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일

210602 한윤범목사 녹취록 댓글

아빠와 함께 2023. 2. 10. 01:43

임청일 210602

한목사님 화이팅!

 

 

 

대전-131강 마태복음28장1절(차이)20210531b
(강의:이근호 목사)


마태복음 28장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이 끝이고요. 나중에 끝나고 나면 [십자가를 아십니까] 그것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절에,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라고 돼있지요.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지상에는, 여러분 아는 이야기니까 편하게 들으세요. 지상에는 시간이 흐릅니다. 시간이 흐르니까 시간의 한 지점을 꼭 집어서 어떤 시간이 있느냐 하면 안식일, 어떤 특정 스물네 시간 안식일이라는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러면 안식일 이걸 따져보자는 거예요.

안식일에 해 색깔이 바뀝니까? 그런 것 아니지요. 안식일에 특별한 새가 두 번 울었는데 세 번 운다든지 그런 변화 없지요. 어떤 변화가 생겨야 이게 의미도 생기는 법입니다. 우리 상식에서는. 그런데 왜 이 날 저녁과 그 다음 날 저녁까지가 안식해야 될 안식일이냐를 세상 변화를 통해서 증명해보라 하면 이게 증명이 됩니까? 증명이 안 되지요. 일반 보통 날과 전혀 차이 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차이가 없다. 차이가 없음은 무슨 말이냐? 개념도 의미도 생기지 않아요. 차이가 없으면, 뭔가 달라야 이름을 붙일 수가 있어요. 이름이 그냥 모든 세상 이름이 개라고 한다면 편리하긴 편리해요. 개. 그런데 주인을 못 찾아 전부 다 동일한 개가 되어서. 모든 인간을 사람이라 하면 편리하긴 편리한데 사람인데 내 아는 사람과 구분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분류하고 이름 짓고, 분류하고 이름 짓고, 분류된 것을 또 분류해서 또 이름 짓고 이름 붙이고, 이름 붙이고 그게 인간의 철학, 지혜, 과학, 학문하는 일이 그 일이에요. 계속 많이 분류하면 훌륭한 학자, 심도 있는 연구를 많이 한 학자, 거기다가 최초로 분류를 해놓으면 자기 이름을 갖다 붙이는 거예요. 과학이 됐든 음악이 됐든 미술이 됐든 새로운 학파, 인상주의, 사실주의, 뭐 이렇게 이름 붙이는 겁니다. 낭만주의 해서 전부 다 붙이잖아요.

그만큼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개념 공부할 때 수박이 뭐다 할 때 선생님이, “수박이 뭐냐?” 하면, “빨간데 까만 씨가 있는 게 수박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맞기는 맞지만 좋은 점수를 못 받아요. 뭐냐 하면, “선생님, 수박과 참외의 차이는 이렇습니다.”라고 차이를 이야기해줘야 돼요. 차이를 해야 수박도 알고 참외를 아는 두 가지를 다 아는 사람으로 인정이 되거든요.

그래서 여기 안식일의 의미는 뭐냐? 지상과 하나님 계신 곳과 인간이 사는 곳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이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차이를 몰랐지요. 왜냐하면 안식일 행할 때 제사 지내라 했잖아요. 제사 지낼 때 자기 행함을 동원해서 제사 지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거는 안식일 기억하는 것도 본인이고 시간의식에서 나왔고, 그때 갖다 바치는 양이나 제물도 그들의 갖다 바쳤고, 거기에 수고하는 자세도 자기의 행함이니까 안식일이 어디 속하느냐? 이 세상에 속하는 안식일이 된 겁니다.

이 세상에 속한 안식일이 되니까 어떤 사람은 안식일에 나무하러 가고 문 열고 하는 거예요. 세상 안에 포함된 안식일이 된 거예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안식일은 무엇과 관련돼야 돼요? 세상 외부와 외부의 요소가 안식일에 담겨서 그래야 안식일의 성취가 됩니다. 완성이 되는 겁니다.

제가 강의할 때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성도란 여러 가지 설명이 많이 동원될 수 있어요. 성도란 이렇고 성도는 어떻고 성경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자주 쓰는 성도란 초과적 요소가 나타나는 존재, 이게 성도란 초과적 요소. 초과적 요소란 것은 비인위적 요소, 인위적으로 손댈 수 없는 요소.

