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 나라는 전체 맞아요.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이 나왔단 말이죠. 그러면 이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이것도 전체에요. 그러니까 애굽 나라가 봤을 땐, 이스라엘이 어? 없는데 왜 나왔지? 애굽 나라 입장에서는 이 이스라엘을 비(非)-전체라 하는 겁니다. 우리한테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소속이 안 되는 거예요. 다니엘 세 친구는 그 바벨론 사람이 아니란 말이죠. 소속은 아니면서 같이 사는 것을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포함되었다. 바퀴벌레가 집에 기어다니면 바퀴벌레는 집사님 소속이에요, 포함이에요? 포함이죠. 인간 세계에는 애굽 나라뿐이에요. 이스라엘 이것은 아주 특이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특이한 사항이에요.
빌립보서 3장 20절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했잖아요. 성도 자체가 특이한 사항이에요, 특이한 사항. 성도, 이스라엘 이것을 ‘코르크 마개’라고 저는 표현하고 싶네요. 코르크 마개. 포도주 병을 코르크 마개로 막잖아요. 포도주를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코르크 마개까지 포함해서 돈 주고 사는 게 되죠. 그런데 포도주 마실 때는 코르크 마개를 먹는 게 아니고 그걸 떼버리잖아요. 떼야 안에 있는 포도주가 밖으로 나올 겁니다. 떼버리면 이 세상이 봉합되었던 것이 노출돼버려요. 코르크 마개가 막혀있다=봉합되었다, 코르크 마개가 떼졌다=노출되어있는 거예요. 그 노출된 구멍을 통해서 벌레가 들어올 수도 있고 눈이 올수도 있고 비가 올수도 있고 여러 가지 잡스러운 다른 액체가 들어올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노출된 거예요. 좋게 말해서 개방되었다 하는데 그건 좋게 말한 거고 나쁘게 말할 수밖에 없어요. 이건 노출된 거예요. 어떤 악한 요소가 안에 들어올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여기 p.232부터 p.233까지 나오는 것은 느부갓네살 이야기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전체에 해당돼요. 아까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애굽 나라에서 이스라엘 나왔죠. 이스라엘이 어디로 가느냐? 지금 다니엘에 의하면 바벨론 나라에 들어가요. 바벨론 나라가 애굽 나라와 동일하게 인간이 구상할 수 있는 전체 나라가 돼요, 전체. 최종적으로 인간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돼요. 이것은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다니엘 2장이나 다니엘 3장이나 다니엘 4장에 보면 그게 나옵니다. 다니엘 4장 10절에 “내가 침상에서 나의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고(높이)가 높더니”
그 꿈의 내용이 뭐냐? 다니엘 4장 10절에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나무가 몇 개입니까? 땅의 중앙에 한 나무죠. 땅의 중앙. 그러니까 통합이에요, 통합. 모든 것을 통합되게 보는 거예요. 많은 나라들이 있고 많은 제국들이 있더라도 이걸 느부갓네살 하나로 바벨론 나라로 통합을 시킨 겁니다. 통합을 시켰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바벨론 뒤에 아무리 많은 나라가 나와도 이 덩치, 바벨론 덩치의 확대에 불과한 거예요. 바벨론 덩치의 확대. 하나님께서 키우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나라가 있더라도 그걸 하나로 통합하는 겁니다. 왜 통합해야 되느냐. 통합을 해야 그걸 전체로 만들어야 비-전체가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생각하고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지혜가 한곳으로 집결되어야 돼요. 느부갓네살이 꿈을 자꾸 두 가지나 꾸는 것은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지혜는 왕 앞에, 왕이 꿈을 꾸니까요, 왕의 꿈을 인간이 해석해야 된다는 그러한 목적 하에 소위 똑똑하고 지혜 있는 자들은 다 집결하게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요. 밤에 불빛 피워놓고 그 동네 나방은 다 끌어 모으듯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바벨론 느부갓네살에게 난데없이 꿈을 꾸게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바벨론 느부갓네살에게 준 꿈은 하나로 모든 것을 집결시키고 통합시키는 꿈을 꾸게 한 거예요.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은 자기 사정만 알잖아요, 자기 사정만. 인간은 자기 사정만 알죠. 그럼 공부를 더 많이 한 사람, 특히 엘리트, 소위 공부를 많이 한 법률가들, 법률가들은 어떻습니까? 남들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겠죠. 남들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 그래서 그 분야에서 많이 아는 것을 세 자로 뭐라고 부릅니까? 대통령이죠. 아까 무슨 대통령이라 했습니까? 개 대통령. 대통령이라 하는 것은 통합의 자리에요. 그 통합이 그냥 통합이 아니고 투표해서 뽑는 게 아니라 그 시대에는 인간들이 사다리를 밟고 밟아서 오르는 최고 지혜의 결정체, 그 시대에 인간의 모든 지혜를 하나로 압축시켜서 구현된 것이 뭐냐 하면 느부갓네살 왕이에요.
그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의 계시, 꿈과 만나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계시로 느부갓네살에게 새롭게 주어진 지혜에 모든 인간들이 그것을 궁금해 하도록 주께서 유도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자, 왕이나 대통령은 명령하는 자죠. 왕이라 합시다. 이 논리는 별로 어려운 논리가 아니니까 여러분이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명령, 지시하는 자는 범주가 세상 보는 범위가 명령받는 사람보다 넓어야 돼요. 넓다는 말은 네 분야의 전공분야보다 내가 더 많은, 네가 전공분야 때문에 몰랐던 그 분야까지 내가 통합해서 다 알고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명령과 지시가 주어지면 이것은 법이 되죠. 누가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 부모가 자식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법을 내린다는 뜻이에요. 법을 내리는 이유는 법을 받는 자아를 법이 죽인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몸을 죽인다는 게 아니라 자아를 죽인다는 거예요, 인간의 자아를. 학생들끼리 자기 반에서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이렇게 떠들잖아요. 떠들 때 쉬는 시간인데 갑자기 선생님께서 문을 드르륵하고 열게 되면 애들이 어떻게 합니까? 교실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렇게 되죠. 잠잠할지어다. 갑자기 잠잠해지죠. 이게 뭐냐 하면 각각 하나하나의 애를 선생이라는 법이 죽이는 겁니다. 자아를 죽이는 거예요. 칼 들고 사람 신체를 죽인다는 말이 아니고 자아를 죽이는 겁니다, 법이.
