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추락하는 가운데

아빠와 함께 2022. 8. 26. 23:32

대립되는 두 나라

한 나라 -우상과 더불어 함께 멸망하게 되어 있다. 

또 하나 -이스라엘의 남은 자,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목표절기라는 율법으로 인하여  망하지 않게 되어 있다. 

전쟁 형식의 대립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전쟁 가운데 몰아세우시고 전쟁 가운데 그때 그때마다 기적적으로 살려줌으로써 하나님이 하는 일은 실제로 살아계시다는 것, 활동은 실제 활동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존재해야 되고 왜 내가 이스라엘을 만들어놨는지’를 그 이유를 드러내면서 살려줘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거룩하다는 겁니다. 이 거룩하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깨끗하다, 오염되지 않았다, 깨끗한 민족이다. 그렇다면 앗수르로 해서 주변의 모든 이방 나라는 더럽다, 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 지상에 모형적으로 일하시는데요, 제가 이 모형적이라고 하는 것은 신약 성경에 비해서 모형적이라는 거예요.

신약성경에서는 이 땅 현세의 삶에 하나님은 관여하지 않습니다. 다 죽여버리니까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은 살려주고 나머지는 죽이고, 이런 식으로 하지만 신약에 오면 모든 인간은 이미 죽었어요. 그래서 죽고 난 뒤에 예수님에 속한 나라와 예수님에 속하지 않는 나라와 구별하게 되어 있습니다.

유다 나라가 약속의 땅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해야 될 것은 절기를 지켜야 돼요. 왜냐? 절기가 하나의 엔진처럼 가동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오염에서 정화 시키는 작용이 유지될 수가 있습니다. 오염에서 정화 시키는 것. 인간 자체가 더럽거든요. 더러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있겠습니까? 천국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나라인데 예수님은 깨끗한 분이에요. 깨끗한 분과 함께 하려면 그 함께하는 백성도 깨끗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전쟁을 통해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가족 형제들이 헤어지더라도 나, 이 여호와와 헤어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절기와 헤어지면 안 되고, 여호와의 율법과 헤어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오염에서, 더러운 데서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는 그 구조, 그 체계에 네가 들어와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나라를 따로 만들었어요. 그렇게 따로 만드시고 주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 어떤 자와 헤어지더라도 절대로 이 예수님과 헤어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마9: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것은 전부를 잃어버린 거예요. 신랑과 헤어졌다는 그것은 신랑 없는 곳에 있다는말이고, 신랑 없는 곳에 있으면 그게 지옥입니다.  .

하나님께서 앗수르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한 것은 이스라엘이 그동안 절기와 헤어진 거예요. 하나님의 뜻과 율법과 헤어진 겁니다. 그래서 앗수르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압박을 가했고, 유다 나라가 이스라엘이지요, 압박을 가했고, 그들은 생존에 위태로움을 느꼈습니다. 살려달라고 하고 싶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살려주는데 조건이 있어요. 절기를 지켜야 돼요. 내 절기를 지켜야 되고 네가 해야 될, 서원(誓願)이라 하는데 네가 하나님 앞에 해야될 일을 계속 한다는 조건 하에 살려주는 겁니다. 그 조건이 있어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헤어지지 않고 그야말로 지상천국을 이루는 겁니다. 지상천국이라고 제가 언급을 하는 이유가, 구약은 모형이기 때문에 그래요. 현실의 눈에 보이는 지리적이고 역사적인 그것이 모형적으로 갖춰져 있기 때문에 지상천국이라 하는 겁니다. 나중에 예수님 오시고 아버지께로 감으로써 지상천국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늘에 계시면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나랑 같이 살 사람을 하나님께서 직접 모집하십니다. 이것은 성도로 하여금 이 땅 어느 누구와 헤어지더라도 절대로 나하고 헤어지는 경우가 있어버리면 네가 살아도 그것은 생명이 아니고 죽음이라는 거예요. 저주라는 겁니다. 생명이라는 그 용어 자체가 구약에는 하나님과 함께 목숨이 부지되는 것을 생명이라, 생존이라 했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목숨 없어도 생명이 되게 하셔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생명이 되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생명이기 때문에. 따라서 이 앗수르가 쳐들어왔을 때 이스라엘은 앗수르가 제발 물러갔으면 좋겠다, 그 정도로 해서는 안 되고요, ‘내가 누구냐’를 다시 한번 돌아봐야 돼요. 내가 누구냐. ‘왜 앗수르를 보내서 우리나라를 완전히 망하게 했는가? 도대체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에게 뭘 원했는가?’  

