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들의 고백
2022년 12월 14일 본문 말씀: 하박국 2:12-14
(2:12)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2:13)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2:14)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인간들은 주변에서 사물들을 끌어모으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물들에 대한 지배와 통치를 통해서 신 행세를 부려보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주변에 있는 인간들까지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자꾸만 사물체로 간주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만 참다운 절대적 존재로서의 인간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아담 이후, 인간은 없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이미 ‘죽은 사물체’가 된 겁니다. 새삼스럽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머금은 물체’로서 인간들을 이 땅에 탄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집어넣으신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원칙을 살리려고 하시는 겁니다. 이 원칙이 원칙대로 빈틈없이 유효함을 인간의 출생을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에 말씀을 주시는데 그 모든 말씀의 배후에는 ‘화가 있으리로다’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율법을 위반하면 저주가 주어지는 원칙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에 꾸준히 죽음을 적용시키시는 것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의 일관성 고수 때문입니다. 즉 그 누구도 하나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제가 예수님 믿을테니 저를 구원해주세요”라고 요청할 자는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 구원과 천국행을 위해 노력해도 하나님쪽에서 기피하십니다. “저리가, 너 아니거든”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위상에 맞는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화가 있을지어다”의 일관성에 못지 않는 일관성으로 자기 백성을 건지십니다. 이렇게 되면 두 일관성의 동일성으로 인해 성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모든 말씀에 ‘화가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것은 참으로 합당한 조치입니다.”고 말입니다. 즉 성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안목과 동일한 안목을 지니게 된 자를 말합니다. 엘리사 선지자에게 일어난 다음과 같은 사건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의 하나님의 일관성을 잘 나타냅니다.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 2:23-24)
아이들의 부모들 중에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신 자’라는 안목을 갖고 있다면 자기 자녀가 곰에 의해서 찢겨 죽게 된 것에 대해서 하등 이의를 걸지 않을 겁니다. 아마 이런 부모가 거의 없을 겁니다. 이 정도로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화와 저주에 노출되어 있는 겁니다.
세상의 전쟁 영웅들이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건축물과 성을 쌓는 것은 너무나도 흔히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안목을 모릅니다. 인간 나라의 전쟁이란 사물체와 사물체와의 전쟁입니다. 자기만은 인간으로 간주하고 상대를 자신의 고귀한 인간됨을 방해하는 사물체로 간주해서 여지없이 피를 내어버리는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것은 전쟁 중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끝나고 자칭 승리자됨에 도취되어 백성들을 왕의 영웅담을 치하하는 공사에 강제로 동원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 22장에서는, 유다나라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유다나라가 바벨론 제국이 망하기 거의 직전에 있는 왕인 여호야김 왕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광대한 집과 광활한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렘 22:13-14)
즉 우상을 섬기는 자는 자기만은 멀쩡한 인간이라고 자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고귀한 존재를 증명해줄 작업에 동원시키는 기계로 취급하는 겁니다. 실은 양쪽 다 죽음을 품은 사물체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완연하게 노출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자신이 극히 합리적으로 윤리적이고 신앙적으로 이성적 삶으로 제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안목으로 볼 때에 예수님은 그들 눈에 다음과 같은 인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요 10:20) 즉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이 여태껏 유지했던 자신들의 멀쩡함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해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대우를 받는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날 것으로 고백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귀신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눅 4:41)
즉 마귀는 압니다. 자신들이 인간들은 신으로 대우하는 것은 곧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들과 같이 지옥불에 들어가게 만드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정말 영생을 얻게 되는 자들은 자신의 주체를 격상시키는 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람들로부터 ‘귀신들려 미쳤다’는 그 참다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데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즉 인간이 영생을 얻는 것은 자기 주변으로 사물들을 잔뜩 끌어모아놓는데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원칙,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원칙에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 지식으로 인해 성도는 자기를 고귀하는 하는 지식을 마다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증인되지 말고 예수님의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강-하박국 2장 12-14절(귀신들의 고백)2212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2장 12-14절까지입니다.
