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쪽에 속한 이스라엘 그리고 그 외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원수 마귀에게 속한 민족, 두 패로 나눠서 전쟁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위치는 어디냐? 우리의 위치는 빠지면 되지요.이론상 굉장히 쉬운데 참 이게 안돼요. 하나님 덕 보려고 하기에 우리 자신을 빼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자꾸 나의 전쟁을 하려고 해요. 그러니 이 성경이 복잡한 겁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어떻게 기도하면 응답받습니까, 자꾸 이런 식으로 우리를, 자꾸 치근덕대면서 자꾸 집어넣는 거예요. 복음 이야기가 하나님과 마귀싸움 이야기입니다. 복음 이야기가.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복음 알면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자꾸 치근대면 사람이 짜증이 확 올라오지요. “우리 인간 이야기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가, 복음 아는 사람은 당부해야 되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우리 자신도 ‘아,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구나.’ 낄끼빠빠,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 되는데 낄 때 조차도 우리에게 허락된 적이 없습니다. 끼는 것조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의 눈동자라고 여깁니다. 의도적으로 미끼로, 전쟁의 미끼로, 낚시 미끼로 탁 던져놓은 거예요. 신명기 32장 10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이스라엘을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본질 중에서도 본질에 속하는 그 지점에 이스라엘은 있는 겁니다. 세상 나라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그냥 보통 나라인 줄 알고 약소국가니까, 인구도 별고 없고 면적도 얼마 안 되니까 삼키고 싶어서 달려드는 거예요. 달려들면 이것은 함정에 빠진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손대면 하나님께서 찬스다, 기회다, 해서 그 민족을 “왜 내 나라 내 백성 건드리냐?”는 것을 빌미로 멸망시켜 버립니다. 오늘날 성도의 처지가 바로 그런 처지입니다. 우리 쪽에서 우리가 하나님한테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일속에 자기 백성을 거기다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어 놓고 아슬아슬하게 다루고 있지요.
한 가지 예를 들면 바로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강도 같은 경우입니다. 자, 강도가 죽는 것은 마땅하지요. 왜? 남을 죽였으니까, 살인강도니까 죽이는 것이 마땅하지요. 그런데 그 강도를 누가 천국에 보내는가 예수님이 천국에 보냅니다. 그 강도를, 남의 가정 파탄 낸 강도를, 그러니까 사람들 입장에서는 강도와 예수님을 하나로 묶어서 공분을 살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가 되어버렸지요. 그동안 우리가 천국 가는 원칙, 천국 가는 이유, 천국 가는 정당성, 가장 기본적이고 납득이 되는 그 원리원칙이 예수님 한분으로 완전히 다 파탄 나버리는 거예요. ‘뭐야 이게? 강도가 천국 간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도 강도질 해야 된다는 말이냐?’ 그런 생각 들겠지요. 바로 그런 것을 제자들도 이해 못 했고 그 당시 사람들도 이해 못 했다는 이유는, 지금 이 강도를 예수님의 나라를 가지고 전쟁하는 전쟁의 미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너희가 세상을 보는 안목과 주님이 세상을 보는 안목과 이게 틀린 정도가 아니고 서로 상치되고 있고 대결상태에 있는 거예요. 우리 평소의 삶과 우리의 상식이 예수님과 대결구조, 대립구조로 짜여 있다 그 말입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하나님의 적, 이스라엘을 미끼인 줄 모르고 덥석 물었던 그 적이 니느웨 앗수르입니다, 이 앗수르라는 이 제국이, 뭐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뭐 그리 잘못했기에 망해야 되는가, 앗수르 나라가 왜 망해야 되는가?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들었기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본질을 건드린 거예요. 인간이 알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만 아는, 예수님과 아버지 성령만이 아는 그것을 인간 쪽에서 개코도 모르면서 안다고 치고 넙죽 이스라엘을 건드린 겁니다.
