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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댁을 아십니까

아빠와 함께 2022. 9. 29. 09:35

[십자가를 아십니까] 38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예수님의 사랑은 세상과 격리시켜 주는 사랑이다.” 떼어놓는 사랑이다. 세상으로부터 따로따로 분리시키는 사랑인데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하면 격리시키는 사랑, 이 격리시킴 이걸 거룩이라 합니다. 격리라 했으니까 그 사이에 갭이 생기겠지요. 내가 구원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는 그 갭, 계곡, 건널 수 없는 갭gap의 존재를 늘 확인하는 것, 이게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나는 왜 세상으로부터 따로 떼어놓은 대상이 되었는가?

그 떼어놓았다는 말은 내가 떼어놓은 게 아니죠. 그럼 구원이 도피처가 돼버려요. 교회 나온다는 것은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만회할 길이 없어서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위로로서 그 공허한 마음을 메워서 본래 내가 행복하고 괜찮았던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지요.
젊은 나이에 아들이 낚시터에 가서 죽었다. 그럼 그 어미가 산에 묻지 못하고 가슴에 묻는다는 말하잖아요. 가슴에 묻었다는 말은, “내 아들은 살아 있는 거야. 절대로 나보다 먼저 죽어서는 안 돼. 암 살아 있고말고.” 이러한 비현실적인 정신병을 어디서 치료가 됩니까? 이 아픔을 어떻게 해결해야 되겠어요? 뭐 성당에 가든지 교회에 가든지 해서 한풀이해야지요.

그걸 아까도 했지만 극렬한 저항. 네가 뭔데 내 인생 조져놓느냐, 에서 오는 본능적인 반발심이에요. 내 의미체계를 왜 무의미체계로 만들어서 무너뜨리느냐는 극렬한 저항. 그러니까 아들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엄마가 그렇게 상처 받은 그게 제 친척 가운데 있었어요. 그때는 초반의 목회자기 때문에 사정없이 성경말씀 들이대 버렸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이삭 바치는 이야기에요. 자진해서 바쳐도 시원찮은 데 주께서 바치게 했는데 왜 화를 내느냐고. 아이고, 위로 자알 되겠습니다. 그게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너는 네 자식 한 번 죽어봐라. 그런 소리 나오나.” 대번에 극렬한 저항이 나오겠지요.

그래서 주님이 인간들에게 수모당한 것은 그만큼 주님이 인간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거예요. 그 당신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에게.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점잖은 사람인데요. 나도 이제는 여생을 착한 일해서 천당 보겠다고 나선 사람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에요. 그런데 네 애비가 바로, 그게 악마가 시킨 일이에요. 그 착한 일이 악마가 시킨 일이에요.

지옥 가면 착한 일하고 싶은 사람들 다 모여 있어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다 천국 가 있어요. 강도 돼서라도 아직도 살려준다는 나는 강도 안 될 자신 있는 사람은 지옥 갔어요. 같이 십자가 달려서 지옥 갔고, 나 같은 다시 태어나도 또 강도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면 천국 가 있어요. 이게 괴리현상이에요. 도저히 인식의 건널 수 없는 갭을 주께서 주입시킨 겁니다. 그 사이, 틈을 갈라지게 한 거죠.

그래서 사랑이란 강제로, 강제입니다. 강제로 격리시켜 주는 이것을 거룩이라 하는 거예요. 이거는 강제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저 사람 절에 가고 나는 교회 가기 때문에 안 논다. 이 격리는 격리도 아니에요. 그걸 아까 뭐라 했습니까? 그거는 자기 인생을 마음 편하게 하려는 도피처에 불과합니다. 이 도피처를 사람들은 구원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어요. 강제성이 있어야 하는데 지가 좋다고 세상과 결별한 이거는 도피성이죠. 도피성은 종교지요.