실제로 느부갓네살 왕이 첫 번째는 꿈을 모르고 4장가서는 꿈을 해석 못한 자는 다 죽인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 죽여버려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건 아까 얘기한 귀속입니다, 귀속. 귀속된다는 말은 독자적으로 자기의 의미가 종결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는 나 때문에가 성립하지 않는 구조다 이 말입니다, 이 체제가. 그게 바로 옛날 봉건주의 사회라 하는 거예요. 임금이 먼저 있고 그 임금을 위해서 귀속된 채 내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 사무엘상 8장에 그게 나와요. 임금? 너희들이 임금을 원해? 그러면 임금이 너희들의 딸과 아들 다 가질 거고 밭뙈기 다 가질 건데 오케이? 좋아? 좋습니다. 그래서 임금 삼은 거예요. 그래서 임금 삼아서 이익이 뭐냐? 지금 옛날 사고방식은 이익을 따지는 게 아닙니다. 이걸 최근에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밝힌 사람이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에요. 프로이트가 밝힌 게 아버지의 이름이에요. 인류의 역사를 이 하나로 다 결론지었습니다. 아버지의 자리를 위해서 아들이 있다는 거예요. 정답입니다.
아버지의 자리.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잖아요. 그럼 그 아들의 아버지가 사라졌겠습니까,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아버지의 자리가 있어요. 그 돌아가신 아버지 보란 듯이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그것이 존재의 이유가 되는 거예요. 존재의 이유, 아시죠? 존재의 이유. 존재의 이유가 현대인들에게는 민주주의 때문에 그게 아니고 기본적으로 인간 속에 있어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현대 젊은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런 거고 실제로는 우리 안에 아버지가 있어요. 육신적인 아버지가 있지만 어떤 때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자리에 있는 경우도 있고. 어쨌든 아버지의 자리는 굳이 남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게 국가일 수도 있고 그리고 민족일 수도 있어요. 안중근 의사에게는 민족이에요. 아버지가 없으면 인간에게는 살 이유가 없습니다. 살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자식하고 부모는 친구 되면 안돼요. 반드시 교육은 아버지가 되어야 돼요. 만약에 친구가 되어버리면 자식들은 아버지가 없는 인간돼서 정신병자 됩니다, 나중에. 반드시 뭔가 꽂아주는 게 있어야 돼요. 바닷가에서 건물 지을 때 어떻게 합니까? 쇠말뚝을 바다 깊숙이 바다 밑 바위가 나올 때까지 완전히 박아버리죠, 말뚝을. 말뚝을 박아버려요.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흔들림이 없는 거예요. 반석이죠. 그걸 꽂아놔야 거기다 기초를 꽂아놓고 그다음에 뭐가 와도 담기게 되고 쌓이게 되는 거예요.
가족이라는 게 중요하죠. 미우나 고우나 가족이 있다는 말은 결국 마지막 자기가 죽기 전에 찾아갈 마음의 고향 같은 게 있어요, 마음의 고향. 그런데 마음의 고향이 없으면 인간의 마음 모습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림을 이렇게 그릴 수 있어요. 동그라미가 인간의 마음이라면 이 마음속이 시커멓게 돼요, 블랙홀처럼. 사랑을 줘도 빠져버리고 미움을 줘도 빠져버리고 복음을 줘도 빠져버리고. 고이지를 않아요. 쌓이지를 않아요. 시커멓게 되어서... 이걸 가지고 무저갱, 바닥이 없는 우물. 악마가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아무리 줘도 숭숭숭숭 다 빠져버리게 해요. 숭숭숭숭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럼 인간은 이렇게 빠져버리면 허탈해서 못살아요. 그래서 프로이트의 연구에 의하면 인류의 역사라 하는 것은 마음이 너무 시커먼 심연(深淵), 깊은 바닥, 끝을 모르는 바닥인데 그 심연 위를 석쇠 같이 걸쳐 놓아서 그 우물을 막는 이것이 바로 육신의 아버지에요. 육신의 아버지가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뭐 애굽이고 바벨론이고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 가정에서의 육신의 아버지는 가정에서는 큰소리치죠. 제사 지낼 때 안 입던 한복 두루마기 입고 아버지의 위세, 권위를 주장하는데 그러나 그 아버지가 자기 집에서는 대빵인데 주민자치센터만 가도 큰소리 못 쳐요. 아이고, 통장님 나오십니까? 이러고 있더란 말이죠. 아버지보다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버지. 애가 커가면서 아버지가 최고였는데 그 아버지가 굽실한 사람이 있다면 아버지 갈아타기. 그럼 뭡니까?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의 회장님이죠. 교회가면 목사님 되겠죠. 특히 아들한테, 너 커서 뭐 될래? 그럼 애 입에서 툭 튀어나오는 것은 적어도 아버지보다 더 나은, 아버지 같은 아버지를 원하는 거예요. 손흥민, 방탄소년단. 네 소원은 뭐냐? 일단은 아버지는 콜하고 일단은 받아요. 일단 아버지가 있어야 심연에 안 빠지니까 아버지로 받치고 아버지보다 더 뛰어난 아버지로 내가 그 자리에 가겠다. 그게 뭐냐 하면 대통령이에요. 개 대통령, 그다음 농구 대통령 허재. 남을 가르치는 사람, 남에게 존경받는 사람, 남에게 인기 있는 사람. 내가 장차 뭐 되겠다는 그 꿈, 꿈이 있을 때 그가 하는 모든 학교 수업이라든지 친구 만남에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자, 의미는 어디서 옵니까? 의미는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아버지로부터 의미가 주어지는 거예요. 아버지로부터 의미가 주어지면 자기가 꿈꾸는 그 꿈에 일찍부터 그 아이는 그 의미에 귀속되는 거예요. 의미에 귀속되게 되면 걔가 크면서 그 아버지, 손흥민 같은 존재가 되는데 불필요한 지식과 지혜는 본인이 알아서 의미에서 삭제해나가요. 삭제해나갑니다. 그러면 이건 선택 또는 결단이 되겠죠.
인간이 결단, 선택할 때 자기 의 빠집니까, 안 빠집니까? 안 빠지죠. 이 결단과 인간의 선택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을 ‘행함’이라고 하는 거예요, 행함. 지금 아버지 이름부터 해서 귀속 이야기했죠. 아버지 이름의 체계 이야기했죠. 그리고 인간이 사는 이유 이야기했죠. 이 전체가 모여서 뭐가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행함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행함의 체제에 갇혀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행함의 체제에 갇혀있어요.
시커먼 블랙홀, 심연. 악마가 인간에게 준 것은 끝도 없는 우물이에요. 그냥 집어넣으면 그때뿐이고 이게 어디로 갔는지
뭔가 나에게 의미되는 석쇠를 그 위에 깔아야 돼요. 석쇠하면 또 빠지니까 그럼 베니어판, 인간은 뭘 동원했다? 전체를 행함으로, 결단, 선택 다 포함됩니다, 행함으로 이걸 다 받아내요. 행함으로. 저는 이걸 이성의 판때기라 해요. 인간의 이성의 판때기.이성의 판때기는 윤리와 도덕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아까 인간은 행함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자기 의. 자기 의라 해도 되고 아까 설명대로 하면 자기 의미. 자기 의미를 좀더 설명하게 되면, 아버지여 보시옵소서. 아버지여 보시옵소서. 제가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모든 이성적인 결단과 판단과 윤리, 도덕으로 지금 잘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보시옵소서.
