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2a 울산강의-역대기상(13강) 11장 5절 : 인간에서 장소로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11장부터 하겠습니다.
11장 1절에, “온 이스라엘이 헤브론에 모여 다윗을 보고 가로되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전일 곧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가 왕이시었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그다음에 3절부터 나오는 것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니 다윗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 여호와께서 사무엘로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 이렇게 되었어요. 말씀대로 되었다는 말은 사람이 한 게 없다, 그런 뜻이죠. 모든 것이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라는 뜻이에요.
언약이란 게 뭐냐 하면 그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에요. 이번에 일이 성사된 것은 당신이 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한 것도 아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주님이 그냥 계신 게 아니고, 주께서 계십니다가 아니라 주께서 하셨습니다. 주님이 계십니다(X). 주님이 하셨습니다(O).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이 계셔버리면 이건 그냥 존재 있음이 돼요. 존재가 있음이 되면 하나님 여기 계시고 너 여기 있고 나 여기 있다고 한다면 그냥 하나님, 너 달랑 이렇게 뚝뚝 떨어져서 존재하게 되는 거죠. 하셨습니다, 로 돼버리면 내가 주님을 하도록 하지 않았고, 너도 주님을 하도록 시키지 않았고 주께서 나 일하게 했고, 주께서 너 있게 했다가 돼버려요.
그러면 여기서 주님이 계십니다, 라고 보면 주님도 계시지만 나도 있다. 이렇게 되겠지요. 하나님 계시고, 인간 여기 있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셨습니다, 라고 돼버리면 이거는 인간에서 뭐로 나가느냐 하면 이게 장소로 나가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장소 자체가 주께서 일하는 작업 터가 된다 이 말입니다. 장소 자체가.
그렇다면 평소에 우리가 만약에 주님이 계신다고 보면 이게 그냥 인간에서 장소로 나가는 게 아니고 내가 여기 있으면 내 장소 따로 있는데 내가 일을 해서 주님을 내 장소에 들어오도록, 거기서 내 인생에 구원 받는데 도움이 되도록 내 쪽에서 내가 일한 바가 돼버려요. 그게 그대로 살아있다 이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일을 하면 주님의 일이 가려집니다. 그런 뜻이에요. 주께서 하셔야 되는데 주께서 하신 게 떠오르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가 일한 것만 생각나면 그 내가 일한 것이 뭐를 가로막느냐 하면 주께서만 일했음을 내가 방해물이 되는 거예요. 그걸 가려버리는 거예요.
주님이 계시다. 이걸 믿음이라 하면 안 됩니다. 제가 지난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을 믿는데 인정하는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그래, 내가 활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활동하는 것을 내가 알아채요. 내가 의식을 하고 있어요.
그게 뭐가 문제냐? 열심히 주를 위해서 섬기면 되잖아, 열심히 하면 되잖아, 자꾸 이렇게 나오는데 내가 일함으로써 주의 일에 방해물이 된다는 생각을 우리가 해야 됩니다. 주께서 하는 것을 커버해버려요. 덮어버려요.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러면 우리가 하는 일에 여러분 일해 보면 아시겠지만 썩 마음에 듭니까, 아니면 뭔가 결핍을 느낍니까, 불만이 생깁니까? 어떻습니까? 내가 하는 일에 세상이 안 따라줄 때 불평불만이 생기겠지요. 그러면 그 원망을 누구한테 하겠어요? 결국 하나님한테 해대는 거예요.
그런 사람의 대표자가 있었지요. 신약에 예수님 제자 가운데 누구냐? 가룟 유다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아먹었는데 팔아먹을 만한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요. 불만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성에 안 차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을 때는 주님이 내 인생에 대해서 방해했다는 혐의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모든 것을 바쳐서 주님을 삼 년 동안 따라다녔지만 내가 원하는 성과를 주님이 나한테 제공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가룟 유다입니다.
왜 자꾸 가룟 유다를 배포하느냐 하면 가룟 유다 자리에 그게 우립니다, 라는 말을 제가 하고 싶은데 실례될까봐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우리에요. 그동안 오십 년, 사십 년 교회 다녔는데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썩 성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차마 말은 못하고 그냥 불만을 터뜨리는데 그걸 노골적으로 하면 벌 받을까 싶어서 기도형식으로 바꾸는 겁니다. 간절한 기도로. 간절한 기도가 뭐예요? 그만큼 할 말이 많다는 뜻이에요. 불만이 많다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 지금 가룟 유다는 본인이 본인을 수습하려고 하는 거예요. 본인 인생이니까.
아까 그림 다시 그려봅시다. 하나님을 존재 본다면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라고 보지 않고 주님이 계십니다, 이렇게 봐버리면 주님 여기 계시고 나 여기 있고 너 여기 있다, 이렇거든요. 그러면 내가 있을 때 내가 가만있습니까? 일하잖아요. 일하게 되면 여기에 뭔가 성과가 나타나지요. 이게 뭐냐? 내가 일한 이게 누구의 자리냐 하면 그게 나의 자리가 돼요. 아까 약간 언급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뭘 인정했느냐 하면 네가 노력한 것은 뭐로 인정해주느냐? 부채꼴로 해서 너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께서 존재를 인정해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주님은 주님의 자리가 또 따로 있는 거예요. 따로 노는 거예요. 따로 놀아서 내 쪽에서 주님께 간절히 헌신하고 충성하고 기도하고 봉사해서 주님의 성과를 내 자리를 빛내기 위해서 여기다 끌어당기기 위해서 굉장한 많은 노력을 다하는 거예요. 주님 덕 좀 봅시다.
이게 나의 자리라 하니까 내 가정의 자리라 할 수 있어요. 내 사업체 자리, 내 직장의 자리, 내 가문의 자리, 내 교회의 자리라 할 수 있어요. 내 교회의 자리에 주님이 하신 일이 와서 덕 좀 보자는 겁니다. 기도했으면 얻을 게 있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근데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 이런 의식 자체가 주의 일하심을 훼방하고 있다는 거예요. 마귀가 따로 없다는 겁니다. 네가 마귀 노릇하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자리를 고집하는 이유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자기가 좀 정상적이고 싶은 거예요. 제대로 된 인간이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성경에 인간이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따먹을 때에 하나님의 벌칙은 뭐였습니까? 정녕 죽으리라 했지요. 그러면 죽을 인간은 정상적인 인간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죽을 인간 만든 게 아니니까 이건 비정상이잖아요.
인간은 본인이 비정상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것을 자꾸 놓쳐버리고 잊어버려요. 자기가 정상이고 멀쩡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정상적인 내가 정상적인 하나님께 덕 좀 보자는데 하나님은 왜 안 도와줍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은, 네가 뭘 보고 정상이야. 너는 죄인이야,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러면 인간은 가만있지 않아요. 내가 뭐 죄인입니까? 내가 무슨 나쁜 짓했습니까, 하면 하나님께서 네가 네 하는 일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그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네가 철저하게 커버하고 방해하고 막고 있고 감추고 있고 가리고 그걸 덮고 있으니까 너는 나의 방해물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란 뜻이에요.
인간들은 뭘 해도 안 망가지려고 애를 써요. 이런 사고방식이 정상이 아닙니다. 망가지라고 인간을 만들어놨는데 그게 안 망가지겠다는 것은 배후에 악마가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인간 자체가 정상이 아니니까 정상이 아니고 망하는 그것이 정상적인 네 자리다, 이걸 통보하고 그렇게 되도록 주께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괜찮은 존재 안 되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주께선 열심히 여러분에게 일을 하셨습니다. 제발 좀 망가져줘. 제발 좀 무너져줘. 무너져버려라. 왜? 그게 너한테 맞으니까. 네 본색에 맞으니까 제발 무너져줘. 자꾸 성공하려고 하지 말고 인생 그럴싸하게 살려하지 말고. 정상도 아닌 게 왜 자꾸 정상인 체 해. 지금 답답해서 주께서 일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이 정도만 해도 한국교회가 왜 이단인 줄 아시겠지요. 한국교회 이단입니다. 멀쩡하지도 않은 인간이 멀쩡하다고 설쳐대는 게 교회잖아요. 기도했으니까 덕 좀 보자고 억압하는 게 교회잖아요. 교회 안 다니는 인간도 정상이 아니고 교회 다니는 인간도 정상이 아니에요. 전부 다. 그야말로 마귀한테 미쳤어요.
