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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안에서

아빠와 함께 2022. 9. 9. 23:17

고전 1장 4-7(예수 안에서)140803-이 근호 목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우리 일상에  성경대로 어떤 변화 같은 것이 일어나야 되는데, 집에 앉아서 기다린다 할지라도 전혀 우리에게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전혀 비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와 닿으니까 마치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집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교회가 비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비밀이거든요. 비밀을 깨닫는 영을 받지 아니하면 아무도 이 고린도전서 1장4절에서 7절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 이야기를 내뱉어 가지고 너희들 선에서 해결하지 못한 것을 내가 알아서 해결해서    너희들이 못 알아들었지만 내가 알아듣기 때문에, 또 내가 성취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너희에게 구원되는 효과를 주시겠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비밀이라는 말은 반드시 그 안엔 계속되고 반복되는 실패성이 담겨 있어야 돼요. 계속 실패하는 교회라면 참된 교회입니다. 그 실패를 했다는 말은 우리 쪽에서 뭔가 계속 시도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고, 할 수밖에 없는 시도를 주께서 계속해서 밀쳐내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 밀친다는 말은 진짜 주님이 계시기에, 계신 효과를 지금 보여주고 계시는 겁니다.

“아, 얼마 전에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따지고 돌아서 보니까 합당한 기도가 아닌 것 같아.” 또는 얼마 전에 헌금을 했는데 “아, 그 헌금을 하면서 순수하게 돈을 초월하지 못한 내 마음을 새롭게 발견했어. 제대로 된 헌금이 아닌 것 같아.” 자꾸 뭔가 내 쪽에서 실시한 구원의 시도들이 실패로 뭔가 밀침을 당하는 가운데서 마저 정복할 수 없는 그 미진한 것이 계속 남아 있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 마태복음 20장에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 라고 나온 말씀이 있습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하니까 제자들이 귀 솔깃해가지고 “야 우리 천국 가는데, 천국에 대해서 미리 알아두어야 하지 않겠어? 지금 주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 한대.” “그래?” “잘 들어 알아듣자.” 하고 귀를 기울이니까 그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라고 하시면서 인간사는 세상의 모습을 말씀하시고 그것과는 반대되는 다른 원리가 작용한다고 설명을 하는 겁니다. 반발하지 않을 수 없죠. “왜 저 사람하고 노동시간이 다른데, 한 시간 일했는데, 나는 8시간 일했으니까 8배를 줘야지 왜 한 데나리온 줍니까?”  천국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된  안목을 가지고 이것을 봐야 해요. 노동시간만큼 품삯을 더 준다는 우리가 당연한 진리라고 알고 있던 이 상식적인 품삯 계산이 천국과는 안 맞는 잘못된 계산이고 잘못된 삶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아니면 누가 이야기 하겠습니까? 천국에서 오신 분이 아니면 그걸 누가 까발리겠습니까?  교회는 등록해 놓고 실제로 사는 것은 세상 원리와 똑같이 살면서, 애굽 원리와 똑같이 살면서 그게 어떻게 천국 백성입니까? 예수님께서 왜 말씀하시는데요? 고린도전서를 왜 펴놨습니까? 

