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남자와 여자

아빠와 함께 2022. 9. 25. 18:07

설교노트

 

남자와 여자

2022년 9월 25일          이근호목사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2:11-15

(2: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2: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2: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2: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가 죄를 지었을 때에 아직 죄짓지 아니하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는 겁니다. 그쪽이 남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조합해서 선악과 과실을 따먹은 그 처음 죄악된 사건을 시간 속에서 되풀이 시켜나갑니다. 그리고 그 되풀이 되는 사건 속에 하나님마저 끼어드십니다.

이렇게 되면 감추어진 하나님 자신이 이 인간 세계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유발시키십니다. 이것이 인간 세상이요 유일한 현실의 형편입니다. 죄지은 쪽에 세상을 맡긴 것이 아니라 죄 안 지은 쪽에서 세상 시스템을 맡기므로서 죄의 경로를 분명히 끌고 가시려는 겁니다.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신체에 이상한 변화를 생겼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움, 곧 수치입니다. 이 수치성을 남아 있는 육체에다 조치를 취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때 찾아왔습니다. 옷을 해입는 인간의 조치가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지를 알리려는 겁니다. 그러나 옷이 옷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도 옷이 되게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1-3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즉 인간의 육체가 입고 벗고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직접 세계 속으로 들어오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남성의 내부성이라는 새로운 내부성을 지니고 남성을 바꾸시려고 하는 겁니다.

해산, 곧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새로운 존재로 교체되기 위해 기존의 육체를 빠져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창세기 35:17-18에서,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이 죽습니다. 그렇게 해서 낳게 된 아이가 베냐민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을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자에게 있어 해산이란 존재 지반이 찢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으로서 기존의 존재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존재의 세계는 남성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 남성으로서는 구원이 성립될 수 없었습니다. 아담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인간은 벌거벗은 몸으로 그냥 지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걸치므로서 손 쓸 수 없는 자기 존재를 유능한 존재로 바꿔버렸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노동은 시작됩니다. 본인을 위한 노동을 하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절기 율법을 통해서 언급하신 바는 이러합니다. “노동하지마!”(레 23:35-36)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노동의 결과입니다. 인간의 노동의 결과물은 없습니다. 그런데 특히 남성들은 이 세상을 경작하면서 그들만의 세계를 지상에 펼쳤습니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사항은 분명 그들의 육체에 담겨 있었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취지를 지키려고 만든 육체를 가지고 이미 위반해 버린 자아와 인간의 신체 안에서 불일치가 일어난 겁니다.

인간은 자꾸 뭘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하라’를 출발 하지만 마지막은 ‘된다’로 마감하십니다. 남성의 문화성에 통치를 받으면서 여전히 여성의 신체에는 원래의 자연성이 남아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해산의 기능’입니다. 이 ‘해산이 기능’에서 남성은배제되고 누락이 됩니다. 손 쓸 수 없습니다.

성폭력이 아닌 성관계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로 생긴 결과에 대해서는 여성을 몽땅 뒤집어 씁니다. 이래서 여성은 본인 아니게 엄마가 됩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있어 첫번째 집이요 첫 번째 사람이요, 첫 번째 세계요, 첫 번째 남입니다. 모든 인간 존재에 있어 엄마는 문화성이 아니라 자연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분명히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인간인 니고데모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는 것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반응입니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 3:4)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다른 엄마를 말하는 것인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임신당하는 식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마리아 몸에서 나셨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6) 마리아는 하나님에게 임신당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임신하고 자신을 낳으신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어머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 2:3-4)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연적인 직능을 맡겼습니다. 그것이 암컷과 수컷의 직능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짐승들 마저 그들의 맏이를 죽어야만 했습니다.(출 11:5) 이로서 인간의 운명에 짐승이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레위기 4장에서 큰 단위의 제물은 모조리 수컷입니다. 하지만 제물 레벨이 등급이 내려가면서 수컷에서 암컷으로 바뀝니다. 그만큼 인간 세계의 대기권은 남성 위주의 세계였던 겁니다.

바로 여기를 하나님께서 공략하시는데 ‘남성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의 자격으로 일하십니다. 창세기 15:9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상위 단위, 즉 더 원천에 가까운 것은 수컷이 아니라 암컷입니다. 여성은 이땅에서 아품을 겪습니다. 무시를 당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구원의 내용이 남성보다 더 사실적이고 실제적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11강-디모데전서 2장 11-15절(남자와 여자)220925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입니다.

디모데전서 2:11-15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바울이 자기 성도한테 하나님의 계시를 말합니다. 일종의 지시입니다. 이 지시에 대해서, 여자는 조용하고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고, 그저 여자는 남자의 지시를 따라라. 여자는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즉 여자가 구원받는 방식은 해산에 있다, 라고 이야기할 때 ‘이걸 안 하면 어떻게, 어떻게 되느냐? 이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어쩔 건데?’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이 지시에 대해서 ‘우리가 안 하면 뭐 어떻게 나올 건데? 안 해도 그만이지.’라는 생각이 항상 우리 맘속에 같이 동반해서 등장하는 이유는 나 우선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우선이 된 적이 없어요. 나 우선이에요. 나 좋으라고 하나님 믿는 겁니다. 그래놓고 신앙이니 믿음이니 그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가 최우선 가치가있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뿐이에요. 나 잘되기 위해서.

