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도래와 미래

아빠와 함께 2022. 11. 7. 07:29

20221104a 울산강의-역대기상(15강) 13장 2절 : 도래와 미래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15장 1절, “다윗이 다윗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궐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위하여 장막을 치고 가로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택하사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영원히 저를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하고 이스라엘 온 무리를 예루살렘으로 모으고 여호와의 궤를 그 예비한 곳으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아론 자손과 레위 사람을 모으니 그핫 자손 중에 족장 우리엘과 그 형제 일백 이십인이요” 1절부터 5절까지 나와 있지요.

다윗이 본인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모든 백성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이에요. 모으기 위해서는 택한 자리가 마련돼 있어야 되고, 그 택한 자리는 2절에 보면, 하나님의 궤를 모신 곳에 모든 사람을 다 모읍니다. 언약궤지요. 언약궤의 단일성. 단일성이란 오직 하나. 단일성에 이스라엘의 전부가 여기에 종속되게 하는 게 다윗이 자기의 사명이라 돼 있습니다. 언약궤 하나의 단일성입니다. 언약궤 하나에 다 모든 사람을 종속되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게 되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은 동일한 처지에 있다. 어느 앞에서? 언약궤 앞에서 언약궤가 완성되는 건 십자가지요. 십자가 앞에서 모든 사람은 동일한 처지에 있다. 동일한 처지에 있다는 말은 무엇을 용납하지 않느냐? 비교, 경쟁 이것을 일체 용납 안 합니다. 언약궤가. 동일한 처지에 있기 때문에 너는 나보다 낫고 나는 너보다 낫다는 게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비교, 경쟁이 없으면 여기서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행복과 불행이 없어져요. 왜냐하면 행복과 불행은 어디서 비롯되느냐 하면 승자냐, 패배자냐 이걸로 승자 되면 행복이고 패배자는 불행이 되거든요. 그러나 승자, 패자 되려면 모든 사람은 경쟁을 해줘야 되잖아요. 한쪽은 이기고 한쪽은 지고가 되는데 모든 사람은 언약궤 앞에서 동일한 처지에 있지요. 동일한 처지에 있다면 누가 누구를 부러워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부러워할 필요가 없지요. 모든 부럽다는 것은 환상에서 나왔고요. 이 환상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이태원에 십만 명 모인 젊은 사람들, 압사 직전까지 광란의 파티를 즐겼습니다. 광란의 파티를 즐길 때 그들은 뭘 느꼈느냐 하면 행복을 느꼈지요. 행복이 죽 갈 줄 알았지요. 행복, 행복, 행복 다음에 행복, 행복 다음에 행복, 행복할 줄 알았지요. 압사되고 난 뒤에 완전히 엉망 되었습니다. 인간이 왜 행복하냐? 또 이야기할게요. 돌아서질 말아야 되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행복한 것은 승자의 기분에 도취돼 있어요. 나, 얼추 이 정도 됐으니까 나는 승자라고 스스로 자기 위로해도 되지, 라는 승자의 기쁨에 빠져있는 거예요. 패배자는 승자의 맛을 보기 위해서라도, 불행한 자가 왜 불행하냐 하면 불행에서 벗어나려 하기 때문에 불행한 거예요. 이게 무슨 이상한 소리 같지만 맞는 말입니다. 자기가 불행한 이유가 불행해서 불행이 아니고 행복했던 그 시절과 비교가 되기 때문에 불행한 거예요. 아프리카는 추리닝만 입어도 중산층이에요. 추리닝만 입어도 중산층이라니까요.

지금 성경을 시간 가기 전에, 우리 인생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것부터 알려드릴게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하려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뭐냐?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하는 거예요.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하니까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잘되든 못 되든 불안해요. 계속 불안해요. 불안하니까 누굴 찾느냐 하면 주님 찾습니다. 주님을 찾는데 불안해서 주님을 찾으면 이게 우상이에요.

출발점을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하는 것은 이걸 근원적으로 이렇게 살지 않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하는 것을 유지하면서 도와달라고 주님을 찾아요. 그러면 이거는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근본 문제가 뭐냐 하면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한다. 여기 ‘내가’ 몇 개 들어가요? 내 인생을, 그다음에 뭡니까? 내가 처리하려고 하지요.

그중에 결정적으로 사단 난 게 뭐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을 때 기걸 들어서 따먹었습니까? 먹을 게 없어서 배가 고파서 환장해서 선악과 과일을 따먹었어요? “아이고, 배고파라. 먹을 것 없나?” 이래서 선악과 따먹었습니까? 선악과 따먹을 때 유혹받아서 따먹었어요. 그 유혹자가 누구냐 하면 뱀입니다.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따먹지 말라는 말은, 인간아 너는 뱀이 아니란 뜻이에요. 너는 마귀가 아니란 뜻이에요. 인간은 인간다워야 되지 뱀다우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뱀이, 뱀 속의 마귀가 인간으로 하여금 불안을 조성하는 거예요. 네가 신이 아니잖아. 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왜 놓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따먹은 거예요.

그 핼러윈 축제할 때 배고파서 했습니까? 어디 빵 주워 먹으려고 그런 것 했습니까? 아니지요. 배불러서 했지요. 배고파서 축제 간 게 아니고 배불러서 갔지요. 거기 갈 만 한, 술 먹을 만 한 돈 있고 가면 뒤집어쓸 만 한 돈 있어서 한 거예요. 그러니까 뭔가 여유 있고 살만 하다는 것이 결코 행복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유혹이에요.

가장 큰 유혹은 뭐냐? 내가 승자로 승리자로 자처하는 거예요. 이게 악마가 아담에게 유혹한 게 그거에요. 내가 승리자로 자처하고 싶은 이유가,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하고 싶은데 목표가 있어요. 목표가 뭐냐 하면 나 말고 모든 것, 나 말고 모든 것 하면 인간도, 짐승도 포함되지만 궁극적으로 누구도 포함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대상으로 하나님마저 이기려하는 거예요. 내가 최고의 승리가 되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를 처리하려고 하는 겁니다. 매 순간이 불안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제시한 게 뭐냐 하면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오늘 역대상 15장에서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제시한 건 뭡니까? 언약궤지요. 언약궤의 근본적인 것은 이거에요. 이 세상에 나 있잖아요. 이 세상에 나 말도 또 있는 게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하려고 거기에 완전히 빠져있는데 성경은 뭐냐? 너 말고, 너 말고 따로 있는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게 언약궤라는 겁니다.

내가 있어버리면 나는 나한테 종속돼요. 그런데 언약궤가 있어버리면, 아까 언약궤 앞에서 모든 인간은 어떤 처지에 있다고 했어요? 동일하지요. 동일한 처지라면 경쟁이라든지 승부라든지 이게 없다 했지요. 동일한 처지니까. 승부가 없고 경쟁이 없으면 뭐가 없습니까? 나는 승자, 패배자가 성립이 안 되지요. 그러면 나는 행복하다, 불행하다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저는 불행하고 나는 행복하다 이게 안 돼요. 비교할 이유가 없다고요. 동일한 처지니까.

여름 지나고 이 계절이 뭐가 되지요? 가을이 되지요. 누가 가을 오라고 고사지낸 적 있습니까, 가을 오라고 뇌물 준 적이 있습니까? 가을은 그냥 왔지요. 언약궤도 그냥 온 거예요. 가을이 오는 것을 우리가 광화문 데모한다고 가을이 안 오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주신 언약궤가 우리가 데모한다고, 언약궤 저리 가, 언약궤 없어져 한다고 언약궤 물러가지 않습니다. 가을단풍 보겠다고 팔공산으로 차가 그렇게 밀리면서 언약궤 듣고 싶다고 오진 않아요.

