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나무와 열매
2023년 2월 5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6:17-20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6: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6: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6:20)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6:21)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상당한 독선적으로 들릴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잘남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을 예수님 앞에서 뺄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그 일만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에 있어 부유하게 산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성공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게 바로 화근이라는 접니다. 마태복음 19:24에는,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있을 수 있다 할지라도 부자가 천국갔다는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오늘 본문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한 자들아, 너희 부로 인하여 너희들의 터가 가려지지 않게 하라”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터, 곧 바닥을 알아야 합니다. 바닥을 깨고 그 바닥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 깔려 있는 바닥을 봐야 합니다. 결국 인간이 찾고자 하는 진리의 도착점은 악마가 거주하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규명하고 안다 할지도 수시로 변하는 자아로 인하여 종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원하는 바는 한결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돈이요 타인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인기요 그리고 그 누구에게 기죽을 않은 권력자가 되는 쪽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미 끊어진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 세대에서 배우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을 때, 인간이 자신의 자존감과 의미를 지켜내느냐에 관한 것들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인간이고 싶어합니다. 그것도 절대적으로 고귀한 인간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나무의 일종으로 봅니다. 그것은 에덴동산 안에서 하나님 메시지가 담긴 두 특수한 나무를 지켜봐야 하는 자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 인간은 신경쓰지 말아야 하고 탐내지 말아야 했던 겁니다. 인간은 용도는 두 나무의 과실을 통한 하나님이 진정 원하는 것을 드러내는 용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마의 자리로 질루하고 달려가면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십니다. 그리고 그 원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 가정, 국가, 기독교, 그리고 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에베소서1:10에 나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이 자신을 독보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싶은 사는 것을 보면, 모두 기존 있는 것을 베낀 것들입니다.
술, 담배, 게임, 소망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들에서 모방한 것들로 그 내용이 채워집니다. 즉 인간이 이 세대에서 벗어날 수 없이 이 세대 정신에 지배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 더 높은 곳으로 달려나갑니다.
권력지향적인 사례가 사사기 9장에 나옵니다. 사사 기드온이 죽고 난 뒤, 아들들 가운데 아비멜렉이 아버지가 누렸던 제왕의 자리에 탐을 내어서 같은 기드온의 자녀 70명을 한꺼번에 다 죽이는데 말쩨 아들인 요담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을 새로운 통치자로 받아준 세겜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무화과 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무화과 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삿 9:8-15)
사람을 나무에다 취급하는 이유는, 열매를 얻기 위합니다. 즉 영생이란 인간에게 직접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말씀이 들어와서 형성됩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돈을 원하는 걸인에게 돈을 주지 않습니다. 사도에게 있는 것을 주시겠답니다.(행 3:16)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은 열매는 찾으시는 분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가 가차없는 그 즉석에서 저주받은 것을 보고 제자들이 놀랍니다.(마 21:18-20) 예수님께서 소경된 자를 눈을 뜨게 하면 사람의 실체를 다시 보게 합니다. ‘사람들’이 아니라 ‘나무들’로 보게 하십니다.(마가 8:24)
이처럼 인간들이 하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로 사용될 뿐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돈을 원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기 사람에게 말씀을 주시므로서 그 말씀은 그 인간 내부에 열매가 맺히는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포도나무이십니다.(요 15:1)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상징입니다. 하늘의 메시지를 담는 상징입니다. 사무엘상 9장에서 사울이라는 젊은이는 그집 재산인 암나귀를 찾으러 갔다가 자신이 영적 세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삼상 10:12-13) 성도란 예수님을 담고 있는 베일 천과 같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철저하게 자신에 대해서 무의미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새삼 자기로서 의미가 찾으면 아니됩니다. 이미 영생을 담고 사는 자라면 이제 성도의 남은 인생은 자신의 의미를 파괴하는 일 뿐입니다. 성도와의 교제와 만남이란 자신들이 아무 것도 아님을 드러내는 자리이어야 합니다. 즉 ‘자기를 버리는 용로로 하나님께서 성도를 귀하게’쓰십니다. 허무를 아는 자만이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빌 4:11-1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우리의 의미를 늘 부셔주시는 주님이 계심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0강-디모데전서 6장 17-21절(나무와 열매)230205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6장 17-21절입니다.
디모데전서 6:17-21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사도바울의 말은 항상 이렇게 건방지다 할까, 독단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말한 것 외에는 다 헛된 변론이고요, 내가 말한 것 외에는 다 망령된 지식이라고 아주 단언합니다. 그리고 “내가 말한 데서 벗어나게 되면 너는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내가 말한 것에만 은혜가 주어지고 내가 말하지 않은 것에는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자신감입니까?
사람이 사람보고 언급하면서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왜 사도는 이렇게 할 수 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사도로 세웠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말해놓고서는 자기는 빠져버리고 자기 뒤편에 있는, 자기 뒤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 그게 ‘터’라고 되어있어요, 터. 터가 있는데 그 터가 이 세대에서는 헛된 것들로 많이 가리워 있다는 거예요. 오물 같은 것, 때가 끼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는, 내가 말한 것은 우리들의 터와 영생의 터, 여기에 생명의 터라고 되어있는데 참된 생명의 터와 직결되지만 내가 달리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생명을 가리는 그런 망령되고 쓸데없는 것들로 가려지고 흐려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사도바울보고 ‘왜 우리의 지혜와 지식은 진짜 무시해 버리고 네가 뭔데 네 것만 옳다고 우기느냐?’라고 이야기한다면 요즘 말로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설명서거든!” 딱 그거예요. 그걸 가지고 사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는 설명서에요. 사도가 십자가 지지를 않았어요. 사도는 어떤 행위를 해도 우리에게 구원의 터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터가 아니고 그냥 설명서다.’
