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완벽한 고난

아빠와 함께 2023. 6. 18. 17:23

완벽한 고난 

2023년 6월 18일                본문 말씀: 디모데후서 3:10-12


(3: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3:11)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사도가 1차 전도때, 지금의 터키 안디옥에서 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나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그곳에서 추방되었습니다.(행 13:14-52) 이고니온에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선동하여 악감을 갖게 했고 바울 일행을 돌로 치려고 위협했기에 그곳에서 도피할 수밖에 없습니다.(행 14:1-7)루스드라에서는 디모데의 고향으로 사도바울은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생각해서 제사하려고 했으나 바울과 바나가 이를 제지하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행 14:8-18)그런데 안디옥과 이고니온애서 온 유대인들이 그곳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 거의 죽게 만든 후 성밖에 내다 버렸습니다.그러나 그는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나(행 14:19-22)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성에 다시 들어가 성도들을 격려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수월하게 전도하도록 도와주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실제로 체험케하기 위해서입니다.“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예수님의 고난이 그 완벽함을 유지해서 구원이라는 결과가 생겨납니다. 여기서 당연한 반발 같은 것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죄란 주님 고난에 완벽함에 저항하고 비난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완벽함을 추구합니다. 자꾸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과 엮이기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독자자는 순수와 진리를 확보하는 것으로 자기 완벽에 나섭니다. 하지만 사도는 바울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3-15) 따라서 사도에게 있어 고난조차 완벽함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확인시켜줍니다.

인간들은 고난을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오면 자기 인생이 실패로 끝났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개성을 추구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선악과 과실 따먹고 범죄한 그 현상입니다. 인간은 자기 내부에 수치와 결핍을 감지합니다. 따라서 뭔가 대단한 것으로 대체하려고 움직입니다.

자기 개성은 개성대로 살리면서 하나님과는 좋은 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도 망가지면 안된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인간 내부의 갈등은 구약 사사인 삼손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삼손이 태어나기 이전에 천사가 삼손의 아버지 가족에서 나타나 ‘나실인’이라는 자리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즉 사람은 없지만 ‘자리’는 먼저 준비된 겁니다. 그 뒤 삼손이 태어납니다. 그의 일대기는 자기가 원하는 여자를 얻고 빼앗기기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 내부에서 어떤 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삼손도 압니다. 자신을 통해서 블레셋을 치는 구원자 나실인의 역할과 자신이 원하는 여자도 얻는 일이 둘 다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삼손은 나실인의 본질을 잘못 읽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나실인의 자리와 상관없습니다. 나실인은 인간죽음을 통해서 성취될 사항입니다. 하지만 삼손을 자신을 살릴려는 노력과 병행해서 나실인이라는 하나님의 기능이 성사되리라고 여겼습니다.

삼손은 구원자로 자신이 믿던 모든 것이 다 함몰합니다. 자신의 육신의 힘도 자신이 의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주님께서 자기에게 지정해주신 ‘나실인으로서의 구원자’ 자리가 맥없이 무너져내린 저주의 자리‘임을 알게 됩니다. 즉 삼손이 자기 손으로 구원을 달성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비로소 나실인의 기능을 성공됩니다.

고난이 성도에게 찾아드는 이유는 이처럼 자기 만의 폭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샌드위치 맨이라는 옛적인 거리의 광고인들은 앞 뒤로 광고판을 매달고 있습니다. 이사람들은 자기만의 폭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광고와 광고 사이를 결합하고 하나로 만들어 알리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이와 같습니다. 자기 폭과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조롱합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41-44) 그 가운데 끼어 있는 예수님께서 얇은 자기 폭을 확장합니다. 그래서 세 가지의 십자가가 성립됩니다.

즉 예수님의 고난은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그렇다면 그 완전함과 완벽함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됩니까? 한 사람은 완벽하게 지옥하고 한 사람은 완벽하게 천국갑니다. 이 완벽함의 근거는 오로지 예수님의 고난에만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난의 완벽함에는 인간들이 완벽하게 ’죄인‘이 되어야 하는 조건이 붙습니다.

이는 곧 구원받은 자가 예수님의 고난 외에 달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조건을 또 들어붙도록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진리를 믿고 순수를 반복적으로 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완벽이 아닙니다. 도리어 구멍 난 양말을 쓰레기 통에 버릴 것이 아니라 구멍 난 양말을 다시 신고 다닌 것이 바로 완성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가 뭔지를 평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인생이란 구원사건에 비하면 턱없이 짧습니다. 참으로 길고 긴 것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구원이란 살아 있는 나를 손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자리에서 주님 고난이 통과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경험하는 겁니다.