그런 사람을 성경에서는 부각을 시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사울이에요. 역대상 12장 23절에 “싸움을 예비한 군대 장관들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로 나아와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울의 나라를 저에게 돌리고자 하였으니” 사울의 나라를 저에게, 저가 누구냐 하면 다윗이거든요.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뭐냐 하면 사울 왕은 자꾸 하나님 생각하고 사무엘 생각하면서 생각하는 게 뭐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께 속았다는 겁니다. 자기가 사무엘에게 속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에 대비해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속였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 “하나님이여, 저 골리앗을 이기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도와주면 날 안 속인 거고 하나님이 안 도와주면 저를 속인 겁니다.” 소년 다윗이 그렇게 해서 골리앗을 이겼습니까? 제가 묻는 거예요. 아닙니다.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합니다. 이 전쟁은 내게 속한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고 사무엘상 17장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이 전쟁은 너 떼고 나 떼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라고 돼 있어요.
사무엘상 17장 47절에,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칼과 창은 누가 쥐고 있습니까? 지금 칼과 창을 쥐고 있는 것은 골리앗 쪽이고 사울 군대 쪽이죠. 지금 유일하게 칼과 창이 없는 사람은 누굽니까? 소년 다윗밖에 없어요. 이 전쟁은 칼과 창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연히 맞닥뜨리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주께서 하신 거예요. 주께서 하신 것을 내가 받아들여서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있고 내 존재 있고 네 존재 있고, 존재로 보면 안 돼요. 인간이 아니고 이 설명을 지금 하겠는데 사울 왕이 뭐가 문제냐 하면 이스라엘 속에 사울 왕이 있거든요. 그런데 사울 왕은 이스라엘을 나의 나라, 자기의 나라로 본 거예요. 자기의 장소로 본 겁니다. 사울 왕을 담는 장소로 이스라엘을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고 장소로 설명하거든요. 주께서 하시게 되면 주님의 장소 안에 인간 사울도 들어있고 다윗도 들어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안에. 주께서 하시는 일 안에 불신자도 들어있고 신자도 들어있는 거예요. 지옥 백성도 들어있고 천국 백성도 함께 들어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구약을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 내부 요소가 사울적 요소도 들어있고 다윗적 요소도 들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울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가, 주님이 계신 건 인정해요. 그러나 신뢰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신뢰하는 것은 누구를 신뢰하느냐 하면 내가 행한 것만 신뢰해요. 내가 기획하고 내가 생각한 것만 신뢰해요. 누가요? 사울이요. 그럼 신약에 누가요? 가룟 유다가요.
다윗이 지은 시편에 보면 시편이 전부 기도잖아요. 그 기도의 핵심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나의 행한 것을 제거해 달라는 거예요. 특히 시편 51편 같은 경우는 대표적이요. 하나님께서 나의 제사도 원치 않고 나의 번제도 원치 않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원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대 인간 나와 나 사이에 내가 얼마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얼마나 바치면 되겠습니까? 이 문제가 아니고 현재 내가 있는 이 곳이 하나에 주께서 일하심의 결과로 나타난 어떤 장소 안에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어려우면 신약에 쉽게 ‘예수 안’으로 보면 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예수 안에서 구원 받아요. 예수 안이란 장소 안에서 그 공간 안에서 그 자리 안에서 구원 받는 거예요. 인간은 떼세요. 자리가 중요한 거예요. 자리 안에서.
그 자리 안에서 은혜가 오고 그 자리 안에서 용서가 있고요 그 자리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작동하고요. 그 자리 안에는 예수님의 피가 작동해서 그게 새 언약에서 내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새 언약 안에서 장소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 장소 안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냐? 가룟 유다 같은 존재고 사울 같은 존재에요. 죄인입니다.
우리가 나는 사울 되기 싫어 다윗 될래.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버리고 다윗을 구원했으니까 나는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될래. 이렇게 생각하시는 데 그거는 너무나 나 존재 중심으로 내가 뭘 하면 뭔가 될 거라는 성경 자체를 지금 출발을 잘못되게 해석하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분명히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우리 자체가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에요.
이게 어느 정도 비정상이냐 하면 비정상이면서도 자꾸 자기를 정상으로 보는 비정상을 또 발휘해요. 이걸 고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비정상 같으면 군소리 안 합니다. 강도처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세리와 창기처럼 죽어 마땅합니다, 이렇게 되겠는데 자꾸 정상으로 생각하니까 주님 저 어때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저 독자적으로 괜찮은 존재 맞잖아요, 이렇게 우기는 거예요. 그런데 왜 내가 노력한 만큼 어떤 결과를 안 주십니까,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이게 존재 중심이 되니까 그런 거예요.
그게 아니고 내가 도대체 이 동네가 어떤 동네가 이 동네가 얼마나 거룩한 동넨데 시건방지게 더러운 내가 이 장소에 있어도 되나,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야 되는 거예요. “정상도 아닌데 내가 왜 이 장소까지 언약 안까지 누가 집어서 들어왔지? 주께서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역대상 11장에 사울 왕 이야기, 다윗 왕 이야기할 때 이게 보통 필수적인 이야기가 아니에요. 진짜 필수적인 이야기입니다. 어느 정도 필수적인 이야기인지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어요.
다윗은 주께서 하셨습니다, 로 이끄는 장소 안에 있는데 이걸 뭐냐 하면 아까 했지요. 역대상 11장 3절, 언약 안이라는, 다윗은 장소 안에 언약 안에 있어요. 그런데 사울은 따로 자기 안에 이스라엘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하고 있어요. 전쟁할 때 하나님께 제사 드려야 한다고 우기거든요.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사울은 또 사무엘도 믿어요. 어려운 것 있으면 누구한테 찾아가야 된다? 사무엘에게 찾아가야 된다. 왜 찾아가야 되는데? 나만의 장소가 멀쩡하기 위해서 건사되기 위해서 지켜내기 위해서 나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목적이 뭡니까? 결국 목표점이 어디에요? 아무리 하나님 찾고, 목사님 찾고, 사무엘 찾고 선지자 찾아도 최종 목적은 뭡니까? 나지요. 왜? 본인은 정상이라고 보기 때문에, 멀쩡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이 사울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요소, 요건으로서 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어렵다. 이스라엘은 뭐로 돼 있느냐? 사울과 다윗으로 중첩돼 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사울 요소와 다윗 요소로 중첩돼 있다. 중첩돼 있으니까 하나님께선 사울 왕 시대에는 다윗이 부하니까 누가 권력이 있고 누가 위세가 세요? 사울이 세지요. 다윗은 골리앗 이겼지만 쫓겨 다니기 때문에 백성들도 권력적으로 다윗은 사울에게 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복속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누가요? 백성들이.
백성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울 왕의 이스라엘을 그걸 유일한 이스라엘로 정당성으로 인정해줬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중첩된 것을 누가 푸시는가? 하나님께서 풀어버려요. 푸시면 사울 왕 제거되고 차기 왕이 다윗으로 바뀌는 겁니다. 중첩된 것이 일렬종대로 나란히 된 거예요. 풀려서. 사울 왕 그다음에 다윗이 있는데 이 다윗이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다윗이 누굴 친다? 사울 왕 소유로 돼 있던 이스라엘을 치는 방식으로 다윗이 왕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어느 정도 어려우냐 하면 이렇게 어렵습니다. 내가 여기 있잖아요. 내가 여기 있을 때 나는 정상도 아니면서 정상이라고 우기는 이게 사울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도한데는 성도가 내 인생 내가 알아서 구원해야 되고 나는 반드시 천국 가야 된다고 우기는 게 사울이란 말이죠. 왜?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의 하심은 안 믿어요. 하나님을 믿어요. 하나님이 하신 내용을 믿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활동을 믿지 않아요. 사울 왕과 똑같아요.