그런데 이 설명서가 친절하게 설명한다고 해서 알아먹는 설명서가 아니에요. 이 설명서는, 사도 됨은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직수입되었기 때문에, 그냥 주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먹는지 못 알아먹는지, 지금 예수님은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설명서를 제시해놓고 이 설명서가 이해되느냐, 라고 묻는 거예요.
‘이 설명서가, 네 눈에는 이 사도가 굉장히 독선적이고 독단적으로 보이지? 그런데 그 주장이 납득이 되느냐? 네 맘속까지 침투가 되더냐?’를 우리보고 묻는 겁니다. ‘사도의 말을 거부하는 것은 곧 나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일을 하신 거예요.
그러면 이 사도가 하는 이야기, 오늘 본문 내용이 그 하나님의 생명, 영생이라 할 수 있어요. 이 생명의 터, 생명의 터를 가리는 것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 바로 재물에 있다고 보는 거예요. 돈에 있다고 본 겁니다. 17절에 보면.
그래서 지금 사도는 이 시대의 부자들을 굉장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걱정하느냐 하면, ‘너는 너에게 필요한 존재냐, 아니면 예수님에게 필요한 존재냐?’를 묻습니다. 이 세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이란 이런 뜻이에요. 부자가 있는데 이 부자를 창공으로 덮는 게 있어요. 덮는 게 뭐냐 하면, 이 세대의 분위기에요, 상황이에요, 사고방식이고. 이 세대 사고방식에서는 부자 되었다는 것이 성공한 것으로 그렇게 간주 되는 거예요.
그러면 터가 되시는 예수님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터가 되시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은 “너를 위해서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설명서를 보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설명서를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서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이렇게 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붙여지고 있어요. “집에 돈 많은 것도 죄입니까?” 분명히 언급이 될 수 있지요. 뭐 우리 교회하고 아무 상관도 없지만, 좀 그런 죄 좀 지어봤으면 좋겠다만.
“집에 돈 많은 것도, 집에 금괴가 많은 이것도 죄입니까?”라고 항의를 하게 되면 “이 세대가 어떤 세대인지를 네가 염두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막 나온다.”는 겁니다. 뭐냐 하면, “집에 돈이 많아? 여보 우리 집에 돈이 너무 많은 것 같아. 그러면 영생의 터 다 가리잖아. 아, 이 어찌할꼬!” 이것은 미쳤지요. ‘집에 돈이 많으면 영생의 가치가 그만큼 위축되고 축소되는데 어떡하면 좋아?’ 이렇게 걱정하는 사람 여러분 옆에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세대의 특징은 뭐냐? 돈이 많으면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도록 되어 있어요. 반대로 돈이 없으면 불안감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와서 말씀을 열심히 지키고 오늘도 이 말씀대로 열심히 살려고 하는 이유가, 이게 불안해서 그래요. 공포스러워서 그래요. 이 세대에서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내게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돈을 주시겠지.’ 하는 그런 노림수가 있기때문에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사도님, 말씀만 하세요. 다 지키겠습니다.’ 왜? 그러면 이 세대가 요청하는 돈이 나에게 풍족하게 있을 수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만약에 돈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시다. 주머니에 돈 한 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다음 질문은 이렇게 돼요. “이 사람이 영생을 얻고자 하겠습니까, 돈을 얻고자 하겠습니까?” 한 푼도 없다면. 그건 묻는 내가 잘못이지요. 돈을 얻고자 하겠지요. 따라서 이 말은 뭔 뜻이냐? 돈이 있든 없든 인간은 이 세대에 속했기 때문에 돈을 원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뭐냐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이미 내가 정해놨다 그 말입니다.
그게 이 세대에 속했다는 증거에요. 이 세대 자체는 돈만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돈을 원하고 있지만, 내 내부에서는 돈을 원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하도 영생, 천국, “나중에 네가 부자 되어서 지옥 갈래? 부자가 지옥 가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지 아느냐? 부자가 천당을 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갔다는 그런 소문보다 더 귀하겠다.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했다는 그런 소리는 혹시 들릴지 모르지만 부자가 천당 갔다는 소리는 그보다 더 확률이 낮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잖아요.
그래서 하도 자꾸 영생 이야기하고, 나중에 지옥 가면 안 되고 천국 가야 된다고 하니까 이 말씀에 대해서 그걸 일단은 억지라도 받아들이기를 원하지만 받아들이는 그 모습 자체가 공포스러워요. 억지에요. 이걸 우격다짐이라고 하는 겁니다. 억지로 믿는 거예요, 억지로. 속마음은 실은 돈을 좋아하면서도 영생 놓치면 인생 쫑난다, 그게 걱정되어 가지고, 그게 걱정스러워서 예수를 믿고, 교회 나오고 천당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씀대로 돈 안 좋아하고 주님 좋아할 테니까 영생 주세요. 그리고 영생 주시면……’, 일단 챙길 것 챙겼으니 ‘……그다음부터는 돈 주세요.’ 이렇게 뒤에 노골적으로 나오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영생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인간에게, 돈을 좋아하는 인간에게 영생을 줘봐야 이것은 개돼지한테 보석 던지는 것하고 똑같아요. 튕겨 나와 버려요.