인간들이 이스라엘을 건드릴 때 이유가 있어요. 그 나름대로 원칙이 있다고요. 그게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는 겁니다. 그걸 자화상이라 하는데 늘 인간은 매일같이 자화상을 그립니다. 집에 초상화는 없지만 증명사진은 다 있지요. 내 사진입니다. 여권 사진. 니느웨의 문제점, 앗수르 제국의 문제점은 내 나라 내 민족을 강건하고 든든하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앗수르 민족 국민들, 백성들 우리 몫이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철기문화로 힘 키워서 그들이 강대국이 되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세상에서는.
그런데 성경은 달리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의 생각은 앗수르 생각이에요. ‘힘이 있어야 나라가 강대하고 강대해야 남의 나라까지 점령할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앗수르의 번창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모든 중심이 눈동자 이스라엘 중심이에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주변에 힘을 모으고 키우도록 주께서 부추겨 줬다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는 그들이 앗수르라는 나라가 제국이 되기까지는 그들이 노력했다.” 이게 인간 역사에서 하는 이야기에요. 역사학에서 이야기하는 거고요. 그걸 당연한 걸로 여기고.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앗수르 나라를 키워줬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걸 오늘날 신약 입장에서 말을 바꾸어서 이야기하게 되면 “강도가 강도질해서 사형당하는 것은 자기가 나쁜 짓 해서 그렇다.” 세상에서는, 세상 역사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죄지었으니까 체포되어야 되고 체포되어서 사형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이 세상을 빠져나오는 방법이 그 방법 밖에 없었다.” 와~, 완전히 완전히 달라요. “너는 강도질 해서 사람 죽이고 빠져나오너라.” 지금 이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충격이지요. 세상에서는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 세상이 너무 범죄가 많고 사기꾼도 많고, 그리고 자연재해도 많고 전쟁도 있어서 정말 살기 힘듭니다. 도와주세요.” 이것은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 종교나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네가 살기 힘들다고 불평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뻐개지는 맛을 덜 봐서 그렇다. 이 세상에는 살인이 있어야 되고, 폭력이 있어야 되고, 사기꾼이 있어야 되고, 탐욕이 있어야 되고, 전쟁이 있어야 되고, 그래야 네가 이 세상에 대해서 손을 놓고 미련을 거둘 것이다. 그래야 그 나라 그 의만 바라볼 것이다. 이걸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조성했다.” 이게 성경 이야기에요.
그래서 기도하면서 불평불만하고 짜증 내는 것은 아직 죽을 맛을 덜 봐서 그래요. 배불러서 그렇다는 거예요. 진짜 큰 고통 속에 있다면 어지간한 것 가지고 불평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이걸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필요조건은 뭐냐? 이것은 죄인입니다, 죄인. 그런데 죄인 된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 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에요. “저 죄인입니다.” “죄인이야? 잘됐다. 지옥이나 가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죄인 되었다고 해서 그거 구원되는 것 아니에요. 충분조건은 뭐냐 하면, 그 당사자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희생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때 그때 그 사람 속에 구원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수님의 죽음, 하나님의 죽음에 동참시켜야 이게 이스라엘이 구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의도적으로 앗수르나 바벨론 이런 제국에 의해서 멸망 당하고 파괴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유는 이게 충분조건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받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죽음에 동참하고 참여시키는 방법이 그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은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덮치게 해요.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덮치게 하고, 큰 힘을 키워서 덮치게 하고 그다음에 그 덮친 앗수르를 예수님이 덮쳐버리면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구원되는 겁니다. 앗수르한테 덮치게 해줘야 이스라엘이, “내가 구원받아야 됩니다.”라는 말을 더는 못 하거든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앗수르를 대단히 좋아했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나라한테 당한 거예요. 성도가, 교인이 세상이 너무 좋아서 세상한테 사기도 당하고 당하는 겁니다. 세상이 너무 좋았어요. 너무 좋아서 세상과 함께 망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세상 좋아하라고 부추긴 겁니다. “네가 그리 좋아하는 세상한테 배신 한번 당해봐라.” 이런 거지요. 참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는데 이런 것이 어려워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사야 7장에 이 어려운 이야기가 죽 나와요. 하나님께서 남쪽 유다왕 아하스한테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네가 나를 믿나?” “믿습니다.” “믿으면 나에게 징조를 구해라.” 그렇게 하니까 아하스왕이 “제가 뭐 징조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11, 12절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든지 높은데서든지 구하라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게 오늘 나훔 1장 9절에 “너희가 여호와를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너희가 여호와를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왜 나한테 이런 사태에 대해서 묻지를 않느냐?” 그런 뜻입니다. “주님이여, 그다음 조치가 뭡니까? 그 다음 순서가 뭡니까, 왜 묻지를 않느냐?” 그 말입니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묻지를 않았습니까? 삐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삐졌어요. 하나님 열심히 믿고 교회 다녔는데 되는 일이 없어요. 아주 심하게 삐져버린 겁니다.