이런 노래가 있어요. 찬바람이 불면. 들어본 적 있어요? 안 들어봤으면 제가 한 소절 불러드릴까요? 찬바람이 누가 불라고 했습니까? 찬바람이 사람 말 들어요, 안 들어요? 일체 사람 말 안 듣지요. 하나님이 제시한 언약궤는 우리 인간에게 위기가 되는 이유가 뭐냐? 우리의 정신은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하는 데 모든 정신을 거기에 다 쏠리는 데 내가 몰두하는 그 바깥으로 그냥 쳐들어온 거예요, 언약궤가.

그럼 결국 뭐와 경쟁 되겠어요? 언약궤가 나타났다와 내가 괜찮은 나로 나타나겠다는 것, 언약궤의 등장과 나의 등장이 성경 안에서 치열하게 다투게 되고 싸우게 되고 경쟁하게 되는 겁니다. 나는 나만 생각하고 싶은데 하나님께는 언약궤를 제시하면서 언약궤 앞에 다 모여,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내 거울 앞에 서고 싶은데 주님께서 거울 치워버리고 언약궤 앞에 서라는 거예요.

설 때에 마치 우리가 찬바람 앞에 서야 되고 찾아온 가을 앞에 우리의 결심과 선택과 결단 아무 상관없이 그냥 가을이 우리를 덮쳐버리죠. 어느새 가을 속에 우리가 놓여있어요. 이스라엘은 어느새 하나님의 언약궤 속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답지 않게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근심해하는 것, 언약궤 앞에서 그게 과연 바른 태도인가 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궤가 없으면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한다면 우리는 불안해서 교회 가서 기도하고 말씀 보고 주님 찾는다고 부산을 떨지요. “이 난관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내 인생을 어떻게 수습하면 좋겠습니까?” 그걸 가을에게 찬바람에게 물어보지요. 그걸 찬바람에게 물으면 찬바람이 뭐라 하겠습니까? 너는 자연스럽질 못해. 찬바람은 자연스럽고 가을은 자연스러워.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자연의 일부거든요. 자연의 일부라면 자연스럽게 휩쓸려야 마땅한데 우리는 뭐라고 독단적으로 자연 따로 자기 따로 떨어져 나와서 떨어져 나온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 땅에 유일한 마귀한테 더러운 성질 받아서 내가 최후의 승자가 되리라, 이런 자기만의 전쟁을 벌이고 있고요.

그래놓고는 “아이고, 힘들다. 스트레스 받는다.”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뭔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그걸 비현실적인 것을 환상이라 하는 거예요. 나의 욕망이 악마적 욕망이 나로 하여금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적 꿈속에 헤매고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겁니다.

자, 그러면 언약궤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하지요. 언약궤 안에 죽음이 들어있습니다. 죽음이 들어있는 이유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죽음이 승자가 된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안 죽으려고 어쨌든 살아남으려고 애쓰잖아요. 그 자체가 강력한 죽음 앞에서는 쓸데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이 차이점을 여러분 아셔야 돼요.

미래와 도래의 차이점. 미래라 하는 것은 현재 여기에 아직 있지 않은 것, 미지의 것을 미래라 합니다. 미래는 아무도 구경 못했어요. 왜? 아직 현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구경 못한 거예요. 미래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현재뿐이니까. 현재 그다음에 오는 것을 미래라 합니다. 맞지요? 이미 지나간 것을 뭐라 하지요? 과거지요.

그런데 도래라 하는 것은 미래가 미리 현재에 와버린 것을 도래라 합니다. 나중에 올 게 미리 와서 현재와 같이 섞이고 중첩된 거예요. 그러니까 도래가 하는 것은 미래가 현재에 개입되는 걸 말합니다. 삽입되는 것, 스며들어가는 것, 개입된 거예요. 도래의 대표적 경우가 성령. 성령을 보증금이라 이야기하죠. 여러분 아파트 살 때 보증금 주지요. 성령으로 보증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1장에 나옵니다(22절).

성령이 왔다는 것은 미래가 현재에,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하려고 항상 불안에 떨면서 발작하고 있는데 미래에 이미 확정된 운명이 현재에 들어온 거예요. 어떻게 들어왔어요? 쑥 들어온 거예요. 확정된 미래가, 미래의 우리의 운명이 미래 가기도 전에 먼저 마중 오듯이 쑥 들어온 거예요. 일종에 지금의 나에 대한, 아까 나는 뭐한다 했습니까? 아침에 눈만 뜨면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하는 것, 일종의 나에 대한 폭력이죠. 또는 전쟁선포, 쑥 들어온 거예요. 확정된 것.

우리는 미래에 뭐가 되려고 하잖아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남편이 미국 가있어서 겸사겸사 남편도 만나고 놀러가려고 짐 싸고 있는데 남편이 쑥, 방금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집에 온다고 그냥 쑥 온 거예요. 그러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 이 시간에 여기 있으면 안 돼. 미국 가 있어. 내가 찾아갈게.” 왜? 당신 만난다는 핑계대고 놀러가게. 그랜드개년이나 놀러가게. 그런데 당신이 먼저 와버리면 무슨 꿈이 좌절되고 깨져버리니까? 내가 단단히 적금 들어서 미국 가려고 한 모든 것이 전부 다 아무짝도 소용없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은 뭐냐? 내 인생을 내가 하는데 나를 아무짝도 소용없는 존재로 만들어요. 왜 그러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처리하는 데 내 영, 영이란 내 마음입니다. 내 마음으로 그렇게 내 인생을 괜찮게 승리자로 절대자로 최고의 행복한 자로 만들도록 계획하고 싶은 내 마음이 있는데 확정된 미래의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을 아무짝도 소용없는 마음으로 처리해버린 거예요. 우리의 마음 씀씀이, 정성, 완벽에 이르는 태도, 내가 흠 없는 자로 살고 싶은 그러한 욕구 이걸 아무짝도 소용없게 만드는 거예요. 쓸데없이 그런 짓 왜 하느냐?

사도행전의 이방인들이 율법을 몰라요.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열심히 율법을 가르쳤어요. 우리 하는 대로 해야 메시아 만날 수 있다고. 유대인들은 율법에 제시하는 게 두 가지였습니다. 할례 행하고 안식일 지키고. 두 가지 핵심은 기본으로 하고 그다음에 율법의 조항들을 여호와 섬기라고 열심히 했는데 그들에게 도리어 누가 도래했느냐 하면 성령이 와버렸어요.

성령 오면 성령 주시는 분이 계실 게 아니겠습니까? 누가 나한테 뭐가 왔다는 것은, 택배가 왔다는 것은 보낸 자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성령은 현재 내가 계획한 것과는 완전히 생각도 못한 거예요. 현재 우리가 계획한 것은 미래 계획이지 도래 계획이 아닙니다. 내가 현재 이러니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미래에 행복할 것이라는 그걸 현재에 계획한다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라 하는 것은 현재와 연속돼 있어요. 끊어지지 않고 연속돼 있다고요.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성령은 무슨 영이냐 하면 예수님의 영이고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환대 받고 돌아가셨습니까, 밉상 받고 돌아가셨어요? 저리 가, 하고 밀쳐서 돌아가셨잖아요. 모든 인간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돌아가셨거든요. 그 모든 인간 속에 누가 포함돼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포함돼 있잖아요.

모든 상대와 끊어진 상태, 거기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그냥 쑥 우리한테 도래한 거예요. 미래가 아니고. 미래가 쑥 들어와 버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야 이 기분? 여기서 내 인생이 기분 좋게 끝장나네.” 끝장나는 데 기분이 아주 좋게 끝장나는 거예요. 시험 치고 있는데 “시험 치는 것 그만, 스톱. 합격자 발표하겠습니다.”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름 쓰고 있는데 벌써 합격자 발표나 버렸어요. 이런 황당?

