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상대역

아빠와 함께 2023. 6. 6. 10:31

강남-누가복음 17장 2절 (상대역) 23005223a-이근호 목사



17장 1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연자 맷돌 옛날 사람들 곡물 갈 때 빙빙빙빙 가축 동원해서 돌리는 거 있어요. 야무지게 갈립니다. 그 무거운 연자 맷돌, 아주 무겁지요.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작은 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자는 차라리 자기 목에다가 무거운 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차라리 낫다. 1절과 2절을 보게 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말씀은 폭력을 동반한다. 폭력을 동반해요. 폭력 없는 주의 말씀은 없습니다. 폭력적이죠. 폭력은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깨버리는 것.


따라서 여기에 작은 자, 아주 작은 자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실족케 하거든 그런 일이 벌어지거든 그런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는데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우고 바다에 자진해서 빠지는 것이 낫다. 스스로 말씀의 폭력을 뒤집어쓰라. 그렇더라도 말씀은 사라지지 아니한다. 이 말씀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을 시범 보일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뜻이죠.


따라서 1절과 2절에 대한 우리들의 나올 수 있는 반응은 제가 쓰겠습니다. 야무지게 빠지자. 다시 바다에서 기어 나올 생각 말고 야무지게 빠지면 돼요. 그래야 말씀이 실현돼요. 말씀이 표현되니까. 주의 뜻입니다. 야무지게. 다시 기어 나와가지고 애들 저녁이나 챙겨주고 들어가자. 아니 아니 그러지 말고 힘차게 망하자.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씩씩하게 빠지자. 깊은 물속으로. 뭐 하나 더하면 신나게 빠지자. 그냥 빠지지 말고 목에다가 뭘? 두 번 다시 바깥으로 기어 나올 수 없도록 단단하게 촘촘하게 다 감고 물에 빠지시면 됩니다. 그러면 누가복음 12장 2절 우리를 통해서 주의 말씀 실현 됩니다. 그러니까 이게 말씀 지키는 게 굉장히 쉬워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중요한 것은 이렇게 야무지게 빠지게 되면 그 빠진 자리에 주님도 같이 빠져있다. 주님을 만났는데 거기서 만나요. 바다 속에서 만나는 거에요. 주님을 만날 때. 바다위에서 기웃거리면서 주님 어디 가셨나? 주님 거기 빠져있는데 찾긴 뭘 찾아. 주님을 어디서 찾는데? 주님을 말씀 속에서 찾아요. 주께서 말씀을 내뱉을 때는 그 말씀 안에 본인을 담아서 본인의 죽음을 담아서 말씀을 던진 겁니다.


세상에 이런 판사가 어디 있어요. 이런 판사가. 세상 판사는 자기는 의자에 앉아 가지고 피고는 이러고 있지요. 이거는 세상 판사고 주님은 피고가 받는 형벌 속에 본인이 먼저 선점해서 먼저 앞장서서 피고가 받을 그 형벌 속에 자신이 거기에 가담하고 이리로 오라는 거에요. 그래야 네가 말씀을 지키지 말고 말씀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거에요. 말씀 속에 들어가면 주님 그렇게 대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대체 말씀을 어디서 만나느냐 하는 거에요. 자, 누가복음 12장 2절 말씀을 세상에 딱 던졌습니다. 던지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여기서 본능적으로 “나 하나님 안 믿어.” 대번 보이콧합니다. 자동적이에요. 이게 모든 인간의 기본이에요. 인간의 기본 들어갑니다. 인간의 기본. 인간의 기본은 ‘하나님 없이 홀로 사는 것’, 이게 기본입니다.


물론 이 인간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고요. 인간들은 하나님 없이 홀로 사는 것이 기본이에요. 하나님 없이 사는 거에요. 어릴 때는 부모 간섭받지요. 부모를 떠나면 이제 홀로 사는 것이 자기의 잠재되어 있던 자기 본성의 발현. 펼쳐지는 거에요. 네가 신처럼 되리라 하는 그 본성이 어디 가겠어요. 그대로 발현됩니다.


하나님 없이 홀로 살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 없이 혼자 살았으니까 네가 함부로 살거나 경솔하게 살았던 것이 그게 혹시 들킬까 싶어서 자기 관리에 충실해요. 하나님 없이 사는 건 기본인데 그 기본에다가 하나님 없이 너 혼자 살면 얼마나 엉망으로 살겠느냐 라는 소리가 들릴까 싶어서 경솔하게 살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자기 관리에 만전을 다한다.


여러분 주변에 안 믿는 사람 보세요. 이렇게 사는 거 맞지요? 이게 인간의 기본이에요. 인간의 기본. 하나님은 안 믿지만 나름대로의 내가 살아가는 철칙만큼은 내가 확고하다. 이것을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이 형편을 연구를 해 왔어요. 그 연구한 것 그들이 그렇게 많이 연구한 것 이 시간에 짧게 제가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것을 이성의 능력. 인간의 깨달음의 능력. 정신병자 말고 제대로 된 정상적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는 기본양식, 소양, 상식은 갖추고 살아가는데 인간의 기본은 하나님 없이 살면서도 홀로 살면서 막 산다는 소리를 들을까 싶어서 나름대로의 자기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철칙을 세우는 것 이것을 세상 학문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게 인간의 이성의 능력이라는 거에요. ‘이성의 능력’.


그렇다면 그 다음에 이성의 능력이 역설, 모순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떤 모순인지 제가 한번 적어볼게요. 이성에 의하면 이성이라는 말은 깨달음 이런 거죠. 항상 생각하는 것.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항상 생각해서 양식대로 합리적으로 생각. 이성에 의해서 납득되지 않는 것을 배제한 총체성을 이성은 현실 전체로 보는 역설. 이성에 의해서 납득되지 않는 것은 배제하고 뺄 거 빼고 나머지 총체성을 이성은 뭐냐? 현실 전체, 현실 그 자체로 보는 역설이죠.


이게 왜 역설이냐 왜 paradox냐 하면은 뭘 뺐잖아요. 중간에 뭘 뺐어요? 납득되지 않는 걸 뺀 거에요. 이성에 부합되지 않는 것, 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인간은 용서가 안 됩니다. 그딴 걸 왜 믿어. 그딴 걸. 그건 미신이지. 그딴 걸 왜 믿어. 인간의 기본은 하나님 없이 살면서 이성으로 사는데 그 이성이라는 것이 경솔하게 사는 게 아니고 함부로 사는 게 아니고 정신 바짝 차려가지고 남들 보기에 흠 잡히지 않도록 자기 단도리하면서 살아가는 그게 이성인데 그 이성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무엇인가? 납득되지 않는 것을 다 뺐어. 다 뺀 거에요.


비빔밥 먹으면서 나물 다 빼고 먹는 것처럼. 나물 다 빼면 비빔밥이 아니지. 자기한테 안 맞는 것 고사리 같은 거요. 고사리 다 빼고. 전주비빔밥에서 나물 다 빼면 무슨 전주비빔밥이에요. 세상 전부를 안다? 모른다? 모르지요. 다 뺐으니까.


자, 그러면 지금 우리가 누가복음 하는데 누가복음 성경이죠. 누가복음은 신약이고 구약에서 출애굽기 19장 17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모세는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을 만나러 산에 왔다” 이거에요. 한번 보세요. 인간의 기본은 하나님 없이 이성으로 살아요. 자기가 반듯하게 산다는 것을 날마다 자기를 바라보고 사는 건데 출애굽기 19장 17절에서는 모세는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 만나러 시내 산에 왔다.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빼놓고는 이렇게 살아요. 하나님 없이 내가 반듯하게 살면 된다. 반듯하게 사는 그 총체성을 현실이라고 하고 거기 빠져있는 분을 모순되니까 모순되지 않기 위해서 뭘 보충하느냐 하면은 신을 섬기는 거에요.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는 신을 섬기는 거에요.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는.


인간이 하는 것에 대해서 참 제대로 하네, 반듯하게 하네, 바르게 하네, 열심히 하는구나 최선을 다하는구나. 도와줄게. 인간이 납득이 되는 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반면에 이스라엘은 아주 특수한 민족이에요. 이거는 하나님이 만든 민족인데 모세가 사람들을 데리고 어디 가느냐 하면은 하나님을 부르는 게 아니에요. 모세가 하나님을 부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있다는 산으로 가요. 그럼 그 외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은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남이죠.