그런데 주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나를 뭐로 바꾸느냐? 가룟 유다, 사울 왕으로 바꿔버립니다. 바꾸는 동시에 내 안에 중첩돼 있던 누구를 끄집어내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끄집어내요. 예수님을 내 속에서 끄집어내버린다고요. 그러면 예수님 입장에서 다윗 입장에서 사울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이스라엘을 누구 나라로 봤다? 자기 개인 소유 나라로 봤지요.
그러면 신약에 와서 이 몸뚱이, 여러분 육체 남자, 여자 몸뚱이를 그동안 누구 것으로 봤던 거예요? 내 것으로 봤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욕되게 했던 그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중첩된 예수님이 풀리면서 우리에게 역으로 지적해주시는 거예요. 이 몸이 내 몸 같으면 인생 한 평생 살아온 것 고생 누가 했겠어요? 내가 했지 누가 했겠어요.
사오십 대 여자분들 애들 두고 하는 이야기가 그거 아닙니까. 이제 이야기한다만 내가 시집와서 너희 할머니한테 얼마나 구박받았는지, 하고 이야기 시작되잖아요. 그래야 이야기가 두 시간 반 동안 이어지지 않습니까. 내가 시집와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얼마나 구박하고 시아버지 아플 때 똥 기저귀 다 갈고, 나오잖아요. 그것 누가 하셨습니까? 위대하신 본인이 하신 거예요. 그 이야기 왜 합니까? 나는 정상이라는 거예요. 나는 하자 없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난 남보다 밑지지 않는 존재라는 거예요. 존재에요, 존재. 너란 존재보다 월등하다는 겁니다. 아이 셋 낳아서 내 손으로 다 키웠다는 겁니다. 왜 그런 소리합니까? 나 정상이라는 거예요.
그게 가룟 유다처럼 마귀 들려서 하는 이야기라는 걸 세상 사람들 상상도 못해요. 주께서 지금 우리가 하나, 안 하나 업적을 말하는 게 아니고 내가 했다는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주께서 하셨다는 것을 아주 개 무시하고 짓밟아버리는 그런 마귀 짓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나라는 존재가 이만큼 되려고 인생 이만큼이라고 밥이라도 먹고 집 하나 마련해서 사는데 내가 죽을 둥 살 둥 고생 얼마나 했는지 지금 허리디스크 다 나갔잖아. 너희들 밥 먹이려고 이렇게 고생했다.
특히 아직까지 남편 있을 경우는 덜 하지만 젊었을 때 남편 사별하고 아이 셋 키웠을 때 그런 혼자서 아이 다 키운 아주머니들이 늘 앞에 나오는 말이 있어요. “너희 아버지 세상떠나고 …….” 너희 아버지 세상 떠나고 내가 식모부터 식당 안 한 일이 없다, 이렇게 나오지요. 거기서 여러분 감정이입 되지요. “아이고, 저 아줌마도 고생 되게 했구나.” 이런 생각 들지요. 둘 다 사울이에요, 사울.
교회 왜 다녔어요? 교회 다닌 이유가 뭐예요? 나 알아달라고 교회 다닌 거예요? 자꾸 본인이 본인을 수습하려고 하지 마세요. 수습을 한다는 것은 자기가 그다지 나쁜 인간 안 되려고 악을 쓰고 있는 모습이에요. 요한복음 13장 27절에 보면, 이번 수련회 때 이 대목을 언급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나눠줍니다.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이스라엘은 인류의 대표에요. 이스라엘이 인류의 대표라는 말은 하나님과 유일하게 접속이 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대표자가 뭐냐? 그 당시에 지도층에 있는 사람이죠. 장로, 또는 선지자, 제사장, 왕 이런 사람이죠. 그 이스라엘 지파가 열두 지파에요. 그럼 예수님께서 제자를 뽑을 때 일부러 숫자를 열둘을 뽑았어요. 뽑고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10장에 나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왔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구성하겠다고 선언하시고 열두 제자를 뽑은 겁니다. 그런데 그 열두 제자가 이스라엘이 인류의 대표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뽑은 열두 사도가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직접 같이 동행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누구라고요? 그 중의 하나가 가룟 유다에요. 그러면 가룟 유다는 인류의 대표자의 하나의 요소로서 조건으로 요건으로서 거기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가룟 유다 하나지요. 그럼 나머지 제자는 몇 명이죠? 11. 11의 의견이 예수님을 지켜줍니까, 하나의 의견이 예수님을 지켜줬던가요? 어느 쪽입니까? 하나가 셉니까, 열한 명이 셉니까? 하나가 센 거예요. 가룟 유다 하나가 열한 명의 예수님의 지킴을 허사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이 말은 가룟 유다의 그 태도와 마음가짐을 이해 못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천국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런 뜻이에요. 가룟 유다를 넘어서야 돼요. 그런데 열한 사도는 가룟 유다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 넘어서서 예수님 제가 지켜 드릴게요, 한 제자가 한 명도 없어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아먹을 때 나머지 제자들 다 도망갔습니다. 전부 다 가룟 유다보다 못해요.
왜? 가룟 유다 속에는 뭐가 들어있기 때문에? 여기 요한복음 13장 27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떡 조각 하나를 주니까 사단이 악마가 그 속에 들어간지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 보고, 유다야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부터 해서 어떤 인간도 가룟 유다를 넘어서서 자진해서 구원 받을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음을 가룟 유다로 하여금 턱을 만들어버린 거예요.
다윗이 아무리 골리앗을 이겨도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통해서 다윗이 쫓겨 다니는 볼품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도 사울을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 잘 믿고 싶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지요. 그러나 가룟 유다의 요소, 사울의 요소가 아주 세요. 우리가 우리 힘으로 그 선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다시 역대상 11장으로 가봅시다. 11장 3절 끝에,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 여호와께서 사무엘로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 주께서 일하실 때 말씀대로 일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다윗이 괜찮다 해서 다윗을 옹립해서 사울을 이기질 않았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개입되지 않으면 어떤 경우라도 다윗이 차기 왕이 될 수 없어요. 그만큼 사울은 견고하고 단단해요.
인간들은 사울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사울 왕이 통치하는 방식에 대해서 모든 백성들이 찬동했다는 그 뜻입니다. 동의한 거예요. 다윗 방식이 아니고 사울 방식에 대해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거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본능들을 갖고 있어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면 그 말씀대로 이야기한 그 대목을 찾아봐야 되겠지요.
사무엘상 16장에 보게 되면 이렇게 돼 있어요.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이게 하나님과 사무엘만 알고 있지 다른 사람은 몰라요. 다른 사람이 알면 다 죽어요. 심지어 사울이 사무엘도 죽이려고 했으니까. 그래서 사무엘이 도망가고 그랬어요. 하여튼 이 나라는 이스라엘은 누구 소유냐 하면 사울 왕 소유에요.
내 것 건드리면 인간은 분노합니다. 흔히 남자들이 여자들은 화 안 낸다 하지만 여자들의 눈물이 분노에요. 여자들은 화날 때 울어버립니다. 질질 짜면서, “당신이 나한테 그럴 수가 있나?” 울 때는 분노하고 있는 중이에요. 눈물도 무기가 되니까. 내 것 지키기 위한 최후의 무기가 눈물이니까. 물론 그것도 이삼십 대 말이지 사십 넘으면 프라이팬 들고 설치겠지만. 젊은 때 나름 자기가 순박하다고 여길 때 눈물 흘리면서 호소하는 방법으로 내 것 지키지요.
