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옮기심
2022년 9월 14일 이근호목사 본문 말씀: 나훔 2:11-13
(2:11)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2:12)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2: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용맹스러운 앗수르 군사들, 그들은 건들지 말아야 될 나라를 건드린 겁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재물을 빼앗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이들 앗수르 군대는 그냥 ‘사자’라는 짐승의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사람 취급 받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짐승 취급받아 그들의 근거지는 폐허가 될 것입니다. 이들 앗수르의 교만과 거기에 대처하시는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오늘날 성도가 익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앗수르의 통치자들과 그 수하의 군대들이 짐승으로 보이지만 일반인들의 눈에는 거대 제국을 합리적으로 통치하고 운영하는 현명한 지혜자처럼 존경스러지기 마련입니다. 실제로는 이스라엘이나 유다 나라에서 앗수르에게 흔쾌히 조공을 바치면서 흠모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꾸 무서워합니다. 뭐가 무섭고 왜 무서워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는 채 무서워합니다. 그것은 바로 본인들이 ‘무의미’하게 될까봐 무서워하는 겁니다. 그만큼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서 살면서 주변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통용되는 의미들을 끌어모으게 됩니다. 인간들에게는 죽음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짐승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겁니다. 주변에서 들어오는 의미들을 자기쪽으로 끌어당기고 모으는 이유는, 그런 식으로 자아를 확정짓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다른 의미 세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새롭게 의미가 획정적으로 제공된다는 겁니다. 로마서 9:13의 말씀처럼, 에서와 야곱의 운명과 팔자는 그들이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확정나 버렸습니다. 즉 인간들의 의미는 인간들이 개척해서 새로이 변경시키고 조성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선에서 결정 나 버린 상태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안에’ 이미 갇혀 있는 꼴입니다. 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자폐증 환자입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우선 자기 의미부터 챙기려고 합니다. 인간들의 선악체계에 의해서 등장된 신이 ‘도덕 신’입니다. ‘도덕 신’이란 신께서 악인에 대해서 벌을 내리시고 선한 자에게는 보상을 해주신다는 신입니다. 즉 신께서 악에게만 심판을 하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실제 하나님께서는 선인이고 악인이고 다 심판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두 죄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게 된 성도는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 세계 자체가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그 의미로 갖추어진 세상이 아니라 오직 성경 내용으로만 가득 차 있는 세계라는 점을 발견합니다. 그 의미체계는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모든 것이 ‘다 이루졌으며’ 확정되어짐을 압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성도를 옮겨주십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아브라함은 이 땅을 살면서 이 땅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히 11:8)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다음과 같은 늘 물어오십니다.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까지, 어디까지 잃어버린 작정인가?” 즉 “너는 너 자체가 벌써 무의미한 것을 알고 있나?”입니다.
그 어떤 것도, 특히 우리 자신의 목숨값도 예수님의 목숨값과 족히 비교되지 않습니다. 모든 의미는 오로지 예수님에게서 나와서 예수님에게로만 귀결될 뿐입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하나님 아버지, 세상 의미체제 자체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나훔 2:11-13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뇨 젊은 사자의 먹는 곳이 어디뇨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식물을 충분히 찢고 그 암사자를 위하여 무엇을 움켜서는 취한 것으로 그 굴에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에 채웠었도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너의 병거들을 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너의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너의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너의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앗수르 나라가 이스라엘을 힘이 없고 나라가 아주 작다고 해서 아주 무시했는데 그들은 잘못 건드린 겁니다.