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뭐로 돼 있느냐? 사울과 다윗으로 중첩돼 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사울 요소와 다윗 요소로 중첩돼 있다. 중첩돼 있으니까 하나님께선 사울 왕 시대에는 다윗이 부하니까 누가 권력이 있고 누가 위세가 세요? 사울이 세지요. 그런데 중첩된 것을 누가 푸시는가? 하나님께서 풀어버려요. 푸시면 사울 왕 제거되고 차기 왕이 다윗으로 바뀌는 겁니다. 중첩된 것이 일렬종대로 나란히 된 거예요. 풀려서. 다윗이 누굴 친다? 사울 왕 소유로 돼 있던 이스라엘을 치는 방식으로 다윗이 왕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어느 정도 어려우냐 하면 이렇게 어렵습니다. 내가 여기 있잖아요. 내가 여기 있을 때 나는 정상도 아니면서 정상이라고 우기는 이게 사울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도한데는 성도가 내 인생 내가 알아서 구원해야 되고 나는 반드시 천국 가야 된다고 우기는 게 사울이란 말이죠. 왜?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의 하심은 안 믿어요. 하나님을 믿어요. 하나님이 하신 내용을 믿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활동을 믿지 않아요. 사울 왕과 똑같아요.
그런데 주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나를 뭐로 바꾸느냐? 가룟 유다, 사울 왕으로 바꿔버립니다. 바꾸는 동시에 내 안에 중첩돼 있던 누구를 끄집어내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끄집어내요. 예수님을 내 속에서 끄집어내버린다고요. 그러면 예수님 입장에서 다윗 입장에서 사울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사울은 이스라엘을 누구 나라로 봤다? 자기 개인 소유 나라로 봤지요.
그러면 신약에 와서 이 몸뚱이, 여러분 육체 남자, 여자 몸뚱이를 그동안 누구 것으로 봤던 거예요? 내 것으로 봤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욕되게 했던 그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중첩된 예수님이 풀리면서 우리에게 역으로 지적해주시는 거예요. 이 몸이 내 몸 같으면 인생 한 평생 살아온 것 고생 누가 했겠어요? 내가 했지 누가 했겠어요. 나 정상이라는 거예요. 그게 가룟 유다처럼 마귀 들려서 하는 이야기라는 걸 세상 사람들 상상도 못해요. 주께서 지금 우리가 하나, 안 하나 업적을 말하는 게 아니고 내가 했다는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주께서 하셨다는 것을 아주 개 무시하고 짓밟아버리는 그런 마귀 짓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나라는 존재가 이만큼 되려고 인생 이만큼이라고 밥이라도 먹고 집 하나 마련해서 사는데 내가 죽을 둥 살 둥 고생 얼마나 했는지 지금 허리디스크 다 나갔잖아. 너희들 밥 먹이려고 이렇게 고생했다.
교회 왜 다녔어요? 교회 다닌 이유가 뭐예요? 나 알아달라고 교회 다닌 거예요? 자꾸 본인이 본인을 수습하려고 하지 마세요. 수습을 한다는 것은 자기가 그다지 나쁜 인간 안 되려고 악을 쓰고 있는 모습이에요. 요한복음 13장 27절에 보면, 이번 수련회 때 이 대목을 언급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나눠줍니다.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이스라엘은 인류의 대표에요. 이스라엘이 인류의 대표라는 말은 하나님과 유일하게 접속이 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 지파가 열두 지파에요. 예수님께서 제자를 뽑을 때 일부러 숫자를 열둘을 뽑았어요. 뽑고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10장에 나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왔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구성하겠다고 선언하시고 열두 제자를 뽑은 겁니다. 이스라엘이 인류의 대표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뽑은 열두 사도가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직접 같이 동행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누구라고요? 그 중의 하나가 가룟 유다에요. 그러면 가룟 유다는 인류의 대표자의 하나의 요소로서 조건으로 요건으로서 거기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가룟 유다 하나지요. 그럼 나머지 제자는 몇 명이죠? 11. 하나가 셉니까, 열한 명이 셉니까? 하나가 센 거예요. 가룟 유다 하나가 열한 명의 예수님의 지킴을 허사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이 말은 가룟 유다의 그 태도와 마음가짐을 이해 못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천국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런 뜻이에요. 가룟 유다를 넘어서야 돼요. 그런데 열한 사도는 가룟 유다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 넘어서서 "예수님 제가 지켜 드릴게요"라고 한 제자가 한 명도 없어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아먹을 때 나머지 제자들 다 도망갔습니다. 전부 다 가룟 유다보다 못해요.