사울 왕은 지금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합니다. 왜? 자기 나라거든요. 자기가 왕이잖아요. 여러분 인생에서 여러분이 왕이잖아요. 내 것 건드리면 분노하지요. 그런데 내 것 건드리는 그것이 주님께선 뭐냐? 네가 내 것을 유지하기 때문에 너는 자꾸 나를 들이박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울 왕이 말하기를, “제가 언제 들이박았습니까?” “다윗을 들이박는 것이 날 들이박는 거야.” 우리는 매일같이 내 것 지킨다고 주님을 차로 들이박아서 주님 골병들 판이에요, 지금.
그래서 하나님께서 몰래 가야 돼요. 알면 사무엘이 죽어요. 몰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거짓말해요. 내가 어디 가서 제사 지낸다고 거짓말하고 몰래 와서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에 와서 몰래 하는데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1절 끝에 보면,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예선전 알지요. 네 아들 중에서 예선하였다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누가 왕으로 간택될 줄은 사무엘도 모르는 겁니다. 사무엘이 모른다는 말은, 이걸 아셔야 돼요. 이것 참 어려운 이야기다.
누가 왕인지 사무엘이 모른다는 말은,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보다 더 한 게 있다. 생물학적 삶을 넘어서는 삶이 있다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그저 몸뚱이 밥 잘 먹고 놀러 다니고 나중에 나이 들어서 게이트볼이나 치고 그게 인생이 아니고 그건 눈에 보이는 생물학적 인생이잖아요. 그것에 가려져서 또는 그것에 짓밟혀서 지금 발휘하지 못한 뭔가 더 한 게 있다는 거예요.
그 더 한 게 뭐냐? 이게 언약의 삶이고요 언약에 살면 그 안에 오직 주님만이 관여해요. 주님만이 작업해야 언약의 삶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있으면 인간의 개인적 삶은 눈에 보이는 육체적으로 있다, 이게 전부잖아요. 그러나 더 한 삶은 네가 어디에 속해 있다. 신약에는 예수 안이죠. 그리고 구약에는 언약 안이고. 언약이란 장소 안에 네가 속해 있다는 거예요. 이게 더 한 삶이에요.
주변을 돌아보세요. 내 인생 말고 주께서 더 주신 것 있을 거예요. 평소에 그걸 왜 못 느끼는가? 자꾸 내 인생만 생각하다보니까 모르지요. 여기 손에 들여다보니까 빨간색, 파란색 있는데 이것보다 더 한 게 있어요. 까만 것 있어요. 더 한 게 있다고요. 예수님이 해주신 게 있다고요. 그러나 우리는 하루하루 삶이 너무나 빡빡하게 내가 뭘 해야 내가 무슨 결과를 얻는다. 여기에 완전히 굳어져버리니까 동맥경화증도 그런 경화증 없어요.
완전히 거기에 딱딱하게 굳어져버리니까 뭘 다 잊어버리느냐 하면 내가 한 것 말고 주께서 하신 널널한 공간의 혜택을 놓쳐버리고 잊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맨날 삶이 내 한 것만 생각하니까 하루 스물네 시간 짜증만 내고 분노만 불평만 하는 거예요. 왜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돌아갑니까, 이런 식이에요. 많이 줬는데. 뭘 많이 줬어요, 없는데. 맨날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평소에 우리에게 흔들기를 합니다. 일종의 삶의 투쟁, 삶의 전쟁인 흔들기를 하게 되면 갑자기 내가 당황스럽고 난처한 일이 생기면 거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나의 의식이 발견돼요. 평소에는 나라는 걸 생각 안 합니다. 잘났는데 굳이 생각할 게 뭐가 있어요. 첫 번째는 내 뜻대로 안 되는 당황스런 일이 있을 때 갑자기 뭐가 확 올라오느냐 하면 나는요, 내가 왜요, 하필이면 납니까, 이런 질문이 나오면서 이 뒤에 공통점이 있어요.
나는 의롭잖습니까? 물음이에요. 나는 의로운 자였잖아요. 나를 왜 이렇게 수치스럽게 만듭니까? 왜 나로 하여금 얼굴 못 들게 만드십니까, 라고 할 때 뭐가 부각된다고요? 갑자기 평소에 안 하던 나. 내가 나를 무의식적으로 어떻게 생각했는가가 티가 확 나게 만들어버려요. 누가 뭐래도 나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인간으로 그 바탕 위에서 내가 살아왔다는 것을 티가 나게 만들어버려요. 당황스럽지요. 주께서 흔들기에 나서면.
그러면 두 번째, 주께서 나를 힘들게 했으면 그다음에 인간들의 반응은 뭐냐 하면 도피, 도망, 숨기에 들어갑니다. 숨을 때 그냥 숨지 않아요. 이렇게 숨어요. 그래도 나는 이것만큼은 선하고 의롭잖아, 라는 그런 업적을 품에 안고 깊은 밑에 자기만의 동굴로 도피해버립니다. 그게 인간이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이에요. “이 시점에 내가 망가졌지만 아주 망가진 건 아니야.”
그 도피의 끝은 뭐냐 하면 가룟 유다지요. 장렬하게 자살하는 거예요. 자살까지 안 가지만 일단 도피해요. 누가 나보고 하기만 해봐, 이런 식이에요. 갑자기 감사는 어디 갔는지 없고 자기에 대한 더 단단한 집약이죠. 이게 뭐냐 하면 다윗을 쫓아다닐 때의 사울 왕의 마음이었어요. 이제 여러분들이 왜 자꾸 사울과 다윗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주께서 꾸미시는 이유를 알겠지요.
이스라엘은 사울이 왕이에요. 사울이 대표자가 되는 거예요. 왕은 대표자니까. 그 사울이 대표자일 때 백성들도 다 따랐고 동의했었어요. 왕이 그저 우리 밥이나 잘 먹이면 되는 거지 당신 나라 되던 우리야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야, 동의했지요. 백성들도 자기 육신만 생각해요. 여분의 생물학적 말고 다른 언약의 혜택 같은 그런 것 생각 안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 생각 안 해요. “내가 원하는 것만 제 때 챙겨주면 우리는 하나님 잘 섬기고 믿습니다, 바칠 것 바치겠습니다.” 이런 쪽이에요.
그런데 지금 사울을 딱딱하게 돌이 되어서 어딜 공격하느냐? 다윗을 공격합니다. 세 번째, 다윗을 공격해요. 공격이란 말은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거든요. 내 의를 지키기 위해서 내 인생 망친 것은 저 인간이다. 저 인간한테 속아서 사업자금 다 날렸다. 내 인생이 그렇게 부도날 인생이 아닌데 저 인간이 나를 꼬셔서 저렇게 했고, 그리고 네가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와서 우리 집안 되는 일이 없어. 전부 다 남 탓이에요.
왜? 그래야 자기가 의로워지니까. 의로움이라고 마지막 남아있으니까요. 그런데 공격할 때 사울은 누굴 공격합니까? 다윗을 공격하지요. 다윗에게 누가 있느냐? 다윗은 주님과 함께 일해요. 여기서 주님의 상처, 다윗이 받았던 시편에 나오는 모든 상처는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공격을 해댔기 때문에 발생된 거예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래도 나 다윗 될래, 하겠습니까 아니면 사울이 우리 모습입니다 하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이스라엘 역사가 말씀의 역사에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에요. 왜 사울을 이스라엘 왕이 되게 했습니까? 다윗이 예수님이라면 사울은 우리 모습이에요.