그런데 원래 삐져야 돼요. 이게 삐져야 내가 구원받을 권리가 있어서 구원 받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런 극단적인 최종지점까지 몰아세워서 그 지점까지 가야 돼요. 내가 구원받을만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그 지점까지 가야 돼요. 내가 구원받을만해서 구원받지 않는다는 그 지점은 뭐냐? ‘나 이제 하나님하고 안 놀아.’ 하는 그걸 솔직하게 자인하는 그 순간, 다시 말해서 내가 그동안 믿은 것은 ‘뭔가 믿게 되면 얼추 뭔가 생기지 않을까? 요행이라도 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다리면서 믿었는데 ‘미쳤지. 내가 미쳤지. 믿을 것을 믿어야지. 믿은 내가 바보지.’라는 그 지점까지 주께서 데려가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안 돼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주님하고 사기 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아 나한테 징조를 원해라.” 아하스왕이 “나는 징조 구하지 않습니다.” 뭔 뜻이냐 하면, “내 인생 내가 꾸려나가고 내 인생 내 소박하나마 내 힘으로, 대단하지는 않지만 내 힘으로 가난하지만 이대로 저는 사는 게 제 성격에 맞습니다.” 징조를 구하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인생을 만드는 당사자는 나기 때문에, 나는 내 자아상을 내가 귀하게 보기 때문에, 내가 만든 인생을 내가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은 뭐냐? 나라는 것을 없애려고 합니다. 나라는 것이 없어지는 그 판에 인생은 무슨, 인생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지요. 성경에서는 인생 자체가 없어요. 인생 자체는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 끝 모습, 마지막 사라지는 순간을 죽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인생 자체가 없어요. 지금 있는 듯 보이지요. 그건 덜 사라져서 그래요, 덜 사라져서. 연극 할 때는 무대에서 연극배우가 침 튀겨 가면서 대사하고 성의껏 연기하지요. 연극이 끝난 후에 연극의 막이 내려면 거기에는 텅 빈 무대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얼마 안 남았어요. 한 30년 남았습니까? 너무 심하게 많이 남겼나요? 사라져 없어요. 인생 자체가 없는데요. 왜 우리는 고집을 부리는지 몰라요. 사라지는데 안 사라지려고 붙잡고 있다는 게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악마는 인간을 속이고 있는 거예요. 되지도 않는 구원을 구원시켜 준다고 교회 만들어놓은 거예요. 어떻게 이게 돼요, 안 되는데!
주께서는 그냥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고 물속에 집어넣어 버려요. 물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구원, 꿈도 꾸지 말라고. 네 주제 파악도 못한 채 무슨 구원이 되느냐는 말이지요. 징조를 구하라는 말이지요. 네 구원 생각하지 말고 징조를 구하라.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아하스는 징조를 안 구한다 했어요. “저까지 귀찮게 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래가지고 안 구한 거예요. ‘뭐 하나님이 주시면 주시는 대로 받지 뭐.’ 굉장히 겸손한 척, 믿음이 있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게 아니고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 임마누엘이 뭐냐 하면 이사야 8장 8절에 나옵니다.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징조를 주는데 그 징조가 처녀가 아들을 낳아요. 처녀가! 인간의 육의 혈통은 끝났습니다. 인간의 육의 혈통으로 태어난 것은 안 받습니다. 처녀로 태어나야 돼요. 처녀로 태어나지 않은 것은 안 받습니다.