하박국 2:12-14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민족들이 불 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하나님의 말씀 뒤에는 “화 있을찐저”가 반드시 게재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의 말씀처럼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가 있을찌어다.’ 이것이 모든 선지자의 안에도 다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대하면서 아주 정확하게 해석하는 요령 또는 방법중 하나는 ‘화를 부르는 말씀을 우리가 듣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저주를 유발하는 말씀, 이 인간세계를 저주로써 가득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던져 준 거예요.
바짝 마른 산에 불쏘시개 던지면 산불 나서 다 타버리지요. 그 불쏘시개 같은 기능이 주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말씀을 아니한 게 아니고 말씀을 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의해서 세상은 필히 화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저주받는다, 화 받는다, 심판받는다, 기분 나쁘게 생각할 게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세상은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그 사실을 알게 된 게, 그것을 알게 된 게 너끈하게 저주와 그 모든 심판의 공포를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화가 있을찌어다.” 하는 말씀을 주시는 주님과 동일한 안목을 가진 자가 바로 구원받은 백성이고, 천국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키냐, 안 지키냐.’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말씀에는 반드시 그러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안목을 가지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화가 있다는 것, 저주가 있다는 것,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셔야 되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14절에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이렇게 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좍 덮는다는 것은 세상을 하나님의 화로서 저주로서 확 덮는다는 말이고, 이것을 같은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가득 덮고 있다, 그런 경우와 동일하다는 거예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물 없는 바다는 바다가 아니지요, 그냥 땅이지요, 바다가 바다 되려면 물로 가득 그득 차야 되지요, 가득 차야 되고, 그득 차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으로 하나님 자신이 하는 일은 필히 결과를 남긴다는 그 귀결에 의해서 가득찰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그러면 또 생각해야 될 것은, 그게 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건진다는 이 말씀이 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기에 그게 영광이라고 할 수 있는가? 출애굽기 3장 14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거 하나로 끝났어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누구하고 의논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하고 의논하지 사람하고 의논하지 않습니다. 그게 영광이에요. 하나님 자신의 자존감이고 영광입니다. “너희들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 나는 모르겠고 내가 한 말대로 그냥 실현시키면 그걸로 이 하나님 입장에서는 만족스럽다. 왜? 나는 나만 있으면 되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까.”
하나님 자신을 모세에게 그런 식으로 드러낸 거예요. 든든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안정적이지 않습니까? 아, 세상에 대해서 모든 비밀을 다 알았다는 그런 안도감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내가 홀로 다했다는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 기쁨에 같이 기뻐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별로 어려울 게 하나도 없지요.
인간들이 자기의 자존심을 버리고, 자기의 계획들을 버리고 그냥 하나님의 하시는 대로 스스로, 하나님 스스로 일궈나가는 것에 대해서 동조하고 동의하고 거기에 합세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 중 하나가 오늘 하박국이지요.
그래서 오늘 내용은 간단하게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화가 있을찌어다.”라고 언급을 할 때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는 자에게 화를 내림으로써 나는 뭐든지 내가 원하는대로 다 이룬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자에게 하나님은 화를 내림으로써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해내신다고 증명할 수 있는가?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이게 어려울 수도 있고 쉬울 수도 있는데 그냥 어렵게 가겠습니다. 여기서 고대 모든 제국들, 바벨론이지요, 바벨론부터 나오고 모든 나라의 통치자들은 자꾸 도시를 건설하고 성을 크게 세움으로써 자기의 권위를 드높이려고 하는 그런 일들을 많이 했어요.