‘아버지가 나와 함께하신다.’ 상당히 신비적이고 영성이 가득해보이죠. 뭐가 문제냐? 이게 문제입니다. 이 블랙홀 입구에 베니어판, 이성적 판때기, 윤리적 판때기를 걸쳐놓은 여기서 이 이성적 판때기를 빼버리면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악마가 마련해준 무저갱. 끝없는 심연. 허망하기 짝이 없는 나의 바닥. 우물. 구멍이죠. 깊은 구멍, 검은 구멍. 깊은 구멍이 있어요. 돈을 집어넣어도 빠지고. 인간이 깊은 구멍 옆에 서서 자기 자신을 세워놓고 보는 거예요. 아버지와 함께 하는데 예를 들어 인간 앞에 초가집이 있다 합시다. 초가집 지붕이 이발 돼서 이뻐요. 광주에 눈이 40cm 왔다면서요. 눈이 초가지붕에 수북이 쌓였겠지요. 이 눈덩어리가 있으니까 인간이 뭘 쳐다보느냐 하면 저 하얗게 보이는 좋아 보이는 눈을 쳐다보는 거예요. ‘하나님과 내가 함께 있는 게 천국입니다.’ 라는 마음 태세를 갖추고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거예요. 이 정도 하면 하나님 앞에 사랑받을 만하죠? 이게 나의 결단이고 나의 선택이고 결정입니다, 라고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쳐다볼 때 왜 쳐다보느냐 하면, 오직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해 쳐다보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부인이 안됩니다. 결정타에요. 결정타입니다.
그런데 눈이 막 떼구르르 굴러 와서 블랙홀 위를 막고 있는 이성의 판때기, 인간의 여기다가 그냥 눈이 와서 덮쳐버려요. 인간의 행함을 덮치는 걸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랑은 뭐가 끼어들지 않습니까, 사랑은? 아버지의 이름 날아가버리죠. 윤리 도덕 다 날아가버리죠. 법 다 날아가버리죠. 그리고 마음준비, 마음결심, 결단, 선택 다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개무시해버리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 것, 굴러 떨어진 사랑의 눈덩어리가 나의 예수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예수님 존경합니다, 예수님 소망합니다, 를 완전히 다 뭉개버리죠. 그러면 이 판때기는 찌그러지는 거죠. 이 판때기는 찌그러져서 블랙홀 밑으로 빠져버리고 사랑으로 이 입구를 완전히 봉쇄해버리죠. 주님의 사랑으로. 행함의 반대말은 뭐라고 했습니까? 행함의 반대가 사랑이에요. 이성의 반대가 사랑이죠. 자기 결심의 반대가 사랑이고요. 인간이 법을 싫어하면서도 법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 때문이에요. 아버지가 거기 계셔서 아버지한테 인정받지 아니하면 내가 아니에요.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는 내가 나라는 인생을 사는 이유는 오직 뭐 때문에? 나보다 위대한 나보다 월등한 내가 사모하는 아버지가 거기 있기 때문에. 그걸 종교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종교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거기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이걸 종교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마귀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마귀가. 그래서 그 예능프로에 나왔던 목사, 신부, 여자 중, 그 세 명의 문제점이 뭐냐? 본인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게 죄라는 사실을 몰라요. 자기 자신을 커버하기 위한 이성의 판때기에서 나온 거예요.
정말 그들이 사랑을 받았으면 그 방송에 나와서 이렇게 해야 돼요.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과 함께 있음입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이게 바로 십자가 앞에서 죄라는 겁니다.” 왜?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대신하여 살았다가 죽은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하심이라. 나에서 뭐로 바뀌는 겁니까? 나에서 예수님으로 바뀌는 거예요. 나에서 아버지로 바뀌는 게 아니고 예수님으로 바뀌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격을 묻는 거예요, 자격을. 권한을 물은 거예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인간은 아버지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인간에게 아들을 통해서 구원하는 겁니다. 이삭이 아버지를 구원하죠, 이삭이. 물리는 거예요, 물리는 거. 일곱 인 끄트머리에 일곱 나팔 나오죠. 일곱 나팔 끄트머리에는 뭡니까? 일곱 대접이 나오죠. 뭔가 끄트머리가 물려서 나와요, 물려서. 끊어지지 않고 물려서 나온다고요. 여자가 있는데 여자의 끄트머리에는 뭐가 나옵니까? 여자의 후손이 나오는 거예요. 뭔가 물려서. 그러니까 끝에 나오는 분이 나를 거꾸로 물어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면 과거로부터 시간이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성도한테는 미래가 앞당겨서 앞에 있는 현재, 과거를 삼켜버리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삼켜버리는 식으로. 성경에서 삼킨다 할 때 이거 하나 아시면 다 아는 거죠. 요나+물고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킨 거예요. 사자가 남쪽 선지자를 찢여 죽였지만 안 먹는 거 보세요. 안 먹고 지켜보기만 하죠, 열왕기상 13장에서. 참 희한하죠. 이걸 우연이라고 합니다. 우발성, 우연.