그런데 그 징조를 징조답게 하기 위해서 여기에 누가 들어가느냐? 7장 18절에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그러니까 이집트 이걸 날파리, 앗수르를 땡벌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 역사에 관여해서 그들로 힘을 비축케 하는데 그 힘을 비축한 힘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비축하느냐 하면, 자기 백성들을 더욱더, 물속에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집어넣는데 앗수르 이집트 이런 나라들을 활용하시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앗수르는 천하에 자기가 최고의 제국이라고 으스대고 뻐기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인류의 역사관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들이 와서 이스라엘을 칩니다. 이사야 7장 20절에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주님께서는 앗수르를 이발소에 가면 날카로운 칼 있잖아요, 삭도, 칼, 그 칼로 사용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야말로 구원에 대해서 아예 거의 절망적인 곳으로 밀어넣어 버립니다. “구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인간에게 구원은 없어.” 그쪽으로 밀어 넣는 일에 앗수르를 동원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앗수르가 온다는 것이 어디에 포함되느냐? 주님께서 처녀로 아기를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로 하라는 그 징후의 절차, 과정 속에 앗수르, 바벨론, 이집트, 이런 나라를 집어넣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러면 그 집어넣는 과정 속에 이사야의 자식까지 있습니다. 이사야가 결혼을 했는데요, 아내하고 동침을 해서 자식까지 낳았습니다. 그 자식 이름이 8장 1절에 보면, 자식 이름이 좀 어려워요, ‘마헬살랄하스바스’ 이름을 왜 이렇게 짓는지 동방삭으로 짓든지 오래 살라는 그런 식으로 안 짓고 ‘하나님의 노략. 이방인들의 강탈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이름의 자식을 낳아요. 이사야의 자식은 개인적인 자기의 정체성이라든지 개별성은 일체 용납이 안 됩니다. 아버지 직업에 기여하라고 자식 낳은 겁니다. 아버지 직업에. 아버지 직업이 뭐냐? 주님의 계시 받은 거잖아요. 자식도 본의 아니게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아버지 계시를 뒷받침해주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노략을 하는 거예요. 강탈, 약탈을 하는 거예요. 뭔가 가지게 되면 아직 숨통을 트고 있는 거예요. 뭔가 가진 마지막 숨통을 완전히 질식시켜 버리는 겁니다. 일체 가진 것이 없도록 강대국 앗수르를 키워서 노략질하게 만들 때 그 앗수르가 어떻게 하느냐? 이사야 8장 7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유다에 들어와서 유다의 모든 것을 덮어버려요. 덮일 때에 그게 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편만하다. 어떤 것 하나 앗수르의 그 잔인하고……, 앗수르가 제국 가운데 가장 잔인한 제국이에요. 포로 잡혀갈 때 애들이 힘이 없으니까 걸음이 좀 느리잖아요. 느리게 간다고 애를 바위에 집어던져서 죽여버리는 게 앗수르군대에요. 그리고 앗수르가 어느 나라를 침공하면 귀족들의 코와 코를 꿰어서 꼼짝 못 하게 자기 나라로 끌고 가서 다 죽여버립니다. 말살해버려요. 도살하는 거지요. 인간의 잔혹함과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 앗수르 제국입니다. 한번 점령했다 하면 그 지역의 주민들 다 싹쓸이 했어요. 몽골의 징키스칸 비슷하게 다 죽여버렸어요.
그것을 이사야 8장에서는 편만(遍滿)이라 해요. 8절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으로 인해서 생긴 그 잔인함 학정 폭력 횡포를 두고 편만, 어느 빈틈도 없이 좍 깔아놓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임마누엘로 보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앗수르 중의 한 악한 자가 이 일을 꾸미고 들고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11절) 놀라운 사실이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앗수르로 하여금 덮치게 만드는 거예요. 빈틈없도록. 이스라엘 유다 할 것이 없이 빈틈없이 다 덮치게 해놓고, 그렇게 덮쳐서 어느 하나 숨통 없도록 만들어 놓고 그 덮친 것 위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가 그 덮친 위에 덮쳐버립니다. 완전히 말타기 게임이지요. 가위바위보! 하고 있는데 뒤통수 쳐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오셨다는 그 말은 예수님 이전에 이미 임마누엘이 있었어요. 잔인함의 임마누엘, 지옥 형벌의 임마누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죄인만 있는 임마누엘, 모든 것이 편재되어 있고 편만한 임마누엘이 절차상 먼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징조입니다.