그래서 복음은 들을 귀 있는 자만 듣는 거예요. 성령 받은 자만 복음이 납득이 돼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이 도래가 없고 미래가 있어요. 이렇게 신앙생활 잘 하고 바르게 하면 천국 넣어줄 것이라는 보험 서너 개 들어서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이 쓱 하고 와버리면 내 마음은 아무짝도 쓸데없다는 그런 큰 환희와 감격과 기쁨이 우리 안에 넘칩니다. 네가 이 세상에서 어디서 뭘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일체 거기에 대해서는 묻지를 않겠다.

지금 제가 손가락으로 입을 막았지만 사실은 여러분 입을 다 막고 싶어. “쉿! 네 인생 조져놨으니까 쉿, 가만있어.” 조져놨다는 것은 내가 불행하다는 뜻이고, 불행은 뭐 했다? 패배했다는 뜻이거든요. 남한테만 패배한 게 아니에요. 내 계획대로 안 됐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패배한 거예요. 남한테 패배하면 희망이 있지만 나한테 패배하면 이건 좌절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러한 계획이 완전히 무산되는 거예요. 그건 쓸데없었던 시절에 있었던 한낱 추억이 돼버린 겁니다. 내가 노력해서 잘 되고자 한 것이 한낱 추억이에요. 주님의 것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마치 찬바람이 불듯이, 마치 가을이 쓱 우리 한 가운데 낙엽지면서 가을이란 계절이 찾아오듯이 주님의 세계, 하늘나라가 우리한테 쓱 온 거예요.

세례요한이 물세례 주면서 언급한 게 뭐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와있다. 옆에 와있다. 어떻게 맞이합니까? 일단 물속에 들어가자. 물속에 들어가고 죽고 다시 태어나야 된다. 그게 물로써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물로 이야기한 게 세례요한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죽고 천국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령의 일을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는 불로써 완전히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세례요한은 아직도 미래요소가 강해요. 왜? 세례요한은 메시아가 아니라서 미래요소가 강한데 세례요한이 누구와 접점, 만나요. 세례요한이 누구와 만나느냐 물세례에서 누구와 만납니까? 예수님을 만나지요. 예수님은 미래가 아니고 그 미래가 현재가 돼버린 도래하신 분이에요. 메시아가 이미 왔어요.

이걸 수요일인가, 주일 낮에 설교를 한 것 같은데요. 세례요한이 엘리야로 왔잖아요. 사람들이 오실 미래의 엘리야를 주님은 뭐로 바꾸느냐 하면 미래의 엘리야는 세례요한이다. 하지만 지금의 엘리야는 누구냐? 예수님 본인입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엘리야는 물세례는 진짜 엘리야, 말라기의 엘리야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두 가지 기능을 완수하시는 분은 진짜 엘리야인데 그 엘리야는 예수님 자신, 본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지금 이 순간 이미 와버렸어요. 방금 성령세례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은 성령세례와 더불어 또 불세례를 주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세례 받아서 도래해서 이미 미래가 확정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성령세례 받지 않고 이미 불세례 받은 사람 있어요. 이미 성령세례 받은 사람도 있고 이미 불세례 받은 사람도 있어요.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이 인간들은 지옥에 맞춰 살기 위해서 안간 힘을 쓰는 사람, 이게 특징이에요. 지옥에 맞춰 살기 위해서, 왜냐하면 불세례가 지옥이거든요. 어떻게 하든 지옥 가는 사람에 맞춰 살기 위해서 그냥 힘입니까, 어떤 힘입니까? 안간 힘을 쓰는 거예요.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거예요. 주일에 교회 오지 않고 어떻게 내 인생이 패배자 아니고, 불행한 자 아니고 내가 설정한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하는 데 있어서 얼추 내 계획대로 맞춰보려고 안간 힘을 쓰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한테는 세례라는 것은 관심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내 인생 잘 풀리는 미래에는 관심 있는데 도래에는 전혀 관심 없어요. 도래를 전혀 몰라요. 이미 왔다는 사실을 몰라요. 이렇게 교회 다니고 예수 믿고 바르게 살면 천당 가겠지, 그렇게 미래만 생각하는 겁니다. 성령세례, 물세례로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뉘잖아요.

세례요한의 물세례, 예수님의 성령세례, 불세례 이건 뭔 뜻이냐 하면 너는 예수님 앞에서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다 이 말입니다. 인간과 인간끼리 서로 실력을 겨루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이고, 인간은 그 모든 것에 포함된 일부에 해당돼요. 모든 것은 예수님이 모든 것이에요. 모든 것에서 성령세례 받은 사람 나오고 그 나머지는 뭘 받습니까? 불세례 받고.

불세례 받은 특징이 뭐냐 하면 지옥인데, 그들은 지옥을 인정 안 하니까 그들이 말하는 세상살이죠. 세상살이에 맞춰 살려고 어떤 힘을 쓴다고요? 안간 힘을 써요. 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자기에게 전부기 때문에. 더 쉽게 말해서 인간은 내가 전부에요. 그러나 성경은 누가 전부다? 예수님이 전부에요.

오늘 본몬 역대상 15장에선 뭐가 전부다? 언약궤가 전부에요. 하나님이 언약궤를 쑥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밀었고, 모든 사람은 언약궤 있는 장소에 다 모여서 동일한 처지에 입장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동일한 처지에 있으니까 성도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모든 것에서 성령 받았기 때문에 성도는 모든 것의 일부가 돼요. 모든 것에서 삐져나온 모든 것을 이루는 하나의 개체가 되고 모든 것의 부속품이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머리가 있잖아요. 머리에는 머리카락 있잖아요. 그럼 뭐냐? 나는 머리카락 하나다 이 말이죠.

머리카락 하나기 때문에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머리카락이 어디에 종속된 속해 있는 머리카락입니까? 내 몸 전체에 속해 있는 거니까 내 몸이 만약에 전부라면 머리카락 하나도 뭐가 되느냐? 전부가 되는 거예요. 전부를 보여주는 일부가 돼요. 그렇다면 성도한테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성도의 목표가 뭐냐, 목적이 뭐냐, 성도는 왜 사는가? 이 모든 것은 미래가 아니고 도래에 의해서 확정됐습니다. 그거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확정됐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5장, 이건 강의할 때마다 너무 이야기해서 식상하다 하면 어떠냐 하는 그런 생각 드는데 천 번을 불러 봐도 성도가 어떻게 사는가, 이 구절만큼 확실한 게 없어서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벌써 성도의 삶의 이유, 목적, 확정됐지요. 제가 도래는 뭐라 했습니까? 이미 확정된 걸 주신다 했지요. 그러면 성도는 방금 고린도후서 5장 15절처럼 살려고 애써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5초 후에 답변하겠습니다. 성도는 이제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 위해서 죽었다 사신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하심이라, 이 말씀을 실천에 옮겨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1초, 2초, 3초, 4초, 5초. 이 말씀대로 살 필요가 없어요.

왜? 우리는 이 말씀이란 전부에 일부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를 그렇게 기어이 만들어내십니다. 내가 사는 것을 작살나게 만들어버려요.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실생활 가운데서 늘 순간순간 느끼게 만들어요. 내가 나를 위해서 좀 살아볼까, 나의 잘남과 우수함을 자랑해볼까 해도 도래기 때문에 이미 주의 힘이 왔기 때문에 그런 나를 그냥 방치하지 않으시고 아주 작살을 내버리는 거예요.

작살을 내는 방법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을 작살내는데 어떤 식으로 작살내는가? 너는 이미 죽었어, 라는 말로써 작살내요. 죽은 자가 죽은 너를 위해서 살 이유는 더는 없다는 겁니다. 이미 죽었잖아요. 네가 산 것은 주를 위해서 산다는 도래의 완전성에 입각해서 살고 있는 것이지 너를 위해서 살 것 같으면 주께서 너에게 찾아오지도 않았다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살려면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주님이 찾아오지도 않은 거예요. 성령세례 받지도 않았거든요. 그럼 성령세례 안 받았으면 나머지 뭐예요? 불세례지요. 불세례 받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떻게 산다 했어요? 이 인간들은 지옥에 맞춰 살게 돼 있어요. 왜? 지옥에 가야 되니까. 지옥 사람 되려면 어쨌든 간에 지옥 가려고 안간 힘을 다 쓰는 사람이에요. 행복해야 되지요, 남한테 이겨야 되지요, 광란의 파티에 가야 되지요.