이걸 어렵게 이야기해서, 이쯤해서 어려운 것 하나 나와야 돼요. 지가 알아서 도피하듯이 교회 찾고 성당 찾아서 거기서 자연인 되어서 주님 왜 이러십니까?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주님이 내 인생 조져서 엉망 만들어서 그렇습니다, 라고 따지는 것,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연에다 정신 입히기.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것은 대자연입니다. 하나님은 안 보여요. 하나님을 대리해서 자연을 상대로 자기 울분을 다 토로합니다. 주식이 내려간다든지 환율이 오른다 해서 사정이 안 좋으면 관악산 올라가서 야호, 자연을 향하여 자기의 소리 에너지를 거기다 막 공격을 해대지요. 야호! 많이 시끄러울 거야. 나 때문에, 이런 뜻이거든요. 야호!
야호라 하는 것은 사람 이름이 아니고 역시 나는 여기 있어, 라는 뜻이거든요. 풀이가 더 길어. 내가 일방적으로 붙여서. 야호란 말은 나는 여기 존재한다는 뜻이에요.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기 싫은데 공부하라 하니까 오토바이 타든지 드럼을 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나 여기 있다. 더 나쁘게 나가면 마약 한다든지 그런 거죠. “나 여기 있어. 어떤 경우라도 내 세계는 내가 사수할 거야.”

자연은 해와 달과 별은 우리 여기 있는 것 신경 안 씁니다. 누구 말 듣느냐 하면 예수님 말 들어요. 자연은 예수님 말 듣는다는 말은 인간 말 안 듣는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예수님과 인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미 하나님과 인간은 격리된 상태에요. 인간 쪽에선 하나님 쪽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갭을 깨고 인간 쪽으로 수시로 넘나들지요.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뭔 뜻입니까? 나는 하나님께 갈 수 없는데 어떤 연유로 하나님은 무슨 수단이 있어서 어떻게 저기서 내 쪽으로 오는 게 가능하냐? 이걸 바로 공부하고 이걸 탐구하고 그걸 나의 마음의 내용으로 채우는 것, 그게 신앙생활 아닙니까? 이게 신앙생활이거든요. 자연에다 내 정신을 입히는 게 아니라 자연에다 복음으로 입히기.

낭만이란 뭐냐? 낭만이란 것은 일종의 나의 도피처, 나만을 위한 에어포켓을 만드는. 작으나마 내 안에 내가 자연인으로 그걸 순수자아라 하거든요. 순수자아를 얻고자하는 겁니다. 어릴 때 소년이나 소녀들이 순수자아를 많이 사실은 희구했어요. 그걸 원했어요. 순수자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 순수자아 찾던 소년, 소녀들이 지금은 찜질방에 가요. 삶은 계란 먹고 식혜 사 먹고 앉아 트림하고. 배는 다 튀어나와 배는 둥그렇고 누가 이불인줄 모르고 째고. 낭만 다 깨졌지요. 왜? 낭만은 깨지라고 있는 거예요.
애가 다락방의 순수자아를 추구할 때는 걔들이 뭘 고려 못하느냐 하면 내가 늙는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르죠. 경험하지 않는 것은 인간은 인식되지 않는 법입니다. 인간에 인식되는 것은 과거에 이미 체험된 것들이 누적이 될 때 인간은 그게 하나의 인식체제를 갖추게 되는 겁니다. 내가 안다는 것은 내가 경험한 안에서만 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부부라 할지라도 상대를 모르는 이유는 배우자가 살아왔던 그 인생과 아내가 살았던 인생이 달라서 그래요.

예수님이 살았던 것은 언약 안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지가 태어나서 지가 살던 생활세계, 일상의 세계 그게 전부에요.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이게 대화가 되겠느냐 이 말입니다. 대화가 안 되는데 이게 끝에 보면 대화가 돼요. 갭이 있어서 대화가 안 돼야 되는데 어째서 대화가 성립되느냐 이 말입니다.

물론 그 여자는 남자 다섯 명 있었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 사귀지만 그런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그거는 과거 네 인생이고 거기에 대해서 내가 아무 신경도 안 쓰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어디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사는지 관계없이 주님이 살아왔던 약속의 라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라인에 그 여자를 무조건 데려와서 예수님 자신의 증인으로 세우는 게 목적이거든요.

그러니까 직원을 뽑을 때 그 사람이 어디서 무얼 하든지 신경을 안 써요.

