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3a 울산강의-역대기상(17강) 16장 16절 : 말려든 자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16장부터 하겠습니다. 역대상 16장의 보면 하나님의 궤가 나옵니다. 궤는 상자인데 하나님의 상자, 그냥 궤짝이죠. 이 궤짝에 사무엘상 6장 19절, 20절에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돼 있어요. 언약궤란 상자를 봤는데 하나님께서 70명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상자 바깥과 상자의 안의 세계가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는 상자 밖에 있고 하나님은 어디 안에 있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상자 바깥에 있는 인간이 상자 안의 세계를 마치 자기 세계인 양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뭐냐 하면 곧 죽음이에요. 사람이 있고 여기 상자 안에 하나님 있잖아요. 여기 뭐가 설치돼 있단 말입니까? 죽음이 설치돼 있는 거예요, 죽음이.
이게 창세기 3장 24절의 말씀이에요. 하나님께서 생명이 있는 에덴동산에서 내쫓아내버리고 그다음에 다시 들어오면 죽어요. 생명나무가 있는데 이 생명나무에서 인간들이 추방되었어요. 쫓아내고 여기에 두루 도는 화염검, 천사들이 불 칼로 여기에 못 들어오게 했단 말이죠. 만약에 이쪽에 발을 들여놓으면 뭐가 된다? 죽는다는 이야기거든요. 죽어요.
그렇다면 머리가 뛰어난 여러분은 생각할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생명나무 바깥에 살고 있지요. 이 바깥의 세계가 무슨 세계냐? 바로 죽음의 세계지요. 죽음이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굳이 태어나서 살아야 될 세상이 우리 이 세상인 겁니다.
어린아이들, 어릴 때 동화책을 많이 본 소녀 같은 경우에는 공주가 되고 남자아이들은 왕자가 되겠지요. 어릴 때 공주, 왕자로 시작해요. 공주처럼, 왕자처럼. 그런데 좀 크면 여자는 자기를 여자로 봐요. 그리고 남자는 자기를 남성으로 본다고요. 여자는 자기를 여성으로 봐도 되지만 성은 대표자가 남자기 때문에 남성과 여자, 여자로 본다고요. 처음에는 공주에서 많이 양보한 거예요.
그런데 결혼해서 살다보면 여자가 떨어져나가요. 뭐가 되느냐 하면 사람이 돼요. 남자, 여자 관계없이 나는 그냥 사람이구나. 사람에서 좀 더 나가면 나이 들면 내가 괴물이 돼요. 또는 괴수가 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뭐가 되느냐 하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전부 다 흙이 됩니다.
여자 나이 육십 쯤 되게 되면 여자로 안 봐요. 사람으로 봐요. “저기 사람 가네.” 젊은 사람들은, “여자가 가네.” 여자의 시절이 끝나면 사람이 되고 나중에 팔십 되고 요양원에 가면 괴물이 돼요. 나중에 요양병원 졸업하게 되면 뭡니까? 하나의 흙이 되죠. 이게 무슨 세계라 했습니까? 죽음의 세계에요.
이게 하나의 교리입니까, 이게 신학이에요? 우리는 지금 교리를 연구하는 거예요?, 신학이란 지식을 우리가 공부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우리 사는 이 세상 자체를 제대로 보는 것은, 이건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우리 인간이 그동안 자기를 제대로 보질 못한 이유가 저쪽 세계에서 누가 건너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흙이 된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지만 흙 다음에 무엇이냐,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과학이나 철학도 아무 주장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이나 철학을 내세우려면 이 세상에 있는 세상 끝나고 난 뒤에 어떤 세계냐를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세상 끝나기 전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증명해야 돼요. 그게 논문입니다.
논문이란 어디서 나왔느냐? 논문의 모든 소스는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추려내야 돼요. 세상 바깥에 있는 그것으로 이 세상은 이게 진리라고 주장하면 이 세상에선 안 받아줍니다. 그러니까 이 자체가 모순되지요. 죽음이 무엇이냐의 증거는 죽어봐야 아는 것이지 살아 있으면 죽음이 무엇이라고 해봐야 그건 가설이죠.
따라서 인간을 이렇게 죽음으로 내보낸 그쪽 세계에서 누가 건너와야 돼요. 인간을 이렇게 죽음의 세계로 만든 의지를 가지고, 좀 죽어줘, 라고 확실하게 죽음의 세계를 형성하도록 해준 그쪽에서 누가 건너와야 우리가 이 세상에 내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다는 걸 비로소 아는 겁니다.
우리가 공주로 시작해서 남자나 여자로, 그다음에 사람으로, 괴물로, 흙으로 죽는다는 이게 섭섭합니까, 아니면 기분 즐겁습니까? 어떻습니까? 이걸 우리 자신이 밝히면 기분이 섭섭하구먼, 이렇게 되겠는데 어떤 분이 오셔서 이걸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내가 이렇게 된다는 것이 그게 섭섭한 게 아니고 어떤 분이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해주셨다는 그 사실 자체가 기뻐야 돼요.
내가 이 세상에서 뭘 알겠어요? 전혀 모르고 있는 무지 상태의 나를 하나님께서 일괄해서 일괄적으로 다 아시는 분이, 세상은 이렇게 돼야 마땅한 거야. 네 조상이 원래 에덴동산에서 살았는데 추방되어서 후손이 대대로 전부 다 죽음의 세계에 태어나서 죽음의 세계로 사라지는 거야, 라고 누가 이렇게 친절하게 우리 마음속에 알려주는 것, 그 자체가 여러분 즐겁지 않습니까, 기쁘지 않습니까?
사람이 꼭 내가 죽음의 세계에서 태어나서 결국은 죽는다는 사실, 이것이 섭섭해 하지 마시고요. 왜 그래야 되는지를 알 때는 그게 기쁨으로 변해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우리 세계로 건너오신 그분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그분은 죽었지요. 죽었는데 우리는 죽으면 흙이 되면 끝이잖아요. 그분은 점점점 3일 뒤에 어떻게 됐어요? 죽었는데 3일 뒤에 빈 무덤 됐지요. 빈 무덤이란 말은 뭡니까? 시신이 도난당한 게 아니고 그 당사자가 시체 찾으러 온 막달라 마리아 보고, 누굴 찾느냐고 이야기했어요. 크게 써보겠어요.
너는 지금 누굴 찾는가, 또는 누굴 찾느냐? 이렇게 물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조금 전까지 죽으신 분을 찾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 죽었던 분을 찾는다는 말은,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의 모든 언어와 모든 행동과 마음속은 어디에 갇혀있단 말입니까? 죽음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 죽음 안에서 뺑뺑이 돌고 있지요.
죽어서 아는 것 말고 살아 있을 때 눈으로 확인될 수 있는 그 범주 내에서 판단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예요. 죽음 바깥 말고 안쪽의 범주 내에서 시신이 있었는데 여기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에 예수님 하신 말씀이, “네가 누구를 찾느냐?” “죽었던 분을 찾습니다.”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내가 말씀대로 이렇게 살아났잖아.” 말씀대로.
“내가 너한테 한 말이 헛된 말이고 그냥 부질없는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아무것도 아닌 말이었던가. 나는 내가 한 말 그대로 여기서 살아났느니라.” 내가 바로 죽었던 네가 찾고 있는 그 시체의 주인공은 현재 어떻게 됐다? 약속대로 이렇게 살아 있잖아, 하는 순간 막달라 마리아의 생각의 범위는 어떻게 되겠어요? 죽음의 세계에 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어떻게 됩니까? 죽음 이후로 확대됐지요. 이번 수련회 9강 초반에 했잖아요. 죽음 이후로 확대된 거예요.
죽음 이후로 확대된 막달라 마리아 보고, “아이고, 아줌마. 이 땅에 죽음의 세계에 태어나서 고생 많이 했고 참 슬프지요. 죽음의 세계에 태어나서 공주로 왔다가 나중에 흙으로 돌아가는 게 섭섭하지 않습니까? 이거 섭섭하구먼, 그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할 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무슨 생각하겠습니까? “나한테 그걸 알려줬던 이제야 내가 죽음 이후까지 확장되어 알게 된 그 기쁨에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이걸 내가 알게 되다니.”
세상 사람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 그냥 짐작만 하고, 그냥 그럴 수도 있겠지. 종교도 하나의 이론이니까 머릿속에서 나왔으니까 그러면 좋겠지, 가 아니라 이건 뭐 다른 소리, 군소리 못하게 만들었잖아요. 너 누구를 찾느냐고 되묻는 그분이 지금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는 분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 말을 약속을 했다고 할 때 막달라 마리아 속에 뭐가 들어왔습니까? 약속이 들어온 거예요.