그게 무슨 천국 백성입니까? 지옥 사람이지요. 그래서 그런 것을 아셔요. 하나님이 그런 것을 아시고 계속 들이미는 겁니다. 들이미는 이 모든 지시는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이룰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들이미는 것은 죄인, 네가 행하기 전에 이미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그리고 네가 이 땅에 살면서 역시, 역시, 혹시가 아니고 “역시 네가 죄인 맞잖아. 어느 하나 말씀 이것, 하나님 우선으로 산적이 있더냐? 다 너 좋으라고 믿고, 너 좋으라고 교회 나왔잖아.”라는 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은 ‘하라’는 것이 아니고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그러나 이렇게 행하라는 대로 따르는 자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반드시 이 말씀대로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정답은 뭐냐? 이거에요. 하나님만 일하신다. 하나님만 일하셔요. 인간은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일하지 않습니다.

구약 레위기 23장에 보게 되면, 십계명에도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절기를 지키라 할 때 필수요소가 성경에 나옵니다.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35절에도 나와 있고 36절에도 나와 있고 그 외 많은 절기 때마다 필수 요건으로 들어가는 것은 “일하지 말라. 그 날은 일하지 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함의 결과물로 너희가 되어야 되지 네가 지시에 따랐기 때문에, 네가 지시대로 일하기 때문에 네가 되는 그런 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용납한 적이 없어요. 인간의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이 가리워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참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지 마. 일하지 마.” 이런 뜻이지요.

그러면 왜 일하지 말라고 하는가? 인간은 자꾸 뭔가 일을 하게 되면 자신이 창세기 2장에서 3장으로 넘어오면서 망가진 자기 자신을 감추는 방식이 돼요. 인간의 육신은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지키는 육신입니다. 생명나무는 먹어도 되지만 선악과나무는 먹어서는 안 되고 절대로 이것은 알아서는 안 된다는 그것과 연관되어 있는 육신으로서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어요.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생명나무를 지키기 위한, 훼손되지 않게 지키기 위한 그 육신, 그리고 선악과 지식을 이미 받아내 버린, 그때는 이미 육신이 아니고 자아 또는 주체, 주체 사이에 뒤틀린 상황에서 인간 내부에 불일치상황이 연출되고 있어요. 일치되지 않아요. 인간은 아담이 만들어질 때 생명나무, 선악과, 에덴동산 중앙에 두 나무가 있는 데서 인간은 만들어졌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무슨 관련성이 있어야 될 거예요. 인간의 육신과 관련성이 있는데 과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까 생명나무 지키겠다고 인간을 거기서, 가차 없이 그 좋은 동산에서 추방해버렸어요. 그러니 관련성이 있는 겁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생명 나무와 선악과와 나는 관련성이 있다.’ 이런 생각을 도통 안 하고 있어요. 안 하고 있고 나는 내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생명나무와 선악과 그 취지를 지키는 것이 이게 일하면 안 돼요. 그냥 누려야 되지 일해서 지켜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일하고 싶어요. 인간이 일하고 싶은 그 이유가, 따먹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는 인간이 뭔가 육신적으로 불일치, 일치되지 않으니까 현재 에덴동산의 상황과 자기의 육신 자체가 어떤 불일치상황이 벌어졌으니까, 자기 몸에 이상이 생겼으니까 여기서 옷을 입는 겁니다.

옷을 입고 난 뒤에 그때까지는 벌거벗은 몸이거든요. 벌거벗은 몸이 여기에 손쓸 수 없는 손상이 일어났거든요. 그걸 메우기 위해서 옷을 입고 그다음부터는 자기를 유능한 존재로 탈바꿈, 바꾸고 말았어요.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설 때 ‘내가 옷 입고 나서겠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나서지요. 옷을 입는 행위가 반칙입니다. 처음 모습은 벌거벗은 모습이에요. 옷 입는 행위로 말미암아 자기는 주체자로서 자아에 가치 있다고 내 의미가 따로 존재한다고 우기면서 옷을 입었으니까.

그다음부터 인간은 옷 입고 유능한 존재로 자부하면서 유능한 존재라 하는 것은 이제는 내가 일한 몫은 찾아야 되겠다, 내가 일해서 내가 인생을 꾸려 나가야 되겠다는 그 자부심으로서 남녀가 아담과 하와가 무장된 겁니다. 그러면 생명나무 가치, 인간은 그런 생명나무 따위는 모르지요. 선악과 가치, 그것도 몰라요.

옷을 입은 상태, 일종의 무장된 상태에서 자기만 챙기면 되는 거예요. 주께서 나가라, 가차 없이 생명나무 보호하기 위해서 나가라 했습니다. 나가고 난 뒤에 인간의 육신은 그 주어진 땅의 저주스러운 환경에 맞서 싸우는데 광주 강의 때 그런 이야기 했지요. 맞서 싸우지만 결국은 저주를 이기지 못해서 인간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요. 이게 인간 처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가라고 하면서 벌거벗은 몸, 벌거벗은 몸에 인간이 옷을 입고 스스로 자립하려고 애쓸 때 주님께서 아담에게 찾아온 이유는, 그 본래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의 몸을, 옷은 입었지만 주께서는 벌거벗은 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계속해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몸의 입장에서.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안식일에 노동하지 마.”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립하고 난 뒤에 인간이 도저히 실행하기 곤란한 짓이에요. “일하지 말라.”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인간은 일하고 싶어해요. 그러나 주님의 약속은 “네 일과 전혀 상관없이 내가 되게 해줄 게.” 되게 해줄 게.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네가 너에게서 빠져나가야 되지요. 그 빠져나가는 것을 해산(解産)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나에게서 빠져나가는 것.

