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가짜 인간

아빠와 함께 2022. 9. 11. 21:42

설교노트

 

가짜 인간 

2022년 9월 11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2:5-6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인간은 이유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는 채 화를 냅니다. 화를 내는 게 일상입니다. 억지로, 일부로 화를 억누르고 하지만 그것은 다른 방면으로 터져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본인들의 화를 풀기 위해 주변의 사람들을 찾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피해자와 희생자를 연쇄적으로 양산합니다.

그리고 그 끝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인간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아담이 이미 망가졌기 때문이요 오늘날 우리는 모두 그 망가진 아담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망가졌지만 하나님은 안 망가졌기에 이 사이의 차이에 의해서 분노가 일어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의 화를 북돋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보내신 이유는, 인간의 분노를 다 담아내어서 그 인간의 분노에 대해 하나님의 분노를 퍼붓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분노를 내지 않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므로서 자신이 가짜 인간임이 들통난 자들입니다. 다니엘 8:27에 보면, 하나님을 만난 자가 나옵니다.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멀리서 보면 하나님의 이미지는 낭만적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면 그 중압감과 압박감이 인간으로 감히 감당못합니다.

이때 성도는 비로소 자신이 가짜 세상 안에서 놀아났음을 압니다. 즉 죽음은 삶의 자리에 위치하지 못하고, 삶은 죽음의 자리에 위치할 수 없는 겁니다. 소위 살았다고 우기는 자는 주님의 세계에 들어설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생명이신 주님은 죽음의 세상에서 인간들에게 맞아죽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시선, 다른 안목이 요청됩니다. 인간이 분노하는 이유는 ‘나만의 인생’이 공격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짜 인간은 이미 아담의 선악과 이후에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가짜 인간들은 자기네들 끼리, 상호 멀쩡하다고 우깁니다.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보내시는 이유는, 인간의 일에 관여하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일에 관여한다는 것은 인간의 죄에 관여하는 것이고 이는 인간의 분노를 유발하면서 인간의 모든 죄를 단일화시킵니다. 즉 인간은 ‘여러가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죄를 짓게 될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중보자를 자기 세계에서 추방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손을 죽어 추방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게 되면, 인간들은 분노하게 되고 그 분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노하실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슬그머니 죄판을 인간 밑으로 밀어넣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 발판을 결사적으로 밀어내게 됩니다. 즉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 복음을 어디다 써먹을 거지?”라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17:9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있었던 놀라운 일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이후에는 이미 인간들에게 있어 자진해서 자신이 ‘가짜 인간’임을 아는 능력이 없음이 확연하게 드러내면서 이 말씀을 전해줍니다.

즉 인간을 위한 십자가는 없고 도리어 자아를 잃게 하는 십자가만 있는 겁니다. 나의 구원은 사라지고 주님의 구원이 나의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간 존재의 장판을 뜯어내십니다. 당연히 극렬한 분노와 실망들을 인간들이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즉 “세상은 왜 내가 예상한 대로 안 돌아가느냐?”는 식으로 불만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삶은 죽음의 자리에 위치할 수 없는 원칙 때문입니다. 1985년도에 KBS방송국을 통해서 방영된 미국 드리마 ‘V’는 파충류 외계인의 공격을 말합니다. 거기서 사람처럼 생겼지만 실은 피부 벗겨지니 파충류 맨살을 드러낸 겁니다.

이것처럼 주님의 영이 임한 사람은 자신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선악과 따먹은 그 현장에 도달하도록 인도받게 됩니다. 인간의 존재의 장판은 그저 자신의 이익받은 것과 자신의 재주들이 얼룩들룩 더럽게 때 묻어져 있습니다. 이 존재의 장판 위에서는 자기 자랑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찢어버리고 뎌러운 속살이 나오게 합니다. 노아 홍수 때의 취지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인간과 땅의 피조물을 싹 쓸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업으로 인하여 언약이 생겨납니다.

 

노아는 물에 떠 있는 방주에서 비둘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비둘기는 보낸 자에게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현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떠나야 함을 말해주는 겁니다. 마태복음 3:16에, 예수님께서 세례 받을 때에, 그 많은 사람들을 제쳐두고 유일하게 성령님께서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임합니다. 이 현상이 바로 ‘하나 뿐이신 중보자’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참된 진짜 인간은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비둘기같은 기능으로 작업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 세계로 인도받게 됩니다. 다시는 전에 ‘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인간들은 여전히 자신의 존재막을 고수합니다. 이들의 희망은, 비록 자기는 늙어 죽어도 자식이 자신의 꿈을 이룰 것이라고 과감하게 죽을려고 합니다. 그런데 첫 번 유월절날,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맏아들을 천사를 보내어 다 죽여버렸습니다. 즉 인간 존재의 막에서 희망이라고 마지막 남은 소원을 미리 제거하시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중보자의 일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여기고 감격함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더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여지는 없게 됩니다.

아들은 오직 예수님뿐이어야 하며 진짜 인간도 예수님 한 분 뿐이어야 합니다. 인간이 잉태한 자식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즉 인간이 만든 은혜의 방식을 주님께서 거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라진 그 죽음의 자리에만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하는 겁니다. ‘죽은 자의 명령’만이 생명의 음성입니다.(히 9:16-17)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존재의 장판의 허위성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9강-디모데전서 2장 5-6절(가짜인간)22091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2장 5-6절입니다.