파티 가서 죽었다고 또 온 전체가 일주일 동안 애도기간 갖고. 이게 지옥이 아니고 뭡니까? 제가 설교 시간에 했지만 죽은 자가 죽은 자답게 한 거예요. 벌써 죽은 자가 그때 죽은 거예요. 무슨 사람에 존엄성이 있어요. 인간은 존엄성 없어요. 둘 중에 하나에요(성령세례 받은 자 또는 불세례 받은 자). 무슨 존엄성이 있어요.

인간은 자체적으로 전부 다가 될 수 없어요. 예수님이 전부 다지요. 인간 꼴에 같은 인간이라고 서로 협력해서 뭘 해보겠다고요? 미래에? 도래는 그게 아닙니다. 인간의 미래를 작살내버리고 도래에 오실 분은 뭐가 전부냐? 언약궤가 전부입니다. 가을이 오면~ 보세요, 가을이 오잖아요. 찬바람이 불면, 찬바람 불잖아요. 이게 인간들이 오라 해서 온 가을입니까, 불라 서 분 찬바람이에요? 그냥 오는 거예요.

가을이 오는 것을 말릴 수 없듯이 언약궤가 들어오는 것은 어느 인간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언약궤는 실패하는 경우는 없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압사로 죽이든지 연탄 캐서 죽이든지 결국은 다 죽이는데 실패함이 없다 또는 다 심판하는데 실패함이 없다. 이 사실을 미래가 아니고 미리 당겨서 알려주고 찾아오신 그것이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언약궤가 있는 그 내용이 미리 그들에게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좀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 같으면 제가 이렇게 했으니까 성경에 깊이 사고하는 사람은 그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나름대로 해결하도록 해봐야 돼요. 뭐냐 하면 십계명이 있잖아요. 십계명은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 지시조지요. 십계명 지켜야 됩니까, 언약궤 믿어야 됩니까? 어느 것이 우선입니까, 라는 질문, 그 질문이 의미 있게 다가와야 돼요.

십계명만 지키면 안 됩니까? 혹시 언약궤만 믿으면 안 됩니까? 언약궤도 믿고 십계명도 믿고 둘 다를 해야 됩니까? 둘 다를 한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되지요. 하나님 쪽에서는 십계명과 언약궤를 같이 하나로 만들었거든요. 십계명이 언약궤 속에 들어있어요. 그냥 들어있는 게 아니고 인간의 죄로 인하여 깨진 채로 들어가 있어요.

물론 깨진 것 대신에 멀쩡한 것 만들어졌지만 깨졌다는 것, 이게 첫 번째 원판이 아니고 깨진 적이 있었다는 그러한 증거를 품은 그 돌 판이 언약궤 안에 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언약궤 뚜껑에 속죄의 피와 매치하기 위해서 만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만나게 하는 것, 죄와 피의 만남에서 죄를 유발해야 되니까 죄를 유발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십계명.

그래서 십계명을 온전히 지킨다는 말은 십계명을 봐선 안 되고 십계명과 언약궤에 있는 그 피와 결합된 앞에 동일한 처지에서 설 때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더 죄인 되게 하시는군요. 그 언약궤 뚜껑에 뿌려지는 피를 바라보면서 피 앞에서 율법을 다시금 해석해야 돼요. 하나님 주신 명령을 재해석해야 되는 거예요.

아하,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그 기능과 그걸 용서하는 기능과 이어지게 하는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그 일을 하시는구나. 그 일을 하시는 분의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이라 하고요 언약궤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거예요. 언약궤라는 눈에 보이는 상자, 거기서 이뤄지는 제사 기능, 그리고 그 기능이 그 현장에 있으면서도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그 현장에 계시는 거예요. 그분이 하나님의 이름이란 분이 그 현장에 같이 게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뭐가 보이느냐? 그냥 언약궤만 보이는 거예요.

보통 공장에서 물건 만들어내면 도매상에 가죠. 도매 다음에 소매상으로 가죠. 그런데 언약궤는 뭐냐 하면 소매로 시작해서 도매로 갑니다. 소매는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 도매는 이것이 레위인들, 그리고 어디로 가느냐? 공장으로 가요. 원천,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겁니다. 죄인들에게 죄를 수집해서 우리 하나님이 하셨던 일, 속죄, 사죄의 피 흘리는 장소까지 언약궤가 자기 백성을 당기고 있는 거예요. 언약궤는 뭐냐? 자석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9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그렇게 돼 있지요. 위에서 보면 언약궤가 뭐냐? 등대에요. 어두운 지옥 같은 캄캄한 세계, 하늘나라의 등대, 언약궤가 등대 쪽으로 자석으로 잡아당기는 거예요. 자기 백성을 쇠붙이를 자석으로 강하게 잡아당기듯이 언약궤로 잡아당겨서 언약궤가 있는 그 천국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이게 등대에요.

제가 노래 가사를 하나 적어왔는데 이것이 언약궤의 등대 기능과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 보세요.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비치면
한 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은희가 불렀던 <등대지기> 노래가 건전가요에 해당되지요.

얼어붙은 달그림자, 이게 뭡니까? 이 세상 아닙니까. 은희가 들으면 웃겠다만 하여튼 내 마음대로 해석하면 되니까. 등대가 있는 이유가 거센 파도치고 방향을 잡지 못할 때에 뭔가 하나 반복적으로 회전하면서 유일하게 어두운 가운데서 불 비추는 것, 그게 뭐냐? 그게 언약궤가 있는 그 장소,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등대라면 성도는 뭐가 되겠어요? 등대지기.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언약궤라는 등대를 위해서 사는 확정된 사명과 임무를 받은 것을 감축 드립니다. 10분 쉽시다.

 

 

20221104b 울산강의-역대기상(15강) 13장 2절 : 도래와 미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봤듯이 하나님께서 정말 친절하게 이스라엘에게 뭔가 모호하지도 않고 애매하지도 않게 확실하게 언약궤라는 나무상자를 줬어요. 물론 이 나무상자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근데 그 나무상자 안에 들어가는 돌 판 자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고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사실이 그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 인간이 알지 못한 미래는 이미 주님이 모든 것이 되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되셨다는 말은 사다리타기에요. 어떤 A, B, C 지점 인간들은 각자 자기 서로 차이 나는 개인을 바라보면서 이기려고 하지만 결국은 아무리 꼬이고 미로를 거치고 어떻게 몇 번 돌아도 결국은 누구 앞에 온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다 모이게 돼 있어요. 산 자나 죽은 자나 전부 다 죽고 나면 무덤에서 주의 음성을 듣고 다 모이게 돼 있단 말이죠. 요한복음 5장에 보면. 결국 예수님 앞에 다 모이게 돼 있어요.

여기 보세요. 이 그림을 보게 되면 우리가 주님에게로 간다고 되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간다가 아니라 주님 쪽에서 이미 왔다가 돼요. 오늘 본문 같으면 뭐로? 언약궤로 온 거예요. 언약궤로 그냥 오신 거예요. 언약궤 앞에 특징이 뭐냐? 모든 인간의 사적인 경쟁이라든지 비교, 대조 이걸 전부 다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인간과 인간끼리 서로 소소한 경쟁, 다투고 이런 것 없어요.