주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뱉고 다시 거둬들인 그 관계에서 누가 끌려 들어온 거예요, 말려든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가 같이 끌려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 속에 뭐냐 하면 막달라 마리아의 기술, 공부한 것, 지식, 학식, 덕식 이런 게 있는 게 아니고 주의 말씀이 들어있는 거예요. 주의 말씀이 주도권을 쥐고 들어있는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지요. 제자들한테 가서 “나, 그분 봤다. 그분의 약속은 죽었다 살아난 것뿐 아니고 나머지 모든 말씀도 그게 바로 현실이고 그게 바로 진실이었다. 다른 진실은 나한테 필요 없다.” 3x5=15, 그런 진실은 진실도 아니에요. 그건 진실도 아닙니다. 지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하는 것 진실이다. 그런 진실도 짜증나. 그런 진실은 진실도 아니에요.
저 태평양 건너가면 미국이란 나라 있다. 그건 진실이야. 그 진실은 무슨 의미 있는 데요? 그건 눈에 보이는 죽음의 세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 정도밖에 안 되잖아요. 그 정도 알고 여러분 평생 죽을 때까지 시간 허비하면서 사실래요? 기껏 고정도 아는 것, 신문 보고 AI한테 물어보면 다 아는 고정도 가지고 여러분 인생, 목숨 걸렵니까? 아니잖아요.
방금 이야기한 것이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그 말씀,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지만 오늘 역대상 16장입니다. 역대상 16장에서 하나님의 궤, 상자가 있는데 그 궤에는 하나님이 그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은 어디 있는가? 상자 밖에 있지요. 이걸 글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너는 거기에 있지만 나는 여기에 있다.” 언약궤를 가운데 두고.
그래서 사무엘상 6장에서 언약궤 만지다가 죽었잖아요. 죽으니까 여기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백성들이 애곡하더라. 그다음에 20절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즐거워야 되는데 즐거움이 아니고 공포스럽게 된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는 거기 있지만 나는 여기 있다는 거예요. 함께 있지를 못하는 거예요.
인간은 죽음의 세계에 있고 주님은 생명의 세계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언약궤란 공간을 동원해서 도구를 동원해서 같은 인간의 세상에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인간들이 발발 떨게 만드는 겁니다. 이 세상에 어떤 버뮤다 삼각지라 해서 들어가면 죽는다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다 생명나무 있는 장소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이동시켜버린 거예요.
이동시키니까 인간들은 어디에도 다 갈 수 있지만 그곳에 가면 인간은 죽는다. 그러면 그곳이 저 멀리 눈에 띄지 않는 먼 곳에 있다면 나중에 죽으면 갈게요.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가면 죽는다는 장소를 이스라엘 나라한테는 그게 공존하게 만들었어요. 같은 땅에 약속의 땅에 함께 있게 됐다 이 말입니다. 그게 굉장히 신기하고도 두려울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이 된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의 독특한 점이에요. 다른 민족과 다른 점이에요. 다른 민족은 높은 산에 제사 드리면 돼요.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에요. 하늘이여 받으소서. 옛날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 왕이 제사장 복장으로 비 오라고 기도했잖아요. 그때 특정 제단 세워놓고 했는데 이스라엘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미리 와버렸어요. 너는 죽고 나는 살았다는 그 상황을 같이 공유하게 만든 거예요. 같이 있게 만든 거예요. 인간들만 사는 세계에 하나님이 들어와 버린 겁니다. 누구한테? 이스라엘 나라한테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역대상 16장 봅시다. 여호와 궤를 메고 올 때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다윗이 이제는 아무나에게 언약궤를 맡기지 않습니다. 아무나가 아니고 여기 4절에 보면 누구한테 맡기지요? 레위지파에요. 레위지파는 언약궤를 들여다보면 안 되지만 하여튼 왜 운반할 수 있는 만질 수 있는 사람이 되는가? 제사장과 레위지파 사람들은 하나님께선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걸로 간주하는 표시를 했어요. 제사들한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일단 좀 죽자. “너는 죽은 거야. 너는 산 것 아니야.” 라는 표시를 제사들한테 한 거예요. 레위지파에서 제사장들 나왔으니까. 그러니까 죽은 자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운반할 수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올 때에 그들의 양심을 봤습니까, 도덕을 봤습니까, 인격을 봤습니까? 그들은 뭘 보고 애굽을 나왔습니까? 이게 복음이죠.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복음 압니까, 모릅니까? 딱 결정지을 수 있는 그 내용을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올 때 인격이나 품위나 부모 효도, 양심, 착한 것 그것 보고 하나님께서 내보냈습니까? 뭘 보고 내보냈습니까? 방금 언급했잖아요. 너희들은 일단 죽었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죽어버린 이스라엘은 어디에 싣느냐 하면 죽은 어린양 안에 이스라엘을 품어버립니다.
바깥의 어린양에다 이스라엘을 품으니까 이미 어린양은 죽었잖아요. 피 바랐으니까.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미 죽은 걸 넘어가는 걸 뭐라고 합니까? 유월(절), passover라 하는데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죽었다. 넘어가자.” 이미 죽었으니까 두 번 다시 거기에 대한 죄 문제라든지 거기에 대한 책임을 일체 묻지 않는 거예요. 이걸 복음 안이라 해요. 네가 교회 몇 번 다니고 봉사하고 그런 것 안 묻습니다. 묻지를 않아요.
목사 대접한다고 고기 사줬나, 그런 것 묻지를 않아요. 그냥 뭐냐 하면 너 지금 누구 안에 들어있어? 죽은 어린양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걸 죽은 어린양이 세상 죄를 어린양이라 해서 신약에서 십자가 안이라 해요.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옵니다. 나는 십자가 안에 있다. 십자가 있는데 내가 그 안에 들어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움직일 때 뭐가 움직이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 사도 바울 들어있으니까 사도 바울이 움직인다는 말은 뭐가 움직인다? 십자가가 움직이는 겁니다.
부엌 바닥에 가만있는 냄비가 움직인다? 그러면 그 냄비가 움직이겠어요. 냄비 확 들춰보세요. 그 안에 생쥐 들어있지. 생쥐 들어있으면 생쥐 가면 바깥의 냄비가 그냥 움직이는 게 보이잖아요. 주님께서 이 땅에 복음만이 움직이길 원해요. 인간이여 좀 나대지 마라. 인간이 설치면 안 돼. 복음의 갑옷을 입고, 그게 에베소서 6장에 나옵니다. 전신갑주를 입고(13절).
복음의 갑옷을 입고 움직이게 되면 여기서 마귀가 화살을 쏘고, “네가 부모한테 효도를 했어? 네가 착실히 살았어?” 백날 율법으로 화살을 쏘고, “네가 완전해, 완벽해? 너는 하자 없어, 실수 없어? 너는 제대로 인생 살았어?” 하고 화살을 막 쏴 대죠. 마치 임진왜란 때 거북선 가는데 일본 배에서 화살 쏘잖아요. 그게 먹혀들어갑니까? 안 먹혀들어가죠. 거북선은 지붕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거북선은 세계 최초로 지붕 있는, 세계 최초는 아니에요. 왜? 노아방주가 있기 때문에^^
거북선은 지붕이 있는 배에요. 일본과 해전을 벌이는 일본 배는 다 노출돼 있어요. 거북선에서 불화살 쏘니까 일본 배가 불타고 노량해전에서 침몰하잖아요. 제가 이야기하는 게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누가 너를 쏘리오. 누가 너를 험담할 수 있느냐? 로마서 8장에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파출소장, 교도소? 필요 없어요. 주께서 이미 주님의 판단을 거친 사람이에요. 어린양 속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주님에게 올 수 있는 지옥의 모든 저주는 다 커버가 돼요.
우리 인생 살아도 그리 한 번 살아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비겁한데 비겁한 것 알아요. 얍삽한 것 알아요. 중요한 것은 누구를 증거한다는 것, 십자가 지신 분을 증거한다는 이것이 하나님이 원했던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 십자가 들춰보면 가관이에요. 어떤 건 세리, 어떤 건 창녀, 어떤 것은 도둑놈, 어떤 것은 강도, 어떤 것은 절뚝발이, 어떤 것은 소경, 온갖 사회에서 지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바가지를 하나 썼는데 전부 다 십자가로 바가지를 쓰니까 그 죄를 물을 수가 없네요. 왜?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미 저주받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교회에서 세례 줄 때 하나님 믿습니까, 이러면 안 되고 복음에 대해서 물어서 세례 줘야 돼요. 이 말이 굉장히 수월한 것 같지만 이게 자기 의를 포기할 때만 해당되거든요. 자기 의로움, 나 잘났다 이것 포기 안 하면 우리는 십자가 갑갑해서 지가 벗겨버려요. 나는 잘났는데 그딴 거죽 떼기를 굳이 써야 돼? 나 누구 못지않게 잘났어. 나 그 재미로 사는 거야, 라고 이렇게 큰소리치는 사람에게 십자가 들이밀면 답답하다고 던져버리지요. 이딴 복음 나한텐 필요 없다. 끝까지 난 잘나고 싶어, 이런 거예요.
