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언약궤의 최종성

아빠와 함께 2022. 12. 5. 07:57

20221202a 울산강의-역대기상(16강) 13장 11절 : 언약궤의 최종성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언약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언약궤는 형체가 있습니다. 언약궤는 형체가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형체가 없어요. 방주가 형체가 있습니다. 성전도 형체가 있지요. 구약 때. 구약의 특징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 사람들이죠. 왕, 사람들입니다. 눈으로 보입니다. 그 사람들을 의존하고 그 사람들의 지시에 따르고 명령에 따르고 그 사람들에 대해서 복종하게 되면 승리가 주어지는 것이 이스라엘의 특징이죠. 좀 어렵지만 쭉쭉 나가겠습니다. 약간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전쟁 전문으로 하는 나라에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집어넣어준 거예요. 왜 전쟁을 하는가? 전쟁을 함으로써 여기서 승자가 생기고 패자가 생길 때 이긴 자는 의미가 되고 패자는 무의미가 되는 거예요. 살아도 소용없는 인생, 이거는 살 이유가 있는 것. 승자, 패자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전쟁의 전문 나라, 이스라엘이 졌다? 그럼 이스라엘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이거는 이스라엘이 전쟁에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 내부와 외부가 있다면, 내부에는 언약궤가 자리 잡고 있어요. 외부에서는 언약궤가 자리 잡아서 승리가 주어지고 이스라엘이 이긴다는. 싸워서 이긴다는 뜻이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끝까지 살아남는 이스라엘. 이걸 여섯 자로 하면 이겁니다. “끝내 이기리라”

박세리가 1998US오픈골프대회에서 이겼을 때 방송에 김민기의 <상록수> 틀어줬잖아요. 김민기 작사, 작곡, 양희은이 부른 노래, <상록수> 끝내 이기리라 했잖아요. 홀컵에 쏙 들어갈 때 이겼잖아요. 태국선수를 이기죠(제니 추아시리폰, 태국계 미국인). 끝내 이기리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없는 나라로 만들어서 전쟁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하나님은 끝내 이기리라가 돼요. 왜?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악마가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악마에 대해서 끝내 이기리라, 라는 이것을 말로만 아니라 실제 눈으로 보이고 실제 역사 속에 있던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께선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러면 이 성경이야기는 종교가 아니죠. 취미가 아니에요. 이거는 한 번 믿어볼까, 이런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더 큰 환경입니다. 성경 내용이. 학생들이 학교에서 이순신 장군 배우잖아요. 사탐하는 사회탐구에서 역사 배우잖아요. 그 역사를 배울 때 학생들이, “선생님 그딴 종교를 강요하지 마세요.” 이렇게 나옵니까?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가 일제에 압제를 받아서 전부 다 못 살았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아요. 일제 때 조선시대 때보다 서너 배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만큼 자유도 많았고요. 그러니까 일제 역사 자체가 우리가 일본한테 억압당했다는 피해망상으로 종교 비슷하게 된 거예요. 일본은 죽여라, 이렇게 나오잖아요. 일본 때문에 잘 먹고 잘 사는 거예요. 이거는 아무도 안 가르쳐주는 이야기입니다만.

조선 시대와 비교가 안 돼요. 생활수준부터 돈, 경제문제뿐만 아니고 인간의 인권과 자율성 같은 게. 일제 때는 재판할 때도 변호사 없으면 일본법에 의하면 국선변호사를 대줘가면서 재판했어요. 심지어 안중근 의사한테도. 이거는 조선시대 때는 상상도 못한 겁니다. 그런 이야기는 학교에서 아무도 이야기 안 해줘요.

어쨌든 간에 역사시간에 일본만 나오면 나까무라 죽이라고 성토를 하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습니다. 강요로 압박당해서 일본에 돈벌이하러 갔다고요? 천만의 말씀 그 당시에 양복 입고 일본에 돈벌이 가는 것이 10:1, 100:1이 넘었어요. 서로 가고 싶어서. 독일에 광부, 간호사 가는 것보다 비율이 더 셌어요. 여자들 일본 방직공장 가는 것, 그건 아무나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유지 쫌 돼야 갈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 하나도 안 하잖아요. 민족주의가 나라를 망치는 거예요. 나까무라 때문에 사는데…….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가 나라 등쳐먹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민들의 생활고 서너 배 더 나아졌어요. 일본 통치 이후에는 그전까지 조선 서민들 인간도 아니었어요. 지금 국가 자체가 이념화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하나의 국가가 되게 되면 뭔가 적을 하나 만들어서 밟아야 자기들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꾸 그런 것을 학생들에게 과거에 대해서 왜곡되게 가르치는 거예요. 북조선이나 남조선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전쟁을 하게 돼 있고 전쟁을 함으로써 인간은 이미 악마 속에서 살아도 의미 없는 무의미한 존재, 집단이란 걸 알려주는 겁니다. 의미 있는 것은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생명나무 있는 그곳만이 의미가 있어요. 원래 인간을 창조했던 그곳, 그곳만이 의미가 있고 거기서 추방된 이상은 의미 있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소용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마화 된 인간세계에 시비 거는 거예요. 전쟁을 벌인 겁니다. 전쟁을 벌이는데 이스라엘 속에 뭘 만드느냐? 언약궤를 만들어서 내부의 외부전쟁 승리로 이어지게 하는 거예요. 언약궤를 집어넣어서 이스라엘로 전쟁 승리하게 한다면 이거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고 누구 전쟁이냐 하면 언약궤의 승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역대상 13장 봅시다. 13장 9절,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소가 나오는데 이 소가 뭐냐 하면 사무엘상 6장 9절을 보게 되면 언약궤가 블레셋 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그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겼거든요. 이겼을 때 그들은 하나님도 이겼다고 생각하고 자기 신전에 모셨더니만 사무엘상 5장에 보면 자기들 다곤 신상이 박살나버렸어요, 그날 밤에.

그전에 사무엘상 4장 3절에 보면 이스라엘로 하여금 일부러 블레셋과 전쟁을 하도록 벌였지요. 이스라엘만 전쟁해서 블레셋이 이겼는데 죽은 사람이 몇 명이냐? 사천 명 죽었어요. 4장 2절에.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전쟁했는데 내가 뭐라 했습니까? 전쟁을 하는데 승자만 의미 있고, 패자는 무의미하다 했잖아요. 이스라엘이 사천 명 죽고 졌지요. 그럼 이스라엘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럼 승자가 뭐냐? 블레셋이란 말이죠. 일단은 준결승전, 블레셋과 이스라엘 붙어서 블레셋이 이겼지요. 자, 결승전……. 승자가 뭘 갖고 가느냐 하면 언약궤를 가져갔어요.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갔다고요. 언약궤와 블레셋 결승전 붙어서 누가 이겼습니까? 언약궤가 이긴 거예요. 그쪽 신이 진 거예요. 처음에 사천 명 죽고 난 뒤에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들고 나가면 전쟁에 이기지 않을까 해서 언약궤 앞장세워서 나갔습니다.

이게 민수기 10장에 보면 나와요. 언약궤 앞장세우면 이기고, 승리한다는 게 있어서 그 말 믿고 언약궤를 앞장세웠는데 언약궤를 들고 나오니까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전쟁할 생각 안 하고 뭐와 전쟁을 하느냐 하면, 언약궤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언약궤보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더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바로 사무엘상 4장에 나옵니다. 이걸 제가 하나하나 따지겠습니다.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나가겠습니다. 굉장히 어렵지만 중요한 것이라서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4장 5절에 보면 빨리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왜냐하면 8절에 이 언약궤를 만드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애굽이 신들을 친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애굽의 신들을 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전쟁에 끼어들었다. 따라서 경각심을 누가 갖느냐? 블레셋 사람이 더 크게 가져버렸어요. 그래서 블레셋 사람이 대장부가 되어서 더 힘 있게 하자, 이렇게 나온 거예요.