이건 뭐냐? 상대. 상대가 있어요. 성경말씀은 상대가 있어요. 이 성경 말씀이 “이 소자 중에서 네가 실족케 하면 네 목에다가 돌을 매고 바다에 빠져라” 할 때에 이 말씀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말씀이 아니고 나도 그 말씀에 나도 끼어들게. 그 말씀 실현 장소가 나 말고 하나님이 상대역으로 상대자로 거기서 같이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놀라운 면이에요. 특수한 면이에요.


인간은 홀로 살지요. 이스라엘은 상대자가 있습니다. 이 상대자 어쩔 거에요? 어쩔 거에요? 상대자 없이 성경 말씀 지키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이성의 능력이에요. 성경을 이성적으로 보는 겁니다. 이성적으로 보고 이성적으로 지키고 이성적으로 나는 신자라고 확고한 자부심을 갖고 싶어 할 때 이성의 능력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시내 산에 갔거든요. 거기서 돌판 주고 깨졌습니다. 깨진 돌판. 돌판이 깨졌어요. 하나님이 “이리와.” 하나님이 불러놓고 내가 내 것을 이야기해놓고는 돌판이 깨지는 것을 유도해서 깨져버렸어요. 돌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너희들 사이에 이렇게 관계가 깨어졌다.


이 말은 너희들이 홀로 사는 것이 문제 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원래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했는데 깨어져버린 상태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에게만 너희들은 알고 있어야 된다. 알고 있어야 되는데 그 알고 있으라는 그 말씀을 그냥 “알고 있어라 당부한다.” “예” 이게 아니라. 깨어져버린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으면서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끝까지 깨어졌습니다. 깨져버린 거에요.


그 깨어짐의 극한이 뭐냐?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아를 죽여버린 거죠. 요한복음 14장 10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지금 인간의 기본은 하나님 없이 홀로 사는 거에요.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이 말씀은 너희들이 아무리 홀로 살고 싶어도 너희들 제자들한테는 내가 가만 두지 않겠다는 거에요. 홀로 살고 싶더라도 그 깨어진 돌판을 극복하고 그 깨어진 관계 넘어서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버렸다는 사실을 네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에요. 하나님과 인간관계는 깨졌어요. 말씀 줘봐야 인간은 못 지킵니다.


누가복음 17장 “화 있을지로다 연자 맷돌 해서 빠뜨린다” 이거 인간이 못 지킵니다. 못 지키니까 그 못 지키는 자리에서 내가 너와 만나마. 그러니까 당당하게 물에 빠지고 다시 기어 나올 생각하지 말고 용감하고 물에 빠져버려. 문제는 뭐냐 하면은 내가 물에 빠져서 화가 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홀로가 아니고 상대자로서 주님이 우리를 함께 있다는 것, 만나게 했다는 것 이 사실이 구약 이스라엘 원칙을 그대로 이끌고 있는 거에요. 구약 이스라엘의 원칙을.


다시 말씀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부르면 돼요. 그들은 실제로 애굽 나올 때 여호와 불렀어요. 주님께서 “너 아니야 그거 아니야. 너희들이 부르는 여호와는 너희들의 망상이고 상상이고 내가 진짜 여호와께서 어떻다 하는 것을 내가 보여줄 테니까 너는 사람들 데리고 시내 산까지 와” 와서 뭐했는데? 돌판 줬고 돌판 깨졌습니다. 돌판 주고 돌판 깨졌어요.


거기서 모세와 하나님하고 대화하는 게 나와요.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출애굽기 34장 7절에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죄는 용서해주는데 죄 없다 하지는 않겠다는 거에요. 미치겠어 진짜요. 그동안 우리가 뭘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에요?


우리는 자꾸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하잖아요. “주님 죄가 너무 아파요. 용서해주세요.” “용서했다.” “감사합니다!” 도망가기 바빠요. 왜?? 대구강의에 나오는데 실속 챙길 것을 챙겼으니까. 얻을 거 얻었으니까 도망가면 끝나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도망가지 마. 네가 죄 짓고 도망가는 것은 좋은데 네 죄를 네가 다 갖고 가. 갖고 가.”


구원은 받았는데 죄는 그대로. 왜 그래야 되는가?? 로마서 5장 10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이게 기본입니다. 인간의 기본은 하나님 없이 나 홀로 반듯하게 사는 게 기본인데 성경의 기본은 뭐냐 하면은 로마서 5장 10절 “너희는 내 원수”였다는 겁니다. 내 원수. 너희는 나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그까짓 것 연자 맷돌해서 바다에 좀 빠져도 너 불평하지 마. 그것 가지고 원망하지 마. 하나님 원수인데 원수 값을 해야지.” 원수니까 물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지요. 원수인 주제에 밖에 나와서 까불고 돌아다니지 말고.


그러니까 오늘 누가복음 17장 하는데 17장에서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상대로 어떤 유도리 또는 협상, 타협, 융통성 얄짤 없습니다. 일체 일절 협상이란 게 없습니다. 딜 없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은 주님이 이 말씀에 의해서 주님이 자신이 던진 말씀처럼 바다에 빠지기 때문에 그래요. 스스로 화를 저주받은 자는 어떤 모습인가를 예수님이 스스로 그 말씀에 이런 자는 저주받는다. 알았지? 내가 저주받을게 하고 그 저주받은 말씀을 실효성 있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 저주의 자리에 주님이 먼저 그 말씀 속에 자기가 던진 말씀 속에 자기가 들어가버린 거에요.


그래서 말씀은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은 함께 하는 거에요. 주와 함께 그 말씀 속에 주님이 어떤 입장에 있는가를 같이 체험하는 것. 이게 바로 폭력적으로 나온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 폭력은 우리 때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 아들 때려버리죠. 아들이라고 봐주는 거 없어요. 그냥 말씀이 주는 폭력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 된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가지고 꼼수부릴 생각하지 마세요. 바쁜데 교회 못 가는 거 좀 봐주세요. 고3인데. 모가지에 돌 해서 바다에 빠질라고 수능을 왜 치고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의 내 때죠. “내 때”. 때가 이르렀으니 나는 잡히러 간다. 실컷 누가복음 17장에서 소자 실족케 하면 뭐 바다에 빠진다 아주 폭력적으로 해 놓고는 실제로 폭력을 먼저 말씀에 의한 폭력을 먼저 당하신 분은 예수님 본인입니다. 나는 드디어 때가 되매 46절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은 그렇게 산상설교 쏟아놓고 쏟아놓고 쏟아놓고서는 다 이루었다 하는 코스는 우리는 완전히 재끼고 주님 홀로 그 말씀을 다 이룬 거에요. 죄 용서를 다 이룬 거에요. 부자청년이 잘못된 것은 안 망가지고 영생 얻을려고 한 거에요. 부자청년이 잘못된 것은 이성의 능력으로 영생을 획득할려고 한 거에요. 이성의 능력으로.


말씀 속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말씀을 지켜버려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습니다. 말씀에 폭력이 있다는 것은 생각 못하고 오히려 내가 말씀 잘 지키면 하나님 주신 폭력에서 내가 피할 수 있다고 그게 나한테 도달되지 않을 수 있다고 꼼수를 부리면서 내가 내 몸 사리면서 영생은 영생대로 획득할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이성의 능력으로 영생까지 얻을려고 시도하는 것. 그거는 돌판이 깨어졌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거에요. 돌판이 깨진 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건널 수 없는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거에요.


아까 그 이성의 능력이 뭐냐 하면은 인간이 납득이 안 되는 것은 뺀다고 했지요. 인간이 납득되지 않는 것은 뺀다 할 때 그 빠진 게 뭐냐 하면은 그 빠진 것을 베드로전서 2장에서 이렇게 합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 이렇게 나와요. 건축자들의 버린 돌. 너희들이 뺐지? 너희들이 너희 자신에게 납득이 되고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에이 이건 필요 없어 하고 빼버렸지. 그 쓸데없는 그 돌, 그 돌이 인간에서는 도저히 건너올 수 없는 천국을 이룹니다. 인간의 이성의 힘으로 갈수 없는 천국. 우선 인간들이 뺐으니까 나 이것은 도저히 못 믿겠다고 뺐으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나오면 조치를 하지요. 우리가 안 믿으면 그만이죠.