하나의 제국의 왕이 된다는 것은 아주 쉽게 말해서 싸움질했던 주동자라 이렇게 봅니다. 싸움질했던 주동자, 자기의 민족, 자기의 국가를 동원해서 다른 민족하고 싸워서 승리자가 될 때 다른 민족까지 삼켜버린 영웅적인 왕이 되는 겁니다. 제왕이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냥 가만있지 않고 자기의 업적을 키우기 위해서 도시를 건설한다든지 자기가 살고 있는 궁전과 성을 크게 키우는 일을 해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유발하는 행위들이 된다 그 말이지요.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보다가 “성 다 지었냐? 도시 다 만들었어? 화가 있을찌어다.” 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불로 다 태워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뭐 소박하게 자기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그럴싸한 건물 건축물을 짓는 게 그게 뭐가 나쁘냐?’ 인간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시편 28편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인간은 건설하고 하나님께서는 건설치 아니하고, 건설과 반대, 파괴시키는 일로 나가시는 겁니다. 현대건설이 들었으면 굉장히 기분 안 좋을 거예요. 인간이 건설하는 것을 주께서는 부수는 거예요.
부숨으로써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이게 내 영광이야.” 드러내는 겁니다. 심판으로써,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 자신이 어떤 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파괴라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왜 파괴라는 방법을 사용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하나님만이 가져 야 될 그 ‘스스로’ 자기 스스로 행사하는 것, 계획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만 가져야 될 영광을 악마와 결탁해서 인간들이 자기도 하나님인 양 하나님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 흉내를 내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화를 퍼부으시고 저주를 하시는 것은, 이것은 인간 쪽에서 섭섭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본래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렇게 좋게 생각하세요. 본래 인간은 뭐냐 하면, 본래 인간이라는 것은, 원래 인간이라는 게 없어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그다음에 인간이라는 작자는 이 땅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라고 해서는 안 되고 뭐라고 해야 되는가? 사물체, 죽어가는 사물체, 인간이 아니고 그냥 사물 덩어리, 물체 덩어리라, 이게 적합해요. 아프가니스탄이 멸망할 때 그 장면을 제가 본적이 있는데 미군 군용기가 카불 공항을 마지막 떠나는, 밤이었나, 하여간 마지막 떠나요, 군용기가 남아 있던 미군들, 또는 미군 가족들, 미군에 협력한 사람들을 태우고 마지막 떠날 때 제가 대충 헤아려볼 때 한 대여섯 명이 떠나가는 군용기 바퀴 위에 또는 바퀴 붙들고, 거기 뭐 붙잡을 게 있었던 모양이지요, 바퀴를 붙들고 군용기가 카불 공항 떠나는데 그렇게 붙들고 날아가는 장면이 있었어요.
카메라가 그걸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1분도 안 되어서 우수수 다 떨어졌어요. 지상에 있으면 그냥 엎어지기나 하지 비행기 타고 100미터 이상 올라가니까 그 높은 데서 떨어지는 거예요. 뭘 붙드는가? 그들이 군용수송기를 붙드는 거예요. 군용수송기는 뭐냐? 사물체입니다. 물체에요, 그냥 사물체에요. 아프가니스탄 피난민들이 그 사물체를 붙드는 이유는, 본인이 사물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사물체를 붙들어서 그것이 나를 살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전쟁입니다. 인간의 전쟁은 사물체와 사물체와의 격돌이에요. 사물체와 사물체기 때문에 전쟁할 때는 상대를 인간으로 보면 전쟁이 안 됩니다. 하나의 사물체로 봐야 돼요. 인간 자체는 그냥 밧데리가 다 떨어져 가는, 밧데리가 다 닳아져 버린 그러한 로봇, 밧데리 좀 넉넉할 때는 까불까불 까불다가 밧데리가 다 떨어지게 되면……, 그러니까 10살이나 12살 때 국민학교 때 찧고 까불다가 “의자 들고 뒤에 서 있어!” 할 때는 혼자 그렇게도 까불다가 그 사람이 60년 지나고 난 뒤에는 노인네가 다 되어가지고 느릿~느릿, 까불고 싶어도 관절이 안 좋아서 까불 수가 없어요. 까불기는 까불어도 아파요, 모든 게. 밧데리가 다 떨어진 거예요, 밧데리가!