여러 가지 이성의 판때기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필연이 있어요.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따지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결과가 나를 위해서가 되어야 되니까. 자, 그런 인간의 아버지 이름의 집대성이...... 크리스마스 트리 제일 꼭대기에 보면 뭐가 있습니까? 별이 있죠. 그 별 같은 존재가 느부갓네살이에요. 인간이 아무리 이후에 역사를 많이 하더라도 느부갓네살로 이미 모든 구조는 확정됐어요. 결정 났습니다. 느부갓네살을 넘어설 수가 없어요. 그게 인간의 한도이고 한계입니다, 한계. 인간 지혜의 한계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준 것은 인간의 지혜가 어디까지인가를 보게 한 거예요. 해독이 안 되는 거예요. 그 꿈의 해독이 안 되는 거예요. 남보다 더 뛰어나게 아는 범위가 더 넓은 인간들이 다 집결하는 장소가 왕의 장소에요. 그 왕의 장소에서 그다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질 때 인간의 통합된, 무지의 통합성이 드러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다’ 에요.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아버지의 이름으로 자기의 희망과 꿈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열심히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게 막혀버렸는데요? 막혀버렸어요, 하수구 막히듯이. 그 마개 역할을 누가 하는가? 그 마개 역할이 다니엘이에요. 다니엘이 뻥! 하고 마개를 뽑아줘야 돼요.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의 모든 지혜와 모든 결정과 판단은 다니엘에게 종속되었다고 보면 돼요. 다니엘에게 종속된 거예요. 느부갓네살이냐, 다니엘이냐? 다니엘에게 철저히 종속된 거예요. 귀속된 겁니다. 다니엘이 계시를 풀어주지 아니하면 인간의 대표자 느부갓네살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에요. 그래서 얼마나 답답했으면 신하들을 다 죽이려고 생각했죠. 본인이 감당할 수 없어 터져 나와버리면 이게 범죄가 되는 거예요. 만약에 지가 왕이 아니고 힘이 없다. 그럼 그 분노는 내부로 향하겠죠. 그러면 그 결과가 뭐에요? 자살이죠. 자살이에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 봅시다. 애굽 나라에서 이스라엘 나라 끄집어낼 때, 누가 여기서 압제합니까? 누굽니까? 바로 왕이죠. 모세가 와서 히브리인 빼내겠다 하니까 바로 왕이, 지금 내가 최고인데 지금 내 권력에 대해서 네가 뭔데 전체 말고 전체 외의 외재적 요소, 너무 어려우니까 그냥 외(外), 권력 외 권력을 여기서 네가 추가적으로 여분의 것으로 네가 따지느냐. 이 바로 왕의 권력을 네가 오해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권력을 키워서 내 권한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을 도로 더 심하게 압제하게 되죠. 그게 바로 전체 왕이 하는 이야기에요. 쉽게 말해서 바로 왕이 모세한테, “네가 나한테 시비 안 걸었으면 현재 네 히브리인들 이만큼 고생 안했어. 네가 나의 코털을 뽑았잖아. 건드렸잖아. 이거는 나의 권세가 전체라는, 전체 범주를 다 장악하고 있다는 그걸 네가 지금 몰라서 그래. 한번 보여줘? 내 권세가 어느 정도인지. 짚을 주지 말고 벽돌 수 그대로 다 채워.” 이거였던 거예요. 괘씸죄에 걸린 거예요. 그러니까 그 히브리인들이 모세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세, 아론 죽으라고 그렇게 했죠. 그렇다면 그 히브리인들은 어느 권세 아래 있습니까? 바로 권세 아래 있는 거예요, 바로 권세.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요. 여러분들이 그걸 아셔야 돼요. 바로 왕이 좋다는 말이 아니에요.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산다는 말은 아버지가 마음에 든다, 아버지 취미가 내 취미야, 그런 뜻이 아니에요. 아버지를 존경하는 게 아니에요. 아니, 사람이 개를 키울 때 개를 존경해서 키웁니까? 나한테 의미를 주기 때문에 키우는 거예요, 의미를 주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아내가 있다. 마음에 안 드는 남편이 있다. 왜 같이 삽니까? 너무 이뻐서? 사랑스러워서? 존경해서? 아니죠. 나의 의미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식도 마찬가지고. 나 아버지 안 좋아, 가출해도 다시 집구석 들어오는 이유가 뭡니까? 탕자가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이유? 그건 내가 아버지의 의미의 일부로서 자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남편의 아내라는 그 자리가 내 의미가 돼서 그런 거예요. 이것저것 다 떼면 안 되나? 떼버리면 이성적 판이 날라가서 허망하기 짝이 없죠. 허망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남자가 그렇게 지긋지긋하면 남자를 안 만나야 되는데 또 가는 거예요. 자기에게 남자가 있어야 자기 의미가 충족되기 때문에 그래요. 아버지를 미워해도 아버지 같은 사람 만나고 싶고.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엄마를 미워해도 엄마 같은 사람 만나는 이유가 이미 내가 내 마음대로 결정된 사항이 아닙니다, 내 의미라는 것은.
그 바로 왕에게 뭐가 주어집니까? 열 가지의 재앙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게 패는 하나님, 때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열 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지금 바로 왕이 뭐가 헷갈리느냐 하면 재앙은 우발성이잖아요. 예상 못했죠. 그 우발성과 자기 코앞에 있는 모세, 아론 형제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상관성을, 모세는 상관성 있다고 이야기하고요. 바로가 알고 있는 지혜에서는 그 상관성을 연결시킬 재주가 없어요.
예수님이 여기 계신 것하고 마지막 이 지구가 불타는 것하고 어떤 상관성이 있습니까? 이걸 연결시킬 수 있는 그런 물리학자 있습니까? 그런 생물학자, 과학자 있겠어요? 없죠. 그걸 성경에서는 완악이라 해요. 이걸 강퍅이라고 하는 겁니다.
애굽이 단일적인 전체성이죠, 전체성. 이게 이렇게 되어야 돼요. 단일적인 전체성. 애굽 외에는 없어요. 이렇게 되어야 이스라엘 나와요. 따로 이스라엘이 나오는 게 아니고 애굽-전체성 안에서 이스라엘이 나온다고요. 마치 아기를 해산하듯이.
피노키오하고 일반 애들하고 차이점이 뭐에요? 피노키오는 목수가 나무를 만들어서 천사가 와서 혼을 집어넣었다 하잖아요. 그런데 일반 애들은 엄마라는 죄인 몸에서 나와요. 심지어 하나님마저. 죄인이 없으면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중요한 것좀 받아 적으세요. 죄에서 구원이 나오는 거예요. 애굽이라는 죄에서 구원이 나와요. 택한 백성이 나와요.
이솝 이야기에 이런 게 있어요. 개구리 왕국에 자기들끼리 있으니까 개구리도 아버지의 이름이 그리웠던 모양이죠. 그래서 개구리 왕국에서 뭘 원했는가? 그때 신 이름이 제우스입니다. 제우스신에게 기도했어요. 우리에게 임금을 달라, 제우스신이 뭘 줬느냐 하면 통나무 하나를 줬어요. 개구리가 거기서 연못에 빠진 통나무에 올라타기도 하고 뭐 이렇게 하죠. 통나무가 임금이라는데 임금이 재미가 없어요. 재미가 없어가지고 재미있는 임금을 보내달라고, 너무 재미없다고 하니까 누굴 보내줬느냐 하면 이번에는 제우스신이 학을 보내줬어요. 학이 개구리를 한 마리씩 다 잡아 죽였어요. 그러니까, 제발 통나무 보내주세요.
살기 위해서 왕을 찾는 것 자체가 재앙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왕을 얻었으면 왕에게 복속되고 귀속되는 조건을 각오해야 될 텐데 자기 소원 들어주는 그런 임금은 임금 자체를 모른다는 것이 이솝우화에서 이야기하는 거죠.
그만큼 왕은 폭력적이다. 폭력적이라는 말은 권력적이라는 말인데 그래야 밑의 어떤 누구보다도 낮지 아니하고 높아야 되거든요. 높다는 것은 법과 지시를 유일하게 내릴 수 있는 권한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밑에 것을 자기가 내린 법과 지시로 꽉 묶어줄 수가 있어요.