쉬운 예를 들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르헨티나(세계에서 제일 축구 잘하는 나라, 메시) 시합하는데 전반전 끝나고 사우디아라비아 감독이 호통을 쳐요. 너희들 메시와 사진 찍으려고 축구하느냐, 이랬어요. 메시에 대한 가치가, 아르헨티나가 자기 팀에 있는 메시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메시라는 축구팀의 실력을 더 인정해주니까 경각심이 나서 사우디아라비아가 2:1로 이겼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전쟁을 벌이면서 사람 대 사람의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일깨워주는 겁니다. 교회 나온 사람을 교인이라 이야기하고 교인과 교인 사이를 교우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나 교인과 교우는 하늘나라 와 아무 의미 없어요. 상관없고 진짜 성도는 뭐냐 하면 교회 와서 사람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누구냐 하면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느냐가 그 사람을 성도라고 이야기해요.

그냥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나, 어떻게 비추겠어? 그런데 신경 쓰고 교회 나오면 그거는 교회 백날 나와도 소용없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고 인도했고, 인생을 어떻게 살게 했느냐,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게 취미도 아니고 친목단체도 아니고 더구나 종교는 아니죠. 종교는 인간이 만드는 거니까.

경각심으로 사천 명 이기고, 또 이겼어요. 1차전에 사천 명 죽이고 블레셋이 이겼는데 또 전쟁해서 이제는 그 당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엘리가 이때 죽었는데 엘리가 송해보다 더 살았어요. 아흔여덟까지 살았어요. 오래 살았지요. 죽을 때 며느리가 하필 그 타이밍에 애를 낳아서 이름을 지었는데 ‘이가봇’ 하나님이 우릴 떠났다, 우릴 버렸다. 왜? 며느리 입장에선 자기 남편 죽고 시아버지 다 죽었으니까. 기댈 곳이 없어요.

그래서 아들, 일종의 장군이에요. 장군 둘 다 죽고 언약궤 빼앗기고. 그래서 표현하기를 21절에 하나님이 우리나라 이스라엘을 떠났다, 라고 며느리가 애 이름에다 그렇게 지은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떠났다. 우리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되었다. 무의미하게 된 거예요. 전쟁에서 패자가 무의미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5장에 넘어가면 언약궤를 포로로 잡은 거예요. 신을 포로로 잡아놨는데 전쟁 아직 안 끝났어요. 언약궤 있는 곳마다 여호와의 저주가 계속 임한 거예요. 오늘 역대상 13장 9절을 읽어보면서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이렇게 돼 있어요.

제가 물어봅니다. 언약궤 붙들면 사람이 왜 죽지요? 제 질문입니다. 언약궤는 상자인데 그 상자를 붙드는 게, 웃사가 넘어질까 붙들었거든요. 소들이 발작을 일으켜 난동을 부리니까 소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언약궤가 나무에 금박 씌운 거라 깨질까 싶어서 붙들었는데, 보지도 않았어요. 붙드니까 죽었습니다. 왜 죽었을까요? 왜 언약궤는 사람을 죽입니까? 이게 진짜 신앙의 핵심이에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상대 안 합니다.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래서 언약궤를 붙들면 왜 죽이는가? 언약궤 안에는 인간의 최종성이 들어 있어요. 담겨있다. 나는 인간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확고한 취지가 언약궤 안에 들어 있어요. 어떻게 죽은 자가 생명나무를 왜 붙드느냐 이 말이죠. 인간은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된 거예요. 추방된 자가 어찌하여 선악과 따먹듯이 그걸 따먹느냐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진짜 깊이 있는 말할까 말까하다가 터뜨리는 속에 있는 질문이 뭐냐 하면, “목사님,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듭니까?” 누구나 묻고 싶은 이야기고 차마 자진해서 말은 못하지만 누구나 살아가면서 꼭 묻고 싶은 이야기잖아요. 차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전부 다 그게 제일 궁금하지요. 하나님, 예수님보다. 답변은 이미 나와 있어요.

옛날 선생님이 학생이 까부니까 “수업시간 방해되니까 앞에 나와 의자 들고 있어” 하니까 학생이 하는 말이, “선생님, 팔이 왜 아프지요?” “너 벌 서고 있는 거야.” 인생이 왜 힘듭니까? 그게 벌 서고 있다는 말이에요. 인생 자체가 벌 받고 있는 거예요. 안 힘든 인간이 없어요. 우울증 같은 소리하고 있네. 모든 인간이 다 우울증이에요. 행복한 인간이요? 벌 서는 주제에 뭐가 행복한, 행복한 인간 없습니다. 혼자 세계에서 제일 불행해.

16강 못 들어갈까 봐 걱정해, 불행해. 날 춥다고 불행해. 감기 걸려서 불행해. 코로나 걸려서 불행해. 인생 태어나면서부터 울면서 태어나는 겁니다. 뭐 남자 세 번 운다고요? 남자 나이 육십오 세만 넘으면 드라마 보면서 매일 울어요. 여자는 울지도 않아. 남자는 찔찔 거리면서 울고 있다고. 훌쩍훌쩍. “재벌 집 막내아들이 불쌍해, 송중기가 불쌍해.” 어느 인간치고 교회를 백날 다녀보세요. 권사, 장로, 목사 돼 보세요. 행복한지. 행복은 물 건너갔어요. 지금 의자 들고 있다니까, 인생은. 의미 없습니다.

언약궤 안에 최종성이 있어요. 언약궤 안에 너희들이 나에 대해서 대적한다는 증거물이 들어 있습니다. 너희들이 아예 불행을 저주와 비극을 사서해. 그 증거가 언약궤 안에 들어 있어요. 그 언약궤를 들이민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를 우리 앞에 몰아붙이고 밀어붙이는 거예요. 언제 그런 강의했거든요.

왜 하나님은 인간을 극단까지 몰아붙이는가? 그 이유가 뭐냐? 구원은 사람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뭐 성화론에다 철야, 선교, 금식, 중보기도 하여튼 난리 블루스를 쳐요. 헌금, 십일조, 교회 섬기기, 목사 섬기기, 아주 무슨 짓이든 다 해보세요. 그래서 구원되는가. 그래서 구원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세리와 창기가 천당 가요. 바리새인들 전부 다 지옥 갔습니다.

그 말은 인간이 지옥 가려고 악을 쓰기 때문에 종교적인 열심을 내고 있다는 뜻이에요. 본인 행함으로 구원 받으려고 아주 환장을 했기 때문에,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없으니까 맹탕이잖아요. 맹탕이니까 그 빈 공간을 뭐하느냐? 자기 행함으로 채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우울증이 도진 거예요. 점점 정신병이 심화되는 거죠. 자기가 자기를 놔주질 않았어요. 자기에게 매질하고 있는 거예요. 더 심하게 매질해서 더 열심히 해야 천당 갈 수 있어. 본인이 본인한테 책망하고 난리도 아니지요.

사실은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몰아세우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극단적인 모습은 뭐냐?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 갈 수가 없다. 그 말은 인간들을 다 끌어 모아서 그중에서 인간의 힘으로 천국 가려고 하는 가장 극한의 최고의 노력을 앞장서서 했던 자들이 누구다? 바리새인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이 그 짓을 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던 겁니다. 자기에게 온 주님을 죽였던 거예요.

그래서 구원은 찾아오기, 하늘나라에서 다가오는 겁니다. 멀리 있는 구름이 가까이 와서 먹구름이 되는 것처럼 하늘나라가 다가오는 거예요. 제가 왜 먹구름이냐? 하늘나라 멀리 있는 구름은 솜털같이 굉장히 낭만적이죠. 뽀송뽀송 아름답다. 하지만 정작 그 구름이 다가올 때는 먹구름처럼 비를 머금은 무거운 시커먼 구름이 돼야 지면에 가까이 올 수가 있어요. 실제로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그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올 때는 우리에게 무서운 분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이것을 영화에도 나와 있고 뮤지컬에도 있지만 이거는 엑스칼리버. 엑스칼리버가 뭐냐 하면 칼 이름이에요. A.D. 6세기 경 혼돈스러운 영국에 서로 왕이라고 우기는 그 시대에 유명한 전설이 있어요. 바위에 엑스칼리버란 칼이 꽂혔는데 이 칼을 뽑을 수 있는 자만 영국 전체를 통치하는 새로운 왕으로 등장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게 어떤 인간이 달려들어도 칼이 안 뽑혀요. 오직 순결한 자만이 뽑을 수 있다. 엑스칼리버입니다.

