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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3-11-24 16: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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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오 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간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교신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야 됩니다. 교신하는 지점은 제사장과 선지자입니다. 그들이 무슨 특별한 능력이나 재주가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신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었고 그 율법이 사람들이 원한다고 해서 율법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율법은 우리가 지키면 비로소 효과 보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지키든 안 지키든 그대로 그냥 돌아가게 돼 있어요.
서랍에 있는 다이아몬드가 우리가 다이아몬드라고 불러줄 때 빛을 발하는 게 아니죠. 그냥 서랍에 있더라도 그 고유의 빛을 발하는 것처럼 율법 자체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능력이 발휘되고 아니 되고가 아닙니다. 말씀이라는 게 사람 손에 다루어져야 말씀 되는 게 아니에요.
말씀은 말씀대로 효과를 발휘하는데, 발휘하는데 사람들은 왜 그러면 말씀을 지키는데 복이 안 옵니까? 이렇게 하는데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는 게 이 율법이란 말씀에서 복만 나온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우리가 율법을 안 지키면 그냥 그대로 있고 지키면 복 얻고 그게 아니고 율법에서 저주가 나옵니다.
말씀에 대해서 저주가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 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에게 지금도 지옥 가라고 활동하고 계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천국 가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다루기 나름대로 어떻게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가 결과에 휘말려 있는 그런 입장입니다.
어쨌든 그 당시 사람들이나 자기가 궁금한 게 있어서 하나님과 이 땅과 교신할 수 있는 그 교신 처를 찾죠. 그걸 어려운 말로 매개라 하는데, 매개체, 신과 인간 사이에. 교회서 이야기하는 건 중보자, 다른 말로 하면 매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중보자가 하나다. 이 사실은 우리한테는 지극히 당연하게 보이지만 구약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선지자와 제사장을 모독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그럼 네 교회만 이단 아니고 우리교회는 이단인가?’ 이렇게 머리가 나온다는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걸 안 믿고 어떤 특정 교회를 만들면 그 교회가 주의 말씀을, 주의 계시를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들 생각하는 거예요.
왜 어느 특정 교회가 주의 말씀과 바른 해석을 독점하고 있느냐?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본인들이 독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그 심정으로 남을 바라보다 보니까 ‘너만 잘났나, 우리는 어떠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자란 말은 네 교회, 내 교회 비교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평소에 주의 말씀에는 관심 없고 자꾸 교회 키우는데, 자기 교회 정당화하는데 신경 쓰다 보니까 ‘너만 최고냐? 우리가 더 낫다.’는 식으로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요거는 하나의 팁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아! 저 사람의 관심사는 예수님한테는 관심이 없고 교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구나.‘ 그 자체가 그들이 이단이라는 것을, 예수님한테 시선 돌렸다는 것을 그대로 자기들 입으로 털어놓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궁금한 게 있는데 여기서 하나 생각해야 될 것은 우리가 궁금한 게 있다는 것은 우리가 궁금한 걸 만들어 낸 게 아니고 주님께서 일부러 만나게 하기 위해서 궁금하게 하신 거예요. 고넬료와 베드로, 베드로와 고넬료 사이에 중보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고넬료를 구원하기 위해서 베드로로 하여금 고넬료를 만나게 했죠. 이렇게 중재하는 것, 중매쟁이. 중재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할 수 있지, 다른 사람은 못합니다. 