우리가 내 것 지킨다고 내 하는 일로 인하여 주께서 하신 일을 이렇게 우리는 들이박고 있고 구박하고 있고 핍박하고 있고 괴롭히고 있는 거예요. 내 것 지키기 위해서. 내 수고가 헛수고 안 되기 위해서. 왜? 나는 정상이니까 나는 의로우니까 나는 남한테 지기 싫어하니까. 이게 사울과 다윗이 같이 이렇게 이스라엘에 중첩돼 있었던 겁니다. 이게 풀릴 거예요. 푸는 방법은 어떻게 푸는가, 그건 10분 쉬고.
20220902b 울산강의-역대기상(13강) 11장 5절 : 인간에서 장소로
(강의:이근호 목사)
성경에 나오는 사울이나 가룟 유다 인생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참 사는 게 힘들어요. 얼마나 노력하고 애쓰는지 몰라요. 사울은 자기가 나라의 왕이잖아요. 왕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존경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요. 자기 권력에 누수가 생기면 안 되기 때문에. 따라서 자기가 책임져야 될 이 나라에 뭔가 다윗 같은 존재가 등장해버리면 그 흠집을 제거해야 다시 온전한 자기가 정상적인 왕이라 하는 것이 증명이 될 수 있지요. 그래서 내가 정상적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누구를 공격 목표로 따로 뽑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나의 의가 유지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정치란 것도 그렇게 사회 모든 관계가 의도적으로 적을 만들어서 적을 공격함으로써 자기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인간은. 아이가 세 명 있다면 추석날에 부모가 자기를 나무란다 싶으면 첫째 아들이 문제 있으면 둘째, 셋째를 막 공격함으로써 자기 문제 있는 것을 상쇄시키는 방법이죠. 나보다 더 못한 것을 밟음으로써 자기가 그렇게 못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죠.
하나님께서는 그 반대 방식을 사용해서 다윗을 높여버립니다. 그게 역대상 11장 4절부터 보게 되면, “다윗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예루살렘 곧 여브스에 이르니” 여브스는 지금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그 예루살렘 빼놓고 다른 덴 다 차지했어요. 예루살렘 그 핵심부분만 빠져있는 거예요. 여브스 토인, 원주민들이죠. “여브스 토인이 다윗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나” 이렇게 돼 있어요. 그 대목이 사무엘하 5장 6절에서 8절에 보면 아주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까 처음에 제가 이야기한 거죠. 인간이 아니고 장소문제에요. 인간문제가 아니고 장소 문제인데, 인간문제 같으면 너라는 인간과 나라는 인간 가운데 누가 더 세냐, 누가 더 못하냐? 그게 인간문제에요. 인간이 늘 비교하잖아요. 누굴 만나면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할까, 나을까 생각하잖아요. 인간문제는 개인의 존재를 두고 비교우위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문제가 아니고 장소문제가 돼버립니다. 그러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함에 특수한 장소의 창조, 새로 생김, 발생되는 거예요. 개인이 누가 누군지 나은지 문제가 아니라 개인문제를 장소문제로 확장시키는 겁니다. 이걸 신약에서는 지옥 가는 사람은 예수 안으로 들어오질 못해요.
그러면 예수 안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예수 안이라는 이 공간은 그전에 어떤 특정 인간이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고 잘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순서가 필요해요.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야 장소가 되는 거예요. 그냥 장소가 주어지는 게 아니고 인간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인간은 뭐한다고요? 네가 잘났나, 못 났나 비교한다 했지요. 제가 방금 이야기했지요.
사울이 없이는 다윗의 취지, 의미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울은 다윗 네가 낫나, 내가 낫나? 백성들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사울을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 이렇게 봤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네가 낫다, 내가 낫다가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장소, 이스라엘 장소가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네가 잘났다, 못 났다는 이걸 완전히 뛰어넘는 여분의 공간이라는 거예요. 인간의 생물학적 공간 말고 여분의 언약이 주어진 것이 바로 장소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되어야 다윗이 자꾸 사울 왕을 살려주려 하고 사울 왕이 아들과 함께 죽었을 때에 사무엘하 1장에 보면 다윗이 얼마나 애통해하고 웁니까. 그걸 보고 성경 보는 사람마다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그렇게 저주를 퍼붓고 현상 수배하던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가 하나님에 의해서 붙여줬으니까 하나님 찬양하고 이제는 나를 괴롭히던 인간 제거되었으니까 속이 시원하다, 이렇게 되는 것이 인간으로서 자연적인 흐름이잖아요. 성경을 천 독을 해도 마찬가지에요.
사무엘상의 끝은 사울 왕이 죽는 거예요. 아들과 함께. 사무엘하 시작은 뭐냐? 다윗이 사울 왕 죽었다고 애통하는 것부터 시작해요. 그게 인간들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다윗이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을 때 다윗을 막 도망가잖아요. 사막에 동굴에. 그럴 때 먼저 사울을 죽일 기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부하 신하가 죽이자고 할 때 다윗은 처음에 안 죽이고 사울의 옷 가를 칼로 베었어요. 나중엔 그것도 후회해요. 내가 감히 기름부음 받은 사울 왕의 옷을 베다니 내가 잘못되었습니다. 그 정도로 나와요.
그럴 때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왜 이해를 못하느냐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과 다윗을 두고 누가 다음에 차기 왕이 되어서 우리나라 이스라엘을 통치할 것인가? 그것만 생각해요. 존재만 생각한 거예요. 장소를 생각 못하고. 이스라엘 장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로 생각 못하고 개인적으로 근사하고 개인적으로 잘 먹고 잘 살면 그걸로 하나님이 이용한 충분한 대가를 얻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요새 같으면 교회 나온 이득을 얻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 사울 왕이 죽을 때 다윗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차라리 내가 죽을 걸. 참 이스라엘 용사, 아까운 용사가 죽었다.” 사울 왕한테는 다윗이 누가 잘났는지 비교대상이 돼요. 존재니까. 그러나 다윗의 입장에서는 사울도 이스라엘의 일부라고 본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공간에서 우리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본질을 갖고 있는지 사울과 그 백성들과 사울의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공간을 통해서 충분히 다 폭로시키고 들춰내는 그런 그릇(도구)으로 사용했다는 겁니다.
우리도 남들 보기에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고 보시면 안 돼요. 그들이 십자가를 거부하고 지옥 가는 것은 바로 내가 그런 자로 태어났음을 그런 자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인정해줘야 돼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돼요. 이건 내 노력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내 일함으로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일하심의 결과로서 누구와 시합 붙는 게 아니고 내가 놓여있는 공간 자체가 예수 안이라는 놀라운 공간에 이미 포함이 됐다는 사실에 우리는 감격해야 되지요.
그걸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 이렇게 보셔야 신약도 풀려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여기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존재가 아니고 어떤 새로운 공간을 만드신 거예요. 예수 안이라는 공간. 그 공간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는 그걸 십자가 안이라고 이야기해요. 참 생각해보면 십자가 안이라니 그게 몇 평이나 된다고 그 안에 온갖 예수 믿는 사람 다 들어있겠나, 생물학적으론 말도 안 되지요.
그렇지요. 예수님 십자가, 골고다 언덕 몇 평이나 된다고 몇 사람이면 정원 꽉 차잖아요. 심지어 십자가에 달랑 세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세 개의 십자가에 세 명 달렸거든요. 그러면 하나의 십자가에 한 명. 그러면 십자가는 몇 명입니까? 달랑 한 명. 그런데 예수 안에 예수님만 들어있지 다른 사람은 들어있을 수 없지요. 그런데 성경은 사도 바울은 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이방인들도 복을 받아서 구원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 안에 어떻게 됩니까? 예수 안이 확장되지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역대상 11장 보겠습니다. 여기 보면 역대상 11장에 인간문제가 장소문제로 전환되면서 토착민 여브스, 예루살렘 원주민들이 뭐라 했느냐 하면 다윗이 쳐들어오면 우리 성 안에 있는 절뚝발이와 소경이나 장애인들도 다 쳐 부셔서 여브스 성, 우리 성채 안에 못 들어오게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아까 사무엘하 5장 6절에서 8절, 분명히 맞지요.
