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생명이 나타나지 않으면 모두 썩는다는 겁니다. 썩는 것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인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들 자체적인 자생력으로서는 자신이 썩는 것을 회복할 능력은 그 자체에 없다. 그래서 썩고 결국은 죽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다.’ 이걸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에덴동산에 심을 때는 짝을 이루기 위해서 심어놨거든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두 개가 같이 있어서 에덴동산이 축복과 그리고 낙원의 동산이 되는 근거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 살면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 땅에서 살고자 그렇게 애를 씁니다. 그렇게 살고자 애를 쓰면서 인간들이 추진하는 것은 어떤 결과를 낳기 위해서 원인이 무엇인가, 원인을 알아야 같은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고 그 좋은 결과를 위해서 원인부터 손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은 그 원인을 모르는 것과 이유를 모르는 것을 구분할 줄을 몰라요. 이유를 모른다는 말이 뭐냐 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 희망을 가져야 되는 나 자체가 문제 있다는 그게 이유입니다. 썩도록 태어났는데 결국 이 땅에서 썩고 죽게 되어 있는 인간이 그렇게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이걸 애써 거부하고 살아야 되겠다고 애쓰는 것, 자기 썩어야 될 이유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헛된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예수님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몰랐던 것, 왜 우리는 썩고 죽어야 되는지 그 이유가 비로소 나타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해서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과거가 아니고 주님의 과거라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나의 과거는 애초부터 없었어요. 전부 다 주님의 과거였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지 내가 과거에 한 일은 나의 과거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라면 살아가면서 제발 과거는 잊어주세요. 과거는 그냥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과거라는 것은 없습니다. 주께서 하신 주의 일이었지 나의 일은 아닙니다.
과거 때문에 현재를 망치는, 현재를 우울하게 지내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 해야돼요. 이 말은 여러분이 기억이 있을 것이니 과거가 있더라도 과거를 이렇게 덮어주는 게 뭐냐? 지금의 주님이 우리 자신의 과거를 “실은 나의 일이었어.” 하고 덮어주는 거예요. “너 썩었어. 너는 죽는 거야. 너 때문에 아니야. 네 행동 때문이 아니야. 행동을 나쁘게 해서 그런 게 아니야. 개차반처럼 행동해서가 아니야. 너는 처음부터 썩은 채로 태어났어.”라고 이야기해 주는 그분이 바로 생명이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쓸데없이 걱정한다는 것은 왜 걱정하느냐? 여전히 주님이 와서 모든 것을 들춰주심에도 불구하고 “저리 가!” 하고 주님을 내쫓고 내 선에서 해결하려 하니까 우리가 헛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계속해서 주어지는 선과 악의 지식을 감당을 못해요. 생각해 보세요. 막대기가 있는데 막대기의 이쪽에는 선, 그 반대쪽에는 악이 있다면 이런 막대기가 얼마나 모순되겠습니까? 어떻게 선과 악이 한 막대기에 같이 있겠습니까? 선을 아는 나무 따로 있고 악을 아는 나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선과 악을 아는 나무가 한 과일에 다 있다는 것, 이것은 인간이 감당하지 못하고 인간이 먹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선과 악은 심판용이기 때문에 심판자가 아닌 자가, 선과 악을 자기가 갖고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만들 때는 심판의 대상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리는 겁니다. 먹지 말라고. 심판의 대상은 따로 있는 거예요. 악마가 심판의 대상이지 인간은 심판의 대상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악마가 나만 죽을 수 없다, 이래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닌 이 인간을 인질로 삼아버린 거예요. 유혹을 해가지고. 심판의 대상이 아닌데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버리면 졸지에 인간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린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선과 악에 대해서 인간은 균형 있게 그것을 행사를 할 수 있는 균형점이 없다는 거예요. 선과 악, 선과 악을 양쪽을 다 봐야 돼요. 눈이 사시가 될 정도예요. 인간은 선과 악 그걸 감당을 못해서 기껏 한다는 것이 뭐냐? 그 중간지점에 균형을 맞추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 중간쯤에 있는 우리는 살려고 시도하고요.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내가 사는 것이 선이라고 이미 규정을 해놓은 이상 나를 살리는데 힘들게 하는 적들은 무조건 악한 자가 되고 내가 사는데 도움 되는 자는 그자가 누구든지 무조건 나에게는 선한 자로 내가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말도 안 되는 해석을 내려버립니다. 내가 사는 게 선이에요, 내가 사는 게! 군소리하지 말라는 거예요. 무슨 군소리가 필요합니까? 내가 사는 게, 살아남는 게 남는 건데 무슨 군소리가 더 필요합니까? 교회 와서 기도한다. 왜 기도합니까? 살려고. 하나님은 죽으라고 했는데 우리는 살려고 하는 거예요. 사는 게 정의고, 사는 게 공의고, 사는 게 이게 덕이고, 사는 게 진리가 되어버렸어요. 이런 나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잖아요. 교회 와서 성경공부 하는 것, 그것은 구색입니다, 구색. 그것은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거예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루 더 사느냐가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풍부하게, 풍요하게. 그것도 어떻게? 남에게 칭찬받아 가면서. 그것도 어떻게? 여유롭게 권세까지 누리면서.