그러면 뭘 주느냐?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줘요. ‘돈이냐 영생이냐?’ 할 때 사람들은 자기 상식상 ‘돈보다 영생이 더 귀하지. 나 죽어서 천당 꼭 가야지.’ 이렇게 생각해서 돈과 영생, 이렇게 나란히 대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성경은 돈과 영생을 언급하면서도 뭘 하느냐 하면, ‘돈이냐 말씀이냐?’를 먼저 줘요. 돈이냐 말씀이냐.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사도행전 3장 6절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3장 6절에서 앉은뱅이 거지가 앉아 있을 때 사도들이 가서 아주 섭섭한 말을 해요. 뭐냐 하면, “네가 지금 돈을 구걸하고 돈을 원하지만 나한테는 돈 없다.” 서울역 지하도에 있는 노숙자에게 다가가면 “아저씨, 돈 좀, 담뱃값, 술값 좀 주세요.” 하잖아요. 그때 “나는 당신에게 줄 돈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꺼져라!” 대번 나오는 게 그거예요.
‘내가 네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겠다.’ 이게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올 때 주께서 여러분에게 주십니다. 주실 때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주께서는 절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이 세대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어두움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아요. 인간은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누군지를 모르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내가 뭘 원하는지를 압니다. 이 세대의 사람들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해요. 술, 담배, 게임, 도박, 이거 왜 합니까? 남들이 하니까 하는 거예요.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간단합니다. 인간은 모방되고 모방하는 존재. 인간은 무엇인가? 도 닦지 마세요. 산속에 들어가서 기도하지 마세요. 뻔합니다. 인간은 모방하는 존재예요. 교회 와서 옆에서 기도하니까 같이 기도하고, 옆에서 찬양하니까 같이 찬양하고, 전부 다 모방이에요. 옆 사람이 믿는 척하니까 같이 믿는 척하는 거예요.
인간은 모방하는 거예요. 나의 자존감? 무슨 모방 하면서 자존감이 있어요? 다 베꼈는데. 다 베꼈는데! 무슨 자존감입니까, 논문 다 베꼈는데. 논문 다 베껴서 박사 되어서 문제 된 사람 있잖아요. 김건희? 아니 홍진경. 거기서 거기인지, 누가 더 베꼈는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모방하면서 살아가게 되어있어요. 자기 것 없습니다. 자기 것도 없으면 내 존엄성과 내 자존심은 어디서 찾습니까? 너 베꼈잖아. 네 인생 다 베꼈잖아. 베껴놓고 내 자아의 가치를 논해요? 거기서 거기인데요? 우리는 못 빠져나갑니다.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사도,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말씀입니다. 뭐냐 하면, “내게 있는 게 있는데, 나는 지금 금 없어도 사는데 너는 지금 금과 은을 달라고 해? 네가 돈을 찾는 것은 이 세대가, 서로가 서로를 베끼는, 내 인생이 아니고 이미 살던 사람들의 인생을 복사해서 살기 때문에 돈 없이는 못산다고 그것이 진리가 되어서 유통되고 있는 사회”거든요. “나는 그거 너한테 안 준다. 내게 있는 것 줄게.” 내게 있는 그게 뭐냐? “예수의 이름, 주의 이름을 너에게 줄게.”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래서 성경이 어려운 거예요. “은과 금,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주지 않겠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 너한테 줄게.” 그건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에요. 로마서 10장에 아주 구체적으로 나와 있어요.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여기 영생,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 나오거든요. 8절에 보면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말씀이다. 금이 아니고, 은이 아니고, 주식이나 펀드가 아니라 우리가 전하는 것은 주식 대박 나는 것이 아니고, 부동산값 오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말씀을 너에게 주는데 그 말씀을 줄 때 반드시 전제조건이 뭐냐?
“네 속으로 돈 좋아하잖아. 내가 돈 안 준다.” 그걸 먼저 전제로 깔아줘야 돼요. “돈 안 주고 말씀 줄 게.” 하는 거예요. 영생은 생각하지 말고요. 영생? 그것은 너한테 말도 안 되지요. 영생은 말이 안 돼요. 왜냐하면 우리 조상이 영생에서 쫓겨난 입장이기 때문에. 영생 달라고 할 수 있는 권한도 없고요, 꼭 줄 이유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 줄 이유도 없습니다.
주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말씀 안에서 네가 네 본색, 네 본래의 자리가 영생 얻을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 말씀 안에 담겨 있습니다. 나는 구원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 안에 담겨 있어요. 그 말씀을 주는 거예요. 말씀이 덮쳐버립니다. 말씀이 덮쳐버리면 돈도 챙기고 영생도 챙긴다는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주장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할 때 주의 이름 안에 말씀의 완성된 채 주의 이름 안에 들어 있어요. 주의 이름. 사도바울 이름 아닙니다. 사도바울 이름 부른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목사 이름 부른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청소기가 왔는데 설명서가 따라오잖아요. 그런데 그 설명서가 청소해주는 것 아니잖아요. 청소기가 청소하지요. 설명서는 설명서일 뿐이에요. 설명서는 자기를 지향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말고 다른 분을 지향하는 거지요. 사도가 설명서라면 오늘날 모든 성도가 설명서에요. ‘내게 들어 있는 것은 나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이다.’ 이걸 내세우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이런 거지요. 동상제막식 할 때 그때까지는 사람들에게 안 보여주려고 천으로 커튼처럼 위에서 아래까지 가리잖아요. 사람들은 궁금하지요. “홍대 교수가 제작했단다.” “유명한 조각가가 했다는데? 아, 궁금한데?” 지역 유지들 다 모여 있고, 행정관료들 다 와서 폼잡고, KBS 카메라 돌아갈 때 제막식에서 동상은 천으로 가려져 있다는 말이지요.
그 천을 한꺼번에 스르륵 벗기면, 좍 벗기면 그때 동상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때 벗겨지는 천, 한시적으로 걸쳐 있던 그 천, 비바람 다 맞고 있는 천, 그게 성도 아닙니까? 그게 성도에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터, 그 터를, 이 세대의 종자라 할 수 있지요, 이 세대의 사람이 주님의 생명의 터를 깔고 앉은 거예요. 이걸 가리고 있었던 겁니다.
