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지옥하나님25-언어의 연출

아빠와 함께 2023. 5. 8. 23:15

[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25 - 언어의 연출

23,04,17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전체 VS 전체 !!

교재 102페이지에 '사도들이 증언해주는 주의 전쟁' 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까 신약에서의 전쟁은 그 대상이 아니라 공중권세를 잡은 자들이라는 라는 겁니다. 그들이 누구인고 하니까, 이 '전체'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우리 인간은 이 전체와 개인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고 또한 그럴 능력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공중권세를 잡은 자, 즉 세상 신이 이 세상 전체를 모두 다 장악하고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전쟁을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앞장세워서 주님이 전쟁을 하신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성도와 주님이 또 하나의 전체가 된다는 것이죠. 그렇지요?

* 동물원 구경하기 !!

예를 들어서, 동물원에 가서 사자를 관람한다면, 그것은 어떻습니까? 재미가 있는데, 그냥 표를 끊어서 동물원에 가서 보면 된다는 겁니다. 사자가 아무리 무서워도 그 우리의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원숭이를 보는 것도 그러하고 말이죠.

하지만 동물원에 가서 재미가 없을 경우가 있는데, 그게 어떤 경우인고 하니, 사자를 바깥에서 보면 재미가 있는데,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발을 그만 헛디뎌서 그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재미는 고사하고 "나, 살려줘요" 라고 하게 되는데, 거기서 얼른 빠져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즉 울타리 안에 있는지 울타리 바깥에 있는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울타리 바깥에는 봉으로 찌르면서 "너거들, 까불면 죽어" 라고 하면서 폼을 잡을 수도 있는데, 만약에 우리 안에 들어가서 그렇게 하다는 작살이 난다는 겁니다. 원숭이도 만만하게 보고 안에 들어가서 설치다가는 얼굴이 남아나지 않고 말이죠.(ㅋㅋ).

그러면 주님의 전쟁을 함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 안으로 들여보내는데, 그런데 우리만 달랑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 전체가 안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 전체를 두고 '예수 안' 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예수 안' 이라고 하면, 우리는 자기가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생각하는데,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고, 즉 "내가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것이 아니고, "나를 둘러싼 것이 얼마나 큰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인생을 자기가 해결하려고 하지말고,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을 모르면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는데, 이 세상이 무서워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사자가 무섭고 원숭이가 성격이 까칠해도, 우리는 울타리 바깥에서 관람하는 것과도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느 곳을 가더라도 안전하다는 말이죠.

* 생활고 !!

이게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겁니까?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는데,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 등등, 그 어떤 것이라도 말이죠.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환난, 곤고, 핍박, 이런 것을 세 글자로 '생활고' 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일을 만나도 우리가 기죽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적든 많든 무엇을 가지고 있을 때는 생활고가 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가 만들지 않은, 즉 자기가 행하지 않은 어떤 큰 것이 자기를 뒤집어씌우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자기가 행해야 한다는 것이, 자기가 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환경, 이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서 아들을 내어주셨다" 라고 하는, 바로 그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데, 주님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말이죠.

* 이스라엘아, 너는 네 것이라 !!

이게 로마서 8장의 내용인데, 그러면 주님의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압니까? "내가 너를 사랑했다" 라고 했을 때, 그 '너'가 '나'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와있는데, 이사야서 41장 이하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아, 너는 내 것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것을 오해했다는 것이죠.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자기들이 이스라엘인 줄로 알고, 주위를 둘러봐도 다른 이스라엘은 없으니,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편이다" 라고 나왔다는 겁니다. 성경의 그 이스라엘이 현재의 자기들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교인들도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주님께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고 하면, 그 사랑이 실증적으로, 즉 실제로 효과가 나타나는 대상, 그게 바로 사랑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 나는 너를 사랑했다 !!

그러면 주님께서 사랑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잘 들어보세요. "나는 너를 사랑했다" 라고 하면, 그래서 그 사랑이 인간세계 속에 들어가면 그것이 실증적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 환경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환난, 곤고, 핍박, 기근 등등,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주님의 사랑이 생활고보다 더 세구나"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면 그것이 바로 "나는 너를 사랑했다" 라고 했을 때, 그 '너' 라는 대상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여기에 내가 있으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일방적인 자기 착각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이제 정죄함이 없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라고 하면, 그게 로마서 8장 마지막에 나오는데, 즉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끊을 수 없느니라" 라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를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 그 전체에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물어, 물어봐 !!

방금 이야기한 동물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자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데, 폭탄 제거반과 같은 복장을 하고 우리 안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옷이 무거워서 뒤뚱뒤뚱 걷게 되는데, 하지만 그래도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자가 다가와서 물어도 괜찮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자를 더욱 가까이 접근해서 볼 수 있는데, 울타리 바깥에서 봉을 가지고 폼을 잡는 수준이 아니고,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사자를 보고 "물어, 어서 물어봐"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죠(ㅋㅋ).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안'의 상태로 만들어서, 이 세상 안으로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폭탄 제거반의 복장을 갖추게 해서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 안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 생활고야, 나를 물어라. 어서 나를 물어봐라" 라고,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겁니다.

* 수입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하면 !!