예수님께서 마귀에서 시험받을 때 제공된 시험이 세 가지 아닙니까? 풍요하게 넉넉하게, 인기 많으면서 권력도 쥐고, 이게 딱 우리 모습이라는 거예요, 딱 우리 모습. 내가 아프면 나쁜 것이고 내가 건강하면 좋은 것이고, 이미 우리는 결정 났어요. 우리는 우리 중심이 되기를.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선과 악을 즐기고 있습니다. 내가 정의롭다는 것부터 출발한 자체가 이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인간에게 유통되던 정의였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들은 선과 악, 나에게 이익되면 선이고 자기에게 손실되면 악이라 해서 자꾸 균형을 맞추는 거예요, 균형을. 양쪽을 눈치 보면서.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그 선악을 아는 인간이 아무리 선과악을 안다 할지라도 해결 될 수 없는 문제점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 7절에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만든 자기 몸을 감당을 못해요.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게 있습니다. 그게 부끄러움과 수치였습니다.
이것은 선과 악을 아는 자식이 해결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선악과 따먹었다는 티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걸 티를 냈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거예요. 겨우 땜빵한 거예요. 그런데 그 선악과를 따먹기 전, 따먹기 전에는 벌거벗었어도 상관없었거든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문제가 생긴 새로운 인위적인 조작, 그것은 치마 옷을 입는 거예요. 창세기 3장 20, 21절에 보면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기서 가죽옷을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 입혔습니다. 이 가죽옷이 뭐냐? 벌써 예수님의 행동이, 활동이 아담과 하와부터 벌써 개시가 되었다는 겁니다. 개시가 되는데 개시되는 그 장소가 인간이 스스로 선악과 따먹어서 어떤 감당 못 하는 그런 부끄러움, 해결책이 없는 그 현장에 예수님의 행위가 거기에 찾아가는 거예요.찾아가서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조치를 인간이 자기의 선악과 따먹은 어떤 증세, 어떤 징후 어떤 문제가 터졌다는 그 징후의 증거가 있는 그 옷에다, 치마에다 노리고 가죽옷을 거기에 결합을 시키는 거예요. 인간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곳에, 그러니까 인간이 선과 악을 아는 지식과 이성으로 해결 못 하는 그 지점에 무엇이 주어지느냐? 하나님의 생명이 찾아와서 공격을 하고 그 지점에다 딱 갖다 붙이는 거예요. 가죽옷은 일단 패치 또는 파스 같은 겁니다. 그걸 붙여놓게 되면 거기서부터 ‘나니아(Narnia)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넘어가는, 가죽옷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의 세계로 이끄시는 거예요. 그 지점이 뭐냐?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양심으로서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그 지점에 패치가, 파스가 붙어 있는 거예요. 가죽옷이 붙어 있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가 거기에 붙어 있는 겁니다.
근원적으로 우리보고 “제발 너의 윤리와 도덕과 모든 행동과 상식과 이성과 판단과 논리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라.” 그 말이지요. “스스로 살려고 하는 그 행동 자체가 부끄러운 줄 알아라.” 그 말입니다. 썩는 인간이 뭘 열심히 한다고 안 썩는 것이 아니거든요. 성경 전체가 이렇게 일관되게 선악과의 지식을 알고 있는 인간을 겨냥해서, 인간이 선악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부분을 찾아내서 그 찾아낸 그것을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로 사용하시는 방식, 그것이 영생으로 활동하는 주의 방식입니다.