디모데전서 2:5-6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중보자에 대해서 단출하게 정리해서, 압축해서 사도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중보자 이야기, 사도가 이 복음을 그 당시 사람들에게 전해보니까 그들 듣는 사람이 대부분 분노했어요. 화를 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렇게 친절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의를 다하셨는데 이게 어디를 봐서 분노가 나올 소지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사도가 이 말을, 지식을 전하는 게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이 말을 전했다는 것이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도가 이 예수님을 중보자로 언급할 때는 기존의 인간에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어떤 방식, 방편, 인간이 자기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중보자는 한 분이라는 이 한마디로 모조리 다 거부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서 종교 없는 인간은 없었는데 인간이 각자 자기 종교를 만들어요. 인간이 종교를 만들어서 신에게 잘 보여서 그에 대한 반대급부, 어떤 혜택을 노리고 있다. 이러한 행동의 그 바탕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자기가 진짜 인간이라는 것을 깔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전하는 이 중보자 개념은요, 우리보고 가짜랍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가 가짜 인간인 것도 모르고 평생을 그걸 지키려고, 그걸 붙들고 어떻게 살려 내보려고 아등바등 그동안 애를 쓴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전라도 무안에 가보면 소금밭이 있어요. <인간극장>에 “어머니의 소금밭” 해서 이번 주 내내 나왔는데 그 어머니가 아침마다 자기 종교를 행사합니다. 창문가에다 정화수 떠놓고, 수돗물이지요, 그거 떠놓고 비는데 빌 때 그 멘트가 제가 어릴 때 우리 할머니한테 들었던 멘트를 반갑게 다시 들었어요. “그저 남산 위에 노루 새끼처럼 잘 뛰어놀 듯이 우리 아들 건강하고 우리 손자 건강하기를, 내가, 이 할미가 너희들 잠자고 있는 그 시간에 깨어서 대신 빌어줄 게.” 이게 자기 종교에요. 왜 그렇게 결석도 안 하고 매일같이 비느냐? 나도 정상이고, 그리고 내 아들도 정상이고, 내 손자도 정상이고, 우리 가운데 가짜인간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 진짜배기 인간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에게 어느 근처 교회가 전도했으면 자기가 가짜인 것도 모르고 “아, 이런 방법도 있었구나. 예수님이 중보자고 그분이,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예수님이 계시니까 이걸 믿으면 구원되는 이 간단한 방법을 몰랐네.” 하고 그 가짜인간, 인간 자체가 가짜인 것도 모르고 그대로 또 교회 출석 할 것이다, 그 말이지요.

그분이 교회 출석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그 근처 원각사라는 절에 다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만약 교회 갔다가 손자나 아들이나 다치게 되면 속에서 뭐가 일어나느냐? 분노가 일어나겠지요. 예수님의 중보자, 오늘 본문 6절에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여기서 속전이라는 이 단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가짜뿐이다. 진짜 인간은 아무도 없다.’

모든 인간은 죄다 죄가 형상이 된 것이 인간이에요. 인간이 죄를 지은 게 아니고 죄가 인간을 이용해서 죄가 자기 확장을 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도 죄가 되고 예수를 믿어서 사는 것도 죄가 되는 이유가, 그렇게 함으로써 마지막에 남는 게 나 예수 믿었으니까 내가 구원받는다는 내가 그대로 다치지 않고 있는 거예요. 예수 믿기 전에도 나는 진짜 인간이었고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더 나아진 더 훌륭해진 진짜 인간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이제 죄짓지 말자, 하는 이야기가 이게 왜 말이 안 되느냐 하면, 속전 자체가 인간이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압박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 죄에서 벗어나서 내가 가짜네, 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정도로 죄에 통제를 받고 있어요. 정신이고 뭐고 전부 다 죄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자기가 가짜 인간인 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걸 성경에서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너희는 죽었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 죽었다는 말은 의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걸 좀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죽음은 삶 안에 위치시킬 수 없고 삶은 죽음 안에 위치시킬 수 없다.” 죽은 인간 속에 예수님을 끌어당길 자리가 없고요, 예수님 안에 자진해서 걸어서 인간이 들어갈 그런 자리도 없습니다. 삶과 죽음은 따로 놀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시선과 다른 안목이 필요한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막 분노를 퍼붓고 있습니다. 분노를 퍼붓고 있을 때 제가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6장 8절이 생각나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화를 낸다는 것은 화를 내는 순간 무엇을 다 내보냈느냐 하면, 햇빛 주시는 은혜, 공기 주시는 은혜, 어젯밤에 목숨 유지한 은혜 그딴 것, 그딴 것 다 내보내고 ‘네가 뭔데 나를 개무시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은혜받은 것은 하나도 없고 ‘네가 뭔데 나를 화나게 하느냐?’ 그걸 가지고 뭐냐, 육체를 위하여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본능적으로 불쑥불쑥 나와요. 불쑥불쑥. 통계는 안 내봤습니다만 인간이 보통 하루에 분노하는 횟수가 75번 내지 90번, 쉽게 말해서 생각했다 하면 분노, 분노 없이 행동하는 일은 없고요, 분노 없이 말하는 것도 없어요. 제가 지금 설교하는 것도 분노 중에 하는…….

인간은 분노 없이는 움직일 활력소가 나지 않습니다. 분노가 있을 때 인간은 살맛이 나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 오게 되어 있어요. 분노. 그런데 인간이 뭘 모르냐 하면, 내가 왜 분노하는지,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지를 아무도 몰라요. 분노는 일어나는데 분노하는 이유를 찾을 길이 없어요.