이런 예를 이게 적당한데 여러분이 바둑을 모르니까 제가 친절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바둑이란 뭐냐? 19줄X19줄=361, 이것은 361집이 되는 겁니다. 두 사람이 번갈아 흰 돌, 검은 돌을 놓거든요. 다 놓고 나중에 끝나고 나면 내 집은 35집, 네 집은 39집 그러니까 네가 4집 이겼다. 이래서 승부 나는 거예요. 361집 가운데서 왜 35, 39 빈 터가 있느냐? 나머지는 돌을 다 놨기 때문에 내가 만든 빈 터, 네가 만든 빈 터 어느 빈 터가 넓으냐에 따라서 승부가 결정 나는 겁니다.

그런데 승부 나는 35집, 39집이란 게 바둑판 위에 361집 안에 부분으로 있잖아요. 그렇지요. 고 평지 안에 35, 39라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전부 중에 35이고, 전부 중에 39니까 이게 사실은 361 가운데서 부여받은 거예요. 우리 자체가. 아까 머리카락으로 예를 들었지만. 우리 자체가 주님의 전부에요. 주님이 만든 전부라니까요. 인간의 존엄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손아귀에서 못 벗어난다는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내 입장에서는 전부를 다 받은 거예요.

언약궤가 그런 거예요. 언약궤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게 유일한 거룩한 장소가 돼요. 거룩이 이스라엘 속에 삽입돼 들어온 겁니다. 삽입 방법은 이렇게 돼요. ①끊고, ②개입(삽입). 인간과 인간의 모든 경쟁관계를 끊어버리고 그다음에 개입하는 것, 삽입되어 들어오는 거예요.

인간과 인간을 끊고, 라는 말은 인간 대 인간 사이에 의사소통하려면 여기 뭐가 필요합니까? 말이 필요하지요. 그냥 입 다물고 만납니까? 카페에서 만날 때 커피, 이러고 두 시간 반 동안 앉아서 쳐다보기만 합니까? 뭘 해요? 계속 말을 하지요. 끊는다는 말은 뭔 뜻이냐? 말을 끊는 거예요. 너희와 너희들 사이의 말을 끊는 거예요.

말을 끊고 개입한다는 것은 이게 무엇의 개입이냐 하면 율법의 개입이에요. 네 말 말고 하나님 주신 율법을 너희들 속에 들어가란 말이죠. 그럼 신약에서는 율법에 들어가지 않고 율법의 완성에 들어가겠지요. 신약에서는 복음이 들어가겠지요. 복음은 뭐냐 하면 죄 사함이에요. 죄인을 향한 죄 사함 이야기 들어가는 거예요.

신약에서 언약궤 앞에 있는 십자가 앞에 있는 성도끼리는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너나 나나 죄 지은 자인데 사함을 받은 거예요. 그럼 죄 지었다는 말은 뭐냐? 하나님에 의하면 우리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죽어 마땅한데 뭘 위해서 살려줬다? 나를 위해서 살려줬다? 아니지요. 뭘 위하여? 죄 사함, 복음을 위해서 하루하루 우리를 살려준 거예요.

이 세상에 사람답게 살려고 안간 힘을 쓴다? 이거는 성도한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한테는 그걸 용납을 안 해요. 이 정도 살았으니까 누구 앞에도 내가 열심히 살았다고 자랑할 만하잖아, 라는 것은 주님께서 성령께서 용납을 안 해요. 그런 의식은.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 보겠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그다음에 사도행전 4장 31절부터 봅시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방금 말은 내뱉어놨지요.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이렇게 돼 있지요.

자, 이게 언약궤 앞에 있는 상태에요. 이게 십자가 앞에 있는 상태입니다. 이게 미래에 이렇게 합시다가 아니라 도래된 상태에요. 이거는 인간들이 도저히 예상 못한 사태가 벌어진 거예요. 인간은 자기 인생을 아침 눈만 뜨면 누가 처리합니까? 내 인생은 내가 처리하지요. 내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나는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왜 내 것이 있어야 됩니까? 세상에 맞춰 살아야 되거든요. 열심히.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그거는 가봐야 알고, 아직은 모르겠고.

방금 중요한 것, 세상이 어떻게 끝나는지 아직은 모르겠고, 이게 애매함이고 이게 모호함이잖아요. 언약궤를 줬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매하고 모호함이 있다, 없다? 없어요. 확실한 언약궤를 줬다 이 말이죠. 성도한테는 십자가가 이미 끝판이에요. 끝판 왕이에요. 끝났어요. 십자가 앞에서 동일한 처지에 있습니다. 어떤 처지? 가졌든 못났든 다 같은 죄인이다, 죄인.

그리고 죄에서 용서받을 길은 지옥에서 빠져나갈 길은 뭐밖에 없다? 예수님의 언약궤 안에 뿌려진 피, 그 십자가 피 밖에 없어요. 여러분 이게 어려워서 안 믿어지는 겁니까, 성령을 안 받아서 안 믿어지는 거예요? 이게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이게 성령을 안 받게 되면 방금 제가 한 것, 오직 피 밖에 없다는 그것이 본인의 인생을 모독한 걸로 들려요. 그동안 열심히 산 나는 뭐가 되느냐는 굉장히 불쾌하고 기분 더러운 감정이 일어난다고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여기서 여러분 사도행전 말씀을 잘 들었는지 제가 문제를 내야 되지요. 실습문제를 내야 이해됐는지 안 그러면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해서. 여기에 사도행전 4장 32절에 보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했으니까 남 어려울 때 도와줘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5초 드리겠습니다. 5, 4, 3, 2, 1 끝났습니다.

뭡니까? 남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도와줘야 돼요, 말아야 돼요? 5초 지났습니다. 이 귀한 시간에 10초나 낭비하고. 사람은 도와주면 그 인간 버립니다. 돈 주고 그 인간 버려요. 왜냐하면 받은 사람이 이 돈은 내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의식을 갖지 않고 갑자기 돈이 들어오면 어떻게 얻었든 간에 내 것이 돼버리면 그 인간을 도와주고 지옥 보내는 사람 돼요.

우리 것이 우리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마치 내 것처럼 왜 도와줘요. 사람은 도와주면 그 인간은 백 퍼센트 망합니다. 부모가 자식 도와주면 자식 망하고요, 자식이 부모 도와주면 망해요. 그럼 뭐해야 되느냐? 그냥 굶어죽게 만들어야지요. 왜?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지금 십자가 앞에 우리의 입장이 뭐냐? 죽은 자잖아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우리의 미래가 이미 죽은 자에요. 백 살을 살든 송해처럼 96살을 살든 이미 우리는 죽어 마땅한 자에요. 이백 년 살아도 마찬가지에요. 자꾸 죄만 증거할 뿐이에요. 살 하등의 이유는 날이 갈수록 없어요. 치매 걸려야 알겠습니까? 치매 걸리기 전에 아세요.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여러분 피해자로 보십니까? 나의 욕망이 나를 피해자로 흉내 내기 때문에 나를 피해자 만드는 것은 내 욕망이 가해자에요. 어떤 욕망? 주님은 우리가 죽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살아야 되겠다고 고집하는 그 욕망이 나를 피해자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가해자가 되고. 그걸 유혹이라 합니다. 유혹은 언약궤 외에 다른 데 눈 돌리는 게 유혹이에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역대상 15장 29절,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 올 때에 사울의 딸” 이름이 뭐죠? 미갈.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 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어다보다가 다윗왕의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심중에 업신여겼더라” 자, 유혹은 뭐냐? 언약궤에서 눈 돌리는 거죠. 언약궤 그게 뭐라고, 이게 유혹이에요. 마귀가 작동했다고요. 언약궤 그게 뭔데, 십자가 피 그게 뭔데?

십자가 피가 중요하나, 내가 더 중요해? 미갈은 어느 쪽이었습니까? 본인이 갖고 있는 게 있어요. 뭐냐? 왕의 아내잖아요. 위치, 권위, 자긍심, 자부심, 체면 이걸 끌어 모아서 나의 세계를 형성한 거예요. 그런 미갈을 도와주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문제를 던집니다. 언약궤를 다윗 성에 들어온 것이 미갈을 도와준 거예요, 미갈을 도와주지 않은 게 됩니까? 미갈의 소원을 전면 거부한 거죠.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금 집안 사정이 어려우니까 도와주세요.” “굶어죽어라 인간아.” 이렇게 나오면 성령을 받지 않은 세계에서는 어떤 심리가 작용하느냐? 이렇게 작용합니다.