인간이 주의 일에 장애물로 작동하는지를 알아야 돼요. 자아가,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일에 방해물로 등장시키는 이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우리 내부를 영생으로 통하는 그런 비밀의 구멍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내가 구멍이 나지 않기를, 내가 건재하기를 바라는 이 심보, 이게 뭐냐 하면, 선악을 아는 것, 이것 어떻게 조치를 해야 되는데 조치가 안 되니까 ‘그냥 선악을 아는 체로 천국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우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선과 악이라는 막대기의 그 기준점, 주님께서 거기에 쳐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선과 악은, ㉮인간으로서는 감당되지 않는 선과 악이라는 막대기 하나가 서로 이어지는 것처럼 착각해서 이렇게 있지만 ㉯주님께서는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중간에 그것을 잇지 못하고 떨어지게 만들어 버려요, 선과 악이. 선과 악이 떨어지면서, 우리가 있던 그 지점을 침으로써 떨어지면서 그다음부터는 ㉰선과 악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판정 못 하게 만들어요. 선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전혀 우리와 무관한 일이 되게 만들어요. 이게 해방입니다, 이게! 선악과로부터의 자유에요. 선과 악에 대해서 자유입니다.
그걸 자르는 방법은 어떻게 자르는가? 주님께서 시간을 통해서 잘라버립니다. 인간은 자기 과거부터 내려온 기억 속에 있습니다. 기억 속에 있어봤자 이것은 수평적 흐름이에요. 수평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과거-현재-미래, 모든 인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나아가는 수평적 시간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시간적으로 봐서 1차원 인간 존재지요.
그런데 주님께서의 시간은 뭐냐? 인간의 시계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알려주는 기계가 시계에요. “채깍, 채깍, 채깍, 채깍……” 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시간은 뭐냐 하면, 이게 수평적 시계가 아니고 수직적 시계에요. 하늘로부터 땅에서 내려오는 시간이에요. 주님이 와서 주님으로 돌아가는 그 코스가 주님의 시간입니다. 그 수직적 시간과 수평적 시간이 만나서 수평적 시간관을 중간에 토막을 내버려요. 과거로부터 우리를 매일같이 끊어서 단절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말씀드릴 때 우리가 과거를 잊으라는 말이 그런 뜻이에요. 수직적으로 시간이 주어지는 거예요. 수직적으로 시간이 주어져 버리면 우리가 생각하는 기억 속에 있는 나의 과거의 어릴 때가 내 시간이 아니고 주의 과거지요. 주께서 일으킨 과거 일들이었어요. 내가 일으킨 나의 과거 일이 아니고 주께서 일으킨 거예요.
오늘 집에 가서 학창 시절 앨범 찾아보세요. 주께서 그렇게 교복 입고 수학여행 가게 하고, 다 주께서 일으킨 일들입니다, 주께서. 그리고 앞으로 하루를 살고 내일 되어서 오늘을 돌아보세요. 주께서 일으킨 사건입니다. 수평적인 시간은 없고 이제 주님이 와서 그 썩어질 우리를 영생으로 생산시키는 거예요.
썩어진 것을 소재로, 재료로 가져와서 그것이 썩어지지 않고 영생하도록 영생을 생산하는 재료로 우리의 몸을, 우리의 과거를 사용하신 거예요. 그게 뭐냐? 가죽옷이에요. 가죽옷이 우리에게 패치로 붙어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 선악의, 균형 잡힌 선악의 심판자리에 전에는 우리들이 있었지만 그 자리에, 예수님이 그 자리에 있어서 선이고 악이건 내가 관여할 테니 네가 관여하지 마라, 네가 상관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당부하는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이거든요.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게 뭐냐? 9절 끝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 은혜가 뭐냐?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이게 은혜라는 말이지요.
은혜가 나타나게 되면 예수님이 은혜 안에서 나타나서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과거사, 우리가 몰랐던 내가 죽는 이유, 썩어질 이유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걸 드러내시는데 그냥 드러내시는 게 아니고 이미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영생을 위하여.
