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03a 울산강의-역대기상(18강) 16장 22절 : 하나님의 음식물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16장 22절,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다윗이 예언하면서 그 백성들에게 선지자와 왕의 입장에 서서 장차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그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통해서 나타나셨을 때 이걸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약의 특징은 특정 인물로 나타난다. 그럼 이건 무엇과 대조되느냐 하면, “평소에 나는 누구 쳐다보고 사는가?” 이것과 대조하면 대번 알 수가 있지요. 이게 사람들은 두 개를 이야기해요. 하나는 나는 나를 쳐다본다. 두 번째, 나는 하나님(신)을 쳐다본다. 나는 나를 보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쳐다보고 산다. 이게 하나님이 실제로 언약으로 일하는 특징에 의하면 여기에 들어갈 수 없어요. 모조리 다 잘못입니다.
오늘 뉴스에 루마니아 대통령이 나왔어요. 루마니아 대통령이 이야기를 하는데 뭐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챗GPT 보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챗GPT가 거울 같이 생겼어요. 그러면 루마니아 대통령은 오늘 아침에 누구와 이야기했는가?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 누가 제일 예쁜가?” <백설 공주>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거울보고 하는 거예요. 챗GPT 보고 나라는 어떻게 하면 되고, 올해 앞으로 경제정책 어떻게 하면 되느냐? 챗GPT 보고 묻는 거예요. 자기는 이렇게 신식 대통령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거울 속에서 챗GPT가 나오고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현대판 <백설 공주>되지요.
그러면 루마니아 대통령은 누구 쳐다보고 있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지요. 거울아, 거울아 자기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자기는 괜찮은 비서 하나 들였다고 주장하는 데, 여러분들은 누구 쳐다보지요? 나를 쳐다보고 하나님 쳐다본다. 둘 다 탈락입니다. 언약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언약은 특정 인물로 등장해서 나와 경쟁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인물로 나타나는 거예요. 이게 언약이에요. 노아언약 때는 노아로 나타났어요. 아브라함언약 때는 아브라함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삭에는 이삭으로 나타났고, 야곱에는 야곱으로 나타났어요. 그게 바로 역대상 16장 16절부터 17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언약이며, 이렇게 돼 있지요.
성경에 아브라함언약이라 할 때 여러분은 여기서 도발적이어야 돼요. 내가 아브라함보다 뭐가 못 났는데 왜 나는 나를 쳐다보는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쳐다봐야 하는가? 아브라함 지가 뭔데? 이렇게 도발적으로 나온다면 여러분들은 성경을 지금 제대로 이해하고 깊숙이 성경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보셔도 돼요. 성경 속으로 들어가려면 화가 나야 됩니다. 분노가 일어나야 돼요.
“왜 나는 나를 못 보고 만들어? 하나님 왜 저를 못 보게 만듭니까?” 그렇게 화를 내야 오늘 본문 16장 22절을 이해돼요.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방금 했던 원칙을 그대로 적용시켜버리면, “하나님, 나는 내 편한 데로 내 행복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 부은 자가 뭐기에 선지자가 뭐기에 어떻게 나보다 중요합니까, 하나님?”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제대로 하나님 앞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좋은 사이가 아니에요.
그러면 기름 부은 자, 선지자가 언약이거든요. 이게 다윗언약, 다윗에게 이런 다윗이 기름 부은 왕이고 다윗이 선지자니까요. 그럼 왜 우리는 날 못 쳐다보고 그 선지자, 왕을 쳐다봐야 되느냐, 기름 부은 자를 쳐다봐야 되는가? 그것이 33절에 나옵니다. “그리 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주께서 땅을 심판하려 오실 것임이로다”
무슨 삼림의 나무들이 뭐 즐겁다고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시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심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삼림들이 아주 춤을 추듯이 좋아하고 기뻐하고, 하나님 조치는 항상 정당하고 잘하셨습니다, 이렇게 찬미하는 모습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왜 이 세상은 심판돼야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특징이 뭐냐? 노아언약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특징은 인물로 나타난다 했지요.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멸종 시나리오’에요. 인류멸종 시나리오입니다. 인류만 멸종당하는 게 아니에요. 모조리 다. 인류멸종 시나리오, 세상을 전부 다 멸종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멸망시키려고 하시는 거예요. 심판하시려고.
언약에 의하면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여기 ‘나’ 있잖아요. 나를 쳐다봐선 안 되고 내가 신을 쳐다보는 것도 우상이죠. 왜냐하면 인물로 등장했는데 우린 추상적인 신, 우상이죠. 허망한 신, 추상적 관념적인 신을 맨날 쳐다보면서 신에게 도와 달라 하는 거예요. 누가? 내가. 그러면 인물과 나는 경쟁관계에 있는데 하나님께선 ‘나’ 출발점을 인정하지 않지요. 인물로부터 출발해야 돼요. 나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특정인물로 출발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이야기하기보다도 실제로 창세기 12장 2절, 3절에 나오는데 여러분 피곤하시기 때문에 그냥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오늘은 아주 쉽게 가겠습니다. 다 이유가 있어요. 몸 아픈 사람이 있어서. 창세기 12장 2절,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택해서 하는 말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보세요. 또 하나님 편애하잖아요. 나한테 복을 안 줘요. 지명한 특정인물을 내세워서 그 인물에게 복을 주는 거예요.
그러니 나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에게는 성경 하나하나가 분노 유발될 수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성경 보고 분노를 안 일으킨다는 것은 성경의 뜻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결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딱 택했다니까, 아브라함을. 그리고 아브라함을 쳐다보고 가는 거예요. 너 쳐다보지 말고 아브라함, 왜? 아브라함을 쳐다보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안 쳐다보는 사람은 저주받는다. 이게 방주처럼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우리 쳐다보고 살고 아쉬우면 하나님 찾는 것, 그거는 인류멸종 시나리오에 딱 적합한 거죠. 왜 우리는 우리를 쳐다봐선 안 되는가? 언약적으로 보면 복과 저주가 아브라함에게서 출발하고 거기서 확정이 되고 규정이 된다는 말은, 우리는 이 땅에서 언약적으로 망하고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누가? 우리는. 우리는, 이걸 말을 바꿔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해도 되고 당신. 당신은 망하고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율동까지 하면서, 당신에게 저주를~, 우리는 저주받기 위해 태어났어요. 그래서 저주받기 때문에 내가는 족족 나를 망하게 하는 일만 하게 돼 있어요. 내가 하루일과 족족. 일기 쓸 때 아침에 맑았다, 아침에 출근해서 하는 일 족족 나로 하여금 나를 폐허로 만드는 그러한 일을 축적을 하는 것에 우리는 시간을 다 보내고 있어요. 내가 나를 망하게 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주 열심을 다하고 매진을 하고 몰입을 하지요.
그래서 인간이 망하는 이유는 자기 일에 자기에게 이익이라 생각하고 자기에게 이익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매진했던 그것이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 다 가보니까 앞에 철벽이 있어요. “이건 길이 아니네?” 실컷 한 평생 살았는데 여기서부터 지옥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무리 오래 살고 평생 살아도 나만 쳐다보고 사니까 그런 거예요. 이거는 언약이 아니고 비-언약이에요. 언약적이 아닙니다. 이걸 좀 어렵게 말씀드릴까요.
인간은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니에요. 단 둘의 관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언약의 인물이 개입해서 조성된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린 눈에는 뭐냐 하면 나와 너, 너와 나만 보여요. 우리 단 둘이, 맨날 우리 단 둘이,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좀 더 공부를 하고 좀 더 세상에 대해서 넓게 알게 되면 이 세상은 단 둘이란 자체가 이 세상에서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신혼부부가 제주도 신혼여행 가서 호텔에 묵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단 둘이 여기 방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다른 모든 중산층 계급사회가 함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양식, 사고방식,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 시대의 중산층들이 평균해서 평균된 층들이 했던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흉내 내는 거니까요. 그 문화양식에 그들은 푹 젖어있습니다.