특히 누가? 부자가요. 재물이 많은 사람들이. 재물이 많으면 이 세상에서는 사람 취급받아요. 내가 사람다운 사람, 가장 이상적인 사람, 성공한 사람으로 대우받습니다. 그래서 문제인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을 인간이라 하는 것은 마귀가 그렇게 하고요. 인간은 나무입니다. 인간은 나무의 일종이에요.
인간은 주님의 상징입니다. “휘날리는 태극기는 우리들의 표상(表象)이라~” 할 때 그 태극기가 우리나라가 아니잖아요. 태극기를 상징이라 해요. 표상, 상징, 인간은 하나님의 상징물에 불과한 겁니다. 인간은 인간이라고 이야기하는 이것은 이 세대가 가르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도를 통해서 바닥을 보게 하는 거예요. 뜯어내서 그 바닥을 보게 하는 겁니다.
도대체 나라는 이 존재의 바닥에 뭐가 있는지 그 바닥을 뜯어냈으니까 그 바닥의 바닥에 뭐가 있고, 그 바닥의 바닥에는 뭐가 있느냐? 그걸 본성적 자리라고 하는데 본성적 자리, 그 본성적 자리는 인간들이 어떻게 찾아가고 있느냐 하면, 내가 뭘 원한다는 것, 내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날마다 변하기 때문에 종잡을 수 없어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있어요. 한결같이 원하는 게 있습니다. 그건 뭐냐? 바로 마귀가 계속해서 인간에게 욕망을 자극해서 잡아당기고, 결국은 마귀가 인간을 유혹해서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까지 계속 잡아당기는 겁니다. 그 악마의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진 자리가 악마의 자리에요. 그 자리로 악마는 유혹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뭘 원하느냐? 돌이 떡 되게 하는 것과 두 번째, 네가 사람들에게 귀한 존재, 누구보다 뛰어난 영웅적인 존재로 대우받는 것.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바로 마귀와 함께 세상 권력을 행사하고 누리는 것, 권력을 쥐는 것. 이것은, 이 악마의 유혹은 회사, 직장, 가정, 어디에도 안 통하는 데가 없어요.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것은, 이 세대에 속한 인간이 원하는 것은 실은 마귀가 끌어당기는 낚싯줄이라 할 수 있어요. 계속 끌어당기지요.
‘너의 자리는 나처럼, 악마처럼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인간으로서 절대적 인간 되는 것이 너의 소망이야.’라고 그렇게 유혹하는 거예요. 이게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본능입니다. 마아슬루(Abraham Harold Maslow, 1908-1970)의 욕구설 다섯 단계에서 제일 높은 단계의 욕구가 뭐냐 하면, 내가 절대적인 내가 되는 거예요. 그걸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해요.
인간의 욕망 가운데 자아실현, 내가 어디까지 초월할 수 있느냐, 나의 한계는 내가 정한다는 거예요. 나의 한계는 내가 정한다. ‘네가 그것까지라고 나에게 힐난하지 마라. 나의 한계는 나도 몰라. 내가 어디까지 높아질지는 나도 감 못 잡겠어. 나는 갈 때까지 가 볼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이게 이 세대에 통용되는 처세술입니다. 잘 팔리는 책 내용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가지고 리스트를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 리스트가 있어요. 제가 많이 하지 않고 다섯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
첫째, 하나님은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가정을 원하지 않아요.
세 번째, 국가를 원하지 않습니다.
네 번째, 기독교를 원하지 않아요.
다섯 번째, 나를 원하지 않습니다.
차(車) 떼고, 포(包) 떼고, 다 빼버리고 마(馬), 상(象) 다 빼고 장기 둘게 없네요. 주님이 원하는 것은 뭐냐? 주님이 원하는 것은 에베소서 1장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나의 나 됨, “나는 ( )이다.” 곧 “I am …….” 주어로 시작해서 그다음에 서술어, 목적어, 그 목적어 구성, 문장구성에서 ‘나는 ( )이다.’ ‘너는 누구야?’ ‘나는 이런 사람이다.’ ‘너는 또 누구야?’ ‘나는 이런 사람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라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요한복음 1장에서 “너 뭐야? 선지자야?” “아니야.” “너 메시아야?” “아니야.” “네가 제사장이야?” “아니야.” “너 뭐야?” “나, 아니야.” 나는 ‘누구의 소리’예요. 상징이에요. 누구의 소리, 누구를 드러내기 위해서 잠시 한시적으로 그분에 의해서 쓰임 받는, 하나의 동상제막식 전에 동상에 걸쳐 있던 하나의 천으로 만든 베일 같은 거예요. 장막 같은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것 다시 말씀드리면, 부자한테 걱정해서 하는 이야기가, “너는 너에게 필요한 존재냐, 아니면 예수님, 나에게 필요한 존재냐?”를 묻는 겁니다. 네가 너한테 필요한 존재라면 지금 마귀한테 속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돈이냐 영생이냐’는 우리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해당되지 않는 것은 알겠는데 그러면 영생은 어디 있느냐, 어떻게 주어지느냐? 영생은 요한복음 17장 2절에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영생 나오지요? 영생은 누구 소관이냐, 누가 전문가냐 하면 예수님이 전문가예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다 마감될 때 주어지는 것이 영생입니다.
