸 생각을 해봐야 돼요.

다음 시간에 본격적으로 하겠지만 미리 조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그 계시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 위에서 받았고요. 모세도 마찬가지죠, 시내산에서. 계시를 받았고 위에서 내려온 방향은 어디를 향했습니까? 땅으로 향했죠. 그러니까 계시의 출처가 위니까 이것은 영광스러운 거예요. 영광스러운 계시가 땅에 내려왔다는 말은 계시의 처음 출발점이 영광스럽기 때문에 이것은 영광스러운 곳으로 돌아갈 그런 계시가 되는 겁니다. 영광스러운 곳으로 돌아갈 계시가 돼요. 그러면 모세, 엘리야가 이 땅에서 초라하게 산다는 것은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이 되는 거예요.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현상.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전에 고기 잡던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위에서 내려온 게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기 무슨 조치가 있어야 돼요. 위에서 내려온 게 없고 그냥 주님의 영광을 봤죠. 봤는데 제가 초막 셋을 지어서 여기에 본인이 합류하려고 애를 쓴 거예요. 그러나 합류하려는 자체를 주님으로부터 거부당합니다. 너는 지금 합류하면 안 돼. 모세, 엘리야, 예수님의 영광에 지금 합류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다른 곳을 경유해야 너도 예수님처럼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영광스럽게 되는 겁니다. 그 다른 게 뭐냐? 그것은 10분 후에 쉬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