궁금한 게 유발되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궁금한 게 있거든 저 목사 입장에서는 반갑고 고맙습니다. 누가 질문한다는 것은 굉장히 고마운 거죠. 때로는 귀찮을 수도 있는데 귀찮다고 생각하면서 막상 그 질문 받아보면 귀찮다 하는 것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알게 돼요. 새로운 사실을 같이 은혜 받을 수 있는 그런 기회를 하나님께서 부여한 게 됩니다. 그렇다고 쓸데없는 질문하지 마세요. 정의 경제 사회, 천주교 정의 실천 그거는 어떻습니까? 이런 질문 하지 마세요. 천주교 자체가 문제 있는데 그거야 말할 것도 없죠. 언제 예수님이 데모하라 했습니까? 예수님이 뭐 답답해서 기자회견, 예수님이 기자회견하는 거 봤습니까? ‘나 예수인데 기자회견…’ MBC, KBS 불러서, 어떻게 예수님이 그럴 수 있어요? 관심사가 교회에 있고 주님이 관심이 없어요. 자기들이 중보자라는 거예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중보자입니다. 구약에서는 그것이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율법 때문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율법 때문에 그들은 매개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율법의 매개 역할이 끝났다고 한다면 더 이상 선지자나 제사장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들이 필요치 않다는 말은 십일조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고 동시에 십일조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십일조 할 필요가 없다는 뜻 이예요. 결국은. 받을 자격도 없는데 십일조 누구한테 냅니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교회를 주장하는 이유가 교회만이 중보자가 된다면 교회 운영자, 교회 책임자가 십일조를 받아 챙겨야 되겠다는 그 고집도 함께 포함돼 있는 거예요. 다~ 돈! 돈! 돈! 돈! 다 돈 관계입니다.
뭐가 금식하느냐? 금식 때문에 질문하는데 질문 내용이 뭐냐 하면 ‘금식을 할까요? 말까요?’ 하는 겁니다. 금식을 죽 해왔는데 할까요? 말까요? 하는 겁니다. 그러한 것이 있던 것이 “다리오왕 사년 구원 곧 기슬래월 사월”이라 돼 있죠?
대전에 가면 우리 공부 마치고 중국집에 가는데 우리 태 집사님은 기스면을 먹어요. 기스면 그런 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기스면이 아니고 기슬래, 요새 말로 11월 달과 12월 달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벌써 그전부터 금식을 해왔던 거예요. 언제부터? 5월 달, 7월 달. 5월 달은 이스라엘이 멸망, 성전이 멸망한 달이고 7월 달에는 유대 총독이 죽었던 달, 그날을 기념해서 금식을 한 겁니다.
왜 금식을 하느냐, 금식하면 하나님이 다시 원상복귀 해줄 줄 알고 금식을 한 거예요. 성전이 깨졌는데 금식을 했거든요. 그런데 요 다리오 왕 사년이 언제냐 하면 BC 518년경인데 요게 무슨 해냐? 이미 성전을 개시한 것이 522년이니까 성전을 다시 증축하기로 작정하고 공사 시작한지 벌써 사년된 거예요. 성전을 새로 개축하고 신축 잘하고 있는데 옛날처럼 ‘성전 다시 세워주세요.’라고 금식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금식을 그만 둘까요?’라고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 그 당시 매개자들인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물어온 겁니다. 그 답변을 스가랴가 대표해서 답변을 하는 겁니다.
자, 그 이야기가 이 스가랴 7장에 나온다면 그럼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 아니냐? 지금 성전 자체, 건축 구조물 자체가 의미가 없는데 뭣 때문에 그렇게 우리가 볼 필요가 있느냐, 하는데 이 금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금식하는 이유, 금식하면서 기대 되는 효과, 그걸 노리고 금식하는 거예요. 제가 언젠가 강의했죠. 기다리지 마라,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뭔가 희망과 포부 이런 걸 기다리면 그것이 나의 올무가 되고 주님 주신 은혜를 이게 갉아 먹는 게 돼요. 지금 오늘 주신 이걸로 인하여 우리는 감사해야 될 텐데 우리는 감사를 보류할 수밖에 없어요. 왜, 내 뜻이 이루어지면 그때 오늘 못한 감사를 마저 하겠다고 보류하니까 참, 지금 주신 감사는 감사가 아니죠. 하루하루 사는 것에 감사해야 됩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오늘 참석 못하셨어요. 지금도 편찮으셔서 식사도 못하시고 누워계셔서 ‘아! 이제는 가실 모양이다. 아이고, 그럼 다들 반갑고 좋지.’ 라고 하는데 아까 가보니까 이제 일어나 계셔서 오셨어요. 아! 아직까지 주님께서 더 사시게 하시는구나.‘ 어쨌든 내가 기대했던 내가 잘못이네, 분명히 내 입으로 기다리지 말자, 해놓고 뭔가 좋은 소식을 기다렸던 내 자신이 나쁜 놈이구나.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거에요. 할 일 없으면 가야 된다는 거예요. 별 할 일 없으면! 좋은 데 가서 쉬시면 좋으니까요. 괜히 욕하는 것 같은데 욕이 아니고 진심입니다. 기다림을 빨리 앞당기기 위해서 금식을 해보는 거예요. 이거 무슨 객기입니까? 이게 무슨 오기에요? 이것은 자기의 소망에 대한 집착의 다른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맘에 안 든다는 거예요. 아주 짜증난다는 이야깁니다.