우리가 가야 될 그 곳은, 이 땅에는 하나의 비밀이에요. 비밀인데, 그 비밀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느냐 하면,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나는 진리라고 여기는 이 모든 것이 항상 실패라고 주님한테 밀침을 당하면서, 그 간격이 유지되면서 천국은 내가 그리던 그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생각한 그 곳이 결코 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내가 그리고 상상하는 것은 내 몸에서, 내가 이 세상 살면서 받았던 원리 원칙을 그대로 구현한  천국이기 때문에 그 천국은 결단코 예수님이 소개한 천국과 절대적으로 대척관계인, 정반대 관계에 속한 상상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교회는 비밀이고 천국도 비밀이고 그리고 진짜 천국과 통하는 교회는 교회 자체가 비밀이에요. 그 교회를 인간이 손대서 운영을 해보겠다고 헌금은 어떻게 하고 선교헌금은 몇 퍼센트 내고 목사 월급 얼마 주고 예배당은 어디에 짓고 이런 모든 손질들이, 모든 관리들이 더욱더 교회들을 교회 아닌 것으로 전환시키는데 효과가 있을 뿐이에요.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숙달된 것을 그대로 행함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인간 세계에서 벗어나지를 못 하고 있어요. 한 가지 예를 들면 밖에 나가기 위해서 옷을 입었는데 누런 옷이다. 누런 옷을 어떻게 입고 갑니까? 어떻게 합니까? 세탁기에 넣고 하이타이 넣어서 하얗게 만들어야죠. 하얗게 만들면 이제 입고 나가도 되겠네. 누런 옷은 못 입고 하얀 옷은 입고 외출한다. 요걸 네 자로 이야기하면 기계작용입니다. “기계작용” 인간은 해 온 대로 할 뿐이에요. 그걸 두 자로 이야기하면 인간은 기계입니다. 인간은 기계예요. 타고난 기계예요. 실제로 인간의 몸은 세포로 된 기계라는, 메카니즘에 대한 세포로 된 기계, 인간의 모든 출생의 정보는 DNA라는 기계, 전부다 기계예요. 기계는 아무 의식도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그저 동작되는 대로 움직일 뿐이에요. 그런 기계는 천국에서 받아 주지를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 이야기를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강의에 쫓아 온 사람이 남자만 오천 명이었습니다. 때가 됐는데, 이제 배고플 때가 됐죠. 그 때에, 제자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 왔어요.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이건 1인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 밖에 안 됩니다.” 하고 가져오니까 예수님께서 그 1인분을 자신의 1인분으로 받아 들여 가지고 거기서 하나님께 축사를 하니까 화수분처럼 계속해서 나오는데 무려 오천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를 남겼습니다. 이 지점이 중요한 지점이에요. 이 지점이 인간이 기계냐, 아니면 천국 가는 사람이냐, 드러나는 지점인데요.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배불리 먹었으니까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해서 예수님이 떠나니까 끝까지 따라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왜 나를 따라 왔느냐? 너희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나를 따라 왔잖아?” 하고 이야기 하셨거든요. 참, 예수님 말씀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먹는 기계였습니다. 먹고 사는 기계였어요. 단지 그것에 갇혀 있어요. 그거밖에 없어요. 따라서 자기기계 같은 인간이 지어낸 천국도, 기계들만 모여 있는 공장이에요. 천국이 아니고 공장. 사람은 그 공장 같은 천국을 그리워합니다. 왜? 지금 숙달됐고 지금까지 경험해 온 것이 기계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 떡을 먹고 배부르면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것,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그걸 주께서 제공했으니까 주님 붙잡으려고 끝까지 따라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이야기합니다. “너가 하나님의 일을, 너가 천국 가려고 한다면, 너가 정말 인간되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어라.” 믿어라하니까 믿어라 하는 그 소리 듣고 제자들이 아, 우리가 성경지식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거 이야기하는가 보다 해가지고 그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을 나타냅니다. 옛날 모세가 광야에 있을 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줬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늘에서 당신이 빵조각 내려 준다면 당신을 메시야로 모셔 가지고 천국에라도 가겠습니다. 그런 제안을 인간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이 그거는 영생이 아니야. 그거는 생명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거 먹어봐야 또 죽는데 그게 뭐 생명이냐. 그거는 죽는 인간 또 죽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비밀이라는 말이 뭐냐 하면, 교회가 생명을 주겠다는 말입니다. 그 생명은 무엇과는 연결돼서는 안 되느냐 하면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 이러한 사고방식과 간격을 유지해 줄 필요가 있는 거예요. 뭔가 중간에서 끊을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비밀이라고 하는 거예요. 비밀. “너희가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라는 거예요. 오병이어 할 때,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줄 때, 이미 주신 그 도시락은 그냥 주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을 경유해서 줬잖아요. 그게 예수님의 살이고 예수님의 피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도, 먹으면서도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그게 예수님의 생명으로 보이지 않고 지가 평소에 늘 먹던 떡으로 보였고 그 고기로 보인 거예요. 다 떠났습니다. 제발 우리가 알아듣는 소리 좀 해라.  예수님을 경유한 것은 이미 예수님이 떡을 주고, 빵을 주고, 고기 준 것은, 제발 니가 니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라. 이 말이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라 이 말은, 예수님이 기계 같은 너희들을 하나님께서 죽은 존재라고 간주하시는 차원으로 떡을 주신 거예요. 니가 떡을 먹고 잘 살라고 애쓰기 때문에 나를 오해했다는 겁니다. 다시 할게요. 우리들 배부르라고 줬잖아요?” 그 말에 예수님은 “너희들이 죽은 인간이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주는 거다. 너희들은 생명이 없고, 너희들은 영생이 아니고, 내가 영생이고 내가 생명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나를 경유해서 떡을 줬다. 떡을 먹고, 먹는 인간으로 생각을 한다면 너는 죽은 인간이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살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을 때, 이거는 진짜 죽음을 죽은 거예요. 진짜 죽음이란 뭐냐 하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유일하게 성사된 죽음만이 진짜 죽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했잖아요. 그 죽음이 진짜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죽어도 못 죽어요. 안 죽어요. 사람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죽는다며? 인간이 이해하는 죽음은 백골화입니다. 백골화. 인간이 이해하는 것은 백골이에요. 하얀 뼈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죽은 진짜 죽음은 뭐냐 하면 아버지로부터 내가 버림받는 거예요. 사람은 아무리 용을 쓰고 자살해도 안 죽어요. 자살해도 못 죽어요. 왜, 마지막 날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발, 현실을 확장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인간도 주님 앞에서 죽을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죽음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죽음이 그 죽음인데, 그 죽음은 바로 악마와 사탄과 거기 합세한 자의 영원한 버림받음.

