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정리

방향성

아빠와 함께 2023. 4. 27. 19:10

이사야 65장 1절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말고 이방 민족에게 여호와를 알려버려요. 그러면 이방민족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가 여호와와 상관없는데 하나님의 영이 와서 알게 해줘버리니까 사도행전 나오듯이 그 이방민족 특징이 뭐냐? ‘여호와를 아는 것? 여호와의 나라, 천국? 우리는 불가능한데?’ 계속해서 여호와 이름을 아는 순간 그 불가능함이 계속 유지되는 거예요.

그 여호와 이름이 누구냐? 우리 주님입니다. 여호와 이름이 주님이거든요. 예수님이 하신 일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일,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애당초 무능하고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방민족은 알아차리죠, 예수님을 알게 한. 그래서 그들은 압니다. 내 속에는 애초부터 구원이라는 것은 들어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구원은 하나님부터 하나님까지 가는 것이지 인간은 거기서 끼어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돼죠. 불가능성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비로소 여기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이 개, 돼지 이야기 있잖아요. 이 이야기가 바로 내가 몰랐던 진짜 내 모습을 개와 돼지 앞에서 발견하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아이고 저도 교회 50년 다니고 복음 들을 만큼 들었는데 제가 복음을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이렇게 주장할 거예요. 그러면 복음 간단한 시험 해보면 알아요.

주일 날 돈 십만 원 줄 테니까 교회 가지 마라, 하면 교회 안 가겠습니까? “하~ 씨, 그 돈, 하나님은 돈, 재물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는데 그 돈 까짓것, 주님을 섬겨야죠.” 자, 올립니다. 500만원, 500만원 갑니다. “500만원 보다 주님이 더 소중한데! 십자가 피가 500만원보다 더 귀한데요?” 자, 50억 갑니다, 50억!” “50억?” “500억 갑니다. 자, 500억 손 들어요. 500억 갑니다.” 경매 붙이는 거예요.

‘집 안에 어떤 우환이 있더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자, 딸내미 죽었습니다. 주님 감사할 사람? 아들 죽었습니다. 감사할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복음을 사랑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 돼지에요. 그리고 여호와에 대해서 몰라요. 무식한 인간은 이 땅에 살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했는가? 주님께서는 우리를 돼지로부터 출발하게 만들어요. 만들고, 그 다음에 뭘 하느냐 하면, 주님만이 아는 내용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인간을 우리 속에 심어놔요. 그러면 우리 속에 과거의 나와, 과거의 나는 육이죠, 그리고 미래의 나, 영적 인간입니다.

그래서 개, 돼지 같은 과거의 인간이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말을 하게 하는 것은, 이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해요, 성령께서. 이 개, 돼지 같은 인간들이 하는 게 뭐냐? 어떤 불신자, 이방인이거든요, 이방인들은 여호와 몰라도 당당해요. 왜? 여호와 모르니까. 이거 말 되는 이야기거든요. 여호와를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서 말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당당하게 여기고 자부심을 갖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나와서 많은 사람 만나잖아요. “너 십자가 복음 알아?” “그거 왜 알아야 되는데?” 아주 당당하고, 씩씩하고, 정당하고, 자기에게 충실하고, 자기 합리화에 항상 무장 되어 있어요. 이게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본모습이에요, 이게.

그러니까 십자가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놓쳐버렸고 잃어버렸던, 내가 종교라는 연출된 위선과 연기력에 스스로 있던 그 환상을 벗겨내면, 정말 십자가 복음이 그 종교 행위 다 벗겨내면 내가 복음 모르고 내가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는 합리성과 정당함에 굉장히 당당해야 하고 의젓해야 하고 자부심을 갖는 진짜 개, 돼지 같은 내 모습을 발견하게 하시는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에요. ‘내가 뭐가 못 났는데? 내가 못난 게 뭐가 있는데?’

그래서 매일같이 성령께서는 우리의 피막을 벗겨내요. 피막을 벗겨내면 성도에게 남는 것은 뭐냐? 성도에게 남는 것 개, 돼지에서 하나님의 천사 같은 성도가 되는 그 방향성만 남아요. 그게 성도입니다. 방향성, 화살표만 남아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네가 죽어도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가자.”

그 가자, 하는 게 방향성이에요. 내가 할 수 없는 곳으로 이끄시는 주님이 친히 살아있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 역사, 그것은 뭐냐? 말씀 자체가 “너는 개고,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십자가 진 복음이다.” 이 두 요소를, 복과 저주를 한꺼번에 집어넣고 방향성을, 개돼지에서 주님만 쳐다보는 방향성만 보여주는 그 현상이 계속 발생될 때 그것을 성도, 그것을 ‘이스라엘 중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 땅에 실적이 얼마고 얼마나 대단한 존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야될 곳을 주께서 친히 이끄신다는 것, 주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만, 십자가의 복음만 증거케 해주시고, 증거 하면 증거 할수록 우리의 원체, 우리 모습이 개돼지에 불과한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