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그들은 별로 중요치 않게 여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어느 민족치고 하나님 안 믿는 민족 어디 있느냐, 이런 식으로 생각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 같은 하나님이 아니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지요. 어떻게 일하느냐? 이 땅에 있는 난폭하고 맹렬한 짐승들의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고 황무지로 만드는, 다 없애버리는, 그들의 노력의 성과를 다 싸그리 사라지게 하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나훔, 예언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딱 둘이에요. 하나는 멸망되어야 될 앗수르 그 당국자들, 권력자들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딱 두 분만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자랑하는 군대를 다 멸하시고 그 나라를 황폐하게 만든다. 그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 그 기본태도부터 다시 한번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일같이 정립해도 우리가 모자라요. 정말 늘 정립해야 되는데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에서는 그 소리 듣고 방성대곡한 거예요. ‘나 끝났구나.’ 내가 아무리 애써도 아버지를 통해서 내리시는 하나님의 확정된 신분에서 나는 요지부동 그걸 변경시킬 경우는 내 인생에는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서 대성통곡한 겁니다. 성경의 내용은, 성경의 세계는, 운명과 팔자는 지시에 따라서 확정되어 버립니다. 이게 여러분에 기쁜 소식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듣고 열심히 살면 앞으로 잘되겠지.’ 그런 것 없습니다. 내가 말씀 듣고 실천에 옮기고 열심히 사는 것과 전혀 상관없이 말씀 자체가 우리의 미래의 모습까지 이미 한꺼번에 단번에 확정 지었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단번’이에요. 인간이 추가적으로 노력하고 애씀, 다 잘라냅니다. 그것 다 치워버립니다. 주의 말씀에 의해서 끝났어요. 천국에 합격이냐 불합격이냐, 그것은 인간의 노력 여하와 전혀 무관합니다.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주님의 의지에 의해서 이미 확정났습니다. 바로 이 마음 자세, 이 태도, 성도라면 단 하루도, 하루도 빠트리지 말고 이걸 유지해 줘야 돼요. 이걸 유지하지 아니하면 우리 짐승 됩니다. 짐승 되어 버려요. 이걸 유지하지 아니하면,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성도는 성경 안의 세계가 현실이지 성경 바깥의 세계는 전혀 현실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서의 이 진짜 세계는요, 성경적 의미로만 가득 차 있다고 보는 거예요. 성경적 의미로만! 이런 것이 믿어진다는 것, 이게 수용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천국에 갈 수 없도록 운명과 팔자를 가진 인간들과 완전히 차별화되는 마음 자세에요.
세상에 천국에 가지 못할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가 이 땅에서 얻어 챙긴, 어릴 때부터 할당받고 부여받고 계속해서 자기에게 쏟아지도록 끌어모은 그 의미는 이 세상에서 발굴한 것이고, 세상에서 날아다니는 것이고 통용되는 거예요. 그 의미만 계속 끌어모으는 겁니다. 그 의미만! 앗수르의 통치자가 앗수르 제국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합리적이고 생각이 깊고 거기에 똑똑한 사람, 아이큐 높은 사람, 앗수르에 서울대학 나온 사람 한두 명이 아니에요, 많다 그 말이지요. 일류대학 나온 사람이. 그 앗수르가 그대로 이스라엘 안 건드리면 그들은 멀쩡하고 합리적이고 정상적으로 다 유지가 돼요.
그런데 그 앗수르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건드리는 순간 그들은 멸망되어야 될 짐승이라는 새로운 의미체계로 인하여 그들은 지적받게 되고 그 팔자, 운명을 부여받게 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해야 될 것은 이것이 앗수르 문제가 아니에요. 오늘날 보통 인간들, 보통 사람들이라는 사람들이 그 바탕에는 무서움이라는 게 있어요. 무서우니까 안 무서운 척하고, 무서움이 왔으니까 무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상대에 대해서 화를 내고, 분노 퍼붓고, 공격하고. 왜 공격합니까? 무서워서. 왜 무서운데? 모르겠어요. 왜 무서운지.
그거 성경이 밝혀줍니다. 인간이 왜 무서워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은 짐승이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이 땅에서, 이 짐승의 세계에서 긁어모은 그 의미가 소실될까 봐 의미에서 무의미로 넘어가면서 무서워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목숨 끊어지는 게 무서운 게 아니에요. 인간이 무서운 것은 내 의미가 사라지는 게 무서워요. 내가 왜 사는지 사는 의미가 없어질 때 인간은 가장 무서워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앗수르는 주님 보시기에 의미도 없는 찢겨 죽을 사자이면서 그들은 이스라엘을 정복해놓고 이겼다고 좋~다고 “봐! 앗수르 제국을 한 번 봐. 이 의미 있는 거대제국을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던가!” 큰소리칠 때 여호와께서 “그 의미 내가 다 없애줄 게.” 다 없애줬잖아요. 황폐하게 만들었어요. 의미도 없는 것들이, 짐승인 것들이, 이런 것들이 의미를 떡 찾고 있는 거예요.