빠져나갈 때 그냥 빠져나가지 못해요. 내 존재의 지반, 내 존재의 바탕, 바닥이 찢어져서 죽음을 경험해서 빠져나가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내 행한 것을 받아버리면 내 행한 것으로 되돌아가 버려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옷을 빼앗고 모든 가치와 의미를 빼앗을 때 그다음에 주는 것은 다시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것이 교회에서 굉장히 중요한데요. 기도할 때 인간들의 잘못된 의식이 그거예요.

기도라는 노동, 노동하지 말라 했는데 기도라는 노동을 했음으로 그 기도 노동한 값을 내가 도로 내 것으로 얻겠다는 거예요. 그냥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얻겠다는 거예요. 내 것으로. 내가 기도하는 수고만큼 그것이 내 것이 되는 것으로 내가 끌어모으겠다는 겁니다. 욥기에 있어서 주신자도 하나님이고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욥 1:21)이라고 할 때 그다음에 욥에게 하나님이 뭘 줘도 그 준 것이 결코 예전의 내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을 주시는 거예요. 하, 이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내 교회, 내 가정, 내 국가, 내 가족, 내 천국, 이런 것은 내 신앙생활에 입에 담을 수가 없어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내 교회 잘되기, 내 교단 잘되기, 내 가정 잘되기, 내가 들어가는 신앙생활은 없어요. 주께서 주실 때 내 것으로 안 줬는데 왜 인간들은 무당한테 가서 비는 것처럼 교회 와서 빌면서 왜 자꾸 잃어버린 내 것을 달라고 하느냐 그 말이지요. 내 것, 내 것이 없는데! 이미 찢어져 내가 죽어야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요. 왜? 나는 나에게 덫이기 때문에. 덫에 걸렸거든요. 내 가치와 내 의미에.

하나님께서는 이 남성과 여성을 그때부터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옷을 입었을 때에 옷을 입은 채로 하나님께서 나설 때에 그래서 인간들은 옷을 입다가입다가, 브루카라 합니까, 아프가니스탄 여자들은요, 전에는 얼굴은 내놨는데 얼굴까지도 위에서 아래까지 다 가려버려요. 그러면 남자도 가리는가? 남자는 안 가려요. 남자는 몸 다 내놓고 다녀요. 얼굴 다 내놓고 다닌다고요. 그걸 여성의 비주체성이라 합니다.

여자는 주체성이 없어요. 주체성은 남자가 여자주체성을 대신하고, 여자는 그 주체성을 대신하는 남자의 소유물로 그렇게 된 겁니다. 이게 문화에요. 남성은 동산에서 쫓겨나서 토지를 경작했고 토지는 곧 문화가 됩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 생물학적 결정성 때문에 여자 속에는 계속 처음에 있었던 그 자연스러움이 유지가 되고 여자는 자연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겁니다.

교육받은 여자 또는 장관이 된 여자, 국무총리가 된 여자라고 해서 해산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인간들이 문화라는 것, 옷을 걸치고 문화를 만들었을 때 인간은 그럴싸하게 자기가 위장에 성공했다고 자부하지만 주님의 계시 앞에서는 일체 그것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세계에서는 자기 몸을 가리고, 얼굴을 가리고, 하나님이여, 제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는 식으로 나오지요.

그런데 얼굴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흰 벽에 점 박힌 거예요. 그 점에는 뭐가 있느냐? 시선이 있고, 그 시선은 외부의 것을 강렬하게 자기 쪽으로 빨아당기는 힘이 있어요. 까만 점, 얼굴의 하얀 벽에 까만 점 두 개 딱 박아놨어요. 거기서 시선이 나오는데 그 모든 시선의 특징이 뭐냐? 모든 것을 내 것 만들기 위해서 바짝 빨아당기는 거예요. ‘여자는 얼굴 들고 가지 마. 남자가 네 얼굴 대신할 게.’ 남자가 이 세상의 주관자로 나서는 겁니다. 나서서 여자는 남자가 벌어놓은 것 그냥 뒤에서 챙기기나 하고 애나 키우면 된다는 거예요.

이게 인간세계의 형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실 때 이런 엉망인 남성 위주의 판에서 주께서는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겠는가? 그게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어떻게 이루시는가? 여자는 인간의 내부성입니다. 남자의 내부성이지요. 주님께서는 그 내부성에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기절할 이야기를 합니다. 뭐냐 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임신했다는 이야기이에요. 사람이 하나님을 임신한 거예요.

인간에게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하나님이 어디서 나타나는가? 여자가 하나님을 임신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코스를 마련했던 겁니다. 어떻게 천지를 창조하신 그 위대한 하나님을, 인간이 어떻게 그분을 임신할 수가 있겠어요? 인간의 상상, 아이디어를 초월한 겁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구약에 보면 출애굽기 11장 5절에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그다음 구절이 뭐냐 하면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모든 가정의 맏이를 죽이는 그 재앙, 죽음의 천사를 보내서 그 재앙을 베푸실 때 인정사정 보지 않고 마구 죽어 나갈 때 거기에 누구도 죽느냐 하면, 가축의 맏이도 인간의 맏이와 더불어 같이 죽어요.