 

주님의 이 말씀이라는 것, 선지자의 말씀, 성경 말씀은요, 이 복음이라는 것은, 인간이 추락해야 알아요. 죽음을 향하여, 지옥으로 곤두박질칠 때 비로소 눈이 확 뜨이는 겁니다. 그 경험을 하나님께서는 유다한테 하게 한 거예요. 앗수르를 통해서. 차이성,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의 차이성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기가 자기 생명을 지켜보겠다는 그것에 손 놓게 만들어요. 자기가 자기를 지탱하는 것은 이제는 물 건너갔어요. 끝나버렸어요. 나를, 더 이상 내가 내 가치를 지킬 수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럴 때 하나님이 주신 그 절기 지키라는 의미가 비로소 생각나게 되고 율법을 주신 이유를 생각나게 하는 겁니다.그리고 이러한 추락이 되지 않는 상태를, 앗수르 오늘 본문 14절의 경우를 봅시다. 앗수르는 자기 우상과 더불어 멸망한다는 것. 앗수르가 우상을 섬긴다는 게 무슨 뜻일까? 함무라비 법전에서 왕이 지혜롭게 통치하기 위해서 어떤 법을 만들었는가?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이 발견되었어요. 제국이 크기 때문에 그 점토판을 지역마다 운반해서 동일한 법을 지키도록 했어요. 그 점토판에 새긴 법은 항상 왕이 계속해서 점검을 했지요. 동일한 법 체제 하에 제국이 유지가 되도록. 현대법이 바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며 현대법의 모든 것은 인간이 가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법들이 있다는 것을 함무라비 법전의 연속성을 통해서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법을 정했는데 자 이 법을 정했을 때 그걸 보고 백성들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휴~ 나는 안 걸렸다. 오늘도 나는 그 법에 저촉되지 않고 살아서 다행이다.’ 이렇게 하겠지요. 그게 바로 우상의 세계입니다. 우상의 세계의 특징은 항상 독자적으로 온전한 자아를 유지하는 게 우상 세계에 있는 개인들이 원하는 바에요.

‘법에 위반되지 않았으니까 나는 온전하고 정당하다.’ 쉽게 말해서 ‘나는 깨끗하고 의롭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휴~ 나는 오늘도 바르게 살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의 활용도에 의하면, 로마서에 나오고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율법의 활용도에 의하면 ‘주님 앞에 우리가 죄인이라서 할 말이 없다.’ 자 어느 쪽이냐 하는 거예요. ‘주님 앞에 죄인이라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저는 괜찮아요. 죄인이기 때문에.’ 이게 옳은가, 아니면 ‘그 어떤 법을 봐서라도 나는 괜찮다.’ 이게 옳으냐,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죄인이어서 할 말이 없다.’ 이걸 가지고 바로 세상에 있는 법과 대조가 되는 오늘 15절에 나오는 절기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절기.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 그렇게 큰 절기가 세 개 있어요. 레위기 23장에 그 전체가 상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은 1월 14일 저녁에 드리는 거요. 첫 이삭이 팰 때 드리는 것. 유월절은 하루지만 그 뒤에 7일을 무교절이라 해서 이스트(yeast), 누룩 넣지 않은 딱딱한 떡을 7일 동안 먹는 절기가 들어가서 한 세트로 되어 있어요. 1+7, 그렇게 한 세트로 되어 있습니다. 그게 유월절입니다. 유월절 끝나고부터 50일을 계산해서 오순절(五巡節), 이 오순절을 맥추절(麥秋節)이라고 해요. 그다음에 나오는 절기가 초막절(草幕節) 이걸 수장절(收藏節)이라고도 하는데요. 이 초막절은 7월 15일에 드리는 겁니다. 이게 3대 절기에요. 나중에 추가해서 대 속죄일도 들어가고 하지만 하여튼 절기는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절기 때 뭘 하느냐 하는 거예요. 이 절기 때 뭘 하느냐 하면, 제사를 드려요. 제사를 드리는데 번제 드리고, 소제 드리고, 속죄제 드리고, 속건제 드리고, 화목제 드려요.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더러운 오염된 것을 하나님이 받을만한 깨끗한 것으로 전환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제사라는 방식을 절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참여시킨 거예요.