결코 그들은 사라지지 않아요. 지옥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나사로 앞집의 부자도 지금도 지옥가서 살아 있어요. 아무도 안 죽습니다. 아무도 죽은 일 없어요. 다만 그게 죽음이에요.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미움 받고 저주받는 것, 에서도 지금 지옥에서 미움 받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죽음이에요.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오해는 내 몸이 흙이 되면 죽는 걸로 생각하고 백골 되면 그게 죽음이라고 오해한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아무 것도 무지하고 모르면서도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을 자기한테 마치 자기가 아는 일처럼 오해하니까 교회는 비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께서는 늘 우리에게 절망을 가르쳐 주십니다. 절망을 무서워하지 마시고 절망을 즐겨야 돼요. 지금 버스 탔는데, 우산 없는데, 비는 오는데, 곧 내려야 되는데, 하늘 보니까 먹구름 두꺼운데, 거기서 비로소 절망과 희망은 우리 소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구나! 외부에서 어떤 상황에 따라서 희망 갖기도 하고 절망 갖기도 하는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성격 문제가 아니고. 사람은 이 상황에 현실에 수동적이라는 겁니다. 뭔가 쫓겨 다니고 매어 달리고 있는 거예요. 알 수 없는 공포에 계속해서 시달리는 거예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그 절망감. 그러니까 인간은 계속해서 마약처럼 자꾸 희망만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러나 그 희망은 하나의 자기 착각이고, 우리가 속해 있는 현실은요, 그게 핵심이 아닙니다. 그게 중심이 아니에요. 내 희망이 중심이 아닙니다. 결국 인간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매여 살아요. 직장에 취직한 사람의 특징이 이렇습니다. 겉으로는 아니더라도 속으로 “사장님. 제 자리를 쫓아 내지 않는다면 제가 무슨 짓을 다하겠습니다.” 참,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차마 그 말은 못하지만 속으로는 “이 자리만 유지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직장에서 구조조정하게 되면, 책상 걸상 다 빼게 되면요, 어떤 사람은 도시락 싸들고 와서 책상, 걸상 있었던 그 자리 맨 바닥에서 도시락 까먹고 못 나간다고 버티는 거예요. 사람이 그게 뭐냐 하면, 숙달된 겁니다. 그 자리가 내 자리다는 숙달된 겁니다. 숙달이라는 것은 기계만이 나올 수 있는 거예요. 아무생각 없이 그냥 반복할 뿐이에요. 아무생각 없어요. 따라서 우리는 아무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생각 없이 사는 그 생활을 죽고 난 뒤에까지 연장해서 그것을 천국이라고 하면서 교회 등록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총체적으로, 이것은 사기입니다. 다 거짓말이에요. 교회고 뭐고 성당이고 절이고. 본인들이 기계인데. 본인들 자체가 문젯거리인데, 문젯거리 모아 놓으면 거기서 진리가 나옵니까? 안 되지요. 