그러면 왜 하나님은 언약궤를 보내셨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 이스라엘에게 왜 언약궤를 보내셨는가? 그것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주인을 찾아가기 때문에. 주인을 찾아가게 만든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도 사건이고요. 애들이 태어난 것도 사건이고, 그리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교통사고부터 모든 일들은 하나의 사건이에요. 그 사건을 일으킨 주인이 따로 있어요.
이 땅에 일어나는 사건의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모든 사건의 주인을 뭐라고 하느냐? 이걸 기원, 또는 원천, 다른 쉬운 말로 본래의 모습, 본래의 나. 결국 언약궤를 보냈다는 말은 내가 모르는 진짜 나, 내가 처음 출발했던 진짜 나로 하나님께서 데려가기 위해서 언약궤를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언약궤를 통해서.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신기한 일이 뭐냐 하면 상자 하나 들여다봤다고 70명이 죽은 것, 참 신기해요. 그게 뭐라고. 그냥 아카시아나무에다 금박 입힌 건데 그게 뭔데 죽느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상자 만졌는데 사람 죽였다. 이 말은 이 세상 어떤 공장에서 만들었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안 만들었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만들 수가 없지요. 언약궤는 인간이 만들었지요.
그러나 언약궤 속에 있는 걸 만들고 집어넣더라도 그 ★언약궤를 들여다보면 죽는다는 말은, 언약궤를 만들게 하신 분이 인간에게 만들라 해놓고 거기에 하나님이 자기 거처로 삼았다는 뜻이거든요. 이게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참 신기한 일입니까? 참 신기한 일이죠.
그다음에 모든 사건의 주인을 찾아간다는 말은, ★사건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지요. 일어난 일은 꼭 일어날 이유가 있잖아요. 사건에 주인이 있다는 말은 그 사건의 이유를 내 쪽에서 대지 마세요.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갈 이유를 내 쪽에서 굳이 이유를 대지 마세요.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될 이유는 내가 훌륭하기 때문에 자꾸 내 쪽에서 만들어내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 이유는 주인이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말씀으로.
너는 이것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나야 했었어, 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이유를 알려줘요. 하나님 쪽에서 이유를 이미 확정지어서 준다는 말은, 내 쪽에서 나한테 일어나는 이유를 내가 굳이 만들 이유가 없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걸 더 추려보면 뭐냐 하면 이렇게 돼요. 여섯 자입니다.
“이유 없이 살라.” 이유 없이 사세요. 일곱 자로 하면, 이유 없이 살아라. 그냥 이유 없이 살아야 돼요. 사람이 왜 사는 게 힘든 줄 알아요? 이유를 대기 때문에 힘들어요. 우리는 아무 이유가 없는데 자꾸 내 쪽에서 이유를 만들려고 억지를 부리니까 일어난 사건도 힘들고 그걸 정당화하고 변명한다고 그것도 힘들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역이고 지옥인 이유가, 왜 지옥이냐? 자꾸 이유를 만들려니까 지옥이 되는 거예요.
자기 집에 남자 아이가 있으면 “아들 이리와. 내가 오늘 옷 하나 사준 이유를 알아야 돼. 따뜻하게 해서 공부 많이 해라.” 자꾸 엄마가 아들자식 사랑한다고 이유를 대니까 아이는 부담이 되는 거예요. 아마 그 애가 복음을 들었으면 “엄마, 우리가 이유 대면 안 된데. 복음 아는 분이 그러는데 이유 없이 산데.” 이유 없이 사는 게 제일 편해요.
왜 이유 없이 사느냐, 묻거든 이렇게 하세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이 책임을 지려고 하거나 나한테 이유를 대려고 하는 그것이 우리는 당연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진짜 사건의 주인이 와서 이야기하는 것이 뭐라고 하냐 하면 네 죄를 내가 용서한다. 그게 이유거든요.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 식대로, 마이웨이죠.
우리 방식대로 산다는 그것이 다른 분한테는 이게 정상이지만 저쪽 세계에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이야기하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오늘부로 네 죄를 지금 이 순간 너의 죄를 내가 사하기 위해서 용서하기 위해서 왔다는 그 순간부터 뭐가 죄가 돼버렸어요? 우리가 굳이 우리 인생에 대해서 이유를 대는 그것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죄 용서란 말을 함으로써 거기서 마중 나가면서 우리가 죄인인 걸 아는 거예요.
내가 죄 지어놓고 이게 죄라 하는 것은 그건 죄가 아니에요. 그건 기껏 내 양심상 반성하려고 “이건 죄 맞습니다. 맞아도 쌉니다. 고생해도 당연하지요. 지은 죄가 커서.” 맨날 그런 이야기하는데 여러분들 연세 많은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네 꼬라지 보니까, 가슴을 치면서, “내가 못났어. 내가 잘못이지. 내가 죽어야 돼.” 이러잖아요. 진짜 엄마 죽던가요? 그거는 정신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는 거예요, 자식한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이야기에 많이 속아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 내가 못났다? 절대로 안 못났어요. 엄마는 지금 수고했다고 자찬하고 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부흥회 가서 “주여, 내가 이런 죄인입니다.” 그건 죄 아닙니다. 죄라는 것은 지 죄를 알아서 용서받는 게 아니고 죄 용서받는 그 순간 그제야 아는 것이 뭐냐?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죄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러니까 이 땅에 살면서 내가 책임질 내 일은 없고 전부다 누구 일이냐 하면 주님의 일이에요. 죄 용서도 주님의 일이고, 이유 대지 말라는 것은 주께서 당부하신 거고 모두 그렇게 하신 거예요. 저쪽 세계에서 건너온 것도 우리보고 오라고 한 게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오셨고요.
아까 했던 문장을 다시 써보겠습니다. 너는 거기에 있고 나는(하나님) 여기에 있다. 그러면 거기는 어디고, 여기는 어디냐? 거기는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또는 이걸 세상이란 곳에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은 말씀 안에 계셔요. 그러니까 말씀세계와 현실세계가 하나님이 안 오시면 이 세상에 둘로 안 나누는데 오셨기 때문에 말씀세계 따로 있고 그냥 인간들이 태어나면서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 따로 있는 거예요.
현실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현실세계에서 어디로 들어온 거예요? 말씀세계 안으로 들어온 겁니다. 아까 같이 거북선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또는 십자가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또는 어린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 보호막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 안의 세계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마감되고 완료되고 완성된 말씀의 세계가 여기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 현실세계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말씀세계에 들어오지 못하고 현실세계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게 있어요. 승자와 패자, 또는 패배자의 세계입니다. 말씀 밖의 세계는 승자와 패배자 둘로 나눠져요. 언제? 매일, 매일같이. 물론 집에서 게임하는 사람은 게임할 때마다 늘 느끼지만.
실제로 게임 안 하고 일상 출근하고 퇴근해도 항상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저 사람한테 말발로 이겼느냐 졌느냐? 내가 직장에서 동료와 만날 때 이 타이밍에 이긴 순간이었어, 안 그러면 내가 굴욕적인 순간이었어? 늘 따지게 되는 것이 현실세계입니다. 늘 이기면 좋겠지요. 그러나 이겼다가 졌다가, 이겼다가 졌다가 지게 되면 이긴 기쁨은 다 날아가고 졌다는 굴욕감, 좌절감 인생 살기 싫네, 이런 것 있잖아요.
회사에서 이야기합니다. 이번 달 이 과에 있는 사람들 보너스 백만 원 드리겠습니다, 할 때 총무과라면 그 과에 있는 직원들은 와~하고 환호성을 지르겠지요. 자, 우리가 방금 생각했습니다. 현실세계에서는 뭐가 있다했습니까? 승자와 패자만 구분돼요. 그렇다면 총무과가 백만 원 받았다면 사장이 총무과 수고했어. 특별히 백만 원 보너스 쏜다, 할 때 왜 그들이 기쁩니까? 다른 과에는 뭐가 없어요? 백만 원 보너스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백만 원 보너스 없는 것과 백만 원 보너스 있는 내가 어떻게 돼요? 내가 승자가 되지요. 그러니까 기쁜 거예요.