어떤 통계를 보니, 음주운전으로 인해서 사고를 당한 경우에, 그 피해자는 수입이 60퍼센트가 줄어들었다고 하는데 말이죠. 음주운전을 한 인간으로 인해서, 그 사람은 기분이 좋았을지 몰라도, 상대방은 그것으로 인해서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보험회사에서 주는 보상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이죠.

그러면 운이 없다고 할 수밖에는 없는데, 그럴 때 이런 환난, 곤고, 핍박, 기근과 같은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고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사고 이전과 이후의 수입이 그만 확 차이가 난다는 말이죠. 수입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인데, 그것을 치를 수 있는 비용이 없다는 겁니다.

* 그냥 하루하루를 버티는 삶 !!

쉽게 말해서, 사는 재미가 없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럴 경우에는 폭탄 제거반의 복장이 아니고, 그냥 맨몸으로 악마가 다스리는 이 세상에서 아등바등하면서 살아간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루하루를 그냥 버티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런 경우에는 영적인 싸움일까요? 자기와의 싸움일까요? 자기와의 싸움, 즉 생존 싸움이라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나에게는 그 어떤 주님의 사랑도 없었구나" 라고, 그렇게 판정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해놓고,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말이죠. 누가 가짜이고 누가 진짜인지가 드러나게 한다는 겁니다.

* 시골교회 목사 !!

제가 만약에 시골교회에 부임을 한다고 하면, 물론 여기 우리교회도 시골이라면 시골이지만 말이죠. 뺀질이들이 사는 도시나 그 근교가 아닌 저기 강원도나 전라도 쪽으로 간다고 하면, 그러면 십자가 마을 사람들이 저를 보고 뭐라고 하겠느냐는 겁니다. 시골에는 가지 말라고 말릴까요?

"목사님, 설교수준을 너무 높게 하지 마시고, 모두들 순박한 사람들인데, 그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천국에 가려고 교회에 나오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가끔 농사나 좀 도와주시고, 아프다고 하면 병원에 갈 때 운전이나 해주면 됩니다" 라고 하지 싶은데, 아닌가요? (ㅋㅋ)

물론 제 아내는 그런 말은 하지 않고, 다만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지 싶은데, "절대로 설교시간에는 고함을 치지 마세요. 그냥 조용조용히 지냅시다. 인생말년을 이렇게 공기가 좋은 곳에서 지내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준다면 같이 가겠습니다" 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아무리 순박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자기들이 30년, 40년 믿었던 것과 다른 소리를 해서 상처를 받게 되면, 목사의 허리띠를 붙잡고 마구 흔드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당한 목사도 있는데, 그러면 저는 다음과 같이 설교를 하지 싶은데 말이죠.

* 저는 잃을 때가 기쁩니다 !!

"여러분은 자기가 얻을 때가 기쁩니까? 잃을 때가 기쁩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그러면 당연히 얻을 때 기쁘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아무리 시골 사람들이라도 교회에 다니고 지옥에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그 시골로 보냈다고 하면, 목사로서 그들이 천국에 갈 자인지 지옥에 갈 자인지, 그것을 확인시켜주어야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질문을 했을 때, 만약에 "저는 건강이고 재산이고 간에 잃을 때가 기쁩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곧 성도라는 말이죠. 물론 이것은 도시나 시골이나 상관이 없는데, 무엇인가 상실함이 있어야, 그런 상실로 인해서 주님의 사랑이 주입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십자가를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천국에 간다고 나온다면, 여기서 "시골이니까 봐줍시다" 라는 것은 성립되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악마가 이 땅에서 인간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시골교회도 만들고 신학교도 만들고 목사도 배출하고 있다는 말이죠.

주님의 전쟁에서는 주님의 사랑으로만 구원이 되는데,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 사랑과 긍휼이 들어갈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인간은 자기 위주이기 때문에, 자기 행함과 그 결과를 마치 창고에 물건을 쌓듯이 쌓아나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있고, 저것도 내가 했고" 라고, 즉 "이 감자는 내가 캤고, 자식공부도 내가 시켰고" 라고 말이죠.

그렇게 자기 성과가 차곡차곡 쌓여있으니 주님의 사랑이 먹히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자기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말이죠. 아무리 시골교회라도 그것은 생존싸움인데, 즉 "없으면 무시를 당한다" 라고, 그렇게 자기를 지키는 싸움만 할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 교재에도 나오듯이, 그것은 주의 전쟁은 아니라는 말이죠.

* 잠시 요약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요약하면, 주님의 전쟁에 우리를 참전시킬 때는, 악마도 너끈히 이기는 폭탄 제거반 이상의 중무장을 시켜서 이 세상에 내보낸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8장인데, 즉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그 어떤 것도 끊을 수가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바로 그 전쟁인데, 즉 "마귀에게 속한 인간들아, 너거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에게 왔기 때문인데, 그 아들은 악마의 결정으로 인해서 발생한 십자가, 즉 죽음에서도 부활로 다시 튀어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죠.

* 예수님의 죽음이 없는 것은 모두 다 거짓 !!