왜? 가룟 유다 속에는 뭐가 들어있기 때문에? 여기 요한복음 13장 27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떡 조각 하나를 주니까 사단이 악마가 그 속에 들어간지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 보고, 유다야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부터 해서 어떤 인간도 가룟 유다를 넘어서서 자진해서 구원 받을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음을 가룟 유다로 하여금 턱을 만들어버린 거예요. 다윗이 아무리 골리앗을 이겨도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통해서 다윗이 쫓겨 다니는 볼품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도 사울을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 잘 믿고 싶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지요. 그러나 가룟 유다의 요소, 사울의 요소가 아주 세요. 우리가 우리 힘으로 그 선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11장 3절 끝에,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 여호와께서 사무엘로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 주께서 일하실 때 말씀대로 일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다윗이 괜찮다 해서 다윗을 옹립해서 사울을 이기질 않았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개입되지 않으면 어떤 경우라도 다윗이 차기 왕이 될 수 없어요. 그만큼 사울은 견고하고 단단해요.
인간들은 사울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사울 왕이 통치하는 방식에 대해서 모든 백성들이 찬동했다는 그 뜻입니다. 동의한 거예요. 다윗 방식이 아니고 사울 방식에 대해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거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본능들을 갖고 있어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면 그 말씀대로 이야기한 그 대목을 찾아봐야 되겠지요.
사무엘상 16장에 보게 되면 이렇게 돼 있어요.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이게 하나님과 사무엘만 알고 있지 다른 사람은 몰라요. 다른 사람이 알면 다 죽어요. 심지어 사울이 사무엘도 죽이려고 했으니까. 그래서 사무엘이 도망가고 그랬어요. 하여튼 이 나라는 이스라엘은 누구 소유냐 하면 사울 왕 소유에요. 내 것 건드리면 인간은 분노합니다. 사울 왕은 지금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합니다. 왜? 자기 나라거든요. 자기가 왕이잖아요. 여러분 인생에서 여러분이 왕이잖아요. 우리는 매일같이 내 것 지킨다고 주님을 차로 들이박아서 주님 골병들 판이에요, 지금.
그래서 하나님께서 몰래 가야 돼요. 알면 사무엘이 죽어요. 몰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거짓말해요. 내가 어디 가서 제사 지낸다고 거짓말하고 몰래 와서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에 와서 몰래 하는데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1절 끝에 보면,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예선전 알지요. 네 아들 중에서 예선하였다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누가 왕으로 간택될 줄은 사무엘도 모르는 겁니다. 누가 왕인지 사무엘이 모른다는 말은, 인간이 생물학적 삶을 넘어서는 삶이 있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생물학적 인생 에 가려져서 또는 그것에 짓밟혀서 지금 발휘하지 못한 뭔가 더 한 게 있다는 거예요. 그 더 한 게 뭐냐? 이게 언약의 삶이고요 언약에 살면 그 안에 오직 주님만이 관여해요. 주님만이 작업해야 언약의 삶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있으면 인간의 개인적 삶은 눈에 보이는 육체적으로 있다, 이게 전부잖아요. 그러나 더 한 삶은 네가 어디에 속해 있다. 신약에는 예수 안이죠. 그리고 구약에는 언약 안이고. 언약이란 장소 안에 네가 속해 있다는 거예요. 이게 더 한 삶이에요. 주변을 돌아보세요. 내 인생 말고 주께서 더 주신 것 있을 거예요. 평소에 그걸 왜 못 느끼는가? 자꾸 내 인생만 생각하다보니까 모르지요. 우리는 하루하루 삶이 너무나 빡빡하게 내가 뭘 해야 내가 무슨 결과를 얻는다. 여기에 완전히 굳어져버리니까 동맥경화증도 그런 경화증 없어요. 완전히 거기에 딱딱하게 굳어져버리니까 뭘 다 잊어버리느냐 하면 내가 한 것 말고 주께서 하신 널널한 공간의 혜택을 놓쳐버리고 잊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맨날 삶이 내 한 것만 생각하니까 하루 스물네 시간 짜증만 내고 분노만 불평만 하는 거예요. 왜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돌아갑니까, 이런 식이에요. 많이 줬는데. 뭘 많이 줬어요, 없는데. 맨날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평소에 우리에게 흔들기를 합니다. 일종의 삶의 투쟁, 삶의 전쟁인 흔들기를 하게 되면 갑자기 내가 당황스럽고 난처한 일이 생기면 거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나의 의식이 발견돼요. 평소에는 나라는 걸 생각 안 합니다. 잘났는데 굳이 생각할 게 뭐가 있어요. 첫 번째는 내 뜻대로 안 되는 당황스런 일이 있을 때 갑자기 뭐가 확 올라오느냐 하면 나는요, 내가 왜요, 하필이면 납니까, 이런 질문이 나오면서 이 뒤에 공통점이 있어요.