사도행전 3장 18절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성경에서 제시한 해답은 간단합니다.

이스라엘로 들어오라. 니 자리에 있지 말고 이스라엘로 들어오라. 이스라엘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유일하게 찾아간 민족이거든요.여러분들이 서부영화 보게 되면 그 벌판에, 사막 그 텍사스 벌판에 그 가느다란 철로에 열차 하나가 저 밑에 까마득하게 보이면서 연기 내뿜고 달리는 모습이 상상 될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만이 유일하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어요. 그거는 외롭게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유일하게 보여주는 그 지점으로 열차가 되어 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답은 뭐냐 하면, 자꾸 내 쪽에서 직접 부딪히지 마시고 이스라엘로 들어와서, 이스라엘부터 그 안에 들어와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어떤 식으로 누굴 예언했는가, 그 예언한 자를 찾아야 돼요.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이 타셨는데, 열차에 타셨는데 나중에 자기가 탔던 열차를 부숴버린 거예요. 부숴버리고 그 외형적인 굴레가 찢어지면서 이스라엘을 벗어난
총체적 메시야로서 이방에게 이전됩니다.
혈통적인 아브라함 자손이 천국 간다고? 이제는 끝났다. 이제는 내가 전한 소식을 접하는 사람만이 진짜 이스라엘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천국의 백성이라고 마태복음 8장에 벌써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제가 방금 이스라엘로 들어가야 한다. 일상의 자리 말고. 그냥 기계 반복적인 자리 말고. 이스라엘로 들어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지금 내가 생각한 모든 현실은 이것이 이스라엘에 비하면 황당무계한 가상의 현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접수하라.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떡을 먹을 때, 내가 먹는 그 떡이 떡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게 주어진 모든 삶에 일어난 것이 주님이 우리를 살리고자 하는 그 살려내는 그러한 현장인 거예요. 현장. 따로 종교생활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현장 속에서 우리는 무얼 즐기면 되냐면 절망을 즐기면 돼요. 집 나왔는데, 가스 불 껐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집에 도로 돌아가려니까 기차는 놓치겠는데, 이런 절망.

 

