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문
누가복음 13:22-27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바로 오늘 나왔던 말씀대로 이야기하면 돼요. 오늘 예수님 하신 말씀대로 자기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이 곧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 따로 있고 내가 할 말 따로 있고 이래 버리면 아무리 본인이 예수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예수님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가 계속 나오게 되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할 수 없고 무엇의 증인이냐 하면, 바로 자신의 자기 잘남의 증인으로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 받는 자가 적다.’ 하면 평소에 진짜 예수 믿는 사람 같으면, 그 구원 받는 사람이 적은 것이 기뻐서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야 돼요.정말 주님 말씀대로 빈틈이 없네요.‘ 하고 같이 동감하고 같이 좋아하고 춤추고 즐거워해야 됩니다. 성경 말씀에 예수 믿는 사람이 적다했는데 그거에 삐져서 개척교회 했는데 ’교인이 사모님하고 둘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래 나오면 평소에 그 사람은 교회를 믿는 목사지, 예수 믿은 적이 없는 목사예요.
‘주여 문을 열어 주소서.’ 하니까 ‘나 니 누군지 모른다.’라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했으면,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면 됩니다. 내가 누군지 본인이 모르면 돼요. 아이,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내가 누군가를 내세우면서 앞에 나올 때 그것은 그 자체가 주님 말씀에 위배돼요. ‘나는 니가 누군지 모른다.’ 라는 것을 수용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되게 쓰고 있지만 막상 구원하시는 주님은 우리가 신경 쓴 만큼 우리에게 관심 없어요. 천하를 다 아시는데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 알아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주께서는 니가 ‘나 알아 달라’는 것에 내가 니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뭔가 주님 앞에 말씀을 들었으면 뭐가 삭제되느냐 하면 ‘아! 그동안 내가 나의 가치에 대해서 나의 존재의 긍정에 대해서 나의 의구에 대해서 이렇게 철저하게 나에게 신경 쓰는 이 자체가 주님의 은혜를 받고 십자가 앞에서 이것이 삭제돼야 돼요. 구원파가 이단인 이유가 거기 있어요. 여러분들은 구원 받았습니까?‘ 하는 그 자체가 이미 주님은 관심 없고 내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가려고 신경 쓰는 거예요. 그 구원파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한국교회서 나왔어요. 박 옥수가 이단 같으면 나머지 거기서 나온 토대는 다 이단이죠. 주의 말씀은 예수님이 구원 받은 너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넓은 길에는 무슨 재미로 사는데?’ 이걸 조사를 해야 돼요. 그 사람들 무슨 재미로 사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 가족 있다는 재미로 살고, 내가 있다는 재미로 살고 내 직장 든든하다는 재미로 살고 그러니까 인간의 행복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 없으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그 재미로 사는 사람들이 그 넓은 쪽으로 다 몰려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에 보면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많은 재산과 다복한 가정을 사랑하면서 ‘나는 주도 사랑해요.’ 하는 그런 거짓말 좀 나한테 하지 마라.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뻔히 아는 거짓말을 해댄다고 거짓말이 아닌 게 아니라 이 말이죠. ‘주님 어느 놈이 천국에 갑니까? 그러면 천국 갈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아무도 갈 수 없는 곳 이예요. 천국이라는 곳은!!