이 세상은 전부 다 과거사로 가득 차 있지요, 과거사로. ‘과거에 어떤 왕이 위대했고, 과거에 어떤 대통령이 훌륭했다.’ 훌륭했는데 그 인간이 왜 죽습니까?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이 훌륭했으면 왜 죽어요? 세종 대왕, 세종대왕이 그렇게 훌륭했는데 왜 죽습니까? 세종대왕을 훌륭하게 본다는 것은 아직도 조선 시대 제4대 왕 세종을 지금도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익이 되는 것을 인간은 뭐로 보느냐? 선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 선에서 우리가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세종대왕 한글 만든 것, 주께서 만들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우리하고 상관하지 맙시다. 우리는 썩을 인간이고 우리는 죽을 인간인데 왜 아직도 우리가 선에 미련을 갖고 있고 악한 자가 아닌 것처럼 행세하느냐 그 말이지요.
로마서 7장에 보게 되면 그 원칙에 대해서 나와요.
사람들은, 선과 악을 아는 인간들의 주장이 이거예요. 뭐든지 원칙대로 살아야 된다. 그러면 교회 왔다. 교회 오면 말씀듣고 성경 보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채 설교 듣고 말씀 보게 되면 어떤 것이 마음에 딱 오느냐 하면, ‘원칙대로 살자. 원칙대로,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되고 목사님 말씀대로 사는 것, 이게 성도의 바른 도리다.’ 이게 딱 있는 거예요. 그러나 여기 로마서 7장에 보면 그게 틀렸어요. 원칙대로 사는 게 아니고 원칙 안에서 살아야 돼요, 원칙 안에서. 그게 왜 그러냐? 로마서 7장 8, 9 절에보면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의 일은 계명을 줌으로써 계명이 살아나고 나를 죽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 관심사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이 살아나요. 율법이 살아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칙이 살아나고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살아나야 돼요. 우리는 애초부터 죽어 있었다는 사실이 내가 인정하기 싫지만 감추어진 진리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어 있었던 거예요. 내가 살아난 게 아니고 죽음이 살아난 거예요. 전에는 죽음 안에서 죽음이 살아 있었는데 지금은 주님의 영생이 살아 있는 거지요. 어쨌거나저쨌거나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아니에요. 죄가 있을 때도 죄가 살아났지 내가 살아난 게 아니고 생명이 있을 때도 생명이 살아나지 내가 살아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선악을 조정해서 내가 살려고 시도했잖아요. ‘열심히 살아야지. 바르게 살면 살려주겠지.’ 이거 다 사기입니다. 이거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사기에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사기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살아나야 되지 내가 살아나면 안 돼요. 우리는 제발 죽어 있어야 돼요. 계속해서 죽어 있어야 돼요.
그러면 죽는 방법이 뭐냐? 과거를 삭제하면 되지요. “네 과거 이랬잖아. 뭐 언제 네가 지난 여름밤에 한 짓을 아는데?” “음, 그거 내 일 아닌데?” “그러면 누가 했는데?” “주께서 하신 주의 일인데?” “이 뻔뻔스러운……” “뻔뻔하든 말든 어제부로 내가 죽었다고.” 어제부로 나의 과거는 죽은 과거에요. 예수 그리스도 몰랐을 때 했던 것은 다 죽은 일이었어요. 그리고 그걸 죽게 한 일은 주의 일이었습니다. “너 몇 년 살았어?” 물으면 “예, 제 나이가 40입니다.” 그러면 40년 동안 죽음이 살아 있었고, 40년 동안 죽음이 살아 있도록 주께서 일하신 기간이 40년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보고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했어요. 이건 뭐냐? 베드로가 영생 얻고 난 뒤에 다시 남의 과거 속에 주님의 이름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당신의 과거는 주님의 과거입니다.” 그 이야기해서 그 사람이 나의 과거로부터 그 사람은 수평적 시간에서 수직적 시간으로 끄집어내는 작업을 베드로가 성령 받고 난 뒤에 해야 될 일입니다.
사실은 그 일을 벌써부터 복음 전하는 자들이 이 한국 땅에 했었어요. 오늘날 우리에게 했었습니다. 과거 없는 영생에 속한 자가 아직도 과거 속에서 못 벗어난 우리에게 와서 주님의 영생의 복음을 전하니까 그 영생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정체가 나의 과거라는 게 없고, 나의 선도 없고, 나의 죄도 악도 없고, 모조리 다 죄가 하는 짓이고, 악마가 하는 짓이었고, 주께서는 그 악마로부터 악마를 폐하시고 우리를 생명의 세계로 건져주시 기 위해서 영생의 패치로 우리 중앙에 찾아왔다는 거예요. 내가 선하게 중앙에 있는 나를 빈 공간으로 잘라버린 거예요. 선과 악이라는 상식을 그 중간을 잘라버린 거예요. 이 선과 악의 이어짐에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선은 악이 되지 못하고 악은 선이 되지 못하고 중간에 끊어져 버렸어요. 선과 악을 한꺼번에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자리에 내가 없는 겁니다.