여러분은 이런 게임을 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꼬마인형이 있으면 그 인형을 포도주를 담는 통 위에 세워놓고, 여기 통에 나있는 여러 개의 구멍에 칼을 여러 개 꽂는데, 그렇게 계속해서 꽂다가 보면 그만 인형이 위로 '퉁' 하고 튕겨서 올라온다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펑' 하고 부활이 되었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들이 "이제 예수님의 시대는 끝났어"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팩트인데, 즉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 내용말고 다른 것은 모두가 다 거짓이라는 말이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앞서서 먼저 교재 106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여기에 골로새서 2장 12절 말씀이 있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여기 마지막에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미 완료가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세례라는 것은 교회에서 목사가 물을 뿌리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시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되는데, 그런데 그 앞에 보면 '하나님의 역사', 즉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믿음은 받아주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악마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 인간들이 알아서 무장한 것은 전혀 소용이 없는데, 그러면 악마는 이빨을 감추면서 웃는다는 겁니다. "겨우 그것으로 나를 이기려고 해?" 라고 하면서 말이죠.

* 믿음은, 행함누락이고 결과수용 !!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믿음이 생겼는데, 그러니 믿음은 행함 누락이라는 겁니다. 자기의 모든 행함이 누락된 상태, 그게 믿음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을 것이다" 라는 것이 아니고, "이미 받았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결과수용인데, 즉 자기 자신이 곧 결과라는 말이죠.

여기서 주님은 막대기, 즉 봉으로 쑤시는데, 그러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어르렁거린다는 겁니다. 다니엘을 생각하면 되는데, 바사 나라의 다리오 왕 때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께서 봉을 잡고 우리를 앞장세워서 쑤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할 것이 없는데, 다만 우리는 결과물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그 봉을 쥐고 있는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인데, 우리는 그분에게 연장된 결과물로서 악마를 향해서 봉으로 쑤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네가 나를 죽였지? 하지만 나는 너를 이겼어. 부활했잖아" 라고 하는, 바로 이 싸움이라는 말이죠. 여기 봉에 달린 자가 성도인데, 그러면 성도는 자기 행함으로 마귀에게 달려들 수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를 누가 지었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내가 땅을 바쳐서 이 교회를 지었다" 라고 하면서, 장장 50년 동안을 시골교회의 장로로서 버티고 있는데, 이런 시골에서는 장로가 은퇴를 해도 수렴청정이라는 말이죠(ㅋㅋ). 그런 시골교회에 복음을 아는 목사가 와서 설교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를 누가 지었습니까? 장로님이 앞장서시고 여러분이 지었지요? 그런 장로님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했지요?" 라고 하면, 교인들은 "예, 임했습니다"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목사는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라고 하고, 그러면 교인들은 "아멘"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복음을 안다면 그런 설교가 아니고, "여러분은 얻은 것이 기쁩니까? 상실된 것이 기쁩니까?" 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마귀와의 싸움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주님의 행함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주님의 행함으로 인해서 우리의 행함은 누락이 된다는 말이죠.

* 모든 자기 계획은 용납되지 않는다 !!

여기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세례' 라고 하는 것은 같이 붙어있다는 의미인데, 즉 연합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붙어있으면서 주님이 뒤에서 자꾸만 쑤신다는 말이죠.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데, 그래서 성도는 그 특징을 "모든 자기 계획은 용납되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모든 계획은 주님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계획을 세우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게임에서 자기가 패배자가 되는 게 아니라 승리자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여기에서 자존감이 발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 공부도 일종의 게임 !!

예를 들어서, 어떤 학생이 "나는 아침에 1시간 동안 영어단어를 외우고, 학교에서 다녀와서 저녁에는 2시간 동안 수학기초를 다진다" 라고 했다면, 그것은 계획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엄마가 묻기를 "너는 왜 그런 계획을 세우는데?" 라고 하면, 당연히 "그것은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공부라는 것은 일종의 게임인데, 그런데 공부는 혼자가 아니고 여럿이 한다는 말이죠. 게임은 혼자서 하면 재미가 없는데, 그렇게 여러 명이 해서, 이번 중간고사에서 누가 일등을 하고 누가 꼴지를 하게 되는지, 그런 것이 있어야 게임이 재미가 있다는 겁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자기 혼자 있으면 재미가 없는데, 재미가 있으려고 하면 게임을 해야한다는 것이죠. 전쟁이라는 게임을 말이죠. 그래야 자기가 계속해서 집권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남한 사람들이 왜 북한에 가지 않는고 하니, 반공정신이 투철해서가 아니고 북한에 가면 재미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거기에는 국민의 힘이 없다는 겁니다(ㅋㅋ).

게임을 벌려야 하는데, 그러면 왜 게임이 재미가 있을까요? 게임이 있어야 승자가 발생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자기가 승리자가 되는 것이 왜 재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자존감 때문에 그러한데, 그러면 이기는 것으로 인해서 왜 자존감이 생기게 됩니까?

* 나는 신이다 !!