그런데 뽑고 싶어도 뽑을 수 없는 엑스칼리버를 저는 어디로 활용하고 싶은 거냐? 히브리서 4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11~13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엑스칼리버에요. 폐부를 깊숙이 긴 칼로 그냥 찔러버립니다. 그냥 찌르지 마시고 ‘팍’을 집어넣어서. 말씀이 팍 찌르면 찔린 말씀을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나쁜 행동을 해도 박힌 말씀은 내 힘으로 내 인생에서 뽑아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그 칼에 꽂힌 채로 구원이 돼요. 그래야 구원이 돼요. 그 말씀에 꽂힌 총괄, 총합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꽂힌 채로 구원 받아요. 그래서 그걸 십자가 안에 있다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해요. 나는 십자가 안에 있다. 십자가 안에 꽂혀있는 겁니다. 그 십자가 안에 꽂혀버리면 십자가 안에 뭐가 흐르느냐? 예수님의 피가 생명으로 흐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내 피와 내 살을 먹고 마시지 아니한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 다른 말로 내 칼에 찔려라. 내 칼에 찔려서 찔린 채로 있을 때에 거기서 우리 육신 흔히 생각하는 자아, 나는 뭐냐? 나라 하는 것은 그 칼을 제외한 나머지가 나가 돼요. 그러면 나는 뭐냐? 칼에 꽂힌 그 구멍, 구멍이 생기고 외부에서부터 뭔가 찔렸다는 흔적, 그 구멍이 있으니까 그 구멍 자체가 우리가 무의미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찔렀고 그 말씀 빼놓고 나머지 자아는 뭐냐? 의미 없는 거예요.

그 의미 없는 것을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뭐냐? 내가 난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따라서 은혜 빼버리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게 우리가 만들어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에요. 그런 경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이거는 찾아볼 필요 없어요. 여러분 너무 잘 알아요.

마태복음 16장 18절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8.  And I say also unto thee, That thou art Peter, and up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the gates of hell shall not prevail against it.(KJV)

18.  "And I also say to you that you are Peter, and up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the gates of Hades shall not overpower it.(NASB)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름을 뭐라 하느냐? 너는 이제부터 시몬이라 하지 말고 내가 이름을 새로 지어줄게. 베드로라 하라. 반석인데 보세요. 반석이니까 돌 자체는 의미가 없어요. 반석은 돌인데 뭔가 시작점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반석, 돌 그게 뭐? 그 위에 뭐가 세워져야 될 시작점이 되는 거예요. 너는 반석에다가 나중에 사도가 되니까 주님의 말씀이 들어와 버리니까 아무 무의미한 것밖에 없는 반석 위에 주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모든 말씀을 다 이룬 거예요. 구약, 신약 모든 말씀을 주님께서 다 이룬 거예요.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어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지요. 자, 묻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알게 하면 나중에 죽어서 어디 가지요? 지옥 가지요. 마음속으로 간음하면 어디 가지요? 지옥 갑니다. 네가 오른손이 범죄 했는데 안 찍어버리면 지옥 가요. 모든 말씀은 지금 장난이 아닙니다. 허투루 한 말이 아니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내 말과 내 뜻을 다 행하지 않으면 지옥 가게 돼 있어요. 그런데 세리와 창기, 강도는 천국 갔잖아요.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천국 갔지요. 그들이 뭘 했는데 천국 갑니까? 분명히 산상설교에서는 말씀 일획일점이라도 안 지키면 지옥 간다고 나와 있거든요. 마태복음 5장에 나와 있는 말씀이에요. 제가 지어낸 말씀이 아니고.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켜내야 돼요. 만약에 안 지키면 호리라도 못 지키면 지옥 불에 가는 거예요.

그런데 세리와 창기,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에게 너는 의인이라.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네가 죄 사함 얻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천국 왜 갑니까? 뭘 지켰는데 천국 가요? 진짜 묻고 싶다. 그들이 뭘 지켰다고 천국 갑니까? 주께서 수많은 말씀을 주셨는데 그 말씀 중에서 하나도 지킨 게 없는데 천국 왜/어떻게 가느냐 이 말입니다.

그들의 바탕이 반석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무엇의 반석? 주께서 홀로 다 하셨다는 걸 보여주는 반석, 주님만이 생명이란 걸 보여주는 반석, 나의 의는 일점일획도 거기에 끼어들 수 없음을 보여주는 반석, 내 기도가 내 구원에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내 기도가 내 구원에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기쁘게 받아들이는 반석, 기도를 하던 전도를 하던 나는 의미 없음, 애를 키우든 돈을 벌든 의미 없음.

오직 그 사람들에게는 뭐냐 하면 오직 주님의 은혜만 증거하는 많이 용서받았기에 오직 주님만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랑의 나라가 아들의 나라요, 그 사랑의 나라가 천국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천국, 저 푸른 초원 위에 골프장 있고 분수 있고, 무슨 소리하고 있어. 지금 엉뚱한 것 하지 마세요. 내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그게 천국 아닙니다. 살림살이 나아졌습니다만, 서울의 저쪽 경기도 저쪽에 있는 사람이고, 공중 부양하는 사람이고.

천국은 살림살이 나아지는 게 행복한 곳이 아니에요. 내가 무의미함을 이미 째지도록 늘 웃고 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걸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임하면 너희들의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주께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무엘상 6장 이야기 계속 해보겠습니다. 어떻게 해서 웃사가 죽음을 맞이했는지 보겠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와 블레셋이 결승전 붙는 거예요. 언약궤 잡았다고 하다가 언약궤를 누가 이동하는가? 언약궤는 앉은뱅이 같아요. 스스로 휠체어 타고 움직이질 못해요. 사람이 언약궤를 놔두면 거기 그 도시에 저주가 일어나고, 이쪽에 놔두면 이쪽 도시에 저주가 임한 거예요. 재앙이 임한 거예요.

블레셋 지역 다섯 군데가 그랬습니다. 재앙, 이게 종교입니까? 아니지요. 이게 소설입니까? 아니지요. 이게 신화입니까? 아니지요. 실제지요. 실제도 되고, 실재도 되고. 현실 그대로에요. 언약궤는 뭐냐? 언약궤는 그냥 물체에요. 사물체. 물체 또는 상자. 나무 상자인데 여기서 뭐가 피어난다 했습니까? 나무 상자 있는 곳마다 그 지역이 재앙이 일어나는 거예요. 역대상 13장 봅시다.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과 의논하고, 2절에,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선히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저희와 함께 들어 있는 성읍에 거하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보내어 저희를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이렇게 돼 있지요.

자, 여러분 읽었으니까 물어봅니다. 왜 블레셋 사람이 언약궤 있는데 가는 곳마다 다섯 도시가 재앙을 만났습니까? 언약궤가 재앙이 왔습니까? 분명히 이스라엘에게는 재앙이 없었는데 블레셋 나라에 가니까 재앙이 왜 생겼습니까? 방금 읽었던 역대상 13장 2절과 관련돼 있습니다. 무엇이 블레셋 나라에는 없었던 거예요? 레위 지파가 없기 때문에,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없어 그래요.