지금 이 순간 너는 누구의 비서냐, 누구의 직원이냐, 누구의 계획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냐? 딱 필요한 그겁니다. 인간의 자기 정신은 반드시 자연을 입히게 돼 있지만 이 자연은 누구한데 있느냐? 주님의 언약대로 움직이는 게 자연입니다.
따라서 성도로 하여금 주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자연과 예수님이 이미 한 통속이 돼 있는 이 일상의 변화, 자연의 세세한 변화, 계절 변화부터 해서 모든 변화, 새로운 복음적 의미를 알도록 주께서는 성도를 여기다가 집어넣습니다. 이 사이는 주님의 언약과 주님의 맹세가 작용하고 있어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히브리서 6장 20절에 나옵니다. 한 번 찾아봐야 되겠지요.

히브리서 6장 20절 내용은, 히브리서에 보게 되면 젖을 먹는 사람에게는 납득이 안 된다. 장성한 자라야 납득이 된다는 이야기를 전제로 깔고 나오는 말씀이에요. 보기 전에 잠깐만 하나 더 찾아놓고 설명해드리겠습니다. 6장 20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찬송가에 나오지요.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389장)  앞서 가신 예수께서, 그 뒤에 어려운 말이에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약한 교인들, 5장 끝에 나오는, 젖을 먹는 자는 이걸 이해 못하는 거예요.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13,14절)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의 등장을 납득을 못한다는 거예요. 장성한 자라야 납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을 제가 굳이 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자부심을 의도적으로 심기 위해서, 그래. 나 장성한 자야, 확인시키기 위해서 지금 이 대목을 고른 겁니다. 멜기세덱을 알면 장성, 멜기세덱의 의미를 모르면 이건 젖을 먹는 사람, 이렇게 보시면 된다 이 말입니다.
멜기세덱을 안다는 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멜기세덱이 무엇과 관련된 인물이냐? 맹세와 관련돼 있어요. 맹세와 관련된 인물의 특징이 뭐냐 하면 맹세를 하신 분이 맹세를 이뤄나간다는 그게 초보자들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제가 문장을 하나 쓸 테니까 초보자는 이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만 일하신다.” 이게 신앙 초보자에게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오믈렛 지가 만들고, 화장실 고치는 것도 집사님 혼자 다 고쳐놓고. 전부 다 했잖아요. 분명히 인간이 일을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뭡니까? 하나님도 일하시고 우리도 일하시고, 이게 초보자들의 상식인데 하나님만, only 하나님만 일하신다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목사가 하나님만 일하신다고 한다면 그 교회 돌아가는 것은 끝났지요. 헌금이고 뭐고 하나님만 일하신다. 하나님만 믿어라. 우린 안 할게. 됐다. 청소도 안 하고 아무 것도 안 하고 주일날 화단에 잡초가 있든 백합 심어놨더니 이상한 잡초만 피어나고. 하나님만 일하신다며? 엉망진창이 되리라는 것은 뻔하지요. 왜 그러냐? 그 교회가 한 번도 초보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교회기 때문에 그래요. 이 멜기세덱을 몰라서 그래요.

히브리서 6장 보겠습니다. 멜기세덱 이야기거든요. 6장 13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이야기가 참 어렵지요. 그러니까 초보자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보고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왜 끼어들어갑니까? 하나님이 자기 보고 이야기하면 왜 아브라함을 그 자리에 들어가게 해요? 애들은 빨리 자라, 이렇게 해야지요.
그냥 맹세하는데 아브라함을 집어넣어준 것은, 하나님의 수준 높은 내용을 아브라함이란 낮은 육신에 그걸 담아내기 위해서. 그러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증인되는 거예요. 증인입니다. 하나의 스피커에요. 본인이 지어내지도 않은 이야기인데 본인의 말로 하는 특이한 사람. 세례 요한도 그렇잖아요.

다시 아까 봅시다. 인간의 모든 기억이란 어디서 왔다? 본인이 과거에 살아왔던 자기 의미체계에요. 이러면 백날 예수 믿고 하나님 믿어도 자기 증인되지 주님의 증인될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일을 아브라함을 집어넣으니까 아브라함은 인간이 건널 수 없는 갭을 건너게 돼버렸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아들을 그것도 미운 자식이 아니고 사랑하는 아들을 집어넣는 것, 죽음의 제물로 바치는 것 이거는 하나님이 예수님께 한 명령이지 아브라함에게 낸 명령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걸 아브라함이 해냈어요, 해내지 못했어요? 해냈지요.
그럴 때 하나님이 비로소 네가 나를 믿는 걸 인정하겠다. 네가 나의 맹세의 일원이 된 것을 내가 네가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네가 네 라인 버리고 네 선 버리고 나의 맹세의 특이한 라인에 들어온 것을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그것을 순간순간 찔끔찔끔 보여줄 때 아브라함은 언약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지요. 야곱도 천사와 씨름하는 것 있잖아요.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꿈에 의해서 젊은 청춘을 다 날려버린, 그 귀한 청춘을 다 날렸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요셉은 말씀에 이끌렸다, 이러고 끝나요. 말씀이 응할 때까지, 이렇게 한 마디로 끝났어요. 맹세에 응할 때까지, 주님의 약속이 응할 때까지.