그냥 일상으로 평범하게 살고 말 던지는데 그 말 던질 때 실려 있는 그 의미가 어디서 온 의미냐 이 말이지요. 그들은 성경 속으로 못 들어왔어요. 들어올 수가 없어요.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역시 성경이지요, 갈라디아서니까, 하나님의 계시니까,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보면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성경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죄에 갇혀 있어요. 죄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조선 시대건 앗수르건 간에 그들은 폐쇄구조 안에 있어요. 폐쇄구조 안에 있는 사람을 두고 뭐라고 하느냐? 자폐증 환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폐증 환자. 자폐증 환자에 있어서의 모든 의미는 자기 안에서만 나와요.인간은 하나님의 예언과 계시를 계속 만드는데 그 만드는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말씀, 계시라 하는 것이 다 어디서 나오느냐? 내 의미를 살려주는 하나님, 내 의미를 살려주는 약속, 예언, 그런 식으로 본인이 그런 것을 자꾸 제조해내요. 자기 안에서. 나를 잊어버리면 안 돼요. 왜? 의미가 나한테서 나오기 때문에, 의미가! 사람들은 이게 죄 아래 갇힌 형국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백 독해도 그걸 못 찾아내요.
성도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의미는 성경적 의미로만 꽉 차 있고 그 외 의미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도예요. 성경적 의미에요. 이 땅에서 나오는 의미는 의미가 아니에요. 그것은 엉터리고 성경적 의미만 꽉 차 있어요. 그냥 어떤 것도 말씀 바깥으로 안 나가요. 성경적 의미에 그냥 녹아져 있어요. 성경적 의미의 바다가 이 현실 세계예요.세상은 주께서 확정된 대로 갈 뿐이에요. 요지부동이에요. 인간이 변경 못 합니다. 그 변경 못한 그 스토리, 내러티브(narrative), 서사구조, 이게 성경 내용이에요.
선악체계,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되어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도덕적인 신이에요.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신은 있다. 신은 있는데 어떤 신이냐? 도덕적인 신이다. 악인은 심판하고 선인은 복을 주신다.’ 악인은 반드시 심판하시는 도덕적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악인들은 심판받아 마땅하고 선인은 복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심판하고 선인은 상을 주고 심판 안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다 심판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심판도 없으면 사람들은 성경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왜 필요하냐? 자꾸 이상하게 늙어가는 게 무섭고, 죽는 것이 무섭고, 심판이 무서우니까 성경을 봐서 사전에 어떤 해결을 보자는 거예요. 보험 들어놓듯이.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무섭다는 의미가 뭐냐 하면, 내가 갖고 있던 나, 존재의 의미가 삭제되고 없어지는 것이 무섭다는 거예요. 원래 나한테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딴 사람은 지옥 가도 나는 지옥가서는 안되는 이유가, ‘저 사람이 의미가 있든 나는 모르겠는데 내가 확실히 하는 것은 나는 절대로 지옥가서는 안 되는 그런 의미가 나한테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 입장에 의하면, 주님 입장에 의하면 인간이 늙는 것도 있고 죽는 것도 있고 심판이 있더라도 성경은 필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게 어려워서. 인간은 늙는 것도 없고, 죽음도 없고, 심판도 없고, 그런 것은 모를 것 같으면 사람들 대부분은 성경 안 봅니다. 교회 나오지도 않아요. 뭐 살다 늙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고, 심판은 뭐 가본 사람이 있나 그런 것은 없고,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산다.
그러니까 교회 오겠어요? 성경 볼 마음이 있겠어요? 안 보지요. 그런데 ‘왜 늙지? 왜 죽지? 혹시 심판이 있으면 나만 손해인데. 그러면 교회 가야지.’ 이런 사람들이 교회 오는데 ‘그래, 인간은 늙고 죽고 심판이 있어.’라고 그렇게 생각해도 그 사람한테는 성경과 무관하다 그 말입니다.
왜? 성경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순간 성경은 해석 불가입니다. 해석이 안 돼요. 왜 그런가? ‘왜?’가 지금 다섯 번째 나오는가? 성경은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고 우리하고는 관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뭐냐? 도덕적인 신이에요. 그런데 도덕적인 신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왜? 도덕적인 신은 선악체계에서 양성되기 때문에. 선악체계에서 구성된 신이 도덕적인 신이에요. ‘도덕적인 신은 도덕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도덕적인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 생각과 일치되고 동질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가진 인간을 처벌하지 않는다.’ 이게 도덕적인 신이에요. 선과 악의 신, 선과 악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신을 하나님이 심판해 버립니다.
‘양심껏 바르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바르게 사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바르게 사는 하나님이 바르게 사는 인간을 처벌한다는 것은 하나님한테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모순된다. 불합리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르게 살면 처벌하지 않는다.’ 이게 도덕적인 신이에요. 양심의 신입니다. 이게 마귀에요, 이게!