또 하나 예를 들면 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내 친구는 저쪽 단지 아파트를 샀고, 그 시기에 나는 이쪽 단지 아파트를 샀어요. 복덕방 말 들어보니까 내 쪽 단지가 오천만 원 올랐다는 거예요. 시세가. 그런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내 친구 아파트는 사억 내려갔답니다. 내 쪽 아파트 값은 보합세고 저쪽은 사억 내려갔데요. 기분 좋아요, 기분 안 좋아요? 기분 째지지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뭐만 있다고요? 승자와 패자만 있어요. 드라마 보는데 진짜 내가 싫어하는 배우가 캐스팅 돼서 그 드라마 볼 때마다 꼴 보기 싫은 것 계속 보게 됐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배우가 캐스팅되기 전에 이혼했데. 그 순간 기뻐요, 안 기뻐요? 정치적 발언하면 안 되는데 특히 울산, 대구, 경북에서 이재명 돈 받아먹었다는 소리 들을 때 조국이란 사람이 징역 2년 선고 받았다고 할 때 여러분한테 누가 돈 챙겨주던가요?
돈 안 챙겨주더라도, 이거는 절대로 전라도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내가 못된 경상도 사람에게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상 보이지요. 좌파 싫어하는 사람이 좌파 쪽 사람이 징역 살면 갑자기 기분 좋지요. 안 좋은 척하지 마세요.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게 뭐냐 하면 현실세계에요.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면서 자기 삶의 아픔을 그런 식으로 해소하려 하는 거예요.
자, 궁금한 것은 뭐냐? 현실세계는 승자와 패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보너스 받고 복도로 나왔는데 다른 과도 와~하거든요. 왜 좋아하는데? 보너스 받았대. 그때 궁금한 거예요. 얼마 받았는데? 이백만 원 받았대. 아까 좋아했던 것 다 날아갔어요. 왜? 누가 승자입니까? 이백만 원이 승자에요. 우리는 그 굴곡에 살아요. 매일같이 그 굴곡이에요. 그게 사건이에요. 그 사건 주인 누굽니까? 우리 주님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내 성공에 웃고, 내 실패에 울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 못되면 기뻐하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 잘되면 또 울고. 이게 현실세계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알건 뭡니까? 말씀세계는 뭐로 나눠지느냐? 궁금하지 않습니까. 알려드려야 될 책임이 저한테 있지요. 말씀세계는 승자와 패자가 아니고 사랑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 이 차이점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밀양>(2007년)이란 영화가 있어요. 그 주인공이 누구죠? 전도연(신애 역).
그 사람은 아들이 죽었을 때 너무 패배에요.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밀양까지 와서 피아노 레슨하며 사는데 애가 납치되었다 죽었어요. 이건 패배지요. 그러나 패배지만 약간이나마 위로가 되는 것이 유괴해서 죽인을 범인 잡혔어요. 사형선고 받았어요. 약간, 정말 약간 되겠지요. 범인이 잡혔으니까 백 퍼센트 가운데 1%라고 합시다. 그런데 전도연은 99% 이 아픔을 뭐로 채웠습니까? 교회에서 부흥회하다 은혜 받았지요.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이젠 제가 천국 갑니다. 은혜 받았지요.
은혜 받고 난 뒤에 교회에서 봉사하는데 교도소 죄수들 위로해주고 복음 전하는 봉사를 하면서 같이 가게 되었어요. 그때 전도연이 패자겠습니까, 승자겠습니까? 승자지요. 또 누굴 만났느냐? 자기 아들을 죽인 죄수를 만났어요. 여전히 그는 의기양양 승자에요. 그래서 손양원 목사, 자기 아들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았다는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처럼 자기도 대단한 신앙인인 것을 티내기 위해서 내가 승리자란 것을 티내기 위해서 그 범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당신 같은 천하의 살인자도 나 같이 어진 천사 같은 엄마가 있어서 당신한테 복음을 전하니까 내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서 구원 받으세요, 이렇게 하니까 그 죄수가 하는 말이, “아줌마가 이야기 안 해도 나는 교도소에서 복음 받아서 이미 구원 받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자기는 승자로 행세하고 싶은데 갑자기 뭐가 됐어요? 패배자가 됐지요.
그러면 전도연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건 결국 뭡니까? 이 땅에서 자기에서 나온 패배감을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걸 메워서 이제는 패배자 아니고 승리자로 군림하려는 자기욕망의 화신이 된 겁니다. 세상에서 망해버린 내 인생 교회의 목사, 장로 되어 그걸 보상받으려는 심보, 그건 말씀세계입니까, 현실세계입니까? 현실세계에요. 그걸 아셔야 돼요.
이 말씀세계에서는 사랑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 두 종류밖에 없어요. 왜? 이 말씀세계에서는 나는 여기 있다는 말은 말씀세계 바깥에 있는 자는 전부 다 똑같은 사람이에요. 다 어떤 사람입니까, 산 자에요 죽은 자에요? 죽은 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죽은 자에요. 우리 예수님 시체 어디 있지?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마리아야 너 누굴 찾는데? 왜 산 자를 죽은 자에서 찾느냐?”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아하, 진짜 막달라 마리아는 진짜 사랑받은 사람이에요. 주님의 말씀세계가 덮쳐서 이제는 막달라 마리아는 주의 말씀이 들어올 거예요. 들어왔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누가와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그거는 말씀세계가 아니에요. 이미 죽은 자를 예수님 본인처럼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이미 죽은 자를 생명을 줘서 살려내기 위해서 주께서 일부러 찾아왔잖아요. 찾아와서 너의 죄를 사한다 했거든요.
그 말은 우리가 이 땅에서 패배자 되지 않고 승자로 군림해서 죽을 때까지 우러러 보는 그런 대상이 되겠다는 그 자체가 네가 죽어야 될 이유라고 내가 너한테 일러주마. 그런 뜻이에요. 니가 살아간 이유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줘야 돼요. 내가 내 이유를 변명하면 안 돼요. 주께서 주신 이유는 죄 사함의 원칙에 의해서 주기 때문에 너는 이런 죄 때문에 너는 죽을 수밖에 없어. 네가 그동안 네 죄를 몰랐어. 왜? 죄 사함을 안 받았기 때문에 죄를 몰랐던 거예요.
죄를 누가 고릅니까? 내가 고르는 거예요. 내가 골라서 내가 의인이 되면 뭐가 된다? 내가 의인 되면 졸지에 뭐가 돼요? 내가 의인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말씀세계에서 패배자가 아니고 승자로 군림하려는 자기 본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거예요. 이것은 말씀세계 아닙니다. 이거는 현실 종교의 세계에요. 하나님 하신 것 빨아 당겨서 지가 전에는 패배였지만 지금 승리자로 군림하겠다는 그 의욕, 그 본심 이건 큰일 날 이야기입니다. 가짜에요. 신앙 아닙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에요. 인간의 육신은 이런 짓을 하게 돼 있는데 이런 짓 나올 때마다 아하 이게 바로 주께서 살려고 가는 죄의 리스트에 해당되는 이야기군요. 그걸 우리가 기쁨으로 받아들이면 돼요. 이거 또 죄 지었군요, 제가. 남한테 지기 싫은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내 자존심.
여러분 부부싸움 할 때 이유가 뭐예요? 여러분은 부부싸움 해본 적 없어서 잘 모를 거예요. 부부싸움을 왜 하는 줄 알아요? 여러분 말고 다른 쪽에. 자존심 때문에 하잖아요. 자존심이 뭡니까? 패배자가 되지 않고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 까이기 전에 까는 거예요. 이 본심, 이것 죽을 때까지 지워질까요, 안 지워질까요? 이게 우리 본성인데 안 지워지지요.
안 지워져도 괜찮아요. 왜? 이게 바로 죄 사함 때문에 비로소 내가 몰랐던 뭐가 됩니까? 내가 죄가 되는 겁니다. 내 죄를 나의 기원, 원천, 나의 본질 이걸 안다는 것 이게 섭섭한 일이 아니고 너무나 기쁜 일입니다. 10분 쉽시다.
20230203b 울산강의-역대기상(17강) 16장 16절 : 말려든 자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서 언약궤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언약이거든요. 언약이 뭐냐 할 때 이것만 생각하면 돼요. 무지개만 생각하면 됩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언약 이후에 무지개가 하나 떴습니다. 하늘에 무지개가 떴어요. 이 세상이 있단 말이죠. 그럼 이 무지개가 이 세상에 어디에서도 다 보이게 돼 있어요. 각자의 무지개가 피겠지만 보인다.