아까 첫 번째 시간에 했던 시편 54편 4절에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시니” 갑자기 누가 등장합니까? 하나님이 등장하지요. 그러니까 자기 인생을 살면서 인위적으로 내가 내 인생을 살았다가 아니라 거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초과적인 요소가 나올 때 성도입니다. 초과적이란 것은 내게 속한 것 말고 무엇, 내가 손댄 것 말고 그 무엇이 있어야 되지요. 예를 들면 교통사고 일어났다. 교통사고 누가 일으켰습니까? “○집사님, 교통사고 누가 일으켰어요?” 상대방 운전사가 잘못해서, 이렇게 되면 이거는 초과적이 아니에요.

초과적이란 것은 내가 알 수 있는 것으로 되돌아오면 안 돼요. 나를 무식하게 만들어야 돼요. 그래서 성도는 이렇습니다. 성도 아닌 사람이 성도를 보게 되면 뭐냐? “저거 무식한 거야, 순진한 거야? 무대포야 뭐야, 저거? 기도해서 응답받았다 이야기 좀 하란 말이야.” 기도라는 원인을 집어넣어서 응답받았단 이야기하란 말이죠. 기존교회에서.

그런데 뭐냐 하면, “나 기도 안 했는데 응답받았어.” 이게 말이야, 자칫하면 천박하고 딴소리하면 안 되지. 그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어. “너, 성령 받았다며.” “성령 받았어.” “뭐했는데?” “한 것 없어.” 이렇게 하면 진짜 남 배려 못하는 싸가지 없는 역할이에요. “그럼 너 한 것도 없이 성령 받았어?” “그래.” “그럼 나도 한 것도 없는데 성령 못 받았어?” 그걸 왜 나한테 따지냐 말이죠. 그건 초과주신 그분의 자기결정이지 왜 나보고 그런 이야기하느냐 말이죠.

주일에 설교했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손가락 후벼도 죄가 없게 만들어버렸어요. 하는 짓마다 죈데 분명히 나의 인위적 차원에서는 하는 짓마다 죄에요. 나밖에 모르는. 그런데 초과적 요소가 뭐냐? 분명히 죄 지었는데 내게 돌아올 책임이 하나도 없어요. 죄 책임이 없어. 벌이 없는 거예요. 그럼 상대 저쪽에서, “어째서 그런데?” 하면, “나도 몰라. 그렇대.” 그럴 때 “너 믿어지나?” “나는 믿어져.” “나는 안 믿어지는데.” “안 믿어지는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고.” 이게 초과적인 거예요, 초과적인 것.

그래서 초과적인 것 앞에서는 이 말하면 안 돼요. 사고났다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사고란 말을 붙일 자격이 없어요. 정 붙인다면 태어난 게 사고지요. 인간은 사고는 없고 전부 다 뭐냐? 사건의 나열밖에 없어요. 모든 게 사건입니다. 사고란 말을 할 때는 뭐냐 하면 내가 손해 봤다는 뉘앙스와 연계돼있어요.

지금 부활이란 것을 안식일 이후에 주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셨는데요. 그래서 안식일의 완성이 부활인데 부활을 설명할 때 부활이 어려워서 제가 어렵게 예를 들 수밖에 없습니다. 2와 0의 차이는, 이렇게 물을 때 2-0=2, 이것도 아니고 0+2=2, 이것도 아닙니다. 0,2=2, 이게 옳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2-0에서 0은 없음이잖아요. 2는 있음이죠. 그것도 두 개나 있잖아요. 두 개 있으니까 카운트해서 2가 있잖아요.

2-0 이런 이야기할 때 그 선입관 뉘앙스가 어떠냐 하면 있는 것은 좋은 것이고 없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이렇게 응원하고 옹호하는 그런 계산이 돼요. 숫자 하나에 1을 붙이고 -, + 또는 허수라는 단어 붙일 때 항상 바닥에 있는 것은 뭐냐? 현재 있는 것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고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은 재주 더러운 것이라는 이런 의식이 있어요. 물론 사람들은 표준적으로 그래요.

어떤 사람이 손가락이 여섯 개다. 편리해서 좋겠네, 이런 사람 없잖아요. 군엔 안 갑니다. 군에 갈 수가 있어요.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장애인이라 하지요. 장애인이란 의식 자체가 뭐냐 하면 손가락 다섯 개가 좋다는 느낌을 먼저 전제로 깔고 있는 거예요. 손가락이 여섯 개가 나쁜 것이 아닌데 손가락 여섯 개 있는 엄마가 뭐라고 합니까? 수술하자, 이렇게 나오지요. 얼마나 놀림 받겠는가 수술하자.

