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강-YouTube강의(강함과 약함 고린도후서 4:8)20230606-이 근호 목사
제435강, ‘강함과 약함’. 자, ‘강함과 약함’인데 제목을 약간 늘여보겠어요. ‘강해지려는 것과 약해지려는 것’, 이렇게 방향성을 집어넣어서 제목을 그렇게 변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강함과 약함이니까 강해지려는 것과 약해지려는 것이 있으니까 우선 첫째, 강해지려는 자들이 어떤 모습을 띄는지 알면 되고 약해지려는 자들이 어떤 모습을 띄는지 알아서 두 개 합치면 되겠죠.
우선 강해지려는 사람은 로마서 1장에 나옵니다. 1장 28절-32절, 상당히 길죠. 빨리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8)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자, 28절에서 32절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의 특징을 하나로 뽑아낸다면 ‘분노’. 괜히 화를 내고 있어요. 괜히 성질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길에 가다가 혹은 집안 식구나 혹시 오랜만에 아는 사람 만났는데 말투나 행동에 화가 나있거든 바로 여기 사형에 해당되는 사람이라고 보시면 돼요.
왜 그들은 화를 내면서 살아갑니까? 왜? 강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없으면 화가 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럼 강해서 뭐하는데? 강해서 뭐 할 건데? 강하게 되면 남한테 안 지게 된다는 거예요. 남한테 안 져서 뭐 할 건데? 내가 승리자가 되죠. 그럼 승리자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돼요? 강해지고 싶죠. 강해지고 싶은 거예요.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흔들림이 없다, 이런 거요. 교회도 그런 강함이 많잖아요.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든지 어지간한 시련은 이긴다, 뭐 이런 거요. 이것도 일종의 강함이다 이 말이죠. 너네 교회 교인 몇 명이고? 우리교회 이만큼 많이 나와. 그것도 일종의 뭡니까? 강함이요, 배틀이고 경쟁이요 투쟁이죠.
그 투쟁은 내가 강해야 됨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한 투쟁과 싸움입니다. 동서지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자식과 부모 사이에 평소의 행동과 말투가 전부다 분노 속에 있습니다. 분노 가운데 있어요.
로마서 1장 28절에서 32절까지 읽었던 이 내용은 하나님을 버려야지만 비로소 내가 마음껏 강함의 경쟁에 구애받지 않고 부담 없이 나설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인간은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 28절에 자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거예요. 하나님 모셔버리면 자기가 성깔대로 강함에 매진하기가 좀 주저되는 거예요. 선악과를 아예 따먹어버려야 그다음부터는 하나님하고 관계가 바이바이 되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부담 없이.
그런데 그 하고 싶은 게 뭐냐? 그게 인간 속에 들어온 악마의 마음인데 악마의 마음은 스스로 신이라 자처하기 때문에 그 누구한테도 지지 않고 최고로 절대적으로 강함의 강함, 강함의 존재로 자기를 자부하고 싶은 거예요.
목사님 앞에서 상담을 한다, 또는 정신과 의사 앞에서 상담을 한다, 그 상담을 왜 합니까? 점쟁이 앞에 가서 상담한다, 상담을 왜 합니까? 상담을 왜 하는 거예요? ‘나는 지고는 못 살겠습니다. 약한 것은 내 생리에 안 맞습니다.’ 이런 거거든요.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누구하고 상담했습니까? 안했죠. 상담 안했죠. 스데반 집사님이 누구하고 상담했어요? 안했죠. 약해지려는 거예요. 약해지고 싶은 거예요.
자기 사랑하는 여자보고 ‘여자야~ 여자야~’ 부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약해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노래 가사가 있어요. 약해지면 안 된다. 보세요. 로마서 1장 28절에서 32절이 왜 나왔겠어요? 세상 전체가 이미 마귀의 성질들을 다 갖고 있으면서 그 성질이 뭐냐? 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하나님 제키고 하나님은 거리 두고 자기 속에 있는 욕구와 욕망대로 그냥 밀어붙이면 그것이 마지막 32절에 어디 해당된다? 사형에 해당된다. 심판받는다 이 말이거든요.
문제는 그렇게 알고서도 자기가 옳다고 행할 뿐 아니고 남들까지 그 일이 옳다고 부추기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분위기에 휩싸이는 세상이에요. 분위기에. 낙오자가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낙오자 되면 인간도 아니라는 거예요.
강한 사람으로 부각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관계없이 해도 된다는 것이 이 사회에 용인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나온 것이 뭐냐? 29절, ‘모든 불의와 추악과 탐욕과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자랑하는 자요’ 이런 거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이게 취미가 아닙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거예요. 누가 강해지기 위해서? 내가 살아남고 강해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이런 현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두 번째, 그러면 이런 세상에서 과연 약해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에서 10절, 7절부터 보게 되면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 보면 7절에 강한 것이 오직 하나님께 있기에, 필히 우리는 자체적으로 강해져야 된다? 강해질 필요가 없다? 강해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아시죠. 우리가 평소에 이 세상과 닮아서 얼마나 자체적으로 강해지려고 하는지 아시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상태, 답답한 일을 당하는 상태, 핍박을 받는 상태, 그런 상황을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 상황을 맞닥뜨리게 주께서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목자고 우리는 양이라서.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의도적으로 집어넣어요.
그러면 그때마다 정말 주님이 강하다는 것, 근거를 내세우는데 그 근거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굳이 내가 안 강해도 괜찮아요. 예수님의 생명은 사탄을 이겼죠, 율법을 이겼죠, 저주를 이겼죠, 지옥을 이겼죠. 죄를 이겼죠. 죽음을 이겼죠. 그 생명이 우리한테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4장 11절에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주께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가는 방법입니다.
세상은 강하다고 우기고 강해지려고 하고 성도는 충분히 약해져도 괜찮아요. 여자야 여자야 약해져도 괜찮아. 가사를 바꿔야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