빠징꼬 있지요. 저는 한 번도 안 해봤어요. 한 번도 안 해봤는데요. 왜냐하면 게임도 모방이기 때문에 남 하는 것 하기 싫어요. 그것도 모방이기 때문에 하기가 싫은데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레버 잡아당길 때 운 좋으면 구슬이 확 쏟아지거든요. 그럴 때 그 구슬이 장애물에 부딪혀서 튕기고 또 튕기면서 충돌할 때 사람 손이 충돌하라고 뭘 한 게 아니고 그냥 우연히 당겨보니 우연히 자기 앞에 쏟아진 거예요.
그 충돌하는 모든 절차와 순서, 이것은 이미 당기는 사람 손을 떠난 거예요. 영생이라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인간의 손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일괄적으로 예수님이 알아서 다 해놓고, 그게 일괄해서 완수가 될 때 완성이 되어서 오는 거예요. 완성이 안 되면 미리 오는 법이 없어요. 다 깔끔하게 이루었다, 가 될 때 그때 우리에게 그냥 주는 게 영생입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영생을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고 그게 요한복음 17장 9절에 나오는데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가 따로 있고, 따로 있는 자에게만 영생이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따로 있는 자에게만.
여러분이 결혼식 하고 난 뒤에 밥 먹으러 가잖아요. 그때 식당 입구에서 “어서 식사들 하세요.” 하지 않아요. 부조 낸 사람에 한해서 식권 줍니다. 십만 원 부조하고 제발 부부가 가서 식권 두 장 받지 마세요. 식사비 5만 원 넘습니다. 혼주 손해나요. 적어도 20만 원은 내놓고 식권 두 장 받으면 그 정도는 반타작은 되지요.
영생 줄 자, 천당 가고 싶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영생 줄 자는 어떻게 결정하느냐? 그것도 주님한테 일임되어 있어요, 주님한테. 그러니까 여기서 종교라는 것은 아무 맥을 못 추지요. 종교라는 것은 거짓이지요.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게 구원해 달라고 외치는 게 종교잖아요. 천당 갈 자격도 없는 게 천당 보내 달라고 앙탈 부리는 게 종교고.
그러니 이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악마의 속임수냐 그 말이지요. 종교라는 것 그리고 과학, 물리, 철학, 이런 학문이 왜 생기는가? 본인이 사람인 척 하기때문에 생긴 거예요, 사람인 척 하기때문에. 인간, 사람이라 하는 것, 사람은 인간이고 인간은 사람이라 하는 것은 세상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고 학문에서 나온 거예요.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쳐다보면서 규정한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규정하는가? 마가복음 8장 24절, 제가 언젠가 몇 년 전에 이 대목을 보면서 굉장히 놀랐어요. 새삼스럽게 알았던 게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 24절, 이 세상, 이 세대에 소경이 있었어요. 참고로 소경은 이 세대에서 볼 때 저주받은 겁니다. 그러니 소경 되었다는 말은, ‘너는 우리 동네 같이 안 살아도 괜찮아요. 그냥 대충 살다 죽으세요. 당신 죽어도 아무 서러워 할 사람 없습니다.’ 하고 짐이 되는 존재가 소경입니다.
그 소경에게 주님 찾아와서, 이 세대에서 저주하고 이 세대가 추방하기를 원하고 이 세대에서 같이 살지 않기를 원하는 소외된 자 아웃사이더지요,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찾아가서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뜨게 합니다. 소경의 눈에 침을 바르면서 “무엇이 보이느냐?” 할 때 소경이 하는 말, 충격이었습니다. “사람이 보입니다.”가 아닙니다. “나무 같은 것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이, 나무 같은 것이 보인다는 말 한마디에 구약부터 신약까지 다 풀려 버렸어요. 왜냐? 왜 주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을까요? 열매가 없기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을 위한 나무로 다루십니다. 심지어 예수님마저 그렇게 다뤘어요. 요한복음 15장에 “나는 포도나무요” 나는 포도나무요.
비로소 그동안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 납득이 되었어요. 뭐냐 하면 에덴동산에 왜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중심에 서 있느냐 하는 거예요. 주변에 나무가 많았겠지요. 하지만 중심에는 독특하게 두 개의 나무가 서 있어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인데, 생명나무와 선악과에 대해서 아담과 하와는 그 자리에 끼지도 못해요. 쳐다보기만 하는 겁니다.
그 나무의 취지에서 흘러나오는 지시와 명령을 따르는 대상일 뿐이에요. 인간을 위한 선악과가 아니고, 인간을 위한 생명나무가 아니라 생명나무가 지닌 그 의미를 위해서 인간은 보조로 거기 서 있는 겁니다. “네가 선악을 아는 나무과실을 따먹지 마라.” 이 말은 “신경 쓰지 마라. 선과 악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쓰라고 나는 너를 인간으로 만든 게 아니다. 만약에 네가 선과 악에 대해서 신경 쓴다면 나는 너를 인간으로 다루지 않고 흙으로 다루겠다.”는 겁니다. 흙으로 다루겠다.
울산 강의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어릴 때는, 여자를 예로 들면, 어릴 때는 자기를 공주로 여기다가, 나중에 한 3, 40대까지는 자기를 여자로 생각하다가, 40 넘어 50대 들어가면 사회에서 그 사람을 여자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봅니다. 사람으로 보다가 드디어 한 60 넘으면, 60대까지도 봐줄게요, 70 넘으면 괴물로 봅니다. 본인이 인정해요. 그리고 90 넘으면 흙이 돼요.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요. 아직도 물론 여자이기를 원하는 나이대가 있기는 있어요. 여기 있는데 조금 지나면 여자에서 보통 사람으로 바뀝니다. 매력도 없고 그냥 사람이에요. “저를 여자로 대해주세요.” 70 넘은 할머니가 그런 소리 할 바가 안 되지요. 약간 말을 실례한 것 같은데요. 사람 죽고 나면 장례 치를 때 방법이 있어요.