그들은 단 둘이 있는 게 아니고 그들 주변에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은 그 시대에 보편적으로 용인이 되는 용납이 되는 스타일, 삶의 스타일 안에서 그들은 노닥거리고 있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단 둘이 해놓고 행동하는 것은 남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주의하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남들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그러니까 우리 단 둘이 해놓고는 거기서 무엇을 플러스하느냐? 남들 보기에 우리는 너무 오버하지 않게 살자. 결혼했으니까 주변의 사람들, 어른들에게 실망스럽지 않게 살자 할 때 이 단 둘이 성립 안 돼요. 제3의 요소, 타인의 시선을 떠안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오늘 강의 진도에서 이걸 필히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방금 이것을 어려운 말로 단일화된 총체화라 합니다. 세계는 단일화된 총체화로 뭉쳐져 있음, 묶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세상은 모두 다 여기 하나로 모여라, 하는 쪽으로 묶여져 가고 있어요.
오늘 우리 외손녀가 휴대폰을 샀는데 애들 휴대폰이 따로 있어요. 초등학교 2학년이 휴대폰이 왜 필요하냐? 학교 등교하고 보니까 자기 빼놓고 휴대폰을 다 갖고 있어요. 몰랐지요. 외국에 살다보니 그걸 몰랐던 거예요. 단일화잖아요. 총체화고. 이 땅에 이 시대를 거주하고 있는 것은 전부 다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한 구덩이로 서로 담겨서 한 덩어리 되는 그런 원칙에 모든 인간은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이걸 마태복음 7장에선 뭐라 하느냐? 이걸 넓은 길이라 해요. 많은 사람들이 한 덩어리로, “어서 와, 어서 와. 모여, 모여.” 서로 모여서 한 덩어리로 뭉쳐야 뭔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결합해야 인류가 지구에서 살 출구가 생겨. 모든 지혜 다 끄집어내, 라고 한 덩어리 되어서 가는 거예요. 흩어지는 것은 낙오자에요. 그 중심축으로 모아지는 겁니다.
그 중심축이 뭐냐? 그 중심축이 바로 너와 나, 우리지요. 이 땅에 주인공은 없어요. 서로가 동일한 마음가짐으로 하나같이 집결되는 성향을 보입니다. 이 세상은. 세상이 뭐냐 할 때 전부 다 한 덩어리 되는 성향을 보인다, 이렇게 보시면 정답이에요.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갈수록 그 성향이 강렬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기가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어디서 거주하든지간에 이 세상에 아프리카 가든지 북극에 남극에 가든지 관계없이 전부 다 세상은 한 덩어리입니다. 일종에 잡아당기는 블랙홀처럼 강한 중력이 작동하지요, 서로.
그래서 초등학교나 중학교 애들한테 너 어떻게 살래, 인생관이 뭐냐? 애들은 그걸 몰라서 너 장차 뭐 될래? 대통령 될래, 난 연예인 될래, 손흥민이 될래, 이러는데 그 복잡한 것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나, 어떻게 살래? 나 이렇게 살래. “나 남들과 떨어지지 않을래. 나는 중심축에서 벗어나지 않을래.” 이게 지 고백이 아니고 본능입니다.
그 중심축에 누가 있는데? 본인이 있지요. 어떤 영웅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은 영웅을 원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이 영웅이에요. 그래서 떨어지지 않는 이걸 이익이라 하고, 떨어지면 이걸 손해 또는 더 노골적으로 낙오자라 해요. 시대의 낙오자. 그렇다면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이 원하는 것은 뭐냐? 평화, 화해, 평등, 소외된 자 돌아보기. 멀리 있는 사람 안아서 자꾸 한 구석으로 모으는 거예요. 누가? 이 세상이.
모든 인류가 한 덩어리된 것, 이것은 이미 마이클 잭슨이 노래한 거예요. 라는 가수들 한 오십 명 나와서 부른 것도 있고, 마이클 잭슨이 주기도문 주제로 부른 노래도 있어요. 한 덩어리 된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의라고 하는 거예요. 정의라고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학교에서 배운 정의란 소외된 자를 돌아보고 억울하고 어려운 사람을 챙겨서 그다음 뭔데? 한 덩어리 되는 거예요.
애가 태어나서 일 년 되면 그걸 뭐라고 하지요? 돌이죠. 돌잔치 해주잖아요. 돌잔치 왜 해줍니까? 일종에 서약 같은 거예요. 너는 이제 우리 집안사람이라는 서약이에요. 집안사람이면 한 덩어리가 돼요. 따로 놀지 말란 말이죠. 전에는 우리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서 선조나 아버지 섬기자, 이랬는데 현대는 아버지고 선조고 없어요. 각자가 아버지고 각자가 어른이고 그래요.
각자가 어른인데 따로 노는 어른이 아니고 한데 뭉쳐지는 한 가정으로서의 다 같이 어른이 되는 조건 하에 뭉쳐지는 것, 그걸 네 자로 ‘민주주의’라 하는 거예요. 학교에선 그 민주주의 교육을 시키고요. 그 민주주의가 어떤 범위에서 못 벗어나느냐? 민족주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민주주의는 정치적 제도지만 민족주의는 혈통적 주의잖아요. 인간이 만든 관념이 혈통을 못 이겨요. 그러니까 민주주의를 하되 우리끼리 민주주의. 우리끼리 민족? 북한에서 나오는. 그걸 국뽕이라 해요. 자기 민족에 대한 광신도.
자, 이러한 세상적으로 지금 방금 이야기한 것이 뭐냐? 세상은 가만있는 게 아니고 끊임없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 데 그 움직임은 어떤 움직임이 되겠습니까? 멀리 있는 사람들, 가까이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어떻게 된다? 한 덩어리가 되는 움직임. 요한계시록 17장에서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모든 것이 모든 나라, 민족이고 뭐고 모든 게 결국은 한 통속이 되는 거예요. 아담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마지막도 아담의 몸체로 마감되는 것이 인류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 한 덩어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고립시켜버립니다. 자,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 하면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게 된 이유가 이런 데서 나와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주변 나라와 교역을 해보니까 경제적 고립이 나라를 망친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독고다이, 우리 중심으로서는 나라 자체가 유지가 될 수 없어요.
큰 나라들이 어떻게 했는가? 큰 나라들이 교역이 활발하면 할수록 강대한 나라, 주변의 힘을 자기 나라 쪽으로 쫙쫙 빨아들여줘야 나라가 튼튼해져요. 이걸 현대식으로 이야기하면 투자가 없으면 나라꼴이 안 됩니다. 외국투자가 없으면. 외국투자가 지금 주식을 팔고 나가버리면 울산 80%가 수입이 없게 돼요.
그렇게 해서 그들이 뭉쳐서 원하는 게 외치고 싶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자꾸 하나로 응집이 되는 데요. 태양의 오십 배 되는 별이 응집이 되면 그것이 블랙홀이 돼요. 무게가. 천문학에서 계산을 해보니까. 스스로 큰 깊은 우물을 만드는 거예요. 뭉치면. 자꾸 뭉쳐서 외치는 구호가 뭐냐? 이겁니다. 참 이거는 진짜 아무나 안 가르쳐주는 건데. 살아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거예요. 이게 인간세계입니다.
지금껏 강의하면서 제일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하나님의 언약은 특정 인물을 내세운다 하지요. 그렇다면 언약 바깥에, 언약이 없는 곳에는 특정 인물이 아니고 자기만 쳐다보고 신을 쳐다보는 그들끼리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끼리 모여서 하나의 덩어리가 이뤄지는 거예요. 그런데 역대상 16장에 보면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고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해서 특정 인물을 내세웠잖아요.
