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시험전쟁

아빠와 함께 2022. 10. 10. 08:47

20221007a 울산강의-역대기상(14강) 12장 8절 : 시험전쟁
(강의:이근호 목사)


역대상 12장은 다윗이 한창 버림받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버림받은 자, 다윗은 버림받았어요. 국가로부터 민족으로부터 현재 왕 권력으로부터 버림받았어요. 기껏 따라다닌 사람은 600명 정도. 다윗이 버림받은 잔데 다윗이 뭘 하고 있느냐 하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관계 잘 보세요. 버림받은 잔데 전쟁을 한다.

그러면 이 전쟁은 어떤 전쟁이냐? ①승리하는 전쟁이다. 승리해야 할 전쟁이다. ②시험받지 않아야 될 전쟁이다. 다윗이 한 전쟁이 둘 중에 어느 것이겠습니까? 보통 성경을 보면서 다윗 대목에 와서 사람들은 승리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보지요.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자가 제일 멋있는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 보세요. 우리를 무엇에 들지 마옵시고 돼 있지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로 돼 있지요.

지금 다윗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안 받았지요. 바로 그 전쟁이에요. 사람에게 버림받고 세상에 버림받으면 어느 인간이든 좌절하게 마련입니다. 내가 인생 잘못 살았나 하는 그런 생각 들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 시험 들었다고 할 수 있느냐 하면 사람한테 버림받지 않고 존경받으면 이거는 승리한 거고, 사람한테 계속 버림받고 무시당하면 이거는 곧 하나님께 버림받은 걸로 여기는 그런 생각들이 있어요.

문장을 제가 써볼게요. 사람의 본심은, 사람의 심정은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 세상 살아가면서 형성돼 있는 심정, 정서, 감정 다 해당되는데 이것들은 어떤 목적이 있어요.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거예요. 괜찮은 사람이라고 대우 받고 그들로부터 수긍이 되고, 그들이 나를 용납해주고, 그들이 나에게 버리지 않고 관심 두는 것. 그럴 때 사람들은 사는 맛을 느끼게 돼 있어요, 인간은.

그래서 인정받은 것에 반대되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게 아니고 버림받았지요. 보세요. 우리가 믿는 주님은 우리의 본성과 반대쪽으로 가잖아요. 그 전쟁이에요. 버림받아도 상관없음을 유지할 수 있느냐를 보는 전쟁, 주기도문에 우리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그다음에 뭡니까? “악에서 건져 주옵소서”

복음을 안다는 게 이미 전쟁 속에 들어왔는데 그 전쟁은 바로 시험 속에서, 시험은 유혹이니까, 테스트니까, 유혹 속에서 버틸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전쟁이에요. 그럼 시험의 전쟁이 뭐냐? 승리한 전쟁 아닙니다. 승리라고 해버리면 남들한테 인정받잖아요. 다윗이 어릴 때 인정받았지요. 골리앗을 이기고 난 뒤. 그런 다윗을 하나님께선 어디로 내쳤습니까? 인정받기는 받았는데 고작 따라온 사람이 600명이었고, 그 사람들이 주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따라왔어요.

그런데 다음에 차기 대선주자로 내세울만한 변변한 캐비닛, 내각 변변한 자체적인 조직이 안 된 겁니다. 차기 대선에 나갈 수 있는 참모진부터 해서 재력, 뭐 준비된 게 없어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으니까. 분명히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무엘상 16장인가 모르겠는데 사무엘 보내서 다윗을 차기 왕으로 이미 확정지었지요. 차기 왕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결정을 하고 난 뒤에 다윗을 생각했을 거고 다윗의 주변 참모들도 생각했을 거고 하나님의 결정이 어떻게 실현되느냐, 현실화 할 것에 대해서 상당히 궁금해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 안목으로 볼 때에 사정이 호전되는 게 아니고 갈수록 궁지로 몰리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다윗을 버림받은 대표자로 삼았던 겁니까? 그것은 바로 다윗이 선지자가 때문에 그래요. 마지막에 올 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처하게 되는 그 형편을 앞당겨서 다윗의 인생 가운데 그렇게 복제를 해서 집어넣은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전쟁은 시험받지 않은 전쟁인데 좀 모호하지요.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런 겁니다.

어느 게 진짜 현실인가? 이 전쟁입니다. 현실의 중심이 사람들 패거리가 많은 사울 쪽이 현실을 꽉 쥐고 있느냐, 아니면 그쪽 대다수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울 쪽에 의해서 나약하게 지금 현상수배 당해 쫓기고 있는 다윗 중심으로 현실이 전개되는가? 그 시험을 다윗은 겪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요.

세상이 내 중심으로 내가 잘나고 내가 성공하는 인생 중심으로 현실이 흘러가는가, 아니면 예수님 중심으로 흘러가는가? 성경은 어느 쪽을 이야기합니까? 내 중심입니까, 예수님 중심입니까? 예수님 중심이지요. 다시 말해서 내 중심은 아니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현실은 내 중심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된다 했어요. 예수님이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님 중심이다, 라고 이야기해도 되는데 말을 바꿔봅시다. 내 중심은 아니지요. 그러면 내 중심도 아닌데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은 어디에 빠진 거예요? 시험에 빠진 거죠. 주기도문은 뭐냐? 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그 악에서 나를 건져달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말로는 주기도문을 잘도 외워요. 건져달라고 해놓고는 실제로서는 제발 안 건져줬으면 좋겠다. 반대로 나가지요.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 나 중심으로부터 나를 빼내주세요, 이게 성경인데 실제 일상의 삶은 왜 나를 힘들게 하십니까,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시험에 흠뻑 빠졌어요. 거기서 나오는 쇼가 뭐냐? (샤이의) 흠뻑 쇼. 내가 본 적은 없는데 비를 많이 맞는 모양이라. 엉뚱한 소리해서 미안합니다. 사람은 흠뻑 취하고 싶어요. 어디든지. 미친 세상에서 제 정신으로 못 살고 뭔가 흠뻑 취하는데 너무 취해서 마약에 취해서 어린이집 애들 사십 명 죽이고 이런다니까요, 태국에서.

그럼 우리는 어디에 취했습니까? 아니 말 잘못했어요. 우린 어디에 취하고 싶습니까? 우리는 나의 중심에 취하고 싶고 내 성공에 취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내 중심의 현실에 도움 되지 않는다고 하면 참석하지 않잖아요. 내 중심에 기여하지 못할 걸 내가 뭐하려고 시간 낭비하느냐. 차라리 전국제전 개막식이나 가지. 내 중심이 아닌데 뭐.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여러분들이 만나는 사람 쪽쪽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하면 내 중심으로 성공하겠다고 승리하겠다는 사람만 다 만나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복음 전도하지 말래도 여러분만 시험에 들지 않으면 온통 전도 기회고 선교 기회가 되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그게 부러워서 헬렐레 하고,

“저 사람 잘 돼서 너무 좋겠다. 나는 뭐야, 지금 이 나이에? 왜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대들고. 지금 하나님은 일 잘하고 계시는데 우린 반대로 그런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대드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이 바로 그게 얼마나 뒤바뀐 상황인지 그게 시험에 든 상황이란 걸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을 따르는 소수지만 600명은 자진해서 뭐하겠다는 사람입니까? 자진해서 시험에 들지 않겠다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다면 그 버림받은 자리가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중심 자리란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한 사람들. 방금 문장이 좀 길었지요. 짧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왕이 현재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다면 이거야말로 하나님께서 선택받았다는 확연한 징후가 되지 않겠는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이 선택한 겁니까, 하나님이 선택한 거예요? 하나님이 선택했지요. 하나님의 선택에 인간이 관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관여 못하지요. 이건 순전히 백 퍼센트 하나님 일이지요.