새삼 성공자 될 필요가 없음을 반복해서 감사하고 자신의 실패성을 늘 즐거워하고 고마워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 안에 어떤 미흡함이 없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9강-디모데후서 3장 10-12절(완벽한 고난)230618-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모데후서 3장 10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3:10-12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사도바울이 자기가 경험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안디옥에서 어떤 고난을 받았는지 그것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 내용을 주보 뒤에 제가 미리 적어봤습니다. 녹취하는 분을 돕기 위해서 그냥 쭉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도가 1차전도 때 지금의 터키 안디옥에서 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나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그곳에서 추방되었습니다.(행 13:14-52)】 안디옥이 두 군데 있는데 터키의 안디옥입니다. 【이고니온에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선동하여 악감을 갖게 했고 바울을 돌로 치라고 위협했기에 그곳에서 도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행 14:1-7)】

여기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 짓고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많이 받은거죠. 이것은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상황이 그대로 복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루스드라는 디모데의 고향으로, 사도바울은 거기서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생각해서 제사하려고 했으나 바울과 바나바가 이를 제지하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행 14:8-18) 그런데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곳 사람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 거의 죽게 만든 후에 성 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나서(행 14:19-22),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성에 다시 들어가서 성도들을 격려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이 수월하게 전도하도록 도와주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실제로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고난이 왜 있느냐? 완벽을 드러내기 위해서 고난이 있는 겁니다. 천국이 완벽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고난이 찾아오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유대인들이 사도를 핍박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왜냐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완벽은 거짓된 완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사람들이 생각하는 완벽은 거짓된 완벽이다 하는 그 완벽 속에, 사람들이라는 그 말 속에 우리 자신을 집어넣으세요. 그러면 과연 우리가 뭘 믿는가를 스스로 알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없고, 고생을 덜 하고, 고통이 없는 것이 완벽에 더 가까이 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굉장히 많아요. 왜 인간은 이렇게 고통이 없고 아픔이 없는 것을 완벽이라고 생각했는가? 그것은 관심사가, 자기 인생의 승리자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고통이 와서 아픈 것보다도 더 아픈 것이 있는데, 자기가 실패자가 된다는 아픔을 못 견디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 것은 나에게서 시작해서 나에게 도달되는 그 삶의 노선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나로부터 생각한 것이 나에게 도달되는 거, 그 속에 마귀가 집어넣어 준 심보가 우리 안에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했느냐 하면, 주님이 받은 고난을 우리 마음속에 집어넣어서, 성도의 육체를 하나의 껍데기로 본다면, 그 안에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해서 예수님의 고난만 흐르게 하십니다.
이 주님의 고난이 우리 안에, 인생 속에 타고 흐르고 있으니까 그것보다 더 완벽한 것이 어딨겠어요? 왜? 주님은 다 이루신 분이기 때문에. 다 이루심이 시시때때로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데 우리는 철이 없어서 아프고 괴롭다고 난리도 아닙니다. 완벽한데,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는 생각을 자꾸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완벽함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쓰레기이고 노폐물인 것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그러한 일들을 자꾸 성도를 통해 발생시키죠.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핍박을 받게 했습니다. 그러면 이 핍박을 받는다, 라는 것은 그냥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뜻인데 이것은 사도바울이 늘 자신을 패배자로 자인하는 그런 즐거움을 갖게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자기가 인생 성공이 되어야 기쁘게 생각하는데, 사도바울은 ‘내 인생은 이미 완벽하게 패배했다’는 그 패배함의 완벽함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게 디모데전서에 나오는데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라고 말을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관심은 바로 구원에 꽂히게 돼요, 이 말을 딱 하면. 죄인을 구원하러 왔다, ‘구원’에 강조점이 있는데 사도바울은 어디다 강조점을 두냐면 그 죄인이 누구냐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 뒤에 나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통해서 내가 구원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친히 구원하시는 작업 자체에 대해서 기뻐하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죄인 되게 하셨다는 그 자체가 주님이 실시하는 구원이 이미 나에게 완벽하게 실시되고 있고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는 거예요.

디모데전서 1장 14절에 보면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들, 이런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뭐냐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 바로 죄인이라고 이야기할 때 “저요!” 라고 먼저 자기가 손들고 나와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네가 왜 죄인이냐’ 물으면 그 다음부터는 이야기할 게 많은 거예요. “내가 왜 죄인인가? 나는 내가 원하는 식으로 인생 성공을 꿈꿨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사도바울은 빵꾸난 양말을 버리지 않고 계속 신고 있는 겁니다. 그걸 끝까지 신어야 되죠. 왜? 내 빵꾸난 인생이 완벽 조건에 맞기 때문에.

주님의 완벽한 구원의 조건에 맞기 때문에 내 인생 자체가 애초부터 빵꾸난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 태어난 것 자체가 환란 받아 마땅한 존재로 태어난 겁니다. 이게 창세기 3장에서 나왔던 이야기잖아요. 우리는 저주받는 자식이에요. 저주받는 자식이 저주받는 게 뭐가 그리 불만이고 그게 그렇게 짜증이 나는 겁니까?