아까 이야기했는데 다시 말씀드리면 그 특정 인물이 하는 일이 뭐라고 했습니까? 33절에 심판이죠. 심판이니까 우리가 지금 방금 내린 결론이 뭐냐? 인간 뭉친 이유가 결국 마지막 도달한 게 뭐냐 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이 자랑스럽다는, 뭉쳐 있는 모든 인간이 살아 있는 모든 인류에 대한 자체적인 찬미죠. 자체적인 흐믓함, 뿌듯함 이런 거란 말이죠.
이걸 뭐로 만드는가? 이걸 폐허로 만들어버려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으로 폐허로 만들어버리면 이 안에 있는 인간들, 폐허에 사는 인간들을 두 자로 하면 뭐라 할까요? 폐허의 위에서 사는 인간을 뭐라 할까요? 폐인. 폐인의 특징은 자기가 쏟아낸 오물, 쓰레기 안에서 못 빠져나온 걸 폐인이라 하지요. 자기가 쏟아 부은 그 쓰레기 안에서 그 쓰레기가 너무 아깝고 쓰레기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거기서 나갈 생각을 못하는 걸 두 자로 폐인이라 하는 거예요.
한쪽은 폐허가 될 인간들의 집단, 덩어리 이쪽은 복이 되는 하나님의 인물. 언약 속의 인물은 복이 되고 그 복에 의해서 공격 대상이 되는 인간의 뭉쳐진 단체는 뭐가 되겠습니까? 복 반대 저주가 되겠지요. 성경 참 쉽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쉽게 하십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 때문에 신을 찾는 것, 그것 그 인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물을 따로 내세워요.
하나님이 인물을 따로 내세운 걸 아시는 분은 성경을 보면서 살짝 분노해야 돼요. 왜 내가 아니고 저 사람입니까, 나 아니고 왜 아브라함입니까, 나 아니고 왜 이삭입니까, 나 아니고 왜 야곱입니까, 나 아니고 왜 예수님이십니까, 라고 질문을 진지하게 심각하게 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러면 다시 봅시다. 나는 가만있지 않고 뭘 찾습니까? 나는 나를 찾고 나를 쳐다보고 살고 또 누굴 쳐다본다? 신을 쳐다보지요. 이 신을 구약성경에서 이걸 우상이라 했습니다. 우상의 반대말은 뭐냐? 인물이죠. 왕이죠. 언약의 인물, 왕. 그 왕을 바로 오늘 본문 역대상 16장 22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우상의 반대말은 참된 신, 이렇게 이야기하지 마세요. 참된 신이 언약을 가지고 특정 인물을 이 땅에 내세웠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을 쳐다보게 되면 다 신자 같아요. 그런데 신을 쳐다보는 그 인간이 누굴 쳐다본다, 평소에? 자기 자신을 쳐다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의 인물을 주신 이유는 너를 쳐다보지 말고 누굴 내세워라? 하나님이 인물화 시킨 그 사람을 네 대신 쳐다보라 이 말이에요.
아주 쉬운 말로 하나님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예수님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이 이야기거든요. 어느 쪽이에요? 둘 다 안 되지요. 둘 다 안 되죠. 누굽니까? 둘 다 믿으면 구원받는다? 성경에 없어요. 성경에 주 예수를 믿어라, 이렇게 돼 있지요. 하나로 한다고. 둘 다 믿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항상 단 둘이 있는 것 같지만 항상 짝을 찾아요. 일단 나는 집어넣고 나한테 잘해줄 짝.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나도 보고 그 짝도 보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요. 모든 사람이.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너도 믿고 너도 쳐다보고 나를 쳐다보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아니면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라 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라 했지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나는 언약의 인물이 아니고 아까 말씀대로 하면 나는 폐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종내 잊지를 못해요. 내가 했던 모든 일, 노동뿐만 아니고 사랑, 미움, 여러 가지 열심, 내가 신혼여행 간 것, 아기 낳은 것, 그 하나하나 내가 장로 되고 안수 받아 목사 된 것, 인간은 자기에 관한 모든 것을 잊지를 못합니다. 잊지를 못할 정도가 아니고 거기다가 의미를 부여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망하고 저주받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우리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에 대해서 화내지 마세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분명히 했어요. 너 쳐다보지 말고 언약을 지니고 있는 그분을 보라고 분명히 언급했으니까 화낸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나 쳐다보고 아브라함 쳐다보고 둘 다를 보는 게 되니까 이거는 자기를 부인하는 게 아니죠. 너 아니고 아브라함이야, 너 아니고 이삭이야, 너 아니고 야곱이야, 너 아니고 예수님이야, 너 아니고 다윗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한 가지를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무엘하 4장 4절에 보면 제가 읽어볼게요.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급히 도망하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므비보셋이 다섯 살 때 유모가 급히 도망가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무엘하 4장에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에 대해서 어떤 대우를 했습니까? 천대했습니까, 특별대우를 해줬겠어요? 특별대우를 해줬지요. 이게 상당히 문제인데요. 왜냐하면 지금 다윗은 누구와 계약한 게 아니에요. 누구와 의논하지 않습니다.
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는 점선이에요. 사무엘상 20장 42절에 보면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자기들 친구가 되어 영원한 언약을 맺었습니다. 지금 요나단은 죽었거든요. 자기 아버지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어요. 죽었을 때에 다윗은 그 요나단을 아끼면서 요나단의 아들에게 영원한 언약을 했어요. 그럼 실선은 뭐냐 하면 이런 게 참 어려운데요.
자, 므비보셋은 현재 사무엘하 4장 때 살아 있습니까, 죽어 있습니까? 절뚝발이 사람은 살아 있지요. 살아 있으니까 실선으로 동그라미 치겠습니다. 실선을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다윗은 누구와 언약했느냐 하면 친구 요나단과 했지요. 요나단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점선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점선으로 처리한 이 언약을 다윗과 므비보셋을 아무 관계없이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므비보셋에게 모든 혜택을 다 줘버려요. 이게 언약입니다.
지금 우리하고 예수님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우리는 므비보셋 입장이에요. 예수님은 누구와 했느냐 하면 아버지와 언약을 맺고, 그 혜택은 아무 상관도 없는 나만 쳐다보고 사는 나의 행복만 추구하는 나에게 언약적 결실을 효력 있게 적용시켜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천국 백성 만들었습니다. 이게 언약이에요.
그렇게 된 입장에서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자기 자랑했겠습니까? “다윗 임금님, 내가 착하기는 착했지요. 내가 훌륭하기는 훌륭하지요. 내가 다윗 왕을 참 좋아했으니까 나한테 잘해주지요.” 이렇게 하면 다윗이 뭐라 하겠습니까? “으응 왜 이래 너? 내가 너하고 상대해서 이런 혜택주는 게 아니야. 너는 내 상대자가 아니야. 나는 네 아버지 요나단과 계약해서 그 혜택을 너한테 주는 거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죽었던 예수님과의 계약을,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그 의를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우리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 언약이 어느 날 우리로 하여금 알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안에서 우리의 운명, 우리의 미래, 우리의 숙명, 우리의 장래 수시합격입니다. 땅땅땅 끝났어요. 끝났습니다.
특히 언약적으로 하나님의 대상으로서 우리의 미래는 오늘 죽어도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아는 이걸 우리한테 깨닫는 방식이 뭐냐? 악마로 하여금 활발하게 활동하게 합니다. 악마는 이 언약 바깥에 있어요. 아까 공부했으니까 복습합시다. 언약 바깥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 했습니까? 언약을 모르는 인간은 자기를 쳐다보는 인간끼리 한 덩어리가 된다 했지요.