하나님의 일이 백 퍼센트 드러난 그 현실이 사람에게 인정받는 게 인간들의 본심인데 하나님의 택한 사람은 버림받고 있으니까 버림받은 자리에 합류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일이 확실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있겠어요? 멋진 기회 아닙니까? 주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겠다, 모호하다. 모호한 게 아니고 본인 자체가 시험에 빠졌으니까 예수님 없는 곳만 찾아다니는 거예요. 예수님 소식이 안 들리고 예수님이 일 안 하는 곳만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게 어떤 자리라 했습니까? 사람의 본심은 남들에게 인정받는데 있습니다. 아니에요? 이렇지 않은 사람 있으면 손들고 나와 보세요. 어떤 사람은 진짜 손들고 나올 수도 있는데,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남한테 인정받는 걸 싫어하고 버림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인간세계엔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누구 일이냐 하면 구원이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 일이에요.

주기도문에 뭐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뭐하라? 악에서 건져 주옵소서. 악에서 건져 주옵소서, 하니까 너무 모호하잖아요. 구체적으로 마약에서 건져 주옵소서, 이거는 잘 이해되고, 가난에서 건져 주옵소서, 그런 것은 잘 이해하면서, 사채업자한테 건져 주옵소서, 이런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악에서 건져달라는 것은 바로 남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이게 나다, 자아다. 이 자아로부터 나를 빼내달라는 겁니다. 왜? 나는 못하니까. 나는 내 편이니까, 나는 내 위주니까 내가 나에게서 뽑아낼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버림받는 것이 어떤 누구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 못한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인간이라면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예수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이거는 인정받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기 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하는 그런 모습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겼던 베드로가 끝판에 가서 예수님을 배신할 때 그것도 한 번 배신한 게 아니고 다짐을 하듯이 삼세판이잖아요. 세 번이나 배신했잖아요. 그 배신한 이유가 뭡니까? 그 당시 세상으로부터 자기가 버림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인간이 아무리 숨기고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주님께서 이끄시게 되면 인간의 본 마음은 들통 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뭐냐? 꼬깃꼬깃 숨겨놓은 우리 본심이 들통 나는 현장, 그게 바로 교회고, 그래서 교회는 장소가 아니고 사건입니다. 예상 못한 사건, 내 본심이 들통 나는 사건, 이게 복음 사건이고 말씀 사건이에요. 인생을 몇 년 살았는지 자꾸 그것 계산하지 마세요. 적금 붓는 것고 아니고. 인생 몇 년 살았는지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진짜 내 모습을 내가 수긍하고 있고 동의하고 있고 인정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내 모습은 뭐냐? 나만 남한테 인정받는 거예요. 누가 버림받는다면 그 버림받은 사람 쫄랑쫄랑 따라갈 자들이 아니에요, 우리가. 주판 튕기면서 어느 쪽이 대세냐? 어느 것이 정의냐는 배부를 때나 하는 소리고요 진짜 힘들 때는요 나를 살리는 게 어느 쪽이냐, 이렇게 나오는 게 인간의 본심이에요.

지금 하나님은 다윗을 인간을 보기에 더 사는 쪽으로 안 보여요. 그래서 오늘 12장에 나오는 시글락이란 장소가 이스라엘 땅이 아니에요. 이거는 블레셋 땅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도망을 치되 남의 나라 영역까지 가서 도망을 치겠습니까. 시글락까지 오게 된 경위도 있어요. 블레셋 땅에 목숨 부지해볼까 싶어 갔는데 거기서도 추방됐다고 보면 돼요.

블레셋 땅에 가서 위장취업해서 있으려고 했지만 이스라엘과 전쟁 나서 거기서도 오래 있지 못하고 시글락 땅으로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유다 이스라엘을 공격한 아말렉을 비록 쫓겨 다니는 신세지만 이스라엘 왕으로서 자기 본분은 다하면서 아말렉을 쳤던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시글락은 버림받은 자로서 간 겁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 전쟁은 승리하는 전쟁이 아니고 다윗이 시험에 들지 말아야 될 전쟁입니다.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택은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사실. 이 말을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했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이 땅에서 버림받을 수도 있는 그런 험악한 극단적인 지경까지 몰아세울 수가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말로는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지만 실제로는 나 좋으라고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경우를 색출하기 위해서. 그런 마음, 하나님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내가 인정받고자 하는 본심에 유리하게 작용하고자 내 쪽에서 먼저 하나님의 손을 덥석 잡았던 가짜 선택 있잖아요. 종교적인 열심 그걸 색출해서 전부 다 배제시키기 위한.

하나님 철저하지요. 가짜는 오지 말라는 거예요. 천국에는 가짜는 못 들어가는 겁니다. 시험에 이긴 자만 들어갈 수 있어요. 방법은, 첫째 모델 주시고, 두 번째 비교하고, 세 번째 배제시키고. 모델케이스 제공하고 모델과 비교시켜서 그 비교해서 맞지 않으면 이걸 배제시키고, 제거하고. “나가, 어딜 가짜가 끼어들어? 어디 쭉정이가 알곡에 붙어서 흉내 내기하고 있어?” 하고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모델 누구십니까? 예수님.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거예요. 예수님을 참된 인간이잖아요. 참된 인간 보내시고 오늘날 우리와 비교시켜서 가짜는 지옥 갈 자가 여기 왜 끼어들었는데? 이 자리가 어느 자린데 니가 왜 끼냐? 나 하나 끼어야 교인 수가 부흥되잖아. 교회 부흥 같은 건 네가 신경 쓸 문제 아니지요. 교회 부흥된다고 그 교회가 구원 받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하나님은 택한 자만 구원하는 걸로 저는 소식을 그렇게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 또 제가 알기로는 로마서 9장, 하나님의 자비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으로 인간은 두 종류로 돼 있고 구원 받는 건 하나님의 사랑의 그릇만 구원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다른 생각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인간이 달음박질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만 해당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아닌가요? 하나님이 선택해야지 내가 예수님을 선택해선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말이 옳다면, 맞는다면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나님이 선택한 것과 네가 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네가 선택한 그 두 가지 경우에서 둘이 같이 섞일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뽑아내기 위해서 내가 예수님을 선택한 자는 어떻게 하든 잘라내야 하지 않습니까. 털어내는 거예요. “달라붙지 마. 너는 이쪽 동네 아니야, 저쪽 동네야 지옥이야.” 하고 떨어뜨리는 거죠.

구원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예수님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고 성도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 달랑 하나님이 먼저 선택했다는 그것밖에 없어요.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름 받을 때에 주님을 미리 알았다는 사실을 성도라도 몰라요. 불러주니까 내가 예수 믿었구나, 이게 아니고 예수 믿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나를 선택했음을 불러줄 때 아는 거예요. 그렇게 부름 받은 자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자를 어떻게 했다? 영광스럽게 영화롭게 했다.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이것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 아니지요. 이것이 기본으로 깔려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누굴 만나더라도 그게 현실화되고 사실화돼야 되지요. 로마서 8장 30절 말씀에 나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정했다고. 그다음에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정한 것이 주님이 먼저 정했지요. 하나님이 먼저 정했잖아요.

이 사실을 로마서 8장 30절 말씀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늘 주님이 묻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내 마음대로 안 되면 주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널 미리 정했잖아. 내가 너를 미리 선택해서 미리 정했어.” 이게 대낮 열두 시에도 왕왕왕, 밤 열두 시 잘잘 때도 왕왕왕, 새벽 여섯 시 일어날 때도 왕왕왕, 우리가 서울에 올라가도 왕왕왕, 미국 가도 왕왕왕, 유럽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왕왕왕. 미리 정하시고.