제가 하나의 예를 들테니까요 저의 질문에 답변을 해보세요. 어떤 말기암 환자가 병원에 누워 있습니다. 의사도 이제 포기했어요. 당신은 일주일내에 죽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지났는데도 안 죽었어요. 보니까 가을철인데 창밖에 잎새 하나가 분명히 떨어져야 하는데 그 다음날도 안 떨어지고 그 다음날도 안 떨어져요. 누가 스카치테잎으로 붙여놔서 희망을 이어가도록 그렇게 했겠지만.


자, 어떤 사람이 말기암 환자인데 창밖에 있는 나뭇가지 저거 떨어지면 나 죽는다고 했는데 떨어지지를 않네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자, 질문입니다. 1번 우리가 그 병원에 간다. 2번 안 간다. 몇 번입니까? 우리가 그 병원 그 사람 구경하러 간다. 2번 안 간다. 안 가지요. 남들이 마지막 희망을 북돋우던 말던 나는 내 일 있잖아요. 그게 무슨 관계있습니까.


예수님이 버린 돌이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마지막 잎새. 그럼 우리는 그 십자가 우리 관심사가 없어요. 왜? 나는 돈 버는 일에 바빠. 아무 관심 없어요. 나는 이성적으로 살 거에요. 혼자서. 이성적으로. 뭐 연자 맷돌 이 성경 안 보면 되고 안 믿으면 돼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홀랑 따먹으면 되잖아요. 그거 쉽지요. 어디서 우리한테 겁박질이야 하고 그냥 선악과 그냥 삼키면 되잖아요. 이제 없지?! 하나님 삼켰으니까 없지요?! 또 다시 우리를 협박하기만 해봐. 지금 이런 형편이라니까요. 이런 형편.


왜? 우리는 이성적으로 사니까. 나 잘난 맛에 살아가거든요. 이스라엘 관심 없습니다. 이 성경도 관심 없고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뭐 관심도 없어요. 언제 하나님 보고 싶어했습니까. 나 살기도 바쁜데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이성 중심의 삶에 주께서 포기하겠습니까? 포기 안하겠습니까? 포기할 주님이 아니지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오늘 누가복음 17장에 나옵니다.


17정 2절 “이 작은 자 중에 하나”. 예수님보고 노골적으로 욕했습니다, 욕은 안 했습니다 라는 말은 소용없게 만들었어요. 이 세상 속에 주님과 연관되어서 관련된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주께서는 돌출하게 출현하게 만듭니다. 일종의 이 땅에 지뢰를 깔아놓아버린 거에요. 지뢰를.


예수님은 너무 위대해서 너무 고귀해서 말을 해도 조심히 말하고 공손하게 공경하며 말해야 된다. 백날 해봤자 주님과 연관되어 있는 상대역, 상대자. 주님과 상대적으로 엮어있는 자를 건드리는 것은 주님을 건드린 게 됩니다. 인간은 예수님이 안보여도 인간은 예수님의 말씀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되어있어요.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의기양양하게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러 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 나사렛 예수잖아.” 너는 지금 나를 믿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 곧 나를 핍박하는 것이고 그게 너에게 뭐로 돌아가느냐? 폭력으로 돌아간다는 거에요. 네가 지금 맨발로 가시를 밟으면 가시가 아프겠어? 네 맨발이 아프겠어?? 맨발이 아프죠. 네가 지금 자진해서 스스로 폭력을 지금 부르고 있다는 거에요. 폭력을. “작은 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이게 뭐냐 하면은 이 작은 자, 보잘 것 없는 자, 대수롭지 않은 자, 있으나 없으나 무시하는 자 신경 안 써도 될 만한 자, 그 자의 상대역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이 작은 자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가느다라한 줄이 연결되어있었던 거에요.


이 시점에서 공식 하나 쓰겠습니다. x+(-x)=0 맞지요? x는 사라지지 않으려는 나. (-x)는 예수님. = 0. 주님께서는 사라지신 분이 아직 안 사라지는 나에게 들어붙어서 나로 하여금 제로, 없어지게 만들어요 이 땅에서. 없어지게 만들어요. 뭐만 남기고 없어집니까? 말씀만. 누가복음뿐만 아니고 로마서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됐다” 이런 거 있잖아요. 말씀만 남기고 사라지는 거에요. 이럴 때 노래 하나 나와야 하는데.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가느냐. 얄미운 사람’


주님은 이렇습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폭력이 작동하고 있었는데 그 폭력의 제공자가 누구냐? 예수님 자신이라는 거에요. 이 세상에 절에 가든 성당 가든 교회 가든 모든 인간은 제거, 사라져가고 있다는 거에요. 너희들은 이성적인 능력으로 악착같이 살고자 하는 것은 있는데 왜 살고자 하는데 왜 살아지지. 아는 게 전혀 없어요. 왜? 나를 살아지게 하는 그것을 내 이성에 납득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다 뺐거든요. 다 뺐는데 뺀 것이 전부 다 복음만 다 뺐어요. 어떻게 빠져도 복음만 삭삭 빠졌는지.


자, 여기까지는 쉽습니다. 이제 어려운거 나옵니다. 어렵습니다. 어렵다고 분명히 예고했어요. 인간의 몸이 있지요. 거울에 비치면 보입니다. 맞지요? 거울에 몸이 비치는 것 맞지요? 거울에 내 자아가 비칩니까? 안 비칩니까? 거울에. 거울 비치니까 영어로 s-e-l-f라고 글자가 막 뜹니까? 그거는 귀신들린 거고. 없지요. 몸만 반사될 뿐이에요. 자아는 거울 봐도 안 비춰요. 셀프. 거울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아는 거울에 안 비치니까 자아는 없는 건가? 자아가 만들어내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인간의 자아를 만들어내요. 시간이 흐름이. 시간 감각이 나는 내가 거울을 보지만 시간은 날마다 나를 보고 있어요. 시간이. 아이고 머리 많이 빠졌다. 많이 늙었다. 좋은 화장품 발라도 피부에 잘 먹지도 않지. 자아가 어떤 거냐 하면은 몸은 이렇게 합니다. 숟가락 들고 밥그릇에 밥 퍼서 숟가락에 실어서 입에 넣는다. 이건 몸이에요 왜? 거울 보면 보이잖아요. 거울 보면 밥 뜨는 거 보인다고요.


그럼 자아는 뭐냐? ‘내가 밥을 먹는구나’ 이게 자아에요. ‘벌써 저녁이 되었네’ ‘어! 6시네’ 뭡니까? 시간 감각. 시간에 휘둘리는 게 자아입니다. 시간에. 그래서 자아는 초조감을 느끼고 자아는 또 언제 죽는가? 또 언제 내가 좋았던가를 생각해요. 이것을 가지고 아까 마태복음 26장에 나왔어요.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것을 때라고 해요 때. ‘time’. ‘때’.


인간은 때에 묶여있어요. 시간에 묶여있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이 세상도 떠나겠지. 몸은 이야기 안 해요. 내가 이야기해요. 내가. 죽으면 세상 끝나겠지 그래서 자살해요. 그러나 인간은 자살해도 때를 못 벗어나요. 왜냐하면 때는 주님이 그 매듭을 주님이 쥐고 있어요. 내 때. 모든 것은 주님이 꽉 쥐고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의 때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때를 경유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판타지라고 해요. 우리말로 하면 ‘환상’.


앞에 피아노 있지요. 피아노가 실제로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니면 환상입니까? 피아노 만지면 소리 나고 있다 하잖아요. 그거는 내 때가 이야기하는 거에요. 내 때가 볼 때는 피아노가 환상이 아니고 사실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의 때를 경유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피아노가 있다 할 경우에만 피아노가 사실이 되고 예수님과 관계없이 피아노는 이것은 주님 보시기에 이것은 환상입니다. 환상이에요. 어렵지요. 잘 이해가 안 되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피아노가 환상인가 실제인가 하다가 가다가 미끄러졌어요. 엎어졌어요. 엎어져가지고 벽에 부딪혀서 머리에 충격 받았어요. 충격 받았어요. 충격 받아가지고 충격 받은 상태에서 기어가가지고 피아노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건 뭡니까? 이게 뭐더라? 이게 뭐더라? 몰라요.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환상이 아니고 실제라는 것은 나를 경유해서 나한테 의미가 될 때에 실제가 되거든요.


