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불의 형상

아빠와 함께 2022. 10. 27. 07:37

대전-신명기(6강) 신4:12(불의 형상) 20221024a
(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4장 11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여기 에스겔 강의도 했지만 형상이란 게 나와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면 무슨 세계가 되느냐 하면, 이게 말씀의 세계 되겠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신명기에서 현재 이스라엘에게만 주고 있어요. 다른 민족에겐 말씀을 안 줍니다. 언약을 안 줘요. 그럼 이게 무슨 취지냐, 왜 이스라엘에게만 주고 다른 민족은 안 주느냐?

말씀이 와서 이 세상에 지배적으로 확 퍼지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걸 정복이라 해요. 전쟁을 할 때 말씀을 줘서 저쪽의 모든 것을 덮어버리면 그쪽에 말씀에 덮인 것이 뭐냐 하면 소멸됩니다. 소멸된다 하면 이 생각하면 아주 쉬워요. 고린도후서 4장 끝에 18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거울 보면 우리가 보이잖아요. 보이는 우리 몸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자아가 형성돼 있는데, 잠간이란 것은 없어지는 거죠. 여기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나와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표현이 굉장히 새롭게 들려옵니다.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그 뒤에 네모로 해놓고 이런 경우를 여러분의 뜻으로 채워보세요, 라고 하면 어떤 경우가 낙심하지 않을까, 이래 하잖아요.

낙심하지 아니한다는 말이 무서운 말인데 이게 뭐냐 하면 너희들은 낙심 외에는 할 게 없을 것이다, 평생 낙심할 것이다. 그걸 감당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낙심하는 이유가 뭐냐? 보이는 몸 때문에 낙심해요. “저 사람은 멀쩡한데 왜 내 몸은 안 아픈 구석이 없어. 내 몸은 왜 자꾸 삭아지지?” 그래서 그 뒤에,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갖고 노시는 겁니다. 어떻게? 겉 사람과 속사람을 일방적으로 허락도 없이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나눠버리죠. 미안한 것도 없어요. 그냥 그 사람은 내가 칼로 다 벗겨낼게. 그래야 뭐가 보인다? 속사람에게 더 관심이 끌릴 게 아니겠는가. “네가 집안 망해야 주님 주신 영생이 빛이 나지 뭐.” 이런 이야기인데 우린 그 말씀에 더 낙심 되니.

이건 교회 왔다가 저주를 옴팍 뒤집어쓰니까 자기 인생 살아온 것 보세요. 이거는 주께서 말갛게 껍데기란 껍데기는 다 벗겨내는 것 같아요. 제가 아침 산책길에 어떤 사람은 차를 대놓고 심심한지 길가의 가로수를 박피하듯이 벗겨내고 있어요. 한 오지랖 하는 내가 한 소리하려다가 나무가 죽지는 않겠다 싶어서 그냥 넘어갔는데.

그 모습이 주께서는 쉬지도 않고 놀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계속 우리가 이 정도입니다, 라는 것을 전부 다 박피하는 거예요, 박피. 벌써 제목 나왔다, 박피. 피부 미용하는 것도 아니고 뭐예요. 미백하는 건 차라리 좋지, 박피를 해버려요. 왜? 겉이 속을 가리고 있으니까. 속을 드러내기 위해서 겉의 내 모습에 자아가 치중하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 별로 무겁지 않는 것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이용당한 거죠. 내가 위대하게 된다는 것은 주님에겐 안중에 없어요. 위대한 것이 내 안에서 자라나지요. 위대한 것이 속에서 새롭게 주의 것으로 나지, 내가 알고 있는 나는 후패해지고, 내가 모르는 나가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고. 이런 엄청난 작업을 주님께서 하십니다.

이 작업을 할 때 우리가 말씀 좀 지킨다고 가능하겠어요? 말씀 들을 때부터 벌써 졸기 시작하는데 이래서 위대한 과업을 천리마한다고 되겠습니까? 전적으로 이거는 하나님이 손대고 있는 거예요. 손대면서 고린도후서 4장 16~18절에 나오는 말씀과 똑같은 고백들이 사도에게만 나오란 법 없잖아요.