불교에서 말하기를 생로병사(生老病死)라 하는데 이 네 자가 너무 길잖아요. 두 자로 줄여보겠습니다. ‘짜증.’ 불교라는 것은 이 짜증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기쁨으로 바꿀까, 해서 고안한 것이 불교에요. 그러면 복음은 뭐냐? 마태복음 1장 21절에 나옵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미 구원이란 말을 할 때는 자기 백성마저 죄 속에 갇혔음을 확정 짓습니다. 죄 속에 갇혀있는 상태가 완벽한 상태며 죄인 상태에서 그 누구도 자진해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그 상태가 완벽한 상태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어떤 누구도 자기가 힘들고 아플 때 하나님을 믿을 자들이 아님이 완벽해야 돼요.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믿던 그 믿음이 실망으로 끝나는 점에서 완벽해야 돼요. 하나님 믿는다, 하나님 믿는다, 해도 막상 어려움이 오고 어떤 유혹거리가 왔을 때는 ‘아, 내가 심지어 하나님 믿는 것마저 내 속에서 내가 인위적으로 조작했구나. 조작된 사태를 내가 임의로 만들었구나.’

내가 하나님 믿고 구원받는다는 그 자체가 성경에 아무리 그런 내용이 있더라도 우리 안에서는 그 내용이 조작되는 거예요. 성경에 있는 말씀도 일단 나에게 와버리면 나 자신을 위대하게 하고, 실패자로 안 만들기 위한, 성공자가 되기 위한 조작거리로 삼아버립니다. 심지어 종교라 할지라도, 기독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에요.

어제 토요일 이 동네 은하수 유치원에서 운동회가 있었어요. 지묘초등학교 체육관에서 했는데 역시 어떤 모임의 하이라이트는 행운권 추첨이죠. 참석한 아동들이 80명인데 행운권을 30개 준비해놨답니다. 엄청난 행운권이에요. 처음에 행운권 당첨될 때는 “Congratulation~” 막 노래 틀어주면서 분위기 띄웠는데 상품이 보니까 뭐 별로 시시한 거예요. 플라스틱 대야 같은 이런 거예요.

사람들은 별로 행운권에 대해서 기대를 안 했는데 갈수록 행운권의 질이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상품 가치가 높아졌어요. 행운권 숫자는 계속 불러대는데 30명의 오더가 다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마지막 행운권이 딱 5개 남았는데 상품이 뭐냐? 씽씽카 5개가 딱 남았어요. 갑자기 사람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합니다. 운동회 시작하고 흩어졌던 집중력이 마지막까지 끝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마지막 행운권 다섯 개 때문에.

우리 외손자가 잠결에 아무거나 뽑은 숫자가 20번이었어요. 20번인데 지금까지 계속 꽝인 거예요. 다섯 개 빼놓고. 드디어 다섯 개에서 네 개로, 곧 하나가 주인을 찾아갑니다. 또 네 개에서 한 개가 떨어져 나가고 세 개 남았어요. 또 한 개가 떨어져요. 두 개 남았어요. 한 개 또 떨어졌어요. 한 개 남았어요. 그런데 마지막 번호가 20번이었습니다. 이게 아멘, 할 문제가 아닌데……, 그게 20번이었어요. 그래서 씽씽카를 타가지고 우리는 그 날의 그 모임의 승리자가 된 겁니다.

그런데 일단 승리하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 문제가 발생됐습니다. 씽씽카에 대한 지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행운권을 해서 그냥 뽑았으면 씽씽카 지분이 외손자에게 있는 줄 아는데 그때 마지막 뽑을 때 외손자 누나가 마지막 두 손 모아 진심으로 기도를 해버린 거예요. 그것도 진심으로 기도를 한 거예요. “진심으로~ 진심으로~” 그렇게 진심으로 기도를 한 거예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지분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건 내 거라는 거예요. 왜? 진심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부모도 마찬가지고, 애 하나에 7명 따라갔거든요, 사돈까지 합해서, 저도 참석했으니까요, 참았던 물욕이 마지막 씽씽카에 무너져 버린 겁니다. 기도 덕분에 얻었느냐, 아니면 잠결에 아무거나 뽑은 외손자에게 있느냐.

그러한 분쟁이 발생 될 때에 정답은 뭐냐? 다 주님의 일이었던 거예요. 2항이 아니고 제3항을 생각 못 했던 겁니다. 주님의 일을 통해서 그동안 인간들의 종교적인 행위조차도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왜냐하면 정작 영생의 완벽함에 모아져야 될 기도가 씽씽카에 무너져 버린 거예요. 씽씽카하고 영생하고 바꿔버린 셈이 된 거예요.

