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정리

딤후8-뿌리 교체 전쟁

아빠와 함께 2023. 5. 5. 22:54

뿌리 교체 전쟁

디모데후서 2:1-7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군사라는 것은 전쟁하기 위해서 모집된 사람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전쟁으로 초청받은 그런 처지가 성도의 입장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전쟁 외에 남의 전쟁에는 별로 관심 없거든요. 우크라이나 러시아전쟁이 우리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군사로 모집 당한 사람은 이 전쟁이 자기 전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에 휘말려 들어갑니다. 어느 정도로 휘말려 들어가느냐 하면,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 요구받게 되는 겁니다. 그 말은,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를 위한 자기 전쟁을 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주님이 일에 집어넣을 때는 자기 전쟁을 스톱시키고, 그것을 거부하고 오직 주님의 전쟁에 몰두하게 하십니다. 그 전쟁은 어떤 전쟁이냐 하면, 오늘 5절에 보면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되어 있으니까 어떤 전쟁을 하느냐? 하나님이 창세 전에 정해놓은 규칙과 법이 있어요. 그 법을 사수하고 그 법을 드러내는 전쟁에 모든 성도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의 가치를 드러내는데 전쟁방식으로 거기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군인의 모습으로 참여하게 되어 있어요. 전쟁하면서 이 면류관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월등하게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날마다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거지요.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 모든 기쁨과 영광을 오직 아이가 하신 그 단독행위, 그것만 받고 나머지는 일체 받지를 않습니다. 이게 사달 난 거예요. 전쟁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전쟁의 빌미가 하나님의 자기 아들에 대한 편애 때문에 발생 된 거예요.
로마서 11장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 다른 사람 상대 안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에베소서 1장 4, 5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창세 전부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구원할 사람을 택했다.’
결정적인 것은 골로새서 1장 16절이지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세상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천사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바로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예수님이 만들었다’고 되어 있어요.세상 모든 것을 예수님이 만들고,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창세 전에 다 계획했고,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악마가 이야기하는, 그 최고 천사가 주장하는 것, 직접 자기가 신에게 충성 봉사하고 대화해서 어떤 신의 기쁨을 누리겠다는 모든 시도는 좌절되는 겁니다. 아들의 존재가 가로막고 있으니까 좌절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피조물이 하는 모든 것을 안 받는가?

그것은 이미 창세 전에 아들과 그렇게 합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계약을 그렇게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아들을 배제하고 본인이 직접 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하는 그것은 뭐냐 하면, 뿌리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받을만한 뿌리, 하나님이 좋아할 뿌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때는 그 뿌리가 예수님과 관련성이 있을 때만 받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그 인간을 악마 자신의 뿌리로 삼아버린 겁니다. 그렇게 삼기 위해서 에덴동산에 와서 인간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긴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되는 인간을 인질로 볼모로 잡은 겁니다. 악마가. 다시 말해서 ‘나를 치려거든 하나님이 만든 인간을 같이 쳐야 될 것입니다.’라는 것이 악마의 이야기였어요, 생각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나옵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대가로서 내가 하늘나라를 만들겠다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나오는데 천국을 ‘아들의 나라’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 자기 아들의 나라, 아들이 주가되는 그 나라.
‘모든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대가로서 모든 인간을 죽여도 내 아들의 나라는 포기 못 하겠다.’ 이게 창세 전에 하나님과 아들 간에 합의한 합의서입니다. 합의한 내용이에요. 그 합의서가 복음입니다. 자, 이렇게 되니까 그 중간에 끼어있는 인간 입장에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날 죽였잖아. 이제는 너희들 차례야. 내가 너희들 다 죽여버리겠다. 내 아들 왜 건드렸어?” 이거거든요, 십자가가.