내가 저 사람을 안 도와주면 하나님이 나에게, 너는 하나님과 재물 가운데 재물을 더 사랑해서 네가 안 도와줬구나. 네가 이 차에 오늘밤 새벽 2시 46분에 네 재산과 네 집이 홀라당 다 타고 서울에 가 있는 자식 네 명 다 죽고, 이렇게 돼야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아서 내 소유를 아까워하다가 하나님께 된 통으로 저주받아서 너도 어려운 사정 겪어보라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망하게 했구나, 아아 그때 도와줬으면 우리 집과 자식들까지 건재할 텐데 내가 스크루지 구두쇠처럼 돈이 아까워서 안 도와줘서 이런 벌을 받았구나, 라는 생각 그 생각이 주님의 생각입니까, 악마의 생각입니까? 악마의 생각이죠.

그러니까 도움 거부당한 그쪽에서 너도 나처럼 집구석 말아먹어봐라. 안 도와준 네 재산도 날아갈 거라 할 때 우리는 무슨 이야기해야 돼요?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바였어요. 왜? 오늘밤 새벽 2시 46분에 가진 것, 자식들 다 죽어버리고 홀라당 다 타서 완전히 상 거지꼴 되는 그게 내가 원하는 거예요. 왜? 내 물건은 내 것이 아니니까요. 주님을 믿는다 해놓고 실제는 주님 믿는 게 아니고 누굴 믿어요? 주님 믿는 나를 믿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나를 지옥으로 보내는 가해자잖아요.

사람은 유혹은 이미 우리가 범죄 한 상태에서 유혹이란 게 뭐냐 하면 우린 범죄 이후의 아담이거든요. 유혹은 뭐냐? 나의 삶을 즐겁게 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이미 악마의 유혹으로 이렇게 됐어요. 됐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궤 완성, 도래한 언약궤 뭡니까? 십자가죠. 십자가는 요 즐겁게 하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전혀 즐겁지 않은, 나의 삶을 즐겁지 않은 쪽으로 성령께서 활동을 하십니다. 왜? 유혹은 나를 즐겁게 해주거든요.

예를 들면 유혹에 어떤 것이 있는가? 음식에 반응 나타내는 것, 미술에 반응, 정치에 반응 보이고, 스포츠에 반응 보이고. 손흥민이 수술한다하고. 연예인들 동정에 반응 보이고. 이게 지금 뭐예요? 왜 음식과 미술, 건강, 정치, 스포츠, 연예인들, 가수, 배우들 동정들, 그들이 잘 사니 못 사니 이런 것, 왜 여기에 관심 있습니까?

본인을 비춰보는 거울 역할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어느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지를 그들을 통해서 대충 나를 정립해 보려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나를 정립하는 게 애매모호해요. 확실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언약궤는 뭡니까? 우리가 미래에 어떻게 하는 게 불확실해요. 하지만 도래할 때는 확실합니다. 우리는 뭘 하든 간에 뭐가 된다? 죄인이라는 사실.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아줘도 죄인이에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도 죄인이에요. 어떤 경우에도 죄인 아닌 경우 없습니다. 그것은 언약궤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러면 유혹이 아닌 게 뭐냐? 죄인을 죄인 되게 하는 것이 유혹이 아닌 거죠. 그게 뭐냐? 말씀에 관심 두는 게 유혹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복음과 말씀에 관심 두는 것. 주의 말씀이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는 거예요.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지라도 나는 구원의 여호와로 즐거워한다.

주님을 위해 즐거워한다고 하면 될 텐데 앞에다 뭐를 일일이 나열합니까?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것을 나열하고 그걸 하나씩하나씩 부정하는 거예요. 하박국 3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내가 외양간에 소가 많으면 나는 미래를 기약하게 돼요. 그러나 미래는 도래와 반대잖아요. 우리가 찾아가는 게 미래고 도래는 찾아가기 전에 주께서 먼저 쓱 하고 침입한 거죠. 주님의 침입이죠. 주님이 어디 침입했습니까? 나의 삶의 즐거움에 침입해버린 거예요.

이제부터 그 경우를 언약궤가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낙엽이 왜 떨어지는가? 가을이 왔기 때문에 단풍나무 낙엽이 떨어져 발에 차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언약궤 위상, 언약궤가 그냥 상자로 가만있는 걸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이방나라 전부를 완전히 좌석으로 장악하고 있다는 것, 완전히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사도행전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제 물건을 제 것이라 하지 않고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누구를 도와주고 말고 할 수 있는 결정권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럼 누가 하느냐? 성령이 하시는 거예요. 성령이 하실 때는 내가 남을 도와준 게 아니고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더욱더 죄인 되게 하는 게 성령의 역할이에요.

그래서 내가 죄인임을 아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모르는 죄를 더욱더 죄인 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주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내게 있던 돈을 그 사람에게 가도록 주께서 조치하실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난데없이 돈을 받게 되고 나는 난데없이 의인이 뭐 됐다? 죄인으로 만드는 행복을 우리에게 안겨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시키지 않고 평소에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해버리면 내가 없는 돈 끌어 모아서 너 도와줬는데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 이렇게 나와요. 이거는 내 물건을 제 것이라고 하는 것이 계속 살아 있게 돼요. 이건 뭐 제가 더 깊이 안 들어가도 여러분 하루하루 일과가 그럴 거예요. 촌에서 올라와서 어렵다고 도와줬더니만 이게 이모 사랑도 몰라보고 지 힘으로 잘된 줄 알고, 내가 지 총각 때 밥 먹어주고 한 게 얼만데 공무원 시험 합격하고 난 뒤에 지 잘났다고 자랑이나 하지, 이런 생각 안 들겠어요?

“내가 널 도와줬으면 나한테 삶의 즐거움을 줘야지.” “다 이모님 덕분입니다.” 이렇게 돼야 되지요. 자, 이모님 덕분 되면 뭐가 됩니까? 내가 남을 도와줬는데 고맙다고 하면 나한테 어떻게 돼요? 내 삶의 즐거움이 증강되지요. 이렇게 돼버리면 나는 졸지에 뭐가 됩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니고 의인 돼버린 거예요. “나같이 조카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한 사람 봤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실제로 독일에 이모가 살고 있는데 조카가 이태원에서 죽었다 하니까 급거 한국으로 귀국한 사람도 있어요. 놀랬어요. 조카를 저렇게 사랑하는구나. 차비만 해도 수백만 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사사기 봐야 되는데 사사기 보기 전에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방금 제가 지옥에 맞춰 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안간 힘을 쓴다는 이야기했잖아요. 이걸 세상에선 이렇게 합니다. “그게 세상살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렇게 사는 거지 뭐. 그렇게 안 살면 갑갑해서 못 살아.”

이게 세상에서 하는 이야기에요. 뭐가 없는 거예요? 언약궤가 없으니까 뭐가 없는 겁니까? 미래는 있을지언정 뭐는 없다? 미래의 희망과 꿈은 있을지언정 도래가 없는 거예요, 도래가. 성령세례, 불세례 그것 몰라요. 그냥 사람 사는 게 이런 거지. 정 주고 정 받는 게 사람 사는 거예요. 오랜만에 바른 소리할 때는 박수도 좀 치고. 사람 사는 게 그렇지. 정 주고 정 받고 하는 거지요. 뭘 그렇게 진지하고 심각합니까? 사는 데로 살다가 지옥인지 천당인지 가봐야 아는 거고.