사도만 성령 받았어요? 아니지요. 우리도 성령 받았으면 사도가 성령 받아서 나온 이 동일한 고백이 띄엄띄엄 이지만 자주는 아니지만 이것이 나올 때 그게 말씀의 세계입니다. 내 안에 내 세계 말고 뭔가 말씀의 세계가 들어온 거죠. 우리한테 이물질이 들어온 거죠. 그 이물질이 나갈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두 영적 세계가 우리 몸을 가운데 두고 전쟁터로 삼아버린 거예요. 육신에 속했느냐, 영에 속했느냐? 이건 성경에서만 물을 수 있지 철학에서나 과학, 의학에서는 이걸 묻지 않습니다. 의사가 우리 몸 보고, 이 사람이 영적인 사람인가, 육적인 사람인가? 메스를 어디다가 댈까? 이렇게 안 묻지요. “어디가 편찮습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우리를 눕혀놓고 영적이냐, 육적이냐 묻는 것은 성령이 주님이 그렇게 하시지 같은 인간은 그렇게 못합니다.

그래서 아까 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이는 것, 이거 어느 강의에서 했는데, 대구강의인가? 보이는 것은 선분이요, 선분은 선인데 시작과 끝이 있는 걸 선분이라 해요. 보이는 건 선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영원한 직선.

이렇게 우리를 묘사함으로써 뭐가 달아나느냐 하면, 죽음의 공포성, 죽음이라는 이 사실 자체가 없어졌지요. 드디어 죽음과 빠이빠이. 죽음이 뭐꼬,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죽을 때 대비해서 보람상조 넣으시오, 할 때 “아저씨, 죽음이 뭐예요? 내가 잠간이라고는 들었는데…….” 죽음은 순간이잖아요. 이거는 순간이 아니고 길이입니다. 어떤 특정한 길이가 있고, 이건 무한대고. 이걸 영생이라 합니다. 영생과 잠시 있는 선분.

여기서 죽음이란 선분에서 영생으로 가는 그 지점이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은 일종의 문지방이에요. 문지방을 겁내진 않지요. 이쪽 방에서 저쪽 방으로 가는데 문지방을 겁내겠습니까? 내가 상상한 건 첫 번째 사망이고요, 첫 번째 사망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 번째 사망은 위력이 있어요. 왜? 어제 오후 설교처럼 하나님의 분노를 맞닥뜨려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 땅에서도 분노가 왔는데 우리는 월급 받고 일한다고 분노 신경 못 쓰다가 죽고 난 뒤에 요양병원에서 오년 있다 기다리는 것은 뭐냐? 분노지요. “이리 와, 이리 와.” 그냥 일방적 호출이에요. 악한 자나 선한 자는 마지막 때는 그 무덤에서 나와서 주님의 심판대에 오기 때문에 그들은 그제야 누굴 아느냐? 예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불신자들은 다 알아야 돼요.

예수님이 주님이기 때문에 모든 자들은 지옥 가도 주님을 알아요. 성도는 그걸 살아생전에 미리 알았다는 거고 심판주 되신 분을 미리 알았다는 거고 불신자는 죽고 난 뒤에 이미 모든 게 확정되고 난 뒤에 이젠 빼도 박도 못하지요. 그야말로 운명적이죠. 빼도 박도 못해요. 변경이 안 되는 확정된 운명 속에서 그렇게 욕들을 했던 주님을 시시하다고 우겼던 주님을 그제야 만납니다.

그때 주께서 보여주는 게 뭐냐 하면 형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강의한 걸 다시 정리하게 되면 말씀의 세계가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게 되면 형상의 세계가 이스라엘 속에 기입된다, 개입된다, 또는 삽입된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세계가 형상의 세계로 이어지지요. 그러면 말씀의 세계를 처음 받았던 민족이 누구죠?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씀을 처음 받을 때 그들이 경험했던 형상, 이 형상이 진짜배기 형상이죠. 이 형상이 지난 수요일에 설교할 때 언급했습니다. 말씀의 세계가 형상, 그 형상이 이렇게 돼 있어요. 11절에,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 자, 우리가 11절까지 시내 산 현장에 있다고 칩시다.