이 말은 언약의 세계란 것은, 인간들이 말하는 현실을 언약이 덮는다, 덮어버린다. 전부 더 덮어버렸다. 덮어버렸단 말은 빠져나갈 수 있다, 없다? 하나님의 약속에 빠져나갈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는 건지시고 버릴 자는 버리시는 거예요. 사랑하는 자에게는 찾아오시고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안 찾아오지요. 찾아오질 않아요. 고집스럽게 지 잘난 맛에 살도록 만들지요.
그래서 노아언약에서는 이 물리적 환경 바깥에 무지개 있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전체를 하나님이 덮어있다는 그 사실을 말씀이 되어서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버려요.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자, 그게 마음 안에 들어오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아브라함 안에 들어오게 되고 이삭에게 들어오고 야곱에게 들어왔을 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 되느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여기 역대상 16장 15절, 16절, 17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할지어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이는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 특정 인간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동반해서 하나님 자체가 들어와 버린 겁니다.
약속은 아브라함이 이룹니다, 하나님이 이룹니까? 하나님이 이뤄요. 이삭에 들어온 약속은 하나님이 이룹니다. 그래서 이삭을 통해서 이뤘다, 이삭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하나님은 특정 인간 속에 들어와서 그 인간 속의 어떤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속마음, 속심정이 이렇다는 것을 드러내시는 하나님.
마지막에는 누구의 하나님이겠습니까? 마지막에서는 예수님의 하나님. 예수님의 하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들에 대한 아버지로서 오신 분이 바로 마지막에는 하나님입니다.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써 아들을 존중함으로써 아버지를 존중하는 그러한 구조로 이 땅에 오시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돼요. 아브라함에서 하나님 쪽으로 이게 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브라함을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방향이 하나님 쪽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지요. 인간 쪽에선 하나님을 못 찾아갑니다. 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오지 말라 했으니까. 죽음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여다보면 죽어요.
하나님 쪽에서 인간 쪽에 와서 죽어야 될 인간 속에 하나님 자신이 들어오게 되면 죽어야 될 인간 속에 하나님에 의해서 언약이 살아 있는 말씀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 이렇게 만들어지게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했잖아요. 막달라 마리아 속에 주님이 들어와 버리면 주님 자신이 막달라 마리아 모습을 통해서 계속 움직여나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하기를 그럼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충분한 데 이삭의 하나님 되고, 야곱의 하나님 되는 이유가 뭐냐? 여러분들이 이걸 굉장히, 나 혼자 궁금하지요, 여러분은 안 궁금한데……. 왜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충분한 데 이삭, 야곱 이렇게 가느냐?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이게 점점 나와서 여기에 하나님이 마지막에 하나님=인간,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모습으로 직접 하나님이 육신 속에 들어온 게 아니고 하나님 자체가 사람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들에게 눈에 띄잖아요. 누구 속에 내 마음 봐라, 하면 내 마음이 보입니까? “니 내 마음 모르나?” “마음을 끄집어내, 볼게.” 그런데 마음이 보입니까? 안 보이잖아요. 알 수 없다 이 말이죠. 두 사람이 서로 만나는 데 여기 남자 다섯 명, 여자 다섯 명 서로 미팅을 한다 합시다. 그런데 모두들 착각이에요. “아가씨가 나한테 말을 좋게 하더라. 그럼 우리 결혼할 사이인가?” 말 한 번 좋게 했다고 결혼할 사이가 되고 전부 다 오해와 곡해로 엉망진창 되지요.
그럴 때 그 마음을 한 번 봤으면 좋겠다 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볼 수 없어요. 그런데 보게 해주는 게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이게 내 마음이다, 됐냐?” 주시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마음이 뭐냐? 그게 하나님이 자진해서 피해자/희생자가 되는 게 주의 마음입니다. “인간들아, 이리 와. 내가 너희들 위해 죽어줄 게.”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하나님의 마음이 예수님이 되셨다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는 목적이 이미 정해졌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처럼 내가 온 것은 내 양을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리기 위해서 왔다. 이건 누가 날 죽이는 게 아니고 내가 알아서 버린다.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입니다. 이게 예수님 마음인 동시에 누구 마음이겠어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마음, 마음, 하나님이 어떤 마음일까? 그 마음이 바로 예수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서 예수께 오면서 역대상 16장은 어디에 속하는가? 여기 중간에 다윗 지점이에요. 그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다윗의 하나님이에요. 다윗께 언약을 주신 다윗의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 차이가 있을 거고, 차이가 있으니까 따로 있을 것 아닙니까.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 차이가 있을 거고, 야곱의 하나님과 다윗의 하나님 차이가 있을 거란 말이죠. 또 다윗의 하나님과 예수님에 또 차이가 있을 거고.
차이가 있다는 건 틀리다는 말이 아니고 조금씩, 조금씩 그 본질에 점점 더 구체적으로 분명해지는 거예요. 확연해지는 거예요. 모호하고 희미했던 진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다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절차를 경유해서 오셔야 돼요. 그러면 여기에서 두 번째 시간에는 뭐냐? 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다윗과 예수님의 그 차이점, 틀린 점이 아니고 서로 다른 주장하는 게 아니고 조금씩, 조금씩 내용이 더 깊어지는 차이점을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식이 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온 하나님은 이 세상 자식을 없애버렸습니다. 육으로 난 자식을 없애버렸어요. 자식을 없애놓고 네 자식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식을 죽여 놓고. 이 말은 아담 계통으로 범죄 한 DNA, 악마와 결탁한 그 속성, 자기 잘남, 자기 의로움, 자기밖에 모르는 그 더러움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담 계통을 잘라버리는 거예요. 중간에 자르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자를 때에 이 자식은 기존의 아담의 DNA, 혈통이 아니고 다른 혈통이다 해서 온 게 뭐냐 하면 할례입니다. 할례언약이에요. 남성의 생식기를 자름으로 말미암아 그게 하나의 사인이거든요, 문서거든요. 만약에 내 아내에게 자식이 생긴다면 그건 결코 내 자식이 아니다. 그건 뭐냐? 내 속의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약속의 자식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을 때 약속을 던져줘요. 네가 나중에 내년에 이만쯤에 자식을 있을 거라고 던져놓고 그다음은 자식이 없지요. 그리고 하는 말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많아질 것이다. 자식도 없는데 앞뒤가 논리가 안 맞지요. 모든 이유는 주님이 준다 했지요. 도대체 성립이 안 돼요.
아브라함의 언약의 특징은 뭐냐 하면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안 받는다. 인간이 예상하는 일은 일체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뭐냐? 내가 할 수 없고 내가 예상 못한 것이 뭐가 아직도 내 인생에 달라붙었는지 그걸 찾아보세요. 그 사람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에요. 내가 하지 못한 것, 도저히 생각도 못한 일들이 여러분 앞에 달라붙어있을 거예요. 그게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그럼 자식은 뭐냐? 자식은 없는 데서 약속으로 생긴 것이 이삭입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에요. 일반인과 다른.
그러면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 차이점은 뭐냐?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약속의 자식은 다 좋다, 다 귀하다 또는 다 사랑스럽다. 이삭에 오게 되면 나는 하나님이 주신 자식은 다 좋고, 다 귀하고, 다 사랑스럽고 나는 자식이 너무너무 좋아. 이거는 아브라함 때는 이삭을 그렇게 사랑했었어요. 그런데 그 이삭을 하나님께서 모리아 산에서 잃어버리는 절차를 밟게 해요.
그런데 이삭의 경우는 뭐냐 하면 이삭의 부인도 아기를 못 낳아요. 그런데 쌍둥이를 준 거예요. 쌍둥이를 주니까 여기서 이삭은 호불호, 좋은 아이와 좋지 않은 아이 사이에 틈이 갈라져버린 거예요. 나는 자식은 다 좋지만 특별히 맏이 선호, 맏아들 좋아하잖아요. 맏이 에서와 둘째 야곱 가운데서 아버지는 누굴 밀어주느냐? 끝까지 에서에게만 축복이 가게 만드는 것이 이삭입니다.
아버지로서 둘째는 싫고 첫째는 마음에 들어서 끝까지 첫째에서 복을 상속권을 주기로 나는 확정, 굳게 믿고 죽을 때 나중에 눈이 어두워서 축복할 때도 이삭은 큰아들을 밀어붙입니다. 왜? 그거는 이삭 본인의 마음이기 때문에. 자기가 좋아 보이니까. 그런데 막상 축복을 주고 첫째 아들에게 축복이 몽땅 갔다고 생각했지 둘째한테 갔다고 생각 못했거든요.
축복 주고 있으니까 뒤에서 아버지여, 하고 헐레벌떡해서, “여기 내가 사냥해서 고기 가져왔습니다.” “누구세요?” “저 맏이에요.” “그럼 아까 걔는?” “걔는 동생인데 아버질 속인 겁니다.”라고 했을 때 이건 뭐냐? 이삭은 거기서 뭐가 깨지는가? 자신의 결정과 자신의 취향, 자기 스타일, 판단 이걸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침투해서 완전히 박살냈지요.