제가 말 그리 하지만 여러분들 교회 오십 년, 육십 년 다녀 보세요. 이게 남아 있지요. “복음? 복음이고 뽂음이고 간에 사람 사는 데로 살면 되지, 뭐. 내가 성경 알면 얼마나 알아. 사람 사는 데로 살면 돼. 어려운 사람 도와주면 되고. 뭘 그리 골치 아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 분명히 예수님이 이야기했어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분명히 ‘아니요’를 먼저 정해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요, 돈으로 사는 게 아니요 뭐로 산다? 말씀으로 산다. 말씀을 봐야 내가 지금 헛다리짚고 있다는 걸 알게 아니겠습니까. 세상사는 것처럼 산다는 게 얼마나 악마의 유혹 받은 그러한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진리라는 것, 그게 어느새 우리의 즐거움이 되고 말았지요.

이제 언약궤 어떤 일을 하시는가? 사사기를 보겠습니다. 사사기 3장. 왜 사사기가 언약궤를 언급돼야 되느냐 하면 사사시대 때는 이스라엘이 총체적으로 개판이었습니다. 제사장이든 레위인이든 인간 같은 인간은 하나도 없어요, 그냥. 사람이라 하는 것은 대세의 분위기 따라 가게 돼 있습니다. 그 대세의 분위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네 자로 ‘민주주의’라 해요.

애도기간 정하자. 애도기간 왜 정하는데? 평소에 살아 있는 인간들 위해서 애도해야 돼. 죽을 때 애도하는 건 끝난 거거든요. 살아 있을 때 애도해야 돼요. 왜? 미래가 아니고 도래니까, 이미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죽었으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다 했잖아요. 성경에 다 나와 있는 이야기에요. 교회에선 이야기 안 하지만. 교회에서 이야기할 리가 있어요? 교회 자체가 노는 동넨데. 죄와 허물로 이미 죽은 자에요, 우리가.

죽은 잔데 그럼 이스라엘은 왜 살았느냐? 이스라엘을 살려준 게 아니고 언약궤가 살아 있어서 그래요. 모든 이스라엘에 살아 있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백성들은 다 죽었는데 정신머리가 다 죽었어요. 여기에 사사기 3장 6절에 보면,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주변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방민족을 깔아두고 여호와 말고 바알과 아세라 섬기게 했어요.

누가 읽어볼까요, 3장 7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고 돼 있지요. 바알과 아세라 섬기는 건 왜 섬기는가? 자기 삶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람 사는 게 그렇잖아요. 아까 대세라 했지요. 분위가 뭡니까? 인간과 인간끼리 그냥 무심코 사는 거예요. 민주주의처럼 다수의 의견이 진리가 되는 그 체제에요. 한 사람, 두 사람 여호와를 위해서? 그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그러면 모든 인간은 우상을 섬겼잖아요. 율법에 위반됐지요. 율법에 위반됐으면 뭡니까? 그들은 저주받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자기가 저주받아야 된다는 걸 모르고 이스라엘 땅 차지하고 있겠다, 형식적으로 여호와 섬기고 있겠다, 자신은 택한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준다고 생각한 거예요. 아까 했지요. 도와주는 그게 인간 망치는 거라고. 주님은 인간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언약궤의 취지를 그냥 살리는 거예요. 너희는 이미 죽었다는 그 죽음 자체를 살리는 거예요. 너는 이미 죽었다는 그 사실을 살리는 거예요.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십자가가 이야기하는 것은, “죽은 자가 세 끼 먹었으면 됐지, 뭐. 뭘 더 원해.” 이런 식이란 말이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그러나 바알과 아세라는 뭐가 없습니까? 언약궤가 없잖아요. 언약궤가 없고 일반인 같으면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 같으면 유혹을 받는 게 참 당연하고 유혹을 위해서 온갖 것 얻고자 하는 것, 자기가 필요한 것 다 추구했던 거기에 같이 휩쓸려 간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키죠. 하나님께서 주위에 있는 여기 네 명만 보겠어요. 제일 처음 옷니엘, 그다음에 에훗, 삼갈, 그다음에 드보라. 옷니엘 여기에서는 현재 이라크, 메소포타미아, 이름이 길어요.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공격케 했습니다. 전쟁이죠. 전쟁하는 데 옷니엘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요.

자,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는 건 첫째 시간에 했습니다. 미래입니까, 도래입니까? 도래지요. 미래는 잘하면 이겨야 될 텐데 인데 도래는 옷니엘에게는 이미 메소포타미아 군사가 몇 명이든 관계없어요. 이미 전부 다 허수아비고 죽은 자에요. 살아 있는 것은 뭐냐? 언약궤가 살아 있지요. 언약궤가 이쪽을 이겨버려요. 이미 이겼다가 돼버려요. 다 이루었다가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겼다, 이런 도래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켜서 언약궤가 벌이는 전쟁의 위대함과 온전함과 최종성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또 다시 여호와가 이런 분인 것을 언약궤를 통해서 알려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언약궤 그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인간이 주께 범죄 하여 죽어 마땅한데 거기에 추가해서 하나님의 희생의 피가 어린양의 피가 같이 있으니까 죽어야 되는데 그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제 언약궤가 하나님이 이런 분인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 조건 하에 살아 있다, 이게 언약궤에요.

들어보니까 십자가와 똑같은 거죠. 언약궤 완성이 십자가니까. 그러니까 그 언약궤를 버린다는 말은 결국 뭔 뜻이에요? 도래가 아니고 미래에 잘되고 있으니까 계속 잘되겠지 하고 붙이는 거예요. 꼭 사업할 때 망하는 사람과 똑같은 거예요. 지금 잘되니까 잘될 거라고 계속 밀어붙이는 겁니다.

두 번째 에훗. 에글론이라는 모압 왕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옷니엘 끝나고 난 뒤에 사람들은 평화롭잖아요. 평화로우니까 내가 마땅히 승리를 구가할 만한 자격이 되는 줄 알고 또 착각했어요. 이스라엘이 세월이 지나니까. 내가 죄인이고 죽은 자로 생각 안 하고 나는 하나님께서 혜택 받아도 되는 그런 존재라고 오해를 한 거예요. 죄인을 살려준 걸 모르고 내가 살만 해서 잘나서 훌륭해서 완벽했기 때문에 살아났다 또 이렇게 오해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또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여기서 모압이란 나라가 쳐들어왔어요. 모압은 이스라엘을 보고 쳐들어왔지요. 그들은 이스라엘 속에 언약궤가 있다는 사실은 아주 무시한 거죠.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을 언약궤를 공격한 걸로 쳐버린 겁니다. 여기 에훗이 등장하는데 에훗의 특징은 왼손잡이에요. 왼손잡이는 옛날에는 장애인입니다. 왼손잡이로 인하여 승리해요. 에훗이 쳐들어갔을 때 그 왕이 비대했다는 이야기 나오거든요.

사사기 3장 15절,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나한테 조공 바치러 왔어? 받아줄게. 이럴 때 부하들이 오른손을 주의해야 됩니다. 보통 오른손을 쓰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왼손잡이를 보낸 거예요. 오른손을 주의했는데 왼손으로 배를 찌른 거예요. 라이트훅이 들어올 걸 예상 했는데 레프트훅이 들어온 거예요. 깊숙이 찔렀습니다.

찔렀는데 신체가 비곗덩어리인지 삼겹살인지 칼이 빠지지 않았다는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 이 말은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신체에서 이뤄진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어려운데요. 일상에서 인간은 자기의 환상적으로 세상을 구성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어디로 오느냐? 그 인간의 신체에 작용합니다. 몸이 아픈 경우에도 숨을 쉴 때 인간은 자아가 헐떡이고 있지요.

아프면서도 숨 쉴 때까지 계속 아프다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멋있는 꿈이 현실이냐, 아니면 아픈 몸이 현실인지 똑똑히 보라. 평소에 하나님께서 네 신체의 모든 장기 하나 실제로 다루고 있는데 너는 남들이 나를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줄까 환상 속에 있는 거예요. 환상을 일격에 무너뜨리는 것은 병만 한 게 없어요. 질환이 찾아오는 고질병.