이 땅에서 낙오자 되면 안 되고 출세 못하면 안 되니까 서로 한 덩어리 될 때 성공했다 보는 거예요. 남들이 나를 부러워할 때 나는 어느 정도 선방한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하고 우리 가문의 영광으로 보는 겁니다. 한 덩어리니까.
그래서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 다 성공한 사람이에요. 자기 아들 학폭해서 국가수사본부장 됐다 하루 만에 사퇴한 검사 출신 변호사 있잖아요. 그 정도하면 성공한 사람이에요. 왜? 이름났잖아요. 이재명 성공한 사람이죠. 왜? 티비 나잖아요. 이름난다는 것은 하나의 일시적으로 표준적 인물이 되었다는 우리가 부러운 대상이 되었다는…….
학교폭력해서 소리 소문 없이 지금 아무것도 없는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뭔가 떠야 그 사람의 뒤를 깨낼 여지가 있지요. 임영웅이 말고 황영웅이는 트롯대회에서 1등 했는데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결승전을 앞두고 자진 하차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만큼 떴잖아요. 그 사람이 노래대회 나오지 않았으면 그 사람이 폭력 사태가 있었는지 몰라요.
뭔가 내가 가고 싶은 자리, 성공의 자리를 미리 점유했어야 이 땅에 유명인사가 되는 겁니다. 지금도 마약하고 프로포폴하는 사람 한둘이 아닌데 특정 인간이 마약에 뭐한다 하니까 유명인사 되잖아요. 어이가 없네. 본명이 엄홍식, 영화배우 유아인. 뭔가 이렇게 참 대단한 사람이야, 이렇게 돼야 뒷말이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 프로포폴해야 신문에 나지도 않아.
얼마나 인간은 바로 평소에 정신적으로 스트레스 받는 게 뭐냐 하면 일단은 유명인사 되자. 남들이 부러워하는 존재가 되자. 그게 우리의 삶의 목표다. 삶의 목표지요.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부러워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므비보셋은 자기가 아무것도 한 것도 없고 할 것도 없었는데 아버지끼리 계약해서 아버지 대에서 자기 운명은 결정 났어요. 이게 언약입니다.
이걸 누가 방해하고 누가 못 마땅해 하느냐? 마귀가 활발하게 작동해서 이걸 계속해서 “치워버려. 이상한 소리 치워라.” 자꾸 우리 머릿속에 치우고 나중에 마약하든 말든 너도 영화배우로 한 번 떠봐라. 어이가 있든 없든 떠봐라.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할게요, 이러면 유명인사 되니까.
평소에 얼마나 그런 자들을 우리가 씹는 자들을 선망해왔던가를 우리는 여론과 뉴스를 통해서 발견하지요. 하나 되게 하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여론이라 해요. 여론몰이, 여론의 중심에 서는 거예요. 아까 같이 욕 얻어먹는 여론도 있지만 허준이라고 하는 사람, 필즈상이라고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그 상을 받았던 프린스턴대 교수지요, 우리나라 사람.
40세 이전에 상을 주기 때문에 이 사람 될 때 전 세계 수학자들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봐. 한 곳에 몰빵하니까 성공하잖아.”라고 많은 엄마들이 얼마나 자기 자식들 닦달 냈겠습니까. “네가 한 곳에 잘하면 밀어줄게.” 한 덩어리죠. 한 덩어리잖아요. 우리의 평소의 말씨나 태도나 마음가짐, 행동에 이런 악마적인 언약을 배제하고 우리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그러한 스타일, 그런 방식에 삶이 얼마나 우리를 꽉 이렇게 프레스, 억누르고 있는지 몰라요.
이런 세상에 대해서 주께서는 심판하십니다. 심판하는 근거는 이거에요. “같잖지도 않는 네가 뭘 안다고 너희끼리 뭉쳐.” 그런 마귀들,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뭐 복음이 어떻고 하지 마세요. 개, 돼지한테 복음 전해야 소용없고요. 그냥 허허 웃지요. “열심히 해라.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열심히 해라.”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데…….” “그래 성공해라. 그건 결핍이야.” 성공이 남아있는 것은 결핍입니다. 확정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것 누가 쳐다봅니까? 자기 자신 쳐다보고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쳐다보면서. 교회 나와서 신에게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성경에 우상을 보면 반드시 자기를 위해서, 포함돼요.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 비는 걸 우상이라 해요. 그러나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누가? 어떤 인물이. 인물이 누군데? 예수님.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 안 믿고 뭘 믿는가? 하나님 믿고 싶어 해요. 하나님은 나를 부정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나를 부정하기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가 나를 부정하잖아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서 뭘 제거하느냐? 십자가 제거한 예수, 새 생명 예수를 믿어요. 마귀가 그 짓한다고요. 새 생명 예수, 부활의 예수. 부활의 예수는 뭐냐? 십자가는 지나갔다는 거예요. 어디 버스입니까, 지나가게?
십자가가 뭐냐? 언약의 마감입니다. 끝입니다. 끝을 소개한 게 부활이에요. 부활의 능력입니다. 안 살아봐도 미래 알게 된 끝, 마감, 마감의 형국, 마감의 상태 이걸 바로 하나님은 하나의 중심으로 대결해요. 자, 요한계시록 인간들은 모두 큰 성 바벨론 하나입니다. 음녀 하나에요. 그럼 이쪽 하나님 쪽, 언약 쪽에도 둘 돼야 되겠어요, 하나 돼야 되겠어요? 하나지요.
그 하나님 쪽에서 말한 하나가 사도행전 2장 1절과 2절에 나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그날에 모였더니 하늘에서 뭐가 주어졌습니까? 성령이 불 같이 내려와서 전부 다 한 가지 내용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미 하나가 된 사람이에요. 한 인물에서 예수님께 나온 예수님의 그 덩치, 지체, 신체의 하나로 퍼지게 만들었어요.
저쪽 하나와 이쪽 하나와 대결상태, 대결구도로 이어가는 것, 이것이 이 세상에 남은 양상이고 모습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세계에서 인간 자기 쳐다보는 모든 시도는, 그들은 말합니다. 자기의 자율성을 이야기하죠. 자율성 자주 이야기하는데, 나의 자율성이 결국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도록 하나님이 조치하신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하는 모든 것이 나중에 계산해보니까 결국 나를 망치게 하는 거예요. 나를 불리하게 했어요. 나를 파멸에 넣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은 바로 내가 하는 일이 모아놓은 쓰레기 같은 오물덩어리에서 그 오물과 더불어 같이 폐허가 되어가는 그 과정,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그 폐허에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고 건지시는가, 그거는 10분 뒤에.
20230303b 울산강의-역대기상(18강) 16장 22절 : 하나님의 음식물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왜 많은 사람을 쳐다보는 게 아니고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니고 딱 한 사람을 쳐다보게 하느냐? 나를 못 쳐다보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왜 나를 못 쳐다보게 하는가? 내가 구원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저주받은 자는 저주를 받아야 되지 구원을 받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 인물이 나를 대신할 때에 그 대신함 안에 비로소 그 안에만 구원이 있어요. 날 대신하신 분, 그분의 관계가 구원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나의 이름으로 내가 구원되는 게 아니 주의 이름으로 구원되지요. 그 주의 이름에 대해서 반박하면서 대들면서 너의 자율성, 네가 언제든지 할 수 있는데 자꾸 비겁하게 의존적이냐, 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네 노동이 있잖아. 네 노동의 대가를 네가 얻을 자격이 있잖아, 라고 할 때 그게 사탄의 이름이죠. 주의 이름이 아니고 악마의 이름이죠.