여기서 여브스 사람이 뭐가 되느냐 하면 못 들어온다. 그러니까 우리 쪽에 있는 소경과 절뚝발이가 나가 전쟁해도 너희에게는 이긴다는 이 말은 일체 너희들 다윗의 군대는 못 들어온다고 아주 최상급으로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못 들어온다. 들어올 수가 없다. 이게 왜 중요하냐? 이게 바로 그대로 확장되어서 살아서 천국의 확장이 아니고 뭐부터 확장하느냐? 지옥부터 확장시켜버리면 성도는 어떤 경우라도 지옥에 못 들어갑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천국 들어간 것만 생각하잖아요. 그건 벌써 시작이 잘못된 거예요. 천국 들어간 것만 생각하는 건 아직까지 내 존재만 생각하는 거예요. 이거는 예루살렘 성에, 나중엔 시온 성이 돼요. 예루살렘 성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 한 명도 못 들어갑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 말은 정리하면, 인간이라면 단 한 명도 천국에 못 들어온다는 그 하나님의 대원칙을 여브스 토착민을 통해서 먼저 운을 떼게 만들었어요. 지금 여러분 지금 무슨 뜻인지 제가 말하는 취지를 아셔야 돼요.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인 이상은 어떤 단 하나라도 선악과 따먹은 것 때문에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돼 있다는 것이 주님의 한 결 같은 대원칙이고 그 원칙은 변함없이 여전하다 이 말입니다. 단 한 명도 선악과 따먹었다면 생명나무 있는 곳으로 못 갑니다. 이것을 여브스 사람들은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경우라도 소경과 절뚝발이도 너희를 물리쳐서 이스라엘 사람은 한 명도 이 여브스 이 땅에 못 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결과적으론 이 속담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뭐로 바뀌었는가? 사무엘하 5장에 보면,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렇게 바뀐 거예요. 못 들어가는 곳에 다윗이 정복했잖아요. 그러면 무엇에 대한 무엇의 정복이냐 하면 추호도 못 들어간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정복을 하신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그 안에 뭐가 계속 살아남아야 되느냐 하면 추호도 못 들어간다는 원칙은 여전히 계속 살아있어야 되는 거예요. 지옥 갈 사람은 추호도 천국에 못 들어가고, 천국 갈 사람은 추호도 지옥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둘 중에 어느 게 기쁩니까? 여러분 지옥 못 들어가는 게 기쁩니까, 천국 가는 게 기쁩니까? 여러분 어느 쪽이 기뻐요?
다윗을 따라갔던 사람들은 그 속담이 어떻게 다윗 때문에 바뀌어졌는가에 대해서 즐거워하는 거예요. 못 들어간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들어왔다는 말은 이제는 여브스 사람은 단 한 명도 어디 못 들어간다? 시온 성에 못 들어가게 된 거예요. 왜? 그쪽부터 시비를 걸었으니까. 시온 성에 못 들어오는 겁니다. 그게 다윗언약이에요. 다윗이 뭘 했다는 게 아니고 다윗으로 하여금 활동 하에 있는 모든 공간과 그 자리, 그 현장에서 일어났던 속담과 그 말조차도 주께서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 취지를 계속 살려내는 식으로 천국과 지옥을 갈라내는 겁니다.
이것은 여브스 사람 말이 맞아요. 단 한 명도 이스라엘 사람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다윗은 언약의 사람이에요. 생물학적으로 다윗이 할 수 있는 그 여분의 것이 있어요. 왜? 다윗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여브스 사람은 눈에 보이는 다윗만 보고 그 군사들만 봤어요. 뭘 못 봤는가?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못 본 거예요.
이 예루살렘을 누가 정복 못했는가? 사울 왕은 정복 못했어요. 사울 왕 때는 정복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은 사울 왕 본인이 한 것만 쳐다보면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평생을 살아온 거예요. 하나님 믿고 전쟁할 때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전부 다 본인이 다 하는 거예요. 내가 기도하고 내가 헌금하고 전도하고 본인이 다 한 거예요.
그 본인이 다 한 것 여브스 사람은 코웃음 쳤지요. 사울 왕 백날 해봐라. 우리 동네 절뚝발이, 소경도 너희 군대한테 이긴다. 그런데 왕이 다윗으로 바뀌었잖아요. 바뀌어도 맨 그 군대가 그 군대지 뭐. 뭔 볼 일 있겠어. 똑같이 적용합니다. 다윗 너희들 사람 한 명도 못 들어간다. 왜? 우리의 소경과 절뚝발이도 너희들보다 세기 때문에, 라고 큰소리쳤던 그 여브스의 예루살렘을 다윗이 이깁니다. 그럼 누가 이기게 했습니까? 성경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다윗이 가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느니라.
이게 우리한테는 적용이 왜 안 되는지요? 이걸 다시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봅시다. 사울은 뭘 보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합니다. 왜냐하면 사울 자체가 나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그건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자기를 뭐로 봅니까? 자기를 비정상인으로 보지 않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보지요.
다윗 왕은 어떠냐? 골리앗과 전쟁할 때 이 전쟁은 누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닌 나. 주님께서 샤먼에게 주신 말씀, 네가 왕이 된다는 그 말씀 있잖아요. 물론 그게 사무엘상 16장이잖아요. 17장에 보면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깁니다. 이기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전쟁은 내게 속하지 않는 전쟁이에요. 내게 속하지 않는 전쟁에 하나님께서는 그 공간에 참여시킨 겁니다.
여러분 십자가 졌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서도 생성된 공간에 사도 바울은 거기에 본인이 속해 있는 거예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맞는 말이에요, 이게. 남들 보기에는 그게 안 보이지만 사도 바울은 그걸 본인이 아는 거예요. 내가 잘났다, 못 났다가 아니라 어떤 공간 안에 속했다는 겁니다. 예수 안이라는 공간 안에서 구원 받은 거예요.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그렇게 돼 있습니다.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너희를 선택한다. 창세전에 예수 안이라는 공간, 내가 너희에게 어떤 건물을 보낸다. 투망, 망을 보낼게. 망이 너를 건질 것이라는 거예요. 어떻게? 값없이, 일한 것도 없이. 그게 아브라함에게 복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자기가 잘나서 알아서 가나안 땅까지 왔습니까? 아니지요.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했잖아요. 그 말씀의 투망, 그물망, 그 망 안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마음대로 못 움직여요. 주께서 그렇게 몰아세운 겁니다. 호되게 몰아세운 거예요.
이것을 지난 수요일 설교 제목으로 장했어요. <존재의 뒤편> 내가 생각하는 존재의 현실 망 말고 주께서 나를 움직인다는 걸 그게 보이는 다른 관점이 있는 자리, 그게 존재의 뒤편으로 가는 거예요. 쉽게 하면 쇳가루를 종이 위에 뿌려놓고 종이 밑에는 지남철을 대서 움직이면 서로 거리가 가깝고 멀어지는 모든 움직임이 지남철의 움직임에 따라서 비례해서 같이 움직이잖아요.
존재의 뒤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는 주님이 자기의 언약의 장을 형성하고 그 장에 속한 그 백성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성도가 되게 하신 거예요. 네가 성령을 받으면 누구의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 증거 되기 위해서 어떤 직업이든 어떤 아이큐든 어떤 직장이든 상관없이 가족이 몇 명이든 상관없이 증거 하라고 주께서 일을 벌이는 거예요. 내가 일을 벌인 게 아니고 주께서 일 하셨습니다. 내 존재가 문제가 아니고. 나에게 속하지 않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그 여브스 사람의 예루살렘을 이름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다윗 성으로 바뀌지요. 이게 시온 성으로 바뀐다고요. 시편에 보면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 시온 성에 계셔요. 시온 성에서 자기 백성의 방문을 받습니다. 만남의 장소에요. 하나님의 시온 성.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 맞아요. 여브스 말이 맞는다고요. 사울에 속한 이스라엘은 아무도 못 들어갔어요. 왜? 사울 왕이 함락을 못 시켰으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요소에 사울 요소만 있는 게 아니에요. 다윗 요소도 있는 거예요. 그 다윗 요소가 뭐냐?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간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증거 하는 다윗. 다윗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로서의 다윗, 거기에 대한 표식으로 등장하는 다윗의 나라가 예루살렘을 접수하고 함락을 시켜버렸어요.