전도서에도 그 말씀이 나오지요. 7장 1-2절에 보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이유가 뭐냐?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4절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지혜자, 자기 자신을 아는 자는 자기가 사물체,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새삼스럽게 죽이는 게 아니고 죽음 그 자체를 품은, 죽음을 담고 있는 사물체로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1년 지나면 돌잔치 하지요. 죽음이 안에 내장되어 있고, 죽음이 안에 내장되어 있고 그것이 결국은 주님의 스스로 있는 자라, 내가 집어넣은 원리원칙에서 너는 아무리 애를 써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게 70년 80년 지나면 증명이 되지요. 인간은 죽으니까요.
그렇게 인간입장에서는 ‘그러려면 왜 태어나게 했느냐?’ 하지만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그거예요. 인간 속에 집어넣은 하나님 자신의 일관된 원칙입니다. 그 일관된 원칙이 뭐냐 하면, 자기가 사물체인 것도 모르고, 자기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상대방을 사물체로 간주해서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냥 움직이는 기계로 봐서 찔러 죽인 그 덕분으로 자기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들은 사물이고 살아있는 승리한 자기 자신은 마치 사물이 아니고, 죽을 인간이 아니라, 죽을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신 같은, 영광 받아야 될 신인 것처럼 자기를 기념하는 건물구조물과, 건축물과 도시를 건설하는 거예요.
이것은 뭘 잊어버렸느냐? 인간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에요. 의존적이에요. 의존적 인간은 하나님이 집어넣은 대로 움직이는 의존적 존재에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게 그게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집어넣어 준 죽음이 이끄는 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에요. 아무리 과학자고 철학자라도 이것 모르면 바보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뭐 대단한 줄 알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근원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냥 인간이 죽는 것이 아니라 죽는 이유까지 아울러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준 거예요.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죽는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십자가지요.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것은 인간들이 이미, 이미! 벌써! 하나님께서 버림받은 죽은 시체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표해서 그걸 보여준 거예요.
인간이 자기가 잘난 체를 하고 뭐 대단한 체를 해 봤자 십자가 앞에서는 참 한심스럽고 같잖지요. ‘뭐 저런 게 다 있어, 저거? 오늘 있다가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게 저게 왜 저렇게 까불고 있느냐?’ 말이지요. 왜 교만했느냐? 자기를 기념하기 위해서 성을 쌓고. 지금 바벨론 제국들이 자기가 정복한 사람들 포로들을 데려다가 바벨론 나라에 큰 집을 지어서 이렇게 잘난 체 하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피로 물든 성읍’이라고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 12절에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했다고 되어 있어요. ‘피’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전쟁에서 피를 내지 아니하는 전쟁은 없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성공했다는 말은 그만큼 누가 피 봤다는 뜻이에요. 대표적인 것이 뭐냐? 주식시장입니다. 내가 주식 투자해서 재미 봤다는 것은, 누가 피 봤다는 뜻이에요.
아파트 투기해서 돈 2억 벌었다는 것은, 누가 그 아파트에 돈 없어서 못 들어갔다는 이야기거든요. 인간이 성공한 것이 잘됐다, 이런 게 아니에요. 지금 인간에게는 잘된 게 없어요. 진짜 그걸 아는 똑똑한 사람은 마음이 초상집에 가 있지요. 그게 전도서 7장 3절의 말씀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 실패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가 성도가 할 말이 아니라 ‘진즉에 죽어야 되는데 계속 살아가는 이 횡재가 웬 말이냐?’ 이게 바로 성도가 해야 될 고백이에요. ‘왜 자꾸 살게 해주지?’ 우리보고 거지 되라는 말이 아니고 돈이 많이 있더라도 이 자체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는 것이 성도의 마음가짐이에요.