내가 죽어서 어디가야 행복 하냐, 자기 행복부터 챙기지 마시고요. 하늘에 사시는 예수님께서 진짜배기 진리를 이야기할 때 그 진리 내용이 뭐냐, 그걸 먼저 생각해야 되죠. 그 예수님이 하신 진리는 우리하고 의논하고 타협하고 협상하고 흥정할 대상이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내질러 버립니다. ‘못 간다. 아무도 못 간다.’ 갈 수가 없어요. 그곳은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기 때문에 그건 지극히 당연합니다. ‘이 땅에서 고생했으니까 죽어서는 호강 해보자.’라는 심보, 그 심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것이 주의 말씀인가’하여 주의 참 뜻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주님께서 그 사람은 구원하기로 작정한 그 시점입니다. 예수님 만나서 ‘벌써 나았다’ 한 그 시점에 이미 공간적인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신하의 아들 병이 나았어요. 그걸 알고 ‘야! 주께서 주의 말씀대로 되는구나.’ 그러니까 말씀이 도착하면 곧 그것이 그 사람이 병이 낫는 증거가 아니라 구원되는 거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죠. 바로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펼쳤던 누가복음 13장 말씀이 여러분 마음에 도착되면 이미 그 사람은 이미 구원이 시작된 거예요. 이미 구원 받은 사람 이예요.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은 그 입에서 주의 말씀이 튀어 나온다. 우리 몸이 껍데기라면, 하나의 바닷가의 고동 울리는 소라 껍데기라면 우~ 하고 울리는 그러한 통 속에서 주의 말씀이 입을 통해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되는 겁니다. 튀어나오는 것이 주의 말씀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창세가 3장의 원칙이 그대로 적용이 되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언제부터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죽여 놓을 때, ‘니는 죽은 인간이다.’ 할 때 그 죽은 인간부터 사람이 비로소, 죽음 앞에서 ’아! 사람이 이런 거구나.’ 하고 사람이 비로소 부각이 되는 거예요. 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인데 그동안 안 죽으려고 살려고 열심히 기도해서 살려고 얼마나 헛짓하고 있었는가, 나의 참 모습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지금 내 눈에 띄는 내 몸이 손에 만져지는 내가 있으니까 이걸 자꾸 인간이라고 그렇게 고집부리고 우기네요. 이것도 인간이라고. 인간이 아닌데 살아있는 인간 ‘더 살려주세요.’할 때 ‘인간도 아닌데 왜 살려하느냐,‘라고 하시는 말씀이 주님께서 하시는 거예요.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니까 우리를 죽은 존재로 보는 주님의 입장하고는 자꾸 어긋나는 거예요. 주님 뜻을 이해 못하고 자꾸 빗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관심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예수님은 관심이 없고 고생하는 나와 고생 안하게 하는 나, 지금 내가 죽어서는 천국 가서 고생 안하는 나, 그 외에는 다른 게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들이 모든 선배들이예요. 우리보다 먼저 이 땅에 태어났던 모든 인간들이 바로 종교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전부 다 그런 식으로 살아왔던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왔던 그것을 주께서 한마디로 전부 다 차단시켜 버려요. 차단시키는 효과가 뭐냐, 비로소 그럴 때 그 사람들이 평소에 종교생활,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성령 믿고 어떻게 하고 그러한 모든 것이 바로 악마의 힘이고 그게 사단의 힘이고 그게 지옥갈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거기서 힘이 솟아 나온다는 것이 발각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뱀의 앞잡이였어요. 뱀의 앞잡이라면 결국은 우리 속에서 내뿜는 곳은 사실은 우리 뜻이 아니고 사단의 뜻이고 뱀의 뜻이겠죠.
주께서 하는 말씀이 ‘니가 힘든 것은 니한테 니 자신을 긍정하고 너의 가치를 안 놓으려 하니까 그게 힘든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너라. 내게서 배워라. 나는 다 망했잖아. 그런데 니는 니 것을 안 놓으려 하니까 니가 니한테 죽도록 고생하는 거예요. 문제는 안 잘리려고 하니까 문제 아닙니까? 교회도 잘라 버리고 가정도 잘라 버리고 모두 잘라 버리고 심지어 나도 잘라버리고 잘라 버리고 잘라버릴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나 니 누군지 모른다.‘ 그 이야기를 우리가 그 말씀을 우리가 진짜 내 말씀으로 들어야 돼요. 우리는 자기 이름이 있어서 남의 이름 욕 얻어먹는 건 소용없어요. 내 이름을 욕 얻어먹는 것은 참지를 못합니다.
쉽게 하겠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다시 돌아 올 내 자리가 없다는 뜻 이예요.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구축할 내 자리는 주님 보시기에 ‘나 니 모른다.’는 평가를 받는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평생 애쓰고 노력해도 우리는 내 자리만 구축할 뿐이지 그 주님이 안 알아주는 그 자리를 왜 구축하는지 몰라요. 우면 산 그 아줌마 이야기 저를 미치게 만들었어요. ‘그 나무만 잘랐으면 내 아들이 살 건데, 왜 진작 안 잘라주는 지 몰라.’ 주님께서 지금도 계속해서 잘라 줍니다. 자르라고 우면 산 산 사태가 일어난 거예요.
여기 로마서 11장 33절에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의 길은 찾지 못 한다 그랬죠?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뭡니까? 이 이야기를 그대로 하는 거예요. 싱글 벙글 웃으면서. ‘집사님, 어떻게 나도 구원 받아요?’ ‘’‘그의 길은 찾지 못함이라.’ 이렇게 싱글벙글 하면서 이야기하면 된다니까요. ‘우리교회 나오세요.’ 그러지 말고 ‘그의 길은 찾지 못합니다.’ ‘그럼 집사님은 그 교회 어떻게 찾아 갔어요?‘ ‘나도 못 찾았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그의 길을 찾지 못합니다.’ 그게 로마서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그것보다 더 한 게 나오죠. 35절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그러니까 내 것을 주 앞에 바치면 그 바치는 보상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는 이런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었던 하나님이다 이 말이죠. 헌금한다고 십일조 한다고 복 부는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애초부터 우리 것을 드려서 보상으로 되갚아오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걸 고린도교회에서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편지를 보내서 이 이야기를 했다고요. 지금 3차전도 하면서. 사도바울이 돌아다니면서 이 이야기 했다 말이죠.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보상책으로 구원받는 법은 없습니다. 아까 분명히 이야기했다 말이죠.