자,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구조로 확정지어놨어요. 무슨 구조로? 왕국 구조로. ‘백성은 그럼 자존심도 없고 위신도 없고 완전히 왕의 노예가 되어가지고 이게 사는 거냐? 우리 백성을 위하는 그런 왕이면 좋겠다.’ 그렇게 하지만 그건 터무니없습니다. 왕국 속에서 왕국으로 구원되는 거예요. 왕국이라는 체제를 그대로 가져와서 구원받는 데가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 되는 겁니다. 왕국을 이해해야 돼요. 왕국의 특징은 뭐냐? 나를 위해서라는 것은 영원히 존재한 적도 없고 하나님께서 그걸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세상 왕국에도 왕에게 복종해야 되고 가정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복종하고. 아버지 말 안 듣고 가출해도 그 마음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아버지 곁을 떠나도 아버지는 자기 마음 한가운데에 박혀 있어요. 떠나도 자식이에요. 아버지 떠났다고 자식 아닌 걸 백날 입으로 선언해도 소용없어요. 아버지가 있으면 내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냐? 후손이 있으매 내가 있어요. 후손이 있으매 내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성경은 뭐를 잘라버립니까? 아버지를 잘라버린 거예요. 아버지를 안 자르면 아버지의 이름이 내 안에 계속 귀신처럼 하나의 응어리처럼 있기 때문에 현재의 육신의 아버지라는 탈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게 바로 할례 아닙니까.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린 거예요. 밑의 후손이 육신을 거꾸로 차고 오면서 잘라버릴 때는 바로 아버지의 이름을 자르고 아버지의 이름을 자르고 아버지의 이름을 잘라버리는 거예요. 계속 자르고 가는 거예요. 남편 없이 애 낳은 사람이 누구냐? 마리아죠. 마리아에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남편의 이름이 남편이 아버지니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작동하는 것, 그게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그게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고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그거에요.
아버지 있음이 비로소 내가 있음이다. 그냥 육신으로 있는 것 말고요, 의미 있게 있다. 내가 나답게 있다, 를 아버지가 가르쳐 준 거예요. 아버지의 법과 아버지의 지시와 아버지의 기대와 아버지의 희망이 오늘날 나를 의미 있게 한 거예요.
아버지를 잘라버렸다는 말은 뭡니까? 아버지로부터 주어졌던 내 의미가 잘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 of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가 누구겠습니까? 이게 바로 왕이죠, 이 세상 왕. 그 왕을 하나님께서 잘라버립니다. 어떻게 자르느냐? 죽인다는 말이 아니고 어떻게 바꾸느냐? 짐승으로 바꾸죠, 짐승. 그게 바로 다니엘과 느부갓네살의 만남이었습니다.
자, 둘이 만났을 때 둘 다 온전하겠어요, 안 그러면 한쪽이 깨지겠습니까? 한쪽이 깨지겠죠. 심약한 사람, 마음이 약한 사람은 상대방 배우자 때문에 완전히 정신이 진창이 되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기가 센 남편 또는 기가 센 아내 만나가지고 내 인생 숨 한번 못 쉬고 엉망진창이 되었다, 하는 그런 이야기에요. 사람이 둘이 맞는 걸 서로서로 보완하고 이렇게 만나야 되는데 한쪽이 기가 세버리니까 한쪽은 다치기만 하는 거예요. 완전 상처투성이에요. 한쪽은 여기저기 파스 붙이고 다른 한쪽은 멀쩡하니, “너는 나 때문에 행복하지 그치? 행복하다 해. 행복하다 해!” 파스 붙이고서는 “많이 행복하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다니엘하고 느부갓네살이 붙었습니다. 누가 깨지겠어요? 다니엘이 깨지는 게 아니고 소위 전체 권력을 다 쥐고 있는, 다니엘 4장 10절에 나오는 것처럼 중앙에 있는 나무, 최고의 나무가 다니엘 때문에 몸살 앓아서 결국은 자기의 본질을 드러내요.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게 뭐냐? 짐승이에요, 짐승.
인간이 자신을 뒤집어씌운 껍질을 못 버립니다. 인간은 자신을 뒤집어씌운 그 껍질을 스스로 못 벗깁니다. 그 껍질이 쉬운 말 같지만 상당히 어려운 말이었어요. 그 껍질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표면. 표면이라 해요. 표면=현상.
인간은 상대의 표면을 본다. 본다=인식한다. 상대를 아는 것은, 상대의 뭐든지 뭘 보는 것은 그 껍데기에 나타나는 표면을 봐요. 그러면 표면이 있다 합시다. 껍질이 있다면 상대가 이걸 보잖아요. 껍질을 상대방이 봄으로써 이걸 ‘타자’ 또는 ‘타인’이라 하면 껍질 때문에 자기가 감춰지는 ‘옹골참’을 자신의 ‘존재’라 합니다. 이 존재와 타자 사이의 껍질을 ‘자아’라 하는 거예요, 나. 껍데기. 그러니까 존재를 감추는 용도로 자아가 있는 거예요. 이 자아가 있음으로써 나는 껍질과 구별되는 바깥의 존재, ‘남’이라 이야기하고요. 껍질 자체가 ‘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현상, 현상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인식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이걸 현상학(phenomenology, 現象學)이라 해요. 철학에서 현상학이라 합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른다는 거예요. ‘자기밖에 모른다,에서 못 벗어난다’를 철학은 지금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자아가 존재의 옹골참, 이걸 자꾸 감추고 있으니까 이 껍질이 없으면 존재가 그냥 노출되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껍질을 남들이 인정해주는 그 껍질로 강화하다보니까 껍질과 존재를 분리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요. 같이 죽는 거예요, 같이. 그러니까 이 현상학의 문제는 인간은 왜 죽는가,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인간은 왜 죽는가. 끊임없이 나 하나만을 가지고 사는데 그런데 나 하나만을 위해서 사는 내가 왜 죽어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망대가 무너져 죽은 18명 나왔죠 (눅 13:4). 그게 지금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었다는 것을 타인이 죽은 사람을 지금 보고 있잖아요. 그 현상을 보고 있잖아요. 저 사람 죽었다. 제자들이,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네가 남의 일 얘기하듯이 그렇게 하면 안돼.” 이런 뜻이에요. 네가 지금 남보고 죽었다고 말할 처지가 못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죽으면서도 평생 동안 살면서도 왜 죽는지 모르잖아요. 왜 죽는지 모르면 너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왜 죽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그렇게 60년, 50년 성경 공부해도 내가 누군지 모르면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성경이 뭔지 해독이 안 되는 거예요. 그저 이 껍데기 하나, 자기 하나 그거 정당화하는 데에 온 혼신의 노력을 다 한 거예요, 평생 동안. 내가 뭐 어때서, 그거 하나에 자기는 목매듯이 살아온 거예요. 세 가지 노래 가사로 표현해볼게요
■1 괴테가 작사했고 베르너가 작곡한 노래에요. <들장미>라는 게 있어요.