그들이 뭘 봤어요? 그들의 본 게 뭡니까? 산이 벌겋게 그 형상이 불의 형상이죠. 이게 어려워요. 인간은 평소에 자기 자신의 몸을 봅니다. 두 눈이 있으니까 보지요. 그리고 바깥에 있는 해와 달과 별들을 봐요. 사람은 볼 수 있다. 왜? 눈이 있으니까. 눈이 있으니까 보는 거예요. 사람이 볼 때 그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주님의 형상은 뭐였는가? 불붙은 광경이었습니다. 불을 본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평소에 봐왔던 불이란 개념은 뭐냐 하면 피해야 돼요. 도망치든지 피하든지 그 현장에서 바들바들 떨어야 돼요. 왜냐하면 불은 인간이 데이면 어떻게 돼요? 인간이 불에 타서 죽고 재가 되고 소멸되니까. 내가 보고 있던 나를 건사하려면 유지하려면 불붙은 곳에서 피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장소가 어떤 장소냐 하면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장소에요. 시간적으로 그렇고 공간적으로 갇혀버린 상태에서 하나님이 나타났는데 뭐로 나타났느냐? 불로 나타난 거예요. 불이란 것은 인간에게는 두렵고 무서운 겁니다. 인간은 뭐든지 소지해서 내 것 만들려고 하는데 불은 소지하면 내 손이 타버려요. 내 것이 될 수 없는 거예요. 내 것이 없는 것이 쳐들어왔을 때 우리는 두렵고 무서울 수밖에 없어요.

아침에 뒷산에 산책 갔는데 만약에 큰 불곰이 나타났다. 예쁘다고 볼때기 잡아당겼다간 어떻게 됩니까? 곰한테 죽지요. 곰은 안 타나나겠지만 멧돼지 나타나면 이것 바비큐 하면 맛있겠다, 이럴 순 없어요. 무조건 죽은 체하든지 도망치든지 해야 돼요. 우리가 눈이 있어 봐왔던 이 세상의 생존할 수 있는 정보에 의하면 불은 넘어갈 수 없는 거예요. 불은 넘어갈 수 없다면 이건 뭐냐 하면 이 자체가 우리의 형상에 대한 불로서의 부정이고 심판이고, 그리고 진노하는 거예요.

불이 나타났다는 것은 무엇의 연장이냐? 이건 여러분 잘 아는 이야기하겠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쫓아냈습니다. 쫓아낸 이유는 너하고 같이 안 살겠다는 거잖아요. 이제 생명나무만 남았어요. 선악과나무는 없으니까. 생명나무 있는 곳에 너희들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단호함, 주님의 일관된 의지의 천명. “여기에 대해서 나한테 뭐 요구하지 마. 생명나무 주세요, 라고 따지지 마. 없어.”

그게 쫓아내심으로 돼 있어요.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왜 보호하느냐? 생명나무도 그 인간들의 따먹을까 해서. 생명나무를 보호한다는 것은 인간이 따먹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감히 피조물 주제에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그것이 생명나무 따먹을 수 있는 조건에서 하자가 발생된 거예요. 생명 없는 거예요. 그냥 저주에요. 저주기 때문에 보내고 쫓아내시고, 그다음에 뭡니까?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러면 인간은 뭘 타넘을 수 없습니까? 화염검, 천사거든요. 불붙은 천사를 타넘어서 몰래 과수원에 사과 따먹듯이 담 넘어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는 그런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악마와 결탁이 되어 악마가 인간을 부추겨서 무엇을 자꾸 시도하게 만듭니까? 인간이 마지막 남은, 선악과도 알고 그다음에 뭘 따먹어야 돼요? 선악과는 따먹었으니까 한 개 남은 게 있지요. 생명나무 따먹으면 인간은 뭐가 돼요? 신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악마가 그걸 했는데 주께서 악마의 취지를 알고 생명나무 보호하고자 이걸 차단시켜서 저주로 되갚아주었지요. 쫓아냈으니까. 저주가 뭐냐? 너희들 있는 곳에는 뭐가 없다? 생명나무가 없는 걸 저주라 해요.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어.” 저주에요. 그걸 저주라고 이야기해. 왜? 금송아지가 내 목숨과 바꿀 마지막 대상이 금송아지기 때문에 그럼 너는 생명나무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저주받는 거예요. “우리 집에는 금송아지는 없지만 생명이 있다.” 그러면 복 받은 거죠.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아요? “아이고, 퍽이나 위로 되겠다, 정말.”