광주 갔는데 김 을수 집사님 이야기하는데 한 30분 이야기하면 짜증 이야기 한 10개 나옵니다. 매사가 짜증난다는데, 교장선생님도 짜증나고 교감도 짜증나고 2월초에 결혼하는 딸도 짜증나고, 그 이야기 안 하면 폭발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것은 금식이 옳고 그르고 관계없이 그들은 금식 아니면 미칠 지경이기 때문에 금식하는 겁니다. 바로 그게 바로 금식하는 의도는 나쁘지만 금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보고 좋은 말해서 지시와 명령해서 ‘따라라. 복 줄게.’ 이게 인간 힘으로 안 돼요. 인간은 불평을 통해서 자기가 뭔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게 있고 꿈이 있는데 그것이 무너지면서 실체에서 주체로 바뀌는 겁니다. 아주 어려운 말인데, 실체란 어려운 말, 주체란 더 어려운 말인데 실체란 쉽게 말하면 물건 덩어리, 사물 덩어리, 딱딱한 거, 이건 인간도 아니고 그냥 음식 먹고 내뱉는 기계 같은 존재,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쉽게 갑시다. 끊어진 것은 실체고 이어진 것은 주체고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금식하게 된 것은 하나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아이, 성전 잘 지을까 싶어서 금식까지 하면서 자기 성의를 표시했는데 이제 성전 공사가 사년 됐는데 구태여 지금까지 내가 기 팍 죽고 살 필요 없지. 그럴 필요 없는 거야, 이거 그만 두는 게 옳지 않을까, 물어보러 가자.’ 본인도 하나의 실체, 쇳덩어리,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몰라요.
안에 실체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천국에 사는 백성이 되려면 안에 내용물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 내용물을 말씀이 있고 아무리 율법이 있더라도 그 내용물을 채워봐야 그 인간은 여전히 물건 이예요. 하나의 딱딱한 그러한 기계에 불과한데 요걸 채울 때 채워주면서 여기 뭘 하느냐 하면 두 가지를 없애요. 개체에서 또는 실체에서 하늘나라의 예수님을 섬기는 진짜 하늘나라 백성, 주체로 바뀌려면 두 가지가 지워져야 되는데, 하나는 얼룩이 지워져야 되고 하나는 구멍이 나야 돼요. 얼룩과 구멍.