인간이 분노하는 것은 중보자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보자 때문이라는 이 말이 논리상 너무 비약이 되어 버렸는데요. 인간이 분노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그러면 예수님 때문에 왜 분노가 일어나는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냐 하면,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과 결부된 자 중보자예요. 하나님과 결부된 분 중보자고, 그리고 하나님과 결부될 뿐만 아니고 인간의 일에 관여하시는 분이 중보자입니다. 인간의 일에 어떤 식으로 관여하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것이 죄고 죄 아래 있음을 드러내는 일에 관여하신 분이 중보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의도적으로 활동하게 되면 그 활동하는 것이 인간의 속에 본인도 이유도 모르는 채 계속 끊임없이 분노가 올라와요, 끊임없이. 이준석 때문에 분노하고, 이재명 때문에 분노하고, 김정은 때문에 분노하고, 엘리자베스 여왕 죽은 것 때문에 분노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분노하고. 그것은 하나의 핑계에요. 분노의 이유를 찾아야 자기가 마음에 안정감을 얻기 때문에 분노할 이유를 억지로, 땜빵으로 찾다가 그런 것을 찾는데 심지어 그 애 하나, 막 태어난 갓난애도 분노해요. 막 울잖아요. 그런데 이유는 몰라요. 분노 없는 시간보다 분노하는 시간이 더 길어요. 하루 일과 중에서 95퍼센트 넘을걸요? 거의 대부분입니다.

왜 분노하는가? 주께서 분노를 일으킵니다. 왜 일으키는가? 바로 인간 자체가 속죄되려면 죄를 사해주려면 인간 자체가 자기 힘으로 그 죄를 벗어나서는 안 돼요.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자기존재판이 있어요. 존재판, 이중으로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성도를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면, 존재의 장판을 찢어버리고 그 존재의 장판에 가려진, 처음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그때 그 시대에 적용되는 원칙으로 강제로 끌고 가 버려요. 이게 장판을 찢어야 돼요. 찢지 아니하면 내 존재의 그 바탕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어느 인간이 분노 안 할 인간이 있습니까? 왜냐하면 내가 아는 나의 존재의 지평, 존재의 바탕이라 하는 것은 나의 이익과 나의 재주와 나의 자랑거리로 얼룩덜룩진 장판이거든요, 그 장판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나한테 유리하고 내가 남한테 자랑할 거리만……, 이렇게 커피 같은 것 쏟아버리면 얼룩지잖아요. 또 김칫국 쏟으면 얼룩지지요. 그렇게 얼룩지는 것처럼 평생이 얼룩덜룩, 알록달록 전부 다 내가 이 만큼 잘났다, 나한테 이런 재주가 있어, 나 이 재주로 밥 먹고 살아, 그런 것들로 얼룩진 장판이 찢어지지 아니하면 그 밑으로,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던 그 기본으로 못 돌아가요.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1985년에 KBS에서 방영한 외국 드라마 <브이>(V)라는 것이 있었어요. 어떤 외계인이 왔는데 그들이 굉장히 예상 밖으로 인간에 우호적입니다. 인물도 잘 생기고 함께 온 여자분들도 미인이고. 그들이 정식으로 외교사절 보내고 그들의 대장이 미국에 와서 “우리는 안드로메다에서 왔는데 지구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 이런 식으로 우호적으로 오니까 정치꾼들이 그 외계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를 하면서 죽 가는데 나중에 보니까 좀 수상해요. 외계인들이 뭘 하다가 피부가 벗겨졌는데 보니까 파충류예요. 사람 안 보는 데서 쥐 같은 것 막 잡아서 입에 넣고요. 충격적이었지요, 그때.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외계인이, 그 파충류가 사람하고 결혼해서 애까지 낳아요. 그때는 몰랐어요. 이게 성경에 있는 줄을 몰랐지요. 성경 창세기 6장, 갑자기 지금……, 6장 1-3절,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성경 이야기와는 좀 다르지만 그 외계인 파충류가 사람을 통해서 파충류를 낳는 그런 끔찍한, 흉측하고 충격적이고 끔찍한 그들의 속살, 피부가 벗겨질 때의 그 속살, 파충류, 그게 우리의 속살입니다. 우리의 아담의 본색은 아담 이후에 속살이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그걸 20세기 문화로 피막을 입혀놨지요. 전선, 피막 벗기면 구리선 나오잖아요.

주의 일은 뭐냐? 이 피막을 제껴서 뜯어버리고 그 안에 본 살을, 속살을, 그냥 그대로 맨살을 드러내는 일을 주께서 하십니다. 아무도 할 수가 없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그 일을 했습니다. “V”라는 드라마 보고 충격받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자신보고 충격받아야 돼요. 우리 자신의 일상을 보고 충격을 받아야 돼요. 자, 이런 안목, 이런 시선, 다시 이야기합니다,“죽음은 삶 안에 위치할 수 없고요, 삶은 죽음 안에 위치할 수 없고 죽음의 세계와 따로 놉니다. 생명 세계와 이 인간세계가 따로 노니까.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아 가지고 생명 세계를 언급하는데 죽음의 세계의 인간들이 사도바울의 복음을 듣고 분노 안 할 위인이 없었어요. 다 분노했어요. 이것은 사울 본인이, 사도 되기 전의 사울 본인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분노하는 그대로입니다. 분노했던 바가 있는 거예요.