가축의 팔자가 인간과 연계되어 버린 겁니다. 인간의 장자만 죽이는 게 아니고 가축의 맏이도, 그게 무슨 죄가 있다고 가축의 맏이도 같이 죽여버렸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 자체의 문제점, 인간, 네가 지금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회적인 방법이 뭐냐? 인간과 운명을 같이 했던 그 가축을 통해서 인간에게 접근해 나갑니다. 그 가축을 통할 때 가축을 어떻게 분류하느냐 하면, 암컷과 수컷을 나눠서 제물을 드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인간세계는요, 남성 중심입니다. 남성이 경작하고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 문화라는 것은 법체계고요, 국가체계, 그 국가시스템을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어요.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그 가인의 7대손 라멕이 이런 말을 합니다. 23절에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이 라멕이라는 사람이 자기 자랑하기 위해서 여자에게, 자기 아내에게 자기가 이정도로 잔인하다는 점을 여성인 자기 아내에게 강조하고 자랑질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여성이란 존재는 뭐냐? 남자의 가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습니까, 그 가오, 남자의 가오와 자존심을 부추겨주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약한 여자를 자기의 소유물로 데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여자는 남자의 자존심을 부추기는 동시에 장애물이 돼요. 왜? 아무리 남자가 여자를 장악해도 배제되고 누락 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남자는 임신할 수 없고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 점을 주님께서는 딱 지목하고 그 내부성에 직접 관여하십니다.

창세기 35장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야곱의 마지막 자식을 낳으면서 죽게 됩니다. 죽어가면서 베냐민을 낳아요. 그 베냐민은 뭐냐? 어머니를 죽인 자식이 되겠지요. 어머니를 죽이고, 어머니의 존재기반을 찢어버리고 나온 자식이 베냐민. 그런데 베냐민 이름이 뭐냐 하면, 하나님. ‘오른손의 아들’이에요.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활동하시는 그 하나님,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활동하는, 모든 언약의 활동근거지에서 출현 된, 인간 모습으로 출현 되어 나타난 하나님, 그 하나님의 직능과 기능이 벌써 야곱언약의 일부인 베냐민의 출생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죽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라헬이에요.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왜 받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남편이 원했던 그 아들, 남자 때문에 생긴 그 자식, 그 귀한 자식을 위해서 라헬은 자기 목숨을 날려버렸습니다.(창세기 35:17-18) 이렇게 볼 때 인간세계에서 이 엄마라는 존재는 남자의 통치와 주도성을, 그대로 그 한복판을 뚫고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유일한 연결성이 되어버리지요.

모든 남자에게 어머니는 첫 번째 집이고, 첫 번째 사람이요, 첫 번째 세계요, 첫 번째 남입니다. 엄마가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엄마가 있다. 이 엄마의 뜻에 대해서 요한복음 4장에서 니고데모는 이렇게 엄마에 대한 집착을 다시 회상할 수밖에 없도록 예수님한테 유도 받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예수님께서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가 없다.” 할 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니고데모라는 사람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다시 태어나야된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이것은 백 번을 듣고 천 번을 들어도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반응은 “내가 어떻게 이 늙은 나이에 다시 엄마한테서 태어날 수 있습니까?” 하는 반응을 보였어요. 요한복음 3장 4절에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이게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반응의 한계입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알아듣는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알아듣는 그 이야기가 뭐냐? “네가 다시 태어나야 된다.”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다시 태어나는 장소가 뭐냐? 엄마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데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데요? “이 늙은 나이에 다시 엄마한테 갔다가 나올 수가 없는데요?”라고 답변하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답변이지요.

이게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인데 니고데모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우선이니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뭘 해야 됩니까?”라는 식으로 예수님 말을 왜곡한 거예요. 오해한 거예요.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게 없습니다. 왜? 추방되었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인간은 천국 가고 싶지요. 그러나 우리가 천국을 받게 되면 내 것이 아닌 천국이에요. 내가 원했던 그 천국 아닙니다. 이 사실을 좀 사람들이 알아들을 때가 되었는데요. 말을 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다른 데 가니까 다 구원받는 방법 이야기하던데?’ 구원 방법을 가르쳐주는 목사가 나쁜 것이 아니고 구원받겠다는 본인이 나쁘다는 생각을 왜 못 해요?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죽어야 돼요, 그냥. 왜? 옷을 입었기 때문에, 옷. 주께서는 옷을 벗기고 보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1, 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 말은, 옷이라는 것은 ‘입고 벗고’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입고 벗고’가 가능하다는 것은, 옷이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우리의 육신이 내가 지켜야 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밥 먹고 사는 게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옷 안에 들어있는 그 벌거벗은 모습에 대해서 지독하게, 집요하게 언급을 하면서 말씀이, 계시가 그곳을 주목하면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 9장 22장에 노아가 하체를 드러내고 있어요. ‘남사스러워라.’ 뭐 성경이 거룩한 책이고 착한 책이라고 여겼는데 벌써 창세기 9장에 아버지가 하체를 드러내고 그걸 목격한 아들이 그걸 보고 얼레리꼴레리, 했던 그 이야기가 나올 때에 ‘도대체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배울 게 없네. 봐서는 안 될 책인가?’ 하체 이야기가 거기 나오지요.