비행기 무서워 죽을 것 같아, 할 때 왕왕왕. 너는 비행기 타고 유럽 가다 죽어야 돼. 왜? 미리 정하셨으니까. 미리 정한 대로 비행기 타다 빨리 비행기 폭발해서 죽는 건데, 그 신경을 우리가 왜 씁니까? 우리가 신경 쓰면 그건 시험에 빠진 거죠. 시험 빠졌느냐, 밖에 나왔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할 수 있지요.

인간세계에서 언약세계로. 인간으로 태어날 때는 하나님이 나를 미리 정한 걸 몰랐어요. 언약이 와서 나를 악에서 건져 주니까 비로소 우리는 인간세계 속에 있으면서 언약세계 속에 있다는 사실, 넓게는 인간세계에 있으면서 인간세계와 언약세계의 차이점은 언약은 언약 자체가 현실인 것을 언약세계에 있는 사람은 아는데 인간세계 사람은 인간세계가 유일한 현실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오늘도 울산에서 전국체육대회 합니다.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 있어요. 사람들은 언약세계에 관심 없습니다. 우리는 오면서 차 밀리는 데 관심 있고. 왜 차 밀리느냐, 그럴 게 아니라 차 밀리는 이유가, 언약세계는 인간의 힘으론 못 들어가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차 밀리는 거예요. 논리가 몇 개 빠졌습니다만.

인간세계에서 언약세계로 전달, 이걸 달리 표현하겠습니다. 같은 건데 천국을 바깥에서 구경하려는 자와 천국에 이미 들어온 자의 차이. 언약세계가 천국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이 아니고 지금 신약이거든요. 다 이루었다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늘나라가 다 이뤄진 거예요. 하늘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 천국이 다 이뤄진 거예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너희 것임이라. 이미 천국이 이뤄진 거예요.

천국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이미 정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알아챈 자는 이미 천국에 들어갔기 때문에 알아챈 거예요. 이미 정했다는 것으로 끝나버렸어요. 이 모든 게. 그다음 절차는 우리가 손댈 절차가 아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절차기 때문에 우리가 걱정하거나 염려할 문제가 아니에요.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불러줄 때 우리는 인식을 하지요.

하지만 이미 불러주는 것조차도 주님의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일이에요. 불도저로 그냥 밀어붙여요. 이명박 사장으로 있을 때 경부고속도로 공사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밀어붙였잖아요. 천연기념물 나무고, 여기는 최 씨의 본고향이고, 최 씨고 김 씨고 유 씨고 간에 지금 도로가 똑바로 뚫려야 되는데 그런 것 무시하고 그냥 밀어붙였잖아요. 이명박 전 대통령 일할 때 새벽 네 시에 일어났어요. 현대건설에 있을 때 고속도로 뚫는다고.

제가 지금 과거 고생한 이야기가 아니고 그냥 밀어붙이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의 추억도 밀어붙이고요 내가 정들었던 나의 가족도 밀어붙여요. “너희 집안들?” “집안 맞습니다.” 집안이 너의 원수니라, 하고 말씀으로 밀어붙여요.

다윗이 버림받았다는 게 기준이 되는 거예요. 그 시대에 구원의 기준이 된 거예요. 다윗은 하나님께 선택받음으로 왕으로 임기 시작한 거예요. 사울 왕 가짜 왕이에요. 나중에 엔돌의 신접한 여인 만나서 인생 끝날 겁니다. 이스라엘에는 신접한 여인을 용서하거나 살려주면 안 돼요.

그런데 사울이 소위 이스라엘 왕이라고 하면서 엔돌이란 지방에 가서 신접한 여인을 찾았다는 말은 하나님 뜻도 모르고 우리나라에선 무당이나 점쟁이 용서해선 안 돼, 지가 왕으로서 행정적 처리했을 뿐이지 자기 마음은 그들과 같은 마음이란 것을 사울은 몰랐어요. 지가 아쉬울 때 괴로울 때 역시 찾을 것은 무당, 점치는 자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 왕은 어떤 사람이냐? 천국을 바깥에서 구경만 한 사람이에요. 천국은 어떻게 생겼지? 나도 천국에 들어가 볼까, 성경보고 기도하면서 노력해볼까? 지금 구경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다윗은 천국 안에 이미 들어온 사람이에요. 천국에서 멱살 쥐고 잡아당겼으니까 “들어와. 너는 이스라엘 왕으로서 내 언약대로 해야 돼. 그게 다윗언약이거든요. 언약대로 움직여야 돼. 언약이 주가 되고 너는 언약의 종이 되는 거야. 그런 관계야. 너는 홀로 못 살아. 하나님의 약속대로 살 수밖에 없어.”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한 자를 영화롭게 할 수밖에 없는 그 코스에 이미 너는 들어섰다고 잡아당겨주는 거예요. 이게 이미 천국에 들어온 사람이에요.

천국에 들어오지도 않고 바깥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교회 와서는 둘 다 천국 왔다고 우기니까 하나님께서는 교회 온 걸로 쳐주지 않고 흩어져서 일상생활에 매진하게 만들지요. 일상생활하면서 자기가 천국의 바깥에서 기웃거리면서 예배참석하면서 흉내 내면서 찬송 부르면서 기도하는 흉내 내면서 기웃거리지만 막상 가정에 일 터지면 어떻게 됩니까? “나, 버림받기 싫어요.” 그게 바로 시험에 든 거예요. 현실도 아닌 걸 현실로 여기고 진짜 현실은 현실 아니라고 배척해버리고. 그게 시험든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어떤 일을 하셨느냐 하면 하늘에 예수님 계셨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디에 왔습니까? 아까 든 용어, 인간세계에 왔지요. 인간세계는 현실 아닙니다. 인간세계는 내가 남들의 인정받기를 원하는 집합체에요. 그걸 악 속에 죄 속에 들어온 거예요. 죄에서 건져달라는 기도가 그것 때문에 있는 거예요. 인간세계와 하늘나라를 주께서 여기에 언약으로 하늘나라를 만들어버려요. 만들어서 언약세계 따로 인간세계 따로 분리시켜서 이쪽을 버리는 거예요. 버림받게 하는 거예요.

유치하다고 전제하고 좀 유치한 예를 들어보겠어요. 어떤 나라의 왕의 후계자가 사고 나서 기억이 상실되어 길거리를 헤매다가 어떤 집에서 양육이 됐다 칩시다. 거지같은 아이 거뒀다고 농촌에 살면서 모든 험한 일 다 시켰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기가 이 집에 살 사람이 아니고 왕궁에 살 왕자, 왕의 후계자라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때부터 그 사람은 임금과 연락을 취하면서 자기를 받아준, 자기를 이용한 거죠. 자기를 이용한 같이 살았던 그 사람들에게 막대한 금은보화를 선물로 줬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을 키워주고 온갖 허드렛일을 시켰던 그 가정은 갑자기 그 아들로 말미암아 막대한 부자가 된 거예요. 그러면 성공한 겁니까, 아니면 빼내기 위한 작업입니까? 성공한 거예요, 떨어지기 위한 작업입니까? 떨어지기 위한 작업이죠. 짐승 도살하기 전에 잘 먹이는 것과 똑같지요.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게 그런 거예요.

이 땅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고, 이것은 버림받는 이 세상, 침몰하는 여객선에 객실 하나 잡으려고 아등바등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결혼한다고 아파트 잡으려고 3억씩 빚내서 장만하잖아요. 둘이 벌어서 하는 이자주고 하나는 생활비로 쓰고 하잖아요. 그것 왜 합니까? 침몰하는 여객선에 객실 하나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성공했다고 보거든요.

“우리 아들 결혼해도 집 사줄 돈도 없어요.” 그게 슬픈 일입니까, 낙담할 일이에요, 안 그러면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우리 아들 장가보내는데 집 못 사줘.” 이게 굉장히 얼마나 내가 참 나한테 감사한지, 이런 이야기 되겠어요? 안 그러면 “미안하다, 아들아.” 그렇게 되는 거예요? 답변을 기대하진 않겠습니다만 “못난 어미를 용서하라. 아빠가 무능해서 집도 못 사주고 니만 고생이구나.” 그게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 아닙니까.