그러니까 0이란 자체를 안 좋아하는 거예요. 재산이 한 100억 있었는데 사기 당해서 지금 빚졌다 하면, 이건 누구도 망했다고 하잖아요. 너 약간 차이 나네. 이렇게는 이야기 안 하잖아요. 사람들의 성경을 보면서 부활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자체가 나빠요. 이거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부활의 세계는 좋은 게 아니고요. 부활의 세계는 차이 나는 거예요. 좋은 게 되면 우리가 은근히 그걸 고대하게 되고 욕심을 내게 되는 거예요. “주님, 언제 저 부활의 세계에 들어갑니까?” 자꾸 탐욕을 부리는 거예요. 탐욕은 우상숭배라고 골로새서 3장에 나와 있는데,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잘못 되게 태어났어요. DNA 유전자부터 수상한 유전자로 태어나서 생각하는 것이 이 세상의 지옥에서만 용납이 되는 그 사고방식으로 우리 자아를 꽉 채워놓은 겁니다. 냉장고에 과일 채워놓듯이 꽉꽉 채워놨어요.

그래서 100억 있다가 재산 없으면 망한 걸로 보는데, 그리고 돈이 한 푼도 없다가 100억 되게 되면 뭐라 합니까? 이걸 좋다고 보잖아요. 그러니까 0원에서 100억이란 돈이 있으면 좋~다가 되는 거예요. 100억이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차이 나지요. 우리 집에 돈 100억 있는데 귀찮아 죽겠어. 돈을 어디 재워놓을 데가 없어서 잠잘 때 다리 구부리고 자야 된다니까. 발만 닿으면 돈이야. 나는 왜 이렇게 인생 힘들게 사는지 모르겠어. 이게 지금 자랑질 하는 겁니까?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사가지 없는 행동이겠지요.

부활을 뭐냐 하면 바로 이 지상에서 하는 행세 있잖아요. 있는 것은 좋은 것이고 없는 것은 결핍된 것이고 결핍된 것은 나는 저주받은 것이라는 그 사고방식을 사그리 없애버리는 거예요. 이게 부활의 세계에요. 그래서 부활이라는 것은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안식일 주신 이유가 뭐냐? 그거는 안식일을 통해서 이 지상에 잘못된 저주받을 사고방식에서 속이지만 일찍 천국의 삶을 교육받는 거예요. 배우고 익히는 겁니다, 천국의 삶을. 안식일을 통해서 안식일 제사를 통해서 노동을 금지함으로써. 그러면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느 장로, 어느 집사한테 그런 사람 있으면 내가 따라하겠는데 하는데 그렇게 한 사람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초과적인 것이 오게 되면 자, 방금 했던 것 정리해봅시다. 초과적인 것이 있어야, 이게 성도지요. 초과적인 게 있을 때 성도지요. 초과적인 것이 있을 때 성도는 무엇을 배우느냐 하면 차이를 배우는 겁니다. 나는 잘 됐다는 걸 배우는 게 아니고 차이를 배우는 거예요. 차이를 배우려면 서로 동일시 될 수 없는 것 사이에 양쪽 다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성도, 성령 받은 사람이죠.

그러니까 성령 받은 증거가 그립습니다, 알고 싶습니다, 하는 것은 그 질문 자체에 뭐가 깔려있습니까? 성령 받으면 내가 좀 좋아지겠습니다, 라는 그런 의식이 깔려있지요. 그렇지요. 의식이 깔린 거예요. 성령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들지요. 궁금한 게 아니고 사실은 그렇게 받았으면 좋겠다는, 받았음을 확실히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겠지요.

바로 그것이 지상 생활하는 태도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게 부활의 세계에서는 주인공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질문하면 주께서 너는 몰라도 되잖아, 왜 이래. 나만 알면 되지 네가 굳이 그걸 알 필요가 있겠어. 알 필요 없는데 자꾸 알려고 하는 것은 살짝 수상해지려고 하네. 이렇게 되지요. 나만 알고 있으면 되잖아.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까.

앞에 한 것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도된 것은 우리로 좋은 사람 되는 게 아니고 죄 사함을 하시는 분의 역할에 부응하라고 우리가 거기가 참여된 거예요. 우리는 죄인으로서. 죄인이 되어야 죄 사함의 기능이 우리와 협업이 되잖아요. 아귀가 맞다 이 말이죠. 주님은 뭐라 합니까? 신랑이죠. 신랑만 덜렁 있는 부부 없잖아요. 주님이 신랑이란 말은 이 땅에 누굴 찾아왔단 말입니까? 신부를 찾으러 왔잖아요.