그래서 어떤 인간도 불을 타넘을 수 없어요. 불은 타니까. 그래서 주님은 불을 앞장세우는 겁니다. 도망갈 수도 없어요. 벌벌 떨지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앞장세우는 불의 형상의 대상자가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타죽을 일만 있느냐? 여기서 형상은 불이요, 형상이 불로 나타난 취지는 무슨 세계냐 하면 말씀의 세계입니다. 언약의 세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고 활용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4장 13절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 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십계명 줄 때 분위기 험악하지요. 불붙는 가운데 십계명 줬다. 이 말은 뭐냐? 십계명이 어디서 튀어나왔다? 불속에서 튀어나온 거예요. 그러면 십계명은 뭐냐? 불이란 저주의 취지가 사물화 된 것, 물체화 된 게 뭡니까? 돌 판이죠. 율법의 무서움이에요.

율법이 사람에게서 지가 의도해서 한 것 같으면 하나도 무서운 게 아니에요. 인간이 없는 곳에서 만든 율법입니다.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데서 만들어낸 거예요. 그게 어디냐? 불 너머. 그럼 이쪽에는 불놀이야? 완전히 불바다 되잖아요. 베드로후서에 나오잖아요. 마지막에는 전에는 물로 심판받았지만 지금은 불놀이야. 불로써 모든 걸 다 소멸시키는 그 세계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을 보았는데 우린 왜 불이 안 보입니까? 이게 뭐냐 하면 말씀의 세계가 우리한테 오기 때문에 그 배후에 불이 있습니다. 불 너머에서 뭐가 만들어졌는가? 돌 판이 만들어졌어요. 모세가 용감한 게 아니고 모세도 주님 만났을 때 이미 죽은 자에요. 죽지 않고서는 실제로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어디 마실 기분이 나겠어요? 전체가 불인데 불속에 들어가면서 짜장면 그런 것 찾겠어요? 어디 물리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 높은 곳까지 불러 세웠느냐? 불의 침입이죠. 주님의 형상의 침입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은 뭐냐? 율법대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모세를 불러올린 거예요. 심각하지요. 모세 입장에서는 심각한 거예요. 이건 자기 목숨까지 계산할 필요 없어요. 자기 목숨이 중요한 게 아니고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돌 판입니다. 율법이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해요.

말씀이 기입하고 개입하고 우리 속에 들어오니까요. 우리가 몇 년 살았다는 건 잠간이고, 영원한 것이 지금 들어온 거예요. 왜 들어왔느냐? 이스라엘 사람들 농사짓고 살도록 놔두지 왜 들어와야 되는가? 그것은 이렇게 복잡하게 하면 어렵지만 간단하게 해서, 그들로 묶이게 함이라. 어디에 묶이느냐? 특수한 시간과 특수한 공간에 묶이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찾아오신 거예요. 밧줄로 그냥 묶어버린 거예요. 묶고 그 안에다가 말씀 세계를 이뤄나가는 겁니다.

아까 강의했지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을 주신 이유는 뭐냐?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그럼 신약에서 형상이 누구냐? 불이냐? 아님. 신약에서 불이란 불신자들에게. 이스라엘 바깥은 불이지만 이미 말씀이 다 이루었잖아요. 말씀이 이룬 세계에선 형상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죄 사함이에요. 용서입니다. 자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곧 생명이 공유가 되고, 생명 안에 들어온 거예요. 어제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세상 사람들 종교라 하는 것은, 구원이란 죽고 난 뒤에 결정되지만 복음은 뭐냐? 살아생전에 미래가 결정나버려요. 죽음이라도 취소 안 되는 확실한 결정, 최후의 결정.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성경에서 죽는 게 최후가 아니고요, 최후가 앞당겨서 나에게 들어오면 그게 나의 최후가 되는 거예요. 미리 맛보는 미리 받아들인 나의 최후.

그래서 오후 설교에서 최후가 두 가지 나오는데 하나는 행위 책, 또 하나는 생명책. 생명책 최후가 들어오면 우리에게 명단이 주어지게 되는데 그 명단이 무슨 이름으로 지은 책이냐 하면 그게 주의 이름으로 한 책이에요. 주님에 의해서 선택된 자만 적힌 명단이기 때문에 책 이름은 주의 이름이에요.