분명히 성경에 마태복음 8장인가 보면 나와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이 고향이 아니고 고향이 어디 있다? 하늘에 있다. 이 땅에선 나그네였다. 분명히 나와 있지요. 엄마 돼서 너 장가가는데 집도 못 사주고 미안하다, 하면 자식이, “어머님. 이 땅엔 나그네입니다. 좋은 집 소유한들 무슨 소용 있겠어요. 물론 집주면 받겠습니다만. 그것이 진리가 아닙니다.” 그럼 엄마가 아들보고, “네가 시험에 들지 않았구나, 인간아.”

이건 뭐 엄마도 시험 들어, 아빠도 시험 들어, 자식도 시험 들어. 전부 다 이 세상에 남한테 인정받는 인간이고 싶다, 그것 하나에 푹 빠져서 어디서 들은풍월은 있어서 주기도문은 잘도 하네. 악에서 구하옵소서. 악이 뭔데? 니가 악인데 뭘 악에서 구해. 성경하고 설교 들으라 하면 천리 밖으로 내빼면서. 내빼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 성공하는 데 보탬이 안 되니까 내빼는 것 아닙니까.

버림받은 것이 표준입니다. 이 땅에서 표준은 뭐냐? 버림받은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 뭘 지워야 되는가? 나를 지워야 되고, 남는 것은 뭐냐? 다윗? 아니에요. 예레미야? 아닙니다. 엘리야? 아닙니다. 누가 남아야 돼요? 변화산에서 보였듯이 예수님만 남아야 돼요. 이 땅에서 예수님만 보여야 됩니다. 예수님만 남기는 작업, 이게 주님의 작업입니다.

여기 600명 모였거든요. 사실은 시글락 끝나고 난 뒤에 사울은 지는 해고 다윗은 뜨는 해기 때문에 숫자가 늘어납니다. 미리 숫자 알려드릴게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오늘 역대상 12장 23절에서 37절까지 내용이에요.

“싸움을 예비한 군대 장관들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로 나아와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울의 나라를 저에게 돌리고자 하였으니 그 수효가 이러하였더라 유다 자손 중에서 방패와 창을 들고 싸움을 예비한 자가 육천 팔백 명이요 시므온 자손 중에서 싸움하는 큰 용사가 칠천 일백 명이요 레위 자손 중에서 사천 육백 명이요 아론의 집 족장 여호야다와 그와 함께한 자가 삼천 칠백 명이요 또 젊은 용사 사독과 그 족속의 장관이 이십 이명이요 베냐민 자손 곧 사울의 동족은 아직도 태반이나 사울의 집을 좇으나 그 중에서 나아온 자가 삼천 명이요 에브라임 자손 중에서 본 족속의 유명한 큰 용사가 이만 팔백 명이요 므낫세 반 지파 중에 녹명된 자로서 와서 다윗을 세워 왕을 삼으려 하는 자가 일만 팔천 명이요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두목이 이백 명이니 저희는 그 모든 형제를 관할하는 자며 스불론 중에서 모든 군기를 가지고 항오를 정제히 하고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능히 진에 나아가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오만 명이요 납달리 중에서 장관 일천 명과 방패와 창을 가지고 함께한 자가 삼만 칠천 명이요 단 자손 중에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이만 팔천육백 명이요 아셀 중에서 능히 진에 나가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사만명이요 요단 저편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 중에서 모든 군기를 가지고 능히 싸우는 자가 십이만 명이었더라”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왔습니다. 끝부분에 하나의 국가가 돼야 되니까. 참모진들이 확보가 돼 있어야 돼요. 이 많은 사람들이 누구 보고 왔어요? 오직 한 사람밖에 안 봐요. 다윗이죠. 왜 다윗을 봤습니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완전한 다른 세상 되려면 기존 세상의 중심축 자체가 뽑혀서 다른 축으로 대체돼야 되거든요.

바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외치는 게 그겁니다.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요 제가 하나 보탠다면, 내가 곧 축이다. 이 세상의 중심축이다. 내가 바로 주다. 내가 바로 심판주고 구원주고 오직 이 세상은 나의 세계만 남고 나머지는 지옥으로 떨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되는 겁니다. 흔히 어린애들도 다 안다는 것, 우리가 세월이 너무 지나다 다 잊어버렸습니까?

주께서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실 때 우리는 소급해서 나를 부른 것을 믿었으니까 구원 받는 게 아니고, 그건 믿음이 아니지요. 그거는 기웃거리는 거죠. 천국을 바깥에서 구경하는 거예요. 성경말씀 뭐 있는가, 어느 것 믿을 만 한가, 좋은 것만 골라보자 기웃거리는 거고. 천국에 온 사람은, 내가 예수를 믿었다, 자체가 날아가 버리고 정하셨다, 주께서 믿기 전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미리 정했음을 마음의 축, 중심축으로 꽂혀버린 거예요. 중심축 알지요? 오뚝이 안에 철 조각 들었잖아요. 이것 때문에 오뚝이 백날 넘어져도 안 넘어지잖아요.

주님의 언약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시험에 들지 않는 자는 이미 주님이 들어있어서 주님의 일방적인 밀어붙이는 계획만 있기 때문에 이미 그 계획을 계획답게 들춰내기 위해서 그 안에 뭐가 있는가를 알려주는 방식의 일들이 터져 나오는 그게 시험이에요. 유혹 일으켜놓고 시험에 들지 않게 되었단다, 이 아들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 시험을 못 이겨요. 내 힘으로 못 이긴다고요. 내 안에 내 힘보다 더 센 힘, 주께서 창세전부터 꽂아놓은 힘이 있을 때 그 꽂아놓은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도록 인간 같으면 수백 번 더 넘어질 일들은 우리 인생을 살면서 주위에 발생시키는 겁니다. 자식에게 문제 있고, 남편에게 문제 있고, 아내에게 문제 있고, 교회에 문제 있고, 국가에 문제 있고, 우크라이나에 문제 있고, 러시아에 문제 있고, 물가 올라가고 이런 것.

작은 시험부터 큰 시험까지 늘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소소한 것까지 다 찾아와요. 심지어 드라마가 주인공이 죽어버리는 이것 보고 우리는 얼마나 시험 들었습니까. 드라마 16회까지 봤는데 주인공이 행복하질 못해. 다음에 제2탄을 기대하세요, 이럴 때 얼마나 우리는 시험 들겠습니까? 밥맛이 없어. 드라마 그런 식으로 끝나느냐, 항의할까, 이런 식으로. 북한에 돈을 왜 그렇게 퍼주느냐고 그게 불만이 되어 데모하고. 전부 다 이게 뭐예요? 시험 드는 거잖아요. “내 돈을 네가 뭔데 보이스피싱 삼천만 원 빼앗느냐? 못 살겠다. 뛰어내리고 싶어.” 전부 다 시험 들었어요.

 

 

20221007b 울산강의-역대기상(14강) 12장 8절 : 시험전쟁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왜 태어나느냐 하면 이 땅에 버림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다른 가능성을 자꾸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인간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 하나님 마음을 증명하듯이 인간들 만들어서 태어난 족족 다 죽여 버렸습니다. 이게 창세기 5장에 나오지요. 아담이 누굴 낳고 죽고, 또 태어난 자가 누굴 낳고 죽고. 그러니까 아담이 자식에게 준 게 뭐냐, 상속한 게 뭐냐? 죽음을 상속한 거예요.