그러면 그 절망의 끝을 생각해 봅시다. 가스가 터졌는데, 집이 홀라당 탔는데, 우리 집만 탄 게 아니라 4층까지 다 탔는데, 그렇게 될 때 나는 완전히 거지 됐는데, 거지 되어서 빚 못 갚아서 교도소 갔는데, 가가지고 못 나왔는데, 거기서 사고 쳐서 사형 당하는데, 그래서 끝. 결국 죽는 거네요. 우리가 결국은, 기계가 해체되는 순간일 뿐이죠. 그렇게 생각할 때, 그것이 전에는 뭐였냐면 염려거리가 되었고, 걱정거리가 되었고, 고민거리가 되었고. 걱정, 고민이기 때문에 거기에다 무슨 주사를 놓았느냐면 임시방편으로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이름의 주사를 기도의 이름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신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은 신을 피하고 싶다는 본능의 발산이에요. 내가 원하는 신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진짜 현실을 현실로 일구어 놓으신 그 현실에서 눈을 떼고 내가 따로 구상한 꿈같은 현실을 강제로, 억지로 이걸 달성해보겠다는 욕심이 진짜 우리에게 다가와 있는, 이미 풍덩 빠져버린 그 현실을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은 비겁한 행동들이죠.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의 해답은 뭐냐, 예수 안에서는 그럴 필요가 아예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는 이미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요. 사람이 신앙생활해서 종교생활하게 되면 내가 좀 더 거룩하냐, 안 하냐, 그저 거룩이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좀 더 착한 일 하면 거룩이 늘어나고 나쁜 일 하면 거룩이 줄어들고 없어지고 뭐 그렇게 되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는 구원이 견고해질 수가 없다는 거예요. 구원이 견고해지려면, 여기 2절에도 나와 있어요. 부르는 모든 자가 거룩하여지고. 견고하다는 말은 6절에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견고케 된다는 이 말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모든 것이, 그 죽음이 한 번 죽음으로 이미 견고하게 바짝 확정이 됐다는 거예요.  따라서 확정된, 고정된 죽음의 효과가 너무나 견고하기 때문에 그 효과로 인하여 우리가 스스로 바르게 살려는 나의 모든 의로움, 견고함을 주님께서는 죽음이 주는 견고함으로 우리를 가까이 오지마라고 늘 떠밀고 내치는 거예요. 그래서 견고한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항상 내가 기대하고 희망하고 내가 바르게 산다는 것이 나의 속에 있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항상 쫓기고 밀리고 추방되는 느낌을 계속 가질 때, 그 사람은 십자가 안에서 견고한 사람이 되고 예수 안에서 견고한 사람이라고 확정되는 겁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이게 실패로 드러나는 기쁨을 우리한테 주신다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하는 일이 성공이라고 여겨버리면 우리는 견고한 주님의 죽으심에서 초점이 어디로 가냐면 내가 전에 해서 이루었던 멋진 성공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그 다음에 그만한 성과가 나지 아니하면 나는 그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견고하다는 말은, 나의 실패가 하나님 앞에 확실함을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그 분명함, 견고함. 그래서 절망을 즐겨야 되고 실패를 받아들이는, 실패가 취미가 되는 생활을 해야 돼요. 애가 100점 맞아 오면서 “엄마! 나 또 수학 100점 맞았어. 나 또 실패했어. 나는 수학 도사라는 그런 유혹을 받을 것 같아.” 그때 엄마가 “그래 조심해라. 조심해. 100점 맞더라도 너는 거기에 매달려서는 안 돼! 잘하고 있어.” 그런 부모 없습니다. “아이고, 내 새끼 잘했어. 다음에는 다른 과목도 100점 맞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100점 맞았다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 이런 식으로 격려해주죠.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이 다루는 비밀이 되어야 돼요. 내가 훤히 아는 내가 되면 안 됩니다. 내가 훤히 아는 나는 이 땅에서 성공하고 행복해져서 남의 부러움을 사고 남한테 기죽지 아니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존재, 신과 같은 존재, 나는 나로서 최고가 되고 나 있음 자체로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신과 같은 존재, 그 존재가 우리 자신입니다. 이게 바로 반복적인 기계 같은 인간이고, 이게 바로 저주요, 이게 바로 비밀이 아닌 사실입니다. 나를 위한 성공, 나를 위한 세상, 우리는 이것밖에 생각할 줄 몰라요. 모든 생각도 그겁니다. 누런 옷 입고 나가면 안 되고 하얀 옷 입고 나가야 된다. 우리는 아무 종교와 관련되지 않고 예수님하고 관련되지 않더라도 타고난 본성입니다. 이게 기계적 본성이고 반복되는 거예요.  나는 절대로 실패하면 안 돼. 왜? 나는 가치 있기 때문에. 나는 가치 있는 인간이야. 내 노동 시간 만큼은 돈을 더 받아야 되고, 임금을 더 받아야 되고, 이 자리만큼은 쫓겨나서는 안 돼. 우리가 하루하루 스물 네 시간 모든 정보와 내용은 오직 나만이 가치 있다는 것을, 그걸 증명해 주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전서에서는 딴 이야기 합니다. “너가 이제부터는 예수의 증인이 되었구나!” 그 증거가 견고해지고 그 증거를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하늘의 선물이 너희에게 찾아 들것이다. 그러면 너는 줄어들고 늘어나는 거룩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 자체에서 이미 거룩의 효과가 온 거예요. 우리를 계속해서 밀침으로써 밀치는 분이 우리 안에 상주해 있다는 것, 확정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님한테 밀리고, 주님한테 꿇어앉힘을 당하고, 주님한테 굴복당하는 생활을 반복함으로써, 우리 가운데 말뚝처럼 주님의 십자가가 꽂아져 있다는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도 비밀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비밀이고, 그래서 성도도 비밀이고, 교회도 비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뻔한 우리의 생활.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모든 생활. 아무 해답도 없이 무작정 희망 만들기에 매진하는 우리의 생활. 그 희망 달성 됐는지 안 됐는지 측정하는 그 재미로 사는 우리의 생활. 왜 죽는지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우리. 주여, 이스라엘을 통해서 오신 메시야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버림받는 것이 죽음이고, 사랑받는 것이 천국인 것을, 새삼 다시 한 번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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