‘나는 고난이 오고 세상의 모든 걸 버린다 할지라도 주님의 십자가 영생하고는 바꾸지 않겠습니다.’ 하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믿음이 씽씽카가 등장해서 그만 무너진 겁니다.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 그 씽씽카는 남이 가져서는 안 된다는 자기의 고집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인간은 끝까지 내가 신이 되어야 한다는 그 사실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의 그 고뇌라 하는 것은 인간이 예상해서 감내하고 참을 만한 고난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사서 하는 고난과 고생, 교회에서 시켜서, 교회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건 내가 알아서 고난으로 나서는 것, 그걸 가지고 조작된 사태라고 합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귀한 걸 남한테 주고 그렇게 하는 게 고난이 아니에요. 우리의 것을 남한테 주지 마세요. 왜냐면 그것은 나의 의가 발생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에게 빼앗겨 버려야 됩니다. 빼앗길 게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내 걸 남한테 주면 안 됩니다. 여러분 뭐 이상한 논리 이야기 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돼요.

내 걸 고이고이 쥐고 있어야 나다운 존재가 돼요. 나는 돈보다 더 귀한 것은 없음을 분명히 해 줘야 그때 주님의 고난과 만나는 거예요. 여기 성경에서 주님의 고난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 전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아까 말씀 다시 이야기 하면 주님은 우리를 껍데기로 사용해서 그 안에 주님의 고난이 경유해야 돼요. 거기 내 고난이 경유하면 안 됩니다.

그건 하나의 오만함이에요. “내가 주를 위해서 모든 걸 버렸나이다.” 이거, 이런 소리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건 조작된 위선적인 소리에요. 주님이 와서 뺏어가도록 우리는 철저하게 죄인 중에 괴수가 돼야 됩니다. 마태복음 27장 42절에 보게 되면 그 당시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 십자가가 고난이잖아요, 고난받으실 때 주위에서 뭐라고 웅성대고 뭐라고 말을 던졌는지 우리가 들어야 해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함께 십자가 박힌 강도들, 강도 둘 다 그렇게 욕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저가 평소에 하나님 아들이라고 주장했고 나를 믿으면 구원한다고 주장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고 있고, 무능력하고 하나님이 저를 지금 구원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사기꾼이다.’라고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주변에서 그렇게 예수님을 평했습니다.

지금 이러한 평이 성경에 이렇게 있는 한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내가 이런 평을 가지고 누굴 공격하냐면 나를 공격해요. ‘교회 40년, 50년 다녀도 소용없습니다.’ 매일 같이 하나님은 허락하기를 내가 이런 식으로 나를 공격하도록 허락해요.

‘네가 뭐 교회 봉사하고 교회 40년 50년 목사가 되어서 복음 전한다고 하는 꼬라지하고는! 너나 잘하세요, 너나. 너도 지금 안 믿잖아. 네가 안 믿고 있잖아. 너는 너를 못 속이잖아. 네가 하나님 믿고 교회 나오면서 얼마나, 그 행운권, 씽씽카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마음 다지고 있었잖아.’

우리 마음이 왜 평소에 인생 살면서 초조합니까? 행운이 찾아오기를 기대해서 초조한 거예요. 행운이 찾아온다는 말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납득되도록 하나님이 좀 설득해달라는 거예요. ‘내 인생 이게 뭐야, 이게! 인생 꼬라지가 이게 뭐야?’ 이러고도 내가 남한테 하나님 계십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잖아요.

이러한 우리의 마음 상태, 완벽합니다. 그게 완벽한 거예요. 자신의 꿈과 기대를 누군가 와서 이걸 뺏어가고 들춰내야 돼요. 그래야 거기서 현실이 나옵니다. 주님의 완벽한 현실은 아무도 믿는 자가 한 명도 없다는 그게 완벽한 현실이에요. 우리는 성경 보고 교회 다니면서 믿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무너지지 않기를 늘 초조해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너지면 실패자가 되고, 남들은 성공하는데 내 인생 나는 실패했고, 나는 망가졌다는 거예요.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너는 망가지기 위해서 태어났다. 실패하기 위해 태어났다. 고난을 받는 것이 너한테 당연하다.” 아무리 성경에서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듣지를 않아요.

성경 말씀을 이용해서 나의 나다움, 남은 실패해도 나만큼은 성공하고 싶은 그런 충동이 우세한 채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경험한 기억 속에 사는데 그 기억은 항상 우리 내부에서 편집이 돼요. 조작하고, 편집하고, 만들어지죠. ‘나 그래도 잘났어. 나 그래도 꼭 성공해야 돼.’ 이게 계속 조작되는 거예요.

그 이유가 있어요.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의 수치와 결핍을 느낍니다. 벌거벗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을 때는 벌거벗었음이 그게 가장 완벽해요. 그게 Perfect, 가장 완벽해요. 그런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벌거벗은 거 가지고 ‘뭐가 없네?’ 뭔가 없음을, 결핍을 느껴요. 벌써 인간이 완벽한 인간이 아니고 비 완벽한, 하나님께서 내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됐다는 거예요.