“목숨 미련 갖지 마라. 나는 너에게 죽음을 준 거야.” 이건 병을 준 거죠. 죽음의 병, 죽음에 이르는 병을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준 겁니다. 그리고 그 최초의 부모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너는 정녕 죽으리라를 아담에게 맡겼고요. 이게 인간의 운명이에요. 요지부동입니다. 어떤 지위에 있든 얼마나 돈을 벌었든지 아무리 부자가 된다, 될지라도 이 죽음이라는 운명을 변경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예수 믿더라도 이 운명은 바뀌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라는 의식은 죽을 때까지만 유효함, 같은 말로 죽음은 나를 겨냥한다. 빨리 와, 빨리 와. 내가 이렇게 출세했습니다, 하면 무대 뒤에서 “빨리 와.”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 되었습니다.” 뒤에서 “빨리 와, 빨리 와. 죽어 이 녀석아.” 지금도 죽음이 우리를 부르고 있고 우리는 그 부름에 호출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이란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뜻이거든요. 인간은 버림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모두 제거돼야 될 대상이 됩니다. 그 제거되는 방법은 죽음으로 제거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특별한 예외가 있어요. 그래야만 천국 백성이 성립되니까요. 이 예외가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 글자 색깔이 뭡니까? 빨갛지요.

어린양이 피가 이스라엘에게 흠뻑 적신 것처럼 주님께 매일 드리는 피가 이스라엘을 흠뻑 적시지 아니하면, 흠뻑 적셨다는 말은, 인간은 죽을 때 죽는다.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죽음이 오라 해서, 이리 와 죽을 때 죽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 안에서, 또는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미리 죽었다. 이게 이스라엘의 특징입니다. 이미 죽은 거예요. 누가? ‘나’가. 나가 하나님 앞에서 장차 죽을 죽음을 이스라엘 안에선 앞당깁니다. 주님의 심판대까지 갈 것도 없이 심판대가 먼저 와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푸틴이 장병들을 모집할 때 개인물품을 가지고 오라 하지 않고, 동네마다 뭘 만드느냐 하면 징집사무소를 만들었지요. 군에 가기 전에 군복 하나 주고 명패 하나씩 주고. 징집사무소가 마을마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의 끝장, 우리의 마지막을 미리 보게 하는 거예요. 만약에 그것 없이 그냥 가게 되면 죽는 건 맞는데 왜 죽는지는 몰라요. 그런데 말씀이 미리 마중 와서 우리를 낚아채버리면 죽는 것은 기본이고요 죽는 이유까지 알게 돼요.

“아하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과 의가 없어 죽어 마땅하구나.” 죽어 마땅함을 고백할 때 마태복음 9장에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자기 백성을 미리 징집하려 온 거예요. 자기 백성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가 죽기 전부터 이미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 그게 예외적인 단체, 곧 예수님의 피로 호출 받은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역대상 이야기가 이스라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죽는 이유, 왜 죽어야 되는지를 미리 알리기 위해서 구약성경 말씀을 주신 거예요. 율법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말씀과 같이 있다는 것은 인생 끝까지, 끝장까지 안 가 봐도 알아요. 송해처럼 96살까지 안 살아봐도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은 열두 살이라도, 천재지요. 부모의 죄 때문에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열두 살이라도 알 수 있지요. 성령께서 오시면. 그런 천재는 드물지만.

나이 들어서 할 일 없으면 요양병원 가서 예수 믿지, 그런 계산하지 마세요. 그거는 죽음을 대비하는 거고요. 죽음을 대비해서 가는 게 아니고 미리 죽는 자에게만 천국 가는 거예요. 대비하는 사람, 그건 생명보험 들 때나 하는 소리고. 이미 죽은 거예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소급해서 어릴 때부터 만약에 오십 대에 자기가 죽는 이유를 안다면 오십 년 동안 돌아보면서 그것이 인간이 죽어야 될 이유들의 길로 또는 경로로 재해석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의 지난 과거를.

죽음의 흔적을 질질 흘리고 돌아다녔구나. 서울, 부산, 대전 살다 찍고 목포 살고, 어디 살더라도 죽음의 흔적이. 서울 살다 부산 가신 분도 계시겠고. 지나온 과거가 죽음의 흔적이에요. 그 과거 동안에 얼마나 성경연구 많이 했게요. 그 성경연구가 죽으려고 악을 쓴 거란 사실을 뒤돌아보면 소급해보면 알지요. 교회 헌금 얼마나 많이 했게요. 그 헌금이 날 죽이려고 헌금한 거예요. 선교한 것도.

인간이 죽으려면 무슨 짓인들 못해, 그 짓한 거예요. 왜 그 짓이냐? 내가 했거든요. 자아가 사라져야 되는데 그 일 하고 자아가 안 사라졌어요. 여기 피아노 있잖아요. 분명히 이 교회에 피아노 기증하신 분이 있을 거예요. 교회가 샀습니까, 누가 기증했습니까? (중고로 샀습니다.) 그럼 소용없다. 만약에 이 나무를 누가 기증했다면 기능하고 난 뒤에,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런 이야기 안 하지요. 그다음부터는 이 나무만 쳐다봐요.

제 머리를 아내가 손질하거든요. 제 아내가 고백했어요. 시험 들어 안 되겠다. 이제는 설교 듣는 게 아니고 머리 손질 잘했나 본다고 이발소에서 깎아라, 해서 남성이발소 블루클럽 깎았어요. 내가 한 짓을 자아를 없애는 게 아니고 돋보이게 만들었어요.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겁니다. 주님은 이미 나를 죽은 자로 간주했는데 내 쪽에서 극렬하게 저항하는 거예요.

“내가 왜 죽어. 내가 이렇게 교회를 위해서 충성, 봉사하는데 이렇게 착하고 남한테 욕 한 번 안 했는데(구라지요) 내가 도적질 안 했는데(이것도 거짓말이고요) 이렇게 깨끗하게 살았는데 천국 가도 나부터 먼저 가야 돼.”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거는 진실이 아닙니다. 거짓입니다. 이 거짓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외조치로서 이스라엘을 제사를 통해 어린양의 피로서 피가 계속 작동하는 한 살아가는 희한한 민족으로 만드는 거예요. 피 흘린 제사가 계속 생기면 그 이스라엘은 살고, 그것 없으면 이스라엘은 끝나는 완전히 이건 엔진에다 기름 넣는 게 아니라 피를 넣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의 피로 계속 수혈할 때만 안에서 쿵덕쿵덕 생명이 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장이 되는 겁니다. 쿵덕쿵덕 소리 난다는 것은 피가 계속 거기서 순환하고 있고 활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피를 일주일 단위로 크게 피 흘리는 날을 무슨 날이냐 하면 안식일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안식일 계약을 맺는 거예요. 네가 안식일 소홀히 한다면 너는 내 백성 아니다.

이 피를 위해서, 인간의 피는 어떻게 돼요? 거부돼야 되겠지요. 인간의 행함, 인간의 피, 혈통 거부돼야 되겠지요. 왜냐? 지금 함께 계신 하나님의 피가 그들을 살린다면 인간의 피는 거부돼야 되겠지요. 거부되는 이 제도가 할례언약입니다. 십보라가 죽은 남편을 뭐로 살렸습니까? 돈으로 살렸습니까, 안 그러면 마사지해서 살렸습니까? 피로 살렸어요. 그래서 당신은 피 남편이라 하는 거예요. 아들의 할례로 흘리는 피, 언약적 피가 죽은 남편을 살린 거예요. 출애굽기 4장에.

이런 제 이야기에 교회 와서 이렇게 하세요, 이런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도 없지요. 그것 다 빼야 돼요. 그런 게 있으면 자아가 죽질 않아요. 자아는 자기 행한 것이 있으면 자꾸 남과 비교한다고요. 저 사람 기도 몇 시간하는지, 헌금 얼마 하는지, 전도 몇 명 했는지, 다른 교회 교인 몇 명인지 자꾸 비교하게 돼요. 이거는 자기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런 식으로 구원한 적 없습니다. 이거는 기존 교회가 사람을 바보, 등신 만들어놓은 거예요.