창세기 38장에 보면요, 오난이라는 그 아들이 자기 형수하고 관계를 맺을 때 ‘이거 임신해 봐야 내가 삼촌이 될 뿐이지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임신 안 시키기 위해서 정액을 땅에 쏴버렸어요. 그걸 성경에서 설정(泄精)해버렸다(9절), 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오난을 죽였습니다. 이래도 성경이 윤리도덕적인 책입니까? 이게 인간들, 남자가 지배하고 여자가 비주체적이 되는 이 인간의 의미체계, 우리 사회라는 이 의미체계에서 자체적으로 선악지식, 따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지식이 통용되는 이 윤리도덕에서 이런 성경의 계시 이야기가 우리에게 퍽이나 위로가 되겠습니다, 그게!

에스겔 16장 25, 26절에 보면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방앗수르와 바벨론을 흠모하면서 그들의 신을 섬기는 것을 가지고 간음행위로 잡는데 그냥 간음하지 마라, 음란하지 말라, 이러면 되는데 에스겔 16장 25, 26절에서는 이걸 굳이 읽어봐야 되는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건 뭐……, “네가 높은 대를 모든 길 머리에 쌓고 네 아름다움을 가증하게 하여 모든 지나가는 자에게 다리를 벌려 심히 행음하고 하체가 큰 네 이웃나라 애굽 사람과도 행음하되” 하체가 크다. 이 대목이 나와요. 이게 얼마나 노골적입니까!

그뿐만 아니에요. 레위기 18장 9절에서 19절까지 길게 나오는데 이건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는데, 우리가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그런 내용인데 10절부터 읽어보면 “너는 손녀나 외손녀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너의 하체니라.” 그다음에 14절에 “너는 네 아비 형제의 아내를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백숙모니라.” 그다음에 15절에 “너는 자부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다음 16절 “너는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렇게 죽죽 나온다고요.

신명기 23장 10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가 밤에 몽설함으로 부정하거든 진 밖으로 나가고 진 안에” 들어오지 말라. 전부 다 벌거벗은 몸 자체에서 언급해 나오는데 이걸 자연성 또는 우리가 문화적으로 다 커버하지 못하고 깊숙한 곳에 있는, ‘들어가 튀어나오지 마. 그것은 생각만 해도 낯뜨거워. 밖으로 나오지 마.’ 그런 숨겨놓은 우리의 본질에 관한 것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레위기 15장 16절에 보면 “설정한 자는 전신을 물로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이게 뭔가 남자든 여자든 벌거벗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다 더럽다는 거예요. 레위기 12장 같은 경우에 여자가 월경했을 때 제사법이 길게 나와 있어요. 아들을 낳을 때와 딸 낳았을 때와 달라요. 아들을 낳았을 때는 33일이 더럽지만 여자를 낳으면 66일이 더럽다는 거예요.

“뭐 그냥 넘어갑시다.” 할 수가 있어요. 이런 이야기를 “그냥 넘어갑시다.” 할 수 있어요. 무슨 권한으로 그냥 넘어갑니까? 왜 그냥 넘어가는데요? “낯 뜨겁잖아요.” 왜 낯뜨거운데요? 나는 내 위주거든요. 내 위주, 하나님 위주가 아니고 내 위주, 내가 얼마나 착하고, 성적인 것을 멀리했고, 나는 반듯하게 살았다는 내 의미체계를 따로 갖추는 내 위주거든요.

주님께서는 이 짐승을 가지고 제사를 드릴 때 수컷과 암컷을 나눠서 합니다. 우선 남성 위주의 세계거든요. 남성 위주의 세계기 때문에……, 짧게짧게 하겠습니다. 레위기 4장에 보면 전체 범위를 큰 단위로써 제사드릴 때는 반드시 수컷이 들어가요. 왜냐하면 수컷의 세상이기 때문에요.

자,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남성이 통치하는 세계에 주님이 약속이, 주님이 외부에서 외계인처럼 인간의 지상권을 뚫고 들어와요. 대기권을 뚫고 들어온다고요. 외계의 UFO가, 외부, 인간 세상이 아닌 외부의 다른 존재가 뚫고 들어올 때 맨 처음 맞닥트리는 것이 뭐냐? 남성 위주의 세계에요. 수컷 세계라고요, 수컷.

인간세계는요, 인간을 보고 수컷, 암컷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멸적이에요. 인간에 대한 모독입니다. 인간은 이미 품위 있는 존재고요,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존엄성으로완전히 포장이 된 인간세계에요. 인간을 두고 남성을 남성이라 해야지 수컷이라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남자 여자의 관계는 교배가 되어버려요. 이것은 보통 모독적인 언사가 아닙니다. 역겨울 정도로 모독적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인간이 너무나 잘난 체하기 때문에 역겨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옆으로 쑤시고 들어가는 겁니다. “너를 대신해서 수컷과 암컷이 죽는다. 왜? 너는 안 죽으려 하니까.” 왜 안 죽으려 하는가? 천하없어도 자기 위주기 때문에. ‘내가 왜 죽어? 미쳤어? 내가 왜 죽어? 나 멀쩡해야 돼. 나 멀쩡해서, 종교 생활 열심히 해서 신을 기쁘게 할 거야.’ 뭐 그러고 있다 그 말이지요.