로마서 9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운명을 ‘단번에’ 이 ‘단번에’를 잊으면 안 돼요, ‘단번에’ 확정해 버렸어요. 확정했어요! 결정 나버렸어요! 마감, 원서 마감해 버렸어요. 끝났어요. 이걸 성령이 와서야 비로소 우리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성령이 와서 비로소 아는 거예요. 성령이 와서! ‘아, 내가 노력하는 것은 내 운명하고 상관이 없구나.’ 이게 성령이 와야 알아요. 주님의 십자가의 영이 와야 이걸 안다고요, 이걸! 정말 이거, 정말 너무너무 이게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어떻게 천국으로 이동하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5절에 옮긴다는 말이 세 번 나오거든요.
옮긴다는 말이에요. 이왕 하는 것 더 어렵게 하겠습니다. 진짜 더 어렵게 하겠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죽을까 봐 무섭지요. 그러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게 뭐냐 하면, 안 옮겨지는 거예요. 그러나 에녹은 옮겨졌어요. 인간은 죽으면 내가 의미가 없다, 없음이 되잖아요. 없음보다 더 센 걸 주께서 준비했습니다. 그건 뭐냐? 옮겨지는 겁니다.
“신자이십니까?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그렇다면 주를 위해서 어디까지 잃어버릴 작정이십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나)의 목숨값에 견줄 수 있는 값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으면 우리는 뭐라고 정답을 합니까? “없나이다”라고 해야지요. 내 목숨조차도 주의 목숨값에 비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겠지요.
바로 이 내용으로 성경 안의 내용으로 현실이 꽉 차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성도에요. 이게 바로 신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를 어떻게 인도하느냐? 갈 바를 알지 못하게 만들어요.
“아들아! 너는 이 집, 땅, 다 포기하고 나랑 같이 이 땅에서 옮겨지자.” 이게 바로 축복인 거예요. 이게 바로 축복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가 평소에 살던 대로 살아가 버리면 이 땅의 삶이요, 그렇게 편해요. 편하고 그리고 친근하고.
그러나 나훔선지자부터 해서 성도들은 전혀 그런 것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던 모든 의미는 나훔선지자 예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다 박살 내버리고 전부 다 불태워버리고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지옥을 대행하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의미라는 것은 사라질 의미고, 성경은 나타날 의미가 성경책입니다. 사라질 이 인간 세상의 뉴스, 뭐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떻고, 기름값이 오르고 내리고, 주식이 어쩌고, 전부 다 우리 인간의 의미를 붙잡고자 유통되는 의미들, 의미체계에요. 이거 없으면 나는 자살한다, 이거 없으면 나는 못산다, 이런 거요.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 땅에서 아무런 의미를 얻을 필요도 없고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왜? 옮겨지기로 창세 전에 이미 마감되었기 때문에, 운명과 팔자가 마감되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14장 3, 4절에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천국은 내 하기 나름에 달렸다는 이것은 뭐 창세 전에 예정된 적도 없는데 그런 인간들이 만들어낸 계시에 농락당하는 거예요. 짐승의 계시에. 그래서 그들이 믿는 신은 뭐냐? 도덕신, ‘주를 위해서 열심히 했잖아. 주님을 섬긴다고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이게 도덕신이에요. 선악체계를 갖고, 이것은 나쁜 것이고 이것은 좋은 것이니까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취득하면 하나님께서 좋으신 분이니까 이 착한 마음을 가진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일방적인 자기 생각, 그거 짐승입니다. 짐승의 의미입니다. 그런 신은 없습니다.
진짜 신은 뭐냐? 이미 창세 전에 확정되었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영을 통해서 통보받은 겁니다. “네 운명, 팔자, 내가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너는 손쓸 것도 없다.” 바로 그것을 증거 하는 것이, 이 두꺼운 성경 전체의 내용이 이 현실 세계에 꽉 차 있는 것을 주님 따라가면서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이 성도의 앞으로 남은 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나를 생각하고 세상을 생각할 때 그 의미가 어디서 들어온 의미체계인지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나온 의미인지 아니면 죽기 싫고 지옥 가기 싫은 무서움에서 나오는 의미인지 우리 자체의 의미를 계속 챙기려고 하는 그런 짐승적인 의미인지를 따져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고, 창세 전에 주께서 이미 확정 지은 그 사실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을 우리에게 통보해주는 그것을 우리의 목숨보다 더 귀한 의미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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