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1:42-44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찐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심판주가 ‘너는 저주받아야 돼.’라고 누구를 지목해서 이야기하면 그 소리가 바로 우리 자신한테, 나한테 하는 소리구나, 그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우리 인류의 대표자들이지요. 예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이 터무니없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 벗어나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말고 바리새인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봐야 됩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이 십일조를 하던 사람이에요. 십일조를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고, 하나님도 사랑하고 십일조도 행하라.’고 했으니까 하나님도 사랑하고 십일조를 행해 보세요. 해 보게 되면 바로 우리 자신이 바리새인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하는 그 보답이 30배, 60배, 100배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화 있을찐저.’로 돌아오지요.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요. 십일조 했는데 ‘화 있을찐저.’ 십일조를 안 하면 나에게 돌아올 ‘화 있을찐저.’가 없어요. 십일조를 안 하니까 화 있을찐저, 이것을 받는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냐, 하실 겁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나옵니다. 부부가 헌금을 했는데 헌금을 한 당일에 둘 다 죽었어요. 헌금을 한 그 순간 둘 죽었습니다. 헌금을 했는데 헌금 잘못했다고 죽은 겁니다. 그래서 이 대목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보라고 놀릴 겁니다. 꼭 바보 같아! 집구석에 가만있으면 될 것을, 교회 안다니면 ‘화 있을찐저.’ 같은 듣지 않을 이야기를 교회 굳이 가서, 게다가 자진해서 헌금 했다가 ‘헌금 떼먹었지’라는 소리 듣고 졸지에 저주받아 죽어버렸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교인 두 명이 사망한 이 사건으로 인해서, 사도행전 5장 11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 나오는데,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인간이 갖고 있는 원초적인 공포, 두려움, 그 두려움을 돈을 바치면 그 두려움이 소멸될까하는 생각에 헌금을 했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인간이 그 공포심을 잠재우기 위해서 헌금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탄의 역사입니다. 악마의 역사에요.
헌금이란 우리가 갖고 있는 원초적인 공포심이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해소된 것을, ‘너희에게는 축복만 주어지지 저주가 없다.’라는 것을 안 결과의 효과로 주어지는 것이 헌금이지요. ‘돈으로 살아야 된다는 걱정근심이 사라졌습니다. 웬 기적입니까?’라고 표시하는 것이 헌금이어야 되지요. 이것이 고린도후서 8장에 나오는 헌금 이야기입니다. 헌금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의 양만큼 하라는 거예요.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듣는 바리새인 기분 좋았습니다. 주께서 성적순을 내버렸습니다. 천국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바리새인밖에 없다고 했으니까 바리새인들이 최고인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이야기할 때는 바리새인이 기분이 아주 좋았지요? 나중에 뭐라고 하느냐, 창녀가……, 요새 말로는 마사지 걸, 안마시술소 종업원이 너희보다 먼저 천국 간다, 그렇게 하시지요. 뒤에 가면 ‘너희가 보기에 가장 사악하고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는 돈만 밝히는 세리가 오히려 의인이고 네가 바로 죄인이다.’ 했습니다. ‘이레의 십일조를 하고 금식하고 가난한 사람 돌보고 구제, (요새 말로 바자회)까지 했습니다.’ 하니까 ‘네가 바로 지옥 갈 인간이다.’ 합니다. 듣는 바리새인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처음부터 칭찬을 안 해줬으면 좋았는데 처음에 띄워주고 나중에 밥그릇을 엎듯이 해버리니 그 바리새인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 바리새인 마음을 우리가 헤아릴 줄 알아야 됩니다. 헤아리고 자실 것도 없어요. 우리가 바리새인이니까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 다 알아요. 바리새인의 원칙(모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생활화 하자.’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말씀은 그냥 지식이 아니고 행동으로써 나와야 한다, 이 구호 이 모토가 그 당시 바리새인이 사두개인과 대결하면서 주장했던 거예요. 사두개인들은 성전중심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사람들인데 그들의 주장은 ‘성전만 있으면 복이 온다.’는 주장이에요. 바리새인은 그게 아닙니다. ‘성전이 아무리 있더라도 그 사람이 말씀의 생활화가 되고 말씀의 열매를 맺으면서 향기를 내야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성도다.’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것을 백성들이 다 알고 있고 제자들이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바리새인처럼 의롭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누가 감히 바리새인들을 따라 붙어요? 바리새인들은 전문가인데요. 말씀대로 살아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에 대해서 실제로 실적을 내놓는 전문가집단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보고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말씀을 평생 생활하려고 애쓰는 것은 다 너희가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너희 하나님은 마귀다.’라고 이야기한 예수님의 그 하나님은 바리새인과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추상적인 개념의 하나님하고 달라요. 예수님께서 ‘저주가 있을 것이다. 화가 있을 것이다.’ 