그렇다면 이 다윗 성은 뭐냐 하면 어떤 이방인들도 어떤 사람들도 이 다윗 성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 없는 공간, 그런 세계가 되는 겁니다. 천국에는 아무나 가는 게 아니에요. 다음과 같은 질문은 잘못된 거예요.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천국은 어떻게 누가 만들었습니까?”
천국이란 장소로 설명해야 돼요. 누가 만든 공간입니까? 이렇게 해야지요. 내가 들어갑니까, 못 들어갑니까, 라고 질문하면 안 돼요. 그래서 잘못된 질문이 뭐냐 하면, “목사님, 저 선택받았어요, 선택 안 받았어요?” 그 질문이 잘못된 질문이에요. 공간은 개인을 묻지 않습니다. 똑같은 질문에 이런 거예요. 이 질문을 얼마나 많이 해대는지요. 드디어 찬스가 왔네요.
히브리서 6장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4~6절) 그러니까 성령의 선한 맛을 보고도 범죄 하게 되면 천국 못 가고 지옥 갑니까, 라는 질문들.
이런 질문들을 이 대목으로 많이 하잖아요. 그 질문하는 태도가 뭡니까? 나 어떻게 돼요? 또 나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사울이 이야기했던 것과 똑같이 나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내가 구원 받았다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만든 그 공간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도가 된 거예요.
나와 예수님 누가 세냐고 견주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아예 날 사람 취급도 안 했다는 것을 증거 하는 용도로 천국을 만든 거예요. 어떤 인간도 천국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천국을 만든 겁니다. 어떤 인간도 천국 갈 자격이 없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천국을 만드신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 온 것은 횡재한 거죠.
그것을 주일학교 설교 때 이렇게 했어요. 구원 받는 것은 확률이 0%라 했어요. 제로입니다. 왜? 우리는 선악과에서 뭘 했느냐 하면, 인간이 선악과 먹었잖아요. 여기서 인간 나라가 만들어졌어요. 인간 나라 장소가 생겨버렸어요. 이 인간의 장소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물어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까?” 인간에게만 물어요. 훌륭한 목사에게 묻는 거예요. 주님께 묻는 게 아니고. 왜? 주님은 이 세계와 관여 안 하기 때문에. 여기 훌륭한 목사들, 종교인들 많이 있거든요.
그 사람들한테 묻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계속 선한 존재로, 의로운 존재로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타고났어요. 선악과 따먹은 갇혀있는 인간들 특징은 자기 잘남을 스스로 포기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스스로 못 나지기를 원했던 적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인생이 괴롭고 인생이 힘들어요. 그것 때문에. 지 잘났다는 생각 때문에 사는 게 그렇게 고생을 자처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 받은 성도는 예수 안에 있잖아요. 예수 안에 있으니까 뭐가 거치적거리는 거예요,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성령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누가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나지요. 그래 기도가 뭐냐? 제발 나를 치워버리게 해달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일주일 뒤에 이사한다 하면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여 이사할 때 비 안 오고 잘 하도록, 이게 아니라 그 이사하는 모든 것에서 나의 지식과 내 경험과 기억을 제발 주께서 개 무시해주옵소서.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가게 해주세요. 왜? 그래야 주의 일만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고 난 뒤에 이사하고 나니까 결혼반지 다이아 잃어버렸다. 그럴 경우에 인간의 첫 번째 반응은 뭐였습니까? 당황스럽다. 당황스러우면서 나오는 반응은 왜 하필 저에게 이런 시련을, 이렇게 나오죠. 두 번째 반응은 뭡니까? 내가 다이아는 잃어버렸지만 주는 안 잊어버렸다, 이렇게 되지요. 왜? 예수 믿은 게 나의 의가 돼버렸으니까. 그게 자기의 토치카, 기어이 나는 이 정도 신앙이야. 다이아 하나 잃어버려도 나는 복음으로 살 정도로 괜찮은 신앙인이야, 하고 여전히 뭡니까? 자기 존재에 대해서 그런 거죠. 그리고 세 번째는 깨닫는 것은 뭐냐? 내가 바로 주님의 일을 방해했던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그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을 나는 해당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이아 잃어버리고 나니까 구원 받은 기쁨보다 다이아 잃어버린 슬픔이 열 배나 더 아프게 나에게 상처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렇지요.
상처 받은 다윗,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일을 증거 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상처 받은 나, 이게 주께서 나와 함께 일하고 있다는 걸 유일하게 증거 하는 것은 이겁니다. 십자가 증거하는 건 이 방법이에요. 도대체 우리가 어디까지 상처를 받아야 되는가? 강도까지만 하세요. 누구 남의 집안을 작살을 내서 사형당해서 전기의자 앉는 것 말고 십자가로 공개적으로 고 정도까지만 가셔서 거기서 준비된 멘트하세요.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러면 돼요.
그게 가룟 유다와 성도의 갈림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했잖아요. 베드로가 그 이야기를 감춥니까? 요한복음에 나와 있지요. 자기가 배신했다는 것, 도망쳤다는 것 사도 요한이 다 기록하고 있어요. 본인 이야기인데 본인의 수치스런 상처를 다 기억하고 있다고요. 그리고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서 옥에 가두고 죽이는 것 이야기 다 했어요. 자기가 폭행자라고 했어요.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란 걸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증거 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십자가를. 성경 지식으로 신학으로 증거 하는 게 아니고 말씀 달달 외워서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망해버렸을 때 더 이상 내세울 어떤 근사한 것이 없을 때에 요모조모 따져서 나의 의라는 게 없을 때에 세리와 창기가 됐을 때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되었을 때에 주여 죄인입니다,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때에 주께서는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그러한 주님의 은혜가 준비돼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그 점을 에베소서 2장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 하기 전에 역대상 11장을 그다음부터 끝까지 다했다고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다음부터 전쟁이 나오는데 그 전쟁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에요. 전부 다 이거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다윗의 군대라는 이름 때문에 여분의 힘이 등장해서 그 공간을 주변에 남아있는 공간을 하나님의 공간, 다윗 나라의 공간으로 완전히 전환시키는 데 용사들의 명단이 쭉 나와요. 그런데 거기서도 다윗이 약간의 실수를 하지요.
역대상 11장 17절 같이 봐야 돼요.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이 세 사람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고 가로되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여기서 다윗이 다윗의 전과 후가 마음가짐이 차이 나게 묘사되고 있지요. 다윗도 불쑥 나 이 정도할만한 자격 되잖아, 자기 의가 나와 버린 거예요. 우리의 일상처럼. 우리는 매일 그 텀의 반복이에요. 우리는 주께서 일하는 것 싫어. 내가 일해야 돼. 내가 일해서 내가 기대한 결과가 나올 때 내가 잘난 존재인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요. 남한테 기죽기 싫어요.