내가 피아노라고 할 때 피아노가 되었다 할 때 의미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언어에서 나와요. 인간 언어.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세상을 구성하게 되어있습니다. 어린애들 보면 언어를 통해서. 그래서 인간이 언어를 붙인 것은 다 진짜 있는 것이고 언어를 붙일 수 없는 것은 인간들은 환상으로 간주해요. 귀신, 성령, 악령, 천국, 에덴동산 전부 환상이에요. 인간세계에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용서받는다? 미쳤어! 내 죄는 착해야 분량 나눠서 나쁜 것보다 착한 게 있어줘야 플러스 마이너스 해가지고 착한 거 많이 남아있을 때 착하다 하는 거야. 착한 일보다 나쁜 일 많이 남아있으면 나쁘다 하는 거야. 이거는 인간이 자기가 알고 있는 선악체제, 그 윤리도덕 그리고 거기서 교육받은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그렇게 그걸 현실의 총체로 본거에요. 아까 했지요. 이성은 뭐다? 납득 안 되는 것은 빼버리고 납득되는 것만 전부 다 끌어 모아서 현실의 전부로 본 거에요.


거기서 무슨 귀신이 나오고 무슨 악령이 있습니까. 악령은 언어를 못 붙여요. 왜? 있어야 붙이지. 있어야. 피아노는 언어를 붙였잖아요. 주님의 때는요 잘 들으세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의 때는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원수에게 주고 되받아오면서 획득한 의미에요. 따라서 인간은 피아노라는 말할 자격이 없어요. 왜? 목에 돌 묶어서 바다에 빠진 인간이 더 이상 피아노란 말은 피아노를 왜 지금 나한테 물어. 본인이 켁켁 하고 있는데. 내가 땅에 살아야 피아노고 컵이고 의미가 있지 내가 지금 죽을 판에 없지요.


성경 말씀에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모든 저주는 모조리 거기에 달려 질주하고 있어요. 우리는 저주의 대상이 되는 거에요. 저주의 대상이 피아노, 걸상, 의자에 앉았다, 기타가 있다 이게 무슨 우리한테 의미가 있습니까. 자기도 죽을 판인데. 불 속에 들어갈 판인데요. 그럼 어쩌라고 우리 보고 어쩌라고 이렇게 하겠지요. 저 피아노가 있는데 주께서 주신 피아노다 이러면 된다 이 말이죠. 모든 것을 여기 카메라 있는데 주께서 주신 카메라.


그러면 이 말은 점점 더 응용하면 이 몸은 어떻게 돼요? 주께서 주의 말씀을 말씀대로 말씀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 쓰여지기 위해서 주신 몸, 이러면 내 몸은 판타지가 아닙니다. 환상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실제가 되는 거에요. 뭐 그리 복잡해 하면서 짜증낼 거에요. 이스라엘이 복잡했어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그렇게 복잡했다고요.


배고프지? 예. 만나줄게. 예. 안식일날 만나 먹으러 가지 마라. 복잡해요. 그냥 배고프지? 예. 나 사랑의 하나님 먹을 거 줄게 이러면 게임 끝나잖아요. 그 만나가 만나가 아니고 말씀이랍니다. 왜 그 의미가 왜 거기 붙습니까? 어디를 경유해서 의미가 또 추가해요? 요한복음 6장의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은 모세를 통해서 하늘에 내려온 만나를 먹었지? 그건 생명의 떡이 아니야. 주님께서 복잡하게 이야기해요. 복잡하게. 좀 알아듣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복잡하게 이야기한다고요.


생명의 떡은 뭡니까?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하는 말이 “사람이 사람의 살을 먹어요?” 박수 또 치게 됩니다. “바로 그거야. 너희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 ‘이성적인 능력을 가진 자들은 두 번 다시 예수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리라’ “우리 예수 빼고 가자. 빼고 갑시다.” 주님께서 베드로 보고 제자들 보고 “너희도 갈래?”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도 몰라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모르거든요.


마태복음 16장 한번 찾아봅시다. 16장 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자, 이성의 능력으로 혼자 살려고 하는 인간이 이걸 왜 고백합니까? 이걸 왜 고백해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분리시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베드로야 네가 한 거 아니다. 너는 이성의 능력이야. 네가 한 거 아니야. 그건 내 아버지께서 하게 하신거야”


그럼 베드로는 뭡니까? 고백을 했는데 이 자아, self, 자아가 한 게 아니에요. 그러면서도 자아는 또 있어요. 왜? 고백한 당사자가 나니까. 이 말은 뭐냐? 시몬이 아니에요. 뭐냐? 시몬 베드로. 시몬에서 베드로 변할 때 누구를 경유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하나님의 원수로 정죄하면서 그 죄를 죄대로 그대로 두면서 죄 사함을 주는 거에요.


베드로로 하여금 성령 받고난 후에 베드로가 갑자기 요한 되고 이런 거 없어요. 베드로가 성령 받아도 요한이 안 된다는 사실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요한복음 21장에 나옵니다. 너는 나중에 원치 않는 곳으로 갈 것이다 하니까 베드로가 그 다음에 옆에 보더니만 누구부터 봅니까? “쟤는요?” 이랬다고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베드로하고 요한하고 같지 않아요. 따로 있어요.


따로 있는데 ‘서로 사랑하라’ 했다고요. 이건 어딜 경유하느냐 하면은 상대역, 너도 주님의 소자고 나도 주님의 소자인데 이게 주님의 소자가 돼야 돼요. 너는 내 똘마니 되고 이런 거 하면 안돼요. 당신은 내 부하고 이런 거 하면 안돼요. 반드시 주님을 경유해야 우리는 돌 목에 매고 바다에 허우적대고 있다는 것을 아주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어요. 죄 그대로 있으니까. 앞에 계속 죄가 나오니까.


나는 누가복음 17장 2절의 말씀 못 지키고 못 지킨 그 자아, 다시 말해서 죄가 있는 자아를 십자가를 경유해서 새로운 자아로 내가 눈이 띄인 거에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이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어느 말씀 하나 나보고 못 지킨다고 지킬 수 없다고 주신 말씀이에요. 왜? 하나님의 원수니까. 여기 무슨 협상이 있고 무슨 타협이 있습니까? 좀 더 쉬운 거 주면 지키겠습니다 이러지 마세요.


이거 하고 첫째시간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1장 하나님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로마서 1장 32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아멘. 자, 사형에 해당되는 거에요. 사형. 사형에 해당되는 것 29절에 불의, 추악, 탐욕, 모든 인간 다 포함돼요. 사형이죠.


그런데 그 사형에 사형을 받는 것을 성도는 왜 기뻐하느냐 하면은 주님의 십자가 의미로 경유해서 ‘구원받는 나’가 되기 위해서 그 사형 받은 자리에 주님이 먼저 가있고 우리 보고 우리 자신을 너는 사형 받아야 합당해. 왜? 말씀이 그거니까. 끌어당겨서 주님을 증거하는 상대자로 삼아줬을 때 이 로마서 1장 32절은 너무나 자랑스러운 말씀이 되는 겁니다. 너무나 당당한 말씀이 되고 고마운 말씀이 되고요. 어제부로 죽어야 되는데 또 사형수 하라고 또 살게 하는군요.


어떤 분들은 옷을 입을 때 이렇게 세로줄 있지요. 그거 말고 가로줄 입은 사람 있어요. 주로 각 나라의 죄수들이 이런 옷 입어요. 가로 줄. 흑,백, 흑,백 가로줄. 세로줄은 주로 바리새인들이 입어. 사형수로서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죄 아닌 구석이 없다는 것을 웃으면서 당당하게 살아가시면서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7장 2절 (상대역) 2300522b-이근호 목사



말씀을 누구한테 줬는가? 사람에게 줬는가? 아니면 사람의 나라에게 줬는가? 그 문제가 바로 3절에 나오는 “회개하라” 입니다. 회개라고 했을 때 회개하라 라고 외치는 것은 뒤에 붙는 게 있어요. 마태복음 4장 17절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유명한 말씀.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공간 교체. 공간을 교체하는 거에요. 인간은 홀로 있는 게 아니고 어떤 세력권 안에 갇혀있다고 보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말씀은 인간에게 준 것이 아니고 인간의 나라에게 준거에요. 인간의 나라에. 인간의 나라니까 인간들이 있다면 인간들은 어디에 속하느냐? 힘. 힘에 속해있는 거에요.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을 힘이 덮어쓰고 있습니다. 이 작대기는 힘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데 공간은 힘에게 나아갈 수가 없어요. 그냥 지배를 받아야 돼요. 지배를 받아야 돼요.