하신 것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애쓰고 분투노력하는 것이 절벽에다 ‘나 여기까지 왔다.’고 낙서하는 것과 똑같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 38, 39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고 아무도 함부로 이런 이야기를 못하고 오직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이야기에요.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6:38, 39) 했어요.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아니면 천국 못 간다.’고 했어요. 그러면 바리새인이 천국 못가면 몽땅 천국 못가는 거예요. 아무도 천국 갈수 없습니다. 아무도 천국 갈 수 없다, 이 현실 하나와 예수님은 ‘내가 한 명도 잃지 않고 마지막 때 살린다.’는 그 현실을 대비해보세요. 우리 머릿속에서는 이 둘이 서로 연결이 안돼요. 우리 쪽에서는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 맞은편에서 ‘나의 양은 한 마리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실수라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반드시 다 찾는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다 있어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도 있고, 곧 빠뜨리는 법은 없고 추가적으로 더 하나님이 택하지 않았는데도 데려가는 법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을 가지고 바리새인에게 하신 말씀과 결합을 시켜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찌어다.’ 할 때 하나님이 자기 양을 건지시는 분류작업 중에 하나가 되는 겁니다. 공정(process)입니다. 자동차공장 조립라인에 조립순서가 있지요. 그 공정 중에 하나가 ‘화 있을찐저.’입니다. ‘자기노력으로 말씀 지켰다는 그것을 근거라고 내세우는 인간들은 저주를 받을찌어다.’가 공정으로 계속 들어갑니다. 제품이 나오는 중간 중간 과정에 화학약품을 계속 집어넣듯이 계속 주께서 잃어버린 양속에 집어넣으면 잃어버린 양은 예수님과 같이 뭘 느끼느냐, ‘아하, 십일조 한 바리새인이 저주받아 지옥 갔구나.’ ‘이것도 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아야 된다.’는 그것도 계속 들어오지요. 그렇게 들어오는 그것이 자기 양이기에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주입시키는 영적 제품을 위한 재료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아는 순간 우리 속에 두려움과 공포가 날아가 버려요. 구원이란 내 문제가 아니고 주님께서 자기과제로 이루어내는 것이 구원이라는 겁니다.
왜 저주 이야기를 우리 맘속에 집어넣느냐,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정성과 같이 동행한다는 말이 돼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동행하실 때 ‘아니야, 아니야’라고 해야 되느냐 하면, 지금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정이 되기 위해서, 인간의 ‘나도 긍정합니다. 나도 긍정해주세요.’라는 자기긍정에 방해 받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은 모든 것이 긍정이 되고 싶어 하는데 여기에 감히 누가 끼어드는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감히 거기에 끼어드는 거예요. 자기 자신의 것에 대해서 밝게 보고 훌륭하게 보는 자기긍정요소를 빼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아니야, 너는 아니야’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정이고 하나님의 활짝 핀 미래입니다. 오직 주님의 미래밖에 없어요.
그 부정을 하는데 말로만 하늘에서 ‘어이, 먹으면 안 돼.’ 하고 구름 속에서 왕왕 울려대는 소리가 아니고, 그것은 구약에서 썼던 방식이고요, 신약에서는 직접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거예요.아들을 통해서 직접 아버지를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들이 누구냐,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은 아니야.’ 하는데 아니라고 해도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들으니까 그 ‘아니야’를 예수님의 몸에 흔적으로 남겼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의 창자국과 못 자국입니다. ‘거 봐, 너희들 아니잖아. 너희들의 자기긍정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나까지 밀어치고 짓밟아야 되었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의 자기긍정이 하나님이 따로 일하시는, ‘하나님이 보기에 심히 좋았다.’를 완전히 회칠해 버리고 무너지게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간의 최종 모습을 가지고 인간이 얼마나 헛꿈을 꾸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44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 요새는 이런 말을 잘 안 쓰니까 쉬운 말로 하면 ‘저주받아라. 저주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하는 거지요. “……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들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무덤이라는 곽 속에 갇혀 있는 식으로 무덤 속에 있으면서도 ‘주님, 저 어때요?’ 하고 뽐내고 있다는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 인간은 귀신입니다. 그냥 죽음 속에 갇혀 있는 셈이에요.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 하는 것, 그게 오락이고 취미입니다. 목사는 놀아주는 오락 지도자고.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그 오락을 바리새인들이 하고 있었던 겁니다.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락을 한 거예요. 오락을 할 때마다 ‘나는 생생하게 귀신이 아니다. 나는 살아 있다. 이렇게 재미있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것을 보니 나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 맞아.’ 혼자 살아 있다는 것을 자꾸 증명하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무덤에 갇혀 있는 셈이다.’라는 겁니다.