그것은 곧 "나는 신이기 때문이다" 라는 것인데, 요즘 넷플릭스의 '나는 신이다' 라는 다큐로 정명석이 새삼스럽게 유명해졌다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명석보다도 허경영이 훨씬 더 센데, 왜 그 인간만 거론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죠(ㅋㅋ). 허경영은 나라를 구한다고 하면서 돈을 거두어서 자기 궁전을 지어놓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통일교나 신천지도 있고, 또한 잘 나간다고 하는 대형교회가 다 그러한데, 그래서 자식들에게 세습을 시키고 한다는 말이죠. 사랑의 교회를 비롯해서 대형교회들은 다 부동산인데, 즉 자기 행함의 결과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마귀를 이길 수가 있습니까? 전혀 아닌데, 오히려 그것 자체가 마귀라는 말이죠.

마귀는 우리 마음에 이미 씨앗을 뿌려놓았는데, 즉 "너는 이미 신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승자가 되면 자기가 신이라는 것을 잠시나마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게임에 들어가야 하는데, 자진해서 말이죠.

* 초등부 의대 준비반 !!

서울 강남에 가면 '초등부 의대 준비반' 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데, 남들의 눈치를 보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요즘은 아예 간판으로 걸어놓았다는 겁니다. 그런 학원의 입구에 보면 초등학교 4학년이 수학 문제와 물리 문제를 풀어놓은 것이 놓여있는데, 즉 "4학년이 이 정도다" 라는 것이죠.

거기에 나와있는 물리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전기의 저항과 전류의 관계에 대한 것인데, 그런 것을 초등학교 4학년이 풀고 있다는 겁니다. 그 학원의 목표가 무엇인고 하니,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중등부 과정을 다 마스터하겠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강남의 학부모들이 그 학원을 보고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이게 게임인데, 그런데 초등학생이 졸업을 하고 나서 중학교에 가고, 또 중학생이 졸업을 하고 나서 고등학교에 가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런 것은 승자가 될 기회를 별로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가 신이라는 것을 확인해야하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서 자존감이 높아져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게임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게임에 들어가서는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게임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의 모든 계획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굳이 네가 신이 되지 않아도 좋다" 라는 것인데, 인간은 자기가 독자적으로 신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죠.

*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살아있었는가?

어제 낮 설교시간에 '독자적'인 것과 '대칭적'인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즉 주님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대칭에 집어넣는데,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참 어려운 내용인데, 어제는 설교시간이고 해서 의도적으로 빠트렸다는 말이죠.

오늘 이 시간에 잠시만 해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따져보면 어려운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살아있었는가?" 라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이후에 그들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데, 그러면 과연 그 이전에는 살아있었느냐는 말이죠.

그 답변은 '아니오' 라는 것인데, 그것은 그냥 '있음' 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다' 라는 개념을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바꾸어버렸는데, 즉 생명나무의 과일을 따먹기 이전에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냥 있음이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죽었다, 살았다" 라는 개념조차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너거들 생각이고, 나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재편할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게 하나님의 생각이고 계획이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다시 정리를 하시겠다는 겁니다.

일단 그렇게 해놓고, 골로새서 2장 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세례라는 것은 같이 들어붙어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막대기와 그 끝의 봉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즉 주님은 막대기이고 성도는 그 앞에 튀어나온 봉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믿음이라는 것은 행위누락이라고 했는데, 즉 상실이라는 말이죠.

* 비로소 '있음'에서 '살아있음'으로 !!

그리고 마지막에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라는 것은, 우리는 그 결과만 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을 두고 '살아있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집어넣으니까, 비로소 '있음'에서 '살아있음'이 된다는 말이죠. 바로 이게 팩트이고 사실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숨을 쉬면 살아있는 것이고 숨이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라는 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가 가르쳐준 거짓이라는 말이죠. 인간은 죽지 않는데, 다만 호출될 뿐이라는 겁니다. 무덤에 있는 자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기 때문에, 주님 앞에 불려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왜냐하면 "살아있다, 죽었다" 라는 것은 우리 인간 선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데, 즉 주님의 심판으로 지옥에 가는 것이 곧 죽은 것이고, 반면에 천국에 가면 생명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되면, 그것을 살았다고 한다는 말이죠. 주제넘게 그런 것을 우리 인간이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 성도를 죽은 자로 봅니까? 그냥 있는 자로 봅니까? 살아있는 자로 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아있는 자로 보시는데,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우리 자신의 계획에도 전혀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 몸을 두고 살기 때문에, 계획이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오늘 점심은 영덕대게로 !!

그래서 당장에 "성경공부를 마치고 점심은 무엇으로 하지? 오늘은 몇 명 오지도 않았는데, 이럴 때 어디 비싼 것으로 한번 잡숴봐?"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ㅋㅋ). 이런 것이 다 계획인데, 그러면 계획을 왜 세웁니까? 그것은 자존감이 '뿜뿜' 올라오기 때문인데, 그러면 왜 자존감이 올라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나름대로의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는 것인데, 자기가 지지 않고 이기는 그 즐거움을 확보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못된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데,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이렇게 못된 짓만 한다는 겁니다.

* 인간은 누구를 만난다 !!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을 하겠는데, 지금까지 한 것은 쉽다고 치고 말이죠. 성령을 받는 사람은 그 사고방식이 예수님의 사고방식으로 바뀌어져 있다는 겁니다. 즉 "나를 죽여라" 라고 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죽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확인이 되기 때문인데, 그래서 "너희들의 역할은 나를 죽이는 것이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 "인간은 누구를 만난다" 라는 점인데, 성경에서는 두 종류를 만난다고 하는데 말이죠. 첫 번째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면 성도라는 것이죠.