인간은 왜 성공을 원하고 왜 행복을 원하는가? 자기의 수치와 결핍을 느끼는 것을 자꾸 땜질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왜 자꾸 나보다 더 존경스럽고 나은 타인을 모셔오려고 하고 들러붙으려고 하는 이유가, 자기의 수치와 결핍을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것으로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대중가요 잘 모르지만 대중가요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맨날 술이야~” 하는 노래가 있어요. 신용재가 불렀던, 누가 불렀는지는 별로 관계가 없고요, “맨날 술이야.” 인간은 어떻게 사느냐면, 맨날 진리를 믿고 순수를 추구합니다. 왜? 마약 같아서.

왜 진리를 믿고 순수하게 살려고 하고 순수를 지키는가? 진리를 믿으며 순수를 지키며 순결하고자 왜 그렇게 노력하는데요? 자기 내부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인생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 하나님 믿고 싶어요. 바르게 살고 싶어요.” 맨날 그래요, 맨날. 그거 이유가 뭐냐? 고통 없는 순간을 맞이하고 싶어서, 그래서 고통이 없어야 행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인간에게 행복이 뭐냐? 인간에게 행복이란 개성이 살아나는 게 행복입니다. 고난은 이 개성을 무차별로 없애버려요. 고난받는데 무슨 개성이 필요합니까? 십자가 앞에서 무슨 개성이 필요해요? 십자가 밑에서 잘난 자 못난 자, IQ가 뭐고, MBTI가 뭐고, 성격 차이, 성격 조사,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 밑에서 법적으로 잘 살았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복음을 믿으며 순수를 지키며, 십자가 앞에서 이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 소용 없어요.

어느 강의에서 사무엘상 7장 3절을 언급한 적이 있어요. 그 대목을 다시 한번 언급해 보겠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구절이에요.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무슨 뜻이냐면, ‘이스라엘아 너희가 이방나라의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이 너희를 압제하고 통제하고 있고 압박을 가하고 있고 너희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이 ‘너희가 이방신들을 믿지 않고 이제 여호와께 돌아오게 되면 너희들은 블레셋에서 풀려나 잘 살 수 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정말 난해한 이야기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예 블레셋 사람을 이스라엘 주위에 딱 배치를 해 놨다는 그 사실에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을 우리 주변에 배치한 이유에 대해서 너희가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왜 이스라엘 주변에 블레셋 사람을 배치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믿지 못하는 본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을 거기다가 배치한 거예요. 걸핏하면 여호와 믿지 않고 이방신을 믿는다는 말은, 인간의 본심은 아무리 여호와께서 무슨 잔소리를 하고 무슨 짓을 해도 인간의 본심은 인간을 떠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블레셋 사람들이 옆에 붙어있을 때 사람들이 블레셋 신들을 믿고 이방신을 믿은 것은 그게 좋아서 그런 거예요. 좋다는 말은 끌린다는 말이고, 끌린다는 말은 여호와한테는 전혀 끌리는 면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가 이방신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겨라.”라고 했을 때 그들은 4절에 보면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겼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그 여호와만 섬기고 난 뒤에 블레셋 나라가 사라졌습니까? 그걸로 이스라엘이 완전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왜냐면 두 번째, 그 여호와 자체가 변해버렸어요. 인간의 마음은 한결같이 이방신에 끌릴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태어났고, 실패자로 태어났고, 주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죄에서 구원해주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죄에서 구원하는 방식이 뭐냐면, 너희들이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라는 그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이방신을 섬긴 너희가, 출발점은 벌써 죄로부터 시작하는 거죠, 이방신을 제하여 버리면 너희들에게 내가 블레셋을 벗어나는 축복을 허락하마,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이 그걸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죠. 그런데 이번에는 누가 변하냐면, 여호와께서 추가적인 요구를 또 해버려요. 그러면 여호와께 돌아온 그들이 다시 어디로 가느냐? 이방신에게 마음이 돌아가버렸어요.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인간은 결국 망합니다.

인간과 하나님 관계가 애초부터 틀어졌음을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알려주는 겁니다. 자, 인간에게 문제가 뭐에요? 왜 옆에 블레셋이 있는가? 인간들은 세상과 나의 결합을 실제로 추진해요. 그런데 항상 그것이 이스라엘 통해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나와 이 세상의 결합이 실패로 끝난다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주변에 일어났던 사건과 실패로 끝나줘야 비로소 하나님은 이 세상은 나하고 상대하고 있는 게 아니고 주님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겁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난이 그 고난이에요. 인간들은 세상과 자기를 결합시키려고 합니다. 한시도 이 마음이 쉬지를 않아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세상을 내가 다루고, 내가 세상을 마음대로 관리함으로써 내 고통을 줄이고, 고통을 줄이면 나는 행복해지고 행복이란 비로소 내가 신이라는 것, 내가 절대자가 된다는 악마가 심어준 그 심성대로 세상은 따라줄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나의 Perfection, 나의 완벽함을 우리는 한시도 놓치고 잊은 적이 없다, 이 말입니다.