교회는 뭐냐 하면 교회는 날마다 우리의 목을 치는 거예요. 메두사란 그리스에 괴물이 있는데 여자 괴물인데 옛날에는 미모로 예뻤어요. 특히 뭐가 장점이냐? 머리카락이 고왔던 여자가 있었는데 벌을 받아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뱀이 된 거예요. 그게 메두사라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요. 우리 인간이 괴물이에요. 메두사 같아요. 교회에서 매일같이 자아를 쳐도 또 다음 주 되면 또 올라가 있고, 또 쳐도 또 올라가 있고 메두사가 따로 없어. 완전히.

이건 도대체 머리카락이 몇 개야, 목이 몇 개야. 계속 목 치면 또 올라오고 목 치면 또 올라오고 죽지도 않아, 이 괴물은요. 그 괴물은 어디서 왔는가? 세상에 나가면 온통 시험 들 일만 다가왔거든요. 그 일을 만날 때 자기 자아를 본인이 새롭게 만들었어요. 나는 안 죽는다, 이런 식으로.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내가 너한테 질까 보냐.” 하나님께서는 늘 말씀으로 한 주 동안 자라온 이 자아를 댕강 쳐버리죠. 여러분 괴물 또 올라왔습니다. 또 쳐버리고.

그렇게 해서 치는 이유가 모든 사람은 버림받았는데 단 한 분만은 버림받지 않았어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 그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육신 속에 예수님만 남기기 위해서 자아를 댕강, 댕강 말씀으로 쳐주는 겁니다. 잡초를 쳐내는 거예요. 네가 먹고 마시는 것 다 주님이 주신 선물이다. “어젯밤에 잠 잘 잤나?” “일곱 시간 푹 잤습니다.” “선물인 줄 알아라.”

여러분들이 어떤 근심걱정이 있어서 밤새 잠을 못 자고 한 시간도 제대로 못 잤다, 잠 안 온다 할 때 대책이 뭡니까? 어떻게 하면 잠을 이룰까 하지요. 저의 대책은 간단합니다. 잠 안 오거든 자지 마세요. 주께서 안 오게 했는데 잠 안 옴을 감사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메두사의 자아가 날아간 상태에요. 주께서 오늘 잠자지 마라, 나하고 할 일 있어 잠자지 말라고 하셨다면 순종해야지요. 잠 안 자기 순종, 참 쉽지요.

이건 뭐 어찌하다 양 한 마리, 두 마리 아침까지 양 사만 오천이백오십 마리 세다가 잠도 못 자고. 멍하게 화만 나고 그렇지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 하신 일만 남기기,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거저주신 선물만 남기기. 여러분 머리카락 뱀 되기 전에 미리 알아서 선물로 보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안 감아서 뻑뻑하니 뱀처럼 되는 수가 있어요.

그렇게 예수님만 남았을 때 특징이 뭐냐? 예수님만 남았는지 나만 남았는지 어떻게 분간하느냐? 특징이 뭐냐 하면 아까 이런 말했지요. 다시 보겠습니다. ①천국을 기웃거리면서 구경하는 자와 ②이미 천국에 들어온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천국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시간, 또는 시간의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부가 오후 다섯 시쯤 백화점에 가서 신상 나왔는지 기웃거리다가 저녁 할 때 됐네, 하고 집에 가잖아요. 그럼 그 사람은 백화점 직원이 아니고 자기 소속이 따로 있어요. 가정주부에요. 곧 저녁 해야 돼요. 천국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내 시간, 내 관리 시간 따로 있는 겁니다. 시간 속에 여전히 있는 사람은 천국을 기웃거리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천국에 들어온 사람은 시간을 능가한 묵시세계에 들어온 거예요. 묵시세계에서 시간은 주님이 관리해요. “어, 저녁 할 시간이네” 누가 알려줬습니까? 주님이 저녁 할 시간이네, 쌀 불릴 시간됐네, 이런 것. 나중에 우리 육신이 쇠퇴해 죽을 때 되면 쌀 불릴 시간도 잊어버리고 저녁 할 시간도 다 잊어버리죠. 그걸 치매 현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네가 시간 속에서 많이 놀았다. 이젠 그만 가자.” 이게 밥 땐지 저녁땐지 구분도 못하고 자식인지 딸인지 구분도 못하면 “가자, 가자. 가자 집으로” 이런 것. 할 수 없지요. 주님께서 치매 걸리게 하시면 치매 걸려야지.

내 시간이 아니고 주께서 허락한 시간, 허용한 시간 속에서 주님의 종으로써 다뤄지고 지시받고 명령받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런 관계를 이스라엘 언약에 의하면 이것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 합니다. 자, 성경에서 아들이란 뭐냐? 숨겨진 아버지의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자가 아들이에요. 아들이 아니면 아버지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있지요. 요한복음 10장에도 나오고.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왜 자꾸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아버지의 방법은 아들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이것이 다윗에게 준 특수한 관계입니다. 다윗언약이에요.

사무엘하 7장에 나온 이야기인데 보겠습니다. 7장 14절에,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게 다윗언약이에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노아 때는 방주였고, 모세 때는 율법이었지만, 다윗언약에 오게 되면 율법이 아니고 아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율법 지켰으니까 천국 보내주세요.” 안 됩니다.

내 아들을 믿지 아니하면 내 아들을 섬기지 아니하면 아버지를 섬기지 아니한 걸로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에서. 어떻게 나를 공경하지 않고 아버지를 공경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거예요. 아버지의 모든 뜻은 아들에게 다 넘겼어요. 아들 따로 있고 아버지도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진짜 그게 이단이죠.

여러분 삼위일체가 이단 같아요. 왜냐하면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이유가 뭐냐?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 뜻을 다 모른다는 게 담겨있거든요. 그러니까 삼위일체 주장하면 이단이지요. 이건 반대로 삼위일체 주장 안 하면 이단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삼위일체 자체가 이단 같아요. 아들을 통해서 다 보여줬잖아요. 끝났잖아요.

무슨 성부, 성자, 성령 시아버지 세 명 섬긴다고 바쁘냐 말이죠. 섬길 수도 없고요. 인간은 두 개를 동시에 못 섬기게 돼 있어요. 인간은 두 주인을 못 섬기게 돼 있어요. 심리적 논리가. 예수님도 그런 말씀 하셨지만. 아들 섬기면 끝이에요. 끝난 거예요. 무슨 삼위일체가 왜 필요한데? 이단 안 되려하다가 이단으로 티가 나버리죠.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드러내기 때문에, 다른 말로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내셨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600명부터 해서 나중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은 누구만 쳐다보느냐? 다윗 한 사람만 쳐다보면서 버림받든 말든 버림받은 다윗에게 합류하면서 돌아오는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 역대상 12장 내용이에요.

그 내용 중에서 역대상 12장 8절을 보겠습니다. “갓 사람 중에서 거친 땅 견고한 곳에 이르러 다윗에게 돌아온 자가 있었으니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방패와 창을 능히 쓰는 자라 그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 같으니” 이게 무슨 지파라고요? 갓 지파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성경이 이렇게 언급하는 것은, 신명기 33장 20절, 거기는 모세가 자기는 약속의 땅에 못 가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될 후손들을 예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걸 지파 별로 예언을 해요.