그러면 신부는 신부된 걸 자랑하겠어요, 신랑을 자랑하겠습니까. 신랑을 자랑하잖아요. 그러면 신부는 나 신부라고 자랑할 그러한 굳이 그런 이야기를 떠버릴 하등에 이유가 없는 거예요. 신랑만 이야기하면 된다 이 말이죠. 신랑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너는 뭐했는데?” “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지. 신랑이 다 알아서 다하지.” 그러면 이런 싸가지 없는 것....

그래서 주님께서 오실 때 부활은 좋은 것이니까 부활 되려고 오신 게 아니고 주님께서 내 좋은 것 할게, 이게 아니라 십자가 죽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이게 사명입니다. 모든 율법, 안식일이든 십일조든 모든 율법의 완성은 부활이 아니고 뭐냐 하면 죽음이에요. 그 점을 이제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체험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죽음이 갑자기 두 종류가 생겼어요. 하나는 예수님이 죽으신 죽음,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빼놓고 여타의 사람, 우리 죽은 것도 포함되지요. 여타의 사람이 죽는 죽음, 이 두 죽음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른 이유가 예수님의 죽음은 율법의 완성으로 율법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죽는 죽음인 반면에 인간의 죽음은 율법에 위반된 거예요. 율법에 위반된 것도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그런데 완성의 한 부분, 율법의 저주 부분을, 그러니까 복 부분은 없는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우리의 죄를 더해서 우리를 저주받기 위해서 율법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그렇다면 예수님의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 두 개의 차이를 보여주는 거예요. 차이를 보여주는데 일반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이런 차이를 목적으로 왔다는 걸 모르고 그분이 죽는 것, 자기 죽는 것도 둘 다 있음에서 1에서, 나의 있음 영어로 one이죠. one에서 0제로가 되니까 아까 인간은 없어지는 것, 사라지는 걸 뭐라고 봅니까? 이걸 나쁜 짓으로 보는 거예요.

진짜 극악적으로 나쁘고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 마지막 판사가 내리는 건 뭡니까? 사형이죠. 사형은 제발 이 지구를 떠나거라. 그냥 없어져, 사라져, 우리 동네에 같이 있지 말고 너는 그냥 없어져. 기어들어오지 말고 그냥 죽어버려. 그래서 아내들이 남편이 술 먹고 애먹이면, “나가 죽어, 죽어버려.” 그 말은 뭐냐 하면 안 죽고 있는 나는 현재 좋은 상황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질 하고 있는 겁니다. 나가 지금 버티고 있잖아.

그래서 우리가 좋은 것은 상이 되고 내게 나쁜 것은 징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보고 그 징벌을 받으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세계는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늘나라 차이 전혀 없는 거예요. 오늘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줄 때 성령께서 당부하는 건 그것에요. 이게 경상도 말인지 일반적으로 쓰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말이 있어요. “좀!” 이것 대전도 충청도에 이런 것 씁니까? 경상도가 쓰지요. 쫌. 영어로 하면, please, please, please 제발. 제발 부탁하고 탄원한다. 간곡하게 너한테 당부한다. 공부 좀 해라, 이런 것 있잖아요.

성령을 주신 주님께서 성령 받은 우리에게 하는 건, 제발 좀 차이를 보라. 좋고 나쁘고 말고 그 사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신기한 차이, 그걸 좀 봐라, 그걸 느껴라 이 말입니다. 돈 없으면 망했다, 돈 좀 생기면 옴매 기 살아. 돈 없으면 옴매 기죽어. 순악질 여사 눈썹 그려서 코미디에 나온 것처럼.

모든 게 차이는 그냥 모든 레벨이 차이에서는 이미 완성 단계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모자람과 빼고 이런 게 없어요. 그러니 얼마나 좋은 겁니까. 그야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벗어지지 않습니까. 차이를 말하기 위해서 성도가 된 거예요. 좋은데 간다고 성도된 게 아니고 좋고 나쁘고는 선악체제기 때문에 좋고 나쁘고는 이 땅에서 일반 불신자들이 실컷 많이 하란 말이죠.

좋은 천국 못 가서 벌벌 떨면서 교회 나오는 것, 얼마나 떠는지 교회 오면서 벌벌 떨고 있어요. 기도하면서 떨고 특히 더 많이 떨 때는 대표 기도할 때 벌벌벌. 특히 남자 말고 여자들. 말도 안 돼, 발음도 안 돼. 너무 떨어서. 지금 생중계 될 것이고 온갖 것 생각해서 준비한 것 하나도 기억 안 나요. 분명히 자기는 기도를 5분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12초라. 벌벌 떨다가 다 줄줄 흘려버렸어. 기도 잘한다는 소리 들으려고 준비 다했는데 다 흘려버렸어. 왜? 기도 잘하면 나는 어떤 사람 된다? 좋은 사람 되기 때문에. 기도발도 좋네요.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 뭐라 합니까? 쫌, 제발 좋고 나쁘고를 생각하지 마. 너희는 차이를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이야. 차이. 예수님처럼 주의 잔이면 그냥 내 뜻은 지나가지만 주의 뜻이면 내가 그냥 마시겠나이다. 차이에요. 그 차이가 심판이에요. 너희들은 영원한 천국에 오지 못한다는 차이. 내가 너희들 천국 못 간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지. 그것 몰라? 내 아들 보낼게. 내 아들 어떻게 대우했어?