여러분,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했다 하잖아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한 게 아니고 마리아는 임신당했어요. 그게 어디에 있는가? 마태복음 1장 16절에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에 죽 보면 전부 다 태어났는데 마태복음 1장 16절만큼은 예수님이 스스로 거기서 찢고 나와요. “나시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나시니라. 스스로 나온 거예요, 스스로!

그러니 마리아는 일종의 폭행을 당한 거지요. 마리아는 난데없이 당한 겁니다. 피동적이지요. 수동적으로 당해버린 거예요. 놀란 것은 마리아가 놀라버렸어요. 그 마리아 우리 보기에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가 포도주 떨어졌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3, 4절에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 2:3-4)”

자기 어머니잖아요. 어머니 아니라는 거예요.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어머니라 하는데 예수님은 어머니가 아니에요. 어머니는 하나님 본인이 어머니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임신하고 하나님을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이 세상에 인간으로 나타낸 방식이 그 방법 외에 다른 방식은 없어요.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 몸에 들어가서 스스로 임신하게 하셨고, 임신 된 자에게서 스스로 태어나는 그 방식 외에는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인간이 상상하는 하나님은 다 가짜에요. 진짜 하나님은 마리아에게서 임신해서 태어난 그 하나님만 하나님이고 나를 본 자만 하나님을 알아요(요 14:9). 나를 보지 않은 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머릿속으로 상상한 옷을 입고 문화의 세계에서 나온 가짜 하나님이에요.

여러분이 창세기 4장에서, 광주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 최초로 한 행동이 뭐냐? 제사였습니다. 신에게 감사제사 드리는 거예요. 안 받습니다. 안 받았어요. 당연히 안 받지요. 이미 인간과 하나님이 끊어졌는데 뭘 받아요? 제사를 왜 받아야 돼요? 안 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뭘 받는가? 인간의 죽음을 받지요. 그래서 아벨을 받은 거예요. 아벨이 드린 제물의 운명과 아벨의 운명, 보통 인간들은 일치되지 않는데, 아벨한테는 일치시켜 버렸어요. 네가 드린 제물과 아벨의 팔자와 일치시켰습니다. 그게 이스라엘에게 제사제물로서 기입된 거예요. 삽입되어 들어온 겁니다. 암컷 수컷을 구분해주는 거예요.

인간세계에서는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요. 남자가. 전부 다 수컷의 세계에요. 여자가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하고 남자에게 잘 해도……, 물론 남자는 여자를 굉장히 귀하게 여기고 고맙게 여겨요. 여자가 한 행동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남자는 여자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왜? 생래적이에요. 이것은 타고난 본성입니다. 창세기 3장 약속 그대로예요.

성경에서 그 내막이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먼저 범죄했기 때문에. 오늘 본문 내용이 이거예요. 여자가 범죄할 때 남자는 범죄하지 않았다. 남성은 범죄하지 않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여자가 남자 대신 범죄할 때 남성은 범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 사건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암컷 수컷의 두 종류로 나눠서 기능을 맡겼어요. 직능을 맡긴 거예요.

남자가 낫고 여자가 못하다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서 그 구분된 그 둘의 기능을 합쳐버리면 창세기 2장과 3장의 사건이 계속 반복해서 이 땅에 유포될 수 있어요. 너는 여자 역할, 그래서 여자의 생물학적 결정적 조건을 만들었고 너는 남자 역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가 손해봤다는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여자는 구원에 더 가까우니까, 여자는 죽음에 더 가까우니까.

왜냐? 임신이라는 것은 예고된 죽음이니까. ‘아, 내가 죽는구나. 이렇게 큰 고통 가운데 죽는구나.’ 그다음에 애 놓고 나오는 말이 뭐냐?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 왜? 날 닮은 또 다른 나의 복제물이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출현했기 때문에. 여자들이 그 생각을 갖고 있어요. 남자들은 여자를 성폭행 대상으로 봅니다. 하지만 거기서 나온 열매, 자식의 고통은 누가 다 짊어지느냐? 여자가 덤터기를 써버려요. 그게 남성 위주의 세계의 구조입니다.

남자 여자 좋아서 해놓고는 거기서 나온 자식에 대한 애절함과 자식에 대한 애착은 남자가 따라올 수가 없어요. 뭐 아닌 여자도 있습니다. 있겠는데 일반적으로 여자는 자식을 낳아놓고 떨어지지 않습니다. 수컷은 나 몰라라, 하고 딴짓하고 있지요. 왜 반반이 안되는 이유가 뭐냐? 남자는 문화성이고 여자는 자연성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자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반면에 남자는 허세와 허풍, 허황됨, 의미 찾고 이 세상을 어떻게 정복하겠다, CULTURE, 문화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거예요. 경작하다.

경작하게 되면 내 것 된다는 뜻이에요. 내 것 된다. 뭐든지 내 것, 내 것, 내 것, 남성의 세계는 무조건 수고하고, 수고하고, 수고하고……, 그러나 임신은 수고해서 되는 일이 아니에요.주께서는 네 수고, 수고하고, 수고하고, 수고하고 그 열매 얻고, 수고하고 대가 얻고, 이게 인간의 세계거든요.