이건 정신분석학에서 하는 용어인데 얼룩이란 말은 뭐냐 하면 청소할 때, 때가 있어도 아무리 스팀 청소기로 밀고, 밀고 아무리 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아무리 ‘용서해 주세요.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저는 십자가 피로만 용서받습니다.’ 라고 아무리 해도 지워지지 않는 ‘그래도 나는 중요하지.’라는 얼룩 같은 것이 거기 있어요. 얼룩 같은 게 있을 때는 이거를 지운다고 내가 금식하고, 금식하고, 또 금식하고 한다고 해서 지워지는 게 아닙니다. 왜냐 하면 금식하고 돌아서면 나는 금식했다는 대단한 신앙인으로 자부하게 되는 겁니다. 나는 금식했는데 너는 금식도 안 하고 소주 7병 먹고, 나는 금식했는데 너는 금식도 안 하고 이게 뭐야? 나는 금식했는데, 나는 스스로 정갈하게 사는데 나는 반듯하게 사는데, 이게 뭐야?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구멍을 파야 돼요. 덜덜덜덜, 그 지우겠다. 하는 것은 사실은 나 자신을 아주 반짝반짝 빛이 나게 만드는 거예요. 자기 딴아 반성하고 ‘회개합니다. 회개합니다.’ 하지만 회개하면 회개할수록 마치 구두 닦기한테 신발 갖다 맡기는 것처럼 더욱 더 회개했던 그 기억과 그 자랑스러운 그 사건은 자기의 보물처럼 간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금식이라는 제도 앞에서 인간이 기껏 보여주는 자기 정체입니다. 나는 역시 돌에 불과합니다. 내가 인간된다는 것은 말도 되지도 않는 소리입니다. 차라리 내가, 인간들이 돌보고 아브라함 자손이라 하는 그게 더 빠릅니다. 저는 아브라함 자손 될 수도 없고 속할 수 없고 돌멩이보다 더 못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돌멩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함께 하시면 그것이 백성 되거든요.
그 함께 했다는 게 뭐냐 하면 바로 그때는 구멍을 뚫는 거예요. 구멍을 뚫을 때는 어떻게 구멍을 뚫느냐 하면 일단은 우리가 금식해야 돼요. 금식하고 그 금식한 것에 대해서 호되게 책망을 받는 방식입니다. 그 방식이 바로 스가랴 7장 1절에서 나온 겁니다. 성전을 다시 지을 때 이젠 멋있게 보일 때 자기 자신은 이정도 하면 자유롭다고 여길 때 자기 하기 귀찮은 거, 편한 것을 하나, 하나 치워나가고 이제는 법이라는 굴레에서 더 이상 얽매이기 싫은 본연의 사실 내 맘대로 살고 싶은 그런 것들이 나올 때 그걸 호되게 책망 받으면서 그걸 안 하는 게 아니고, 요 말이 중요해요. 막 살면서 이젠 막 안 살아야 돼, 해서 막 안사는 게 아니고, 막 안 살게 되는 게 아니고, 뭔가 내가 어떠냐고 주목하다가 누가 나에게 안 되는 나를 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구멍을 뚫어줬느냐 하는 그 구멍 뚫힘에 우리의 시선이 가도록 그렇게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구멍 뚫고 빈자리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다 십자가로 마저 채우는 거예요. 십자가가 금식이야. 네가 하는 금식은 금식이 아니고 중보자 되신, 매개자 되신 예수님이 네가 책망 받은 그 자리를 마저 채울 때 우리는 주님이 나로 하여금 책망했다는 자체가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는 거예요. 나는 쪼다고 주님은 이렇게 쪼다를 날마다 책망하면서 구원하신다 할 때 이것이 진정한 금식의 완성입니다.
그러면 그 금식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금식하라 했는데 그럼 오늘부터 굶을까요? 굶을까요, 말하지 말고 다이어트 할까요? 이야기해야지, 말을 되도록 해야지. 다이어트도 되고 뭔가 금식하게 되면 주께서 구멍 뚫을 것이요. 그럼 다시…… 뭐 온갖 것 또 기다려요. 어떤 목적까지 기다리는데.