포도원비유에서 어리석은 농부들이 뭐합니까? 종 오니까 때리고 종 오니까 때리다가 마지막에 아들 오니까 그 아들만 죽이면 이 포도원은 우리 것으로 재산등록 된다고 죽여 버렸지요. 그 이야기를 예수님이 왜 하십니까? 자기 자신이 온 것은, 인간이 제일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죽으면 안다. 죽으면 큰 탈 나. 어떤 경우라도 살아남아야지 죽으면 모든 것은 다 살아온 것이 헛수고요 이건 정말 파탄이야, 이건 패배야, 라고 여겼던 그것, 그 죽음 속으로 주님이 자진해서 들어가시잖아요. 날 잡아 잡숫소, 하고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삶을 반복시키는 겁니다. 성령을 줘서. 예수님도 올 때 성령 받았거든요. 성령 받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 이것은 나한테 이익이다, 손해다가 아니라 그냥 차이 나는 거예요.

전에는 한 달 수입이 한 50만원 달랑거렸다가 갑자기 아들이 횡재해서 어머님, 용돈 쓰세요, 하고 아들 250만원 또 며느리가 250만원 도합 500만원 했을 때에 역시 복음대로 사니까 주께서 도와주시나 하지 마시고 약간 차이 나지, 약간 차이나요. 차 바꾸고 경운기 같은 차 타다가 편안하게 가는 것 차이, 차이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차이를 보고 좋다, 나쁘다 하지 마세요.

차이 자체가 부활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세상을 떠났습니까? 아니죠. 본격적으로 부활 되신 분으로서 본격적으로 이 세상에 활동을 하시는 겁니다. 눈에 안 보이죠. 손에 만질 수 없지요. 사진촬영 안 되지요. 그러니까 이건 아까 이야기한 초과적 존재. 초과적 존재니까 이걸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면 유령 같은 존재.

그래서 성도는 누구와 산다? 유령하고 사는 거예요. 꼭 무당 같아요. 단군무당 섬기는 사람에게 단군 욕해보세요. 화내지. 여기 당신밖에 없는데 왜 화내나 하면 저 그림 보세요. 단군님이 살아 계시잖아요. 그래서 무당들은 자꾸 초과적인 것을 끄집어내요. 우연적인 것을. 부채를 가지고 지가 부채 해놓고 보자, 보자. 부채 이렇게 넘어졌다.

또는 쌀을 팥을 지가 손가락으로 지 마음대로 이미지 만들어놓고 쌀에다 그려놓고 안 되겠네, 안 되겠어. 40 전에는 시집 못 가겠어. 저거들이 아무데나 점괘를 지가 만들어 깃대를 만들어놓고 오는 사람한테 자, 점괘 나갑니다. 아무거나 뽑아보세요. 아무거나 쓱 뽑으니까 그 다음부터 지 마음대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림에 대해서. <무엇이나 물어보살>에서 둘이 그 짓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근본적으로 뭐냐? 점 보러 오는 사람이나 점괘 풀어주는 사람이나 항상 뭘 생각하느냐 하면 좋은 것은 가지고 나쁜 것은 없애주세요, 라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아무나 물어보살 찾아간다든지 아니면 교회 나오든지 하는 거죠. 그러면 주님께서는 무엇과 싸우겠어요? 이게 부활의 세계가 아니거든요. 아까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뭘 체험하게 한다 했습니까? 부활의 세계, 천국생활을 이미 시작하게 하거든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좋은 것과 진짜 주님의 부활의 속성과 그것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사고방식을 그냥 두지 않지요. 부셔버립니다. 그 부셔버린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자아를 가루로 만든다. 그것도 그냥 가루가 아니고 고운 가루, 아주 고운 쌀가루로 만들지요. 자아와 가루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아요. 자아는 어디까지나 물질입니다. 또는 사물을 자아라 하지요. 사물의 조각을 가루라 하잖아요. 그런데 자아는 허구잖아요. 허구지만 사람들이 이걸 못 버립니다.