하나님이 귀한 자식 쌍둥이 줬어요. 일단 주니까 감사하고 둘을 줌으로써 내가 원하는 자식에게 나의 소원이 여기에 머물지 않도록 내가 기피하는 자에게 복이 가버리는, 내 뜻과 내가 원하는 노선과 뒤바뀌는 그 작업을 벌이시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에요. 그게 이삭의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께서 너에게 아담 계통 말고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할 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리고 난 뒤에 인생 살면서 하나님 주신 것, 나 저것 좋아합니다, 저것 내 것, 저것 내 것 이렇게 할 때 주께선 “그게 너 좋아하는 거야?” “정말 너무 좋아해요.” 하면 뒤집기 들어가요. “좋아해?”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업어치기다.”
좋아하는 것을 주지 않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 자체가 하나님이 받지 않는 마음인 것을 알지요. 에서를 밀어붙였던 이삭을 하나님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뭐냐? 야곱한테 속아 넘어간 그 이삭을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이 말을 이렇게 한 문장으로 할 수 있지요.
속지 않으려고 하니 진리를 거부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자기 판단과 자기 결정에 하자가 없다고 우기지만 하자가 없다고 우기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게 죄인에서 나오는 죄의 모습이에요. 하자 있음에도 지가 하자 있다는 걸 몰라요. 자기 판단, 결정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 인생 잘 살았다고 우기는 겁니다. 자꾸 자기가 속지 않으려고 하니까 진리와 멀어지는 거예요.
그럼 진리는 뭐냐? 내 뜻대로 안 되게 찾아오는 게 진리에요. 그러니 얼마나 고마워요. 내 뜻대로 하면 지옥 가야 돼요. 그런데 주께선 내 뜻대로 안 해주셔서 천국 보내시는 겁니다. 너무 고맙지 않습니까? 매 순간 그래요. 우리 뜻은 넓은 길로 가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선 우리 뜻대로 안 해주니까 생명의 길, 좁은 길로 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서 천국 들어왔습니까? 이건 제 뜻이 아니고 누구 뜻이다? 이건 아버지의 뜻이지 내 뜻을 꺾어버린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삭의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라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공로를 돌리는 그 도착지점이 바로 천국입니다.
속지 않으려니까 마귀한테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마귀는 맨날 “제대로 판단해. 요모조모 따져보고 판단해.” 하거든요. 훌륭한 선택이 나를 망치는 거예요. 정확한 선택이 나를 망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리석은 선택할까요? 우리는 절대 어리석은 선택할 위인들이 아니에요. 온갖 것 다 고려해서 하는 거예요. 비트코인 할 때도 주식 할 때 온갖 것 다 생각해서 지금 주식 팔 때냐 살 때냐? 돈 있는 사람 이야기지만. 그 온갖 것 다 따져보고 하는 거예요.
내가 옳다고 여기는 그것이 나를 망치는 겁니다. 그러면 옳지 않게 행동하면 안 망하느냐? 우리는 옳지 않은 행동은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해요. 나는 망한 게 맞는다고 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맞이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그 대목 보면서 사람들은 생각할 거예요.
오늘날 우리 아버지 같으면 뒤늦게 둘째 아들에게 속았잖아요. 그러면 아주 대노하고 “물려, 물려. 새로 할 거야.” 얼마든지 아버지의 권위로 새로 할 수 있잖아요. 이삭은 그걸 하지 않아요. 왜냐? 내가 몰랐던 나의 본모습을 이삭의 하나님한테 들켰으니까 이건 마땅히 내가 그냥 받아들여야 될 결과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죠. 왜냐하면 내가 알 수 없는 나의 본질을 일깨워준 것에 대해서 감사한단 말이죠.
“네가 나한테 거짓말 안 했으면 나는 잘난 존재로 착각할 뻔했어, 이 야곱아.” 그래서 뒤에 에서가 막 울어요. “아버지 내 편이잖아요. 나한테 다 준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습니까?” 그러니까 아버지 하는 말이 “그래 나는 네 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네 편 아니고 동생 편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다. 우리 그만하자. 우리 야곱한테 진 거야. 너 동생 말 잘 들어. 안 그러면 저주받아.” 이런 식으로 나중에 형한테 저주를 해버렸어요.
자기가 밀어붙였던 자기가 너무 좋아했던 자식에게 아버지는 아낌없이 저주를 확인 사살하듯이 저주해놓고 또 저주를 퍼부어요. 그게 바로 이삭의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된 거예요. 내 어설픔을 허접함을 아니까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된 거예요. 똑똑한 내가 아는 하나님은 가짜였습니다. 엉망진창인 나를 알 때 그걸 용납해주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세 번째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을 줬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하나님은 뭐냐 하면 소유에 매인 인간 자체를 죄를 고발하는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에요. 야곱이 복을 받았어요. 소유했어요. 요새 말하는 것처럼 나는 구원을 소유했다, 나는 천국을 소유했어, 영생을 소유했다. 항상 뭔가 내가 갖고 있다. 누가? 내가.
갖고 있는 내가 나로 인하여 승리자가 된다. 내 인생 미래는 확정된다, 라고 했던 그 야곱, 야곱의 하나님은 뭘 바꾸느냐 하면 요 ‘나’를 바꿔요. 나를 이걸 펑크를 냅니다. 여기 나를 구멍을 만들어요. 맨홀 있지요. 어떤 사람이 개를 끌고 가면 저 사람이 앞에 가는 저 개 주인이야. 남들이 본 듯이 가다가 그 개 주인이 맨홀에 빠져버렸어요. 맨홀에 빠지면 그럼 개 주인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우리는 마치 루돌프 사슴처럼 산타클로스처럼 내 소유를 루돌프 사슴에 실어놓고 평생을 끌고 요양병원 갈 때까지 계속 갑니다. “이 땅은 죽을 때 너에게 유산으로 줄게. 지금은 안 돼.” “아버지 정신 멀쩡할 때 자식 셋인데 알아서 삼분의 일씩 하든지 안 그러면 서약서 해서…….”
“안 돼. 너희들 내 재산 가져가면 과시할 거야. 유튜브에서 많은 소리 들었다. 재산 놓으면 자식한테 버림받는다는 그 소리 들었기 때문에 버림 안 받기 위해서 내가 큰소리치는 집안의 어른이 되기 위해서 절대로 죽을 때까지 안 내놓는다. 그래야 너희들이 설날에 찾아오지 안 그러면 안 찾아온다.” 돈 나눠주면 안 찾아온다는 그 말은 맞는 말이에요. 아플 때 절대로 안 온다. 그 말 맞는 말이죠. 그런데 그 맞는 말, 이삭의 하나님에 의하면 옳은 판단이 본인을 망치지요.
야곱은 복을 받았어요. 그리고 자식도 열두 명이에요. 야곱이 복 받아서 형한테 도망쳤잖아요. 야곱이 맨홀에 빠졌습니다. 야곱은 복을 받을 자격이 못돼요. 야곱의 복은 뭐냐? 야곱이 야곱 자체를 죽이는 것, 이게 야곱의 복이에요. 내가 죽는 게 복입니다. 누구냐? 나를 죽이는 자가 내 자리에 들어와요. 자리 체인지. 내 자리를 누가 덮쳐요. 중첩이죠. 나는 나 혼자 살고 있는데 누가 나를 덮치는 것, 덮쳐버려요. 나를 깔아뭉개버려요. 나는 납작하게 되겠지요.
위를 올려다보니까 누가 나를 누르고 있어요. 그분이 누구냐?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나를 해서 무력으로 내 모가지를 눌러요. 마치 미국의 경찰처럼 흑인의 목을 눌러 죽이듯이 나를 눌러버립니다. 매일같이. 아침에 출근하자 하면 주님께서 눌러버려요. 아침에 운전하면 주께서 네가 운전하냐 내가 운전하지. 주께서 나를 매일같이 나의 자리를 압박을 해서 먹고 마시고 머리카락 하나 발걸음 하나까지 이건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허락해서 하는 거다. 내가 힘 줄 경우만 할 수 있는 거예요. 나는 못하는 거예요. 그게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야곱을 통해서 하실 일이 있어요. 야곱이 그다음부터 자식을 낳는데 그전에 자식을 많이 낳았잖아요. 낳은 자식들을 누가 구원하느냐? 야곱이 구원하지 않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구원해요. 어떻게 구원하느냐? 아브라함의 믿음을 누가 했습니까? 이삭이 아브라함을 살렸지요. 이삭을 누가 살립니까? 이삭을 누가 변화시켰어요? 야곱이 살렸지요. 형들에게 미움 받은 요셉이 아버지와 형들 다 살려내요.