두 번째 경우부터 먼저해보면, 마태복음 14장 25절과 26절입니다.

(마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마 14: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 와우, 유령이다 !!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오시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 그때 제자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와우, 유령이다" 라고 하면서 무서워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평소에 같은 인간들을 만날 때 그렇게 무서워했습니까? 그렇지가 않았다는 말이죠.

악마가 이 세상 전체를 다 지배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고만고만한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인간들이 같은 인간들끼리 만날 때는 무서워하지 않는데, 그러니 인간들에게는 그런 이 세상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말이죠. 친숙하고 거부감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불쑥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오셨는데, 그것도 밤에 말이죠. 그러자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하면서 무서워했다는 겁니다. 만약 훤한 대낮에 찾아오셨다고 하면 무서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제자들이 왜 무서워했을까요? 그들이 무서워한 이유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죠.

자기들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악마가 다스리는 이 세상에서 사람은 물 위를 걸어다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물 위를 걸어다니는 존재는 없는데, 물고기는 물 속을 헤엄쳐서 다닌다는 말이죠.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온다는 것은,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언어개념을 이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 언어개념, 그리고 이탈 !!

이제 정말 어려워지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의 현실은 어떠한고 하니, 언어가 구성된 세계가 우선이었고, 그 안에서 '나' 라는 것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있고 나서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가 먼저 있고 그 안에서 자기가 태어난다는 말이죠.

그런데 동물의 경우에는 자기들이 자연의 일부인데,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무엇인고 하니까,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일부임을 거부하면서 등장한 것이 곧 인간의 언어라는 겁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지나가는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게 되는데, 그냥 이름이라는 동물은 없다는 말이죠.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그러니 이름을 붙이게 되면, 이름을 붙이는 쪽과 받는 쪽이 생기는데, 그러한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 곧 언어라는 겁니다. '멍멍' 짖는다고 해서 멍멍이, 소가 새끼를 낳으니 송아지, 이렇게 언어라는 것은 이름을 짓는 동시에 소속이 되고 종속이 된다는 말이죠. 이름을 짓는 자에게 편승이 되는데, 즉 이름을 짓는 자의 세계의 일부가 된다는 겁니다.

* 다스리고 정복하라 !!

창세기 1장 28절의 "다스리고 정복하라" 라는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언어가 주어지는데, 그래서 동물에게는 인간에게 붙이는 이름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동물에게는 없는데, 그런데 인간에게는 동물에게 붙이는 이름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인간과 동물의 관계인데, 즉 아담이 동물을 다루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언어의 남발 !!

그러면 그 아담 속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언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포함되지 않는 언어라는 말이죠. 그런 언어가 이 세상에 남발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름을 붙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아담 배후에는 아담에게 '흙' 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아담이 지나가는 동물을 보고 이름을 붙일 때는, 그것은 마치 막대기와 봉처럼,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이 인간 속에 작용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과 동물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분의 지배아래에 둔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선과 악에 관한 지식에 대해서는 "따먹지 말라" 라고 금지명령을 내리심으로서, 즉 "인간아, 네 주제파악을 제대로 해라. 네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의 의미와 가치가 너로 인해서 스톱이 되면 안 돼. 알겠어?" 라는 겁니다.

* 그런데 악마가 인간을 인터셉트를 함으로서 !!

그런데 그 중간에 그만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악마가 인간을 인터셉트를 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것도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도둑질을 하게 되는데, 선악과나무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닌데, 물론 악마가 만든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만 그것을 도둑질하고 말았다는 것인데, 즉 신적 요소가 인간 속으로 납치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은 이런 신적인 선악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악마가 "너희가 이것을 따먹는 날에는 하나님처럼 된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드디어 우리는 성공을 했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졌어. 이 내용의 비밀만 풀게 되면, 우리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오르게 되는 거야"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자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이 나의 것을 가지고 갔지? 그러면 여기에 금지가 하나 더 추가되는데, 이제 생명나무는 금지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선악과나무처럼 동산에 두고 따먹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니고, 아예 생명나무를 에덴동산에서 철수를 시켜버린다는 것이죠.

* 언어 가운데 태어나는 인간 !!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에게 지시도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언어는 인간으로서의 의미가 마감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제 인간에게 있어서 그 모든 의미는 자기 좋아라고 사용하는 의미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부모로부터 물려받게 되는데, 그러니 인간의 언어, 그것을 담화라고 하는데, 그런 말 가운데서 아이는 태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가 코를 만지면, 부모는 "그래, 그것을 코라고 하는 거야" 라고 하는데, 또한 귀를 만지면, "그래, 그것을 귀라고 하는 거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그 코와 귀와 눈이 합쳐져서 얼굴이 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엄마가 아이에게 알려준다는 것이죠.

그리고 아이가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면, "그렇지, 오줌은 화장실에서 그렇게 누는 거야"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서 아이의 자아가 형성된다는 겁니다. 즉 부모가 지정한 언어로 규합하면서 자아가 조립되기 시작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부모는 "너의 코와 귀와 눈이 하나가 될 때, 그러면 너는 온전하게 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우리 병원에 가보자 !!