그래서 기도를 해도 뭘 해도 무슨 이름으로 한다? 사나죽으나 주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어설픈 내 인생이 아니에요. 다 주님이 조성한 주님이 이끌어낸 만들어간 주님께 속한 내 인생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7절에 보면 그런 말씀 있습니다.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고, 특히 여러분이 놓치기 쉬운 대목이 있지요. 살 때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그다음에 죽을 때도 나를 위한 죽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죽는 것이 나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죽음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의 절차상 그 대목이 시나리오 제14번 scene이 그래요. “대전에 있는 너 죽게 돼 있어. 역할이. 제대로 연기하란 말이야. 죽는 척하지 말고 죽으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죽겠습니다.” 그래서 죽는 거예요. 주님이 연출자니까. 시나리오대로. 이번엔 대구에 누가 또 죽어야 되겠네, 이런 것.

그게 뭐냐 하면 말씀의 세계니까 말씀 시나리오거든요. 주님이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태어나는 것도 시나리오대로 죽는 것도 주님이 짜신 시나리오대로 희곡대로 우리가 죽을 때 죽는 것도 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고백을 하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 겁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겁이 있을 수가 없지요.

형상이 완성이 되면 다 이루었다가 되면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이 되는 겁니다. 전에는 뭐였습니까? 불이었죠. 불은 하나의 물체입니다. 에너지죠. 출애굽기 3장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구약인 것을 감안해주시고, 지금 모세가 눈이 있어서 저게 불인지 물인지 알아보는 그 시기에요.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마치 돌 판이 불붙는 시내 산 속에서, 우리 보기엔 불속에서 불 나오지요. 그런데 불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돌 판 나오는 거예요. 율법 나오는 거예요.

이거는 불의 완성된 형상이 이제는 율법이 되고 그 율법의 완성이 예수님이라는 인격체가 되는 그 여정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언약 자체의 여정 속에서 형상의 변모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룩한 땅이 인간에서는 지정할 수 없어요. 그러나 거룩한 땅이냐, 아니냐는 것은 불의 요소와 그리고 지시의 요소와 그 대상이 되는 언약적인 인물로 세 가지가 구성이 되면 여기서 이게 뭐가 되느냐? 거룩한 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온 것은 이 땅엔 거룩함이 없어요.

없는데 거룩한 땅을 만드는 작업을 하려면 창세기 3장 24절, 불 너머에 있는 생명나무 쪽에서 움직여줘야지요. 움직여서 생명나무 쪽이 이 지상에 그대로 자리를 잡을 때 없던 자리가 새로 만들어진 자리가 뭐냐? 거룩한 곳이에요. 그러면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는 불로 가로막았지요.

그러면 이 땅에 내려온다면 땅 주위는 뭐로 가로막아요? 이게 불의 형상으로 가로막지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돼버려요. 가까이 한다고 땅에 있다고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 거기는 무서운 불속에서 돌 판이 나왔기 때문에 돌 판 있다는 자체가 주변에 뭐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된다? 불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돼요. 어렵지요. 어려우니까 더 어려운 걸 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9~2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오늘 신명기 4장 12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보는 것은 뭐냐 하면 불밖에 없지요. 그래서 그 당시에 그들이 불은 볼 수 있잖아요. 불은 볼 수 있지만 그 불의 형상이 완성된 어떤 인격적인 얼굴은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보지요. 그것은 신약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려서 예수님의 얼굴 나타났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얼굴을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이 봤는데, 어떤 로마 군인은 예수님 얼굴을 보고 주의 얼굴이라고 그랬습니까, 안 그러면 뺨 때렸습니까? 뺨 때렸지요. 왜? 너무나 인간적이라. 마리아 닮았기 때문에, 마리아의 DNA를 받았기 때문에 너무나 인간적이에요. 마리아 백 퍼센트 DNA. 너무 인간적이니까 뭐 만만하지요. “내가 그렇게 만만해요?”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헤어질 결심>에서 한국말 잘 못해서 하는 대사.