언약궤는 웃사가 만지면 안 돼요. 누가 만져야 돼요? 제사장이 만져야 돼요. 제사장은 죄인 맞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제사장은 죄인을 모집해서 옷을 입히는 거예요. 그 옷이 무슨 옷이냐? 언약궤를 만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옷을 입혀요. 그 옷에 있는 장치는 언약궤를 만져도 살 수 있도록 제사장한테는 옷을 입힌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한테는 무슨 특이한 사항이 있어서 왜 제사장들은 언약궤 다루고 만져도 죽지 않는가? 제사장 복장에 새로운 요소가 뭐가 있느냐? 바로 언약궤 제사장은 오른쪽 귀뿌리, 오른쪽 손가락, 발가락에다 뭘 뿌리느냐? 피를 뿌립니다. 이 피가 무슨 피냐? 나 죽었습니다, 라는 것을 안수해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사인하기 위해서 제물 소나 양에게 또는 염소에게, 제사장은 소를 잡아요.

그 피를 자기가 내 운명을 너한테 부탁한다, 해놓고 부탁한 소가 하나님 제단에서 죽어요. 죽을 때 피를 남기고 죽어요. 그 피를 도로 이쪽으로 안수하고 피를 내 쪽에서 받는다는 말은, 피는 어떤 과정, 절차를 거쳤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 대신 죽었다는 절차를 거친 피를 자기의 오른쪽에다가 발라버려요.

그러면 제사장의 인간의 대표가 뭐가? 자기가 내세울 것은 자기가 아니고 피입니다. 나는 이 피 때문에 살았습니다. 이게 신약에 보면 피로 인하여 하나님이 받으시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피를 자랑하면서 십자가만 자랑하면서 드러내는 거예요. 이게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예수님의 피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아, 그런 뜻이에요.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오늘날 계약은 언약의 피로 세운 계약이라 돼 있어요. 마태복음 26장에도 나와 있고요. 내가 마지막 언약이니 피로 세운 언약이다. 이거는 종교교리도 아니고 신학도 아니고 현실 그 자체에요. 여러분들이 나중에 죽어서 천국 가거든 무엇 때문에 왔는지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교회 다녔기 때문에 새순교회 다니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어린양의 피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야기하면, “목사님이 보증해주시겠습니까? 천당 가고 싶어요. 이 땅에서 고생했으니까 영원히 이제 고생 그만하고 싶은데 진짜 피로만 된다는 걸 보장해주겠습니까?” 제가 보증해주는 게 아니고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보증해줘요.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 어디로 왔나, 물으니까 이 사람들 천국에 미리 온 장로들 있었거든요. 그런데 신입들이 들어왔단 말이죠. 이 신입들이 어디서 왔나 보니까 신입들에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어린양의 피로 옷들이 전부 다 희어졌어요. 성경에 어떻게 보면 참 쉽지요. 정말 쉬워요. 쉬운데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그 피는 나에게 구멍이 생겨야 돼요. 내가 예수 피를 믿는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엑스칼리버처럼 피가 내 의가 있는 자리, 주님 이것만큼은 가져가시면 안 됩니다, 그 지점에다가 주께서 엑스칼리버 칼로 꽂아버려요.

그 꽂힌 피의 칼은 고맙게도 내 힘으로 빼질 못합니다.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희미한 등불 밑에서 옥경이처럼 살고 또는 <꽃순이를 아시나요> 그것도 마찬가지거든요. 촌에서 올라와서 서울에 취직하려다 망해버린 인생, 어떻게 인생을 망친다할지라도 한 번 꽂힌 피는 내 힘으로 안 뽑아지는 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거지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이 있어요. 그 유명한 거지 나사로. 죽을 때도 몸 아파서 죽었어요. 병원에 한 번, 요양병원도 못 가고 자기 몸 핥는 개 옆에서 죽은 사람 있습니다. 이거는 파트라슈보다 더 불쌍해. <플랜더스의 개> 얼마나 불쌍합니까? 어릴 때 그 동화 보고 막 울었어요. 세상에 이렇게 불쌍한 개도 다 있구나. 그런데 인간이 더 불쌍해.

인간이 개보다 더 못합니다. 인간을 정신적으로 치료한 사람이 오은영 박사에요. 그런데 개 대통령이 따로 있어요. 개 대통령이 오은영 박사보다 더 낫습니다. 말하는 것, 상담하는 걸 보면. 개 대통령은 인간을 개로 보지만 오은영 박사는 사람으로 보는데 사람은 다룰 가치가 없어요. 자기밖에 모르는데 개보다 더 못하는 데 뭐.

그래서 구약에는 언약궤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냅니다. 언약궤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한다. 신약에는 놀랍게도 부활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주께서 성령이 줄 수 있는 권한을 받아요. 왜? 부활을 통해서 어느 쪽에 가있느냐 하면 전에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성령 주실 때 아버지 오른편에서 성령을 줬거든요. 그 위치까지 아들 되시는 주님이 하나님 오른편에 계시면 오른편에 놀러 가신 게 아니에요. 성령을 자기 원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그냥 놀러 오신 게 아니에요. 올 때 그냥 빈손으로 오는 게 아니고 다가오실 때 성령을 갖고 오시거든요. 이 성령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십자가로 환원시켜버립니다. 왜? 거기에 예수님이구원자가 될 수 있고 심판자가 될 수 있는 근거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기 때문에 성령은 반드시 부활로 가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증거하게 돼 있어요. 요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그분은 내가 한 것, 다 이룬 것에 대해서 증거한다. 성령이 성령을 증거하는 게 아니에요. 성령 받으라 해서 성령 받는 게 아니고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십자가를 증거하지요. 십자가 안의 십자가는 새 언약의 완성입니다. 내 살과 내 피가 완성이거든요. 그럼 모든 말씀이 언약의 완성이니까 모든 말씀의 완성이에요.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천국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곳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곳이어야 돼요. 왜냐하면 천국은 우리만 사는 동네가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의 패밀리 가족이 되어서 같이 살기 때문에 같이 기뻐하지 않으면 가족이 될 수 없어요.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들여보내주질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언약궤지만 신약 때는 뭐냐? 부활이에요. 부활의 특징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질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이야기해서 복이 복답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예상한 대로 행함으로 구원 받는 모든 것을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종교라는 것, 종교행위를 전부 다 하나님께서 거부해버리는 거예요. 복이 복답게 되기 위해서.

복은 일방적으로 주는 것, 주님의 일방적 다가섬으로만 구원 받기 때문에 거기에 인간이 반응해서 어떤 결심이나 호응 이런 것은 다 거부해버려요. 하나님이 줘도 우리가 안 받으면 구원 못 받지, 그런 경우는 인간이 지어낸 거고요. 그런 경우는 없어요. 칼로 쑤시는 데 뭘 받고 안 받고 어디 있어요. 말씀으로 쑤셔버려요. 칼에 꽂힌 채 구원받는다 말이에요. 일종의 꽂이에요. 닭 꽂이의 한 가지에요.

그 언약의 피가 합격증입니다. 합격증 같은 거예요. 광화문에서 미국 엘에이 방송국에서 기획을 해서 한 백 명이 떼춤을 추는데 미리 한국에서 예선전을 한 거예요. 한 사오백 명 몰렸어요. 광화문에서 떼춤 추는데 리아킴 해서 우리나라에 스트릿댄스하는 여자분들 있어요. 유명한 사람들 해놓고 그중에서 미국에 데려갈 사람과 탈락할 사람을 가리는데 그들에게 카드를 하나씩 줘요. 카드 표지는 색깔 똑같아요. 카드 열어서 빨간색 나오면 탈락, 녹색 나오면 합격이 되는 겁니다.

그때 빨간색 나오면 탈락이에요. 봉투 열어보기 전에 얼마나 아슬아슬하겠어요. 그러나 그거는 세상에서 기독교 종교에서 만들어낸 그러한 거예요. 지금은 모르지만 천국 가면 알겠지. 아니에요. 벌써 알아요. 내가 봉투를 열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미 안 사람이에요. 빨간 약 줄까, 파란 약 줄까? 맨날 영화에 보면 007이나 누굽니까? <다이하드>나 또는 <미션 임파서블>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 마지막에 아슬아슬하죠. 시한폭탄인데 빨간 선을 끊어야 되는지 어쩔 줄 모르다가 겨우 사는 것 있잖아요.