회개라 하는 것은 “일하지 마. 수고하지 마. 수고 멈추고 내게 돌아와.” 네순 도르마, 여기서 이게 왜 나오나, <투란도트>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 잠들지 말라는 내용의 노래, “네순 도르마~” 하는 노래가 있어요. 모든 나로 인한 수고는 멈추고 돌아오라. 이건 내가 지어낸 이야기니까 더 생각하지 마세요.

네 수고 멈추고 돌아오라는 말이지요. 네 수고. 왜 수고하면 안 됩니까? 죽었거든! 죽은 자가 무슨 수고를 해요? 죽은 자가 죽었다는 것을 자연 속에 포함시켜라, 그 말입니다. 자연 속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내가 너한테 자연이 아니라 내가 죽는 것도 나의 자연이에요. 이것은 죄가 있어 죽는 게 아니고 그냥 죽게 되어 있어요. 이게 ‘되기’에요. ‘되기’ ‘하기’가 아니고, ‘죽자’가 아니고, 그것은 자살이고 ‘죽자’가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죽게 되어 있습니다. 자살하는 수고 하지 마세요, 그런 수고를.

이 수고를 인간만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이 직접 인간 속에 들어오셔서 하셨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바치는 제사, 수컷입니다. 족장을 위해서 바치는 제사, 수컷입니다. 전체의 죄를 위해서 바치는 제사, 수컷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할 때는 암컷 들어갑니다.

레위기 4장 14절, 16절, 수컷 들어가지요.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찌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21, 23절 수컷 들어갑니다. “그는 그 수송아지를 진밖으로 가져다가 첫번 수송아지를 사름 같이 사를찌니 이는 회중의 속죄제니라……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수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것 28절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를 인하여 그것을 예물로 삼아” 그다음에 소소한 것, 암컷 들어갑니다. 32절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수컷과 암컷을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인간세계를 외부에서 유성이 대기권에 충돌할 때처럼 수컷의 세계를 먼저 합니다.

수컷의 세계가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아무 대가를 얻지 못해요. 수컷이 누구냐? 아담이거든요. 아담은 흙입니다. 흙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이 수컷이 백날 수고해 봐야 죄도 못 이기고요, 죽음도 못 이기고요, 율법도 못 이기고요, 악마도 못 이겨요. 뭐 했어요? 그러면 남자들이 큰소리만 쳤지 실제적으로 구원 남성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큰 소리만 쳤지요.

그러니까 큰소리치는 남성한테 여자는 항상 숨도 못 쉬고, 무시당하고 피해를 입는 입장이에요. 그리고 자식 키우고, 모든 것은 여자가 덤터기를 다 써버리고. 남자는 허황된 것만 좆아가면서 자기 자랑한다고 “아다여, 씰라여! 마누라들 들어라. 내가 이정도야. 이정도로 내가 권력이 세.”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여러분이 아하수에로 왕과 에스더의 만남에서 ‘야, 에스더 미모가 아하수에로의 권력을 이겼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네가 오늘 너무 아름답구나. 너무 반했다. 이 나라의 반이라도 너에게 주마. 네가 원한다면.” 왜 선택권을 남자 자기가 정합니까? 뭘 원하는지 여자한테 왜 못 맡겨요? 왜 자기가 정합니까?

남자는 때려죽여도 여자한테 안 지려 합니다. 결혼해 본 사람은 다 알잖아요.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형님네 가족 상견례 할 때 저쪽에서 자기 집안 자랑하니까 우리 어머니가 자랑하는 것은 딱 두 가지 였어요. “야 아버지는 바람 안 피우고 도박질 안합니다.” 나는 그런 남편이라도 족하다 그 말이거든요. 얼마나 성경적이고, 이게 복음적이지는 않은데, 얼마나 성경적인지 몰라요.

잠언서 마지막에 그런 것이 나옵니다. 잠언서 마지막에 나오는 칭찬받는 여자가 어떤 여자냐 하면, 남편 뒷바라지 잘하는 여자, 그걸 달리해서 유청이. 아는 사람 아무도 없구나. <인간극장> 안 보는 모양이라. 복숭아 키울 때 딸이 아버지 아프다고 몇 달씩 심장 수술한 아버지 대신 복숭아나무 키워준, 그래서 주위에서 현대판 심청이라 해서 이름을 유청이라 지은 거예요. 그게 바로 이 남성 위주의 시대에서 최고의 여성이거든요.

여러분이 잠언 마지막을 한번 읽어봐야 돼요. 잠언 31장이 기니까 놔두고요, 여자가 살림 잘한다는 그 내용 빼고요, 29절에 보면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여성은 진정한 내부성입니다. 기존의 더러운, 자기 자랑하는 남자의 내부성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내부성, 우리 주님의 계시성, 하나님이 임신하고 싶은 그 하나님 모습, 그게 여자의 후손이에요.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온다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의 반대말이 남자의 후손이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의 반대말은 악마의 후손, 뱀의 후손이에요. 창세기 3장 14, 15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성에게 인간의 문화가 손댈 수 없고 인간의 폭력적인 통치력이 손댈 수 없는 요소가 여성에게 그대로 아직도 유효하게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은 뭐냐? 임신기능을 갖고 있다. 하늘의 어머니, 없던 것이 생겨나는 그 창조의 기능이 여성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 여자는 어머니 아니에요. 갈라디아서 4장에 진짜 어머니 나옵니다. 그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나의 어머니라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6절)