그런데 아까 함무라비법전 같은 경우는 참여시키는 게 아니고 법을 놓고 관찰하는 겁니다.  법에 저촉되어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함무라비 법전이고, 세상 이방법이고, 그 이방 민족이 우상을 섬기는 거예요.
절대적인 그 국가를 지탱할만한 신을 계속 지켜내기 위해서 법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의 율법은, 일단 그게 더러운 거예요. 그 백성들이. 그러니까 낭떠러지에 있는 어린애처럼 그냥 그 절벽에서 떨어져야 돼요. 5초 뒤에 가루가 되어야 돼요. 가루가 되는 5초 동안의 자기 자신과 세상과 하나님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하도록 체험하는 그 학습체험이 뭐냐? 제사입니다. 그래서 법을 볼 때 이것은 관찰하는 자아가 되지만 율법에 대해서는 참여하는 자아가 돼요. 그 제사에 죄인으로서 참여하는 겁니다. 번제(燔祭) 불에 다 태우는 거예요. 전부 다 불이지요. 불을 다 동원합니다. 완전히 철판구이에요 그냥. 주께서 태워버려요. 왜냐? 태워도 마땅한 것이 너기 때문에, 그렇게 더럽기때문에. 더러운 네가, 너 자신이 법을 관찰해서, 이 법을 관찰해서 그 더러움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어린양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제사와 더불어 참여해서 그 제물과 함께, 같이 나란히 참여됨으로써 오염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유지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다시 새롭게 거듭날 수가 있는 거예요. 그게 제사가 가동되어야 돼요. 절기가 가동되어야 돼요.

그래서 절기 지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전쟁이 아까 이스라엘의 생존을 유지한다 했는데 그것은 결과적이고요, 사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하나님께서 시도한 겁니다. 절기를 지키기 위한. 그런데 절기를 지키는 법은 이스라엘밖에 없으니까 결국은 이스라엘을 지켜주기 위한 전쟁.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자기의 목숨만 부지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까 우리를 지켜주겠지.’ 아니에요. 너희들 목숨을 지키는 게 아니고 율법을 지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제사법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는 거예요, 절기. 특히 에스겔 45, 46장 새성전의 절기는요, 왕이 친히 왕을 위한 제사에요. 제사장은 기껏 뭘 하느냐? 제사장은 기껏 매일 양 한 마리 잡아요. 아침에만 양 한 마리 잡는 것 그것만 해요. 그 넓은 새성전이 텅텅 비어 있어요. 없어요. 제사장만 활동해요. 그런데 언제 크게 제사 드리느냐? 왕이 드디어 입성할 때, 성전에 들어올 때 그때는 제사가 크게 벌어집니다. 그때는 백성들도 같이 참여하게 되어 있어요. 언제 하느냐? 안식일과 절기 때 월삭 때는 왕이 직접 제물 갖고 들어와야 돼요. 왕을 위한, 왕이 다 이루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새성전이 있기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제사기 때문에. “왕 덕분에 우리가 온전하게 깨끗하게 거룩하게 되어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같이 만끽하게 되었습니다.” 왕을 치하하고 왕을 높이기 위한 그 제사로 재편성 되어 있어요. 포도주는 새성전의 제사에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왕 자체가 포도주 역할을 하거든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새언약에서 내 피가 곧 포도주라 했잖아요. 하늘나라 올 때까지 다시는 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고 되어 있어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 22:18)

어쨌든 이 절기를 지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제사를 지켜야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마땅히 추락해야 돼요. 심판으로, 죽음을 향하여. 자꾸 낭떠러지로 가면 나 다친다고 관찰하는 자아는 용납이 안 됩니다. 나를 지켜내기 위해서 법을 지키려는 관찰하는 나는 주님 자체가 제물로 오신 그 주님과 합류가 되지를 않아요. 합류될 수가 없습니다.