만만한 것으로 오시는 거예요, 형상을. 만만함으로 왜 오셨는가? 그게 저주거든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그게 아주 극단적인 미움이고 저주의 표현이에요. 참, 하나님이 인간을 알아도 너무 잘 알거든요. 인간은 좋은 것, 인간은 귀한 것, 거룩한 것 미친 듯이 달려들어서 제 것 만들려고 합니다. 선악체제로 했기 때문에. 선하다, 아름답다, 고상하다 내 것, 내 것 이러고 있어요. 내 것 달래요. 내 것, 내 것 뭐 좋은 것 있으면 내 것 달라 하거든요.

그러면 이런 만만한 얼굴은 줘도 안 받아.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율법으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하는 것이 예수님과 모든 인간의 차별화에 성공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심지어 열두 제자도 예수님을 못 알아 봐요. 알아보지 못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4장 15절부터 보겠습니다. 이것도 쉬운 대목은 아니에요.

자, 하나님의 형상이 이스라엘에 나타났지요. 율법과 더불어 나타났잖아요. 그러면 율법의 돌 판으로 하고 난 뒤에 제가 이름 붙이겠습니다. 미지의 형상. 미지의 형상 주변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불이 붙었으니까 불인데, 불이 인격이 아니잖아요. 자꾸 불속에서 뭐가 나오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인간이, “저 돌 판 어디서 나왔지? 나도 한 번 구경하자. 저거 어디서 나온 거야? 가보고 싶다.” 안 돼요.

어린애들이 목사님이나 부모에게 묻기를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니까 애들이 대번에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그럼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는데?”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그들은 하나님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걸 모르고 자기가 평소에 보는 형상, 내가 보는 의문점 그걸 그대로 어디에 적용시키느냐 하면 하나님에 적용시키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미지의 형상 앞에 1번, 2번, 3번, 4번 쭉 있는데 성경에 나오는 대로 적어봅시다. 몇 번까지 있는지 해보겠어요. 자, 16절부터 첫 번째 남자의 형상, 두 번째는 여자의 형상, 세 번째는 짐승의 형상, 네 번째는 새의 형상, 다섯 번째는 곤충의 형상, 그다음에 어족이죠. 물고기. 미지의 모르는 것에 대해서 인간 쪽에서 미지의 것을 탐구하기 위해서 접근할 때 미지의 형상, 어떤 형상이란 것은 존재자를 말해요. 뭔가 존재자가 있어야 형상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사람 인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딸에게 “너 사귀는 남자 있나? 데려와 봐. 그 미지의 형상을 보여줘. 꽁꽁 숨기지 말고. 어떤 남잔데? 저거 아버진 뭐 하시고?” 묻잖아요. 그러니까 미지의 것을 할 때는 내가 익히 아는 형상으로부터 출발해서 비교해서 연결이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을까를 시도하게 돼 있어요. 왜 하느냐? 인간이 갖고 있는 형상 자체가 불에 저주받아야 될 저주스러운 형상관이거든요.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과 마주친다? 하나님의 축복의 형상은 저주스런 형상과 마주치면서 축복이 축복 값을 하는 거예요. 바로 네가 평소에 알고 지냈던 형상은 전혀 나와 상관없던 거잖아. 그러면 인간이 신을 찾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제도와 그리고 부동산과 인테리어도 할 것이고 거룩한 곳에 가기 위해서 인간이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는 지혜의 산물들, 인간이 제작한 것, 만든 것,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깔아 나가겠지요.

할 때 그때 형상 보세요. 남성의 형상? 남신이잖아요. 여성의 형상? 여신. 짐승 나오지요. 소, 독수리, 사자 에스겔 보좌에 나오지요. 곰도 되고요. 새, 곤충 이런 건 고고학적으로 보면 많이 나와 있어요. 그다음에 물고기. 물고기 신 있잖아요. 바다를 관장하는 물고기 신. 이런 걸 보면 요소를 깨보자.

남성의 형상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신은 아마 남성일 거야. 왜냐하면 남성은 힘이 세니까. 힘이 있다면 노동력이 있다는 말이고, 노동력이 있다는 말은 이 세상을 경쟁할 수 있고 무에서 없는 데서 농작물을 키워줄 수 있는 힘 있는 것, 이게 바알 신이죠. 그다음에 여성이 할 일은 뭐냐 하면 다산, 많은 자손을 번식하는 것. 여성의 존재 이유가 뭐냐 하면 남성 집안의 대를 잇는 거예요. 대을 이어서 여성 값을 다할 때 우리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게 생긴 거예요.