그럼 성도는 뭐냐? 성도의 인생은 창세전부터 너를 건졌다는 그 약속이 응할 때까지 성도는 꼼짝 마라가 되는 겁니다. 자기 인생을 못 살고 뭐든지 내 뜻대로 되는 그런 용납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게 뭐냐? 하나님의 다부진 맹세가 인간에게 한 게 아니고 하나님 보고 스스로 한 그 과정에 인간이 강제로 끌려들어간 거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한 맹세에 아브라함이 강제로 끌려들어갔고 오늘날 성도가 끌려들어갔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성도가 들어갔으니까 증인이잖아요. 증인이죠. 맹세 지키는 주인공이 아니잖아요. 그럼 빼보자. 빼보면 뭐가 남는가? 하나님 남고 여기 상대자가 멜기세덱이 되는 거예요. 멜기세덱에 대해서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어떻게 돼 있느냐 하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3절) 이렇게 돼 있지요.

그러면 이 멜기세덱의 특징은 아까 첫째 시간에 했습니다.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가 돼버려요. 성도에게도 옛날에는 자아가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자아를 없는 걸로 인정해버려요. 또는 매일같이 성도의 자아, 주체를 주께서는 고맙게도 친히 없애버려 줍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자아가 있는 상태에서 예수를 믿으면 자기 도피처가 돼버려요. 자기의 한 맺힘, 억울함, 또 이 땅에 사기 당한 것,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 자기의 슬픔, 자기의 아픔 이것을 하나님께 달라고 요청할 거예요. 요청하나 응답되나 관계없이 그것은 하나님은 자기를 위한 도피처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젖을 먹는 교인들이에요. 이건 멜기세덱이 없어요.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빠져있어요. 하나님의 맹세가 빠져있다고. 그리고 증거 할 때 자기 한 맺힌 것을 증거 하지 주님의 약속은 이것입니다, 라고 증거 할 수가 없어요.

당신은 교인인데 왜 술 먹고 사는가? 내가 교회 다녀도 맺힌 게 많다. 이게 뭔 뜻이에요? 맺힌 게 많다는 말은 뭘 잊지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나의 아픔을 잊지 못하겠다. 아까 그게 자연에 퍼붓는 자기 정신 입히기 아닙니까. 나는 내 인생 맺힌 걸 잊지를 못하겠다. 그럼 복음은? 복음은 잘 알지. 설명해볼까? 주께서 어쩌고저쩌고.
설명을 잘하는데 실생활에 그건 구색에 불과하고, 구색이란 뭔 뜻인지 아시겠죠. 가게를 하는데 손님이 이것저것 찾는데 구색을 갖춰놔야 내놓을 수 있단 말이죠. 누가 찾으면 내놓을 수 있는 지식체계의 일부고 실제 삶은 자기의 한 맺힘, 자기의 슬픔, 자기의 아픔 이것 좀 하나님께서 채워달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맹세와 접점, 그러니까 만남, 만날 때에 그 갭을 건너온 쪽과 만남이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 쪽이고 갭, 계곡이 있어요. 계곡은 천국과 지옥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천국에 간 나사로는 다시 이 세상에 지옥으로 올 수가 없어요. 부자 쪽으로 갈 수 없어요. 왜? 갭이 있어서. 그 갭이에요. 인간의 힘으로 올 수도 갈 수도 없는 갭이에요.
그 갭에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누가 건너왔지요. 몇 명의 천사가 왔습니까? 세 명의 천사가 건너왔지요. 두 명은 천사고 동행인이고 한 명은 주님이고. 주님이 두 명의 천사를 데리고 와서 아브라함을 만나러 왔습니다. 건너왔잖아요. 그럴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여기 부사가 등장하죠. ‘피식’ 웃었더라. 그러니까 이야기한 아브라함은 노골적으로 안 웃고 천막 뒤에서 사라가 피식 웃었어요.