이거는 현대인,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매일 일상을 이걸 겪어요. 일상을. 분명히 행동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자꾸 뭔가 의식이 되는 거에요. 회사가면 사장님의 지시가 의식이 되고 사장님은 자기 집에 갔는데 김부장 남아서 잘 하는 거 알지? 전화 한통 했다고요. 사장은 집에 가고 이 사원은 사무실에 자기 혼자 밖에 없는데 뭘 해야 돼요. 뭘 해야 된다고요.


고3이니까 내가 교회 못가는 거 이해해줘. 고3이다. 수능 앞두고 있어. 수능이 뭐에요? 수능이 뭔데? 왜 도대체 인간의 내 행동 하나하나가 누가 통제하는 거야? 내가 통제한다? 아닌 거 같아요. 내가 통제하는 게 아니고 이미 정해진 체제가 있어요. 체제. 그 체제가 나를 정신적으로 이미 지배하고 있고 억압하고 있는 거에요. 공간적으로. 이 힘. 인간은 힘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같이 풀이하게 되면 인간의 주체는 여기 갑자기 자아 아니고 주체 나오지요. 자아는 거울 앞에 있을 때에 몸만 보이고 ‘저게 나다!’ 할 때 그걸 자아라고 하는 거에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봐 저기 거울에 있는 것이 너야’ 라고 이야기하는 나. 그게 자아에요. 에이 목사님 자아는 없지요. 없으면 그럼 돌멩이하고 당신하고 차이점이 뭔데? 돌멩이하고 우리하고 차이점이 뭐지요? 돌은 자기가 돌인 것을 모르고 인간은 자기가 인간인 걸 알잖아요. 그 안다는 게 앎의 주인공이 자아에요. ‘자아’.


그런데 자아가 사회에 나가니까 밀리는 거에요. 왜? 자아는 주인공이 아니라 종이에요. 이 사회의 종이에요. 이 사회가. “뭐를 할깝쇼? 마님!” 하잖아요. 사극에. 아침에 일어났다. 마님을 만났다. “마님 오늘 뭐할까요?” “골목길 빗자루로 쓸어야지.” “예~~!” 그러고 고봉밥 한 그릇 얻어먹는 거에요. 예산의 국밥집 있잖아요. 예산의 국밥집. 백종원이 좀 도와주니까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거부했잖아요. 그래서 망했잖아요. 내가 30년 동안 했는데 네가 뭔데 종 부리듯 하느냐. 네 조언 필요 없다. 백종원이 철수하겠습니다 해서 철수해서 망했어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왜 그 유투버들이 백종원의 말을 들었으면 예산의 국밥집 지금 다 잘 먹고 잘 살고 자식들 잘 될 텐데 백종원 떠나버리고 망했잖아. 이건 무언의 압력이죠. 무언의 압력. ‘너 토익 몇 점이야?’ ‘370점인데요.’ ‘너 그래서 어디갈라고. 900점 만점에 적어도 790은 돼야 어디 명함 내지.’ ‘그럼 우리는 토익 안 치면 되지.’ ‘선악과 따먹으면 되지’ 하고 똑같은.


토익 안치면 되지. 그러면 너 워드할 줄 알아? 그거 귀찮은데 안하면 되지. 그래? 영어회화는? 영어회화 안하면 되지. 잘한다. 그럼 너 뭐할 줄 아는데? 아무것도 없지요. 뭘 할 줄 알아야 사회에서 써먹을 거 아니겠습니까? 사회가 요구하는 진리가 있는데 인간은 진리에 대해서 결여, 모자람이 있어요. 이게 뭐냐? 이걸 가지고 불안의 공식. 두려움의 공식. 바들바들 떪의 공식. 조마조마함의 공식. 알 수 없는데 뭔가 편하게 맘 편하게 못 사는 공식.


자아는 내가 들어있지만 주체는 타인의 시선, 타인의 요구조건이 들어있습니다. 타인의 명령이 들어있습니다. 타인의 명령. 회개하라는 말은 지금 이 공간 이 타인이 지배하는 힘, 악마죠. 세상 신, 지배하는데서 네가 돌아서라. 회개하라는 뜻이 돌아서라는 뜻이에요.


자, 돌아서면 방향이 어떻게 됩니까? 이건 대구강의 때 했는데 방향이 반대방향으로 가잖아요. 반대방향. 반대방향으로 가니까 거기서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은 이 세상 전부를 몽땅 심판할 하나님 나라가 침노하고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침노하는 것. 마치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뭐를 느꼈어요? 저 바깥의 이스라엘이 이 여리고성을 향하여 침노하고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알게 된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것은 시간 끌지 말고 나중에 늙어서 교회 다닌다고 하지 말고 미리 일찍 진리를 접해야 돼요. 진리와 접해야 돼요. 일찍 다른 말로 조기. 조기학습이 그만큼 중요한 거에요. 조기학습이. 일찍 접하는 건데 진리를 일찍 접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게 바로 5절 6절 이거부터 하고 4절 말씀드리겠습니다.


5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렇게 나오지요. 자, 여기서 믿음, 그것도 아주 작은 믿음. 작은 믿음이라고 했거든요.


예수님께서 작다고 이야기할 때는요 있다 없다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할 때 작다는 표현을 해요. 있다 없다. ‘작다’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쪽에서 믿음이 없는 쪽을 바라볼 때 나오는 안목이 ‘작다’에요. 이미 믿음이 들어온 쪽에서 믿음이 없는 쪽을 볼 때 그 없는 쪽과 있는 쪽의 그 경계선 상의 그걸 ‘작다’로 표현한 겁니다.


오늘날 쉽게 말씀드리면 믿음이 적고 크고가 없어요. 믿음은 있느냐 없느냐 둘 중에 하나에요. 믿음은 있던지 없던지 둘 중에 하나지 적게 있고 많게 있고 그런 건 없어요. 없는데 믿음이 있는 쪽으로 할 때에 믿음이 있는 쪽에서 없는 세계가 있다는 걸 말할 때 작다는 표시를 해서 경계를 표하는 거에요. 이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니까 한번 봅시다.


7장에 47절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사함을 적게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을 받은 자 입장에서는 용서를 모르는 것은 아예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해요. 사랑받으면 무조건 사랑받은 거고 사랑 안 받으면 무조건 사랑 안 받은 거에요.


그러나 주님께서 지금 이야기는 십자가 이후에 사도 바울 편지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예수님은 십자가 지고 가시는 거에요. 사람들이 자꾸 믿음 있다 회개한다 사랑받는다 하니까 내가 그 사랑, 믿음 내가 점차 점차 사라지게 만들어줄게. 너희들이 사랑 있고 믿음 있다 하니까 내가 너희들이 사랑 없고 믿음 없는 쪽이 어느 쪽인지를 내가 믿음 있고 사랑 있는 쪽으로 건너가면서 점차 점차 이 세계가 아예 믿음이 없고 사랑도 없다는 것을 내가 보여주마.


그 일이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갈라서게 해버리죠. 완전히 건너갈 수가 없지요. 자,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오늘 누가복음 17장에 사람들이 제일 궁금한 것 중에 하나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는데 이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라고 하겠지요. 아 믿음은 말로 하는 것보다도요 실제로 제가 모션 취하는 게 좋아요.