그런 건 진짜 하나님 현실세계에는 없어요. 다 무의미한 인간에게 무슨 선택권을 줍니까. 어떤 사람이 요새는 그런 질문 없는데, 목사님 자유의지는 어떻게 됩니까? 옛날엔 어지간히 질문들 했어요. 우리의 자유의지는 있다는 사람, 없다는 사람 있는데 자유의지는 어디 있습니까? 그 질문 참 많이 들었어요.

여러분 자유는 인간에게 고독입니다. 고독은 지옥이죠. 자유 줄 테니까 고독에 한 번 미쳐볼래요?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의의 종이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8장에선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게 진리의 종을 바로 자유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자유란 나에게로 몰린 마음대로가 아니라 어디로부터의 탈출을 자유라 해요, 성경에서. 애굽에서 나온 걸 자유라 합니다. 그러니까 자유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갇혀있다는 걸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자유라는 게 의미 있지요. 10분 쉽시다.

 

 

20221202b 울산강의-역대기상(16강) 13장 11절 : 언약궤의 최종성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레위 지파도 없고 제사장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기껏 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자기가 언약궤 앞에서 무의미하고 재앙의 대상이고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라서 후딱 언약궤를 자기 구역에서 빨리 추방하는 일에 급급했던 겁니다. 그게 사무엘상 6장에 나와요. 쫓아내면서 그들이 재앙을 받았던 다섯 고을, 거기에 금 독종, 금 쥐 금으로 그렇게 형상을 만들어서…….

그들은 그게 없어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기 때문에 다만 이상한 신이 들어와서 우리나라 조져놓겠다, 망하겠다, 우리는 여호와라는 낯선 신에게 크게 당했다는 증거를 담고 수레에 보내면서 그들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들 나름대로 테스트를 한 거예요. 그 테스트가 사무엘상 6장 9절에 나옵니다. 그건 보셔야 돼요.

6장 7절부터 보면,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그가, 여호와가 우리 이스라엘 여기에 재앙을 내린 것이요. 벧세메스를 목표로 잡고, 벧세메스가 블레셋과 이스라엘 경계에 있는 고을이거든요. 그 마을로 돌려보내는데 아무도 소를 진두지휘하지 않아요. 그냥 소한테 맡겨버리고 소가 알아서 가도록 테스트를 한 거예요. 그들 마음속에 있었던 겁니다. 벧세메스로 가면 재앙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고, 그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만약에 딴 데 가면 이것은 뭐다? ‘우연히’ 이게 바로 지금 인간사회, 인간세상을 지배하는 정신입니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우연이다. 신이 없다는 말은 신은 없다고 본 거죠. 이스라엘과 붙어봤던 블레셋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뭘 쳤다? 우리를 쳤다. 그러면 블레셋 사람인 우리는 실제로 손에 만져집니까, 안 만져집니까?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우리는 보이지요. 왜? 블레셋 사람이니까. 우리란 걸 쳤잖아요. 쳤으니까 다섯 고을에 큰 재앙이 왔잖아요. 재앙이 들이닥친 다섯 고을에 우리는 분명히 블레셋이 있지요.

그들이 생각하기를 우리는 있는데 우리를 친 ‘그’는 있느냐? 그라는 실존 인물이 있느냐 말이죠. 그걸 뭐로 테스트했다고요? 소가 벧세메스로 우리가 생각하는 진영으로 제대로 간다면 그가 있고 없다면 그도 없다고, 이래 보는 거예요. 그런데 소가 세상에 벧세메스로 가네요.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여호와 신은 말로만 우리가 만든 신이 아니고 우리를 심판하는 심판자란 사실을 블레셋 사람이 증거합니다.

그러면 이 순간 언약궤를 증거한 것은 이스라엘이에요, 블레셋이에요? 블레셋이죠. 블레셋은 의미 있는 거예요. 그 순간, 그런 경우에는 의미가 있고, 이스라엘은 무슨 일이 있었지? 그 사태를 몰랐어요. 다만 벧세메스에 소가 울면서 올 때 여기서 부흥사들의 벧세메스 소를 많이 거론하지요. 여러분 부흥회 안 해본지 너무 오래돼 잘 모르지요.

부흥사들 단골 메뉴 중에 하나가 벧세메스가 들어가요. 뭐냐 하면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을, 벧세메스로 가는데 뭐가 필요하냐? 그 소가, 송아지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 송아지를 누가 하느냐? 역시 돈 많은 장로들이 송아지를 해줘라 이 말이죠.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메고 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제대로 천국 하려면 장로들이 목사를 잘 후원해줘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야 교회가 교회답게 되지 않느냐? 그것 하면서 벧세메스 이야기를 많이 해요.

여러분한테는 상당히 생소하게 들리지요. 이걸 권사들이나 젊은 집사들이 듣고 기도할 때 집어넣어요. “주여, 벧세메스 가는 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 잘 섬기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 말이에요. 이 말은 뭔 뜻입니까? 협박이죠. 교회 안 되는 건 다 누구 탓이다? 여러분들이 벧세메스 소가 안 된 탓이기 때문에 돈 더 내, 이 말이에요. 결국 돈 문제로 가요. 신천지고 구천지고 전부 다 돈입니다.

그래서 인수인계를 사무엘상 6장에 보면 레위 지파가 받아요. 그래서 벧세메스 사람들이 울고불고하다가 칠십 명이 죽어요. 이걸 떠넘겨요.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냅니다. 이게 위치가, 지금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포위된 형태로 갖고 있어요. 골짜기가 있는데 여기에 벧세메스가 있어요. 경계선이니까 그때는 국경선이 철조망으로 친 게 아니니까. 이 골짜기 기럇여아림이 있어요.

7장에 보면,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 놓고”(1절) 있었던 겁니다. 오늘 역대상 13장 봅시다. 그 장면이 나와요. 5절부터 보면, 기럇여아림 나오지요. 아비나답 집 나오는데 웃사가 그 수레를 웃사 이야기하고 거기서 하나님과 충돌했다는 이야기 봤지요. 아까 웃사가 궤를 만져서 충돌했다. 그래서 그 궤를 어디로 옮기느냐? 오벧에돔의 집에 갑니다. 가다가 역대상 15장에 가면 드디어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다윗 성 있는 곳으로 옮깁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언약궤를 다윗은 왜 바로 예루살렘으로 옮기지 않느냐?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난해하고 어려운 대목이에요. 왜 하나님의 언약궤를 바로 옮기지 않느냐?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까 언약궤 상자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고 물었지요. 최종성이죠. 그걸 다시 설명 드리면 최종성이란 인간의 가치와 의미가 바닥났다는 것을 뜻함. 최종성이라 하는 것은 인간은 결국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이었냐? 하지만 남는 것은 흙밖에 없어요. 이게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가든지 지옥을 가든지 지 마음대로 되는 아니에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별에 의해서 차별을 통해서 가려내기를 통해서 한쪽은 지옥 가고 한쪽은 천국 가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이의를 달면 안 돼요. 흙인 주제에 이의를 걸 자격이 안 됩니다. 그 점에 대해서 지난 수요 설교 때 제가 이야기했어요. 예정선택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창세전에 이미.

그걸 다시 말씀드리면 창세전에 야곱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야곱이 사랑받을 때 사랑했다는 창세전에는 야곱이 없어요. 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태어나지도 않은 자를 하나님은 사랑하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태어나지 않았다. 그럼 이건 없는 거죠. 없는데 뭐가 있느냐? 사랑은 있어요. 지옥 가는 에서도 없는데 뭐가 있느냐? 미움은 있어요. 사랑과 미움은 창세전부터 있는 거예요.

그들이 행동을 밉게 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나쁜 짓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나쁜 짓하면 지옥 가고 착한 짓하면 천국 간다는 것은 언제부터 인간이 이 생각했느냐 하면 악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생긴 이념이에요. 이게 양심이고 이런 거예요. 이게 선악지식인, 선악지식은 인간이 알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본인의 운명은 본인이 아는 지식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쓸데없이 알 필요 없는 것을 쓸데없이 악마한테 한 소리 들은 겁니다.