드라마 보면 말 안 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재벌 집의 육중한 문이 다 닫혔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바깥에 잘 들리는지. 드라마에 말 안 되는 게 한둘이 아닙니다. 경찰이 두 명이 움직이는데 꼭 하나가 사고 나고 범인에게 죽고 그러지요. 둘이 같이 하면 되는데. 그러니 천막 뒤에서 천사와 주고받는 이야기를 다 들리거든요. 제가 천막 쳤던 장소에 가봤습니다. 브엘세바라고 이스라엘 가서 봤거든요. 제가 자랑질이 아니고 주의 맹세에 의해서 갔기 때문에 자랑이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브엘세바 벌판에 천막 있으니까 다 들리겠지요. 들으라고 한 거예요. 비웃으라고 한 거예요. 이삭의 이름이 비웃음. 이 말은 뭐냐? 네가 비웃고 내게 돌아오라. 나에 대해서 화내고 비웃고 그때 돌아오라. 그래서 어제 내가 오페라 <네순 도르마>했지요. 나의 모든 수고가 다 끊어지고 그때 돌아와, 이 말이에요. 피식 웃었지요. 오케이. 그게 현재 인간의 모습이에요.

약속은 아브라함이 약속을 지킬 능력이 있다, 없다? 없지요. 피식 웃음 자체가 인간의 모든 살아온 과거와 지금 찾아온 주님과는 일말의 만남의 접점의 공통점도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삭이란 이름으로 증명해냈잖아요. 항상 주의 일은 그렇게 증명해요. 주께서는 네 쪽에서 나를 찾을 수가 없는 일을 일으킵니다. 나의 아이디어나 나의 예상한 일은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너나 잘하세요, 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일에 비웃는다든지, 비웃는 건 너무 노골적이라면 비웃기까진 아니라도 “아니야, 아니야. 그건 말도 안 되지”라는 식으로 의심과 불신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래야 격리가 돼요. 내가 알아서 격리해버리면 구원이 아니고 도피처가 돼요.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되었습니다. 내 아들을 신부로, 목사로 바치겠습니다.” 그거는 구원이 아니고 인생의 도피처에요. 자기의 한 맺힌 것을 얼추 보상받으려는, 결국 내가 실패하거나 이대로 무너지면 나만 바보지, 라는 오기 같은 거예요.
그래서 한 맺힌 사람들이 새벽기도하거나 금요 철야할 때 이거는 아주 무서워요. 쌍시옷이 막 여과 없이 나와요. 욕을 윤석열만 했습니까. 쭈여, 쭈여. 이것 욕하는 거예요. 앞에 주님 있으면 벌써 멱살을 넥타이 다 잡혔어. 흔들어대는 거예요. 한 번 왕래할 때마다 쭈여, 쭈여. 진짜 주님 한 방 치겠어요. 이것 안 되니까 땅바닥을 치면서 울고불고.
그러면 사기꾼 목사 와서 지가 엘리 제사장도 아닌 게 “한나야, 어디 한 맺힌 것 있느냐?” 성경에 나오는 드라마, 에피소드 하나 건드려서, “아닙니다.” “술 먹었구나.” “술 먹은 게 아니고....” “아들이 있으리라.” 아들이 있어도 아들이 지옥 가는 데.

비웃음과 그것을,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도 야곱도 그렇고 언약의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비로소 나 자신을 알게 되었다, 에요. 이걸 사도 바울 같으면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딤전1:15).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이걸 오후예배 때는 네 자로 ‘마스터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내(예수)가 만들어낸 약속과 맹세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든 맹세가 아니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면 되는 거예요. 이게 극단적인 피동성인데요. 이미 맹세는 끝났어요. 그게 뭐냐 하면 멜기세덱입니다. 그러니까 멜기세덱을 아는 것은 신앙이 오는 정상인 사람이고 멜기세덱을 모르면 초보자란 이 말은 뭐냐? 초보자는 자기의 가능성을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고 여기는 사람이고, 멜기세덱을 아는 사람은 나의 가능성을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잘라주시는 이게 바로 내 안에서 맹세로만 작동하도록 그렇게 힘써 조치한다는 게 얼마나 이게 감사할 일입니까?