<여로>라는 드라마에 영구 나오지요. 심형래가 “영구 없~다!” 그 영구, 영구 머리 보세요. 기계충(머리곰팡이증) 해가지고 무리 윗부분 중간에는 머리카락이 있는데 그 안에 뻥 하고 흉측한 머리의 맨살이 나와 있어요. 숲속의 빈터입니까? 뚫렸어요. 기계충. 사람들은 그 영구 없다, 그 바보를 정상으로 안 보지요. 지금 인간들의 문제가 하루 종일, 그것도 매일 쉬지 않고 분노하면서 자기가 정상이래요. 이게 이 안목이 뭐냐? 죽어가는 똑같은 인간들끼리 주고받으니까 그런 안목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안목, 중보자의 안목, 예수님의 안목으로, 성령의 안목으로 우리 자신을 봐야 되는데 육체를 위해서 심다 보니까 성령으로 자기를 안 보니까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서 평생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밥이 있잖아요. 밥을 오래 놔두면 쉽니다. 못 먹지요. 인간이 그냥 세상에 살면 쉬어요. 인간 못 먹습니다. 매일 하루하루 쉬어가요, 밥이. 유통기한 벌~써 지났어요. 못 먹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모습이, 요양병원에 가면요, 젊은 사람들이 정겹고 정다운 할아버지 할머니 10년 만에 가서 보면 흉측하고 끔찍해서 못 봅니다. 왜? 인간은 서서히 자기의 맨살을 드러내기 때문에 속에 있는 저주의 모습이 바깥 피부까지 뚫고 올라와서. 지금은 같이 보니까 그렇지 만약에 연세 많은 분 사진이라도 찍어서 본인이 그 사진 보면 본인이 놀라 버려요. ‘뭐 이런 귀신이 있나! 절대로 사진 찍지 마. 귀신 찍어서 뭐할래?’

예수님께서는 바로 인간들 보기에 죽음의 세계,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유일한 영생의 세계의 그 안목을 가지고 끊임없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가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슬그머니 중보자를 보내서 인간의 존재의 바탕에다 죄판을 밀어 넣기 시작한 거예요. 모든 말씀이 우리 속에 밀려왔다는 것은, 나는 내 자랑거리, 내 재주자랑, 나의 이익거리만 생각하는 그 존재 밑에다가 주께서는 “너 선악과 따먹었잖아. 이미 저주받아야 돼.” 그걸 밀어 넣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을 때 주께서 준비한 변화는 이렇습니다. 몸에서 흙이 되고 흙에서 저주 되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그대로 슬그머니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을 때 정말 사도바울처럼 성령 받은 사람은 이 중보자 의식이, 중보자 안목이, 중보자 시선이 우리 안에 나의 껍데기 보지도 않고 밑에 새로운 층으로서 아담이 처음 선악과 따먹을 때……, 지금 변함이 없어요. 맨 우리가 그 아담이에요. 그 아담의 자식들이니까 그래서 그렇게 들어왔을 때 예수님이 육신으로 인해서 그 주님의 죽으심이 들어와 버렸을 때 그때 성령 받은 사람이 느끼는 느낌은 뭐냐? 내가 이미 고인이라는 것, 이미 죽음 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서 제일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이 우리가 죽어간다, 가 아니라 이미 죽었다, 라는 것을 즐겁게 받아들이라는 그 기쁜 소식을 정말 우리는 기쁜 소식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게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성경 볼 때 사람이 성령을 안 받은 티가 어디서 나느냐 하면, 복음을 전하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이 묻는 게 거의 백프로 이렇게 물어요. “예, 복음 잘 알겠는데요, 이 복음을 어디에 써먹을 데가 있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교회 50년 60년, 신학박사, 목사가 되어도, 장로 집사가 되어도 마찬가지예요. 교회 한 60년 다니고 집에서 잠을 떡 자려고 눕게 되면 ‘내가 그동안 한 50년 교회 다녔는데 이 교회 다닌 것, 예수 믿는 것, 이게 무슨 소용이 있지? 나한테 무슨 이익을 가져다주지?’ 아~, 이런 생각이 문득 든다니까요. 그러니까 존재의 지평은 나의 이익을 생각하고 나의 주특기, 자랑거리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 자랑 중의 하나가, 내가 교회 가서 예수 믿은 것도 자랑거리가 되는 거예요. 이걸 찢어야 되는데 이게 안 찢기는 거예요. 성령이 와서 밑에서 올라오지를 않으니까, 밑에서 나를 찢어서 십자가 쪽으로 잡아당기지를 않으니까, 멀쩡하게 유리판 위에 구슬처럼 옆으로 돌아다닐 뿐이지 유리판 자체가 깨어지지 않으니까, 존재가 깨어져야 되는데 안 깨어지니까 ‘이 복음 이거 어디에 써먹으면 되지? 복음으로 내가 이익 보는 것은 뭐지?’ 이런 생각을 한다고요.