왜냐하면 나는 절대로 스스로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스스로 계신 분은 따로 계시고 그분에게 우리는 완전히 의존적 존재가 되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자, 이것을, 예레미야 22장에서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르기를 다윗의 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다윗의 위에 앉은 유다왕이여.” 설명하면 유다 왕의 자리에는 내가 다윗언약이라는 것을 쏘옥 집어넣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일관된 자기 원칙이에요. 세상 사람 속에는 죽음이라는 자기 원칙을 집어넣었지만 이스라엘 속에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집어넣은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언약 없이 그냥 집어 넣어버리면 그 사람들은 죽고 나중에 “화 있을찐저” 오늘 본문대로 하면 “화 있을찐저”에요. 저주, 지옥 가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죽어요. 죽는 것은 맞습니다만 그 죽음을 통해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일관된 원칙이 이스라엘 내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작동하고 있음을 누가 보여주는가? 유다 왕이 보여줘야 돼요. 이스라엘 유다 왕이 이 다윗의 자손의 계통이니까 그런 그 유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뒤에서 하나, 둘, 세 번째, 세 번째 왕, 세 번째 왕이 여호야김왕인데 그 여호야김 왕이 다른 주변에 있는 우상을 섬기는 제국의 왕을 흉내 내서 자기도 꼭 그대로 통치를 했어요.
그게 예레미야 22장 13절에 나옵니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삯도 안줘요 “화 있을찐저” 여기 또 화 있을찐저, 그러니까 바벨론 제국이 하는, 이방 민족이 하는 그 짓거리가 하나님의 소위 택한 민족이라는 이스라엘 유다 나라 내부에서도 그 일이 일어났는데 그게 여호야김이라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왕을 아주 작살을 내고 저주를 해버렸는데 그 저주의 차원이 어떤 차원이냐 하면, 예레미야 22장 2절 말씀 “이르기를 다윗의 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유다 왕은 그래서는 안 된다, 라는 시범조로 하나님께서 여호야김을 쳐버린 거예요. 이방 민족 심판하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먼저 심판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내에 이방나라 같은 똑같은 성향을 가진 왕이 등장해 가지고 이방 민족이 하는, 자기가 자기의 권위와 위신과 체면을 위하여 백성들을 함부로 부리는, 자기만이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해서 자기만의 특권을 누리는 그자를 이방 나라 치기 전에, 물론 이방나라 칩니다, 치기 전에 이스라엘 왕부터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해놓고 그걸 쳐버리는 거예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상당히 사람들을 함부로 친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느낌을 줄 것인데 그것은 여러분들의 큰 오해고 오산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을 제가 읽어드릴 테니까요, 여러분들의 마음가짐에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정돈해 보시기 바랍니다.
열왕기하 2장 23, 24절에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
우리 하나님 착하고 선하신, 어떤 그런 하나님이십니까? 그 애들이 엘리사선지자 보고 돌을 던졌습니까? 일진 애들이 와서 칼을 휘둘렀어요? “라이터 좀 있습니까?” 이렇게 건방지게 했습니까? 안 했지요. 그냥 선지자 외형을 보고 “대머리야!” 하면서 “대머리가 우리 동네 또 왔네, 대머리!” 이렇게 한 거예요. “대머리야!”라고. 그러면 그 애들 부모입장에서는 그 하나님께 뭐라고 항의하겠어요? “왜 하나님은 선지자를 대머리 되게 하셨습니까?”
대머리야, 했다고 해서 엘리사가 “이리와! 꿀밤 맞자.”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수풀에서 암콤이 나왔는데 암콤이 몇 명의 애를 죽였는가? 42명의 애를 그냥 죽이지 않고 찢어 죽였습니다. 이게 우리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어요? 하나님에 대해서 뭐 아십니까? 어떤 분인지 아십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대머리 되게 해가지고……, 그 철딱서니 없는, 뭐 알고 그랬겠어요? 대머리를 대머리라 하는데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홍시를 가지고 홍시 맛이 난다고 하는데 그게 뭐가 애 탓이 되겠어요? 대머리 보고 “아이고, 머리숱이 많네.” 이렇게 할까요? 대머리 보고 대머리라 했는데 치려거든 그 버릇 없는 애들 말고 그 애들 엄마를 쳐야지, 엄마 아빠를 치든지 해야지 그것도 아니고 애를 42명이나 죽입니다.