인간들은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잖아요!’ 자신의 뿌리와 명분을 하나님의 창조에서 찾습니다. ‘바르게 살면 되잖아요.’ 하나님이 묻는 건 그거예요. 네가 바르게 사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바르게 산다는 게 어디서 나온 지식이냐 하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데 그 지식은 너의 삶의 명분이나 토대가 될 수 없다고 내가 사전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일러준 바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 있어? 없어. 내가 분명히 하나님형상으로 만들었거든! 하나님형상이 없는데 그래도 네가 인간이라고 우길래?” 끝까지 내가 살아 있는 이 정당성만은 안 놓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자기의 명분이고 뿌리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는 이 자체.
하나님은 인간을 배제하는 전쟁을 해버리지요. “살아 있느냐? 아무 쓸모 짝이 없어.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이 아무 쓸모 짝이 없이 살아 있다는 것을 내가 알려주마.” 그래서 주님의 인간을 배제시키는 전쟁이 뭐냐? 인간의 뿌리를 노출하는, 그 뿌리를 보여주는 전쟁을 우리 주님이 하십니다.
출애굽기17장 9-11절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는 일종의 꼭두각시 같아요. 그러니까 모세가 손이 올라가는 것과 저 산밑에서 아말렉, 그 용맹한 아말렉 군사들이 밀리는 그 연관 관계가 인간의 지혜로서 성립되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성립이 안 돼요.‘맞다. 이것은 모세의 능력이 아니고 오히려 모세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전쟁이다.’ 해서 모세에는 관심 없고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 주목합니다. ‘모세 너, 당신 말고 당신이 들고 있는 지팡이가 우리에게 중요해.’ 지팡이를 올리니까 전쟁에서 이기는 거예요. ‘인간은 지팡이보다 못한 존재다.’ 인간은 지팡이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이게 바로 흔적이라는 겁니다, 흔적.

신약 때 하나님께서 어떤 하나님을 보냈느냐? 자기 아들이 하나님이신데 어떤 하나님을 보냈느냐? 흔적없이 사라지는 하나님을 보낸 거예요. 흔적없이 사라지는 하나님. 흔적없이 사라지니까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손 털었어요. 왜? 없애버렸으니까, 그 실체를 없애버렸으니까 이제 없어진 거예요. 그 흔적이 없는 흔적을 대체해서 예수님의 흔적으로 있는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하나님은 자기 군사를 모집해버린 겁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예수는 빠졌지만 모세와 엘리야 류, 그런 분류에 속한 사람들이 오늘 디모데, 사도바울, 이 사람들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 흔적에 해당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는,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그 내용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그 흔적이 돼요.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인간에게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품고, 그게 뿌리가 되고 그게 사는 존재의 명분이 되는 사람들.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실은 뭐냐? 이제 하나님이 죽었으니 모든 인간은 죽은 자에 해당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모든 사람을 죽여놓고 시작하는 전쟁에서 나타나는 흔적이 바로 성도에요. 모든 사람을 죽여놓고 시작합니다,  하나님마저 죽게 된 세상에서 우리가 왜 자꾸 살려고 애를 쓰느냐? 그것은 성립 자체가 되지를 않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셨는데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었을 때 인간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죽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창세 전에 합의한 내용에 의하면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 되는 근원, 뿌리가 되지 못하도록 그렇게 이미 합의를 보셨습니다. 왜냐? 이미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이 유일한 기쁨이 되기 때문에.
인간은 이 죽음의 세상에 태어나서 그냥 그 안에서 가마솥에 있는 것처럼 살다가 그냥 늙어 죽어야 돼요. 왜냐하면 뚫고 나가는 구멍이 없는 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그 죽음 바깥으로 뚫고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아무도 뚫고 나올 수 없는 이 죽음에서 유일하게 구멍을 뚫은 거예요. 유일하게 빠져나오는 그 구멍, 그게 바로 부활의 구멍이에요. 어떤 인간도 못 빠져나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어떤 인간도 죽음이라는 것을 빠져나올 수 없도록, 죄와 죽음과 율법과 마귀의 손아귀에서 못 빠져나오도록 왜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유일한 기쁨과 영광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부활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떤 자리만 부활되느냐? 예수님만, 죽었던 그 한자리, 그 한자리만 부활이 돼요. 예수님 자리만 부활이 돼요. 예수님만 부활되지 다른 사람은 부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리에 들어가야만 부활돼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자, 시작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이렇게 시작을 해요.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죽었던 나를 내가 살게 함이라.’ 이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나는 죽음으로써 뭐가 확정되느냐 하면, 나는 죽었어도 부활 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 확정돼요. 확정되고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어야 한다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리 제공했을 뿐입니다. 그게 부활이에요. 성도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받은 겁니다. 구원 받았기에 성도가 되었으면 이제는 원 없이 망가지고, 원 없이 실패하고, 원 없이 아파야 돼요. 어떤 희망도, 건강이라는 어떤 희망, 성공이라는 어떤 희망, 건전하고 온전하고 바르게 살려는 어떤 희망도 그것은 마귀가 준 마귀의 강력한 voice, 소리입니다. ‘잘 되어야지. 예수 믿고 잘 돼야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마귀가 우리 안에서 우리를 꾀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할 일은 매일같이 자기를 구성해요. 그런데 주님은 매일같이 그 구성된 것을 해체시켜 버립니다. 인간들이 매일같이 내 것, 내 인생, 내 의미, 가치, 내 나와바리, 영역, 계속 구성하는 이유는, ‘다시 나의 것으로 장만할 게 뭐 없겠습니까?’ 이렇게 가는 거예요. ‘다시 나의 것으로, 나의 역사로 구성할 수 있는 게 없겠습니까?’ 주님의 해체는 이 여지를 없애시는 그런 전쟁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매일같이 주님은 우리 자신을 뽑아냅니다. 그 뿌리를 뽑아내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이 복음은, 십자가 복음은 매일같이 우리의 신앙을 아예 뽑아 없애버리는 일이에요. 우리의 신앙 자체를 뽑아버리는 거예요. 제발 좀 신앙 좀 갖지 말라는 거예요. 속물이 딴 것 뭐가 속물이겠어요?