지금부터 십일조가 뭔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헌금 잘못해서 교회에서 죽는 것, 당연한 것 아니야? 그게 뭐가 이상해.’라고 베드로는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두려운 가운데 헌금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헌금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헌금 했다는 이유로 죽어버린다면 세상에 어느 인간이 하나님에게 죽기 위해서 교회 오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베드로보고 한탄하듯이 물어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거예요. ‘제발 그럴 것 같으면 좀 가 줘. 살려고 하는 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가 줘야 그 때에 주님께서 자기 양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긍정적으로 살아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래도 주님은 자기 양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기 양을 버리지 않는 방법 중의 하나가 제발 교회 나와서 설교만큼은 오직 복음, 오직 피,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장사가 안 되고 교회 문 닫는다고 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것이 불평스럽고 불편스럽고 짜증스러운 일이 주님 보시기에는 하나도 일어난 적도 없는데 하나님께 짜증내고 불평하고, 모든 것이 불평이라는 것은 뭐냐, 아직도 자기긍정을 못 버리고 있다는 거예요.자기 양을 마지막 날에 살리는 이 점에 대해서는 ‘주님께서는 실수한 적도 없고 착오를 일으킨 적도 없고 하자가 없습니다.’가 긍정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그야말로 두려움 없이 교회 나올 수 있어요. 내 생각을 자꾸 가지니까 내 자존심을 따로 챙기니까 모든 것이 불평스러운 거예요. 같은 교인들도 꼴 보기 싫고.
땅에 인간의 노동이 가미되어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이방민족들이 하는 소리에요. 약속의 땅의 특징이 뭐냐, 땅 자체가 생산물을 꽉 쥐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법을 받으면 생산물을 내고 만약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면 너는 저주받게 되어 있어.’라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약속의 땅이에요.하늘에서 비를 내리고 땅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 인간과 관계없이 하나님과 한편이 되어서 그쪽끼리 이야기가 따로 통해요. 인간은 바보예요. ‘열심히 농사지었으니 결실을 이루겠지.’ 하면 땅이 있다가 ‘네 맘대로? 나는 인간지시 안 받아. 나는 하나님 지시 받아. 하나님이여, 올해 농사 좀 잘 되게 해 줄까요? …… 알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연결 짓는 것을 두 자로 언약이라 하는데 그게 무슨 언약이냐, 제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언약, 모세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그냥 하늘이야 비오면 되고 땅은 비오면 곡식을 그냥 내면 되지만 인간은 그것보다 더 해야 돼요. 참새는 날기만 하면 되고 잡초는 자라기만 하면 되지만 인간은 그 나라와 의를 구해야 될 책임을 언약 속에 부여받습니다. 인간의 특수한 모습이에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그렇습니다.