이태원 같으면 위령제하고 난리가 났어야 해요. 행안부 장관도 물러나야 됩니다.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게……, 도대체 뭘 알아요? 아는 게 뭡니까? 인간은 죽어가는 그 몸 하나 챙기는 것만 알지 하나님에 대해서 뭘 알아요?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놓고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폭력적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있는 분이라는 것,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을 제가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찾아서 믿고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을 주님 쪽에서 피해버려요. 그게 하나님이십니다. “주님, 믿고자 합니다.” “너 아니거든! 저리 가!” 주님 쪽에서 피해버려요.
우리는 하나님은 떡 서 있고 찾는 사람은 구원받고 ‘바빠서 나중에 오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지옥 간다고 생각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결정하는 거예요. 누가 구원되고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결정하지 “내가 여기 있을 테니 내가 주소 알려줬지? 내비게이션 켜고 나 있는 곳에 와서 천당 가거라.” 이런 분 아니에요. 그런 분 아닙니다. 와도 못 만나요. 찾아도 찾은 바를 당하지 않습니다. “집에 가! 집에 가, 집에 가! 내가 부를 때까지 그냥 집구석에 있어.” “내가 주를 믿고자 합니다.” “그 입을 매우 쳐라.” 천사 보고 “입을 매우 쳐라.”
이게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골라서 구원하지 우리가 애타게 찾는다고 구원해주시는 분 아닙니다. 그게 ‘스스로’에요. 스스로 매사에 하나님 쪽에서 나온 기획, 계획만 담겨 있어야 돼요. “뭐 우리 교회는 교인도 없고…….” 그 교회 성공하신 거예요. 정말 성공하신 거예요. “이만하면 뭐 예배당 꽉 찼다.” 그것은 지금 본인들이 죽은 존재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겁니다.
자기계획이 서버리면 인간의 계획은 스스로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막는 그러한 기능이 있어요. 내 계획에 미쳐가지고. 그래서 여러분이 아셔야 될 것은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 죄가 무엇인가를 한번 봐야 돼요, 그 죄가! 지금 엘리사보고 대머리라 했다고 죽여버리니 얼마나 폭력적입니까? 참 폭력적이거든요.
이것은 도저히 인간세계에서는 납득이 안되고 논리적으로 그것은 수용이 안 된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들이 이성적이라는 뜻이에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이성적이에요. 하나님은 폭력적이고, 인간들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인간은 배려심도 많고 동정심도 많아요. 상식에 상식으로, 상식적으로 하는 것이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이 인간세계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예수님께서 도대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했기에 예수님을 체포합니까? 에수님의 죄목에 대해서 요한복음 10장 20절에 나옵니다. 이 요한복음 10장 20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죄목을 보면요, 지금 우리가 진짜 진짜 예수를 믿는지 아니면 내가 구라로 만든 가짜 예수를 믿는다고 지금 우기고 있는지 판정될 겁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이겁니다. 예수님의 평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도 아니에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도 아닙니다. 어떤 선한 것도 없어요. 딱 압축해서 이야기하면 뭐냐? “귀신들렸는데 미쳤다.” 이겁니다.
이게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왔을 때 이런 모습이에요. 귀신들렸고 미쳤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하등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고 신앙심의 모순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미쳤고 귀신들렸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 사람들이 설교에 납득이 된다는 것은 가짜 예수를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진짜 예수를 전하면 그 설교 하나하나 내용이 이것은 완전히 미친 것이고 귀신들린 거예요. 우리가, 양심적이고 이성적인 우리가 알아듣겠어요? 못 알아듣겠지요. ‘저건 예수가 아니야. 저건 메시아가 아니야. 가짜야.’라는 평을 내려줘야 제대로 설교 된 겁니다. 그것은 자, 그런 식으로 하면 아무도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아무도 인정 못 하지요.
