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때 뭐라 했습니까? 밥을 먹어도 주님이 밥을 먹고, 잠을 자도 주님이 잠을 자고, 운동해도 주님이 운동하고, 티비 봐도 주님이 티비 보고 그렇게 하고 주님이 안 계시면 나 홀로 티비 보고 나 홀로 영화를 보고 지 혼자 울고불고 하는 나중에 우울증 걸리거든요. 자기밖에 없으니까 언약이 없으니까. 맨날 내 팔자야, 내 팔자야 하면서 자기는 이상적인 괜찮은 시절의 이미지에서 이미지의 종이 되는 거예요.그럼 그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다? 돈이 필요하거든요.
돈은 없지 이미지는 있지 그 간격이 찢어지겠지요. 찢어지니까 이게 암 걸리고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맨날 찢어진 만큼 인간은 그 탓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한테 노예가 돼 있는 마귀지요. 자기한테 노예가 된 인간들이 특징은, 사는 방법은 첫째, 매일같이 적을 만들고, 두 번째, 그 적을 씹고, 세 번째, 잠시 속시원해하면서 산다.
매일같이 적을 만들어야 돼요. 특히 연세 많은 노인네들 매일같이 적을 만들어요. 경상도 쪽에선 매일같이 이재명 씹고, 전라도 쪽은 매일같이 윤석열 부적 만들어 눈알 꽂기, 촛불집회하면서. 적을 만들어야 나의 허전함을 허술함을 메울 수 있어요. 잠시나마 내가 어떤 패자가 승자 되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창세기 3장에 이것 때문에 그래요. 수치심. 수치심은 왜냐하면 자기 내부 균열 때문에 생겨요.
■1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있는데 이미 선악과 따먹고 균열됐어요. 균열됐으니까 벌어졌잖아요. 칸이 노출된 뭐로도 메울 수 없는 빈칸이 노출될 때 ■2그 허무함과 허전함이 자기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자기가 부끄러운 거예요. ■3그래서 치마를 만들어서 나 멀쩡합니다, 수치 없다고 가리는 용도가 옷이에요.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내가 정상이 아닙니다. 환자입니다, 란 뜻이에요. 정신병 환자란 표시에요. 그런데 벗고 있으면 더 환자니까…….
로마서 1장에 보면 이 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나는 복음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세상 자본주의사회에서 부끄럽지 않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이상적인 나로 지켜내기 위해서는 비용이 들고 그게 돈이 되거든요. 그래서 돈 있는 자는 계속 자기가 늙어가면서도 자기는 괜찮아, 괜찮아, 나는 괜찮은 존재야 그걸 남한테 과시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이 뒷받침해주거든요. 실탄이니까. 실탄이 뒷받침해주니까 자기는 계속해서 젊을 때 환상이 확정되고 고정돼버린 겁니다. 돈 없으면 사는 게 뭐라 했습니까? 추잡스럽다. 돈 없는 것도 추잡스럽고요, 돈 없다는 티 안 내기 위해서 허세 떠는 그 모습이 더욱더 추잡스럽고. 돈도 개뿔도 없으면서 돈 없는 주제에 혹시 허접한 내 인생 들킬까 싶어서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으면서 “돈 내가 낼게. 어? 지갑을 놔두고 왔네.” 이런 쓸데없는 추가적 폼을 낼 필요 없거든요.
인간의 겸손? 돈 있는 사람이 겸손해요. 그리고 인간의 착함, 덕목 다 돈이 받침 해줘야 덕목이 되죠. 돈 없는 인간이 겸손 떨면 돈 없는 티에요. 겸손한 게 아니고. 주책 떨고 있다. 저 돈 없는 티 봐라. 이렇게 되지 절대로 그걸 겸손으로 해석 안 합니다. 결국 모든 해석은 뭐로 결정한다? 돈. 이 세상의 모든 해석은 하나로 결정됐습니다. 돈. 그런데 주님은 개뿔도 돈 없이 왔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된 이유를 알겠지요.
주님의 기도 응답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뭐를 질주하고 그쪽으로 막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다 꿰뚫어보세요. 다 알고 계셔요. 그래서 절대로 주님 쪽으로 자진해서 방향 틀기를 못하게 만드는 쪽으로 오십니다. 자, 방금 한 그림이 이렇게 되겠지요. 넓은 길, 좁은 길인데 이 세상 전체가 마귀가 진두지휘해서 달려갑니다. 인간답게 살아라. 다시 말해서 돈 벌어라, 이 말이거든요. 돈 벌려면 어떻게 한다? 마귀한테 이 세상 권력에 고개 숙이면 되지요. 자기 자신에게 고개 숙이면 돈이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만 지키면 돈이 되는 겁니다. 남 생각하지 말고 우르르 다 몰려가죠.