이걸 어렵게 이야기해서 나의 존재구조가 바뀌어야 된다 그 말입니다. 나의 존재구조가. 추락하는 가운데, 내 존재구조가 마땅히 추락하는 가운데서 바뀌어야 돼요. 더 이상 내가 나를 건사한다든지 나를 온전하게 지키는 그러한 환경 자체에서 우리가 벗어나 있다는 것을 만끽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돼요.

더 어렵게 말씀드릴까요? 내가 나한테 속아야 돼요. 내가 사람들에게 속아야 되고요. 그러려면 내가 주님한테 속아야 돼요. 나를 구원하는 주님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속아 넘어가야 돼요. 나를 잡아먹는 주님이에요. 나를 “낭떠러지로 가지 마! 위험해!” 이렇게 하는 주님이 아니고 나를 꾀어서, 세 살 먹은 나를 꾀어서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해서 더 이상 살 가망이 없게 만드는 주님, 그 주님이 제대로 된 주님이고 비로소 살려고 하는 내 자아를 볼 때 “속았어요, 속았어요, 속았어요!”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속았어요!”가 기쁨의 ‘속았어요’ 가 되는 거예요. 기쁨으로. 내가 안 속았으면 지옥 갈 뻔했던 거예요.  여러분, 절기라 하는 것은요, 이 세상 모든 우연한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이 절기에요. 절기는 뭐냐? 굵은 엿가락을 뚝 잘라서 그 속을 다 보이는 거예요. 절단시켜서. 이 세상 역사와 인간 내부를, 아주 속을 다 보이게 만드는 겁니다. 절단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게 해석이에요. 심지어 주님 자신마저 절단되었어요. 하나님 자신이 죽어야 되는 하나님이에요. 죽는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모조리 다 가짜에요. 인간은 십자가 지신 하나님 말고 같이 노닥거리는 하나님을 교회에서 찾지요. 그렇게 하니까 제가 보기에는 교회에 와서 걱정을 하는 게 뭐냐 하면, 천국 갈까 봐 걱정하고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왜냐하면 천국은 일체 나의 존재를 잃어버리는 곳이거든요. 그리스도와 함께 추락한 자만이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라는 말이지요. 왜? 천국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거거든요. 살아 있을 때부터 함께 해야 돼요. 교회 왔을 때부터 주와 함께 있어야 돼요. 주와 함께 있지 않으면 죽어서도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함께 있다는 말은 ‘내 존재가치를 잃어버려도 좋습니다.’ 하는 거예요. 

추락하고 있어요. 시속 몇 킬로입니까? 그것도 가속도 붙여서 추락하고 있는 거예요. 더이상 내가 내 머리카락 잡아당겨서 끄집어낼 수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게 절기에 동참입니다. 곧 십자가에 동참이고 예수님의 찢긴 살과 피에 동참이에요. 제단에서 막 타고 있는 그 앞에서 우리는 죄인으로서 내 인생에 대해서 군소리 없고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온전함, 뭐 의미 없어요, 의미 없다고요. 십자가 그것뿐이에요. 그게 벌써 주와 함께 들어온 사람의 특징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 죽은 인간, 그거 차이 없습니다. 절기 안에서는, 십자가 안에서는 우리가 살아도 죽어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면 그것은 우리한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게 바로 절기 속으로, 또는 생명 속으로 우리가 같이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놓여 있는 그 절기 따라서, 주께서는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십자가가 작동되고 가동되어서 매일같이 이 육신에서 터져 나오는 이 죄가 이게 더러운데 어떻게 이게 그리스도와 영원히 천국에서 살만한 오염 없는, 깨끗한, 정화된 정결한 것이 되었는가? 그것은 다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폭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성도가 이 땅에서 사는 이유는 차이성, 이 세상에서 자기 자아를 온전하게 유지하려는 그 우상 앗수르와, 그리고 성도와의 차이점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지옥이라는 것을 면제해준 대신 이 땅에서 지옥의 삶을 체험케 하시는 겁니다.그러나 그 지옥체험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추락 중이니까 뭐 어때요, 추락이 죽기보다 더하겠습니까? 바로 이게 신약의 새로운 이스라엘의 성도들, 성령 받은 성도들의 보편성 있는 특징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인생을 나 건사하기 위해서, 나 잘 보존하기 위해서 살지는 않았습니까? 안 다치기 위해서, 보호하기 위해서 살지는 않았습니까? 그게 바로 우상숭배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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