주님께서는 교만한 에글론, 교만이란 말은 언약궤의 있음을 무시하는 같은 인간인 줄 알고 이스라엘을 함부로 대했던 에글론의 신체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고 무너지는지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2절에 보니까,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밀어붙였지요) 나갔고 그가 칼을 그 몸에서 빼어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더라” 성경에서 이걸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 후에 에훗의 왼손잡이를 주의한다면 주께서 오른손잡이를 보낼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언약궤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죽은 자로 동일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언약궤 전쟁을 통해서 확인시켜 줍니다. 확인사살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확인해주는 거예요.

세 번째가 뭐냐? 3장 마지막에 보면 나옵니다. 에훗 후에 삼갈이 소 모는 막대기로 이번엔 블레셋이 덤벼들었거든요.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31절)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 계속 있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하는 게 아니고 우발적으로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선택된 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그거는 뭐냐?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전부에 속한 개인이 전부를 대신해서 구원을 하는 거예요. 본인의 자존심, 명예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사사는 흉내 내면 안 돼요. 모방하면 안 돼요. 사사 되겠다고 따라 하다가는 망하는 사사가 뒤에 보면 많은 일이 벌어져요.

사사는 지가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해버리면 스스로 자기가 나를 위함이 부정돼버리고 주를 위함으로 바뀌어버려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이렇게 하면 주께서 나를 구원하겠지, 그런 게 아니고 미래가 아니고 도래가 돼요. 이렇게 잘하면 나중에 구원되겠지, 이게 아니라 이미 구원이 와버렸기 때문에 구원이 덮쳤거든요.

구원이란 뭐냐? 죄 사함이 덮치는 거예요. 죄 사함이란 뭐냐? 이미 나는 죄인으로 어제부로 죽었어도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어제 새벽 4시부로 집이 홀라당 다 타고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다 날아가도 우리는 오케이. 원래부터 저는 제 것 아니었습니다, 이야기해야 될 정도로 우리는 혜택입고 있는 거예요.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사는 게 존재할 수 없는 식으로 주께서 성령으로 자기 백성을 다룹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좀 중요한데요. 네 번째는 야빈이라는 왕이 등장하고 여기 드보라가 나오고요. 네 번째 사사가 드보라입니다. 드보라가 별 한 게 없어요. 드보라가 둘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바락이라는 남성과 여기 야엘이라고 하는 여성으로 구분돼요. 드보라 사사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해요. 남성 바락은 드보라에게 휘둘리고 있어요. 여자에게 기대고 있어요.

기댄다는 말은 도움을 요청하는 거예요. 근데 인간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권한도 자격도 없어요.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도래가 아니고 미래에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은근히 고대하면서 요청하거든요. 그런데 이거는 언약궤 정신과 달라요. 관심이 언약궤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본인의 유혹대상이 된 겁니다. 지금보다 더 낫고 훌륭하고 그럴싸한 가정이 될 때 얼마나 이게 남들 앞에 인기 있을까, 라는 본인이 본인에 최고의 유혹자가 돼요.

아까 내가 나를 유혹자가 되면 현재 그 유혹이 나를 가해자가 된다고. 나를 망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이 가장 망하는 순간이 뭐냐? 승리했다고 여길 때 승리한 나 자신의 대단함이 인간으로 하여금 가장 언약궤, 십자가와 먼 순간입니다, 자기를 망치는 가해자가 된 순간이에요. 그럼 뭘 해야 되는가? 우리가 찾을 것은 실패자로 유지되는 것, 이게 우리의 기도제목이에요. 뭘 해도 성공하지 말고 실패자 되게 하옵소서. 어떤 일 하더라도 실패자 되게 해달라는. Do you understand?

실패한 만하니까 실패하는 게 당연한데 그 실패자가 뭐 그렇게 섭섭한 이야기입니까. 그 궁중의 맛 집 이야기, <대장금>에서 어린아이가 이런 이야기했지요. “한우 맛이 어떠냐?” “한우 맛이 한우 맛인데 어떻게 그 맛을 표현하란 말입니까?” 실패자가 실패하는 게 당연한데 실패자에서 성공이란 말이 왜 나옵니까?

목회성공, 인생성공, 자식농사성공, 사업성공 그 자체는 성도한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것 하지 마세요. 보다 더 실패 자리는 없나이까? 더 남아 있는 실패는 없습니까? 이래해야지요. 한 달에 수입 이천오백 만원인데 더 낮은 실패 없습니까? 그럼 하나님께서 사천 만원 주니까, 그보다 더 낮은 실패 없습니까? 이억 주니까, 더 실패 없습니까?

나로 하여금 지옥에 합당하게 만드는 어떤 요소가 그게 실패거든요. 실패한 사람, 이것이 언약궤에만 감사하는 거예요. 그 실패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두 렙돈, 헌금하라 하니까 자기 가진 것 다 준 과부 있잖아요. 그것도 물어보지 않고 하고 과부에요. 혼자 사는데 다 바쳤어요.

자, 이게 어려운 이유가 이 여성은 군대장관 바락은 드보라가 남성처럼 승리에 성공하는 대단한 잔 다르크처럼 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하나님의 사사의 진면목은 야엘이에요. 그냥 평범한 여성이기 때문에 자기를 내세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언약궤,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공격했다는 이유 때문에, 적이 왔는데 4장에 보면 나와요.

“시스라가 도보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하솔 왕 야빈은 겐 사람 헤벨의 집과 화평이 있음이라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덮으니라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우라 내가 목이 마르도다 하매 젖 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우고 그를 덮으니”(17~19절)

시스라가 도망쳐온 거예요. 야엘에게 물을 달라 해서 마시고, 도망한다고 피곤했잖아요. 전쟁의 결정적 한방은 드보라도 아니고 바락도 아니고 누구냐? 우연히 자기 집에 들렸던 적의 장수를 이것도 신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요. 21절에, “그가 곤비하여 깊이 잠든지라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하고(여기다 ‘낑낑’ 넣으세요)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아주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말뚝을 살쩍에 박았어요. 인간의 존엄성 같은 것 없습니다. 그냥 죽어야 될 자는 죽여 버린 거예요. 본인이 살 자가 아니라 언약궤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했기 때문에 언약궤만 살아나기 때문에 그 언약궤 외에 어떤 인간도 언약궤 전부를 드러내는 데 그것에 방해되는 것은 언약궤를 위해서 용납할 수 없지요. 찍어버렸지요.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어요.

위에서 말뚝을 박으니까 그 말뚝이 시스라를 통과해서 땅에 박혔으니까 시스라 몸은 어떻게 돼요? 그 말뚝 사이에 꽂이처럼 낀 꼴이 되지요. 말뚝이 뾰족했겠지요. 이로써 전쟁은 끝났습니다. 누구의 승리입니까? 바락 승리도 아니고 야엘 승리도 아니고 드보라 승리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락이 생각하는 그런 아니고 드보라 안에 야엘 들어있지요. 내가 사사된 것은 우연이다. 전쟁은 우연의 전쟁이다.

인간이 예상하는 미래의 전쟁 아니고 이미 여기에 도래했던 하나님의 모든 활동에 의해서 어느 것 하나 빈틈없이 죽은 자를 죽게 하는 확정된 사실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언약궤의 그 위상을 위해서 언약궤는 반드시 확정된 사실을 애매모호한 게 아니고 분명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로 여러분 말뚝 박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은 자가 왜 죽어야 되는지를 세상살이 바빠서 남들처럼 그럴싸하게 살아 보이는 걸 위해서 안간 힘을 쓰는 우리의 모습을 오늘도 십자가로 박아주셔서 이제는 십자가의 사람, 언약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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