악마의 이름의 특징은 자기 의를 우리 앞에 제공해주겠다고 제시하는 거예요. 거래하는 거예요. “네가 이렇게 훌륭하고 교회 다닐 정도로 대단하고 착하게 말씀대로 살 정도로 대단해.” 이게 바로 마귀가 교인들에게 계속해서 유혹하는 겁니다. 대신한다는 걸 없애버리고 그냥 모범적으로 살라는 거예요. 네가 모범 된 모델을 알았으니까 따로 붙이라는 거예요. 부처를 알았으면 부처를 따라하면 부처가 된다는 이론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신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약적으로 제시한 특정 인물에 관해서 일해요. 그분 중심으로 일한다고요. 숨어있는 하나님은 언약에 나타난 인물에게 모든 것에 권한을 주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요. 그걸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름 부은 왕은 우상을 대신한다. 인간은 우상을 추구하게 돼 있어요. 우상은 누가 내 대신이란 말을 안 하고 우상은 나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래요. “잘하면 잘할 수 있어, 너. 너에 대해서 포기하기가 너무 이르잖아. 포기하지 마. 너 할 수 있어.” 거기서 나온 노래가, <닭고기 아줌마>(성진우, <포기하지 마>, 1994)란 노래가 있어요. “다 포기하지 마” 빨리하면 “닭고기 아줌마”되는. 포기하면 안 돼. 포기하면 네가 살 의미가 없어진다는 거예요.
제가 수요일 설교제목이 [모조품]이거든요. 사람이 절망에 빠지고 자살하는 이유가 자기가 모조품인 것을 몰라서 그래요. 자기한테는 자기가 진짜라고 우기는 거예요. 진짜 내 대신 그분이 진짠데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는 나와 계약한 게 아니고 내 이름으로 계약한 게 아니에요. 우린 이 땅에서 부동산 사기 위해선 내 사인을 하지만 하늘나라는 내 사인을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선 “너 말고 너 대신한 분, 나와.” 이렇게 되거든요. 너 말고, 네 노동 말고, 네 착함 말고 너를 대신한 분, 사인 받아와. 주의 이름이 와야 돼.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 왕은 그다음부터 어떤 작업을 하겠어요? 지금까지 논리에 의하면 어떤 작업을 하겠습니까? 나를 자기의 힘으로 교체하는 작업에 나서겠지요. 그 교체하는 때문에 주어진 율법이 있어요. 그게 뭐냐? 제사법입니다. 구약성경 할 때 또는 성경이야기 때 사람들이 제일 골치아파하고 좀 짜증스런 얼굴로 인상이 팍 가는 이유가 뭐냐? 레위기입니다.
레위기 언급하게 되면 그때부턴 일부러 자려고 애를 써요. “안 들으란다, 난 아무것도 안 들었다.” 이러고 싶은 거예요, 레위기가. 레위기가 무지무지하게 복잡하게 돼 있잖아요. 절차고 형식 같은 게 막 들어갔다고요. 형식이 아무리 복잡해도 내용은 단 하나에요. “너를 대체할 것을 내가 받는다.” 그겁니다. 레위기의 내용은 너를 대체할 것, 또는 대신이죠. “너를 대신할 것을 내가 주고 그것만 인수받을게.” 이게 레위기에요.
너를 인수받을 것 법으로 규정할 테니까 그것만 들고 오게 되면 나, 그것 바치는 너도 받아줄게. 이게 레위기입니다. 바칠 때 하늘을 향하여 던진다고 받는 게 아니에요. 바칠 때 어떻게 바치느냐 하면 불판, 쉐프들 요리 자랑한다고 불 쇼하면서 하잖아요. 불판요리 있지요. 오징어하고 하는 그 불판 위에서 하나님의 대체한 인물이 곱게 안 죽어요. 불에 홀라당 다 태워서 받습니다. 그걸 하나님의 양식이라고 해요. 흔쾌히 받으신 하나님의 향기로운 음식이다.
옛날 성경번역에는 ‘응식’이라 돼 있는데 요즘은 뭐로 바뀌었느냐 하면 그냥 하나님이 받으시는 음식물이다. 또는 양식이라 하는 게 적당하겠지요. 하나님도 나도 좀 먹고 살자,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잡수시는 양식은 하나님이 제공한 것을 불을 통과한 걸 받습니다. 숯불갈비 탄 냄새 그런 건가?
하나님은 불을 통과, 그 불이 무슨 불인가? 심판의 불이에요. 하나님은 심판을 통과한 걸 받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논리에서는 심판을 통과하게 되면 어떻게 돼요? 심판을 통과했으니까 받을 게 있어요, 없어요? 홀라당 다 태웠으니까 없지요. 없는데 하나님이 지정한 제물은 심판을 통과하고도 그게 받을 수가 있어요.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그 대신 하나님의 양식은 죽은 대표 양식을 나머지 양식에다 이미 대신했다는 의미로서 그냥 양식도 대신 죽었다는 그 의미를 담아서 하나님께서는 받습니다. 일단 숟가락 먼저 뜨고, 숟가락 먼저 떠야 돼요. 그다음에 “먹어, 먹어, 먹어, 너희도 먹어.” 이걸 화목제라 합니다. 주께서 먼저 잡수시고 잡수신 그것을 주께서는 나눠주는 형식으로 하나님의 음식에 감히 우리가 그 음식에 손대서 같이 먹게 해서 한 식구가 되게 하는 방식이 하나님 백성이란 방식이에요.
아까 역대상 16장 봅시다. 2절,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그다음에 뭡니까? 무엇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게 언약의 이름이란 뜻이거든요. 항상 여호와는 언약을 앞장세워서 일하지 언약이 없는 것은 명칭이 여호와든 예수든 간에 그건 우상이에요. 마귀가 만든 겁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언약을 앞장세워서 하는 거예요. 언약을 이루는 분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은 언약을 주고 그 언약을 이룬 분이 여호와란 이름의 하나님.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요. 하나님은 언약을 제공하시고 그 언약을 실천해서 완성시키는 분이 하나님의 이름, 또는 여호와, 또는 주라고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언약 주고 실천자 따로 이냐? 이게 마귀를 의식해서 하는 겁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믿어요. 그래서 욥기에 보면 마귀와 누구와 이야기합니까? 하나님과 이야기하지요. 욥을 두고 이야기하잖아요.
믿는데 마귀가 싫어하는 자가 뭐냐 하면 바로 자기를 심판할 자, 자기의 심판주가 될 하나님의 아들을 싫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을 유포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버리도록 조치하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에즈베리 부흥운동이라 해서 미국의 에즈베리 대학교에서 오순절 부흥운동이 퍼져서 지금 한국 목사도 가고 구경하고 그래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하는데, 이게 바로 성령의 역사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에즈베리 대학교 옛날에도 그랬고요.
그런데 그게 복음적이냐, 할 때 고린도전서 2장에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복음이 뭐라고 돼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인다 했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들이 아무리 탐구해도 알아내지 못한 것, 그것을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만 주신다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으로도 지혜로도 알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어떤 기준을 제시해야 인간의 한계가 노출되겠습니까?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걸 제시하는 것, 그게 뭐겠어요? 고린도전서 1장 끝에 또는 2장초에서. 십자가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무엇과 대비하라고 준 거냐 하면 인간이 종교적으로 또는 윤리적으로 노력해서 얻고자 하는 인간의 한계를 너희들 십자가 아는 사람이 좀 들여다보라는 거예요. 그들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그들이 어떤 순수한 열정과 신앙심과 자기의 낮춤과 회개와 반성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울부짖고 콧물 쏟아가면서 무려 14일 동안 예배가 중단되지 않고 예배드렸다 하거든요. 2주 동안에 한 대학교에서 대학생들이,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그들이 십자가를 압니까? 그들이 십자가를 알겠어요?