제가 될 수 있는 대로 질문을 안 하려해요. 여러분들이 부담되는 걸 싫어해요. 안 그래도 잠 오고하는데 부담주면 안 돼요. 여기 벽이 보이지요. 벽이 보입니다. 그 다음에 벽을 보고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묻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벽을 보고 있다고 이야기하죠. 내가 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누굽니까, 묻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벽을 보고 있다는 걸 내가 압니다. 그럼 내가, 내가 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건 납니다. 이것 언제까지 해야 돼요.

이걸 초월자아라 합니다. 피히테라는 칸트의 제자 그 사람이 이걸 아주 굉장하게 파고들어갔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의식의 주인공은 자아가 아니라 초월자아다. 초월자아는 오직 직관으로만 알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했고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초월자아가 다 관여돼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모든 의미는 자아의 영역을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전부 다 어떤 행동을 했던지 그건 내가 했어요. 그건 내가 알아요. 그건 내가 구경했어요. 그건 내가 체험했어요. 전부 다 ‘내가’가 다 들어가는 거예요.

중국에서 화성 가는 로켓 쏘아 올렸다. 그건 내가 어제 뉴스 봤어요. 내가 또 들어가는 거예요. 내가 안 만들었어요, 하는 게 천만다행이에요. 결국 인간이 아는 지식이라든지 체험이란 것은 내가 실제로 어떤 식으로 연관성이 있어줘야 나에게 의미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이것은 결국 무엇을 겁내느냐 하면 죽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누가? 나는 죽을 때 내가 알아서 죽어요. 이건 자살인데 죽고 난 뒤에도 내가 살아 있어요, 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나는 죽기가 싫어요. 왜? 그렇게 되면 나는 절대자아는 어떤 경우라도 누구는 버텨야 된다? 나는 버텨야 된다. 이게 바로 절대자아잖아요. 이게 신이 되고 악마의 화신이 된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나는 죽으면 그걸 실패라고 간주하겠습니다. 내가 몸이 아프면 실패라고 간주하겠습니다. 여전히 아까 이야기한 좋고 나쁘고를 누가 결정한다? 최종 판단자는 이것이 좋고 이건 나쁘다. 수박 맛있다, 맛없다 누가 결정 하겠다? 이건 누가 뭐라 해도 맛있다 해도 나는 이건 맛없어. 나는 커피가 맛있지 수박은 맛없어. 딱 내가 결정하는 거죠.

그러면 이게 부활의 세계에 합당한 생활입니까? 합당한 생활이 아니라 할지라도 여기서 벗어나는 재주가 있습니까? 절대적인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재주가 있어요? 주님께서 쫌, 제발 해도 부탁해도 우리는 못 벗어나지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0과 1 봅시다.

0과 2 사이에서 아까 2는 있음이죠. 초월자아가 있잖아요. 0이라 하는 것은 죽음이죠. 없다는 표시가 0이에요. 있으면 숫자로 헤아리는데 카운트가 안 돼요. 0은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없음을 0으로 하는 거예요.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미 인간은 있어요. 아무리 없이하려 해도 있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아까 자아, 내 자아를 쳐다보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초월자아가 있다. 내가 이미 있는 거예요.

있는 것을 없다고 할 때 나는 이제는 죽을 거야, 없을 거야 할 때 다른 사람이 묻습니다. 또 하나님이 묻습니다. 네가 없어져서 구원받는 게 기쁩니다, 라고 누가 이야기했어요? 초월자아 내가 했어요. 있잖아, 봐. 너 안 없어지잖아. 어떤 경우라도. 이게 바로 미치는 거예요. 불교신자한테 미치는 거예요. 동안거, 하안거 들어가서 문 닫습니다. 백날 해도 그 안에 들어가서 점 하나 찍고 도 닦아도 결국은 자아는 없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가 뭘 유도했느냐 하면 유아는 해탈 안 되고 무아, 너를 없애는 것이 해탈이라 하니까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린지. 내가 지금 있다, 없다를 누가 판정합니까? 새로운 자아가 등장하는 거예요. 이 자아는 어떤 자아냐 하면 절대자아기 때문에 강력하게 방어체제가 동원됩니다. 사드에요. 신령이라는 사드, 방어체제 동원합니다. 이 방어체제를 성경에서 자기 의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잖아요. 자기 의, 의는 좋고 죄는 나쁘다는 생각을 본인이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뭘 하신다 했어요? 차이를 남기죠. 차이는 좋고 나쁘고 아니고 중성이에요. 무채색이죠.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어요. 꼭 일산화탄소 같아. 아무 것도 없어요. 부활의 능력이 오게 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충분하게 네가 인정해라. 그것 말고 초과적인 것이 있어요. 그래야 차이가 등장하니까. 차이라는 것은 하나가 있으면 차이가 없잖아요. 둘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인간성의 차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0과 1 내가 죽는 것과 있다는 차이를 하지만 이게 차이가 있는 게 아니고 그걸 판정하는 절대자아가 있기 때문에 차이를 말하지만 결국 차이를 말하는 이유가 오직 차이 나지 않는 나만 영원히 존재하고 싶어 하는 의지만 드러날 뿐이죠.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뭐냐 하면 도저히 인간에서 나올 수 없는 다른 세계, 부활의 세계를 덩달아 이야기하도록 누가 개입하느냐? 주님이 활동해요.