나는 의롭잖습니까? 물음이에요. 나는 의로운 자였잖아요. 나를 왜 이렇게 수치스럽게 만듭니까? 왜 나로 하여금 얼굴 못 들게 만드십니까, 라고 할 때 뭐가 부각된다고요? 갑자기 평소에 안 하던 나. 내가 나를 무의식적으로 어떻게 생각했는가가 티가 확 나게 만들어버려요. 누가 뭐래도 나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인간으로 그 바탕 위에서 내가 살아왔다는 것을 티가 나게 만들어버려요. 당황스럽지요. 주께서 흔들기에 나서면.
주께서 나를 힘들게 했으면 그다음에 인간들의 반응은 뭐냐 하면 도피, 도망, 숨기에 들어갑니다. 숨을 때 그냥 숨지 않아요. 이렇게 숨어요. 그래도 나는 이것만큼은 선하고 의롭잖아, 라는 그런 업적을 품에 안고 깊은 밑에 자기만의 동굴로 도피해버립니다. 그게 인간이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이에요. “이 시점에 내가 망가졌지만 아주 망가진 건 아니야.”
그 도피의 끝은 뭐냐 하면 가룟 유다지요. 장렬하게 자살하는 거예요. 자살까지 안 가지만 일단 도피해요. 누가 나보고 하기만 해봐, 이런 식이에요. 갑자기 감사는 어디 갔는지 없고 자기에 대한 더 단단한 집약이죠. 이게 뭐냐 하면 다윗을 쫓아다닐 때의 사울 왕의 마음이었어요. 이제 왜 자꾸 사울과 다윗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주께서 꾸미시는 이유를 알겠지요.
이스라엘은 사울이 왕이에요. 사울이 대표자가 되는 거예요. 왕은 대표자니까. 그 사울이 대표자일 때 백성들도 다 따랐고 동의했었어요. 왕이 그저 우리 밥이나 잘 먹이면 되는 거지 당신 나라 되던 우리야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야, 동의했지요. 백성들도 자기 육신만 생각해요. 여분의 생물학적 말고 다른 언약의 혜택 같은 그런 것 생각 안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 생각 안 해요. “내가 원하는 것만 제 때 챙겨주면 우리는 하나님 잘 섬기고 믿습니다, 바칠 것 바치겠습니다.” 이런 쪽이에요.
그런데 지금 사울이 딱딱하게 돌이 되어서 어딜 공격하느냐? 다윗을 공격합니다. 세 번째, 다윗을 공격해요. 공격이란 말은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거든요. 내 의를 지키기 위해서 내 인생 망친 것은 저 인간이다. 저 인간한테 속아서 사업자금 다 날렸다. 내 인생이 그렇게 부도날 인생이 아닌데 저 인간이 나를 꼬셔서 저렇게 했고, 그리고 네가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와서 우리 집안 되는 일이 없어. 전부 다 남 탓이에요. 왜? 그래야 자기가 의로워지니까. 의로움이라고 마지막 남아있으니까요. 그런데 공격할 때 사울은 누굴 공격합니까? 다윗을 공격하지요. 다윗에게 누가 있느냐? 다윗은 주님과 함께 일해요. 여기서 주님의 상처, 다윗이 받았던 시편에 나오는 모든 상처는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공격을 해댔기 때문에 발생된 거예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래도 나 다윗 될래, 하겠습니까 아니면 사울이 우리 모습입니다 하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이스라엘 역사가 말씀의 역사에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에요. 왜 사울을 이스라엘 왕이 되게 했습니까? 다윗이 예수님이라면 사울은 우리 모습이에요. 우리가 내 것 지킨다고 내 하는 일로 인하여 주께서 하신 일을 이렇게 우리는 들이박고 있고 구박하고 있고 핍박하고 있고 괴롭히고 있는 거예요. 내 것 지키기 위해서. 내 수고가 헛수고 안 되기 위해서. 왜? 나는 정상이니까 나는 의로우니까 나는 남한테 지기 싫어하니까. 이게 사울과 다윗이 같이 이렇게 이스라엘에 중첩돼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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