그럴 때 사도행전 17장 32절에 보면 저들이 뭐라고 한 줄 압니까? 오늘 설교 하이라이트입니다.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비웃었다 이 말이죠. 사도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복음은 그리고 예수님께로 나오는 모든 복음은 예수님 당시의 모든 바리새인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았으며 사도바울의 모든 복음도 비웃음을 받았어요. 왜 비웃음을 받느냐 하면, 비웃어야 그게 정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도들은 제발 예수님처럼 사도바울처럼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말을 하면 안 되고 비웃을 수 있는 내용만 이야기해줘야 돼요. 비웃을 수밖에 없는 내용을!!! 그게 복음 이예요. 그걸 전하라 하는 거예요. 남에게 비웃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복음을 전해야 이 복음이 복음을 전하는 내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전하는 복음이 아니기 그렇습니다.
비웃음을 받아야 돼요. 선교야 주님이 하시고 죽고 사는 것도 주님 손에 달렸습니다. 왜 자기 것을 자꾸 쥐고 자기 것을 채우려고 교회 오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주께서도 안 알아주는 건데. 왜 주님이 안 알아주는데 왜 내가 내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걸 꼭 쥐고 있어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말이죠. 이유가 없잖아요. 구원 받은 성도가 매일같이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 대해서 비웃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원은 구원대로 받아가면서 비웃음은 비웃음대로 하고 있어요. 성도의 하루, 하루의 나날은 하나님께 감사가 아닙니다. 칫~ 하고 주님께 비웃는 식의 하루하루입니다. ‘에게, 주께서 나한테 예수 믿으니까 기껏 나에게 해준 게 요거밖에 안 돼요.’ 늘 주 앞에 비웃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이 누구냐, 그런 인간이 야곱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처음부터 노림수가 있었어요. 야곱 자체 이름이 빼앗는 자지만 노림수가 있었습니다.
좁은 문이라 하는 것은 문이 없다는 뜻 이예요. 일체 문을 없는 거예요.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문보다 작은 문 이예요. 우리를 낙타로 본다면 낙타한테는 바늘이 있으면 그걸 문으로 여기지 않잖아요. 결국은 낙타한테는 문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소리 듣고 제자들은 누가 놀랐느냐 하면 불신자들이 놀란 게 아닙니다. 제자들이 놀랐어요. 왜냐하면 저희들은 구원 받는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하는 말이 '그러면 주님,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과 동행하면 매일같이 이 질문을 주님한테 해야 됩니다. ‘주여, 이런 식으로 저 구원 못 받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해야 되고 주께서 그 소리 듣고 얼마나 기쁘고 즐겁게 들으실 겁니다. ‘그래, 니 힘으로 구원 되려고 하는 니 성질 머리 자체가 문제지 그래.’ㅎ ‘그럼 누가 구원 받겠습니까? 이건 안 됩니다.’ 쉽게 말해서 ‘주여, 이건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 그래, 안 되게 하는 것이 내 뜻이라니까.’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 내가 그러니까 인간이 못한 것을 하나님이 하시잖아.’라고 하시는 거예요.
인간은 자꾸 하나님 하시는 것과 자기가 하는 것과 섞어서 구원 되려고 시도를 하는 거예요. 주님은 요만큼 하면 미비한 것은 내 쪽에서 할 것은 내 쪽에서 보태서 그래서 같이 짝짜꿍돼야 천당 간다고 생각한다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니 것이 나한테 포함되지 않는다. 니 행함이 니 구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은 처음부터 니는 뭘 해도 구원에 전혀 기여를 할 수 없는 그런 존재에 불과한 거예요.
그걸 다시 이야기하면 ‘니는 처음부터 구원을 못 받아. 구원 안 되는 것을 내가 니를 구원 해.’라는 겁니다.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 말이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이기를 원합니다.