그런데 그 아이가 유치원에 가서 오줌을 화장실이 아니고 그만 교실에서 누게 되면, 다른 아이들이 "얼레리 꼴레리" 라고 하면서 놀린다는 말이죠. 아이는 급해서 그냥 화장실 바깥에서 누었는데, 몸이 그렇게 시켰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이, 즉 다른 언어체계가 놀리더라는 것이죠.

그러면 아이는 집에 와서는, 엄마에게 "내가 오줌을 급해서 교실에서 누었는데 아이들이 놀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엄마는 "오줌은 화장실에서 누는 거야" 라고 하는데, 그리고는 오후에 옷을 차려입고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는데, 혹시 아이의 정신발달에 이상은 없는지 걱정이 되어서 말이죠.

엄마는 무엇을 보고 그렇게 합니까? 아이에게 '화장실' 이라는 엄마의 뜻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음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인간의 언어는 이 세상의 합리성에 동조한다" 라고 하는데, 즉 악마의 뜻에 보조를 맞추어주는 것이 인간의 언어라는 말이죠.

굳이 악마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그렇게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언어의 최종의미와 가치는 어디서 마감이 된다는 겁니까? "내가 신이다" 라는 것에 마감이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인간의 언어라는 겁니다.

* 인간의 언어는 자신을 감추는 방식 !!

강의가 좀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다시 들어보면 되는데,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보겠습니다. 이러한 결론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논리가 성립하게 되는데, 즉 "인간의 언어는 자신을 감추는 방식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즉 자기를 속이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무엇을 속여야 하는지,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자기가 무엇을 속여야 하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속인다는 겁니다. 그 속이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상대가 속한 그 언어세계의 합리성에 동조하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속인다' 라는 표현이 조금 거북스러우면 '연출한다' 라고 하면 되는데, 상대방의 말에 비위를 맞추어준다는 겁니다. 상대방에게 동조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래야 상대방과 한 편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상대방이 자기의 든든한 응원군이 되어준다는 겁니다.

그렇게 힘이 되어주면 무엇을 합니까? 그러면 자기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편하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자기가 살아서 무엇을 한다는 겁니까? 신은 죽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자기는 신이기 때문에 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마감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동물들은 그런 것이 없는데, 남에게 속지 않으려고 속인다든지, 그리고 숨긴다든지 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동물은 흔적을 남기기는 남기는데, 하지만 그것은 타인을 속이기 위한 흔적이 아니라 본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언어는 비자연적 요소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언어는 인간에게 있는 비자연적 요소라는 말이죠.

여기서 성경을 찾아보겠는데, 주님께서 얼마나 예리하게 제자들을 상대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8장 24절에서 27절인데,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마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마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 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인간은 타인에게 자기를 숨기는데, 즉 속이는 방식으로 나서는데, 그 속이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사기를 칠 테니 나에게 속아라" 라고 하는 게 아니고,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그 내용의 합리성에 동조하면서 속인다는 겁니다. 인간은 타인이 될 수 없는데, 그런데도 그 타인과 같은 편이라고 위장을 한다는 말이죠.

* 남편은 아내를 죽도록 사랑하십니까?

예를 들어서, 결혼식을 하는데, 주례자가 "남편은 아내를 죽도록 사랑합니까?" 라고 하면, 남편은 "예, 죽도록 사랑합니다" 라고 해야지, "그것은 좀 곤란합니다" 라고 말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혼식이 아닌 이혼식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ㅋㅋ).

그래서 '결혼' 이라는 합리성에 동조하는 차원에서 "예, 죽도록 사랑합니다" 라고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신부에게 "아내가 된 자는 남편을 사랑하겠습니까?" 라고 하면, 신부는 아주 공손하게 "예" 라고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언어를 내뱉는다는 것 자체가 속임이라는 말이죠.

* 제자들은 왜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꾸짖지 않았는가?

앞에서 인간의 언어는 비자연적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왜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바람과 바다야, 잔잔해" 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혼자이지만 자기들은 숫자도 많은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죠.

그들은 무엇을 아는고 하니, 자기들이 말하는 언어라는 것이, 같은 인간들끼리는 속고 속이고 할 수 있지만, 바람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세계에게는 전혀 먹히지를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비자연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 자연과 통하는 예수님 !!

그런데 여기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보고 꾸짖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우리가 아무리 "믿습니다" 라고 해도, 그런 우리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유를 알겠지요? 주님은 우리의 "믿습니다" 라는 언어를 믿지 않는데, 주님은 우리를 알아도 너무나 잘 아신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꾸짖는데, 그러자 바람과 바다가 그만 잔잔해졌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언어만이 자연적이라는 말이죠. 즉 자연을 통제할 수가 있다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자연과 통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님은 자연을 지배하신다는 말이죠.

이 사건 뒤에 무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귀신을 보고 나가라고 했는데, 그러자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제가 나가기는 나가겠는데, 저 돼지 떼에 들어가게 허락해달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상대방이 귀신인데, 물론 외부에서 보기에는 귀신이 들린 청년이지만, 그 안에는 귀신이 들어있었다는 것이죠.