여기 옷이 있잖아요. 옷을 이렇게 벗어놨어요. 벗어놓고 옷이 땅에 흘러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민군들이나 강도가 와가지고 게 섰거라! 이 목사 거기 서라. 너 죽여버릴래! 내가 이렇게 앉아있는데 옷에다가 너 죽어! 너 죽어야 돼! 총 쏴! 두두두두두두두. 옷에다가 쏘는 거에요. 옷을 밟고. 죽어! 죽어! 죽어! 어떠냐? 예 총 많이 맞았습니다. 방탄도 없고 다 찢어졌습니다. 가자! 우리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러고 갔어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미쳤나?! 나 멀쩡한데 남의 옷에다가. 이렇게 해야 할까요? 아니면 윽윽윽 이렇게 해야 할까요? 이게 믿음 있는 거에요. 윽윽 아 아퍼! 왜 갈빗대를 때리는거야. 나 총알 너무 아팠잖아. 이런 거. 이걸 다섯 자로 ‘웃기고 있네’ 이거거든요. 믿음이란 나랑 전혀 상관없는 것을 가지고 닦달 내는 것.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을 닦달 낼 때 그걸 물끄러미 보는 것, 이게 믿음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를 자기 공간에 집어넣고 옛날 우리를 예수님 자신의 증인으로 상대역을 삼았기 때문에. ‘상대역’. 상대역으로 삼았거든요. 영화 찍어봤어요? 영화 찍을 때 평소에 감정 안 좋은 두 사람이 상대역으로 만났어요. 감독이 미리미리 연습해가지고 합을 보세요. 주먹 이렇게 가면 피하고 됐지요? 잘하네. 실제로 할 때 잘 피하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감정이 있어서 줘 패버렸어요. 대번 감독이 뭐합니까? 컷! 하지요. 컷! 하지요.주님이 컷! 하는 거에요. 네가 믿음 생활하지 말라는 거에요. 네가. 왜냐하면 너는 자아일 뿐이에요. 주체라고 하는 것은 이 공간에서 십자가의 힘으로 행동할 때 자아가 아니고 주체가 되거든요. 주체는 뭐냐 하면은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거에요. 이게 사도 바울 편지에 한두 번 나오는 게 아닙니다. “네가 뭘 하든지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라”


지난 주일 낮 설교에 디모데후서 나오지요.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왜 사로잡히겠어요. 우리보고 하라고 사로잡히겠어요? 주께서 하라고 사로잡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이 공간, 힘. 공간에서 우리 주체가 있고 힘은 진리와 결합이 되어있다. 이 말은 힘은 이 세상은 악마입니다. 악마거든요. 악마는 우리에게 진리를 요구해요. 성경말씀이든 이성적 윤리든 도덕이든 하면서. 우리는 뭘 느낍니까? 결여를 느끼죠.


그럼 우리는 이 세상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작업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거에요. 왜? 악마가 나의 주체가 되어가지고 완벽의 완벽을 더해서 철저하게 살아야지. 인간답게 살아야지.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고 사는 것이 인간된 도리지. 계속해서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부모한테 그렇게 하면 안되지. 끊임없이 끊임없이 하지요.


어떤 가정은 생전 부모한테 효도 안 하다가 부모가 이제 곧 죽어서 콧줄을 빼야 하는데 효도 한답시고 계속 콧줄을 꼽는 거에요. 부모는 누워서 “야야 나 이제 죽을 때 됐지?” “아닙니다. 한 5년간 더 살아야 됩니다.” “지금 몸이 다 망가진 판인데 5년간 살라고?” 그래야 사람들이 저 자식은 부모 잘 섬겼다 라는 소리를 할 테니까 부모는 그냥 우리 시키는 대로 콧줄 꽂고 지긋지긋한 세상 고생이나 실컷 하다 죽으세요. 이런 식으로 효도할라고 하는 거에요. 왜 그런 짓해요?


인간 속에 있는 양심이 타인의 요구이기 때문에. 완벽을 요구하는 요구가 힘으로 이렇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인간의 subject. 자아는 self에요. 셀프지만 세상에 나오면 나를 인정하지 않아요. 나 잘났습니다 그거 인정하지 않습니다. 네가 어느 공간에서 어떤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느냐?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느냐?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서 옷도 깨끗하게 입어야 되고 모든 것을 절도 있게 해야 되고 남을 항상 의식해서 살아가는 것, 그게 사회성 있는 존재. 사회성 있는 존재로 인정받는 거에요.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주체 안에 들어올 때 이제부터 좀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악마가 악마의 세계에서 자, 악마의 세계를 다시 설명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회개하라는 방향을 다른 방향을 보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무슨 뜻입니까? 네가 속해있는 나라가 천국이 아니고 천국 근처도 안 갔고 너는 맛본 적도 없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에요.


단절된 세계에서 천국은 침노하는 거니까. 기생 라합이 여리고 성에서 이스라엘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정탐꾼이 오면서 벌써 낌새를 느꼈지요. 이 참에 붙들자. 이 참에 붙들자. 내가 배신자 되도 좋고 변절자도 좋으니까 좋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가 오게 되면 이 세상은 힘으로 완전히 박살난다는 사실. 얼마나 폭력적이겠어요. 말씀대로 실행해버리면 폭력이 되고 그거는 와해가 되고 불바다가 되지요. 노아 때 물바다 된 것처럼. 불바다 되는 거에요. 이성의 능력으로 반듯하게 사는 것 다 물에 다 휩쓸려가고 불에 다 태워져요.


제가 지난 낮 설교 때 제 나름대로 굉장히 느낀 점이 뭐냐 하면은 지옥 간 부자가 지옥 가도 자기의 바닥을 모른다는 사실이에요. 지옥 갔는데도 아직도 물 없다고 땡깡부리고 있는 거에요. 물 없다고. 심부름 시키고 있다고요. 그 개 버릇 어디 안줘요. 부자라는 것은 뭐냐?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우대했잖아요. 그 우대한 주체가 그냥 갔는데 지옥으로 간 거에요. 이 세상 삶과 똑같은 삶이 지옥이에요.


이 말은 뭐냐? 지옥 삶이 미리 땡겨서 이 세상을 만든 거에요. 이 세상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탈출이 안 되지요. 이 세상에서 누가 탈출해요. 탈출이 안 되지요. 그냥 지옥 생활이에요. 이 세상이.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폭력적으로 이야기하지요. 너는 하나님의 원수다. 경건치 않다 이야기해도 덮어버리면 그만이지. 우린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끝난 거에요. 마치 선악과 따먹으면 그만인 것처럼.


악마의 세계에서 뭐가 오느냐 하면은 천국이 오는데 천국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은 천국은 이스라엘의 언약에서 와요. 언약에서. 이스라엘. 악마의 세계가 뭐냐? 이스라엘이에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바로 악마의 세계 왕 이름이 뭐냐 하면은 헤롯이거든요. 헤롯 이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줄 알아요? 아기 예수, 동방박사 죽일려고 한 사람이에요. 엉뚱한 베들레헴 두 살 애들 다 죽였잖아요.


예수님께서 이 왕을 여우라고 해요. 여우.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고 짐승으로 간주해요. 만약에 생각해보세요. 지금 대통령실에 사람이 앉아있지 않고 여우가 앉아있다고 봅시다. 그러면 여우님, 9시 뉴스 드리겠습니다. 여우는 윤여우는 자꾸 사람들을 짐승 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이 악마의 나라가 인간을 그렇게 주체화 시켜놓은 거에요.


그럼 사람은 어디 있느냐? 사람은 인자지요. 인자. 사람은 예수님만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은 사람 아니에요. 그건 죽어 마땅한 흙이 되는 거죠. 사람들이 성경 안 볼 이유가 충분하지요. 이 천국이 온다는 것은 없어요. 천국은 밀려와야 접촉이 되는 것이지 우리 쪽에서 천국은 갈 수가 없는 겁니다. 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방향을 바꿔야지요.


그럼 회개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회개하면 구원받는 게 없어요.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고 우리의 이 자아에 구원이 없고 자아는 예수님이 와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예수님의 타자, 절대적인 타자로서 우리를 삼켜버릴 때 예수님의 능력이 올 때 구원이 덮치는 것이지 구원이 덮치는 거에요. 구원이 내가 가지는 게 아니고.


십자가가 덮치고 예수님이 덮치는 것이지 여러분 가지는 게 편해요? 덮치는 게 편해요? 덮치는 게 편해요. 가지게 되면 이건 나중에 자꾸 잊어버려요. 여기 넣어놨는데 어디 있지? 구원이 여기 있나? 덮치게 되면 공간 자체가 무슨 짓을 해도 동서남북 어디 가도 예수 안이에요. 소자야 주님이 어느 곳에 있는지 언제 있는지 찾아라. 주께서 성도에게는 이 세상에 주님께서 출현하고 계시는 곳이 있어요.