인간이란 존재가 남성, 여성이 있어야 된다면 신의 존재는 뭐가 돼요? 남성과 여성이 결합돼야 되겠지요. 인간 세상에서 결혼식이 기쁜 날이잖아요. 기쁜 날에 기마이 쓰지요. 막 선심 쓰지요. 그렇다면 하늘의 남성 신과 여성 신이 결혼할 때 땅에다 뭘 내린다? 축복을 내리는 거예요. 그게 바알 종교에요. 바알 종교 참 쉽지요.

인간들이 눈으로 보고 관찰해서 알고 있던 인간 세계관을 확장시켜놓은 것이 신의 세계, 그걸 성경에선 뭐라 합니까? 우상이죠. 남성, 여성 하고 신을 섬긴다는 말은, 기본 생각이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떤 땅이 있는데 그 땅은 어디까지나 우리 소유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자식을 번창하는 것. 땅을 소유, 후손 번식, 그다음에 우리가 신을 섬기는 것은 거룩하고 의로운 거예요.

제사제도, 제사 같은 말로 의롭게 되면 하나님께서 결과적으로 뭘 준다? 땅을 복 주고 후손을 복 주고 우리 제사를 통해서 복을 계속 우리 것을 키울 수 있고, 땅을 넓히고 후손이 번식된다. 이게 바로 인간이 신을 본능적으로 찾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거예요. 이게 신이 아니고 뭡니까? 우상이죠. 우상의 특징은 대자연에 갇혀있는 신이에요.

대자연의 무수한 변화, 변동에 대해서 인간이 나름대로 생존하기 위해서 제대로 처신을 잘한 거예요. 바다에 가면 바다 신에게 제사 드리고, 풍어제 드리고. 산에 가면 산신에게 드리고, 무당들 있고요. 무당들은 스케줄 짜서 늘 산신령에게 나름대로 촛불 켜놓고(그러다 산불나기도 하고) 산신이 원하는 걸 대대로, 무당도 세습제니까 아버지 했던 무당 짓을 하는 걸 보게 되면, 바빠서 산신령 못 찾고 바빠서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중간 대리인 제사장들에게 무당들에게 자기의 성의를 표시하죠. 이익은 누구한테 돌아온다? “내가 산신령한테 잘 보여서 잘 되게 해줄게.” 그러한 인식구조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땅 소유부터 해서 씨앗, 후손 그걸 민족이라 하는데 민족의 땅인데 여기를 지금 하나님께서 없는 나라를 만들어서 그곳을 통과 지나가야 되는 거예요. 하다하다 설교할 때 처음으로 동화책 그림을 보여드렸잖아요. 내가 하면서 무슨 짓이고, 꼭 이 짓까지 해야 되는가 싶은 생각 드는데, 앞으로 이 짓도 자주해야 되는가 하는.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드는 거예요.

키보다 높은 바다 속을 통과하는 거나 이스라엘이 바로 이런 우상이 득실거리는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생존에 유리한 그 민족을 통과할 때 이스라엘 자체가 싸움을 하는 민족이니까 전쟁을 벌여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보니까 제가 우상, 바알종교 하니까 여러분 생각나는 게 뭐예요? 교회지요. 성당이고 그냥 교회입니다.

자기한테 이익이 없는데 왜 교회 다니는 노동을 해요. 노동은 반드시 이익을 얻어야지요. 이게 바로 우상이라니까요. 그럼 그 제사장은 누굽니까? 목사, 신부들이죠. 그럼 여 사제는 누굽니까? 여전도사고 수녀들이죠. 그럼 봉사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장로와 권사지요. 집사고.

형상을 나열하고 이쪽 형상은 미지에요. 미지의 X지요. 몰라요. 왜? 불로 가로막히니까 네 힘으로 형상을 볼 수 없다는 겁니다. 볼 순 없지만 저쪽에서 뭔가 건너온 게 있지요. 뭐가 건너왔습니까? 바로 언약, 말씀이 건너온 거잖아요. 율법이 건너왔어요. 그래서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런 세계, 형상의 세계를 뭐라 하느냐? 이걸 염두에 두기 때문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본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하지 말라.” 뭔 뜻입니까? 너는 이것 이미 해왔고 앞으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율법은 이 세상에 부정성을 심어주는 거예요. 긍정성이 아니고 적극적 사고방식이 아니고 부정성을 심어주는 거예요. 말씀은, 율법은. 십자가도 마찬가지고. 하지 말라. 모든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하심이라. “내가 하지 말라 했지?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 마. 무조건 네가 어떻게 처신했는지 내가 듣기 싫고 내가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마. 하라는 것은 해.”