성령이 오신다, 하는 것은 주님께서 온전히 이제부터 예수님만 증거 할 자로 삼기 때문에 예수님에 의해서 궁지에 몰립니다. 궁지에 몰리게 되면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나는 어떻게?’라는 그 나에 대한 나의 안타까움과 분노가 선을 넘어버려요. 나는 어떻게, 가 아니라 ‘주께서 내가 모르는 세계에 잡아당겨 줬구나.’를 발견하게 돼요. ‘안돼! 나 안돼! 나 미치겠어! 이렇게 되면 그동안 내가 이뤄놓은 것 내 성과, 체면, 이거 다 깨지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라는 질문을 내뱉다가 갑자기 찢어진 그 존재의 틈새 사이에서 확 잡아당겨 버리면 내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갈 수 없는 나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궁지에 몰아넣을 때는 ‘예수 믿었는데 다시 예수 안 믿는 시절로 돌아가 봐?’ 도망칠 여지를 주지 않아요. 잡아당겨 버리면, 잡아당겨 버리면 거기서 어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죄를 여러 가지 죄를 지은 게 아니었어요. 여러 가지 죄가 아니라 죄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게 뭐냐? 중보자를 모른 죄, 죄는 하나로 돼요. 그리고 여러 가지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는 한 가지만 보는 거예요. 한 가지 의. 그게 뭐냐? 예수의 의만 바라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 세계에요. 사람이 여러 가지 죄를 짓게 되면요, 죄 지을 경우 있고, 안 지을 경우가 있어 가지고 ‘죄지었지만 착한 일 많이 했잖아.’ 이런 식으로 자꾸 자신을 지키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깨어지지 않은 유리판 위에서 왔다 갔다, 미친 사람이지요. 맨날 평생을 거기서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래도 선방했잖아. 인생 잘 산 거잖아.’ 이게 깨져서 밑에 생각지도 못한 다른 세계에 도착해야 되는데 계속 그 위에서 노는 거예요. ‘개척교회나 만들어볼까?’ 이런 거요. ‘목사나 해볼까? 성경 박사 해볼까?’ 그거 해서 뭐하는데요?

오늘 본문에서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라는 것, 한 분이라는 말은 인간들이 유리판 위의 구슬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일체 그런 방식의 세계는, 이제는 주님 안의 세계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세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17장 9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7장은 변화산 이야기인데 거기에 보면 여러분 잘 알다시피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변화되어서 해같이 빛났어요. 놀라운 사실을 봤지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그걸 대표로 봤습니다. 이렇게 하늘나라 볼 자도 있다, 해서 보여줬는데 더 중요한 사실은 9절에 나옵니다.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이 대목이에요.

그 놀라운 변화산 그 사실을 입 다물라는 거예요. “입 다물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써먹을 데가 없어요. 내가 멀쩡하게 계속 살아 있어서 써먹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찢어버리고, 나를 깨버리고, 나를 없애버리고, 잊어버리게 하는 복음이기 때문에 마치 변화된 놀라운 기적이라도 봐버리면 나는 안 다치고 그것이 나를 빛나게 하는 도구가 되어버리고 수단이 되어버려요. 하나의 소재가 된다고요. 내가 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소재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주께서 그걸 영원히 알리지 말라고 했느냐? 알릴 때 언제 알리는가? 십자가에 죽기 전까지는 알리지 말라.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의미는 알지 못하는 원칙을 계속해서 꾸준히 이어가게 하시는 그 사건이 십자가에요. 어느 누구도 존재의 장판에서 이쪽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그 시절로 자력으로 뚜벅뚜벅 자기가 걸어서 못 들어오게 만들어버리는 게 십자가에요. 저지해버리는 겁니다.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야 인간이 바탕으로 갖고 있던 그 죄가 발산하는 분노를 끝까지 다 일으켜서 죄란 죄의 바닥까지 끝까지 인간의 죄가 어디를 겨냥하는가, 그 죄의 속성, 성질까지 그대로 다 나타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주께서 분노를 일으킵니다. 복음을 전하면 분노가 일어나잖아요. 그러면 그 분노에 섞여서 메시아가 일하십니다. 일하고 분노를 통해서 주의 말씀이 나오고요. ▲인간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분노하고 분노하는 이유는 뭐냐? ‘저 복음이 나한테 어디 써먹을 데 있다고 저런 복음을 나에게 듣게 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써먹을 데 있으면 믿을게. 굳이 당장 써먹을 데 없다면, 나를 그대로 천국 보내주면 믿을 게. 나를 안 다치게 한다는 조건 하에 나는 믿을게.’ 이렇게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분노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분노와 더불어서 주님의 분노도 함께 나오니까, 그래서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 교회 왔는데 진짜 복음 전하는 교회에 앉아 있다가 제대로 주의 분노를 된 통으로 당하는 겁니다. “네가 주의 분노를 한번 받아봐라.” 중보자는 인간들의 이 세상에 분노를 유발하는 겁니다. 왜 유발하느냐? 인간이 자꾸 가짜이면서도 진짜라고 우겨 가지고 평소에 자기를 자기 종교로써, 기독교 종교로써, 천주교 종교로써, 알라, 불교, 자꾸 자기를 지키는 종교를 끝까지 쥐고 있는 거예요. 계속 주님은 거기다가 그것까지 말씀으로 지적을 하니까 그들의 분노도 극에 달하지요. 그들은 말합니다. “내가 그냥은 안 죽는다. 내가 당신 죽이는 것도 허락 맡아야 돼? 죽어라 이 하나님아!” 하나님을 죽여버리지요. 인간이 하나님마저 죽일 정도로 자기는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그때 십자가 앞에서 발각당합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는 그러한 안목으로 완전무장 되어 있는 존재, 그게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나예요. 그걸 몰랐지요.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부활로 다 녹화 떴습니다. 다 녹화가 되어버렸어요. 이게 부활로, 그 녹화된 그 부활이, 그 녹화물이 이게 택배로 오는데 성령이 택배물로 와 버렸어요. 성령 안에 십자가라는 택배물로 와버렸다 그 말이지요.
그럴 때 그 성령이 옴으로써 그동안의 내가, 진짜 나가 누군지를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그야말로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 1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 너무 기뻐서 환장해서 이런 고백을, 서슴없이 지금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너무 기뻐요. 너무 기뻐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게 세상에 기쁜 거예요.