물만 마셔도 주께서 주신 은혜요, 거봉을 먹어도 다 은혜요, 성심당 오징어먹물 빵을 먹어도 다 주님의 은혜요. 범사에 감사한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고 멜기세덱이 할 일이고 두 분 간에 주고받는 그 일에 말려들었기 때문에 나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유튜버로 돈 벌려고 애를 쓰는데 우리나라에 유튜버로 돈 버는 사람이 0.01%밖에 안 되는데 언제부터 돈이 나오느냐 하면 구독자 천 명 되면 나와요. 그런데 그 많은 유튜버 오십만 명 중에서 돈 버는 사람이 천 명밖에 안 돼요. 그래서 돈 벌려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태풍 오는데 해운대 실종됐어요.
왜 그런 짓합니까? 그 사람이 태풍 바로 찍어서 하려고 했지요. 지가 뭐 박대기 기자도 아닌 게 지가 버티고 싶은데 태풍이 와서 했지요. 그게 맹세에요. 나는 성심당 빵 안 먹고 싶은데 태풍이 불어오네. 성심당 빵 먹는 것도 태풍이고, 먹으려고 했는데 빼앗아가는 것도 태풍이고. 범사에 감사해야지요.

그래서 하나님과 멜기세덱 가운데서 멜기세덱이 보여주는 그 맹세의 끝, 도대체 어떤 경우를 맹세라 하느냐? 이게 바로 두 번 죽음과 두 번 부활이에요. 이건 인간이 못합니다. 못하는데 성도는 안으로 태풍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두 번의 사망을 맞이해서 두 번의 부활로 되는 그런 경우입니다. 물론 두 번마저 죽으면 큰일 나지요. 지옥 가지요. 두 번째 죽음이 뭐냐? 지옥 가는 거예요. 두 번째 부활은 영원히 천국에 사는 겁니다.

왜 두 번일까요? 주님이 두 번 했거든요. 누가복음 봅시다. 아까 인간의 정신으로 어디다 입힌다 했습니까? 자연이죠. 그렇다면 누가복음 2장 27~31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게 자연에다 자기의 정신세계, 자기의 슬픔, 아픔을 입히는 행위입니까? 아니죠. 정반대지요. 이게 자기는 그냥 있는데 자기 앞에 누가 왔습니까?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기 예수를 안고 왔지요. 왔을 때 시므온이라는 이 사람이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 26절에. 성령의 지시란 딴 게 아니고 멜기세덱의 맹세가 내가 하나님 쪽으로 갈 수 없는 갭을 저쪽에서 건너온 사실에 대해서만 성령께서 이야기합니다.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이야기해 줄 사람이 없어요.

“네가 하늘나라에 올 필요 없다.” 여러분 참 오늘 중요한 것 압니다. 빨간 걸로 해볼게요. “너는 구원 받을 필요가 없다.” 세상에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기쁜 소식이 이겁니다. “너는 구원 받으려고 하지 마. 구원 시도하지 마.” 왜? 구원이 네 눈앞에 왔기 때문에. 같은 예수님을 봐도 구원이 눈앞에 온 걸로 보는 것과 내가 저걸 믿어야 구원 받지, 라고 자기 믿음, 구원을 시도하는 것과 이거는 천국과 지옥으로 격리됩니다. 갈라집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님의 세계 안에 들어가면 모세와 엘리야처럼 자기 생각을 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해같이 빛나는 영광스러움에 정신이 없어요.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 지읍시다. 베드로가 돈 계산 안 했습니다. 그냥 그 자체로 좋사오니, 하고 끝내버린 거예요. 왜? 거룩이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는 말은 주님 쪽에서 맹세로 다 이루신, 그것도 멜기세덱이니까 다 이루신 맹세로 정답, 백 퍼센트 완료된 상태를 그냥 내 쪽으로 와서 덮어버렸으니까.
그때 그 당시에 우리는 뭐냐? 사전에 그걸 약속할 때는 비웃었지요. 아브라함처럼. “흥, 쳇 뭐 하나님만 일하신다고? 값없이 구원 받는다고, 값없이? 교회 자알 되겠다, 그래. 교회도 안 되면 구원은 누가 받는데? 소는 누가 키울 거야. 교회 운영도 안 되지.”