그래서 주님 계신 곳이 있을 때 아까 피아노를 예를 들었지만 주님 계신 곳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 나라에 의인이 있어요. 주님 나라에. 의인이기 때문에 이 소자를 건드리는 것이 누구를 건드리는 것이다? 주님의 몸을 건드려서 주께서 폭력으로 나서는 겁니다. 우리는 매사를 통해서 주님의 하신 일을 주님과 만나면 돼요. 모든 일을 통해서.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이 몽땅 복음의 세계에요. 성도에게는 몽땅 복음의 세계고 불신자에게는 몽땅 지옥의 세계고 그래요. 어떤 것도 예수님을 경유해서 주신 거에요. 저 피아노부터 보리차부터 이 물까지 주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증거하라고 주께서 주신 거에요. 그걸 대구강의에서 이렇게 했지요. 살아있으면서 주님께 충성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지시가 있어서 그 지시를 따르기 위해서 시간을 계속 늘리고 있다고요. 주의 지시가.


그 주의 지시가 뭔데? 살아보세요. 살아보게 되면 내 의미가 맨날 주님을 경유해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의미가 새롭게 우리에게 부어주지요. 그게 바로 예수 안입니다. 일종의 돔 구조. 돔 구조. 덮어씌우는 예수 안에 있어요 우리가. 만화에 그런 만화 있잖아요. 사람 하나 가게 되면 볼록 볼록 볼록. 전부 다 이렇게 뒤집어씌우듯이. 예수 안에 너도 예수 안에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을 욕하면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튕겨나가버려요. 튕겨나가는 거에요. 저 사람은 이렇다 저 사람은 죄 지었다. 누가 정죄하리요. 튕겨나가버리지요. 정죄하는 네가 정죄 당한다. 튕겨나가버리죠. 방탄유리. 이건 벤츠 차보다 더 단단한 방탄유리. 다 이루었다. 심지어 어떤 죄와 사탄과 율법과 죽음과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공간. 이 공간에서는 우리는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냥 이 죽은 자가 껍데기에요. 껍데기. 새로운 주체를 부여받기 때문에 껍데기인 거에요.


그래서 그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승리했느냐 하면은 세상 권세가 예수 믿는 사람 죽여요. 목 베어 죽인다고. 죽였는데 그게 승리에요. 내가 갖다버린 목숨을 왜 저렇게 짓밟고 난리지? 내가 나하고 상관없는 거에요. 악마의 나라에서 인간에게 악마가 시키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너는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이것 때문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처참한 지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게임 때문에. 누가 주인공이라고요? 내가 주인공이 된 게임. 내가 주인공인 게임. 주님께서는 이렇게 합니다. 성도냐? 예. 그럼 이 게임에서 져버려라. 이 게임에서. 그 게임판에서 나오면 되는 거에요. 컴퓨터 게임 졌다고 울게 아니라 그 게임 안하면 되잖아요. 어떻습니까? 제 생각 어때요? 괜찮지요?!


마약하지 말고 프로포폴하지 말고 마약 안하면 되잖아요. 참 쉽지요?! 왜 마약합니까? 본인이 주인공이고 싶어서. 본인이. 이걸 가지고 제가 오후 설교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기억나십니까? 네 자로 이야기했어요. ‘가족소설’. 인간은 누구나 가족소설을 쓰고 있어요. 술 한잔 먹고 친구 만나가지고 나중에 술 얼큰하게 취하면 네가 나 우습게 보지만 나 살아온 걸로 소설책 10권은 쓴다. 소설 책 아무나 쓰니까. 이게 뭡니까? 평소에 나는 내 스토리 내 소설의 주인공에서 발을 못 빼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 이야기입니까? 누구 이야기의 등장인물입니까? 우리는 예수님 이야기의 등장인물입니다. 저런 쪼다가 구원됐다. 저런 세리와 창기도 구원됐다. 주님의 소설의 등장인물 되는 새로운 공간에 속하는 겁니다. 새로운 공간에. 그 새로운 공간에서 드라마에서 우리가 역을 맡을 때 우리는 의인 역할입니까? 죄인 역할입니까? 연자 맷돌 몰라요? 우리는 철저하게 죄인 역할이죠.


그게 어디 나오느냐 4절에 나옵니다. 3절 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여기서 용서하는 주인공은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이고. 왜? 예수님이 새로운 말씀의 공간의 주인공이니까요. 그리고 돌아온 자는 누구입니까? 회개하고 돌아온 자, 성도지요. 성도인데 이게 몇 번입니까? 일곱 번.


나는 잘못 없는데 옷이 옛날 놀던 가락이 있어 옷이. 자꾸 옷이 잡아당겨. 참 핑계도 참 멋진 핑계죠. 나는 안갈 건데 옷이 잡아댕겨. 그러니까 주님께서 뭘 알아요?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 너는 계속해서 타고난 육신으로서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잠재성을 갖고 있는 이 옷, 옷 있지요. 결국은 옷을 벗게 되거든요. 이 옷 같은 존재가 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준비는 뭐가 준비되어있어요? 용서가 준비되어있는 거에요.


단 조건은 뭐냐? 죄만 갖고 와야 돼요. 자기 잘난 거 가져오면 안 됩니다. 의를 갖고 오면 주께서 그걸 죄로 바꿔버려요. 교만의 죄로. 하여튼 간에 용서가 용서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어떤 흠집도 가질 자격이 우리에겐 일절 없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소자에요. ‘소자’. 그게 바로 종입니다. 그게 소자고 종이에요. 소자부터 이야기하고 종 이야기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잠시 한번 보겠습니다. 소자가 어느 정도로 작은 자인지 여러분 상상도 안 갈 겁니다. 어느 정도로 작으냐 하면은 이렇게 작습니다. 25장 35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이건 누구 이야기죠? 예수님 이야기죠. 그런데 소자 한번 보세요.


37절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오히려 되묻지요. 되물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상대역이에요. 상대역.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상대가 있어서 그 상대와 주고받고 살아가는 거에요. 물을 수 있는 대상이 있어요. 주여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물을 수 있는 것.


자, 소자가 언제 그렇게 했다는 말은 소자의 자아의 기억 속에는 시간 속에 있는 자아로서는 기억이 없어요. 이거는 다른 공간 주님의 때, 십자가를 경유할 때 비로소 주님의 답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답을 몰라요. 오늘 본문을 쉽게 하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 제가 엉망으로 살았지요. 이렇게 물으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 엉망으로 산 것 내가 그렇게 한 거야. 나를 위함이야. 이 주고 받는 상대역.


아 정말 성경 말씀이요 이 공간 하나 바꿨을 뿐인데 기존의 공간 말고 다른 공간을 했을 뿐인데 다른 쪽의 공간, 이쪽 말고 다른 쪽의 공간에서 이런 공간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공간을 사도 바울이 경험했다는 거에요. 사울에서 바울 될 때 이 공간 속에 들어온 고백을 사도 바울이 쓴 모든 편지 속에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로마서 4장에 나오잖아요. 우리는 뭔가 한 게 있으면 값을 얻을 텐데 우리가 “일한 것도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자의 복이여” 이렇게 되어있어요. 일한 것도 없다. 일한 것도 없다고요. 이런 소자가 어디 있어요. 어느 정도로 작은 자냐 하면은 아는 것도 아무것도 없는 소자. 다시 말해서 소자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존재. 나에 대해서. 그게 주께서는 소자라고 불러줘요.