하지만 주께서 다룰 때는 그렇게 다루는 게 아닙니다. 사무엘상 7장 5절은 대단히 유명한 구절인데요. 미스바, 미스바에서 금식하고 회개기도 했습니다. 이게 왜 유명하냐 하면 보통 예배는 평상적인 예배는 그냥 예배드리면 됩니다. 추도예배라든지, 결혼예식 예배라든지 하면 되는데 특별한 것을 목적을 두고 할 때는 그냥 예배로는 성에 차지가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금식에 들어갑니다. 이거는 구약 성경에 보면 그런 대목이 굉장히 많아요. 특별한 일을 앞두고는 금식을 했어요. 밥을 굶었습니다. 행여나 금식을 하게 되면 그 정성이 너무 갸륵하다고 후한 점수를 더 줄 줄 알고 금식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6절에 보면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어떻게 됐습니까? 하나님께서 블레셋 앞에 갑자기 우박을 발해서 어지럽게 하여 그들을 승리케 했습니다.
자, 이게 문제에요. 승리케 안 했으면 ‘에이 씨, 금식도 별 효과 없네.’ 이렇게 되는데 사무엘 상 7장을 후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을 수가 없어요. 금식을 잊을 수 없는 게 아니고 승리했다는 거, 그것도 기적적으로 하늘에서 우박을 내려서, 관심 있다 이거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관심 있게 본다는 겁니다. 관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금식으로 마중 나가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노회할 때 특별히 예배당 새로 신축할 때 특히 가정적으로 어려울 때, 예를 들어서 애가 아픈데 목사님이 기도한다 할 때는 그전에는 아예 금식함으로 말미암아 목사님의 능력 있는 기도 + 자신의 금식했다는 자신의 낮아짐, 그게 결합되면 시너지 효과가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을 하는 거예요. 뭐 금식을 해봐야 알지, 하지도 않고…ㅎ 세 끼 언제 먹을까 싶어서 때마다 다 챙기는데.
심지어 사도바울도 금식하고 다 했었어요. 그러니 금식이라는 것은,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 있지만 금식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말씀은 없거든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키신다 이 말입니다. 이거는 밥이 먹히지 않아요. 금식은 금식해서 나쁘다가 아니라 주께서 금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있게 만듭니다. 그러면 더 살기도 싫어요. 이제는. 그때 우리는 뭐냐 하나님께 다 맡겨야 됩니다. ‘에이, 몰라. 난 몰라, 모르겠어. 하나님 알아서 하세요.’ 마음이 편치 못할 때 뭔가 불안한 조짐도 보이고 이 사태에 대해서 지나간 과거에 내가 생각했던 모든 목표가 한꺼번에 다 무너질 수 있는 그런 위기의 순간! 파멸의 순간! 절망의 순간! 이거 아니면 난 자살로 내 태도를 나타낼 마음준비까지 한 그 순간! 그 순간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나밖에 모르는 이 주체에 구멍을 뚫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제 말은 뭐냐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가 이 땅에 밥 먹고 사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가 하는 결론은 우리는 밥 먹어 가면서 평생 성도는 금식 중에 있습니다. 밥 먹어 가면서! 밥 먹어 봤자, 피자 먹어 보고 치킨 먹어 봐야 십자가 앞에서 이거 먹는다고 천당 가는 것도 아니고 이거 먹는다고 축복받는 것도 아니고 이걸 밥 안 먹는다고 해서 주께서 점수 더 주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결정은, 운명 팔자의 결정은 이미 십자가 부활로 끝장났는데 왜 내가 그걸 잊어버릴까? 잊어버릴 수밖에 없지요. 십자가 늘 쳐다보지는 않잖아요.
자기 계획 하다 보니까 하다가 안 되니까 ‘아이,씨, 밥 먹기 싫어라.’ 그 순간에 주께서 차고 들어와서 다시 한 번 우리 개체에 구멍을 뚫어버리면 ‘아! 십자가 앞에서 내가 오늘도 주께 인도 받는구나.’ 내가 내 뜻대로 안 되고 뭐든지 안 될 때 다시 한 번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십자가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발언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그 즐거움과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계셔야 주체인데 주께서 원하시는 사람인데 우리는 하나님 없이 독단적인 인생 그걸로 만족하려 하는 그런 습성으로 살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구멍을 파서 주의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생명은 딴 데서 온다는 그 금식정신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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