교회 와서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그리고 있고 내가 꿈꾸고 있는 세상에서 나는 완벽하고 싶다. 나는 완벽한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무너지면 되는데 우리가 무너질 기색을 보이지를 않아요. 실패하지 않고 안 무너지려고 버티고 있는 겁니다.

술과 마약, 담배, 이걸 왜 합니까? 자꾸 무너질 기회를 지연시키는 거예요. “맨날 술이야.” 맨날 술 먹듯이, 이게 마약 같은 거거든요, 맨날 술 먹듯이 우리는 맨날 진리를 믿으며 순수를 지키고, 왜? 안 무너지려고, 고통을 면제해보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서 고난을 줬는지 잘 나오는 대목이 바로 사사기에 나옵니다. 사사기 13장에 보면 거기에 자리하나가 먼저 나오고 인물이 거기 자리를 채우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그 자리가 사사기 13장 5절, 7절에 나옵니다. 마노아 가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나실인이라는 자리 하나, 장소 하나가 마련됩니다. 7절에 봐도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나실인’이라는 장소가 먼저 등장하고 정작 애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천사가 오고 난 뒤에 태어납니다. 천사가 다녀간 뒤에, 천사까지 와서 다짐에 다짐을 하고 태어난 뒤에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였다’ 이렇게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면 14장 삼손 이야기, 15장 삼손 이야기, 16장 삼손 이야기, 16장까지 삼손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됐다는 것이 쭉 나와 있어요. 나와 있는데 삼손이라는 이 죄인이, 죄인 중의 괴수가 어떻게 하나님이 지정해놓은 ‘나실인’이라는 그 자리, 완벽한, perfect 한 자리까지 어떻게 근접하고 찾아가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거예요.

삼손이라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그런데 그 어설프기 짝이 없는 것은 기준이 뭐냐면 ‘나실인’이라는 하나님이 지정한 그 이름, 그 이름에 준해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거예요. 미리 말씀드릴게요. 미리 정답을 말씀드릴게요. ‘나실인’이라는 것은 없는 자리에요.

없는 자리인데 어떤 인간이 등장했을 때 ‘나실인’까지 접근하려면 이 ‘나실인’ 된 사람은 자기 속에 풍부한 자기의 꿈과 희망, 자기의 개성, 자기의 포부, 자기의 비전, 자기의 계획, 이 풍부한 것이 축약돼야 돼요. 납작하게 얇아져야 돼요. 자기를 위한 폭이 없어야 돼요.

저 어릴 때 ‘샌드위치맨’이라고 있었어요. 광고하는 사람. 몸 앞뒤로 광고판을 붙이고 북 치면서 자기 존재감을 통해서 가게를 광고하는 거예요. 샌드위치맨이라고 했어요. 샌드위치맨의 특징은 광고하는 거에 의해서 본인이 납작하게 되어버려요. 양쪽에서 납작하게 된다고요. 그러니까 자기 폭은 없고 광고하는 기업체만 크게 있는 거죠.

예수님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께서 고난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위해서. 예수님의 고난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 안에서 구원받아요. 벌써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고난이 경유해야 되니까요. 내가 주님 안에 헤엄쳐 가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주님이 우리의 폭을 대신하는 폭을 가진다, 이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님은 납작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이 자체적으로 폭을 가집니다. 폭을 넓혀버리면 예수님의 폭이 없다고 여겼는데 거기서 양쪽에 두 강도가 같이 달려요. 폭이 생겨버려요. 하나의 십자가가 아니고 세 개의 십자가가 하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샌드위치 면처럼 이렇게 형성이 돼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한쪽은 천국 가고 한쪽은 지옥 갑니다. 아까 제가 두 강도 다 예수님 욕했다고 했죠? 그런데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한쪽은 천국 가고 한쪽은 지옥 가요. 이 결정을 누가 하느냐? 예수님의 고난이 한쪽은 지옥 보내게 만들고 한쪽은 천국 보내게 하는 고난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하나의 경계선이에요. 그 시대의 샌드위치맨이에요. 오늘날 성도가, 저와 여러분 같은 성도가 오늘 이 시대의 샌드위치맨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납작하게 두 겹을 같이, 경계선을 함께하고 있는 그 중간에 중심 없이 중심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경유 할 때 십자가의 Perfection, 완벽함을 모르는 자는 지옥 가고 십자가의 완벽함을 감사하는 자는 천국 가는 거예요. 그런데 지옥 가는 자들은 십자가 피에다가 거기다가 진리를 믿고 순수를 지키며, 그 완벽함을 믿지를 못하니까, 자기 자체 내에서 조작을 해야 하니까 십자가 믿고 바르게 경건하게 살면 구원받는다는 자기 조작이 거기 들어 가버리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그래도 아직도, 그래도’라는 말을 계속 본인이 본인보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도 완벽한데 그래도, 아직은 뭐 더 해야지.’라는 식으로. 본인이 기대하는 완벽함을 본인이 포기할 줄을 몰라요. 삼손은 자기 품에 내용이 가득 찼어요. 삼손이 여자 세 명 밝히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삼손 자기의 인생입니다.