(마 8: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보내소서 한대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에, 그녀들의 오빠가 죽었는데, 하지만 인간들은 죽은 자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내 말이 먹히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들이 "아버지, 일어나세요" 라고 하면 아버지가 일어납니까? 일어나지를 않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요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고조 고조 감추면서 !!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느낌이 듭니까?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모든 언어와 말은 최종적으로 어디에서 스톱이 됩니까? '나'에게 마감이 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동안 자기는 하나님을 속이고 타인을 속여왔다는 것인데, 자기가 그렇게 연출해왔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남들을 보고 "우리 서로 좋게 좋게 합시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본의 아니게 남을 속이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남을 속이는 것보다도 더 나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감추는 방식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감추면서도 무엇을 모릅니까? 정작 자기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것을 북한말로 표현하면 "고조 고조 감추면서" 라고 할 수가 있는데(ㅋㅋ), 그러니 인간은 무슨 말을 했다고 하면 무조건 타인을 속이고 보자는 식인데, 쉬지 않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 할아버지, 아니 받겠사옵니다 !!

예를 들어서, 할아버지가 손녀를 보고 반가워서 돈을 주니까, 손녀가 받지 않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엄마가 왜 받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니, 그러자 아이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할아버지가 돈을 많이 있으면서 하나를 주면 받겠는데, 지갑에 5만원짜리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거지가 되니, 그게 걱정이 되어서 받지 않았다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여기서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합리성과 손녀가 생각하는 합리성이 서로 충돌이 되는데, 그러니 결국은 이 게임에서 할아버지와 손녀는 둘 다 어떻다는 겁니까? 둘 다 패배자가 아니라, 자기 자존감을 유지하는 방식으로서, 그렇게 활용을 했다는 겁니다.

* 환유와 은유 !!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언어에 대해서 조사를 해보았는데, 어떻게 속이는지를 말이죠. 인간은 모든 언어를 두 개로 변형을 시키는데, 그게 환유와 은유라는 겁니다. 환유는 전치의 기능이 들어있고, 은유는 압축의 기능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설명하면 더욱 더 어려워지는데(ㅋㅋ), 모든 언어는 자꾸만 과격을 빗나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리워하는 겁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그것은 밤에 잠도 오지 않고 떠오르는 겁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미끄러지는 언어 !!

그러면 또 "떠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는데, 그렇게 계속해서 그 의미가 원래 이야기했던 표현에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것을 '미끄러진다' 라고 하는데, 마치 기름을 발라놓은 것처럼 말이죠. 거기에 잠시 머물러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자꾸만 미끄러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꾸어야만 하는데, 그 바꾸는 방법이 두 가지인데, 그것이 바로 '환유'와 '은유' 라는 말이죠. 은유, 즉 압축이라는 것은 숨기는 것이고, 그리고 환유, 즉 전치라는 것은 바꿔치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바꿉니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바꾼다는 겁니다. 이런 언어, 즉 진실된 의미가 있어도, 인간은 이런 식으로 묘사하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을 두고 정신병자라고 한다는 겁니다. 남을 속일 수 없다면, 그것은 동물이라는 말이죠. 개나 원숭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인간은 인간다워야 하는데, 그렇다면 '인간답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끊임없이 남을 속이는 언어를 내뱉어주어야 하는데, 즉 악마의 세계 속의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셔서, 성도에게 예수님을 전파하라고 하는 것, 그것은 성도를 정신병자로 만드는 것인데,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누가 믿습니까?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믿지 않기 때문에 '전하라'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강의를 다시 하면 !!

강의를 다시 하겠는데, 언어라는 것은 환유와 은유, 즉 전치와 압축을 통해서, 즉 바꿔치기와 숨기는 식으로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이 악마의 세계에서는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죠. 서로가 똑같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 세상의 합리성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것을 아는데, 그래서 주의 전쟁을 벌이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20장을 보겠는데, 19절과 20절입니다.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 두려워 두려워서 문을 닫은 제자들 !!

여기 19절에 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자기들이 모인 곳에서 무엇을 닫았는고 하니까, 문을 닫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문 안쪽에 있는 제자들끼리는 서로 의견이 통한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문을 통과해서 나타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 의견의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는데, 그러자 제자들이 보고 기뻐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현장에 누가 없었는고 하니, 도마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도마가 빠진 상태에서 예수님이 문을 통과해서 자기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는 말이죠.

* 문을 무시하신 예수님 !!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사람들마다 다 문이 있는데, 그래서 자기에게 납득이 되는 것은 문을 열고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고 하니, 그런 문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들어오셨다는 것이죠.