악마한테 사기 당한 거예요. 너희 딸 액정 깨졌다, 보이스피싱에 걸려서 그 소리 듣고 그다음부터 수백만 원, 수천만 원 날아가잖아요. 액정 새로 하려면 앱을 새로 깔고 그러면 은행정보 다 빼내고 하는데……. 그러니까 아는 것이 힘이다.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이 이야기했거든요. 아는 것이 탈이다.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든 지식은 선악지식에서 나오는 거예요.

3+5는 뭐가 되지요? 8이죠. 이게 단순한 중성적인 지식으로 알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3+5=8이다, 그래서 너는 옳다고 인정받아요. 이게 선이 돼버린 거예요. 모든 지식은 선이냐, 악이냐는 최종 가치론이 개입되는 겁니다.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지요. 노아홍수 심판 때 두 부류가 있어요. 하나는 물위에 방주 안에 떠있는 사람이 있고, 노아의 가족이죠. 밑에는 뭐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평생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일상의 생활했던 사람이죠.

그래서 수요일에 예를 들었듯이 여기에 누가 있느냐 하면 이재명이 있어요. 물속에 누가 있느냐 하면 윤석열이 있어요. 너, 거기서 왜 나와? 하려 하는데 둘 다 물에 빠져 있어요. 그런데 위에 보니까 안 빠진 사람이 있어요. 그건 뭐냐? 언약 안에 있는 사람.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서 언약을 세운다는 말이, 언약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같이 주님께서 창세전의 내용으로 구분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 받는다는 말은 태어나고 난 뒤에 내 쪽에 행했던 것을 내 쪽에서 무시해버리는 거예요. 내가 한 살 때부터 0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했던 모든 것을 delete삭제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 이것이 바로 창세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일임하고, 뭐 일임하나 안 하나 일임돼 있지요. 일임하고 그 절차에 따라서 구원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이게 최종성입니다.

최종성이 슬픈 게 아니고 자신의 모든 과거가 삭제 당함을 감사하는 거죠. 뭐냐 하면 오늘이 12월 2일이죠. 2일이 되는 순간 12월 2일입니다, 라고 시계에서 또는 “지니야, 오늘 며칠이야?” “듣고 있습니다. 오늘 12월 2일입니다.” 지금 12월 되는 순간 이 말속에 12월 2일이라고 듣지 마시고 12월 2일 전에는 전부 날아갔다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다 날아가 버린 거예요. 없어요. 내가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없는 거죠.

이 없어지는 걸 성도는 이걸 뭐라고 보느냐 하면 너무나 당연한 걸로 보잖아요. 그러나 없어지는 걸 세상 사람들은 그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걸 실패로 봐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악마가 준 자기 과거에 대한 집착에 얽매이게 하는지 몰라요. 이게 악마의 시험입니다. 계속 없어져버린 이미 떨어져나간 꼬리를 우리 코앞에 들이대면서 “네가 오년 전에 뭐 된다 했잖아. 네가 두 달 전에 이 계획은 달성한다고 했잖아. 남자 되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오년 전에 결심한 건 다 어디 갔냐?”

그때 성도는 어떻게 해야 돼요? 오년 전에 결심한 것 없어. 그럼 왜 결심했어?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거든.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홍상수 감독, 2015) 그때는 시건 없고 지금은 오늘부로 시건 났거든. 없는 걸 자꾸 되새김하듯 들춰내서 남편 잡지 말고 아내 잡지 말고 자식 잡지 마세요. “네가 나와 결혼하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다고 했잖아.”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고.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 땅에서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실패를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버리는 걸 목표로. 성공은, 그러니 높은 곳에 올라가지 마세요. 올라가거든 그냥 내려오세요. 성공은 사람을 교만케 해요. 안 돼요. 실패해야 돼요. 그게 왜 중요하냐? 다윗은 예루살렘에 언약궤를 옮기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가? 바로 자기 실패를 위한 전쟁을 한 겁니다. 그게 14장에 나와요.

그 14장에 나오는 전쟁이 실패의 전쟁. 실패의 전쟁을 하니까 성공을 한 거예요. 한 번 적어볼게요. 실패의 전쟁이 곧 승리의 전쟁이다. 이스라엘이 처음에 사무엘상 4장에서 전쟁할 때 자기 팀에 메시 있다고 이기는 줄 알았어요. 호날두 오늘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호날두 있다고 이길 줄 알고 손흥민 있다고 이길 줄 알았는데 감사하게도 손흥민이 마스크 써서 잘 안 보여서 헤딩할 때 못해서 다행입니다.

실패의 전쟁을 해야 되는데 승리의 전쟁을 찾았던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실패한 겁니다. 실패의 전쟁의 특징은 뭐냐? 비겁한 전략이에요. 그게 역대상 14장에 나옵니다. 13절에, “블레셋 사람이 다시 골짜기를 침범한지라 다윗이 또 하나님께 묻자온대 하나님이 이르시되 마주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야, 이것 비겁하다. 정면으로 맞서지 말고 숨어서 없는 것처럼 공격하라. 왜? 그래야 그들이 기가 사니까. 그들로 하여금 승리를 만끽하게 만들어라. 인생은 이렇게 돈 끌어 모으며 사는 게 인생이구나, 라고 승리를 만끽할 때 백 프로 그 사람은 복음에서 얼굴 돌아간 눈 돌아간 사람입니다. 눈에 뵈는 게 없어요. 그래서 부자가 천국 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처럼 힘들다.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에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셔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 세 가지했잖아요. 그 세 가지를 현재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절대로 이기기 못할 조건을 세 가지 걸었던 거예요. 악마가 뱀처럼 지혜롭거든요. 완전히 독사고 뱀이고. 한 번 문 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것이 뱀이죠. 인간의 목덜미를 물었으니까 이길 수가 없지요. 그 뱀은 자꾸 물어요. 물고 놓질 않습니다. 이 뱀이 물었는데 잘못 물었어요. 누구의 발꿈치를 문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 대가리를 쳐버렸어요. 그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관계입니다.

비겁한 전쟁을 해요. 블레셋 사람들은 적이 보이질 않아요. 이건 도망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나가서 싸우라” 이것 누가 지시한 거예요? 이건 하나님이 다윗에게 지시했고 다윗이 군사들에게 지시한 것 맞지요. 그러니까 뽕나무 소리 안 나면 어떻게 해요?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소리가 들려야 되는데 안 나면 어떻게 돼요? 이건 안 되지요.

비겁한 전쟁을 해야 될 이유가 다윗의 군대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그 시그널, 사인을 그들은 다 받아들어야 되는 거예요. 어떤 순간순간도 하나님의 개입과 지시에 따라서 세상을 움직인다. 그것이 인간이 예상 못한 하나님의 전략이다. 그것을 눈치 채야 되는 겁니다. 이걸 한 문장으로 쓰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내건 모든 조건을 이기신다.” 인간이 내건 모든 조건을 교회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바로 기도지요. 그래서 기도하는 당사자가 기도 내용을 구성하려면 자기에게 아쉬운 것,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 기도할 때 조건을 달았지요. 무슨 조건이냐 하면 네게 필요한 것은 누가 아신다? 아버지께서 미리 아시기 때문에 네가 내건 조건을 주님께선 거기에 대해서 일체 거부하는 게 아니고 그걸 이기시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자식이 암 걸렸다. 맨 정신으로 가만있을 부모는 없어요. 소위 교회 다니던 절에 다니던 맨 정신으로 밥이 안 들어가지요. 자연 금식이 돼요. 강대상 앞자리에 꿇어앉으면서 자동으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간절한 간구, 기도가 절로 나오지요. 안 나올 수가 없지요. 조건 겁니다. 차라리 내 목숨을 가져가시고 자식 목숨 살려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남자는 그렇게 안 하는데 여자들이 많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러한 조건을 우리로부터 끄집어내시는데 유도하는데 성공하셨어요. 이게 우리의 본심이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테스트하시거든요. 그 시험의 조건이 뭐였습니까? “네 사랑하는 하나밖에 없는 독자를 내게 바쳐라.” 쉽게 말해서 죽이라 이 말이죠. 그것도 누구 손으로? 네 손으로 죽여라.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조건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간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 조건에 부합되었습니까, 부합되지 않았습니까? 참 질문이 어려워요. 아브라함이 아들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조건에 부합되었어요, 부합되지 않아요? 부합된 것처럼 보이지요. 네가 네 손으로 네 자식 죽이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에 출제문제를 바꿔버려요. 네 아들 대신 옆에 수풀에 있는 양으로 바꾸라고 마지막 한 순간에 멈춰, 해놓고 그걸 바꿔버려요.