“니고데모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 분명히 니고데모는 귀가 있어요. 귀가 있어서 분명히 들었습니다. 분명히 들었어요. 윤석열 대통령이 욕을 했어요. 분명히 했는데 5천 명 국민을 전부 난청으로 만들어서 ‘잘못 들었나……?’ 분명히 뭘 했어요. “거듭 태어나라.” 분명히 거듭 태어나라, 이 이야기를 들었던 니고데모는 곧이곧대로, 그대로, 믿음도 좋지, 그대로 믿었습니다. “내가, 이 늙은 몸이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하늘나라는 가고 싶고, 우리 엄마는 늙었고, 나도 늙었고. 끝났잖아요. 니고데모는 주님이 우리를 임신한다는 사실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노동하지 마. 내가 임신할 거야. 네가 임신하지 마. 내가 임신할 거야. 내가 너를 임신할 거야.” 마리아가 임신했을 때,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여자여,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자기 엄마인데.

성경은요, 전체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도통 모르는 이야기만 있어요. 모르는 이야기만! 알 수 없는 이야기만 있어요. 예수님 이용해서 천당 갈 사람 같으면 도무지 알지 못하는 이야기만 가득 차 있어요. 세상에 나의 본질을 이처럼 하나님이 직접 왕림하셔서 알려주는 이런 방법 외에는 나를 알 길이 없습니다. 나를 안다는 것, 이게 가장 복음의 기쁨이에요.

성령의 기쁨은 뭐냐? 그동안 내가 나를 몰랐어요. 왜 몰랐습니까? 나한테 속아 넘어가서 그렇지요, 나한테 속아 넘어가서! 이 가짜인 나한테 속아 넘어가서 진짜인 줄 알았지요. ‘하기’가 아닙니다. ‘주께서 해 주기, 되기’입니다. 어떻게? 주께서 마리아한테 찾아오듯이 우리한테 찾아오는 거예요. 내 안에 내 것이 있는 게 아니고 말씀이 작동하게 되면 그 말씀 안에 작동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셨던 그 코스가 되풀이되게 되어 있어요. 말씀 안에. 모든 것은 주께서부터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게 되어 있다고요.

이제 마지막 남아 있는 어려운 것, 이거 너무 어려워서 상상도 안 되게 어려운 것, 창세기 15장 8-10절에 나옵니다. 아브라함하고 하나님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쪼갤 때 하나님께서 그 중간을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계약이 체결되는, 언약이 체결되는 그 장면이거든요. 여기 보면 분명히 레위기에서는 수컷이 대규모 단위 대규모 unit, 집단에서는 수컷이 남성이 인간세계 전체를 대표하는 것 맞아요. 왜냐하면 오늘 본문대로 여자가 먼저 범죄 했고 범죄한 자에게 어떤 시스템을 맡기지 않아요. 여자가 범죄한 순간에 범죄 하지 않은 유일한 남자가 아담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이 인간세계를 일임한 거예요. 범죄 하지 않은 쪽에.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남성이 범죄 하지 않은 조건이지만 사실은 남자도 여자로 인하여 같이 범죄 했잖아요. 범죄 했으니까 이제는 남성도 아닌 것이, 여성도 아닌 것이, 그러면서도 여성의 기능을 가지고 오실 새로운 남성이 기존의 남성주도권과 교체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실 때에 남성의 세계부터 만나는데 어디까지 내려가느냐?

점점 더 내려갑니다. 미천한 여인 마리아 안에 임신해 버려요. 그러면 예수님이 오신 이상 하나님은 Where are you?, “어디 있지요? 하나님은 어디 계셔요?” 여자 안에 있어요. 어떤 여자? 처녀 안에 있어요. 남성의 요소가, 인간적 요소, 인간문화적요소가 끼어들지 않는 생경한 공간을 하나님에 의해서 따로, 새로이 그 공간, 포지션을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 자리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갈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돼요. 그런데 그 마리아도 당황스럽고, 그 남자친구, 정혼한 자도 당황스럽고, 어느 누구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지요.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임신하느냐 그 말이지요.

마리아를 기계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임신하는 기계,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임신하는 기계로 만들 듯이 오늘날 성도를 기계로 만든 겁니다. 주께서! 말씀이 작동하는 기계, 이게 바로 구원이에요. 이게 내가 해산(解産)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말씀의 완성된 모습으로 나로 말미암아 나올 때 우리의 그동안 했던 이 껍데기 육신은 이제는 옷으로 간주 되어서 벗어버리면 돼요. 이제는 흙에 속한 육신은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된 부활의 몸을 입으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약은 3년 된 암소, 암컷이지요. 3년 된 암염소, 암컷이지요. 거기서 3년 된 수양, 수컷은 아래쪽으로 나와요. 레벨이 암컷의 세계, 여자의 세계가 레벨이 높고 수컷은 종속되는 모습. 그래서 예레미야 31장 22절에 보면 “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아, 한번 읽어볼게요.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여자가, 주님이 자기 백성을 안을 그 날을 위하여 마리아나 오늘날 우리가 하나의 기능인으로, 기계로서 지금도 작동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큰소리친다고, 말씀 안다고 하늘나라 가까운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손으로 어쩔 수 없는 피동적인 요소 속에 진짜 하나님이 일하고 있음을 우리가 눈으로 발견할 수 있고, 마음으로 발견할 수 있는,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그런 자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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