목회자들 고민이 뭐냐? 어떻게 교회를 운영해서 이 상태를 유지해서 부동산이나 관리비가 나올 수 있느냐, 물론 내 노후대책과 월급은 나오느냐, 그게 고민이잖아요. 그런데서 ‘값없이’란 말을 못하고요, 하나님만 일하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지요. 왜? 우리 교인들은 너무 말을 잘 들어서 곧이곧대로 들어서 아무 것도 안 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기 때문에 정말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문 닫아야 될 판이죠.
어제 낮 설교하면서 니고데모 이야기가 제가 설교하면서도 정말 재미났어요. 예수님께서 거듭나지 아니한다고 분명히 했어요. 거기에 니고데모가 한글백과사전 해서 거듭남이 뭔지 아무리 찾아봐도 두 번 태어나는 거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어요. 그래서 순진하고 진짜 고분고분한 니고데모는 온전한 인간을 자기가 본 것을 잘 이야기했지요. 너무합니다, 너무합니다.
하늘나라는 가고 싶은데 방법은 이미 정해졌어요. 다시 왔던 데로 다시 와야 되는. 군대생활 두 번은 할 수 있는데 이건 군대생활 문제도 아니고. 거듭나서 다시 군대생활 해야 된다, 이러면 하지요. 늙더라도 하지요, 용병 되어. 이 문제가 아니거든요. 어떻게 하느냐? 못합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못하라고 한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같으면 인간의 일은 구원이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구원의 일은 그거는 악마가 제시한 방식입니다. 마귀의 역할도 커요.

자, 정신을 자연에 옮기는 방법 중에 하나가, 40페이지 보겠습니다. 성만찬. 아까 시므온 보세요. 시므온은 아기 예수만 딱 봐도 이미 자기는 구원을 봤다가 됐지요. 이제 종을 편안하게 놓아주시는군요. 멜기세덱이 오신 거예요. 그냥 맹세의 대상자가 온 거예요. 맹세 완수자가 온 거예요.
그러면 시므온은 그냥 빠지고 저분이 하셨다고 아기 예수가 했다고 증언만 하면 될 문제니까 인생사는 것 참 이제는 편하게 됐으니까 이건 그야말로 만루 홈런 때린 거지요. 인생 살다가 이런 대박도 있구나. 로또 해서 천당 갈 것 같으면 로또 사겠다. 이게 로또 맞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해답은 이미 알아서 해답이 온 거예요. 그러니까 시므온은 뭐 보통 땡 잡은 게 아니지요. 대박 났지요.

그런데 성만찬의 경우 봅시다. 40페이지 위에 있는데,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린도전서11:23~25)
사도 바울이 성만찬을 행합니다. 그런데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신 쪽에서 자기 자신의 기본적인 마음상태를 가만두지 못하고 자연에다 정신화시킨다 하지요. 그러면 앞에 뭐가 있으면 가만있지 못하고 무조건 화풀이 분풀이의 대상으로 삼지요. 그러니까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의 떡과 살을 주니까 이거야, 하고 잡는 거예요.
시므온은 이거야, 하고 잡은 겁니까, 그냥 만난 겁니까? 그냥 저쪽에서 건너온 거죠. 아브라함과 똑같아요. 성령의 지시를 받고 아기 예수를 본 거죠. 아기 예수를 봤을 때 다른 사람은 성령 없는 사람 같으면 뭐냐? 그냥 아기지요. 근데 시므온에게는 멜기세덱이 되는 거예요. 똑같은 원천입니다.