오랜만에 시골에서 고추하고 가지하고 돈은 안 되지만 나물하고 바리바리 싸가지고 와서 서울에 있는 아들 집에 떡 앉아서 시어머니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면 기절할 거예요.ㅎㅎ ‘어머님, 언제 내려가십니까?’ 하면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면 기절한다 말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니 살림 사는 것을 보니 니 살림 사는 것도 아니고 엉망이다. 내가 처음에는 니한테 기대했는데 아예 기대 못하겠다. 내가 죽을 때까지 니하고 함께 살면서 니 이렇게 살림 못하는 것을 혹독하게 잔소리 해댈 거야. 그래야 니 집 살림이 돼.’ 이게 주의 뜻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내 힘으로 조치를 해서 그 천국에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기미가 안 보입니다. 우리는 매일 실패해요. 실패, 실패, 또 실패예요. 우리가 즐거운 것은 말씀 잔소리꾼이 평생을 떠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고추잡채를 배웠다 칩시다. ‘어머님, 제가 이번에 잡채를 배웠어요. 제가 만든 잡채가 어떻습니까? 이제 5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어머님한테 이거 하나 배웠습니다.’ 어머님이 잡채 든 쟁반 들고 낯짝에 던져 버립니다. ‘내가 평생 너와 함께 있겠다는 의미를 모르느냐, 그래 나한테 5년 배워서 그것도 주의 뜻이라고?’ 에라, 주의 뜻이 시어머니 뜻이라고? 그것도 잡채야?‘ 라고 얼굴에 던져버립니다. 시어머니 뜻은 이겁니다. 시어머니 없이는 니가 집구석이 안 된다는 것이 시어머니 뜻 이예요. 이건 예수님의 뜻은 뭐냐 하면 ‘너는 예수님이 함께 있지 아니하면 니는 구원 못 받아.‘ 라는 것이 예수님 뜻인데 우리는 그것을 뭐로 해석하느냐 하면 주님이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내가 구원 된다는 식으로 또 자기 자신의 구원의 욕구에 대해서 그대로 악마의 이빨을 드러내는 거예요. 악마의 이빨 덧니를!!
하나님께서 그 야곱을 철저하게 지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데려가는데 놀라운 것은 창세기 28장에 보면 사다리가 내려옵니다. 그 사다리를 가지고 한자로 뭐라 하느냐 하면 ‘문’이예요. 문!! 무슨 문? 하늘의 문, 이게 하나님 집입니다. 베델입니다. 하늘의 문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저 어떤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말썽꾸러기, 나밖에 모르는 주님도 귀찮아하는 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잊지를 못하는 것, 주님 하신 것은 다 잊어버리고 지가 애쓴 것, 손톱에 때 낀 것, 지 손톱 아픈 것, 이런 거는 못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화내는 요 못돼 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다리가 주님의 문이 거기서부터 개시가 되고 열립니다.
어떻게 열립니까? ‘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피 묻힌 문이, ‘주여 이 피 왜 흘렸습니까?’ ‘니가 그렇게 잡채 만들고 애 잘 키운다고 나한테 자랑해서 내가 그 죄를 씻는다고 흘린 피가 아닙니까,’ 피가 물들은 사다리, 그 사다리가 주님의 십자가로서 우리 속에 박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기를 ‘ 너희들이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 십자가가. 그 피 묻은 십자가가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누굴 부러워하면 그 사람한테 두려움이 생겨요. 부러움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어요. 지금 여러분, 누가 두렵습니까? 부모한테는 자식이 제일 무섭고 두려워요. 그 애가 잘못되면 부모 얼굴에 떡칠을 하기 때문에. 이게 공포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모는 자식을 낳고도 자식의 십자가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자식 안에 살아가요. 자식이 문이라.ㅎ 자식이 천국의 문이 돼 버렸어요. 천국의 문이 없어요. 사다리가 없어요. 사다리가 없으니까 기껏 생각한 아이디어가 뭔지 아십니까? ‘착하게 살면 사다리가 내려올 거라고.’ 세상에 그런 속임수에 넘어갑니까? 여러분 착하게 산다고 되는 게 아니고 야곱은 못되게 살아도 그 안에서 솟아 나와요. 못 되게 산 야곱, 지 밖에 모르는 인간 속에서 사다리가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주님이 올라왔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 데서 실제로 사흘 만에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 세상은 말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말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 거기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왜 십자가입니까? 인간의 힘으로 갈 수 없는 나라가 바로 천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만 생각했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자기 행동과 태도 마음씨 양심 이런 것 추스르면서 그것을 잘 다스리면 하나님이 사랑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주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고 결국은 내가 내 자리로 되돌아오는 지독한 나의 사랑인 것을 십자가 피 앞에서 다시 한 번 회개할 수 있는 저희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