그런데 그때 야곱은 뭐했는가? 자식 하나 버렸지요. 왜? 피가 있으니까. 자기가 채색 옷을 입혔고, 특별 사랑은 받은 것은 자기 아내 라헬을 너무 사랑해서 그렇게 했고. 사랑하는 아내의 첫 번째 낳은 맏이 요셉을 너무 극진하게 사랑해서 딴 아이들과 차별화해서 채색 옷을 입혔는데 나중에 심부름시킨 아이는 없고 그 채색 옷에 피가 묻은 거예요. 그리고 형들이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짐승이 와서 요셉을 죽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국과수에 보내서 그 피가 짐승의 핀지 사람의 핀지 조사를 할 텐데 CCTV가 있었습니까, DNA 조사하는 게 있었습니까? 그냥 형들이 와서 “아버지 너무 서러워하지 마세요. 요셉 죽었습니다.” 할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듯이 이삭이 자기 사랑하는 에서에게 자기가 친히 저주를 선포할 때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의 잃어버림이죠.
자신이 걸었던 모든 것의 낭패, 내가 나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끌어 모았던 모든 것이 아무짝도 없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지요. 야곱은 그냥 웁니다. 이제 아무 낙이 없어요. 야곱이 이런 이야기합니다. “차라리 요셉 따라 나도 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야곱에게는 요셉의 형들이 어떻게 해도 위로가 되지 않아요. 왜? 자기 자신과 일치된 사랑하는 아들 독자가 죽었으니까 무슨 낙으로 살겠어요.
그 독자 요셉이 하나님의 꿈에 의해서 혼자 돌아다니면서 나중에 그 아버지와 형제들 다 굶어죽게 되었을 때 누가 구원했습니까? 요셉이 국무총리 되어서 형들을 멀리 있는 남의 나라에 있는 고센 땅에 와서 아버지, 엄마까지 큰 호강을 시켜줬어요. 그 고센 땅이 애굽에서 강남지역이거든요. 제일 농사가 잘되는 지역에다 살게 했습니다. 누구 빽으로? 국무총리 빽으로 밀어줘서 살게 했지요.
그때 애굽에서 야곱의 자손의 수가 하늘의 별만큼 창대했던 겁니다. 누구 방식으로? 인간의 아이디어로? 아니지요. 인간을 죽여 놓고 주께서 일하시는 거예요. 인간이 예상 못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그런 식으로 이끈 거예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혈육을 끊어버렸습니다. 이삭의 하나님은 자기가 선호하고 좋아하는 것, 그것 주의 뜻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와서는 한 발자국 더 나가지요. 아예 복을 받겠다는 나 자신을 하나님께서 밟아 죽여 버려요. 야곱을 죽이고 야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로 살게 만들지요.
그러면 그다음에 다윗, 다윗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다윗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 다윗을 혈통을 없애는 게 아니고 혈통을 바꿔치기하는 그런 언약이에요. 지금 역대상 16장은 다윗시대입니다. 메시아, 구원지지요. 메시아가 어떻게 오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으로 와요. 다윗의 자손으로 오면 사람들은 다윗의 혈통 기다리면 메시아 오겠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아니에요.
다윗의 혈통으로 두 가닥으로 나눠져요. 하나는 말아먹을 혈통이죠. 죄로 가는 노선, 족보 있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와 관련된 혈통이 나오는데 이게 어려워요. 다윗에서 메시아로 가려면 다윗의 자손으로 이어지려면 여기서 다윗의 인생에 같이 꼬여서 다윗으로부터 피해 받은 피해자가 됨으로써 다윗의 혈통에 편입하는 노선이 되는 겁니다.
다윗이 벌인 그 일에 자기 인생 있잖아요. 자기 인생이 따로 있는데 어디로 꼬이느냐? 다윗을 만남으로 다윗에게 꼬여서 지 인생 망쳐버려요. 그 사람이 누구겠어요? 우리야 장군. 참 억울한 거예요, 본인 입장에선. 성경 몇 군데 읽어드리면 로마서 1장에 보면,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절) 3절에 보면,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그다음에 영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서 다윗의 혈통이라 하는데 다윗의 혈통에 대해서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보면 어떻게 노선이 둘로 나눠지는가? 노선이 둘로 나눠진다면 선조가 남자가 한 명이어야 돼요, 두 명이어야 돼요? 각각 노선 두 명이어야 되죠. 껍데기는 다윗인데 다른 남자가 등장해요. 남자이름 둘 등장하는 대목이 마태복음 1장 6절에 나옵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여자는 하나에요. 여자는 밧세바 하나인데 남자가 둘 등장합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한 번 적어볼게요. 여러 번 수십 번 했지만 다시 봅시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누굴 낳았다? 솔로몬을 낳았단 말이죠. 이 계통에서 예수님이 나시는데 메시아 노선인데 다윗의 자손 노선인데 다윗은 남자잖아요. 여자는 뭡니까? 밧세바는 하나지요. 남자가 둘이에요. 그러면 장차오실 예수님의 선조는 다윗이냐, 우리아냐 하는 거예요. 남자 둘이 한 여자를 통해서 자식을 낳았다 이 말이죠.
다윗이 밧세바라는 여자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는데 밧세바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다윗으로 인하여 피해 받은 자기 본 남편이 밧세바 안에 들어있어요. 여자 안에 죽은 남편 들어있고 죽인 남편 들어있어요. 이쪽 남자 혼자 살고 있는데 옆집에는 정다운 부부가 살고 있단 말이죠. 혼자 있는 남자가 정다운 부부의 남편을 죽였어요. 그러면 죽은 자가 희생자가 되겠지요. 가해자가 누굽니까? 다윗이 되고 죽은 자는 우리야가 되겠지요.
그리고 난 뒤에 죽은 자의 아내는 죽인 자와 혼인을 했어요. 그다음에 여기 혈통이란 것은 누가 관여하느냐? 하나님이 관여하거든요. 하나님이 누굴 낳게 하느냐? 가해자와 피해자의 아내 사이에 하나님이 자식을 생산토록 해버려요. 그게 언약이에요. 언약 노선이에요. 생산하게 되면 그 생산된 자식 안에 뭐가 들어있냐 하면 가해자, 피해자 둘 다 들어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도 안에는 뭐가 들어있냐?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도 들어있고 가해자의 자격으로 주님의 신부가 된 그런 자도 동일 인물로 같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것은 다윗언약의 특징은 뭐냐? 혈육의 노선을 교체를 하는 거예요. 기존의 죄의 노선이 시편 51편에 나오거든요.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남편 우리야를 죽였을 때 나단 선지자가 찾아온 그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지적을 할 때 비로소 다윗은 뭘 아느냐 하면 내가 죄라는 걸 처음 알아요. 다윗은 율법을 알아요. 율법을 알기 때문에 조심하면 되잖아요. 율법을 어기면 죄고 안 어기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나의 근원적인 죄로 접근을 못해요.
주님께서는 그렇게 율법대로 살아서 바르게 살겠다는 것을 어쨌든 간에 그걸 뭐로 바꾸느냐? 가해자로 만들어버려요. 가해자 성립되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피해자가 있어야 돼요. 그 피해자와 함께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줘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영원한 가해자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이상하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란 이유 때문에 천국에 살아야 된다 말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죽인 자기 때문에 천국에 살게 돼요. 다만 그걸 인식하고 알게 되었다는 그것 때문에. 알게 된 것은 성령께서 알게 하셔야 아는 거니까.
우리야 장군이 죽었지요. 죽었으면 솔로몬의 아버지가 누굽니까? 다윗이 아니에요. 누굽니까? 죽은 자, 피해자란 권리로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는 이유가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구세주가 돼요. 우리가 예수님을 죽이지 아니하면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거든 올려놓을 테니까 또 들어보세요. 또 들어봐서 알 것 같으면 대단한 거죠.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주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철저하게 이용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주님의 개인적 일 그 늪에 빠진 거예요. 빼도 박도 못합니다. 아까 무지개 있지요. 무지개 밖에 못 나가잖아요. 다윗언약 밖에 성도가 나갈 수 없어요. 기어이 우리는 다윗이 돼야 돼요. 다윗이 되고 그 다윗의 후손에 의해서 구원될 자기 때문에 우리는 다윗 같은 주님에 대한 가해자로 주의 언약에 다윗언약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 육신이 아담의 몸에 나왔잖아요. 아담의 DNA 있잖아요. 이 혈통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혈통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복습하듯이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의 자손이죠. 그럼 우리야는 다윗의 혈통입니까, 혈통 아닙니까? 혈통 아니죠. 그런데 우리야 장군이 어떻게 다윗이 혈통이 되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겠어요? 인생이 꼬인 거예요. 왜? 다윗이 죄를 지었거든요.