우리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무엇을 감추는지 몰라도 감추기 위해서, 그렇게 자기가 신이 되기 위해서, 승리자가 되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문을 만들었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 문을 우리의 허락도 받지 않고 통과해서 그만 박살을 내버리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거기에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문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신자가 되고 성도가 되려고 노력을 하는데, 즉 문 안에서 천국에 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 감도 잡지 못하고 말이죠. 성경에 나오는 언어를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언어로 일방적으로 다 바꾼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쳐들어오니 어떻게 나옵니까? 거기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두려워하는 것인데, 그래서 주님이 그들을 보고 제일 먼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밤 중에 주님이 걸어오셨을 때도 제자들이 무서워했는데, 그리고 풍랑이 일 때도 역시 무서워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 쪽에서 오실 때 인간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하나님과 직접 마주하게 되면 쫄 수밖에 없는, 그런 지경으로 평생을 묶여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 나는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 !!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드디어 도마가 오는데, 그러자 여기서 먼저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본 제자들과 도마 사이에 논쟁이 발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25절에 보면 도마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는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요 20:24)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렇다면 여기서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도마에게 무엇을 알려주시는고 하니, 인간들은 자기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숨기면서 악마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살아왔는데, 여기서 인간들이 무엇을 숨겼는지,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 아하, 나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죄인이구나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였는데, 즉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죄인이구나" 라는 것인데, 그것을 숨겨왔다는 말이죠. 그것을 악마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강남의 대치동 학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데, 심지어 교회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살아온 이 모든 것들이, 나는 버림을 받아야만 마땅한 죄인이구나" 라는 것인데, 그것을 악마는 꼭꼭 숨기고 있었고,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들추어내시는데, 그렇게 하심으로서 우리 인간의 진짜 참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다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문을 만들고 또 만들어서 꼭꼭 닫아걸고 "나는 행복해야 돼. 나는 성공해야 돼. 나는 더 살아야 돼.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자식만큼은 성공해야 돼" 라고 하면서 살아왔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것이 다 무엇이라는 겁니까? 우리 인간이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것을 가리우기 위해서 악마가 만들어낸 것들이라는 겁니다.

* 악마의 속임수, 곧 합리성 !!

그것이 바로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합리성인데, 그야말로 이성적이고 납득이 되는 것들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이죠. 그러한 것에 우리는 푹 빠져있었는데, 그게 거짓인 줄도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악마가 인간을 동원해서 통째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즉 창세 전의 십자가 비밀에 대해서 악마가 인간들을 속이면서 왔다는 말이죠. 그리고 우리 인간은 그 악마의 속임수에 대해서, 그 합리성에 동조하는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거기서 유통되는 성경의 언어, 즉 구원, 천국, 죄, 십자가, 피 등등, 그런 것들을 동원하게 되면 자기는 구원이 되는 줄로만 알았다는 것이죠. 그러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자기 자신,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죽은 존재로 보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숨이 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 라는 말을 끄집어낼 때는, "진짜로 살아있다는 것은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다" 라는 것과 서로 연계를 시켜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진짜 죽은 자로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경우에만, 살아있음이 곧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라는 말이죠. 그것 자체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너는 진짜로 죽었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대칭성이고, 교재 106페이지에 나오는 골로새서 2장 12절 말씀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골로새서 2장 12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 예수님 자신의 활동 !!

벌써 골로새서 2장 12절을 4번째로 하지 싶은데, 여기 세례라는 것은 같이 한다는 의미이고, 그러니까 우리의 행함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역사, 즉 하나님의 활동과 그 활동으로 인한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가 되는데, 그렇게 됨으로서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라고 하는, 그 결과 속에 놓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골로새서 2장 12절 말씀, 이게 하나님의 언어인데, 이 언어는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서 교재 104페이지에 보면, 고린도전서 13장 5절 말씀이 나오는데, "사랑이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그리고 103페이지를 보면 "그분을 핍박한 것은 단지 인간을 핍박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핍박한 것이 되고, 또한 그분의 제자들을 공격하는 것은 종교의 한 분파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자체를 공격한 것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을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어느 한 종교분파의 활동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활동이었다는 것이죠.

이제 교재 102페이지를 보고 마치겠는데, 여기에 보면 "죄의 개념은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신 일로 통해 만천하에 정체가 탄로나 버렸다. 인간들의 자기 정당성과 의와 공로성 주장이 곧 죄였다. 즉 나름대로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한 것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누가 시켰는고 하니, 악마가 시켰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몸이 아파서 병원에서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의사가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라고 하니까, "당신은 돌팔이가 아닌가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의사는 자기 몸의 문제점을 밝혀내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돌팔이가 아니냐고 나온다는 말이죠.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자꾸만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십자가가 돌팔이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잘못이 끊임없이 나오는 기쁨, 즉 자기가 주님과 함께 주님이 쑤시는 막대기의 봉이 되어서, "왜 저에게 이런 혜택을 주십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또한 그것이 성도의 즐거움이라는 말이죠.

*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악마의 노래 !!

이 세상에서 악마가 가르친 노래를 하나 소개해드리면,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공감을 표했다는 겁니다. 여기 1절에 보면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라고 하고, 2절에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라고 하고, 그리고 3절에서는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양주동 박사가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이라는 불교경전을 가지고 만든 '어머니의 마음' 이라는 노래인데, 요즘은 '어버이 은혜' 라고 하는데 말이죠. 이 노래의 가사를 살펴보면 구구절절이 얼마나 그 가슴이 아파 오는지 모르는데, 그 합리성에 동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아니, 동조할 뻔했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 최종 의미와 가치가 마감되지 않게 해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배후에는 악마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3,4,25 오후 5시에 마침.

마누라는 돌팔이 의사를 만나라고 하고, 어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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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마음]
양주동 작사, 이흥렬 작곡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엔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니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깍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요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 없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