그러면 아버지 아브라함이 양을 잡을 때 아브라함은 뭘 느끼겠어요? 하나님께서는 내 자식 이삭을 받는 게 아니고 뭘 받는다? 대신해서 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때 아브라함은 식겁했겠지요. 식겁한 동시에 뭡니까? 아브라함 본인의 인간으로서의 어떤 한계점도 인간의 힘으로 천국 가려면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지요. 그걸 믿음의 증인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실패의 흔적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는 걸 말합니다. 내 기도대로 응답 안 해준 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거예요. 그럼 이걸 해봅시다. 자식이 암 걸렸다. 기도했다. 그럼 결과는 두 종류에요. 뭐냐 하면 암이 심화되어서 한 달 만에 죽었다. 이상하게 기적이 일어나서 암에서 완치되었다. 두 가지 결과지요. 두 가지 어떤 결과라도 하나님이 이긴 게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한 우리 인간의 기도를 우리의 본심을 끄집어내는데 하나의 하나님의 기도의 과정으로서 참여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6장인가 네가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했거든요. 인간은 항상 자기 뜻에서 기도하지 주의 이름으로 기도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해놓고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주님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쉬지 않고 기도한 덕분에 너희들은 구원을 이룬다고 돼 있어요.

그래서 주님의 기도로 오늘 하루하루를 살고 어제 것은 다 삭제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새롭게, 새롭게 알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예상 못하는 자식이 암에 걸리는 난데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우리는 황급히 다급해서 기도를 하게 했고, 그리고 어떤 결과든 이거는 내 기도의 응답이 아니고 주님의 기도에 참여하는 식으로 우리 성도로 하여금 응답되게 하는 거예요. 내 기도 아니고 주님의 기도대로 뜻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되게 하는 거예요.

어제 밤에 자는데 꿈에(미리 밝힙니다, 꿈입니다.) 우리교회 둘로 나눠졌으니까 앞쪽에 내가 뭘 하다가 연기가 자욱한 거예요. 꿈속에 보니까 식당에서 불이 났어요. 큰불이 난 거예요. 커튼에 불붙고 한 거예요. 꿈속에서 해결책은 뭐냐 하면, 이건 꿈일 거야, 하고 깨어났는데 그래서 왜 그런 꿈을 꿨는가, 보니까 보일러를 많이 틀어서 몸이 뜨거워서……. 몸이 뜨거울 경우는 불이 났을 때 뜨겁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원인을 규명하게 돼 있거든요. 규명할 때 내가 나쁜 짓을 했을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되는 짓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내가 성경을 안 봤구나, 내가 전도를 안 했구나, 내가 헌금이나 돈을 너무 사랑했구나, 요새 내가 주님 말씀에 관심이 없구나. 온갖 것 다 끄집어내잖아요.

그걸 일부러 다 끄집어내게 해놓고 그것과 주님의 기쁨과 아무 영향력을 주지 않아요. 상관없다는 것을 새로 알게 돼. 이걸 전에도 알지만 오늘짜리로 새로 깨닫는 거예요. 이게 바로 내 이름이 아니고 행함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주의 행함으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이란 주님 자신의 열심이에요.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실패 외에는 할 게 없어요. 실패하는 즐거움, 왜? 합격증 따놨으니까. 엑스칼리버 칼은 꽂혀 있으니까. 그 주님의 성공을 우리는 생각 못하고 자꾸 독자적인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성공적인 인생을 따로 끄집어내려니까 주님께서 가만있지 않고 그것이 얼마나 주의 구원을 훼방하는 짓인 것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아까 마태복음 16장에 시몬으로 있을 때는 자기가 자기 종이었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돼버리면 시몬이 베드로의 종이 돼요. 왜냐하면 베드로는 베드로의 이름이 아니고 베드로 안에 작용하는 예수님의 기능, 구원의 반석 기능하고 있으니까 베드로 육신은 그냥 껍데기고 안에는 주님이 일하니까 이름이 베드로. 베드로가 뭐냐? 주의 이름이에요.

야곱은 야곱의 이름이지만 이스라엘은 누구의 이름이냐?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래서 그걸 보편화시키면 뭐가 되느냐?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껍데기는 내 이름인데 안쪽에는 주의 이름이 사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10장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달리 이야기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 구원을 받았다 이 말이에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윗이 레위 인들을 모집하고 제사장들을 함께 모아서 언약궤를 옮길 준비하는 것이 13장이고요, 거기서 오벧에돔의 집에 도착했는데 그 집에 복을 내리셨다 했어요. 언약궤가 있음으로 복을 내리셨다. 벌써 세 번째인가 네 번째 하고 있는데 다시 해보겠습니다.

언약궤 안에 뭐가 들어있지요? 최종성 들어있지요. 최종성이란 우리가 하나님께 한 몹쓸 짓은 다 갖고 있는 거예요. 최종적인 몹쓸 짓. 아담에 속했다는 말은 악마에 속했다는 말이거든요. 악마가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간에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고 날 아프게 만들면 우리는 화나게 돼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의 분노에요. 물어봅니다.

분노를 왜 일어납니까? 어떤 때 성이 나지요? 답변은 이렇습니다. 우리 강의가 즐거운 것은 질문하고 답변 사이에 3초밖에 안 걸린다는. 분노는 왜 일어나느냐? 완성된 모든 것이 갖추어지지 않으니까 분노가 일어나는 거예요. 합격이란 기쁨이 없을 때는 분노가 일어나요. 미완성이 들통 날 때 분노가 일어나요. 완성이 돼버리면 그까짓 것 좀 져도 괜찮아요. 실패해도 상관없어요. 그러나 모든 걸 갖추지 않을 때는 갖추려는 내 시도가 방해받을 때 사람은 나의 완성이 방해받을 때 인간은 분노하게 돼 있습니다.

애가 성적이 떨어졌다. 왜 분노가 일어나는가? 네가 적어도 상위 층, 그러니까 10등 안에 드는 것이 너를 키워준 한 살 때부터 스무 살 때까지 3억 든다 하거든요. 돈을 그만큼 투자한 아빠, 엄마의 보람에서 너는 10등 정도는 해줘야 효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게 아빠, 엄마가 생각했던 완성 레벨이에요.

그런데 10등에서 15등으로 내려갔을 때는 그동안 학원비 등 해서 드렸던 3억이 나중에 3억5천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것, 이거는 5천으로 내 여유자금에 손해난다는 내 완성체가 한쪽이 붕괴될 때 나의 나다움이 지장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분노가 일어나는 거예요. 사람이 화가 나는 것은 완성된 것을 본인이 소지하고 있는데 그 소지한 것을 무너지고 와해시킬 때 사람은 분노하는 겁니다.

시진핑이 왜 분노할까요? 상하이에 감염자 한 명 생겨서 분노하잖아요. 우리 중국은 한 명도 없는 게 완전체인데 그 완전체에서 몇 명 생기니까 분노해서 다 가둬버려. 배급제하고 이런 식으로. 그런데 우리나라는 감염자가 삼만 명, 오만 명 나와도 왜 분노하지 않습니까? 나라 자체가 포기했기 때문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니 마음대로 하세요. 시위를 하던 데모를 하던 화물연대를 하던 니 마음대로 하세요. 대장이 없으니까. 각자 선택이니까.