중간에 이렇게 끊는 작업이 마태복음 17장 27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갈 때 어떤 관리들이 시비 걸었던 겁니다. “예수여, 그리고 당신 일행들이 성전세 왜 안냅니까?” 성전세 왜 안 내냐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5, 26절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지금 세금 내라고 하는 그 세금쟁이들은 시간이 선악 선과 악의 노선에 있어요. 수평적 시간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수직적 시간이에요.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는 것인데 자기 아들은 성전세에서 면제되는 것이 상식이다.’라고 하시면서 ‘아들은 성전세를 낼 필요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마태복음 17장 27절에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지금 성전세 베드로보고 내라 하거든요. 베드로 반 세겔, 예수님 반 세겔, 합해서 한 세겔.
이 두 사람의 성전세를 주께서 어디서 구하느냐? 인간의 일은 단절되어 있어요. 인간은 과거와 단절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일은 주님이 일으킨 일이에요. 따라서 지금 모든 인간은 과거로부터 생각해서 지금의 자기가 사는 것을 도모하려는 이런 행동 외에는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어요. 그래서 성전세는 줘야되는데 세금 낼 돈은 없고, 베드로가 당황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는가? 고기를 잡으라는 거예요. 고기 잡아서 입 벌리고 보니까 두 세겔도 아니고 열 세겔도 아니고 딱 한 세겔, 딱 한 세겔을 고기가 물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이벤트가 또 없어요. 고기 입 열어서 딱 한 세겔, 너와 나의 한 세겔을 딱 줬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원인으로 캐게 되면 ‘예수님께서 고기 속에다 한 세겔을 집어넣고 잡히게 했다.’ 이렇게 됩니다. 인간의 상식, 이성에 의하면. 이유에 대해서 언급하면 ‘너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베드로, 그리고 저쪽도 죄인이고 예수님 나 빼놓고는 다 죽음이고 생명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예수님만 생명이에요. 자, 생명의 역할은 뭐냐? 너희들의 죄를 까발리는 겁니다. 들춰내는 거예요. 너희들이 지금 살아가는 이것은 너희들이 사는 게 아니고 저주가 살아 있는 것이고, 죽음이 살아 있는 것이고, 저주가 살아 있는 것이고, 악마가 살아 있는 형국을 너희들이 지금 대표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 그걸 영생이 되신 주님의 활동으로 까발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고기를 잡아서 한 세겔을 준 것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선악을 아는 인간이 결코 예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기 믿음으로 구원은 성사되지 않는다.’ 인간의 믿음으로 구원이 되지 않고 예수님의 드러남으로 구원이 성사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구원이 되는 거예요. 찾아오실 때 내가 어떠한 존재에 불과한가가 다 밝히 드러나는 겁니다.
오늘 제가 몇 번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언급하면, 여러분의 과거는 여러분의 일이 아닙니다. 양심의 가책, 그런 것 좀 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일이 아니었고 주의 일이었습니다. 좀 많이 뻔뻔하더라도 참아내세요. 좀 뻔뻔하세요. 죽어서 우리 자신과 이별하지 마시고, 세상과 이별하지 마시고, 살아서 과거와 이별하시고, 살아서 이 세상과 이별하셔서 살아 있을 때부터 영생을 얻어야 됩니다. 나와 이별해야 돼요. 우리 자신이.
원칙대로 살지 마세요. ‘원칙 안’에 사세요. 주님의 영생 안에 살아야지 내가 살아서 내가 원칙대로 바르게 살지 마세요. 이것은 마귀의 가르침입니다.
또 마태복음 22장 17-20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또 단절이 나와요. 어떤 바리새인들이 또 예수님한테 시비 겁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 대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그 형상에 시이저(Caesar), 가이사지요, 영어로 하면 시이저, 시이저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1절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게 단절입니다. 선과 악 사이를 끊어버리는 거예요. 선도 네 담당 아니고 악도 네 담당 아니고 그것을 끊어내시는 예수님 담당이거든요. 가죽옷 담당이에요, 가죽옷 담당.
