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강-YouTube강의(회복과 창조 잠언 8:22)20230523-이 근호 목사
제433강, ‘회복과 창조’. 창조에 대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피조물에 대해서 사람들이 주로 이야기해요. 세상에 있는 해와 달과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만들어진 그 창조를 통해서 창조주를 생각하려고 그렇게 시도를 하는데 그것은 실패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기에 우리 자신이 회복된다. 나중에 죄짓기 전의 아름다움과 기쁨과 낙원을 주께서는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예루살렘성에서 회복시켜준다. 자기 잘된다.’ 거기에 치중해서 성경을 보는 안목이 있어요.
그런데 잠언서 8장에는 창조를 언급하면서 우리 인간들을 창조했다는 창조에 관심을 두는 창조가 아니라, ‘창조 때에 누가 계셨다. 하나님이 창조행위를 하실 때 거기에 누가 계셨다.’를 주목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했다. 뭐 이거 알면 하나님의 백성이겠지.’라는 생각은 너무나 터무니없이 안일한 생각입니다. “너 창조될 때 거기에 누가 있었는데?” 물으면 “하나님 계시고 그다음 창조되고 난 뒤에 나 있었다.” 이렇게 돼버려요. 그건 잘못입니다.
잠언서 8장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23절에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24절에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절에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절에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절에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자, 창조할 때 해와 달, 별, 땅, 들, 세상 진토, 바다, 큰 샘 이 모든 것에 주목할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질 때 거기에 누가 계셨느냐’가 제대로 창조를 아는 사람이에요.
창조할 때 누가 계셨느냐 하면 생명이 계셨어요. 이렇게 돼버리면 우리 인간이 만들어져서 숨을 쉬잖아요. 또는 사슴이 만들어질 때 숨을 쉬죠. 사람들은 그걸 사슴이 생명 가졌다, 사슴이 숨을 쉰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생명은 그게 아닙니다. 생명은 피조물 속에 호흡이 작동하고 반복하는 그게 생명이 아니라, 생명은 창조 때에 하나님 옆에 계셨던 그분을 생명이라 해요.
그러니까 내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이 회복되는 것이 제대로 된 회복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잠언서 8장 36절,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숨 잘 쉬고 밥 잘 먹고 열심히 운동하고 건강하고 튼튼한데 단지 뭐가 없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없고 안목이 없을 때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린 자’라 하는 겁니다. 자기 영혼을 잃어버린 자.
생명은 내가 생명이 아닌 거예요. 내 목숨이 생명이 아니라는 이걸 우리가 분명히 해야 돼요. 살려달라고 할 필요 없어요. 살아도 주님 생각하게 해주시고 지금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 생각하게 되면 그 사람은 원래 창조했던 그 구조 안에서 회복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회복된 사람이에요. 예수님 얻어버리면 회복이에요, 그게.
8장 35절에 보면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었다. 나를 얻는 자는, 신약의 예수님이죠, 예수님을 얻는 자는 생명을 얻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시편 139편 16절에 보면 나옵니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내가 있기 전에 주님의 눈이 먼저 있었다. 내 눈이 있기 전에 주님의 눈이 먼저 있었다. 그 주님이 누구겠어요? 나보다 예수님이 먼저 계셨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관심사가 나한테 있어야 되겠어요, 나보다 먼저 계신 분에게 있어야 됩니까? 당연히 먼저 계신 분에게 있어야 되죠. 왜? 하나님은 그분 위주로 창조하시고 그분 위주로 회복하시고 완성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비참하게 죽었지만 주께서는 영광스럽게 회복하셨잖아요. 그 회복을 말합니다. 시편 139편 15절에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편 139편 17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생각이 하나님과 더불어 천국에 살 사람 속에 창세 전에 이미 결정된 뜻이 그 사람 속에 들어옵니다. 17절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6절에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이 기록된 것에 대해서 아까 17절 읽었던 것,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그러니까 지금 시편 139편에 이 신앙인은 뭘 느끼느냐 하면 살아가면서 내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냐를 느끼는 게 아니고 ‘주의 뜻이 나를 통해서 나를 방편으로 삼아서 자기 주의 뜻 스스로 펼치는 도구로서 이렇게 저를 사용해주시니 주의 뜻이 어찌 그렇게 깊으십니까’라고 감사하면서 찬송하고 있는 거예요. 시편 139편에.
그러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잠언서 8장에 나오는 것처럼 바다, 산, 땅, 들, 하늘, 궁창 다 마찬가지에요. 그들이 파도 철썩 한번 치는 것, 창세 전에 주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신 거예요. 창세 전에. 하늘에 구름이 만들어졌다 흩어지고 또 만들어지는 것, 각양 각색, 각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 주께서 그렇게 창세 전에 다 계획하신 대로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공중에 나는 새, 바다에 헤엄치는 물고기, 그리고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 그 모든 것이 여기 시편 139편 그리고 잠언서 8장에 의하면 바로 그때 창조 때 함께 계신 그분의 뜻을 스스로 펼치기 위해서 창조세계, 창조질서를 만들었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몽땅 주의 뜻에서 빠지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주의 뜻에서 빠진 게 없다고 한다면 그 모든 것에다가 우리 자신을 거기다 한번 넣어봅시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주의 예정하신 뜻에 어긋나거나 비껴간 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창조 하나도 나를 위해 창조한다 하지 말고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했다, 골로새서 1장 16절, 예수님을 위해 창조된 것을 안다면 이 세상에 살면서 두려움이라든지 불안 같은 것은 있을 이유가 없죠.
이 세상에 불안과 두려움은 내 뜻을 관철하려고 억지를 부리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아니야,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건 도리어 너를 힘들게 해.” 라는 식으로 주께서 당부하고자 우리에게 불안과 근심 걱정을 주는 거예요. “이게 뭐 잘못된 거야. 성경 다시 봐. 세상 뭐라고 되어 있는지.”
회복과 창조는 예수님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것이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