인간은 분노하면서 분노하는 그 자체가 레벨에서 성공을 했다는 것이 티가 나버린 거예요. 내가 생각한 나다움이 성공이지 하나님이고 예수고 간에 그딴 성공은 거부한다는 자기 마음의 표현입니다. 내가 성공일 때 성공이지 주님이 주시는 성공은 나는 달갑지 않습니다, 반갑지 않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구원 받는 자가 누구냐 하면 반드시 잃어버린 자입니다, 탕자. 하여큰 탕자, 이 사람은 염치도 없어. 그렇게 성공하겠다고 장담해놓고 땅겨서 가불도 그런 가불이 어디 있습니까. 땅겨서 유산 다 가져가놓고 돈 다 써버린 거예요.

돈을 함부로 쓴다는 것은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가 돈을 쓰는 자체가 성공적 삶이라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돈을 마구 쓰는 것은, 돈을 막 뿌리듯이 쓰는 것은 이게 성공적인 삶이라는 거예요. 벤츠 굴리고(벤츠 타는 사람 욕하겠다만), 골프 치고(골프 치는 사람 욕하겠다만) 이런 것으로 함부로 쓰는 것은 그게 자기가 나의 나다움의 최종적인 성공 모습이 이미 프레임이 짜있는 거예요. 그것에 맞추어서 자기 삶을 스스로 자기를 격려하고 독려할 수 있는 삶의 동기 유발로 자극제로 사용했던 거예요.

성경에서 이런 걸 무슨 나라라고요? 이게 블레셋이에요, 블레셋. 블레셋과 같은 정신머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블레셋 교회지요. 블레셋 교회는 오직 기도하시면 복 받고 성공한다는 이야기밖에 안 하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 십자가 복음 이야기해보면, 기쁘게 실패하세요, 하면 그 교회는 그 이야기를 못 들어줍니다. 내가 왜 사는데, 무엇 때문에 사는데?

언약궤는 최종성입니다. 그 설명마저 해야겠다. 최종성은 뭐냐?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는 걸 다 넘어서버렸으니까 더 이상 인간이 할 게 없어요. 구원에 인간이 할 게 없어요. 그럼 뭐냐? 부활의 영 외에는 구원 될 길이 없는 겁니다. 그걸 구약적 모습으로 보여준 거예요. 언약궤 가는 곳에는 인간은 무조건 실패해야 되고 실패하라고 다가가는 것, 여러분 누가 성경 찾아보세요.

마태복음 1장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란 이름이 구원자인데 그 구원자가 바깥에서 온 구원자입니까, 어디서 온 구원자에요? 죄에 갇혀 있는 자를 자기 백성을 어디서 끄집어냅니까? 이게 중요해요.

죄에서 끄집어내기 때문에 자기 백성은 외부에서 오지 않으면 자기가 죄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라요. 이렇게 성공적인 삶이 죄라는 사실을 몰라요. 그러면 우리가 가난하란 말입니까? 인간은 자기가 가난하다는 의식 자체가 죄가 돼요. 가난이고 부자고 이미 실패자일 때는 가난, 부자란 자체가 의미가 없는 호칭입니다.

한 군데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4장 25절,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다가가는 거예요. 구원은 다가오는 거예요. 저쪽에서 오는 거예요. 외부의 구원자가 우리에게 오는 것이지요. 내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오면 올수록 먹구름이죠. 오면 올수록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실패가 마땅함을 깨닫는 감사와 기쁨이 생깁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인간의 삶을 제가 한 자씩 해서 지어봤어요. 촉, 책, 벌. 인간은 뭐로 사는가? 촉으로 살아요. 감각으로. 좀 분석하게 되면 과거의 기억을 기초로 한 감각. 이건 정보, 지식 뭐라도 괜찮아요. 인간은 촉, 기분이든 감각이든 전부 다 바탕은 뭐로 돼 있느냐? 과거에 자기가 기억한 것, 체험한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체험한 것 중에서 기억나는 것, 어제까지 기억나는 그 바탕 위에 촉으로 삽니다.

그런데 촉으로 사는데 이 촉은 우리한테 뭘 주느냐? 책, 책임을 부여해요. 어제 네가 그렇게 결심했잖아. 오늘 이게 무슨 꼴이야. 내가 나한테 책임을 묻는 거예요. 이게 스트레스를 받아요. “어제 네가 일할 때 성사가 잘된다고 호언장담했잖아. 이게 뭐야, 이게.” 이런 것. “네가 10월 29일에 이태원 가서 잘 놀다온다고 호언장담했잖아. 그런데 깔려죽어? 이게 뭐야.”

언약궤는 하나님이 결정한 최종성, 인간은 최종적으로 흙에 불과하다는 그 최종성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따로 언약궤 계열에 편입한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언약의 후손이라 하는데 이 대목은 로마서 1장 2~4절에 나와요. 다윗의 후손 나와요. 언약궤는 후손을 만들어요. 언약궤 안에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미 최종성이니까 없음이 되죠. 없음에서 있음이 되려면 창조의 능력이에요. 창조 능력이 십자가에서 나오는데 이게 언약의 능력에서 나오거든요.

인간이 촉으로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사는데 여기에 대해서 오늘에 보면 그 과거의 기억에서 장담한 그 책임을 무겁게 오늘 나한테 짊어지운다니까요. 내가 나에게 책임을 물어요. 이게 하루하루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뭐냐? 로마서 6장에 보면 죄의 삯은 뭐 된다? 사망. 결국은 우리 주변에 있는 인물처럼 우리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전부 다 사망이에요. 사망인데 그냥 죽지 않아요. 죄 값으로 벌 받는 거예요.

촉, 책, 벌. 특히 중요한 것은 책. 매일같이 스스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할 일이 있는 건 좋아요. 하지만 어떤 짐이 되느냐? 꼭 성공해야 되고 꼭 성사해야 된다는 그 짐. 왜 꼭 성공해야 하느냐 하면 촉, 감각 안에 과거의 기억이 뭐냐 하면 나한테 요청하고 요구하는 타인의 시선들이 있어요.

“네가 내 자식이잖아. 시집가면 잘 먹고 잘 살아야지.” 그러한 친정 아빠, 엄마의 요구 또는 친정 조카나 동생들의 요청과 주변사람들, 알고 지내던 지인들 나에 대한 평가가 있어요. 이게 행동 하나에 감각의 촉으로 구성이 된다고, 내용이. 주변의 눈들이 많아서 눈들에 의해서 심리적 압박을 받는 거예요. 이게 참…….

인간은 생리적인 신체의 작용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육이잖아요. 육이 육을 몰라요. 인간을 알려면 영에서부터 출발해야 되는데 인간의 의학과 과학은 육에서부터 나와서 육을 관리하고 치료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육을 아는 의사들이 왜 촉, 책, 벌입니까? 왜 책임을 져야 돼요? 병원 안 된다고 힘들다고 병원 은퇴해서 “십칠 년간 치과 했다. 나 이제 그만 할래.” 이번 주 <인간극장:방금 은퇴했습니다> 제목으로 나온. 본인이 인간을 치료하면서도 인간이 누군지를 몰라요. 다만 남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더라, 남들 이야기밖에 안한다고. 그리고 목사의 설교도 남들, 목사는 타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성령의 검, 엑스칼리버, 말씀이 여러분들을 찔러댈 때는 그냥 말씀 하나를 찌르는 게 아니고 말씀의 뭉치, 말씀의 완성 십자가,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한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내 피와 내 살을 먹으면 생명이 있다. 네가 이 땅에서 뭘 하며 어떻게 지냈던 일체 그건 다 지나간 거예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오직 예수님의 최종성만 여러분 속에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가오셔서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해주시는 그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실패해도 상관없는 이미 승자가 된 승자와 함께 한 이 삶을 살게 하신 주님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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