인간은 선악을 안다고 자기 수치까지 해결할 수 없어요. 주께서 찾아와서 선악으로 나의 수치를 해결하려는 그 지점에, 십자가의 은혜가 거기에 충격을 가해서 끊어내 버립니다. 아까 그 동전이벤트도 제자들 사고를 예수님이 고기를 잡게 하는 식으로 끊어내듯이 이 바리새인이 주장하는 세금 내는 문제도 주께서 오셔서 둘을 연결시키는 이 연결의 중간을 끊어내는 거예요.
이것은 곧 상식적인 우리 자신과, 영생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나 자신을 주께서 끊어내는 거예요. 예수를 믿으려는 나와 예수 안에 사는 나와 전혀 별개의 존재라는 겁니다, 별개의 존재. 바르게 살려 하는 나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와 전혀 다른 존재예요.
끝으로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과부가 있는데 이 과부가 자기의 원한이 있어서 원한을 풀기 위해서 재판관을 찾아왔습니다. 4, 5절에 보면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그 재판관이 뭐라고 하느냐? ‘그 과부가 앞으로 나를 계속 귀찮게 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어쩔 수 없이 나간다.’ 그렇게 했습니다. 6절에 이런 표현이 있어요.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불의한 갑자기 이 재판관이 불의한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억울한 일을 당한 이 여자 과부에 의해서 이 세상이 모조리 다 하나님이 심판 앞에서 불의하다는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주께서 억울함을 당한 과부를 발생시켜서 불의함의 불의함을 들춰내는 작업입니다. 거기에 이 과부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과부는 자기 억울한 것을 재판에 하소연하기 위해서 재판관을 닦달 내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닦달, 내가 계속 귀찮게 하고 재판해 달라고 달려드는 이 모습, 이게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성도는 뭐냐?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한지 가만있지 않고 주께서는 성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자꾸 시비 걸고 닦달 내는 삶을 살도록 뒤에서 주께서 부추긴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하는 말이 8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세상은 어차피 마귀의 세상입니다.
우리는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옥에서 태어났고요. 우리가 태어나서 살면서 공부하고 가정에서 배운 것은 전부 다 지옥에 적합한 인생으로 살고자 필요한 것들, 그러한 지식과 요령들을 우리는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래놓고 우리는 우리의 본색이 뭔지를 몰랐지요. 몰랐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은혜로, 생명 되시는 주님의 그 십자가의 능력이 찾아올 때 비로소 우리가 깔고 앉은 이 세계, 우리가 몰랐던 이 세계가 우리를 생산했고 우리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썩게 되어 있고 이게 사망을 이루어 가도록 모든 면에서 유도되고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주께서 오셔서 뽑아낼 때, 이게 시간이거든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못 버리고, 현재 자기 삶에 대한 애착도 못 버리고, 미래의 성공과 출세에 대한 계획과 목표, 목적도 우리는 못 버리고 있습니다. 그럴 때 주께서 수직적으로 우리에게 영생이 찾아오게 되면 영생이라는 원칙, ‘영생의 원칙대로 살아라.’가 아니라 영생 안에 우리를 이미 거기에 포함시켜 놨기 때문에 영생 안에 사는 사람으로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어요. 이 선악에서 우왕좌왕하는 우리를 거기서 옴팍 파내서 주님의 영생세계 안에 집어넣어 버렸다는 말이지요. 집어 넣어진 채 우리가 위에서 아래를 보니까 그동안 선과 악에 얼마나 우리가 시달려 왔는지, 얼마나 선과 악에 농락당했는지,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저주받는다.’ 그 논리에, 그 악마의 논리에 우리가 얼마나 놀아났는지요. 이미 영생인데, 이미 다 이뤘는데, 이미 천국인데 왜 아직도 인간들 말에 휘둘리고 ‘이러면 나 손해되는데?’ 혹은 ‘오늘 이익 봤습니다, 하나님.’ 이익과 손해, 선과 악, 이제는 그 선악 구조에서 주의 은혜 된 자는 여기서 벗어난다는 이야기에요.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과거, 현재, 미래, 다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주의 이야기인데, 주의 활동인데 우리는 너무 주제넘게 우리 활동과 행동과 원칙을 의미 주면서 끼어들었습니다. 주여,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주시고, 주께서 모든 것을 주의 일로 만든 그것만 의미 있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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