십자가란 뭐냐 하면 내가 회개하는 것조차도 내 구원의 근거가 되지를 못한다는 것, 성령께서 정말 알리고 싶은 것은 바로 그거에요.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형태나 모습이 아니라 그런 게 없이도 된다는 것, 구원이란 게. 유별남이 없어도 된다는 것, 이게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어요. 나는 십자가를 알아, 이렇게 하면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대번에 달려듭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가도원에 가서 며칠 기도했어, 성경 어떤 대목을 공부했는데, 누구 설교를 들었는데?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해요. 아무 상관없는 건데.
아까 므비보셋 이야기했잖아요. 여러분 그것 잊지 마세요. 아무 상관없어요. 인간은 자기 일밖에 몰라요. 자기 일밖에 모르는데 주의 일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자기 일밖에 모른다는 그 범주가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 아는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의 범위를 아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레위기를 좀 소개할 거예요. 지금 이 시간에. 쉽게 하기 위해서 이 문장을 먼저 쓰겠습니다.
젓갈은 푹 삭혀야 맛이지요. 젓갈은 푹 삭혀야 돼요. 레위기의 원칙을 뭐냐 하면 내 음식에 손대지 말라.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겁니다. 역대상 16장 22절 누가 읽어보세요.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만지지 말라, 상하지 말라.
방금 제가 쓴 것은 내 음식에 손대지 말라.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고 회수하려는 하나님 쪽의 언약적 인물 제시입니다. 하나님께 제시된 인물이에요. 그러니까 손대지 말고 상하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너희들은 뭐냐? 그 음식 앞에 젓갈류다. 젓갈은 어때야 맛이 난다고요? 이게 썩어야 되고 푹 삭혀야 맛이 나거든요.
삭힌다는 말은 그 고유의 맛이 날아가 버린 거예요. 소금과 젓갈류의 절묘한 조화. 삭지 아니하면 음식에 오를 수 없는 게 젓갈이에요. 젓갈의 기능은 마치 소금과 같아서 맛을 돋워주는 거예요. 본래 맛이 아니라 다른 맛을 돋워주는 거예요. 김치 맛을 돋워준다든지 보조, 시다바리 역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음식에 시다바리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젓갈 같은 자기를 쳐다보면 안 되고 누구냐? 하나님이 받으시는 음식이 어떻게 인물화 되어 우리 가운데 있느냐를 주목해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이에요. 예수님 생각하면 되겠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요단강 세례 받을 때 그렇게 했잖아요.
그런데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기어이 십자가에 처참한 몰골로 죽게 하십니다. 끝까지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 맞아요. 그러니까 보통 인간들로는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지켜주고 안 다치게 해주는 게 사랑이라 여기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아직도 더 살아야 돼요. 더 썩어야 돼요. 푹 삭아서 나는요, 하는 말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도록 푹 삭아야 돼요.
우리는 그냥 폐인이에요. 자기가 쏟아놓은 오물에서 못 벗어나는 그런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주께서 오케이,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대체물이 돋보이잖아요. 우리가 푹 삭아야 대체물이 돋보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음식으로 여기지 않아야 음식으로 여기는 분이 돋보이는 거예요.
바둑에 이기는 법을 알려드릴게요. 어떤 누구와 두어도 이기는 방법은 이겁니다. 남이 보지 못한 수를 내가 두면 이겨요. 바둑뿐만 아니라 모든 게임이 그렇지요. 특히 바둑 같은 경우엔 그게 강렬한 데요. 우리나라는 신진서란 선수가 제일 잘해요. 그 사람은 남이 보질 못한 수를 봐요. 그래서 지질 않아요. 세계랭킹 1위에요. 한 달 수입이 10억이 넘을 정도로 잘 둬요. 세계 최고에요. 여러분들은 복음계의 신진서가 되길 바랍니다.
남이 보질 못한 것,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아는 것, 그 방법은 뭐냐? 나를 쳐다보고 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 안 쳐다봐, 이러는 게 아니고 쳐다볼 필요 없는 모든 환경이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찾아오고 있어요. 나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을 때, 반대로 나에 대해서 신경 써버리면 그만큼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요. 스트레스 받아서. 그 결핍 때문에 마음이 불안정해요. 결핍성 때문에.
이 목적을 해내야 되는데, 이 목표를 달성해야 내가 마음이 편한데 이게 조마조마해서 자기에게 미련이 강렬하니까, 미련은 강렬한데 내가 나한테 못 마땅하니까 결핍에 시달리는 거예요. 그래서 무리수를 두고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결국 그것이 남 탓으로 돌아가고 자기 때문에 남까지 괴롭히고. 남 괴롭혀서 남이 공격하니까 자기 괴롭고. 해결책, 해답은 전혀 없고. 그 원인은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가 삭을 대로 삭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자, 해결책은 뭐냐? 기름 부은 자가 어떤 자인지 찾아보면 되겠지요. 해결책이 있으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창세기 14장 1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여기에 살렘 왕 이름이 멜기세덱이라 하는데요. 이 이름에 결부된 직책이 두 개에요. 살렘 왕이니까 왕이지요. 또 하나는 뭐냐? 하나님의 영원한 제사장이다.
그렇다면 이 멜기세덱이 누굴 만났느냐? 아브라함을 만났단 말이죠. 그럼 아브라함의 자손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두 가지의 기능이 어떻게 따로 주어져서 어떻게 따로 합류하느냐? 그 합류한 시점이 완성된 시점이 되는 겁니다. 멜기세덱이란 사람에서 아브라함이 만났으니까 아브라함은 이 땅에 선택받은 인물이니까 그냥 통로, 통과하는 파이프, 비어있는 파이프로 보면 돼요.
멜기세덱 요소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두 가지 기능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왕 기능과 하나는 제사장 기능을 해요. 아브라함이 기도하니까 아비멜렉 집안 여자들이 임신을 하게 된 거예요. 아브라함의 누이동생을 건드릴 뻔하니까 아비멜렉 집안사람들이 임신 못하는 저주받은 거죠. 저주받다가 기도하니까 풀린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께서 유황불 내릴 때에 의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합류된 자만 의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삼판을 내렸고요. 아브라함의 기도에 따라서 조카 롯과 그 두 딸만 건짐 받았어요. 그래서 그걸 하나님께선 롯을 생각해서 롯을 건진 게 아니고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졌고, 아브라함은 무엇과 관련돼 있는가? 멜기세덱과 관련돼 있어요.
그러면 성경은 하나의 일종에 순환을 보여주는 데 멜기세덱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가? 다시 멜기세덱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성경의 여정입니다. 이건 하나님 자기의 노선이에요. 자신의 여정, 자신의 여행. 걸어서 세상 끝까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 가운데 걸려든 사람들, 택한 받은 사람,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각종 선지자들, 특히 이스라엘 집단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멜기세덱부터 아브라함부터 해서 이삭, 야곱, 야곱에서 열두 지파가 나오고 열두 지파가 무슨 나라? 이스라엘 되지요. 전부 다 이 사람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제물, 하나님이 회수한 제물, 그리고 이거는 뭐냐? 희생물이 되는 거예요. 그 이스라엘 압축한 것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희생물이 될 때 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또는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렸잖아요. 아브라함이 제물 드릴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이 제물을 받으시고 나를 용서해 달라, 나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이루게 해 달라 이렇게 했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취지는 그게 아니고 제물과 아브라함의 일대기를 일체화 시키는 겁니다.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나 양을 안 받기 때문에.