지금까지 이해하다 갑자기 이해 안 되시면 곤란한데 내가 걱정되면 안 되겠지요. 뭐냐 하면 부활은 주님의 활동이 본격화되는 거예요. 시공간을 떠나서 본격화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팔레스타인 그 동네만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온 우주에 아니 계신 곳이 없이 편재하면서 활동하는, 부활은 주님이 활동하시는 겁니다.

활동하실 때 무슨 활동하느냐 하며 주님께서 부활할 때 이미 뭘 거쳐 왔습니까? 십자가를 거쳐서 부활됐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십자가로 세상에 들이대면서 심판하시는 활동을 하시는 거예요. 무엇에 대한 심판이냐 하면 바로 절대자아가 나쁘다가 아니라 절대자아가 부활의 세계와 차이 나는 십자가를 집어넣을 때 절대자아는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죄가 되는 것이 나쁘다가 아니라 죄가 되는 것이 성도의 하나의 역할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해서 십자가의 반복성을 위해서, 그래서 아까 했잖아요. 인간에게는 사고는 없고 사건밖에 없지요. 이 사건은 모든 사건은 십자가 사건과 이어진 사건으로서의 거미줄처럼 전부 다 연계돼있는데 조그마한 수박 먹는 사건인데 그게 십자가와 관련된 사건으로 거기에 같은 주님의 언약의 피가 미세 모세혈관을 통해서 흐르도록 조치를 다하시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28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볼지어다 내가 끝까지 책임지신다 이 말이거든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다시 말해서 성령 받은 증거가 뭡니까? 또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증거가 뭡니까? 그거는 바로 성도에게 초과적인 것 드러나는 거예요.

뭐가 초과적이냐? 내가 바로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나쁜 게 아니고 그런 역할을 맡게 된 것을 감사하는 거죠. 다시 말해서 내 일은 이 땅에 없다는 사실, 크게 적을게요. 오늘 이 강의의 마지막 결론은 이거였습니다. 내 일, 나의 일은 없다. 앞에 뭘 붙이면, 애초부터 나의 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뭐 며느리가 모여서 시어머니 욕하고, 시어머니끼리 모여서 며느리 욕하는 동치미 나와서 온갖, 동치미 모르죠. 동치미 여름에 먹는 깍두기 같은 김치 그런 건데 예능프로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속풀이쇼 동치미>에 나와서 여러 가지 불평불만 시집살이 호된 것, 며느리 때문에 못 살겠다는 것 있는데 그 이야기가 전부 다 어디서 걸리느냐 하면 차이를 몰라서 그래요.

나의 일은 아예 없어요. 그냥 주님이 원하는 차이를 알리는 그 일에 우리가 그냥 부름 받은 겁니다. 저는 이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사명이라고 해요. 사명은 좋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사명은 어쩔 수 없는 다른 가능성이 없어요. 성도는 성도가 내 일이 아닌 것은 다른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저 내 일은 없고 주의 일만 되도록 그 가능성밖에 없어요.

제가 전에 이야기했지요. 수요일에 이야기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잡을 때 다른 가능성이 없어요. 어느 강의에서 그 이야기했습니까? 수요일에 했는가, 다른 가능성이 없어요. 기생 라합이 정탐꾼 할 때 살려줄까, 말까 이게 아니고 그것 마땅하잖아. 당연한 거란 말이죠. 저쪽에서 여호와란 하나님이 와서 아모리 민족부터 모든 민족 작살냈는데 그 다음 차례는 우리 여리고 자기 민족 차례잖아요.

그러면 정탐꾼이 왔다. 좋은 찬스란 말이죠. 여기 좋은 관계 유지하는 것이 나은 거예요. 그러면 다른 가능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성령이 오라 했습니까? 성령께서 우리한테 찾아온 것은 다른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너는 꼭 구원돼야 되기 때문에 찾아오신 거예요, 그냥. 다른 사람 보면 좋겠네, 하는데 좋고 마네 간에 나한테 좋다고 묻지 말고 좋아도 주님이 좋겠지. “그럼 너는 안 좋나?” “나는 많이 좋지.”