여자 세 명 밝히고 그 여자를 빼앗기게 돼요. 빼앗겼을 때 삼손은 내 여자 빼앗겼다고 분노합니다. 그게 삼손의 일대기에요. 내 여자 빼앗겼다고 분노하면서 분노하는 과정에서 블레셋에 대해서 물리적이고 폭력적인 처벌을 삼손이 시행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가 믿음으로 된 여자냐? 아닙니다. 14장, 15장, 16장 삼손 일대기인데 14장 초반부터 나옵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그 부모한테 “여자와 살겠습니다. 살림 차리겠습니다.”라고 이렇게 나올 때 부모가 이야기했어요. “왜 너는 이스라엘 사람 중에 취하지 않고 블레셋 사람의 여자를 그렇게 찾느냐?” 이유는 단 한 가지, 예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다는 그 본성이 어디 딴 데 갑니까? 여자뿐이 아니라 남자도 마찬가지고요. 여자, 남자 다 마찬가지예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우리가 거기서 언제 벗어났습니까? 우리 십자가 복음 알고 벗어났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마지막 하나 남은 싱싱카 앞에 우리가 초조함을 느끼는 이유는 뭐죠? 그 씽씽카가 대야입니까? 그냥 냄비였어요? 아니에요. 애들이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간절히 두 손 모으지 않을 수 없었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모릅니다. 복음, 복음, 하나님, 하나님, 천국, 천국 하지만 우리는 이 복음과 하나님과 천국을 그걸 무엇과 바꿀지 우리 자신이 장담을 못 합니다. 마지막 기도, 마지막 기도 내용을 우리는 뭐로 장식할지 우리가 자신할 수가 없어요.

‘이 여자만 주신다면 제가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런 노래도 있잖아요. “이 여자만 허락하신다면~” <고해>라는 노래, 그 노래 가사에도 나와요. 그저 이 여자만 허락하신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뭐든지 하겠다고. 삼손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소위 ‘나실인’의 명분, ‘나실인’의 명분을 삼손도 알아요. 뭔지 다 압니다.

하나님의 신이 주신 이 힘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걸 다 알아요. 아는데 ‘이왕 이스라엘 구원할 거 내가 좋아하는 여자 밝히면서 구원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아니냐?’라는 생각이 이 삼손의 생각이에요. 삼손의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생각의 폭이 있었다니까요. 하나님 뜻도 실현하고 내 명분, 내 기쁨과 내 보람과 내 꿈도 실현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되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늘 우리가 보았던 본문 있잖아요. 지금 그 설교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주보 뒤에 나오거든요.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곳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 거의 죽게 만든 후 성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사도바울을 죽여서 성 밖에 내다 버렸어요.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그만 때린 이유는 사도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만 때린 거예요. 죽은 시체를 또 때릴 이유가 없어서 성 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이 순간 사도바울은 자기의 포부, 개성, 꿈, 희망, 그거 죽어버렸는데, 죽어버렸는데 그런 게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사도바울은 이걸 핍박이라고 하고 이걸 고난이라고 얘기합니다. 이걸 고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되, 아까 기도하신 분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혼과 영을, 혼과 영을 자극해요. 혼과 영, 우리의 정신 상태까지 전부 다 해체해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의 정신과 마음, 포부, 희망, 꿈, 그게 어디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몰라, 우리는 몰라요.

그런데 주님의 고난이 올 때, 내가 놓쳐버린, 하나님이 주시는 완벽함을 다시 찾으라고, 확인하라고, 이렇게 내가 쥐고 있는 이 포부를 작살나게 만드는 거예요. 빵꾸난 양말 버리잖아요. 다시 쓰레기통에서 찾아와서 그 빵꾸난 채로 살아가라, 이 말이죠. 그게 하나님의 완벽한, 그게 퍼펙트니까요.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나 구원받았어요.’ 그 뜻이거든요. 제가 설교 초반에 이야기했잖아요. 구원의 여정에서 완벽하다고요. 내가 죄인중의 괴수됨이 구원의 완벽함을 더 완벽하게, 두드러지게 보여준다고요.