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갓 피어난 어여쁜 그 향기에 반해서
정신없이 보네 장미화야 장미화
들에 핀 장미화
여기 보면 정신없이 본다는 말은, 한 아이가 들에 핀 장미화를 정신없이 본다는 것은 보는 것을 제거하지 아니하면 그 장미화를 볼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장미화를 제대로 껍질을 뚫고 그 사물 자체를 보려면 본인이 본다는 자체가 제거되어야 가능하다는 뜻이에요. 나는 보고 있잖아, 이게 없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믿는 내가 사라져야 예수 믿는 거다, 와 같은 원리에요. 그러니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보는 줄 몰라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보고 있는 줄 몰라야 제대로 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보고 있다는 나를 의식하는 순간 그건 제대로 보는 게 아니에요. 그건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타자가 다가온다는 것은 껍질이 자기를 의식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느부갓네살이에요. 자기가 예상 못한 꿈을 꾸었을 때 꿈이 너무나 강한 장악력으로 쳐들어오게 되면 자기의 한도가 드러나는 거예요. 왕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뭘 알아야 되지, 인식을 못하니까 내가 왕이라고 우겨도 그 꿈이 왕이에요. 내가 만인의 아버지 노릇해도 내가 너무나 무능해요. 무능력하고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그리고 자기가 꾼 꿈의 내용은 자기 제국의 미래와 관련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그 꿈은 개꿈이야.’ 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넘어갈 수가 없어요. 왜? 미래와 연결이 안 되게 되면 지금 현재의 제국, 왕국은 미래한테 양도가 되어서 있어도 없음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미래가 보장되지 않으면 현재의 있음은 소용없는 있음이 되는 겁니다.(“여기서 느부갓네살은 반드시 그 꿈을 알아내어 미래를 보장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지혜자를 찾게 되는데 이로서 지혜는 현재라는 시간을 너머서서 현재를 장악하는 미래의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인간들의 시간관에 잉여부분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위기를 부르는 사태다.”)
마치 천국이 없으면 우리가 살아도 산 게 아니죠. 죽음 뒤를 모르면 지금 산 게 아니에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정했다는 말은 네 죽음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쓸 자격이 없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죽이잖아요.
사람은 자아가 있잖아요. 방금 아까 현상학에서 자아가 있죠. 이 존재, 존재의 껍데기를 뭐라고 했습니까? 자아. 이 자아가 타인, 하나님이죠, 하나님을 자꾸 상대하려고 하는데 이게 틀려먹은 거예요. 이게 철학의 한계이고 인간 지혜의 한계입니다.그럼 인간은 뭐냐? 인간은 대우 세탁기 안에 욕조 있죠. 세탁기 위에 여러 가지 작동하는 버튼 있고. 세탁기 작동하게 되면 욕조통 자체가 돌아가죠. 그러면 소용돌이 막 치잖아요. 그럼 성도는 뭐냐? 이 욕조통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을 상대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가 아니에요. 남을 자기가 판단하고 분석할 대상이 아니라 자기는 주님과 함께 같이 돌아가는 겁니다. 갑자기 눈이 40cm 온다든지 이렇게 되면 왜 와야 되는가? 갑자기 내가 초청하지도 않은 코로나가 걸렸다. 왜 걸렸는가? 상당히 자기는 필연적으로 살아가는데 코로나 걸렸다, 눈이 많이 왔다, 이건 뭡니까?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죠. 우연이니까 우연이 내 속에 들어왔으니까 우연이 나의 일부가 된 거예요. 이게 욕조 안에 있는 성도 아닙니까. 나의 일이 따로 있겠지만 주님의 일속에 어쩔 수 없이 같이 휘말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주의 일이 나를 삼킨 거예요. 고래가 요나를 삼켜버린 겁니다. 주의 일은 그렇게 진행되는 거예요. 미래란 미리 대처하라고 알려준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 과거란 다시 되돌아갈 수 없고 수정시킬 수 없는 불가역적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미래도 그냥 미래의 주인이 따로 있어서 인간을 미래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걸 느부갓네살에게는 꿈이라는 미래가 오고 그것이 제국의 미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미래의 사람. 미래에서 온 코난. 그럼 느부갓네살은? 그 미래에 삼킴 당해야 될 과거의 인물. 현재 됐다 싶으면 과거로 곧장 내려가니까 현재는 없는 거죠. 하나의 첨점, 뾰족한 첨점에 지나지 않지, 어떤 시간이라는 게 없어요. 항상 과거, 미래로 구분되는 파동 같아요. 파동의 고(高)가 있고 골짜기가 있고 높낮이가 있잖아요. 이처럼 시간이 파동치면서 가기 때문에 항상 현재도 과거로 쭉 미끌어져가요. 현재다 하는 순간 벌써 그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어디론가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길이 있는데 이 길이 ‘인간의 길은 길이 아니다’ 를 알려주는 길. 그러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하는 것처럼 성경을 한마디로 말해서 길이에요. 주님이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잖아요. 길입니다. 길이란 말은 아까 포도주병에 있는 코르크 마개처럼 이게 노출되어 있어요. 인간은 닫혔죠. 왕으로 닫혔는데 아버지의 이름으로 닫혔는데, 느부갓네살 왕의 입장에서 다니엘은 그냥 부하에요, 직원이고. 그는 내가 죽인다 하면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에요. 코르크 마개인 것은 상상도 못했죠. 예수님이 왔을 때 목수의 아들이라고 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그렇고 그런 다수성 중의 하나로 본 거예요. 이 전체 속에 소속된 하나의 요소로 본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부분집합이죠. 귀속된 게 아니고 포함된 거예요. 부분집합이란 이런 겁니다. {1,2,3} 요소가 몇 개에요? 3개죠. 그럼 부분집합은 몇 개가 되겠습니까? 1 하나, 2 둘, 3 셋,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1}, {2}, {3} 요소 끝,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부분집합은 여기서 {1,2} 쌍이 있을 거고 {2,3} 있을 거고 {1,3} 있겠죠. 또 하나 더 있어요. {1,2,3} 전체가 있어요. 또 하나 더 있어요. 공집합∅이 있어요. 총 8개에요. 그래서 부분집합은 2³입니다, 공식이. 요소는 3개인데 부분집합은 8개. 어느 것이 더 많습니까? 부분집합이 더 많은 거예요. 이걸 칸토어의 역설(Cantor’s paradox)이라 합니다. 이 부분집합을 멱집합(冪集合, power set. 주어진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들을 원소로 갖는 집합)이라고 하는데, 칸토어라는 수학자가 19세기 말 이걸 발견한 거예요. 전체의 전체를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해도 만들어낼 수 없다. 불가능하다. 그래서 칸토어는 무한집합을 이게 바로 신이라 한 거예요.