그럼 저쪽에서 순진한 거야, 무식한 거야? 무식하든 순진하든 좋은데 글쎄 이 초과적인 내용을 내가 알았냐고요. 어느 대학교에서 이런 걸 가르쳐주겠어요. 이걸 누가 알았냐고? 내가 가르쳐준다고 알거냐고 이게. 본인이 본인의 사태에 대해서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지켜보겠다. 내가 살아 있어서 너희들과 함께 있겠다. 그걸 어떻게 과학적으로 증명됩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무시하면 그만이지요.

제가 오늘 강의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부활되어 좋다 기쁘다가 아니라 그냥 부활의 일은 아예 차이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는 이런 차이가 드러난다는 겁니다. 골로새서 3장에 나오지요. 이미 우리는 땅에서 죽었고, 땅, 우리는 하늘에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는 하늘. 그러니까 우리의 생명은 거기에 안전하게 보관이 돼있고 우리는 여기 쓰레기만 있는 거예요. 덜렁덜렁. 잘라버리고 싶어. 꼬리가 나와 있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세상 사람들은 지 꼬리 좀 누구한테 밟혔다고 이것 때문에 못 살겠어, 못 살겠어 난리도 아니에요. 지 목숨 좀 잃는다고 꼬린데 어차피 썩어서 뚝 떨어질 건데 이 목숨 해서 치과 아플 때는 뭘 하라 하더라. 뭐 플러스 온갖 것 좋은 해독제에다 뭐 어떻게 건강에 좋은 것, 백신 가운데 어느 백신이 좋은가. 주신 것도 감사해라.

세상에 모든 그런 잡스런 것들에 몰두하고 있으니까 이건 무조건 내가 좋아야 되니까 결국 내 일밖에 안 됐잖아요. 그러니 차이는 내 일과 남의 일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런 차이, 그 차이는 부활의 주님이 요구한 차이가 아닙니다. 그냥 내 일은 없는 그 구역, 영역에 속해서 이게 바로 세상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나의 일이라고 하는 거구나.

그게 남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육신의 본인 일이고 그리고 부활의 세계라 하는 것은 전혀 이런 선악적인 옳고 그름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죄 용서하심과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보여주신 그 세계가 상상도 못한 예상도 못한 그 세계가 부활의 세계. 그럼 우리 육신은 왜 남아있는가? 사명 때문에. 어떤 사명? 그 차이를 보여주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봅시다. 29장 1절 보게 되면,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아까 첫째 시간에 군대장관 개입한 것 알지요. 천사가 개입했지요. 여기도 천사가 개입하잖아요.

우리 인간들 동네라 공동체란 말 쓰는데 저는 공동체란 말 쓰기 싫어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천사를 공동체에 넣어줄까요, 말까요? 안 넣어주지요, 천산데. 차기 대통령을 천사로 합시다. 가브리엘 천사를 대통령으로 합시다. 하겠어요? 천사는 차이 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저 세상에 속해서 이 세상이 어떤 세계인지 차이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천사의 기능이라면 우리의 역할도 뭡니까? 천사의 기능이에요. 어차피 구원받았기 때문에 죽기 전에 주께서 내 목숨 하기 전에 우리는 주님의 낯선 특징 있는 차이 나는 죽음 안에서 비로소 생명이 거기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죽음이 확대되어서 오늘날 나는 거기에 편입되어서 생명을 얻었다.

네가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느냐? 없지. 그러니까 차이 나는 거예요. 절대자아, 이놈의 절대자아를 우리 인간이 버릴 수 있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네가 절대자아가 아니고 주님이 절대자아가 됐어요. 예수님이 절대자아에요.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분류하고 이름 붙이고, 분류하고 이름 붙이고. 네 이름은 네 아파트는 너한테 가고 내 아파트는 내 이름으로 한다, 이게 아니라 주님의 아파트 주님의 이름으로 네가 거기 살든지 내가 여기 살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차이 나는 것만 증거하는 그 일을 부활의 능력,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한테 그걸 하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좋고 나쁘고를 너무 예민하게 거기에 감각적으로 놀아났습니다. 평생을 그런 식으로 순간순간을 그런 식으로 좋고 나쁨과 거기에 말려들었습니다.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거짓게임에 벗어나서 하늘에 있는 생명의 안목을 가지고 주님의 안목을 가지고 십자가의 안목을 가지고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