소나 양을 받는다고 시작해서 결국 하나님은 소나 양이나 염소를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선 인간이 준 것은 아무것도 받질 않아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소나 양의 말씀에 입각해서 따로 지정한 그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받아요. 예수님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기 전에 이스라엘은 그래서 이거는 하나님 말씀에 합당치 않고, 합당치 않고, 합당치 않고 계속해서 잘라내는 과정의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에요. 너 아니고, 너 아니고, 너 아니고 이사야 아니고 예레미야 아니고, 아니요, 아니요. 세례 요한, 너 아니고 예수님.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믿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예수님으로부터 무슨 소릴 듣는 거예요? 너 아니고, 너 아니고, 너 아니고, 너 아니고. 이번에 네가 출세한 것도 너 때문이 아니고. 애가 공부 잘한 것도 너 때문이 아니고. 속이 안 좋은 것도 너 때문이 아니고. 소화 안 되는 것도 너 때문이 아니고. 소화 안 되는 너 때문이 아니에요. 네가 죽는 것도 너 때문이 아니라는.
사나죽으나 내 것이지 네 선에서 걱정하고 염려할 그게 아니라는 거죠. 다 나 때문이라는 거죠. 나 때문에 너한테 벌어진 상황이죠. 멜기세덱 때문에 일어난 상황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 멜기세덱이 왕과 제사장이잖아요. 그럼 아브라함이 제사장 죽 하면서 왕의 요소도 아브라함 후손에 나타납니다.
먼저 사무엘상을 보고 민수기 보겠어요. 사무엘상 2장 10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이거는 첫째 시간에 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이 세상을 뭐로 만든다? 폐허로 만든다. 하여튼 하나님이 일하시면 이 세상은 무조건 폐허가 되어 마땅한 세상이다. 이걸 기정사실화시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망하기 위해 태어났고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그걸 확실히 한 것이 여호와의 나타나심입니다.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그다음에 뭐라 돼 있느냐?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심판을 누구한테 맡겼다? 왕에게 맡겼지요. 멜기세덱이 왕이니까요. 왕과 제사장이에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나는 것도 318명하고 소돔과 고모라 다섯 왕과 전쟁할 때 승리하고 만났거든요.
하나님은 끊임없이 전쟁을 하십니다.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멸망 프로젝트, 멸망 시나리오거든요. 그걸 누구한테 맡기느냐? 왕에게 맡기는 거예요. 그럼 우리 생각에는 왕에 빌붙으면 되겠네. 문제는 그 왕이 어떻게 나오느냐, 에요. 왕이 어디에 나오며, 누구며, 어떻게 나오는지 문제에요. 왕을 알아봐야 빌붙든지 엎드리든지 할 건데 왕이 누군지 알 수 있어야지요.
민수기 2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왕으로 된 나라, 왕은 왕인데 여호와께서 왕으로 계시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지금 반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민수기 24장 17절,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한 별, 한 홀. 홀이란 것은 왕이 쓰는 지팡이를 홀이라 해요. 왕이 등장한다. 어딜 통해서? 야곱의 민족을 통해서.
그러면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통로 역할인데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고 이삭 아들이 야곱이죠. 야곱에서 무슨 지파? 열두 지파. 열두 지파가 후손을 낳게 되면 무슨 나라? 이스라엘 나라. 이스라엘 나라가 왜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나라는 다수잖아요. 다수인데 한 명을 뽑아내기 위함입니다. 심판 주를 뽑아내기 위해서, 왕을 뽑아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속에서 왕이 나왔어요, 안 나왔어요?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잖아요.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고 상하게 하지 말라. 여러분 골치 아픈 레위기지만 레위기에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다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음식을 해먹어요. 음식을 해 잡숫는 데 불판 위에서 음식을 해먹는데 심판을 통과한 그 음식, 심판을 통과했다는 것을 냄새로 맡으시고 냄새가 너무 맛있는 음식이라서 기꺼이 하나님께서 양식을 제사장을 통해서 준비케 합니다.
제사장이 기름 부은 자입니다. 기름 부은 자는 왕도 되지만 제사장, 그다음에 선지자 되거든요. 전부 다 멜기세덱의 기둥 중에서 뽑혀 나온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잡수었다, 안 잡수었다 어떻게 아는가? 제사장과 그 가족이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께서 맛있게 드신 결과를 부여받고 있다고 보면 돼요. 제사장들이.
제사장들은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양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 양식은 반드시 어디를 경유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제사를 경유해서 제사의 일부는 바치고 일부는 남겨둬서 누가 먹느냐? 특히 화목제 같은 경우에는 제사장들이 가족들이 먹어요. 동물성만 먹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당뇨 걸려서 안 좋아요. 식물성 그것도 하나님께 일부를 바치고 십일조로 바치고 나머진 제사장 가족들이 먹어요.
제사장들이 그 양식을 먹고 생존한다는 것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 자기가 받으실만한 음식으로 간주해서 계속 하나님에 의해서 살려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내 음식을 내가 먹고 싶다는 거예요. 그 음식이 음식으로 유지되려면 너희들 속에 제사장 기능이 계속 유효하게 살아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뭐냐? “목사님, 제사장만 있으면 되겠네요.” 당연히 그런 질문 나오잖아요. 근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한 것은 전에는 하나님과 제사장이 다이렉트로 연결됐다면 다윗언약에서는 하나님이 지정하는 왕에 의해서 제사장이 그 왕의 지시를 받게 돼 있어요.
여기 역대상 16장 4절에 보면,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이걸 누가 지시합니까? 왕, 다윗이 지시한 거예요.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음식물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 왕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 관계를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맛있게 드셨다는 것은 극히 인간적인 표현을 한 거예요. 내가 음식을 먹고 기쁘고 배부르다는 말은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는 나처럼 영원토록 함께 배부르고 하나님과 영생을 누린다. 그런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장치, 시스템을 누가 마련해주는가? 레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친히 마련해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받는지, 안 받는지 그 여부를 어떻게 아느냐? 제사기능이 원활하게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된다는 것. 그러면 제사장들이 또는 레위 인들이 하는 일이 뭐냐? 제사 지내는 거죠. 그럼 제사가 뭔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것에 대한 심판을 그 제단에서 대신 세상 심판을 이스라엘을 중앙에서 미리 심판을 다 해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을 받았습니까, 아직은 안 받은 거예요? 심판을 이미 받은 게 돼요. 자기를 대신한 양들이 자기 대신 심판을 받았으니까요. 어쨌든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그 심판을 경유한 탄 음식, 그것을 하나님은 자기 양식으로 받았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양식에 합류된 자의 특징이 뭐냐? 저는 이미 죽어 마땅합니다.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6장에 누구와 더불어서 받았어요? 예수님과 더불어서 저는 심판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그렇게 해석하고 있지요.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인데 율법 앞에서 누구누구도 저주 피할 자가 없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나는 율법대로 저주받았다.
그래서 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 대신하신 분이 살아 있고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21절 내용이에요. 그냥 쓱 넘어갈 게 아니고 그 대목을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걸 생각해야 돼요.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이 세상 전체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세금 올라간다, 가스비 올라간다, 그것과 비교가 안 돼요.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완전히 퍼부은 거예요. 뭐라고? 더 이상 너를 쳐다볼 이유가 없다고. 저주받을 걸 쳐다봐서 뭘 기대합니까? 뭘 해도 저준데. 이게 율법을 통해서 확연하게 우리 자신을 아는 겁니다. 루마니아 대통령처럼 거울아, 거울아 이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율법을 보면서 뭘 해도 이거는 하나님께서 안 받는구나. 받지를 않는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의 행위라 하는 것은 율법을 보고 율법에 자극 받아서 내가 행하는 걸 말해요. 내가 행하는 것은 안 받아요. 그러면 주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받아요. 주님의 행하심은 일단 우리를 죽였다 치고 행하기 때문에 우리한테 두 번 다시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네가 못됐구나. 좀 맞아야 되겠어.” 이런 것 없어요.
