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강-YouTube강의(산자와 죽은자 에베소서 1:20)20230509-이 근호 목사
제431강, ‘산 자와 죽은 자’. 인간들은 죽은 자밖에 없어요. 산 자는 없습니다. 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서 항상 내가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의식만 계속 하고 있는 겁니다. ‘나 죽어있는데?’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혹시 꿈속에 자기가 ‘나 죽었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꿈 깨보면 ‘아, 나 참 식겁했네. 정말 죽을 뻔했네.’ 하고 식은 땀 닦으면서 오늘도 보람차게 하루 씩씩하게 살자, 하고 그렇게 살아가죠.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것이 가리워집니다. 막혀버립니다.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그만큼 산다 죽는다, 생명이냐 죽음이냐 조차도 제대로 확립이 안 되어 있어요. 그 개념 확립이 안 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냐?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죠. 왜 그러냐하면 마귀는 저쪽에 진짜 살아있는 생명나무가 인간에게 차단된 다른 쪽에 인간이 넘볼 수 없는 공간에 진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도록 그렇게 훼방을 놓는 거예요.
생명나무가 인간 쪽이 아니고 인간 너머에 다른 세계에 있다면 인간은 몽땅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세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일로서 일들이 일어나게 해요.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것.
그러면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건, 죽지 않았는데 죽음과 관련된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래서 죽음이 일찍 미리 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자, 죽음이란 뭐냐? 하나님으로부터 괴리된 것,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된 게 죽음이에요. 그게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버림받는 것, 격리된 것,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 이것을 죽음이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하나님과 끊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어내면 된다는 거예요. 만들어내고 섬기면 그만이지, 해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우상이라는 게 나왔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에 여호와 하나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모든 민족들의 신은 각자 나름대로의 참된 신이라고 주장하지, 우리가 우상을 거짓된 신을 섬겼다는 생각을 그들은 추호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임무가 뭐냐? 이스라엘의 임무는 ‘너희들 믿는 신이 가짜야. 그것은 신 아니야. 진짜 신은 따로 있어.’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마차 부리듯이 타시고 그 주변 나라와 접촉하게 만들었죠. 싸운다든지 공격한다든지 회유한다든지 어떤 식으로든 접촉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라 하는 것을 그들에게 이스라엘 나라 존재 자체로서 보여줬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뭐 너희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가 보여 달라고 요청한 적 있어요? 없어요. 다른 나라는 없어요. 애굽 나라가 진짜 하나님이 누군지 그렇게 궁금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나라는 부강했고 부강하다는 말은 그만큼 참된 신을 믿고 있다는 자부심을 그들은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부강하게 만드는 신은 가짜야’ 이런 생각은 있을 수 없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가지고 애굽 신들을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들의 허무성을 다 폭로시킵니다. 그들이 신으로 섬겼던 자연 현상을 하나님께서는 혼돈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너희들이 믿는 신이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신들이 그렇게 나올 수 있게 된 그 출처가 신에서 신이 나온 게 아니고 너희들 혈육에서 육신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지막 재앙이 온 애굽에 있는, 바로 왕 아들뿐 아니고 맏이뿐만 아니고 온 애굽의 모든 맏이를 다 죽였습니다. 이 말은 모세한테 대든 사람은 바로 왕밖에 없지만 우상을 섬긴 것은 모든 집안마다 다 우상을 섬겼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치고 우상 말고 다른 참된 신을 섬길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히브리인들은 그들은 참된 신을 섬겼겠는가? 그들도 마찬가지죠.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와서 바로 왕하고 대결구조를 가져가니까 그들은 도리어 바로 왕편을 들고 기존 권세 편을 들고 모세와 아론을 박대했죠.
그럼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보여준 것은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참된 신을 섬길 수 없다. 단 어떤 경우냐 하면 우상을 섬기는 그 죄에 대해서 희생적인 요소가 들어가면 그 희생적인 요소를 경유할 때만 참된 신을 만날 수 있다, 라는 조건이 모세를 통해서 제시됩니다. 그러면 그 희생되는 조건이 뭐냐?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이에요. 죽음.
자, 이렇게 됐으니까 죽음에 대해서 두 개 종류의 죽음이 등장했어요. 하나는 인간이 죽고 난 뒤에 숨 끊어진 것을 죽음으로 보는 인간들의 죽음. 그 죽음은 가짜 죽음이죠. 이것은 참된 하나님이 제시한 죽음이 아니에요. 참된 하나님이 제시한 죽음은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과 괴리되는 격리된 죽음. 그리고 자기 백성을 위해서 희생당한 그 죽음. 그 죽음만이 하나님께서 제시한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 쪽에 뭘 앞장세웠습니까? 십자가란 죽음을 앞장세웠죠. 그러면 죽음이 하나님 쪽에서 인간 쪽으로 밀고 들어왔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는 생명이라는 것은 애시당초 인간은 기대하거나 고대할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인간은 생명이라든가 영생이라는 것을 얻을 쨉이 못 된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십자가 중심으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영생을 얻겠다고 시도하는 모든 종교는 다 헛수고에요. 사기입니다. 마귀가 만든 거죠. 악령이 만든 거죠. 조작된 거예요. 어떤 인간도 자신의 죽음, 주님이 앞장세운 그 죽음 앞에 그냥 죽은 자이어야 하지, 살아날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복음 9장 6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에 마침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안 따르고자 하는 게 아니라 따르는데 제 부친을 장사하고 그다음에 따라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 이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례 치르나 안 치르나 죽기는 마찬가지에요. 안 치뤘다고 사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죽음을 애도해도 죽음은 그대로 있어요. 죽은 데서 살려달라고 아무리 기도해도 여전히 죽음은 죽음이에요. 인간에게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에베소서 1장 20절에 보면 그 해결책이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아니고 죽은 자들 속에서 살아난 거예요. 죽은 자들. 그러니까 예수님 살아났다고 해서 내가 살 권한이 생겼다고 말하면 안돼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제대로 제대로 이건 확립된 거예요. ‘어떤 누구도 예수님 빼놓고 영생 얻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이게 부활이에요. 부활을 믿는다고 부활되는 게 아니에요. 부활은 반대에요. 아무도 부활될 수 없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부활되신 거예요.
그렇다면 천국은 텅텅 비겠네요. 예수님만 덜렁 외롭게 있고. 아무도 천국 못 가고. 아무도 영생의 생명나무 따먹을 수 없다면 그러면 아무도 없이 혼자 있겠네, 라고 할 때 거기에 대해서 로마서 1장 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이 말은 성결의 영, 성령이죠.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에 있을 때에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살린 그 영, 성령이 우리 안에 있으면 죽은 우리 몸도 삽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겁니다. 부활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