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성경적 의미로 가득한 세상

아빠와 함께 2022. 9. 15. 19:15

○세상은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그들은 별로 중요치 않게 여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어느 민족치고 하나님 안 믿는 민족 어디 있느냐, 이런 식으로 생각했지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지요. 어떻게 일하느냐? 이 땅에 있는 난폭하고 맹렬한 짐승들의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고 황무지로 만드는, 다 없애버리는, 그들의 노력의 성과를 다 싸그리 사라지게 하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 그 기본태도부터 다시 한번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일같이 정립해도 우리가 모자라요. 정말 늘 정립해야 되는데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이 대목을 언급한 이유가 있어요. 성경을 대하는 태도, 성도는 매일같이 한결같이 이 자세 이 태도를 유지해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예를 드는 거예요. 그럴 때 34절 보게 되면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크게 소리 지르며 통곡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창세기 27장에 보면, 에서는 그 소리 듣고 방성대곡한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성경의 내용은, 성경의 세계는, 운명과 팔자는 지시에 따라서 확정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너는 저주받으라” 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에서가 대성통곡하고 있다는 것은, 에서가 믿음이, 정말 현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믿음 댓방이에요. 진짜 믿음 좋은 거예요. ‘나 끝났구나.’ 내가 아무리 애써도 아버지를 통해서 내리시는 하나님의 확정된 신분에서 나는 요지부동 그걸 변경시킬 경우는 내 인생에는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서 대성통곡한 겁니다. 에서는 창세 전부터 영원히 저주받기로 하나님 사이에 이미 협의가 되어 있어요. 딱 마감되어 있습니다. 원서 마감, 합격통지서, 다 끝났어요. 바로 이 마음 자세, 이 태도, 성도라면 단 하루도, 하루도 빠트리지 말고 이걸 유지해 줘야 돼요. 이걸 유지하지 아니하면 우리 짐승 됩니다. 짐승 되어 버려요.

인간이 왜 무서워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은 짐승이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이 땅에서, 이 짐승의 세계에서 긁어모은 그 의미가 소실될까 봐 의미에서 무의미로 넘어가면서 무서워하게 되어 있어요.

○의미도 없는 것들이, 짐승인 것들이, 이런 것들이 의미를 떡 찾고 있는 거예요.

폐쇄구조 안에 있는 사람을 두고 뭐라고 하느냐? 자폐증 환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의미는 성경적 의미로만 꽉 차 있고 그 외 의미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도예요. 성경적 의미에요. 이 땅에서 나오는 의미는 의미가 아니에요. 그것은 엉터리고 성경적 의미만 꽉 차 있어요. 그냥 어떤 것도 말씀 바깥으로 안 나가요. 성경적 의미에 그냥 녹아져 있어요. 성경적 의미의 바다가 이 현실 세계예요. 세상은 주께서 확정된 대로 갈 뿐이에요. 요지부동이에요. 인간이 변경 못 합니다. 그 변경 못한 그 스토리, 내러티브(narrative), 서사구조, 이게 성경 내용이에요. 성경 내용은 선악체계,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되어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도덕적인 신이에요.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신은 있다. 신은 있는데 어떤 신이냐? 도덕적인 신이다. 악인은 심판하고 선인은 복을 주신다.’ 악인은 반드시 심판하시는 도덕적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순간 성경은 해석 불가입니다. 해석이 안 돼요. 왜 그런가? ‘왜?’가 지금 다섯 번째 나오는가? 성경은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고 우리하고는 관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뭐냐? 도덕적인 신이에요. 그런데 도덕적인 신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왜? 도덕적인 신은 선악체계에서 양성되기 때문에. 선악체계에서 구성된 신이 도덕적인 신이에요. 선과 악의 신, 주님께서는, 선과 악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신을 하나님이 심판해 버립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를 어떻게 인도하느냐? 갈 바를 알지 못하게 만들어요.
“아들아! 너는 이 집, 땅, 다 포기하고 나랑 같이 이 땅에서 옮겨지자.” 이게 바로 축복인 거예요. 이게 바로 축복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가 평소에 살던 대로 살아가 버리면 이 땅의 삶이요, 그렇게 편해요. 편하고 그리고 친근하고. 이 세상은 지옥을 대행하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쨌든 간에 우리가 알 수 있는 인생길을 내가 아는 방법으로 한번 살겠다고 버티기에 들어가면서 나오는 의미들이에요. 이거 없으면 나는 자살한다, 이거 없으면 나는 못산다, 이런 거요.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 땅에서 아무런 의미를 얻을 필요도 없고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왜? 옮겨지기로 창세 전에 이미 마감되었기 때문에, 운명과 팔자가 마감되었기 때문에.

○어린양과 더불어서 같이 따라가는 사람이 등장해요.

진짜 신은 뭐냐? 이미 창세 전에 확정되었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영을 통해서 통보받은 겁니다. “네 운명, 팔자, 내가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너는 손쓸 것도 없다.” 바로 그것을 증거 하는 것이, 이 두꺼운 성경 전체의 내용이 이 현실 세계에 꽉 차 있는 것을 주님 따라가면서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이 성도의 앞으로 남은 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나를 생각하고 세상을 생각할 때 그 의미가 어디서 들어온 의미체계인지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나온 의미인지 아니면 죽기 싫고 지옥 가기 싫은 무서움에서 나오는 의미인지 우리 자체의 의미를 계속 챙기려고 하는 그런 짐승적인 의미인지를 따져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고, 창세 전에 주께서 이미 확정 지은 그 사실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을 우리에게 통보해주는 그것을 우리의 목숨보다 더 귀한 의미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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