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누군지 발굴하는 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있습니다. 이준석 국민의 힘 대표에요. 계속 부딪히면서 내가 누군지를 알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아주 적절해요. 마찬가지입니다. 앗수르 제국이, 내가 어느 정도까지 되는지를 계속 측정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관음증 환자입니다. 훔쳐보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나오는지 훔쳐보는 식이에요.
그런데 이사야는, 바로 경상도 말로, 이건 표준말로 번역하기 힘든데 ‘데뎅키다’ 들켰다, 걸렸다, 하는 뜻이에요. 경상도 말로 데뎅키다. 내가 저쪽을 관찰하고 훔쳐보는데 훔쳐보다가 훔쳐보는 그 시선이 걸려드는 거예요. 훔쳐보다가. 주님이 앗수르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 당해버린 겁니다.
“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상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왕하 19:25) 즉 “네가 나를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내가 너를 바라보는 관찰자였다. 너의 최후의 모습은 일단은 내가 18만 5천부터 조지고 갈게.” 그래서 천사 보내서 조지고 그러고 나서 돌아와서는 나라가 다 멸망하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주님을 관찰하고 주님이 어떤 분인 것을 내가 파악하려고 합니다. 내쪽에서 찾아가는 방식을 사용해요. “주여, 말씀을 20 독, 아니 백 독했습니다.” 백 독하니 뭐합니까? 자기가 관음증 환자인데. 하나님 뜻을 이렇게 담 넘어 보고 있는 건데요.
바깥에서 주께서 보시는 거예요. 바깥에서 보시고 있음을 안쪽에서 그 시선을 마주칠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무엇을 믿지 않았는가를 발견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시작과 끝까지 주님께서 나를 주시했다는, 주시한 그 사실을 내가 안 믿은 거예요. 그냥 내 쪽에서 보는 것만 급급했지 내가 파악하고, 파악한 것을 내가 또 추슬러 가지고 스스로 내가 살아보려고 애썼지 주님께서 끝까지 나를 지켜봤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행적에 있던 그 체험을 자기 백성에게 그대로 같이 예수님 체험에 참여시킵니다.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주께서 다녀가셨던 행적, 주께서 관찰하셨던 그 관찰에 동참시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열두제자입니다. 열두제자, 그게 신약의 성도고 교회입니다. 주님이 당했던 그 십자가로 갈 수밖에 없는 그 체험을 같이 그 길을 가게 하셔요. 가게 하시면 세상 사람들이, 의미 없고 해답도 없는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구원을 목말라 하면서 구원해 달라고 외치는지요. 이것은 마치 여러분, 버섯 가운데 팽이버섯 있지요, 끝이 동글동글한 데 줄기로 되어 있는 버섯, 그게 팽이버섯이지요. 지옥에서 울부짖는 모습이 그 모습이에요. “살려주세요!!” 교회 와서 금요 철야 하면서 살려달라는 거예요. 그 모습을 성도는 같이 보게 하는 겁니다. 얼마나 자기 존재의미 모르고, 사는 해답도 모르면서 그저 모르니까 몰라도 그저 구원은 해 달라고, 자기가 누군지는 모르고 아무 의미 없는데 살아 있으니까 더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지옥의 모습을 우리 성도들을 통해서 느긋한 마음에 여러분 쪽에서 관람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체가 존재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오실 때 주님의 존재의미가 곧 우리의 존재의미인 것을, 주님의 활동하는 기능이 우리 삶의 기능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된 것을 저희들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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