제사를 잘 드리면 이스라엘은 땅도 풀리고 하늘도 풀려서 농사가 잘 돼요. 그런데 제사에 대해서 관심들이 없으면 하늘도 땅도 다 닫혀서 가뭄이 들고 흉년이 들고 곡식이 잘 된다 해도 갑자기 이웃나라가 와서 다 빼앗아가는 일들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게 약속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사가 중요한데 그 제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어디서 나옵니까? 제사를 주관하는 전문가들을 제사장이라 합니다. 매일 제사하는 것이 버겁기에 보조원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레위지파라는 거예요. 그 레위지파와 제사장의 특징이 뭐냐, 농경시대에 농사지을 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직접 하나님 앞에서 언약이 유지되면 축복이고 언약이 유지 못되면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들은 개인적으로 아슬아슬한 겁니다. 다른 사람은 농사만 지으면 그만이지만, 지금 그들은 자기 집에 땅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직접 상대해서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만들어내야 돼요.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만들어낸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사람에게 저주를 축복으로 전환하는 그 장치가 언약궤가 중심에 있는 제사하는 장소입니다. 그 제사장소인 거룩한 곳에 들어가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도 안 죽고 버티면 축복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대표자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고 사는 것은 누구에게 달렸느냐하면 제사장들의 제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느냐에, 그리고 제대로 비용이 충당되느냐, 거기에 달려 있는 거예요. 만약에 제사장이나 레위 인들이 농사짓는 사람들처럼 자기 돈 버는 것에 신경 쓰면 그 제사자체가 ‘네 마음가짐이 엉망이다.’ 해서 안 되는 겁니다. 온 나라가 저주받아요. 그래서 그들이 전적으로 제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누가 돈을 주느냐, 하나님이 제사장과 레위 인에게 돈을 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돈을 주는 것을 가지고 십일조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이 주지를 않아요. 하나님이 직접 줄 수 있는데 하나님이 손이 없잖아요. 손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이겁니다. 제사의 성공여부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가 결정된다는 것을 제사장이나 레위인만 알지 말고 전 국민이 알게 하기 위해서 전 국민을 경유시켜서 그런 돈의 흐름으로 제사장과 레위 인에게 오도록 하기 위해서 십일조라는 율법을 준겁니다.
십일조라는 율법은 뭐냐, 땅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생산물을 내게 되면 이스라엘백성들은 노동으로 참여할 뿐이지 이것은 자기들 땅도 아니고 생산물도 자기 것이 아니에요. 농사 잘 된 것은 제사덕분이라고 농사에 신경 쓰는 것이 아니고 그 시선을 제사장이 제사를 얼마나 잘했는가, 제사장의 제사의 충실도에 두면서 십일조를 거기에 전달하는 식으로, 물동이 전달하듯이 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생산물을 다시 제사장에게 전달하는 겁니다. 그 경로 가운데서 십일조를 내는 일반백성들에게 나의 것, 나의 돈은 일체 없는 거예요. 내가 돈을 내는 것이 아니고 복이 저쪽에서 왔기에, 내가 축복을 주는 것이 저쪽에서 옵니다. 내가 제사장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사장 먹여 살리는데 제사장이 예뻐서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은 모세언약을 계속해서 가동시키기 위해서 그냥 일꾼들을 하나님이 불렀는데 하나님이 주신 생산물의 십분의 일을, 제일 좋은 것을 떼어서 그들에게 전달하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십일조라는 겁니다.
기본은 하나밖에 없어요. ‘내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냥 뭐가 지나가는 것 같아요. 뭐가 지나가는가? 하나님의 것이 나한테 와서 나도 먹이고 저쪽도 먹이고, 그런데 하나님이 먹이는 것은 나한테 직접 먹이는 것이 아니고 제사를 통해서 나를 먹이고, 그 제사가 신약에 와서 완성된 것이 십자가라 하는 겁니다.
잃어버린 양을 영원히 잃지 않는 방법은 ‘하나님의 축복, 너를 구원했다.’를 계속 되풀이 하는 것밖에 없지요. 되풀이하는 그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직업과 생활 여건을 줘서 그 모든 축복은 나의 긍정이 아니라 주님의 일에 하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증거 하라고 평생토록 우리에게 밥 먹여 살리고 있는 겁니다.
은혜 때문에 헌금하고 복음을 위해서 살고, 그런 겁니다. ‘헌금이란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것이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서 쓰시는 헌금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위해서 점심을 맛있게 먹는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주신 헌금입니다. 그것은 당신 속에 예수님이 들어 있기에 그런 거예요. 우리 속에 예수님이 들어 있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에게 헌금을 하는 겁니다. ‘네가 얼른 챙겨라.’가 아니라 우리 속에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증거 하라고. 따라서 항상 우리 속에 내 것이라는 것은 없고 하나님의 것인 예수님의 것으로 우리는 하나의 껍질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는 이미 다 이루었는데 우리가 우리 힘으로 구원받지 못하기에 그것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 자기 피로서 우리를 저주에서 복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놓았는데 우리는 그것마저 내 것으로 여기지 않는지 돌아보게 해주시고 이제는 우리가 우리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 되었사오니 우리 속에 달성할 수 없는 기적을 우리 속에 이미 품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평생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