주께서 나를 그렇게 궁지에 몰아넣어서 내 인생, 내 평생 자체를 완전히 찢어놓은 겁니다. 어떻게 내가 내 인생을 찢습니까? 이게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내가 불가능한 일을 주께서 다 찢어놔 버린 거예요. 그래서 성도한테 예수님 이야기는 스포일러에요. 미리 줄거리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중보자가 하나라는 것은, 그런 죄인을 한 분을 받쳐주는 용도로 하나님께서 활용하신 거예요. 나 아니고, 나 아니고, 너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가 모여서 그러면 오직 누구야, 예수님 한 분으로 모이게 해서 예수님만 한 분인 것을 증거 하는 거예요.

이 예수님이 한 분이라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구약성경에 여러 가지 사건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유월절인데요, 유월절은 바로 자식을 먼저 미리 당겨서 죽이는 사건이 유월절 사건이에요. 왜냐하면 어느 부모치고 자기가 연속될 수 있는 자기 방안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 대에 못 이루면 자식한테 이걸 시키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인간이, 비록 나는 죽어도 내 자식 살아 있으면, 특히 자식 중에서도 딸은 말고 아들 살아 있으면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거예요. 자식들에 관한 멘트 가운데서 불쑥불쑥 아줌마들이 하는 멘트가 이런 것이 있어요. “내 새끼 생기면 절대로 이런 것은 안 시킨다.” 아줌마들이 그런 이야기들 해요. 보통 드라마에도 그런 대사가 나와요. 남편이 자식 버리고 도망가놓고 자기 인생 즐겨놓고는 뒤늦게 자식 잘되니까 찾아왔을 때 대사가 그래요. “수연아!” “왜 왔어요?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지금 갑자기 내가 너무 몰입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우리는 끝났어요.” 경상도 말로 하면 “가가 가가?” 즉 “그 아이가 그 아이 맞지?”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요런 대사. 자, 지금 둘 사이는 끝났는데 자식이 있잖아요. 자식에게 자신의 연속성을 거기다 담는 거예요. 내가 죽는데 서럽지만 그나마도 서러운 것을 커버할 수 있는,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는 다른 방안이 뭐냐? 자식이 잘되는 것. 세상에 그걸 유월절 날 미리 당겨서 죽여버려요. 주께서. 본인을 죽이는 게 아니고 본인이 희망으로 잡는 마지막 보물,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는 그 자식을 죽여버리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나로서 ‘1’로서 유지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주께서는 제로(0)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는 이 땅에 하나의 흔적이었다. 그냥 날려 보냅니다. 자식 죽은 것을 성경에서는 그걸 저주라고 해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 만났을 때 자식을 못 낳게 되고는 하나님의 저주 받았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중보자를 앞장세워서 이 전쟁을 벌이신 거예요.

이런 세계, 지금 우리가 여러분 편안하게 듣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런 이야기, 존재 위에 서 있는 세계와 존재 뒤에 있는, 존재의 바탕에 있는 생명의 세계의 차이점을 받았을 때 선지자는 혼절했어요. 정신이 나가버렸습니다. 다니엘 8장 27절에 보면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다니엘이 지금 코로나 걸려서 수일을 앓은 게 아닙니다. 계시를 받았어요. 그 계시가 뭐냐 하면, 나라와 나라가 전쟁이 벌어집니다. 전쟁은 인간의 존재의 바닥을 드러내고 모든 삶이 어려워지는 게 전쟁이지요. 그러나 그 어려움이 어려움의 끝이 아니에요. 전쟁에서 어려움이 인간의 어려움의 다가 아니라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더 힘든 것은 바로 존재의 더 밑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세계,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을 때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한 그 세계, 그 말씀의 세계, 주님의 세계가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더 정신을 못 차리고 정신이 나가버리는, 혼절(昏絕)이거든요, 기절해 버리는 세계에요. 그걸 비친화적이라 해요. 친화적이지 않아요. 동질적이 아닙니다. 이질적이에요. 우리는 한평생 살면서 똑같은 인간들, 동질의 인간을 만나 가지고 수다 떨고 시간 보내면서 “우리, 친구 아이가!”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나 다니엘은, 선지자는 그게 아닙니다. 그 세계가 아니에요. 혼절 나는 세계에요.

왜? 그동안 고이 지켰던 나가 갈기갈기 찢어져 버린 그 세계가 얼마나 충격적이겠습니까? 그것도 내가 일부러 만든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제로 발목을 잡고 잡아당긴 세계인데 내가 어떻게 손쓸 수가 없어요. 손쓸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대책이 없어요. 뭐 어쩌라고, 뭐! 내가 선택해서 예수 믿었으면 예수 믿는 것 그만두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면 돼요. 그 도망갈 길도 다 차단되어 버렸는데요? 다니엘 10장 8절에 보니 천사가 다니엘에게 찾아왔어요.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앞에 한글자 집어넣어요 “힘이 쪽 빠졌고” 9절에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지요. 바들바들 떨었어요.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이게 실재현실입니까, 아니면 내가 놀던 데가 현실입니까? 둘 중에 어느 쪽이 허상입니까? 정녕 내가 천사의 말씀을 만난 이것이 진짜 현실이라면 내가 놀던 곳은 전부 다 그냥 연극에 불과한 꾸며낸 내가 그동안 가짜에 현혹되었군요. 허구에 나가 말려들었고, 허구에 울고, 허구에 웃었고, 부질없는 세월을 보냈군요. 이게, 이 말씀의 세계가 진짜인데.”