‘누구를 위함이냐’에요, 누구를 위함이냐. 나를 위함 같으면 그것은 죄가 된다는 거예요. 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게 죄가 돼요. 복음 전하는 게 죄가 된다는 말이 이 부분집합을 이해 못하면서 인간들이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걸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치게 하고 죽였잖아요. 그런데 여기 이 땅에 귀속되는 것만 찾는 전체 세계에서 귀속되지 않고 포함된 분이 와버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졸지에 죄인으로 드러나고요. 언약에 의하면 언약대로 살지 않으면 뭐가 주어집니까? 저주가 주어지죠. 다니엘을 통해서 알린 계시는 너희들 가는 길은 오직 저주만 있으리라, 그거 알려준 거예요. 이렇게 가시면 저주 있습니다. 바로 왕에게 모세가 나타났고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났죠. 그 바로 왕에게 주어졌던 결말이 뭐였습니까? 축복이었습니까, 저주였습니까? 저주죠. 자기가 저주받을지 모르는 자에게 저주를 받아야 된다고 알려주는 것이 전체를 뛰어넘는 초과적인 그런 하나님의 계시의 역할이 그겁니다. 그래서 율법을 준 것은 뭐하기 위함이다? 새삼스럽게 저주받는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너는 저주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저주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2 <언덕 위의 집(Home on the range), 미국 민요>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오 저 언덕 위 들소들 노닐고
노루 사슴 뛰노는 그곳
걱정 근심 없고
구름 없는 하늘
그곳에 집 짓고 살리라
오 언덕 위의 집
노루 사슴 뛰노는 그곳
걱정도 없이
구름 없는 하늘
그곳에 집 짓고 살리라
시인은 그걸 바깥에서 보는 거예요. 아, 푸른 잔디에 어떻게 집을 짓고...... 한번 집 지어보죠. 민원 들어오죠, 냄새난다고. 축사를 왜 여기다 짓냐고.
■3 <메기의 추억(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메기 내 사랑하는 메기야
동산 수풀은 없어지고
장미꽃은 피어 만발하였다
물레방아 소리 그쳤다
메기 내 사랑하는 메기야
물레방아 소리 그쳤다. 이게 바로 죽음입니다. 메기의 추억. 죽으면 두려움도 같이 죽죠. 죽음은 인간이 원했던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성경말씀에 다니엘과 느부갓네살, 다니엘서 이 모든 것은 이겁니다. 죄를 죄 되게 자극시키는 거예요. 저주를 저주되게 더욱더 고취시키는 겁니다. 고취시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자아라는 껍질, 현상을 인간들이 본다고 하잖아요. 인간이 원했던, 인간이 자아를 통해서 봤던 그 타자 말고 주님이 타인으로 쳐들어온 거거든요. 전체 말고, 전체에 포함된 것 말고, 전체 외에 전체 바깥에 있는 비(非)-전체가 쳐들어온 거예요. 쳐들어왔을 때 여기 존재가 죄로 드러나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 율법을 줌으로써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는 거예요 (롬 7:13).
‘나는 죄 지었다’ 성경에 이런 건 없습니다. ‘나는 죄다’ 이거죠. ‘나는 죄다’를 어떻게 하느냐하면 바로 마태복음 9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해요. 마태복음 9장 17절, 이게 뭐냐 하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되고 옛 술은 옛 부대에 담아서 절대로 옛 부대에서 바깥으로 교환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스스로 술이 빠져나와서 부대를 교체하고 이런 건 안 된다 이 말이죠. 될 수가 없어요. 그러면 누가 읽어보세요. 마태복음 6장 13절, 여러분 보시면 ‘아, 이건 들어본 구절이구나.’ 생각날 거예요. 마태복음 6장 13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겁니다. 주님께서 주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어야 될 존재로 주께서 계시를 주느냐를 보는 거예요. 느부갓네살이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왕이에요. 그런데 짐승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 거예요. 그러나 다니엘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주께서 주신 계시가, 또는 꿈을 통해서 준 계시가 너는 처음부터 뭐였다? 짐승이었다. 처음부터 짐승이었다는 거예요. 이걸 느부갓네살이 무슨 수로 압니까? 알 수가 없어요. 그래, 짐승인 것을 알았다고 해서 느부갓네살이 구원받았습니까? 아까 했죠. 하나님의 계시는 “성전에서 잠잠할지어다” 하는 것은 빼도 박도 못해요. 이것은 있는 것을 있는 대로 그냥 노출시킬 뿐이지, 그러니까 정신 차려라, 이런 건 없어요. 짐승은 짐승이니까 그냥 짐승이라고 이야기할 뿐이죠. 죄인이니까 그냥 죄인인 겁니다. 거기서 뭐 더는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우리대신 기도해줍니다. “주여, 저들을 악에서 마귀에서부터 건져주옵소서.”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세 차례나 했어요. 한번만 한 게 아니에요. 세 차례나 기도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주님께서 잔을 옮겨버리면 주님이 속해 있는 자리, 죄 안 지었으면서도 죄인 된 그 자리가 무효가 되면 안돼요. 옮기지 말고, 자기 백성과 함께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저주를 그냥 주께서 당겨야 돼요.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건 아버지와 아들 관계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생각한 신은 전부다 우상이었습니다. 그럼 우상이 아닌 신은 뭐냐? 아버지와 아들 관계, 이게 바로 우상이 아닌 거예요. 제가 요한복음 5장을 언급했죠. 아들을 공경한 자가 아버지를 공경한다 (요 5:23). 네가 주제넘게 하나님을 거론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들이 와서 칸막이 쳐버리는 거예요. 네가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을 찾을 자격도 안 된다. 일을 해도 예수님 내가 해야 되죠. 예수님은 세탁기 욕조통이다. 세탁통 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자기 백성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마치 솜사탕 설탕 넣고 발로 페달 밟으면 통 안에서 뭔가 아우라가 피어나는 것처럼, 그 안에 작대기만 집어넣으면 부풀하게 여자들 파마한 것처럼 커다랗게 부푼 솜사탕이 생기잖아요. 주님께서 자기가 한 공로를 실으니까 여기서 이런 세탁통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자기 백성이 생기는 거예요. 그게 함께 있는 거예요, 그게. 내가 요청한 함께 있음은 허락이 되지 않습니다.
바로 왕의 열 가지 재앙 다시 봅시다. 열 가지 재앙을 때렸잖아요. 열 가지 재앙을 때린다고 히브리인들이 개과천선했습니까? 아닙니다. 없어요. 빠져나온 것은 저쪽에서, 바로 쪽에서 “제발 좀 나가주세요.” 해서 빠져나오는 거예요. 끝까지 바로 왕의 권력이 작동하는 거예요. “명령이다. 제발 천국가거라.” “우리 교회에서 십자가 이야기하지 말고 너는 제발 부탁이니까 우리 교회 그만 나와.” 이렇게 하는 것처럼요. 마귀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니까 길을 마귀가 인도해요, 마귀가. “아참, 나하고 놀지 마세요. 당신은 나하고 놀 부류가 아닌 것 같아요.” 길이 없어요. 길이 없는데 마귀가 우리를 길 가도록 유도하는 기능하라고 주께서 마귀한테 그 일을 시키는 겁니다. 고맙다, 마귀야. 세상과 같이 안 놀아줘서 고맙습니다. 너 나하고 안 놀아줘서 고마워. 서울서 어떤 친구 둘이 부산에 가자고 둘이 갔는데 걸어서 가거든요. 가다가 경기도까지 왔어요. 왔을 때 친구가 하는 말이 “나 부산 안 갈란다.” “왜?” “부산이 없잖아.” 부산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부산서 왔거든. 부산서 서울로 올라왔거든.” 안됩니다. 당신이 부산서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해도 내 자아가 그걸 못 받아주겠다는 거예요, 내 자아가.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 혼자만 가겠죠, 부산을. 부산이 있다는 걸 아는 자만 가겠죠. 그럼 누가 누구를 떠민 거예요? 부산이 없는 쪽이 부산이 있는 쪽을 어디로 가게 했습니까? 부산 가게 만들었어요. 꼭 하나님은 그렇게 가게 하셔요. 친구 우르르 모아가지고 수련회 가자고 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꼭 그쪽에서 나의 믿음을,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천국 있다 하는 그 믿음을, 불신자 쪽에서 이것을 흔들어버려요. 흔들어버린다고요. 그러니까 느부갓네살에게 꿈이 오지 않는다면 다니엘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사람이에요. 복음이 없이는 이 땅에 아무 쓸모짝 없는 자들이 마귀로 인하여 점점 더 길을 찾아가게 만들어버려요. 어느 길로? only one way, 오직 하나의 길. 오직 하나의 길을 가는 거예요. 길은 없어요. 없는데 다른 사람이 안가겠대. 그때 비로소 길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그럼 나도 가지 말지.’ 이건 애초부터 비-전체가 아니고 전체에 속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가짜는 마귀가 설쳐대야 가짜가 생깁니다. 가짜가 발생되는 거예요.