뿌리 교체입니다. 우리 존재의 뿌리가, 형상도 없는, 하나님이 원래 생각했던 인간에게 분명히 있어야 될 하나님의 형상이 이미 없는, 그래서 인간도 아닌 존재가,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유일하게 형상되시는 예수님이 자신의 뿌리로 옮겨진 거예요. 새로운 뿌리가 생겨버린 거예요. 바로 이 전쟁을 주께서 지금 하신 거예요. 뿌리 교체, 파멸된 근원이 주님 쪽으로 옮겨진 거예요. 그러면 골로새서 1장 16절에, 세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바로 그 뿌리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예수님 자신의 기적을 통해서 뿜, 뿜, 계속 발산되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만이 유일한 뿌리라는 말이에요, 예수님만이. 예수님이 나의 뿌리가 아니고, 내가 예수님 뿌리를 드러내는 하나의 흔적으로서 가담되고 있었던 거예요. 이게 피조물 역할이라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이 생각하는 피조물 역할은 ‘예수님도 뿌리고 너도 뿌리고’ 그게 아니고, ‘예수님도 천국 살고 너도 천국 살고’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뭐냐? ‘천국은 오직 예수님만 살고, 그 예수님 삶을 드러내기 위한 원래 피조물, 하나의 그릇으로서의 용도가 피조물을 창조했던 용도’였던 겁니다.

여호수아 6장 20절,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이 장면이에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소리 질렀어요. 그리고 나팔 불었어요. 이 나팔이 신약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신약 때까지. 그러면 나팔 불고 소리 질렀는데 그 여리고 성, 그 이중으로 된 성벽이 왜 한꺼번에 그냥 와르르 무너졌는가? 지진이 일어났는가? 지진하고 관계 없어요. 그냥 무너진 거예요. 그것은 눈에 보이는 실체적인 접촉성 없는 방식의 전쟁입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접촉적인 것, 인간들의 어떤 눈에 보이는 칼이나 창이나 활 같은 것은 접촉되는 거예요. 활을 쏠 때 활이 저쪽에 꽂혀야 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방식은 누군가를 때리려면 주먹이 와서 물리적 힘이 상대방 근육에 압력을 가해줘야 상대방이 아야, 하거든요. 전부 다 접촉성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접촉성으로만 모든 힘이 작동하고 작용한다는 그것, 이것은 악마가 인간에게 이미 그런 지혜를 줬습니다. 왜 그러냐? 악마가 인간에게 그런 지혜를 준 것은, 악마 스스로가 자기의 흔적이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는 영적 존재예요. 영적 존재는 인간의 논리 대상에서 제외 배제됩니다.
인간은, 인간의 마음은 누가 줬는가, 그것은 모르고, 그것은 모르겠고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멱살만 쥐고 싸우는 거예요. 인간들하고만. 그런데 하나님의 전쟁, 이스라엘 전쟁은 비접촉성이에요. 반대로 인간이 인간을 접촉해서 죽이는 그것은 스스로 자멸하는 전쟁입니다.