주님의 기도라는 것은 이 고려장 같은 죽음의 세계에 와서 왜 이 세계가 보편적으로 저주받아 마땅한가를 증명하는 그것이 주님의 기도의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 심판의 정당성이죠. 어떤 단 한 사람도 심판에서 면제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고. 그 누구도 없다는 걸 증명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인간이 좋아하는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했던 그 돈 자리에 뭘 집어넣는 거예요? 예수님의 자기 자리를 거기다가 바꿔치기해서 집어넣는 그걸 대신 죽으심, 대신하심이에요. “이제는 네 자리는 끝났다. 내가 내 이름으로 접수하마. 네 자리는 내 자리로 이미 접수가 끝났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아까도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그 자리에서 성도가 할 원칙은 뭐냐? 똑같은 원칙이에요. 우리는 거기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뭘 합니까? 죄인으로 살면 되지요. 자, 죄인은 뭘 추구한다? 돈 추구한다. 따라서 돈 벌면 되잖아요. 공식 간단하지요.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은, 성도 아닌 사람도 돈 벌고 성도인 사람도 돈 버는데 차이점은 뭐냐?
“엄마 나 돈 벌었어.” 이거는 성도 아닌 사람이고,
“엄마 나 주께 시험 들 것 또 들어왔어.” “한 달에 또 이천만원 넣어줬어. 시험 들어 죽겠어. 못 살겠어. 이천만원, 이천만원 신사임당 어째, 어쩌면 좋아 이거?” 전라도 말로 뭐라 하지요? “어쨌을까, 이천만원. 또 죄인 되네.” 똑같이 달라질 건 없어요.
하지만 내가 주의 이름에 있어서는 주께서 뭐 때문에 돌아가셨는지를 무엇 때문에 어느 인간도 스스로 구원 될 수 없는가를 돈 버는 행위와 작업을 통해서 그것을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제단 위에 누워 있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이 자체가 기도의 응답이에요. 그래서 기도할 때는 고자질하면 돼요.
“오늘도 어디 가서 일을 했는데 어떤 사람은 예쁘다고 보너스 200프로 줬습니다. 도대체 제가 언제까지 이런 수모를 당해야 됩니까? 그런데 고맙게도 새마을금고에서 파산한다 해서 3억 넣어놓은 것 다 날리게 되었습니다. 주여 이걸 통해서 내가 돈이 아니라 주님 위해 살아간다는 걸 깨닫게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히히히 웃으면서 눈물은 왜 나는지 이 모순성, 분명히 정답은 알고 있는데 몸은 나도 인간답게 한 번 살아보면 좋겠다. 돈이 뭔지를 진짜 백화점 원 없이 사보고 죽고 싶다는 이 욕망을 계속 살아나고. 결국은 뭐냐? 제가 처음에 이야기하듯이 너는 모른다. 뭘 모르느냐? 앞으로 무슨 일이 들이닥칠지 너를 더욱더 죄인을 깊이 깨닫게 되는 상황은 네가 아직도 몰라. 내가 친히 만들어준 상황은 너한테 찾아갈 거야. 내가 돈에 미치고 환장하고 괜찮은 이미지에 노예가 됐다는 사실을 계속 줄 때마다 우리는 이미 이 자리가 주의 자리기 때문에 십자가 자리기 때문에 그냥 덜렁 누워서 내게 일어난 것을 고자질하시면 그게 매일 우리의 기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제단 위에 누우란 말이 있어요. 우리가 산 제물 된,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우리가 하나님 제단 위에 있는 그래서 주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케 한 사태를 통해서 이미 구원되었음을 그리고 나는 이미 죄인으로서 뭐가 죄인인 줄 알아가는 그런 삶, 주께서 왜 뒤따라 왔는지 왜 주의 이름으로 우리를 납치했는지, 납치해서 구원하시는 은혜를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어야 되는데 죽기로 확정되었지만 곱게 죽이지 않고 우리가 뭘 평소에 좋아했고 무슨 말을 귀 기울였고 남한테 지지 않기 위해서 어떤 투쟁을 하고 있는 죄를 짓는지를 계속해서 깨달을 수 있는 주만 증거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