사체(死體)한테는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모셔서 집에서 장례한다고 관 속에 있는데 평소에 버릇이 되어 “아버님, 잘 주무셨습니까?” “아이고, 참 죽었잖아.” 죽은 자에겐 안부를 묻는 게 아니에요. “안녕, 뽀삐.” 이런 것 묻는 게 아니에요. “여보, 잘 주무셨어요?” 묻는 게 아니에요. 누가 안부를 물어야 되는가? 사체가 나에게 안부를 묻는 겁니다. 강의가 갑자기 전설의 고향이 돼버렸는데…….
죽은 남편이 나한테 잘 잤어요, 이거는 남편이 묻는 게 아니고 남편에 계신, 아내에 계신 그리스도가 죽은 시체, 나보고 안부 묻는 거예요. 죽은 가운데 일어나라, 이런 식이죠. “출근해야지.” “어, 죽었는데?” “너는 죽었지만 내가 살아 있잖아. 출근해야 돼. 애들 가르쳐야지.” 이걸 또 이론으로 알아서 매일같이 실습하지 마세요. 이것 하면 율법 하나 또 추가한 게 돼요. 하지 마세요.
주께서 이런 느낌을 우발적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고 주님의 자랑되게 하세요. 내가 살아 있는 게 나의 자랑이 아니고 주님의 자랑거리에요. 왜? 시체, 어제부로 죽어도 되는데 살려냈잖아. 주님에 영광이 되고 주님께 자랑거리가 되고. 그게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고.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뒤에 보게 되면 대구강의에서 한 건데요. 19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런 구절 있잖아요. 내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된 거예요. 율법은 살아서 펄펄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율법은 우리를 기어이 죽게 하는 거예요. 사체됨을 분명히 하는 게 율법이에요. 율법을 죽은 시체가 뭘 지켜요.
19절 대목이 저만 보이는가요? 여러분도 같이 보여야 될 건데. 그래서 이런 해석이 사도 바울이 해석한 그대로 못 받아들이는 이유는, 나를 내가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좀 이렇게 못났다고 느끼지 아주 죽지는 않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질 걸 이야기하고, 산다는 것은 끊어진 자리에 하나님과 관계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분에 의해서 관계가 이어진 것을 우리는 살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는 죽었지만 내 안에 사신 분이 살기 때문에 나는 살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스도 안에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건 결국 뭐냐? 네가 주도적으로 하는 것은 없고 다 주께서 하게 하셨던 거예요. 이걸 사역형 피동성, 하게 하신 거예요. 나는 쌍꺼풀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 마세요. 그것 쌍꺼풀 수술하는 건 좋은데 DNA는 쌍꺼풀이 없어요. 아빠, 엄마는 쌍꺼풀 있는데 애 낳고 보니까 쌍꺼풀이 없어. 그럼 누구 하나 안 그러면 둘 다 뭐 했어, 고쳤어.
주께서는 우리 있는 그대로 봅니다. 죽은 잔데 내가 살린다는 거예요. 그럼 이건 뭐냐?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고 하나님에게만 구원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걸 알리게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거예요. 우리가 끝으로 봐야 될 것은 진짜 어려운 걸 봐야 돼요. 요한복음 18장 33절,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왕이 나오죠.
이게 제가 왜 어렵다고 했느냐 하면 아까 첫 번째 시간에 제가 언급했어요. 언약 밖에 인간들이 무슨 일을 도모하는지 설명했지요. 무슨 일을 도모합니까? 언약 밖에 한 덩어리 됐지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어요. 한 덩어리 됐으니까 거기서 뭘 뽑느냐? 그들은 우리 한 덩어리 됨을 긍정해줄 수 있는 어떤 대표자, 왕을 찾았던 겁니다.
그들은 이걸 뭐라 하느냐? 메시아라 했고, 이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태어난다고 본 겁니다. 태어난 장소까지 그들은 알아요. 그 태어난 장소가 베들레헴이에요. 참 이게 이상하지요.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났습니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잖아요. 태어났는데 헤롯이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나지 말도록 두 살 밑의 애를 다 죽였어요. 죽임으로 말미암아 베들레헴에선 태어났다, 안 태어났다? 태어난 자가 없게 한 거예요.
선악과 있을 때 인간은 부담을 느껴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죽음의 협박을 받고 위협을 받아요. 그럼 방법은 뭐냐? 선악과 과일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겠지요. 따먹어서. 자기가 소유하면 되겠지요. 그 방법하면 되잖아요. 예수님이 자기가 메시아라 했잖아요. 그럼 방법은 뭐냐? 메시아라고 발설하는 예수님을 어떻게 합니까? 죽여 버리면 되잖아요.
그런데 제자들이 걱정돼요. 제자들이 예수님이 평소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다 하니까 유대인들의 그다음 조치가 뭐냐? 예수님 시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무덤가에 보초 지키면 되잖아요. 도대체 인간들이 왜 그렇게 나옵니까? 그렇게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교회 가라 하니까 십자가복음 알았을 때 그러면 교회 안 다니는 남편이 아내를 교회 못 가게 하면 되지요. 그 복음을 같이 믿으면 되는 게 아니고 못 가게 하는 거죠.
그 의도가 뭐예요? 도대체 그 이유가 뭡니까? 십자가복음을 못 믿게 하는 의도가 뭐냐 말이죠. 뭐가 깨지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나의 평생의 노동과 매진한 열심히 한 나의 가치가 나의 의로움이 누구 때문에? 예수님 그 한 사람 때문에 모조리 쓰레기가 되는 걸 내 속의 악마가 견딜 수 없는 거예요. 내가 누구로부터 심판받는다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복음을 듣고도 거부하는 사람은 누가 감히 나를 심판해, 이것 때문에 삐져서 교회 안 나와요. 복음 거부합니다. 그러면 복음 듣기 위해서 교회 나온다는 것은, “또 때려주세요, 또 내가 폐인인 것을 알게 확인시켜주세요.” 이래서 교회 나오지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래도 꾸역꾸역 교회 나오는 이유는 언제든지 발 빼기 위해서 교회 나옵니다. 양다리 걸쳤다가 싹 빼는. 언제가 돈만 벌면 뺄 거야. 지금 돈 없어서 한쪽에 혹시 행운이 올 줄 몰라서 그렇지만 돈만 챙기면 뺄 거야. 벤츠 타고 골프 치면 교회 안 나올 거야. 일요일 골프 치러 가는데 교회 나올 재간이 있어야지요. 골프 칠 돈이 없어서 교회 나오는…….
그쪽 스타일에 이미 한 통속이 돼 있어요. 넓은 길에 한 통속이 돼 있다니까. 그러니까 영생은 좁은 길이에요. 찾는 사람이 적어요. 그만큼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 없어요.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을 수밖에 없고 외면당하고 배제당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가신 것도 똑같은 코스를 강제를 가게 하신 사람,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 가신 것처럼 이 땅의 희생물입니다. 성도는 희생물이에요. 하지만 성령의 기름 부음이 우리한테 있습니다.
끝으로 요한일서 읽고 마치겠습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성도를 해하는 것은 야고보서 5장에 나와요. 성도를 해하는 것은 심판을 받으리라. 네가 그 사람을 건드린 게 그 사람을 건드린 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건드렸기 때문에 심판받습니다. 내 양식에 왜 손대냐? 내 음식에 왜 손대? 내가 받을 음식에 왜 손대는가? 여러분 그리스도 성령이 있거든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이 노동한 것 말고 쓱 다른 분이 들어오심에 저희들이 황송스럽고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내 일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성과요 결과요 효과요 주의 연속적인 일인 것을 저희들이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