이 말은 하나에서 내려온 축복이 열두 개로 가지를 뻗었다고 보시면 돼요. 문어 다리가 몇 개입니까? 여덟 개지요. 오징어 다리는 몇 개지요? 열 개. 오징어 다리 없거든 누가 하나 먹었다고 보시면 돼요. 중간 상인이. 다리가 열두 개에요. 이게 이스라엘 하나이면서 열둘이 되는 이유가, 그게 고린도전서 12장에 성령이 아니고서야 예수님을 주라고 할 수 없다고 해놓고 교회를 소개할 때에 눈이 발더러 쓸데없다는 소리 못한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인간 대 인간의 세계와의 차이점을 두기 위해서, 인간은 인간과 비교하잖아요.

그 비교 안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요? 중심이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다른 곳에 하나의 중심이 따로 설정되면 되는 거예요. 다윗을 쳐다보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굉장히 쉬운 데요. 민수기에서 모세를 원망하다 불 뱀이 와서 사람들이 죽었잖아요.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제시한 것은 뭐냐? 놋뱀을 만들어서 쳐다보라고 했어요. 그것 참 쉽지요. 누구든지 쳐다보면 구원을 얻으리라. 참 쉽잖아요.

안 쳐다본 사람들이 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자아라는 메두사, 그 괴물의 장벽을 지가 넘어서질 못한 거예요. 나 아니고, 가 안 된 거예요. 나는 아닙니다. 왜? 나의 어떤 노력과 나의 어떤 행함도 아닙니다. 이거는 구원과 상관없습니다. 나는 쓰레기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게 말로는 흉내 내어 할 수 있지만 진심으로 그걸 넘어설 수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를 안 보는 거예요. 하나를 안 보는 거예요.

놋 뱀, 십자가를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이유가, 자아가 자기를 가로막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데, 내가 그동안 얼마나 착실하게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이게 왜 무의미해, 무가치해.” 자꾸 이런 식이에요. 천국을 기웃거리는 사람들, 교회 와서 천국 구경하는 사람들, 남 따라 하면서 천당 가려고 기대하는 사람들.

인간의 가장 큰 기쁨은 무의미함이 주는 기쁨이에요.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때 만사가 가벼워져요. 세상에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왜? 내가 무의미하니까, 천하의 죄인이니까 못할 게 없어요. 하나님의 전쟁은 그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윗만 쳐다보는 나라 만드는 것, 그게 하나님의 전쟁의 목표입니다. 왜? 그 당시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고자하는 것이 그 시대에는 다윗을 통해서 다 드러내시기 때문에.

그게 바로 사무엘하에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두신 거예요. 전에 출애굽기 4장에서 이스라엘이 아들이거든요. 다윗 땐 누가 아들이냐? 이스라엘 왕이 아들이에요. 전차 열두 개를 쳐다보다가 열둘이 서로 경쟁하다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열둘에서, 열둘에서, 열둘에서 뭐로 초점이 맺힙니까? 하나로 모이는 거예요.

그 하나에서 열둘이 하나님과 이어지도록 하는 그 중간 지점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걸 매개라 합니다. 매개체, 또는 매개. 더 쉬운 말로 중보, 중보자 이런 뜻이에요. 여자들 머리카락 많잖아요. 일할 때 거치적거리니까 어떻게 합니까? 고무줄로 하나로 매듭짓죠. 매듭짓는 그 부분이 중보자에요. 매듭을 통과해서 우리가 된 겁니다. 매듭 없이 된 게 아니고, 스트레이트 파마해서 된 그게 아니고 딱 묶은 머리한 거예요. 예수님한테 묶인 거예요.

그래서 기도해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기도 못한다는 뜻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게 네 소원 안 들어준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쉬운 뜻이 있어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게 뭐냐고 묻는 분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당신 소원 끝났다 그런 뜻이에요. 예수님의 소원만 받지 당신 소원 안 받는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하나로 묶인 분으로서 사울에게 버림받은 겁니다. 사울은 그 당시에 인간세계를 대표해요. 무당을 비롯해서 그 인간세계로부터 버림받은 것, 그게 다윗의 모습이 장차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모습을 그 시대에 세팅된 무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지금 다윗이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우리들도 마찬가지 되겠지요.

신명기 33장 20절 보겠습니다. “갓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갓을 광대케 하시는 자에게 찬송을 부를찌어다 갓이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법 세운 자의 분깃으로 예비 된 것이로다” 여기 보면 갓 지파를 짐승에 비유했지요. 갓을 암사자 같이, 이렇게 돼 있지요. 그러면 아까 봤던 역대상 12장 8절에 그 얼굴은 뭐와 같다? 사자 같다.

신명기에서 축복 자체가 모세 예언한 거죠. 모세가 예언한 것을 바턴을 누가 이어받아요? 다윗이 이어받지요. 완전히 400미터 계주하는 것처럼 바턴 떨어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받는 거예요. 여러분들 교회 올 때 목사님의 말씀만 받는 거예요. 바턴을 받는 거예요. 왜? 그게 나의 팔자고 운명이고 미래고 이미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자를 하늘의 영광스런 천사 같이 만드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말씀을 하게 되면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동화나 만화를 생각해봅시다. 말씀을 받을 때는 말씀이었는데 손에 쥐면서 갑자기 여기서 광채가 난다고 봅시다. 만화로 그릴 수 있어요. 손 주위가 훤해. 이쪽에만 광채가 나기 때문에. 이쪽에 광채가 나게 되면 나머지 내 엉덩이, 발목, 발, 다리, 어깨, 무릎, 팔 이건 뭐가 돼요? 상대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시커멓게 되겠지요. 쓰레기잖아요. 그래서 쓰레기에요. 말씀만 광채가 나니까 내 육신은 빛이 없지요.

만약에 내가 벤츠를 새로 샀는데 목사님으로부터 복음의 말씀을 들었다. 그럼 벤츠가 빛이 나겠습니까, 말씀이 빛이 나겠습니까? 묻는 내가, 물음 자체가 되는지 의심스러워요. 답변해보세요. 어느 것이 빛이 납니까? 말씀이 나야 되겠지요, 나야 되겠지요. “아이고, 목사님 말씀 너무 좋았어.” 그런데 “집사님 벤츠 누가 긁고 갔더군요.” 말씀으로 내가 죄인 되고 쓰레기 되어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범사에 감사한다고 자신만만했는데, “내 벤츠 누가 긁었어?” 벤츠 안 타보니 아나, 그 기분을. 얼마나 우리가 이율배반적입니까, 얼마나 우리가 거짓말쟁이에요.

여기서 더 나가봅시다. 하나님은 다윗을 제거합니다. 그게 역대상 끝부분에 보면 나옵니다. 역대상 21장 1절 누가 읽어보세요.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보세요, 참. 하나님이 다윗 후반기의 다윗마저 제거해버립니다. “네 시대에 너 할 것 다했다. 수고했어.” 다윗을 제거하면서 다윗은 의인으로 드러날까요, 죄인으로 드러날까요? 죄인으로 드러나죠. 다윗이 훌륭해서 이스라엘 됐다는 이야기를 하나님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탄을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자, 그다음 질문. 다윗이 사탄한테 이겼을까요, 졌을까요? 졌지요. 사탄을 누가 이깁니까? 아담의 자손인데 아담 자체가 사탄에게 져버렸는데 그 후손 내리 사탄에게 지는 건 마땅한 거죠. 사탄을 누가 이겨요? 못 이기죠.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탄을 이기지 못한다는 조건 하에 있는 인물로 다윗언약을 세웠다 이 말이죠. 그러면 다윗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다윗 속에 계신 분이 아들이 되겠지요.

그럼 사탄에 져버린 다윗을 통해서 뭘 뽑아내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뽑아내겠지요. 그 아들이 뭐냐? 다윗은 그 아들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아라우나 타작마당에다 다윗이 제사장으로 제사를 드리지요. 양을 잡고 소를 잡고. 나 아닙니다. 장차오실 분이 이 다윗의 죄를 위해서 이렇게 대신 죽으실 분이 오실 겁니다, 라는 것을 증거 하는 거죠.