인간은 안 됩니다. 왜? 율법 자체가, 갈라디아서 3장 22절, 율법이 주어진 것은 아까 묶는다 했지요. 22절에 뭐냐? 모든 것은 죄 아래, 그다음 단어가 뭐냐 하면, “가두었으니” 가두리양식이 여기서 나온 건 아니지만 하여튼 가두리양식이에요. 가둬놓고 키우는 거예요. 저주받을 것을 키우는 겁니다. “죄 아래 가두었으니”

여기에 봉사하는 자가 누구냐? 귀신들, 마귀가 여기에 봉사하는 거예요. 복음 듣고 교회 가서 우상 섬기는. 마귀가 계속해서 복음을 모아서 우상화시키는 작업을 마귀가 해요. 복음은 들었는데 복음으로 복 받으려하는 이게 마귀가 귀신이 작동해서 하는 거예요. 그냥 후패하면 되는데 그냥 속이 새로우면 되는데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자아거든요.

이 자아가 감당이 안 되는,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해야 사는 맛이 나겠는데 주님이 내 인생을 관리해버리니까 내 손은 항상 땟찌땟찌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도 땟찌땟찌한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망해버린 거예요. 뭐 때문에 망했습니까? 율법 때문에 망한 거죠. 가만있으면 이방나라처럼 살 나라를 주께서는 시범조로 하나님의 심판의 시범조로 이스라엘을 활용해주신 겁니다.

계속 봅시다. 4장 19절에 보면, 네가 하늘에 있는 일월성신, 별들을 섬기고 있다는 거죠. 아까 했지요. 모든 신들은 어디에 있다? 대자연 안에 하나의 요소로서 가득 차있는 겁니다. 이걸 전에 강의할 때 이렇게 했어요. 인간의 정신은 어떻게 만드는가? 정신 또는 양심은 어디서 만드는가? 대자연속에서 질서를 뽑아내고, 이게 인간의 정신이 되고 인간의 양심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자연속에서 질서를 뽑아내요. 질서가 뭐냐? 선은 이기고 악은 진다는 질서를 뽑아내요. 왜? 선악체계로 자연에다 대입을 시키니까. 그러면 여러분 아시다시피 대자연은 누구 말 듣습니까? 인간 말 듣습니까, 주님 말 듣습니까? 주님 말 듣지요. 그럼 이건 뭐예요? 대자연 안의 인간이 대자연에게 지 선악체제에 맞춰서 선과 악을 질서를 뽑아낸 거예요. 착하면 하늘에서 단비를 주시고, 네가 나쁜 짓하면 하늘에서 벌을 내린다는 거예요.

그걸 세상 민족은 전쟁하는 가운데서 또 정치하는 가운데서 자꾸 그 흔적을 뽑아서 그걸 진리로 전통화시키는 거예요, 관습화시키는 거예요. 장희빈 영화에 보면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죽이기 위해서 짚 인형을 만들어서 바늘로 콕 찌르니까 진짜 인현왕후가 죽었다는. 나중엔 장희빈이 콜라 마시고 죽잖아요.

그래야 속이 시원해. 왜? 나쁜 존재는 벌 받아 죽어야 되고 선한 존재는 복을 받아야 된다, 이게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의 아버지가 누구죠? 마귀, 악마죠. 요한복음 8장에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 했으니까(44절). 악마가 사주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선이 결국 그 사람의 운명을 천국으로 이끈다고 한 교리를 만든 거예요.

어느 인간이 거기서 그걸 아니라고 할 수 있겠어요? 단 한 분밖에 없었지요. 누굽니까? 예수님. 그때부터 그들은 다 죽었어. 왜 이 세상은 예수님 빼놓고 어느 누구도 불 심판의 대상이 안 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모두 세상 신 안에 죄 안에 가둬졌으니까. 죄 안에 가둬진 자를 주께선 어떤 형상으로 끄집어내는가? 그건 10분 후에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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