 



여리고 성의 함락도 비접촉성이에요. 기생 라합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기생 라합이 구원받은 것도 비접촉성이었어요. 뭐냐 하면, 그냥 창문가, 창문틀에 정탐꾼이 기생라합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 탈출했는가, 그 경로를 표시한 붉은 줄, 그게 바로 기생 라합을 살게 한 겁니다. 정탐꾼이 말하기를 “대장님, 여호수아님! 제가요, 이 동네 정탐했는데요. 이렇게 해서 이 길로 해서, 다음은 이리로 해서 이리로 빠져나왔어요.” 그걸 빨간 표식으로 한 것으로 기생 라합이 여리고 성에서 빠져나온 겁니다. 예수님이 “내가 이 땅에 와서 이렇게 해서 죽었고요, 이렇게 해서 부활이라는 구멍을 통해서 빠져나왔어요.” 그 경로가, 기생 라합같은 우리가 유일하게 빠져나온 구멍이에요.
그걸 어떻게 비접촉성으로 표현하느냐? 그것을 물리적으로 표현하면 파동인데요, 나팔 소리, 파동, 비접촉성인 나팔 소리로 이걸 아는 사람은 서로 알게 하는 거예요. 이게 에베소서 5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이걸 알아듣는지는 모르겠고요, 5장 14절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이게 바로 영적인 어떤 파동, 파동이 이 말씀을 전하면 죽은 자만 깨어나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죽은 자만! 이게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강림하실 때 죽은 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난다는 거예요. 이게 파동 아니고 뭡니까? 죽은 자도 살려내는 파동, 저는 이걸 부활의 파동이라고 봅니다. 부활의 능력, 성령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

이게 말씀을 통해서 이미 죽은 자, 예수님 빼놓고 다 죽었어요, 죽은 자에게 나팔 소리가 들리니까, 말씀 소리가 들리니까, 복음이 들리니까, 십자가의 의미가 와 닿으니까 평소에 인간 대 인간, 가지고 돈 자랑하고, 명예 자랑하고, 학식 자랑하고, 논리 자랑하고, 자기 착함 자랑하고, 교회 충성 자랑하고, 봉사 자랑하는 이러한 인간과 인간의 멱살 잡음과 다툼, 이걸 뚫고 ‘나 죽었는데 살았어.’ 싱긋이 웃을 수 있는 ‘나 죽었는데 살았어.’ ‘왜 살았어?’ ‘말씀, 복음, 말씀 속에 있는 그 십자가 복음 듣고 살았어.’라고 싱긋이 웃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발 접촉성에  농락당하지 마세요. 눈에 보이는 것에 농락당하지 마세요. 파동이라 하는 것은 악착같이 살겠다는 인간들을 악착같이 죽여버리는 능력이 있어요. 뭐가? 예수님의 부활이. “나 빼놓고 다 죽었어. 악착같이 살아도 악착같이 내가 죽게 만들겠어.” 그 능력이 그게 바로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매일같이 원 없이 망하고, 원 없이 실패하고, 원 없이 아플 수 있다는 그런 자유가 있다는 기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잠이 안 온다. 잠자려고 하지 마시고 이제부터는 잠 안 오는 사람이 되었다는 기쁨으로 24시간 꼭두새벽까지 눈 벌겋게 뜨고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그 자유함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모든 진리가 예수님 중심으로 확정되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자꾸 살려고 하니까 모든 것이 막히고, 악마에 농락당하고, 속게 되고, 나 자신을 속이고,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되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났음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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