우선 매장이 있어요. 그다음에 화장이 있습니다. 수목장도 있어요. 요새는 퇴비장도 있습니다. 죽은 자를 소환하는 거예요. 퇴비로. 왜냐? 친환경적이라서. 사람시체에 꽃잎, 짚, 흙을 같이 섞어 넣습니다. 그래서 그게 퇴비가 되면 그걸 유족에게 돌려줘요. 그러면 유족은 그걸 가지고 우리 아버지의 퇴비라 해서 뒷마당에 뿌려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거예요. 섬뜩하지요. 최근 미국에서 그걸 인정하는 주들이 늘어난다는 거예요.
악마가 인간으로 하여금 유혹하는 가장 큰 힘, 이미 나무와 헤어진 입장에서는요, 이미 우리는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는데 자꾸 악마는 우리에게 의미로 발목을 잡아요. 사는 게 무슨 의미 있다고 자꾸 우기면서 발목을 잡아요. 사도가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인간이, 성도가 살아가는 것은 이 땅에 의미가 없음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사도가, 그 설명서가 말하는 거예요.
빌립보서 4장 11-13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게 뭐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나 자체로서 ‘나는 무엇이다.’ 그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전도서에서 이걸 분명히 했어요. 1장 2절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걸 즐기라 그 말이지요. 이걸 즐겨야 돼요. 왜냐하면 주께서는 우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나무로 사용했을 때 우리의 열매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7-19절에 보면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누구의 권한으로? 사람을 나무로 간주하신 그분의 권한으로 “너 열매 없잖아.” 해서 열매 없다는 이유 때문에 나무를 찍어서 불에 던집니다.
이걸 자세히 이야기한 것은 요한복음 15장에 나오지요. “나는 포도나무다. 만약에 열매가 없으면 그 가지는 불사르게 된다.” 역시 요한복음 15장 6절에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어요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이런 것을 우리가 이해를 하려면 내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하지 마세요. 제가 여러분을 말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마세요. 진짜 말리고 싶어요. 제발 말씀대로 살지 마세요. 왜냐하면 말씀대로 살면 공포를 느낀다니까요? 감사함이 나오는 게 아니고 뭔가 ‘말씀대로 살아야 내 형편이 핀다.’ 자꾸 어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있어요.
공포가 있고 두렵다는 것은 내가 지키고 싶은 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나는 사람이고 싶은 거예요. 인간은 사람 아닙니다. 그냥 나무에요. 열매의 유무를 따지는 그냥 나무에요. 말씀으로 그걸 캐내는 거예요, 말씀으로. 참지 말고 캐내야 돼요. 케토톱이에요, 케토톱. 참지 말고 캐내야 돼요.
이 나무에 대해서 구약에 아주 상세하게 너무나 섬뜩할 정도로 잘 소개한 것이 사사기 9장 7-14절에 나옵니다. 사사기 9장 이야기는 기드온이라는 영웅적인 사사가 있었는데 그 아들 아비멜렉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머지 형제들 70명 다 죽이고 자기가 대장질했어요.
그럴 때 그중 한 사람이 빠져나갔어요. 형제들 70명 다 죽일 때 마지막 아들 하나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가서 나무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심산에 올라갔거든요. 그리심산에 올라가면 그 아래 세겜이 보여요. 제가 거기 가봤어요. 그리심산과 에발산이 있는데 그리심산은 축복산, 에발산은 저주산, 그 골짜기에 세겜이 있어요.
지금은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입니다. 거기다 현재 유대인들이 정착촌을 만들어서 범위를 넓히고 있어요. 치안으로 지배하고 있는 입장에 있지요. 그곳을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라 합니다. 요담이 그리심산 꼭대기에 올라서 밑을 보면 세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8절에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이렇게 해서 나무들이 자체적으로 왕 되는 나무를 뽑는데 감람나무에게 “왕 될래?” 할 때 “나는 너희들의 왕이 되기 싫어. 왜? 나는 기름 짜는 일에 바빠.” 나무는 나무를 말하는 게 아니고 ‘나’에서 나오는 열매를 가지고 나의 본체를 이야기한다는 뜻이지요.
그다음에는 무화과 나무에게 “너는 왕 될래?” “나는 왕 안 해. 왜? 나는 무화과 열매 맺는 게 중요하지 나는 그 나무들하고 상대할 필요가 없어. 그럴 여력이 없어.” 그다음에 세 번째 포도나무한테 가서 “너 왕 될래?” “아, 싫어. 나 포도나무 열매 맺기 바빠. 나 왕 안 될래.”
마지막에는 가시나무에게 가요. 가시나무는 열매가 없어요. 가시나무에게 “너 왕 될래?” “그래. 왕 될래.” 이래서 가시나무가 왕이 되어서 이것은 가는 곳마다 사람을 다 찔러서 힘들게 하고 괴롭혀요. 가시가 있으니까. 기껏 내 몸이 하는 기능이 남 힘들게 하는 기능, 그것만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담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사람 잘못 골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드온의 아비멜렉이라는 왕자가 권력을 잡기 위해서 70명이나 되는 형제들을 다 제거했을 때 왜 사람들이 그 왕자를 왕으로 인정했느냐 그 말이지요. 그렇게 폭군적이고, 횡포적이고, 그렇게 폭력적인데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했느냐? 그것은 본인들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 한 거예요.