그래서 주님께서 다니엘을 통해서 알려준 것은 이겁니다. “내가 진짜 인간을 보내줄 게. 그러나 단 한 명이다. 둘 아니야.” 이만희 아닙니다. 사도바울 아닙니다. 단 한 명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진 적이 없다. 내가 십자가 안 졌는데 왜 자꾸 나 찾아오느냐? 주님이 지금 살아 있다. 나를 존재 밑의 세계로 끌어당겼듯이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존재를 찢어버리고 상상도 못 한, 예측도 못 한, 생각도 못 한 그 세계에 여러분을 잡아당길 것이다. 성령으로 진짜 네 모습이 어떤지를.”

단 하나, 그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준비했는데요, 그것이 창세기 홍수심판 이야기입니다. 홍수심판, 창세기 6장 6, 7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 주장이 아니니까 저보고 분노하면 안 돼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쓸어버리는 거예요.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사람이 살 수 있는 어떤 여건도 가축도 다 쓸어버리는 거예요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창세기 7장 4절에 보면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서울 강남 은마아파트도 쓸어버리는 거예요. 지금 집값 6억 떨어지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쓸어버리는 거예요. 교인 수 몇 명, 우리 교회 몇 평이다, 쓸어버려요. 다 없애버리는 겁니다. 쓸어 버릴 때, 존재의 장판이 뜯겨질 때 그때 바탕에 언약이 나옵니다. 언약은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물로 쓸어버리고 난 뒤에 물속으로 다 없어졌는데 여기서 창세기 8장 9절에 비둘기 하나 나옵니다. 이 비둘기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을 때 그 비둘기의 취지를 살려서 세례받아요. 마태복음 3장 16절 여러분 다 아시지만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자, 비둘기의 특징이 뭐냐? 보낸 쪽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보낸 쪽으로 되돌아오지 않아요. 까마귀는 보냈지만 되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노아가 보냈지만 다시 노아 쪽으로 되돌아오지 않아요. 십자가는 내가 믿지만 그 십자가가, 나 있는 장소로 십자가가 다시 오게 하지 않는 그 능력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나를 잊어버리고 나를 잃어버려라.” 그 말입니다. “예수 믿는 나를 잊어버려라.” 그 말이에요.

개인 구원 없습니다. “이렇게이렇게 해서 예수 믿었더니 구원 받았다.” 그런 것은 없어요. 인간의 기독교가 만들어낸 거예요. 그거 가짜 인간들이 만든 가짜 종교입니다. 우리가 성령이 비둘기같이 오게 되면요……, 주님께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을 주시는 분이 돼요.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게 되면 주님께서 거쳤던 그 경로를 똑같이 밟게 합니다. 비둘기같이 온다는 말은 우리를 다른 데로 데리고 가겠다는 의도에요. 전에 네가 네 맛에 살던 너, 네 잘난 맛에 살던 너, 주위에서 칭찬이 자자하고 재주 있다고 나름 성공했다고 부러워하는 그 세계로 우리를 다시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그 세계를 잊게 만들어요.

이 말은, 나의 구원은 사라지고 내 안에 주님의 구원으로 내용이 채워지는 것, 그것을 예수의 증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의 구원이 사라져야 돼요. 이쯤 해서 다시 한번 점검 들어가야 되지요. 인간들이 교회 다니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구원은 뭐냐? 하나님의 복 받아서 나 잘되고 내 자식 잘되는 거지요. 자식은 벌써 죽었는데요? 나는 고인(故人)이에요. 고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산책로입니다. 이미 죽었으니까 이것도 구경하고 저것도 구경하고요, 부도난 것도 구경하고 집에 불난 것도 구경하고 ‘그것참 잘 타네.’ 이미 죽었으니까 구애받지 아니하고 얽매이는 게 없어요. 애들이 추석날 오게 되면 “누구세요? 아 참, 내가 낳은 애 세 명이지?” ‘아, 그렇구나. 내가 저런 애 세 명 낳았구나.’ 이미 죽고 난 뒤에 산책하는 거예요, 산책하는 것. “엄마! 나 사법고시 합격했어.” “그랬어? 음, 그랬구나. 아이고, 너 고생이 많다. 앞으로 네가 사법인으로 잘해라.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 바로 읽어도 우영우.” 그래 봤자 장판 위에 자기가 이만큼 나 잘났다, 나는 이런 이익이 있고 나는 존경받았다는 그러한 얼룩덜룩한, 더럽기 짝이 없는, 그 얼룩덜룩 때만 잔뜩 끼어 있는 그 존재의 판, 그게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이 죽음의 세계에서!

상상도 못 한 그 세계에 찢겨서 끌려 들어가야 돼요. 비둘기가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 비둘기가 말해주는 것은 바로 한 분을 이야기해요. 오직 요단강에 세례받을 때 그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비둘기가 내려온 것은 바로 우리 예수님 뿐입니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거기에 덧붙여서 하나님의 음성까지 들렸어요. 마태복음 3장 17절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기뻐하는 아들이라. 왜 하나님께서 유월절 날 우리 자식들을 미리 다 죽여놓는가? 아들은, 진짜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만 아들로 인정되지 다른 아들은 아들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식을 낳음으로써, 특히 아들을 낳음으로써 자기가 숨을 곳도 찾고 피할 곳도 찾지만 그것 다 소용 없는 거예요. 우리 아들한테 내 몸을 맡길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아들한테 우리가 고인으로써 이미 맡겨진 사람이 되어야 돼요.