그런데 누가복음에 보게 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누구냐? 제자? 아니. 착한 사람? 아니. 어린아이? 아니. 불쌍한 사람? 아니. 죄인들? 아닙니다. 누굽니까? 누가복음 4장 41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누가 증명하는가? 귀신들이 증명해요, 귀신들이. 그러니 인간은 귀신보다 더 못합니다. 왜? 귀신한테 매여 사니까.
다윗의 언약 속에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임을 거기다 내용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그리고 그 모든 말씀에는 인간세계는 무조건 “화 있을찐저”입니다. 누가 영생을 얻는가? 바로 그렇게 인간세계에게 “화 있을찐저”라고 외쳤던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자만이 하나님은 영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떠나는 미군 수송기에 매달린 것은 사물체가 사물체에 의존해서 목숨 부지하려고 생명 더 얻어보려고 했지요. 그 생명, 그것은 생명 아닙니다.
요한1서 2장 25절에 보면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요한1서 5장 11, 12절에 보면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물체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하나의 진짜 밧데리 떨어진 로봇, 그냥 물체지요 물체, 물체 된 인간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뭐가 있느냐?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정하면 된다는 것이 요한1서에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누굴 붙드는 게 아니에요. 수송기 바퀴 붙들 듯이 누굴 붙드는 게 아닙니다.
사람하고 좋은 관계를 이루고, 그것도 붙드는 것인데 사물체가 사물체 붙들어봐야 소용이 없지요. 인간이 세상을 붙들고 인간을 붙드는 그것은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간 거예요. 마귀만은 인간을 사람으로 대우하거든요. 네가 신처럼 되리라. 그러니까 전부 다 신인양하고, 꺼떡거리고, 까불거리고, 그렇다 이 말이지요.
아담이 있고 우리는 아담의 후손들이잖아요. 아담 시대가 끝나고 오늘날 그 후손들의 시대인 인간의 각자각자의 마음은 뭐와 같으냐 하면, 마치 갓 잡아 온 산 낙지 같아요. 산 낙지를 횟집 주인이 날카로운 칼로 토막토막 쳐서 접시에 올려놓고 옆에는 참기름 장하고 소금하고 내놓잖아요. 그런데 그 산 낙지가 토막토막 났는데 토막 났으면 좀 잠잠하게 있는 게 아니고 그 토막 난 조각조각들이 막 꿈틀거리고 있어요. 그게 바로 인간입니다.
아담은 벌써 그 모가지가 잘렸는데, 죽었는데,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아직까지 자기는 계속 살 수 있는 것처럼 촐랑대고 있는 거예요. 밧데리 떨어질 때까지, 코에 호흡이 남아 있을 때까지 계속 촐랑대고 있습니다. 차라리 이 땅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하는 것이 나아요.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한다고 해서 뭐 거지 되라는 말이 아니고, 다시 말해서 내가 기획하고 내가 계획하는 이것이 영생하고 전혀 엉뚱한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감 잡아야 된다는 뜻이에요.
영생은 갈수록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영생을 주러 왔다’는 사실이 더 크게, 더 큰 가치와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와 줘야 돼요. 쉽게 말해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주께서 성공하신 겁니다. 그 성공에 나의 토막난 산 낙지 쪼가리 난, 산 낙지의 조그마한 성공은 아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속 시원해요.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만 큽니다. 8강 탈락했다고요? 잘됐어요. 그만 16강에서 그걸로 됐어요. 축구 선수로 한 20억 타면 됐지, 뭐 그러면 됐어요.
예수님의 죄목은 귀신들렸다는 것과 미쳤다는 거예요. 귀신들리고 미쳤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세상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진짜 예수는 귀신들리고 미쳤다, 그걸 나의 구주로, 영생 주신 주로 내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도 같이 귀신들리고 미친 사람 대우받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러니 안 미치려고, 성공하려고 하니까 점점 더 영생하고 멀어져 가는 거예요. 마귀 사람 되는 거지요. 요한복음 21장 19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가 죽는데 베드로의 죽음까지,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을 확인해주고 증명해 주는 식의 죽음으로 주께서는 베드로의 허리띠를 띠고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리고 기어이 베드로로 하여금 죽게 만들어서 그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만들어버렸어요.