인물 되지 믿음 되지 돈 되지 다 되지 이러고 싶어. 건강 되지. “나 같이 복 받은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 이렇게 자랑 질하고 싶어. 불쑥불쑥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내가 선한 일, 내 딴에 신앙적인 것, 상당히 마음 낮춘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런데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도 해놓고 갔는데 다윗이 후회했지요. 안 갔으면 좋겠다. 내가 농담 삼아 이야기한 것을 진담으로 안 들었으면 좋겠다, 이러고 싶지요. 그런데 그 졸병들이 왕에게 아부하겠다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적군 속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다가 엉뚱한 다윗 왕 개인을 위해서 뭔들 못 하리, 하면서 거기서 나온 게 사랑 is 뭔들, 사랑을 위해서 뭔들 못하겠습니까, 물을 길어온 거예요. 아하. 참 그런 경우가 목사한테 굉장히 많아요. 목사가 부흥회 하면서 겨울철에 수박 먹고 싶다, 이 말하면 초빙한 당회장 목사가 수소문해서 수박 키우는 비닐하우스에서 수박 갖다 바치지요. 오늘 짬뽕 먹고 싶네, 하면 짬뽕 갖다 바치지요.
이게 바로 개인 존재가 아니고 다 같이 은혜 받는 공통의 공간이잖아요. 하나님이 나에게만 여분의 힘을 주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다 준 거예요. 왜? 사울 왕 시대가 끝났으니까요. 그래서 여기 여브스 예루살렘 성이 되었지만 이름은 다윗의 성이지만 실은 그 성뿐 아니고 모든 지역은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이 정복에 나서서 정복에 나선 용사들 명단이 11장 끝까지 나와 있어요. 여기 어떤 사람 보면 23절에,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 사람의 키가 다섯 규빗이요” 이렇게 돼 있다고요. 다섯 규빗이면 얼맙니까? 2미터 50이 넘어요. 그 장대한 사람, “그 손에 든 창이 베틀 채 같으나 저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서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죽였더라” 이건 누가 했던 거냐 하면 소년 다윗이 골리앗에게 한 것 있잖아요. 그 연장선이에요. 그런 능력이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신하들 속에까지. 주님에게 일어난 일이 주님의 자기 공간에 끌어안은 그 인간에게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한테 일어나요, 주님께 일어난 일이.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저 산을 들어서 저 바다에 빠지라 했어도 네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했을 것이다, 라고 하잖아요. 그럼 제가 문제 내겠습니다. 산이 뽑혀 바다에 빠지는 이게 큰 믿음이냐, 아니면 내 죄가 사해지는 것이 큰 믿음이냐? 내 죄가 이게 더 크지요. 왜? 우리는 그 천국에 못 가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은 자는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다. 창세기 3장 24절의 대원칙에 의하면 우리는 천국에 못 갑니다. 그런데 주의 능력으로 주의 새로운 공간에 죄인이 필요해서 죄인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의의 피와 만나서 의인 되거든요. 여기에 초청받은 이 사람만 천국 백성 되는 겁니다. 왜? 예수님만 증거 하기 때문에.
“주의 하시는 일을 가리지 않도록 주여 나를 죽여주옵소서.”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 많아요. 목사님, 제 소원이 있는데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복음을 잘못 전했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잘못 들으면 자기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하루하루 사는 게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그만 속 시원하게 자살하듯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거고. 그게 아니고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죽는 것이 소원이란 말은, 내가 주의 일에 방해하는 존재기 때문에 빨리 주의 일을 그만하라고 치워달라는 식으로 사도 바울처럼 기도하면 돼요. 주여 나 같은 인간은 쓰레기 치워서 주의 일에 훼방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런데 응답받기를 네가 있어줘야 주의 일이 되기 때문에 너 말고 다른 사람 구원하기 위해서 네가 더 살아야 돼, 이런 응답을 받았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힘들다고 죽여 달라고 하지 마시고 평소에 어떤 일이 있을 때 나의 의가 나타나지 않도록 기도하시고 반대로 하세요. “내가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죄인 됨을 더욱더 드러나게 하옵소서.” 그렇게 해야 돼요.
사울과 다윗 요소가 다 나온다는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신약에 오게 되면 에베소서 2장 11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못 들어오지요.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못 들어옵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여러분 이걸 놓치면 안 돼요. 천국에 갈 권한이 있는 게 아닙니다. 아예 없었습니다. 그다음에 13절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자, 그리스도를 다윗으로 대입시켜보세요. 이해 다 됩니다. 사울이 블레셋에 져서 망했어요. 여러분 아시겠지만 사무엘상 마지막에 사울이 죽지요. 그럼 나라가 누구 손에 넘어간 거예요? 블레셋이 이긴 거예요. 이스라엘이 진 겁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예속 받는 그런 형편에 있어요. 누가 없다면? 다윗이 없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사울을 주께서 없애버립니다.
인간이 하는 일을 인간이 내 것이라고 없어지니까 그리스도가 나오시는 거예요. 성도가 뭐냐? 성도는 날마다 내가 하는 일이 실패로 끝났을 때 예수님께 그게 실패가 아니고 그게 너 치료하는 거야. 네 죄 사함이야, 그게. 네가 잘난 척 있으면 그건 죄 사함이 아니야. 네가 못난 자가 될 때 네가 용서받았다는 뜻이야. 네가 세리가 되고 창녀가 되고, 네가 강도가 될 때 그게 없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 감사가 되는 거야. 그게 치료고 용서고 그게 구원이거든요.
예수님이 다윗이라 봅시다. 이스라엘도 이방인이라 보면 돼요. 율법 있으면 뭐합니까? 못 지키는 건 마찬가지죠. 예수님께서 다윗으로 오신 거예요. 다윗이 품고 있던 이스라엘이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역대상 11장에서 이스라엘은 누구와 언약을 맺었지요? 다윗 왕과 언약을 맺었지요.
똑같이 에베소서에서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실 다윗이니까 예수님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다윗으로 오셨으니까 인간이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마지막 언약이 성공적으로 체결이 된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계약조건은 뭐로 보느냐 하면 유월절 피만 묻으면 내가 그냥 넘어가줄게.
내막은 아시죠. 그 피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흘린 저주받은 심판을 이미 받았다는 표시로서의 피기 때문에 심판을 한 번 받은 것은 다시 심판 때리지 않기 때문에 넘어간다. 상세히 하면 그렇지만 어쨌든 간단하게 되면 예수님의 피만 보고 그냥 하나님께서 문제 삼지 않아요. 넘어가요.
그 피가 다윗으로 왔다면 그 피를 피 되게 증거 하는 사람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주님이 나서서 모집을 해요. 주님이 나선다는 것을 주님의 영, 성령을 보내서 자기 사람 모집에 나섭니다. 그 모집의 대상이 어떤 사람이냐? 약속 밖의 사람이고 시온 성에 못 들어가는 사람이고 천국에 못 가는 사람이고 오직 자기 생각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이죠.
그런 사람인데 주께서 성령이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오게 되면 그 성도가 뭘 아느냐 하며 나는 약속 밖의 사람이고 천국 못 가고 죽어 마땅하고 이걸 알게 돼요. 내가 나한테 필요한 존재가 아니고 주님에게 필요한 존재로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먹든지 마시든지 사나 죽으나 이게 누구의 것이냐 하면 주의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성도의 남은 삶은 뭐냐 하면 이제는 두 가지를 보여주면 돼요. 하나는 사울 요소, 가룟 유다 요소입니다. 사울 요소를 보여주시면 돼요. 참 쉽지요. 사울 요소 너무 쉬워요. 내가 고생한 것 내 거란 것. 사울 요소 보여주시고 경과란 거예요, 경과. 그다음에 피를 거기다가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피를 만나게 해주면 결과적으로 뭐가 됩니까? 전에는 내 세계란 게 따로 있었는데 이제는 피 안에 예수님 안이라는 새로운 공간 안에 예수님의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미 이쪽에 들어와 버렸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미리 예언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라. 그런 이야기했지요. 이미 죽은 잔데 살게 된 거예요. 따라서 살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날마다 죽을 이유를 매일 삶 속에서 내가 죽어 마땅함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울이 남의 이야기 아니고 우리 이야기였고 역시 가룟 유다도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잘난 체하면서 남들과 뒤떨어지지 않고 지기 싫어하는 이 모습을 십자가 앞에서 새삼 발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