자, 이제 끝으로 이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참, 이 이야기가 보통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데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히브리서부터 보겠습니다. 그 이야기, 왜 주님의 아들만 인정하는가? 9장 15절부터 봐야 되겠습니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17절,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까 한 이야기 지금 세 번째 하는데 중요하기에 다시 해보겠습니다. 죽음은 삶 안에 위치시킬 수 없고요, 생명은 죽음 안에 위치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 땅에서 우리가 믿어야 될 것은, 이 땅에 살았다고 우기는 자들로 인하여 이 가짜인간들을 향하여 기어이 죽게 된 그분을 믿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분을! 살아서 훌륭한 사람 믿으면 안 돼요. 예수님은 절대로 훌륭한 사람 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천하에 죄인 되어야 돼요. 그래서 인간세계에서 예수 죽었다고 욕 안 얻어먹을 정도의 사람,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는 죽을 짓을 해서 죽어 마땅하다는 그러한 평가를 받은 그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익 보기 위해서 저분 알고 있으면 나한테 좋은 게 있겠지, 그런 식으로 믿을 분이 아니에요. 더는 죽었던 그 주님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팔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걸 잡아주는 것, 그 팔자를 잡아주는 게 뭐냐? 죽은 분의 명령입니다. 죽은 자의 명령이에요. 살아 있는 목사, 장로, 뭐 교단, 이런 명령은, 대통령 명령은 명령도 아니에요. 죽은 자의 명령이에요. 러시아 군인이 우크라이나 침범할 때에 그중에 진짜 성도가 있다면 푸틴이라는 그 대통령이 명령해도 ‘내가 이거 전쟁 나가야 돼, 말아야 돼?’ 본인이 성령 안에서 판단이 되어야 돼요. 왜? 죽은 예수님한테 명령을 받아야지 살아 있는 미친 인간한테 명령받을 일 있습니까? 그런데 러시아 군인 가운데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자기 아내가 욕을 얻어먹었다든지 자식이 얻어맞았다든지 할 때는 ‘이참에 푸틴 핑계 대고 내 복수는 내가 하겠다.’ 이렇게 나오는 것은 이해가 돼요. 되는데 아무 명분도 없이, 아무 누구의 지시 받는 것도 없이 나라가 불러서 간다? 나라 지가 뭔데? 나라 지가 뭔데? 나라가 있다는 게 문제잖아요.

 

있는 것한테 왜 명령을 듣습니까? 여러분들도 자식들을 복음으로 가르칠 때 분명히 하세요. “아빠가 눈에 보이나?” “예, 보입니다.” “아빠가 죽었나 살았나?” “아빠 살았어요.” “살아 있는 자 말 듣지 마. 듣지 말고 엄마 보이나?” “보입니다.” “엄마 말 듣지 마.” “너 보이나?” “나 보여요.” “네 말도 듣지 마. 죽은 자의 명령, 그게 언약이고 그게 생명의 약속이야.” “아빠! 왜 그런데?” “생명은 죽음의 자리에 위치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에 위치할 수 없어요.

강남강의에서 그런 강의 했지요.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는데 자기가 종을 낳고 난 뒤에 아내가 임신을 못 해요. 임신을 못 한다는 것은 아내의 태는 죽은 태에요. 죽었어요. 죽음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것은 죽지 않은 다른 임신을 이용해서 자기 대를 잇는 것, 이스마엘을 낳아서 잇는 것, 하갈을 통해서 잇는 것 그게 전부에요. 이게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전부고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에요. 그런데 딱 종에게서 이스마엘 낳고 난 뒤에 그다음에 15년쯤 뒤, 그 뒤에 하나님께서 죽은 것이 분명한, 분명히 죽었어요, 죽었는데 천사 세 명이 와서 내년에 아이 있을 것이다, 하는 주의 지시, 죽은 자의 지시, 인간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분의 지시가 아브라함 가정에 개입되니까 아브라함의 가정은 존재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끌어 당겨진 거예요. 그래서 낳은 것이 뭐냐? 이삭을 낳았잖아요. 그 이삭 안에 죽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라는 뜻에서 죽음이 포함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갈라디아서에서 “잉태치 못한 자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 우리 어머니는 따로 있다. 우리 어머니 나를 생산한 새로운 피조물 되는 어머니는 따로 있다.”
이걸 언약이라고 한 겁니다.

 

종의 언약이 있는 반면에 그 맞은 편에 아들의 언약이 있어요. “종이냐 아들이냐.” 이걸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두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갈 4:24-27)

은 율법의 저주를 받고 아들은 일체의 저주가 없이 속전(贖錢)에 근거해서 속전, 죄사함에 근거해서 새롭게 만든 아들, 그것을 가지고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어요. 새로운 피조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로 주께서 이렇게 일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 제발 분노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돌아가지 않게 하옵소서. 비둘기를 따르게 하옵소서. 이쪽 세계 말고 주의 세계, 아들의 세계 천국에 끌려가면서 그저 이 땅에서는 이미 죽은 자로 산책하듯이 그냥 나그네로 사는 즐거움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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