우리 보기에는 베드로가 좀 손해인 것 같지요?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냥 죽음을 머금은 사물체에요. 언젠가 죽을게 죽지요, 뭐. 그동안 산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그게 베드로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해당되지요.
오늘 본문 하박국을 다시 한번 봅시다. 2장 14절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 이걸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되어 있어요. 영광을 아는 것.
왜냐하면 예수님이 영광의 응결체거든요. 독생자의 영광이에요. 하나님의 영광은 이 땅에서 독생자의 영광으로 모든 것을 집중시켜 놨습니다. 집약시켰어요. 예수님 독생자를 모르면 하나님의 영광을 모르는 자에요. 그 독생자의 영광을 품은 거기에 영생이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모든 지식의 결집체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그게 나와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 곧 예수님을 아는 것이 바로 그게 영생이에요. 내가 어떤 물체를 붙든다든지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서 영생이 아니라, 나 말고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분이 하신 일을 아는 것이 그게 이미 영생 안에 들어온 거예요.
다시 한번 복습해볼까요? 예수님을 아는 지식, “예수님이 누구지요?” “미쳤고 귀신들렸어요.” 미쳤고 귀신들렸다. 인간들은 그런 평을 하는 이유가, 자기는 될 수 있는 대로 멀쩡하기를 원하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못되어서 환장한 사람들이에요. 그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그것이 자기를, 자기의 주제를 점점 더 격상시킨다고 보는 거예요.
영생과 가장 거리가 먼 상태가 뭐냐? 자기 가치를 격상시키는 사람들이에요. 성화론, 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자기 자신의 의미를 격상시키고 키워보려는 것, 그건 바리새인들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주동해서. 뭐라고? 미쳤고 귀신들렸다. 귀신들이. 아까 누가복음 4장도 이야기했지만 8장 2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귀신들이 날것을 그대로 봐야 귀신은 귀신이거든요. ‘귀신 = 귀신.’ 귀신은 그게 없어요. 자기의 신체가 없고 날것을 그대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날 것으로 그대로 다 보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이 육신이 있어서 이 육신을 내 힘으로 어떻게 멋지게 꾸미고 나를 연출하고 남들 보기에 나를 인정받기 위해서 육신을 어떻게 포장하느냐, 거기에 정신을 쏟으니까 그래서 계속해서 가짜 예수를 자꾸 믿어요, 가짜 예수를!
나의 가치를 북돋워 주는, 나를 성공한 자로 만들어주는 예수, 자꾸 철야기도 하고, 커피 석 잔 먹고 그렇게 하는데, 크리스마스 장식하고 하는데, 진짜 이미 인생 포기한 귀신은……, 인생이 뭐 귀신에게 있겠어요? 운명을 포기한 귀신은 그대로, 생것으로 그대로 고백해 버려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입 다물라. 나는 너 구원하러 온 게 아니야. 입 다물어! 나는 인간하고 상대하는 거야. 너하고 상대하지 않아. 비록 네가 인간들 속에서 인간을 조종한다 할지라도 지금은 입 다물어.”
그 자기 백성이 있는 거예요.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면 그들의 어두운 영혼,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십자가에서 그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을 해줘야 돼요. 십자가의 그 일이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뭐냐? 바로 십자가를 아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사람보다 못한 대우를 받아서 귀신 취급받고 죽어버린 그분에게만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사실, 그 가치 앞에 나는, 나의 개인적 가치는 이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증인이라 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아야 증인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있는 분, 활동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저주와 동반해서 왔고 저주하시는 그 하나님이 참으로 합당하다는 것을 깨닫는 그 지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영생을 얻는 성도가 발생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십자가 안목으로 같이 볼 수 있는 그런 영안이 열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