성경에서, 말씀에서 그런 것을 언급할 때 다 우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무엘상 8장 19, 20절에 그게 나와 있습니다.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필요 없습니다. 당신들에게 왕이 있어버리면 그 왕의 국가가 되고 그 국가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국가가 아닙니다.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아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데 같이 원할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해도 듣지를 않아요. 악마가 그만큼 잡아당기니 말을 들을 필요가 없지요.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말씀이 어떻게 나무에 불과한 우리, 그것도 불에 살라야 될 무화과나무같이 저주받아 마땅한 우리 나무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 어떤 절차로, 영생은 우리하고 동떨어진 것이고 해당 사항은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느냐, 그걸 아셔야 되겠지요.
로마서 10장 14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그다음에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다음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꾸 지금 내게 은과 금은 없는데 내가 너한테 줄 것은 영생이 아니고 말씀을 준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 전하는 자를 일부러 보내셔서 전파하는 가운데 말씀이 흘러들어와서 그 말씀이 너희 속에 말씀 자체가 스스로 성과를 거두면 그 거두어진 성과가 바로 영생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좀 억지 같은 예지만요, 이런 무리수를 쓸 수밖에 없는데 좀 억지 같은 예지만, 어린 애가 밥을 먹다 실수로 풍선을, 바짝 마른 풍선을 삼켰다. 밥 먹다, 장난치다 그만 고무풍선을 삼켰어요. 이것은 동화 같은 이야기고,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고 제가 지어낸 겁니다.
그 고무풍선이 위 속으로 들어갔는데 숨을 쉬니까 위 속으로 숨이 들어가는지 그건 모르겠고, 하여간 숨을 쉬니까 위 속에서 고무풍선, 납작한 고무풍선에 바람이 들어오니까 그게 부푸는 거예요. 내게 들어온 말씀이 자동적으로 그 안에서 부풀어서 그 안에 영생 들었다. 억지지요. 억지 맞는데 맞아요. 억지 맞는데 하나님의 방식이 그 방식이에요.
말씀을 집어넣어 놓고 말씀이 스스로 영생이 되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영생이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으로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껍질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약에, 풍선 이야기는 아니니만 인간은 나무입니다. 구약에서 선지자가 그런 말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너희가 무화과나무인데 열매가 없구나. 하나님께서 너희를 멸망시키리라.”
아까도 마태복음 언급했지요. 21장 18, 19절에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보세요 무화과나무의 개인적인 자존감, 일체 주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이렇게 다루시는 것은, 우리가 무화과나무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놀란 것은 누구냐? 제자들이 놀라버렸어요. “이 무화과나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저주하십니까?” 이렇게 된 거예요.
주님 입장에서는 제자들을 크게 나무라고 싶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제자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자기가 선악을 알아버린 상태기 때문에 선악을, 선악에 대해서 관심끄고 신경 쓰지 말아야 되는데 이미 악마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을 알아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은 지시대로만 따라야 되는데 그만 자기가 자기에게 지시를 내리는 이런 해괴망칙한, 주께서 도저히 용납 못 하는 그런 존재가 된 겁니다.
선악을 알아버렸으니 거기서 뭐가 구성됩니까? 의미가 구성되는 거예요. 이건 착한 짓, 이건 예쁜 짓, 이것은 나쁜 짓, 본인이 본인을 평가해버리는 거예요. 그래놓고 ‘내가 선악을 아니까 나도 사람 구실을 한다.’ 자꾸 사람이라고 우기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인간은 무의미합니다.
자, 그렇다면 말씀이 인간을 어떻게 하느냐? 나무인데 그다음에 나무만 동원하는 것이 아니고 동물까지 동원해요. 나무와 동물의 차이점은, 나무는 고정되어 있지만 동물은 움직이는 겁니다. 사무엘상 9장 2, 3절에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자, 지금 암나귀는 나무가 아닙니다. 식물이 아닙니다.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움직입니다. 암나귀가 움직이죠. 그 암나귀가 움직일 때 사울은 아무 의미도 없이 멋도 모르고 자기 암나귀를 찾으러 갑니다. 왜 찾으러 가는가? 자기 재물이고 재산이기 때문에 이 세대는 재산 없이는 못 삽니다. 돈 없이는 못살아요. 이거 우리가 충실해야 돼요. 절대로 이것 부정할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인간은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돈이 자기의 바닥이에요. 최우선이고 돈이 있어야 사람입니다. 돈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너희 교회 몇 명이냐?” 할 때 “우리 교회 몇 명이다.” 하지 말고 “몇 그루다.” 해야 돼요. “우리 교회 한 열 그루 된다.” 이렇게요. 그들이 헌금을 해도, 봉사를 해도 나무에요. 중요한 것은 열매고, 그것도 본인이 한 열매가 아니에요. 각자는 설명서에 불과하니까. 안에서 주님께서 하신 열매, 그게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에게 준 겁니다.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암나귀를 찾으러 가요. 그런데 그 암나귀에 메시지가 담겨 있는 줄을 몰랐어요. 메시지, 하늘의 정보, 하나님의 뜻이,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 암나귀 찾다가 사울이 왕 됩니다. 그 이야기가 사무엘상 9장, 그리고 10장, 계속 가요. 나중에 어디까지 가느냐? 암나귀 찾다가 선지자 집단 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사울이 막 예언도 하고,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도 하고, 방언도 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평범한 사람인데 하나님의 하늘의 메시지가 담겨버리니까 낙타에 짐을 실은 것과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메시지의 전달체, 운반체가 되고 만 거예요. 사울이. 그 사울이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방언을 할 때 본인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아니 몰라도 괜찮아요. 본인이 알 필요 없습니다. 그냥 나무에 불과하니까, 말씀을 전달하는 거니까.
왜냐하면 본인은 무의미하니까요. 무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은, 성도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가난에도 처할 줄 알고, 심지어 목숨이 달아나도 그걸 알 필요도 없고 하여간 선과 악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어요. 이것은 착한 짓이고, 이것은 나쁜 짓이고, 알지 마세요. 괜히 남들이 사람인 줄로 오해합니다. 허무한 자만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습니다. 허무한 자만이 허무를 즐기세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아야 돼요.