왜냐 하면은 주님께서 소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는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필요없다.’ 그게 상대역이 죽이 맞는 거에요. 주님하고 소자하고. ‘제가 주를 위해서 충성을 했나이다.’ ‘그 입 다물라! 네가 뭘 했든 상관없어. 다 내가 한 거야.’ 기생 라합이 ‘여호수아님 제가 기생질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입 다물라! 내가 그걸 묻더냐!’ 정탐꾼이 빠져나간 그 경로를 보지요. 그 경로. 붉은 줄을 보지요. 이 땅에 왔다 빠져나간 그 붉은 줄. 주께서 이 땅에 와서 흘린 십자가의 피. 주께서는 어린양의 피 그것만 보는 거에요.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우리를 죄인으로 태어나고 하나님의 원수된 자로 태어난 거에요. 로마서 5장 10절에. “원수된 자였고 경건치 않는 자였고”


지금 이만큼 강의했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봅시다. 처음으로 돌아가면 인간의 기본은 뭐냐? 혼자 살고 싶어요. 혼자 사는데 엉망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반듯하게 제대로 살아요. 그런데 문제는 혼자라고요. 혼자. 문제는 혼자에요.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서 개나 키우고 인공지능이나 키우고. 상대역이 없어요. 주고받는 게 없어.


자, 그 다음에 종. 17장 7절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렇게 되어있지요.


여기 분명히 예수님께서 종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뭐냐? 십자가 지시기 전에 이스라엘이 어떠해야 되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인데요 좀 난해해서 도표로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없습니다. 이스라엘 없을 때에요. 이스라엘 없을 때 아브라함이 있었어요. 아브라함 있을 때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계약하기를 나를 믿으면 의가 된다 했습니다. 나를 믿으면 의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는 믿을 그게 없어요. 믿음이 없어요.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중간에 하나님이 상대역으로 아브라함 말고 누굴 줬느냐 하면은 이삭을 태어나게 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까지 믿음을 만들어서 믿어서 복 받게 하시는 것까지 하시는 거에요. 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는 것을 이삭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삭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에 뭐냐? 아브라함 자손을 줘요. 아브라함 자손을 주는데 이 분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쳐서 네가 진짜 믿음으로 의롭다할 때 그 믿음이 믿는구나 할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거에요. 그럼 이건 무슨 사건이냐 하면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사건 속에 둘 다 공간 속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다 들어가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육에 속하고 이삭은 약속에 속하죠. 약속에 속한 주도권을 쥐고 아브라함을 이삭을 보내서 끌어당기는 거죠. 끌어당긴 거에요. 거기서 뭐가 나왔다. 이런 행위 자체가 믿음으로 나온 거에요. 그러면 이 믿음은 이삭을 보내줌으로서 파생된 거죠. 이삭이란 약속 안에 들어 있던 믿음이 아브라함까지 상대역으로 이삭의 상대역으로 아브라함을 고른 거에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뭘 믿었느냐 하면은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거에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장차 내 후손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삭 같은 약속이 온다는 약속을 믿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아브라함이 예수님 올 때를 알고 보고 기뻐했다” 했어요. 보고 기뻐했다.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안 되는 거죠.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이죠.


똑같은 원리로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하면 인간은 자꾸 말씀을 지킬려고 해요.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말씀을 못 지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게 어디 있느냐? 중간에 나와요.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누굴 보내느냐? 모세를 보내가지고 모세 역할이 뭐냐? 율법의 전달자에요. 율법의 전달자. 율법을 줘버리면 율법을 주니까 인간들은 믿음도 없으면서 뭐하느냐 하면은 ‘야! 우리가 믿음으로 살자.’ 율법 지키는데 주르륵 나서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율법은 선악체계에요. ‘선악체계’.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게 되어있어요. 선악으로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의 본능에 있는 선악체계 우르르 나오는 거에요. 쭉 나와가지고 율법으로 하니까 율법대로 하니까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율법의 종이 되어버린 거에요. 율법의 종. 이쪽의 시작은 아브라함은 아들인데 이삭은 아들인데 아들로 개통을 하면서 뭐를 경유하느냐 종을 경유해서 아들 되게 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거에요. 종을 통해서.


왜 그렇게 하느냐? 인간은 아들 될 자격이 없다는 거에요. 그냥 율법의 종이 되는 거에요. 법의 종. 율법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미 저주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율법을 준 거에요. 율법은 인간에게 준 것이 아니고 마귀. 마귀야 네가 인간을 꼼짝 못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 그 법칙 있잖아. 그 법칙 너 폭로해라.


그래서 율법을 주게 되면 악마가 율법을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무능력하게 인간의 그 율법을 못 지킨다는 사실을 가만있는 죄가 들고 나와서 인간으로 하여금 갈등하게 만들어버려요. 이걸 지켜야 되는데 이걸 지켜야 되는데. 교회 갈라고 하는데 하필 또 갑자기 사돈한테 전화 와가지고 한번 봅시다 해가지고 못 가고.


모든 일이 모든 일이 뭔가 기대하고 의도하고 노림수를 가지고 뭐를 할라치면 이게 불안하고 실패감을 느끼고 이번 게임에서 내가 성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 그리고 저주성, 공포 이게 율법의 종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은 이렇게 되니까 종이란 말은 뭐냐 하면은 율법과 내가 떨어지지를 않아요. 내 속에서. 양심이 계속 율법적 기능을 해가지고 지적질을 하는데 환장할 지경이에요. 환장. 행동 똑바로 못해?! 내가 나를 지적해요. 내가. 똑바로 하란 말이야. 너 그것밖에 안되지. 그렇지? 복잡합니다. 종으로 다뤄요 우리를. 종으로.


종으로 다루다가 주께서 성도는 뭘 알게 하느냐 하면은 종으로 다루는데 그 율법의 종 노릇 속에서 같이 종이 되었던 분을 발견해요.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게 8절 9절입니다. 종에게 사례했느냐? 종 따위가 어디 종이 주인노릇 할려고 해?! 라는 것이 율법적 기능으로 우리 안에 작용하지요. 율법적 기능으로.


그러니까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지킬 수가 없어요. 나도 좀 예수 믿는 거 보상 좀 해주시지. 그러면 여기 17장 9절 종 따위가! 대번 팍 나오잖아요. 내가 얼마나 교회 충성했는데. 8절 너는 내 옆에서 수종 들고 있어 어디 네가 끼어들어. 이 율법의 종 따위가! 저주의 종 따위가! 무슨 여기서 어떤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어. 이걸 반드시 경유해야 돼요.


그럼 우리는 뭐 합니까.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다. 내가 제대로 종이 아니고 자꾸 종 안 될려고 하는 이 죄를 짓는구나 할 때 갑자기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고 해놓고 2초도 안 걸렸어요. 주 예수님 이름으로 찬송하리로다. 갑자기 종인데 종을 경유해서 내가 신분이 눈이 확 띄이는 거에요. 내가 참 종이 아니지. 내가 아들이지. 내가 아들이잖아요. 그런데 아들인데 내가 아들이 아니에요. 그건 자아 self고 주님 안에서 아들이에요. 예수 안에서 아들이 된 거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아들인 것을 증거하라고 우리가 예수님과 상대역, 소자가 된 거에요. 소자. 작은 자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땅은 말씀대로 실시가 되는데 말씀대로 실시된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 전부가 우리로 하여금 네가 종노릇하게 만드는 압박감으로 우리의 심령에 작용합니다. 압박감으로. 완벽해야 되고 철저해야 되고 이런 것.


그런데 그걸 경유해서 아 내가 이 벗어놓은 옷이 마귀한테 속아가지고 철저하게 게임의 주인공이고 내가 괜찮은 종, 완벽한 종, 대단한 종으로 살라고 애썼구나. 종은 하나님의 아들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는 그 말이 이제는 죽은 우리한테 이야기하세요. 너는 하늘나라 유업을 받을 수 없느니라. 보통 공장에 가면 이런 거 해요. 자기 헬멧 벗어놓고 안전! 안전! 안전! 이런다고요. 주의한다고.


종아! 종아! 종아! 이건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가 종 노릇하면서 악마한테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환희와 기쁨으로서 우리는 만끽하게 되는 겁니다. 순환구조죠.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맨날 뺑뺑 돌면서 증거되는 것은 주님만, 주님의 다 이루심만 증거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누가복음은 십자가 지기 전에, 지기 전에 철저하게 율법의 저주의 계곡을 건너가는 거에요. 인간은 건너갈 수 없는 것을 주께서는 이래서 너는 건너지 못한다는 것을 철저화시킬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효력만 우리를 덮치는 것을 천국은 우리 안에서 이미 침노해서 우리로 아들 되게 했다는 것, 주님의 공로라는 것을 십자가뿐이라는 것을 경유해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된 것을 그냥 우리라고 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같이 죽고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우리로 생각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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