우리를 가만두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그 가짜를 계속해서 마귀가 와서 친절하게 다 긁어내주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스케일링이라고 해요. 입 벌리라 해서 다 긁어내줘요. 다 긁어내면 그다음에 뭐합니까? 입 닫고 네 집에 가라 하죠. 그 네 집이 바로 천국이잖아요. 스케일링으로 긁어내고. 내 속에 계속 솟아나는 신앙이란 이름의 불신앙. 주님을 위한다는 명목하이지만 사실은 나의 미래 행복을 위해서 미래 생활의 보장을 위해서 보험 들 듯이 보람상조 하듯이 그렇게 나의 안위를 위해서 하는 그 모든 악마적인 것을 악마가 와서 그걸 긁어내주시는 그 친절함. 그러니까 주님보고 욕하지 마세요. 주님이 얼마나 친절한지. 마귀까지 동원해서 스케일링 다 해주시는 거예요. 그 스케일링하면서 빠져나온 것이 자식도 되고 아들도 되고 딸도 뽑아내고 그동안 나한테 자존감을 주었던 그것도 빠져나오게 만들어요. 나의 삶의 의미를 채워줬던 그것도 후벼내는 거예요. 합기도 이런 거. 나도 직업 있다고 큰소리쳤던 거, “입 벌려주세요. 백수죠?” 끄집어내는 거예요. 아버지 이름으로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그 노림수, 그거? 우리가 할 말은 뭐냐. 주께서 물론 대신 이야기해주십니다. “저들을 저희 죄에서 사하여주옵소서.” 이겁니다. “그들을 악에서부터 건져주옵소서.” 죄를 짓지 말라, 가 아니라 죄=나거든요. 그 나로부터 자아로부터 그 죄된 자아로부터 끄집어내소서. 왜? 새 술은 새 부대가 와야 그걸 담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순교한다고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에요. p.233 봅시다. 밑에서부터 11번째 줄, “다니엘로부터 꿈 해석을 들은 후 12달 만에 느부갓네살 왕은 꿈의 내용대로 짐승이 되어버린다(단 4:25, 4:28-33).” 짐승이 되어버렸죠. 이게 되게 중요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컨닝해서 미리 알았으면 대처할 건데.’ 아니, 대처하라고 준 계시가 아니에요. 계시 준다고 대처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복음 알고 천국 간 사람 있습니까? 없어요! 복음은... ‘야, 복음하고 나하고는 전혀 이거 내가 복음을 믿을 위인이 아니구나.’ 그거 알려주려고 복음 준 거예요. 마치 율법적 기능의 연속성이에요. 율법을 준 것은 십계명 준 것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못 지키는 존재로 태어났음을 그걸 확인시키기 위해서 준 겁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은 우리가 믿으라고 준 게 아닙니다. 믿지 않음을 깨닫는 거예요. 믿지 않음이 뭡니까? 죄거든요. 아, 내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이미 구원받아서 천국 가게 되고 영생을 얻은 사람만 그걸 확인할 수가 있어요. 내 일이 아니라 욕조통 안에 들어있는 주의 일의 연속성 안에 내가 휘말렸다는 것을 감 잡아요. 내가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지금 죽고 사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문제에요. 죽고 사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죄와 의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기도할 때, 하나님 저들을 죽지 않고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습니까? 그 기도는 교회 권사들이 하는 기도고요. 주님이 그런 기도하지 않죠. 살고 죽고의 문제가 아니라 가난하고 부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저들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죽는 경우가 있든지 간에 그들의 악에서 죄에서 건져달라는 겁니다.
건지는 방법은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죠. 내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짐은 내 안에서 뭐가 나온다? 내장처럼 그리스도만 나오게 하기 위해서. 나 아니고 이 분이었습니다, 하고 내놓는 거예요. 나의 자아가 이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0)
아까 그림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그림 시작은 블랙홀부터 시작했죠. 원에서 튀어나온 선(б)은 필요 없지만 하나 그어줘야 이게 강조가 돼요. 시커먼 블랙홀, 아무것도 없죠. 복음 40년 들어도 쑥 빠졌어요. 복음이 뭐꼬? ‘하나님이 함께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비판했어요. 몰라, 듣기는 들었는데......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이러면서 다 빠졌어요. 그럼 그동안 이걸 안 빠뜨리기 위해서 막아놓은 것은 뭐냐 하면 이성의 판때기가 들어갔죠. 이성의 판때기는 누구 결정이었고 누구 판단이었고 해석이었습니까? 나. 나의 나 잘되기 위해서, 나한테 미래에 유리하기 위해서 이성의 판때기를 해서 복음도 담고 성경지식에 다니엘, 뭐 창세기부터 요한복음 수련회까지 다 담았어요. 이거 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뭘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천국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 이런 짓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갑자기 기와집이라 해도 좋고 초가집 지붕에서 눈덩이가 40cm와서 굴러와가지고 와장창 이걸 부숴버리니까 이 판때기를 쫙 찢었어요. 남는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 사랑의 반대말은 행함. 행함의 반대말은 사랑. 사랑만이 원함이 되는 거예요.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사랑이 저만치서 온 거예요. 가는 게 아니고 사랑이 왔어요. 사랑이 오게 되면 뭐냐? 나는 이렇고 저 사람은 어떻고 이야기합니까, 안 합니까? 내가 박살나버렸는데 무슨 남 이야기할 게 있어요. 자아 타일이 어디 있어요. 그냥 사랑 이야기만...... 사랑이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계명이 사랑뿐인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사랑이었고 우리의 신랑이었고 사랑이 찾아왔고 우리는 찾아옴을 당했고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 세계가 없고 그냥 사랑의 세계만 있게 하옵소서. 그 안에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 이제는 매일같이 느껴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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