이게 오늘날 성도가 해야 될 일이에요. 성도는 결코 사탄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탄을 이긴 요소가 성도 안에 있기에 성도는 구원 받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아로부터 자아가 늘 댕강, 댕강 떨어져나가야 되는 거예요. 주님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뭔가 일이 잘 풀린다 싶으면 내가 했다는 쪽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와버려요.

이렇게 제가 이야기하면, 나한테 예수님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시는 분이 있는데 차마 그런 말을 안 하지요. 사람은 없으면 입을 다물고 있어요. 있는 것처럼 하기 위해서 입 다물고 있지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 것은 너무 도발적이고 용감한 사람이죠. 그런데 아까 제가 그런 사람한테 이렇게 묻고 싶어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그런 노래 있지요. ‘사랑받기’ 괄호에다 당신은 (버림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당신은 당신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버림받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특혜를 준 거예요. 예외적인 조치를 준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이스라엘은 예외적인 조치라고. 일종의 편애지요. 하나님의 편애, 일방적 사랑이죠.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일방적 사랑이에요.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우정입니다. 결혼이라 하는 것은 한평생 해야 될 대화지요. 그게 결혼이에요.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대화하기 위해서 결혼한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인간에게 사랑이 안 나옵니다. 남을 이용하겠다는 마음이 항상 먼저 나오기 때문에 이건 본인이 그걸 조절을 못해요. 막을 수가 없어요. 주체를 못해요.

남편, 이용감이에요. 아내, 내 이용감입니다. 이용하기 위해서 내 곁에 두고 이혼하지 않는 거예요. 이용가치 없으면 서서히 정리할까, 되겠지요. 헤어지지 뭐, 할 때 물렸다 이런 이야기하지요. 된통 너한테 물렸다. 네가 그런 고집도 있는 것을 사전에 이야기했어야지. 네 인생 때문에 같이 말려들어서 내 인생, 내 청춘 다 날렸다.

그래서 아픈 배우자가 죽을 때 남아있는 배우자가 많이 울지요. 서러워서.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진 것 아까워서 그렇게 많이 울어요. 무슨 재수 없는 일이 벌어져서. 인간은 손해 보는 짓은 안 합니다. 남을 이용만 했지 이용당하긴 싫어해요. 그래서 부부는 우정관계입니다. 우정의 무대에요.

사랑은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사랑한 것만 사랑이에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에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22절) 할 때 그 사랑은 수입품입니다. 내가 예상해서 달라고 온 게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이 자기 사랑을 집어넣고 사랑을 자기가 뽑아가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낚싯바늘에 걸려서 덩달아 구원된 거예요. 주님의 자기 사랑에 말려들어서 구원 받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자기를 부인해야 돼요. 주님의 사랑에 우리가 끌려들었으면, 니가 왜 거기에 딸려오지, 자기를 늘 부인해야 돼요. 주께서 사랑하셨잖아요, 일방적으로. 이렇게 하면서 딸려가야 되는 겁니다. 저도 사랑했잖아요. 그러면 안 돼요. 말실수한 거예요. 그 실수가 본심일 수가 있는데.

주님께선 철저하게 다윗 속에 있는 그리스도 나올 때까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게 ‘까지’에요. 천국을 이스라엘을 통하면서 언약을 통해서 운반시키는데 그 운반용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자기 것만 뽑아내요. 내가 준 피만 뽑아내요. 그 피를 뽑아내다보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뭐가 되느냐? 그 십자가 앞에서 강도가 되고 세리가 되고 창기가 되고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해요. 삭개오 집인데 외부인이 자기 집처럼 일방적으로 쳐들어온 거예요. 쳐들어올 때 뭘 느끼느냐? 비로소 구원이 천국이 내 안에 이뤄진 거예요. 나는 장소 제공했을 뿐이에요. 내 안이 천국이 되면서 삭개오는 자아로부터 이별합니다. “내가 네 배나 갚겠나이다.” 이거는 남을 이용하겠다, 남한테 지지 않겠다는 것을 나는 철회하겠습니다. 내 자체가 쓰레기인데 뭘 남을 이용하겠습니까.

바로 하나가 열둘로 퍼졌을 때 이스라엘이잖아요. 하나가 열두 지파로 퍼졌을 때에 예수님 하나에 열두 사도, 열두 제자가 있을 때에 그 하나와 열둘의 관계가 이런 관계에요. 십자가로 부르시고 거기에 딸려가면서 비로소 자기가 진짜 죄인인 것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거기에 필요한 예언이에요. 갓 예언이 들어붓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오늘 본문 역대상 12장 22절,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라 하는 것은 원래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마하나임이에요. 야곱이 잠들고 있을 때에 하늘나라는 분주했습니다. 사다리가 세워지고 사다리에 왔다갔다, 왔다갔다 되게 바빠.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것 누구였어요? 천사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무슨 기능? 하늘의 천사의 기능입니다. 인간 속에선 천사의 기능이 없지요. 왜? 인간은 버림받았으니까 이미 단절돼 있는 거예요. 하늘나라와 인간은 끊어져있기 때문에 천사의 기능은 없어요. 그러면 이 이스라엘이 그때는 야곱이죠. 얍복 강가에서 야곱에게 누가 와야 됩니까? 천사가 와서 야곱 속으로 들어와야 되죠. 야곱 속에 들어온 그 천사, 오실 하늘에서 존재 이름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야곱을 뚫고 온 이스라엘.

강남강의 혹시 들어보신 분계십니까? 강남강의 끝부분에 제가 인간을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인간을 두 자로, 일본말로? 스무고개 할까요, 부산에서 많이 나는 것? 오뎅, 어묵. 인간은 어묵이라 표현했어요. 다 달라 보이지만 전체로 보면 어묵이 어묵이지 뭐 별난 어묵 있습니까? 그런데 어묵의 특징이 뭐냐? 똑같은 어묵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뭐가 달라도 달라요. 어묵이 다 다른데 그 다른 것을 어묵 사는 사람이 그걸 계산합니까? 다르다고 보지 않고 똑같이 취급해서 40개에 얼맙니까, 하지요.

야곱이 어묵이라면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관통하지요. 그러면 관통 난 어묵은 뭐로 표현하느냐? 구멍 난 어묵, 구멍 난 오뎅. 안에 관통해버린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내 자아를 형성하는 중심부를 관통하는 거예요. 관통 안 하면 심리학이 되고, 관통되면 성도가 돼버리죠. 심리연구, 정신분석 연구하는 사람들은 맨날 자기 지키기 위해서 우울증 치료하려면 뭘 하지, 이런 거예요.

뚫고 지나가면 우울증이고 뭐고 간에 지킬 게 있어야 우울증이지 날아가 버렸는데, 내 게 관통돼버렸는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육체만 껍데기만 빌려줬지 안에는 뭐가 들어있다? 이미 주님 것으로 천사가 와서 관통했잖아요. 천사의 언약, 이스라엘 요소가 관통해버렸으니까 그게 바로 겉모습은 야곱이지만 안의 내용은 이스라엘로 바뀐 것, 이게 바로 야곱언약입니다. 야곱언약 열두 지파가 확대될 때 그게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언약에서 마지막 때 왕이, 아들이 직접 와요.

그 아들은 바로 다윗이 겪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위해서 제사장이 돼요. 다윗이 사탄에 빠져서 인구 조사했잖아요. 그 죄 때문에 많은 사람 죽었잖아요. 그럴 때 마지막 다윗의 모습이 뭐냐? 바로 죄를 씻어주는 제사장의 모습, 그 과정 다윗이 겪었던 과정을 예수님이 그대로 밟았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아가 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 너무나 우리가 하는 일과 차원이 다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내 일에 주의 일이 가로막히거나 답답해하거나 갑갑해하지 않고 도리어 주의 일이 드러나서 내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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