사도 바울이 떡과 잔을 뗐습니다. 뒤에 여러 가지 설명을 붙였지요. 이것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축사하신 잔이니 이거는 포도주로 보이냐? 이거는 피다. 이거는 떡으로 보이냐? 찢어진 살이다, 라고 그것을 제공했을 때 여기서 그걸 먹는 사람은 구원 받습니까? 아니죠. 먹는 사람이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그 뒤에 나옵니다.
40페이지 중간에, “성령이 오시고 난 뒤 교회는 그 버림받은 폐쇄적 사랑을 개방적 사랑으로 전환하여 다시금 회개를 촉구하는 기회로 삼게 된다. 성만찬은 단순히 유다이즘적인 경건한 종교의식이 아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소급성. 일이 다 마무리지우고 내게 일어난 일이 그 원천이 어디에 있기에 이런 결과가 나에게 덮쳤습니까?
더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뭔데 예수님의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로 먹는 사람이 되었고, 도대체 내가 뭐기에 이 떡을 그날 밤 주께서 새 언약 지키기 위해서 죽었던 찢어진 살로 내가 납득이 되면서 이걸 받게 되었습니까, 라는 고백이 일어나게 하는 그런 예식이 성만찬이에요. 어떤 구원 받는 방법이 아니라 이미 구원이 완료돼 끝났어요. 끝났는데 남아있는 게 뭐냐 하면 날마다 자기 자신이 예수님의 증인돼야 될 기능이 남아있거든요.

예수님의 증인되려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상식적으로 일상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격리된 괴리된 다른 세계의 고백과 이야기가 감히 늙어가는 썩어가는 내 몸을 통해서 그게 발설돼야 되겠지요. 그래서 저는 성만찬을 성경이 완료되기 전의 시대에 눈에 보이는 계시로 보는 거예요. 몸으로 체험하는 계시도 있고 또 그 당시에 역시 방언으로, 방언이 살아 있을 때에요. 방언은 하나님의 복음이 담아있는 말을 방언이라 합니다. 사도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으니까 사도들 죽기 전에 방언이라든지 여러 가지 계시들이 있을 게 아닙니까. 통역을 해야 돼요. 방언이라고 다 계시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사도들이 통역해서 사도들이 인정해야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성경이 완료되기 전에 각 교회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유포된 겁니다. 퍼져있는 거예요. 왜 복음이 그때 완료 안 됐는가? 사건이 터져야 계시가 완료되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일어났던 그 일이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용도의 계시로서 성령께서 편입시키면서 그게 하나님의 성경으로 완료가 돼요. 마감이 된다고요. 잡지 마감되기 전에 원고 모으는 작업이에요.
그중에 하나가 뭐도 포함돼 있다? 그 당시에 성만찬이 포함된 거예요. 성만찬에 참석한 사람 누굽니까? 인간들이죠. 그 인간들이 어떤 사람은 성만찬에 대해서 함부로 먹다 죽은 사람 있잖아요. 그것도 다 계시에요. 그 성만찬에 독약 들었습니까? 죄 있는 데도 성만찬 먹고 죽은 사람은 누가 죽였습니까? 여기 있다, 주님이 죽이시는 거예요. 주님이 계시니까.
헌금을 아예 안 했으면 안 죽을 자들이 헌금 반했을 때 헌금 숨겼다고 죽였잖아요. 누가 죽인 거예요? 계시 자체이신 주님이 죽인 거예요. 그러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 하다 죽은 것이 어디 포함된다? 하나님의 계시에 사도행전 5장으로 포함이 된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계시가 완료됐으니까 우리가 행동하는 건 계시가 아닙니까?

우리가 계시에 들어갈 순 없지만 계시에 적용이 돼요. 왜냐하면 그 우리가 아담의 본성에서 행했던 것을 미리 앞당겨서 선배들이 다 했어요. 우리가 한 짓거리를 다 했기 때문에 그 성경말씀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그 자체가 계시 사건으로 계속 살아 있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추가적인 계시가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만찬을 먹고 여기서 내가 어떠한 얼마나 죄인이기에 주께서 피를 흘리기 위해서 건너왔는지 생각하지 않고 아아 이 신기한 떡, 이 신기한 잔을 마시면 구원 받습니까, 이렇게 돼버리면 이건 자연에다 뭘 입히는 거예요? 나의 정신, 내가 구원 받고자하는 욕구를 입히는 거기 때문에 이거는 구원은 도피처, 피난처가 되지 이거는 멜기세덱의 맹세의 적용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만찬은 그 당시 계시 전에 반드시 있어야 되고, 오늘날 성경이 끝난 상태에는 일상의 먹고 마시는 게 전부 다 하나님의 성만찬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여기 살아 있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일거수일투족 움직이는 모든 것이 주께서 건너와서 주의 증인이라고 확인시켜주는 예수님만 증거 하라는 주님의 지시로 여길 수 있는 저희들 마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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