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편지를 쓰면서 성도인 자와 성도 아닌 자를 갈라내는 데에 도사에요. 이것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고자 함이 아니고 “너 아니잖아. 네가 여기 있을 자리가 아니잖아. 넌 네 자리 가.” 그걸 가려내는 데 예언의 말씀, 이 두 번째 편지를 보내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도라면 세상에서 평하는, 세상에서 생각하고 있는 이 복음은 반드시 조롱하게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여러분들을 복음 안다고 조롱하면 여러분들의 대처방법은, 제가 아까 언급했는데 다시 말씀드리면, “너 천당 가기 위해서 네가 복음 받아들이지?” 라고 조롱을 해요. 복음은 그런 뜻이 아닌데. 조롱을 하면 우리 자신이 평소에 내가, 저쪽에서 하는 이야기로 내가 나를 가지고 심하게 구박들을 해와야 됩니다. ‘너 천당 가려고 성경 보지? 구원 받으려고 성경 공부하지?’ 그런 조롱의 말을 내가 나한테 심하게 해야 된단 말이죠.
자꾸 나를 두둔해버리면, 중간에 누가 세상에서 훅하고 들어와버리면, 내가 쌓아놨던 모든 구원의 체제, 나름대로의 천당 가는 체제가 일거에 와르르 다 무너집니다. 그런 예가 바로 열두 제자의 조직의 와해에요. 열두 제자가 12명이잖아요. 12명이 1/n로 동등하게 힘을 가졌다 생각하겠죠, 열두 명이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구조로 12명을 구성한 게 아니에요. 하나를 건드리니까 다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를 건드리니까. 그것은 평소에 그 하나 되는 인간 있잖아요, 가룟 유다. 가룟 유다의 사고방식과 다른 제자들의 사고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기 전까지. 주님의 영이 오기 전까지. 낯선 시간, 낯선 공간이 오기 전까지는 인간들이 어떤 경우를 해도 저것은 나에게 도움이 될까, 도움이 되지 않을까를 계산하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거예요. 예수님이 나에게 이익일까, 손해일까. 그것이 그만 발각된 겁니다. 들통난 겁니다.
신앙생활 그거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그게 아니에요. 왜 평소에 혹독하게 자기를 다루지 않았습니까? 남이 욕하기 전에 내가 나를 욕해야 돼요. 너 지금 억지 부리고 있지, 성경 보면서? 흉내내기하고 있잖아. 너는 몰라도 나는 너 너무 잘 알아. 어차피 힘들게 이중생활 할 거 없이 이중생활 하지 말고 단중생활, 하나만 해 하나만 그냥.
세상이 조롱하기 전에 이 말씀에 나오는 조롱하는 불신자 역할이 있죠, 그 역할을 평소에 성경말씀 읽으면서 내가 그 역할을 담당하는 거예요, 내가. 내가 바리새인 역할 하고요. 내가 가룟 유다 역할하고. 하여튼 못된 역할은 우리가 도맡아하면 돼요. 해서 누구를 긁는가? 나를 긁어버려요.
그걸 백신이라 합니다. 백신을 1차, 2차, 3차, 4차 전부 다 맞아서 앓아누워야 돼요. 내가 날마다 나에게 마약같이 주사를 놓는 거예요. 아이고, 네가 천당 가면 악마도 천당 가겠다. 내가 나한테 궁시렁 궁시렁 하면서 계속 주사를 놔야 된다 이 말이죠. 남들이 조롱하는 게 그렇게 낯설지 않게. 그게 생소하지 않게.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싸다 하는 그런 마음을 평소에 갖고 있어야 돼요.
결국 이런 이야기는 이 하나의 물음 안에 다 들어있어요. 이 물음을 매일같이 우리 자신에게 묻는 겁니다. 이 물음을 여러분들이 한번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기억하지 마세요. 기억하라 하면 또 기억 안한다. 그냥 들으세요.【신과 나는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
신은 나와 관련성이 없어요. 지금 예언의 말씀이 그걸 증명하는 거예요. 신은 나와 관련성이 없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나와 관련성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 이유가 반드시 ‘나’라 할 때는 ‘남’을 끌어당겨서 남과 나의 구조 안에서의 나이기 때문에 그래요. 저거는 남이고 나는 나다, 이런 구조 안에서 신이에요, 인간은. 나한테 행운이 주어지고 나한테 도움이 된다면 괜찮은 신들은 다 도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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