다윗이 우리야에게 너 좀 맞자, 하고 팼습니까? 우리야가 그렇게 미운 거예요, 다윗이? 평소에 우리야와 다윗이 다퉜어요? 아니지요. 우리야의 잘못은 결국 뭐가 잘못이냐? 아내가 예뻤다는 거예요. 아니 예쁘다고 다 좋아합니까? 남자들이 예쁜 건 다 좋아합니까? 다 좋아하겠구나. 예쁘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스타일이에요. 우리야의 잘못을 제가 계속 캐냅니다.
우리야의 잘못이 뭐냐? 자기 아내와 결혼할 때 다윗의 스타일인지 아닌지 사전에 안 물어봐서 그래요. “제가 결혼하게 됐는데요, 임금님.” “그걸 나한테 왜 묻는데?” “제 아내가 임금님 스타일인지 아닌지 제가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걸 왜 물어봐?” “임금님 스타일이어야 나중에 제 아내를 겁탈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걸 무슨 수로 우리야가 알겠습니까? 그냥 얽혀 들어간 거죠. 다윗언약의 늪에 빠진 거예요. 다윗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야는 그냥 말려든 거예요.
말려드는 것 아시죠. 여러분들 고추 빻을 때 고추 집어넣으면 사정없이 구멍 속으로 들어가지요. 그런데 고추가 살아 있다면 기어오릅니까? 살려주세요, 주인님. 저는 청양고추라서 더 맛이 좋아요. 기어오릅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걸 늪에 빠졌다 하지요. 모든 인간은 십자가 늪에 빠진 거예요.
그리고 우리야 장군이 군에 갈 때 “임금님 제가 군에 갑니다.” “그래 온나.” “그런데 언제 죽이실 건데요?” 이걸 물어봅니까? 안 물어보지요. 왜냐하면 우리야는 자기 인생 따로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 인생이 따로 있는 게 죄에요. 절대로 자기 인생, 우리 인생 가지면 안 돼. 우리 인생은 예수님의 인생에 얽히고설켜 들어가야 돼요. 그래야 영생 얻어요.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얽혀 들어간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제가 첫 번째 강의에서 했지요. 모든 사건에 주인이 있고, 그리고 그 이유는 주님만 아신다고요. 내가 내 인생 이 모양이냐고 그 이유를 자기한테 달지 마세요. 이유를 묻지 마세요. 어떤 이유도 그거는 거짓입니다. 우리가 이유를 다는 것은 안 속아 넘어가려고 이유를 달거든요. 똑똑한 체한다고 마귀한테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주님께는 똑똑한 사람 필요 없어요. 그냥 말려들어간 사람만 필요해요.
다윗은 우리야에게 하등에 감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우리야 장군을 죽일 때나 어떻게 하느냐? 우리야 장군 몰래 죽이죠. 이것 주일 낮 설교할 건데 미리 하겠습니다. 특별히. 편지를 써서 보내요. 그 편지 내용에 대해선 우리야 장군은 모릅니다. 주님께서 우리한테 뭘 줬습니까? 성경 줬지요.
이 성경내용 우리가 압니까? 모릅니다. 다만 성경내용의 결과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죽이게 하고 죽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이 엮인 막달라 마리아 같은 인생이 되었다는 사실,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나는 너를 버리지 않고 내가 너와 엮기겠다는 게 성령을 보내신 취지입니다.
우리야의 계통을 따라서 다윗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옵니다. 이게 마태복음 1장 족보에요. 그래서 14대-15대-14대 했지만 나중에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14대, 15대, 14대 분명히 해놓고 마태복음 1장에서는, 늘 볼 때마다 신기해요. 분명히 헤아려보면 14대, 15대, 14대에요. 그런데 마태복음 1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아니에요. 15대에요. 14대 아니에요. 15대에요.
그다음에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이 14대는 맞아요. 앞의 숫자 헤아림이 카운트 방식이 14대라면, 그리고 끝이 14대라면 중간도 14대가 돼야 되는데 15대라고 써놓고 14대라고 하는 것은 그 중간에 뭐냐? 바로 남자 하나를 더 집어넣은 거예요. 진짜 족보는 희생자의 족보다.
끝으로 마태복음 23장 35절을 보겠습니다. 누가 크게 읽어볼까요?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아멘. 아벨의 피부터, 아벨도 억울하게 죽었잖아요. 아벨의 피부터 그다음에 마지막에 예수님의 피까지 이 족보는 무엇이냐? 피의 족보에요. 희생하심이 바로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 그리고 다윗, 그리고 선지자의 피, 사가랴의 피, 마지막에 예수님의 피, 이 족보가 육으로 된 혈통이 아니고 희생으로 연결된 족보가 바로 그 족보를 실어 나르는 가해자 속에 피해자를 실어 나르는 가해자가 될 때 우리는 주님의 족보에 합류한 자가 되는 겁니다.
다윗이 우리야 죽였다고 지옥 갔습니까? 아니지요. 언약은 그런 게 아니에요. 언약이라 하는 것은 피해자의 인생에 엮여 들어간 사람, 그러니까 피해자 우리야의 인생, 아까 다윗 인생에 우리야가 말려들어갔잖아요. 생각을 바꾸자는 거예요. 우리야 인생에 누가 엮여 들어갔다? 다윗이 말려들어가서 다윗은 졸지에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해도 모르는 죄를 내가 우리야를 죽임으로써 밧세바를 간음함으로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내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가 나를 죄 짓게 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십자가를 위해서 죄 지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같이 말려들어갔을 때 그게 바로 십자가의 증인입니다. 그걸 성도라고 이야기하고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태와 사건, 상황 이건 누가 유발했습니까? 이거는 주께서 이렇게 유발하신 거예요. 우리 성공하라고, 성공자 되라고? 아니지요, 아니지요. 우리가 사랑 받았다고, 버림받지 않고 사랑 받았다는 것을 매순간 우리로 하여금 증거하는 겁니다.
이제 끝으로 매순간 증거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 대목이 즐겁고 재밌어요. 우리가 주님의 가해자고 주님 우리 때문에 희생했던 그 노선에 우리가 함께 있으면 어떤 점으로 아는가? 우리에게 억울한 일이 일어납니다. 막상 적어보니까 즐겁지 않지요. 우리로 하여금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해요.
자, 억울하다는 말은 평소에 나는 죄인 아니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해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억울하다는 말은 함부로 손대지 마라. 내가 이만한 인생 살기 위해서 얼마나 단도리 잘하고 철저한지 너희들 모르지. 그러니까 네가 함부로 손댈 대상 아니야. 그 정도로 괜찮은 존재야, 라는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에 뭐가 발생했어요? 억울함이 발생된 거예요.
그러면 우리야 장군은요? 뭐가 잘못됐습니까? 우리야 장군의 잘못은 다윗 인생에 엮여 들어간 게 잘못이고요. 다윗의 잘못은, 다윗의 잘못이 아니고 잘한 짓이죠. 다윗이 잘한 짓은 우리야의 인생에 엮여 들어간 거예요. 우리가 잘한 것은 아니죠. 우리가 잘한 짓으로 하게 하신 것은 예수님 인생에 십자가 지고 가는 죄 사함을 지고 가는 죄 사함의 그 업적, 업적에 우리가 말려들어간 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잘한 일이고, 우리가 못한 것은 뭐냐 하면 그 업적에 말려들어가면서 굉장히 억울하게 느낀다는 점이에요.
저한테 이렇게 대우하면 안 돼요, 주님. 제가 애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하는 데 여기서 몸이 아프면 안 되지요. 애 네 명 낳았는데 설암, 암 걸려서 아프게 됐어요. 이번 주 <인간극장>에 나왔던 이름 정미애라고 <미스트롯>에서 2등한 이선희 목소리 닮았다고 하는 사람 있어요. 그때 생각하는 게 애 네 명 낳았는데 자기는 암에 걸렸단 말이죠.
그러니까 얼마나 억울함을 느끼겠습니까. 그러한 순간순간이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손해 봤다, 억울하다, 이건 하나님이 내 인생 조져놓는구나. 그것이 바로 주님을 또 죽이는 우리 육신의 본성으로서 주의 십자가에 가담하는 자세가 그 자세에요. 억울하시고 돌아서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언약대로 진척된다는 것이 정말 말로 간단하게 할 수 있지만 이젠 우리의 삶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실감나게 느끼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