처음에는 암나귀라는 그 재산, 삼촌이 이야기한 그 우리 집 재산, 귀한 재산 끝까지 찾아내서 재산 하나라도 잃지 않아야 된다, 찾기에 나서요. 계속 찾는 거예요.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내가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 한다. 독자적인, 나다운 나로서 독립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 유산 미리 당겨달라고, 가불해 달라고 해서 유산 다 날렸잖아요.
그럴 때 그 탕자가 집에 돌아오면서 뭘로 바뀌었습니다. ‘나는 무엇이다’에서 그 문장 자체가 삐~! 이게 아무……, ‘나는 무엇이다 = 허무’ 제로에요. 나는 아무리 살아도 영(0)이 돼요. 독자적으로 있을 때는 영(0)이 되어버려요. 사울이 암나귀 찾으면서 점점 더 사무엘 세계로 들어갑니다. 사무엘 세계는 묵시의 세계에요. 묵시의 세계란, 언어가 나타났지만 상징이라는 언어 말고 그 언어를 제공한 말로 표현되지 않는 다른 세계가 묵시의 세계라고 합니다.
무슨 말은 하는데 인간들이 들으면 무슨 소리 하는지 못 알아듣는, 하나님의 신이 임했을 때 나오는 이걸 성경에서는 예언이라고 되어 있어요. 사무엘상 10장 6절에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런 소문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다.
11, 12절에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그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이것은 무슨 뜻이냐? 이 세상은 아무 허무한 동질의 바다에요. 뭘 해도. 그런데 인간은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쉬지 않고 찾습니다. 자기의 욕망을 따라서 찾는데 그 찾는 게 구체적으로 뭐냐? 돈과 인기와 권력이에요. 끊임없이 계속 찾고 찾습니다.
사람은 돈 없어도 버틸 수 있지만 사람이 허무하면 못 버텨요. 사람이 허무한 것을 메우기 위해서 뭘 하느냐 하면, 대화를 시도해요. 말을 시도해요. 누구를 붙들고 전화하든지 아는 사람 붙들고 내 사정, 이야기 좀 들어봐라, 내게 이런 일이 있었단다,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공허해서, 너무 허해서 그래요. 허하면 흑염소 좀 잡숫든지. 너무 속이 허해서 누굴 붙들어야 돼요.
그렇게 붙들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이야기해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내 말 좀 들어줘.’ 이 대상을 내가 물었다는 뜻이에요.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아픔을 들어달라. 그런 대상이 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정신병 의사가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요. 골치 아파요. 잘 안 듣습니다. 시간 재고 15분 만에 끝내요. 그런데 그것 말고 다 귀찮아하는 사람은 약물 처방해 주고 집에 보내버려요. 몇 달 가도 낫지도 않아요. 인간이, 가족이 중요하다는 것이 뭐냐? 이야기 들어달라고 하는 거예요.
남편들이 술 먹고 들어와서 깽판 치는 게 내 이야기 들어달라고 하는 거예요. “직장에서 잘릴 뻔했다. 내 이야기 좀 들어달라.” “시끄럽다. 발이나 씻고 자라.” 막 화내고, 난리 피우고 하지요. 자는 애 다 깨워서 했던 소리 또 하고 하는 이유가, 자기가 자기한테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이런 의미가 있는데 남들이 안 알아 준다는 거예요. 진짜 지난번 설교처럼 환자입니다. 전부 다 환자들이에요.
이미 우리의 의미는 내 안에 들어오신 분에 의해서 결정 났어요. 우리는 그냥 그분을 전달하면 돼요. 의미 있으면 안 돼요. 그러면 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미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남아 있는 것은 뭐냐? 스스로 자기를 파괴하면 돼요.
이거 성도는 굉장히 쉽습니다. 나의 의미를 다 쪼개는 거예요. 부수는 겁니다. 망치를 들고 나의 잘난 인생, 나를 다 깨는 거예요. 이게 뭐냐? 과거 깨기에요. 인간이 당하는 시험은 뭐냐? 자기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 시험이에요. 그게 유혹입니다. 다 헛된 것인데 그 헛된 것을 가지고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지금의 나가 되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 많이 했다는 그것, 다 쪼개버려야 돼요
그리고 성도의 교제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서로 오물을 끄집어내면서 서로 확인하는 자리, 그게 성도의 교제의 자리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을 자기를 버리는 용도로 주께서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나를 폐기하는 그 기능으로서 아주 귀하게 사용하셔요.
설교가 길었기 때문에 잊을까 싶어서 당부하는 건데요. 이제부터 모방하세요. 모방하시고 그게 얼마나 헛되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세요. 남 따라 산다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 받고 홧병을 유발하는 그런 것인지를, 나 좋으라고 붙들었던 사랑, 나중에 나에게서 새로운 말 안 나오면 떠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자기에게 신선하지 않으면 떠나게 되어있습니다. ‘아이고, 그 쓰레기 같은 이야기 그만해라. 많이 들었다.’
이제는 더욱더 자기를 파괴하게 되면 새로운 오물이 개발될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계속 성도의 교제를 할 수가 있어요. 더 바닥의 바닥을 뜯어내는 남은 생애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가는 곳이 마귀가 기다리는 곳인지를 우리는 예전에 몰랐습니다. 그 저 내가 욕망하고 원하는 것이기에 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조차도 얼마나 허무하다는 사실을 십자가의 말씀의 완성을 통해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통해서 더는 우리 자체로 의미를 구성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