삼손은 자기 생각이 많은 사람이에요. 자기 꿈도 실현하고 하나님이 주신 ‘나실인’이라는 사명도 실현하고, 그렇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가 결국 인생 실패했습니다. 자기 꿈은 좌절되고 자랑하는 머리카락 다 잘리고 여자도 놓쳤습니다.

삼손이 뭘 몰랐는가? 오늘날 우리들이 뭘 모르고 있는가? 그 자리, ‘나실이’라는 자리, 삼손 태어나기 전에 먼저 주께서 준비한 그 자리는 죽음의 자리였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의 세계가 살아있는 세계보다 더 넓었던 거예요. 더 컸던 거예요. 더 큰 프레임이였고 범주였던 겁니다. 죽음의 세계가 살고 있다는 이 생각보다 더 깊었던 거예요. 우리가 인생은 길다 하지만 인생은 긴 게 아니고 인생은 순간이었습니다. 긴 것은 죽음의 세계가 길었던 겁니다.

그 행운권 사건 일어나고 난 뒤에 마지막 씽씽카 경품 타고 난 뒤에 다시 초등학교 체육관으로 한 번 가보세요. 거기는 인간들이 보고 있는 시공만 있을 뿐이지 그 사건은 없어요. 2층에 올라가서 체육관을 봐도 그때 그 짜릿한 당첨의 사건은 없습니다.

사건이란 이런 거예요. 사건이라 하는 것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건은 주님이 그때그때 마다 자신의 십자가의 완벽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다루고 있는 그것이 길어요. 그 십자가 사건은 길고, 우리가 얻고자 하는 인생은 짧아요. 그 사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우리 인생은 반복이 안 되지만 십자가는 반복이 되니까.

삼손이 나실인 자리를 찾아갑니다. 찾아가는데 자기가 기대했고 의지했던 것 다 잘려버립니다. ‘저분은 내가 믿을 만해.’ 다 잘려버립니다. ‘저 돈만 있으면 난 평생 먹고 살아.’ 다 잘려버려요. ‘저것만 있으면 나는 행복한데.’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어떤 여지가 전부 다 잘렸습니다. 왜?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방해물이기 때문에 그랬던 거예요.

마지막에 삼손이 비로소 ‘나실인’이라는 것은, 내가 내 꿈을 이루어 나가는 식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영원히 있을 자리, 그 자리는 주님이 친히 나와 함께 동행해서 내 것을 잘라내고 패배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통해서 완벽한 자리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꿈을 꾸고, 주님께서는 틈만 나면 그 꿈을 좌절시키는 겁니다. 좌절시킬 때마다 감사하죠. 그래서 씽씽카 경품 타고 난 뒤에 씽씽카를 봤던 그 관계자 7명은 그걸 보면서 ‘씽씽카 마지막 한 개 남았을 때 왜 내 마음은 초조했을까?’를 반성해야 합니다.

분명히 구원받았고, 우리 안에 그 시대 십자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아주 개모독하게 만드는 요소, 우리가 씽씽카를 원하지도 않았어요, 대야 같았으면 원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유도한 걸 몰랐던 거예요. 주께서 유도한 거예요.

“이래도?” “주여, 십짜가, 뿐입니다.” “이래도?” “시~입짜가 뿐입니다.” “네 입술은 왜 그렇게 떨리는데?” “20억?” “20억이 문제입니까? 십자가가 중요하지!” ‘70억으로 한 번 올릴까?’ “70억 나왔습니다…… 100억, 100억 손들 사람?”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장담하지 못합니다.

고난 자체가 완벽한 걸, 우리는 왜 고난 그 자체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까? 왜 감사하지 못했습니까? 그것 때문에 아직도 우리 인생이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계속 살아서, 주께서 계속 부숴야 할, 무너뜨려야 할 것을 계속 지니고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우리는 압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유를 밟더라도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인지 아니면 내가 행복해지는 사건인지의 구분은, 항상 십자가 사건은 어떤 일도 감사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미 경험했고 확인했습니다. ‘안 깨졌으면 어쩔 뻔했어?’ 그 씽씽카를 안 탔으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저 씽씽카 하나 때문에 복음에 흔들릴 자가 아니죠.’라고 자기를 착각했을 거 아닙니까?

바라기는 여러분에게 한 40억, 50억짜리 땅 하나 턱 증여받아서 기분 좋게 받아 챙기고, 챙기는 과정속에서 ‘야, 내가 50억에 넘어가네.’라고 스스로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자책하면서 50억은 또 남한테 주지 말고 꼭 챙길수 있는 그런 기회가 오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구원될 줄 알았는데 진정한 경건이 무엇이며,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내 선에서 해석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주여, 내가 완벽하지 않음을 깨닫기 위해서 날마다 나의 경건과 나의 믿음조차 빼앗아 가는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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