그래서 어떤 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임마누엘로 오시기를 바라느냐 하면, 세상에 대해서 일체 당해내지 못하는 것을 소원으로 삼는 사람, 세상한테 이길 생각은커녕 세상한테 된통 당하고 질 생각만 하면, 세상에 사기당하고 질 것만 생각하면 너무 기뻐서 환장하는 사람, 도대체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주님에 대해서, 주님의 임마누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 이런 사람, 그걸 아주 쉽게 잘 아는 문자로 이야기하면, 요새 문자로 많이 이야기하는데, 문자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어차피 못 먹을거 찔러나 보자. “주여, 이 세상 어차피 내 것 아닌 거 주께서 확 찔러버리세요.” 일체 세상에 대해서 어떤 희망을 안 갖는 그 즐거움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집의 아내가 코로나 걸렸다. 성경에 보면 아내와 남편은 한 몸이라 했잖아요. 나도 어서 걸리기를 소원하는 사람. 일부러 마스크 안 쓰고요. 이게 우리 남편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함께 당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 바로 강도 아닙니까?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그 강도. 자기는 남의 가정 파탄 내놓고, 사람 죽여놓고 얼마나 낯짝 두껍게 ‘주님, 주님 나라 임하실 때, 천국 갈 때 저 생각해달라.’고 이런 발언을 하, 이런 발언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점핑하는 거예요. 그걸 뛰어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인간들, 철학박사, 신학박사, 과학박사, 그런 시시하고 무식한 이야기를 완전히 뛰어넘은 거예요. ‘너희 이런 것 몰랐지? 너희 백날 해야 이런 것 몰랐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한테요 구하는 것은 그거에요. 7절부터 13절까지 이야기는 덮친다는 이야기에요. 덮치는 이야기. 이 덮치는 이야기를 제가 쉽게 했는데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입증책임’이라는 게 법조계에 있어요. 입증책임이라는 게 뭐냐 하면, 형사사건에서는요, 피고보고 네 죄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라고 하지 않아요. 반드시 기소하는 검사가 입증책임이 있고 민사에서는 원고쪽이 입증책임이 있어요.
먼저 법정에 소를 제기하고 시비 거는 쪽이 증명을 해야 될 책임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가 세상을 볼 때 뭘 보느냐 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내가 왜 이 세상을 심판해야 되는지 그 입증책임을 하기 위해서 벌인 일로 간주할 때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왜 이 세상은 불로 심판받아야 되느냐, 라는 것을 예수님이 먼저 증명하는 식으로 세상 모든 일을 일으키고 있다는 그것을 같이 동감할 때 그게 성도입니다.
세상이 망해야 될 이유를, 주님 쪽이 검사니까, 심판주니까요, 그걸 입증해 나가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내 아들 죽였으니까 너 각오해라.” 이거 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게 얼마나 인간이 들으면 억지스러운지요?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출애굽할 때 애굽의 장자를 왜 죽이느냐 하면, 흠 없는 어린양을 죽였다고 애굽의 장자들 다 죽였어요.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흠 없는 어린양 중심으로 일하는 데, 장차 오실 예수님이지요, 흠 없는 어린양 중심으로 일하는데 애굽 너희들은 왜 모르느냐? 바로 그 의미를 모르는 애굽 너희 장자 내가 다 죽이고 그 의미를 아는 히브리인들은 제각각 문 앞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잖아요. “저 봐! 쟤들은 알잖아. 어린양의 피의 의미를 알잖아.”
그러니까 이것은 애굽나라에서는 얼토당토않은 덤터기를 씌움을 당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모르는 문제를 출제하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모르는 문제를! 그런데 그게 하나님 자기 입증이에요. 세상은 예수님 중심입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게 통일돼요.
이런 이야기가 세상에서는 먹혀 들어가겠느냐? 터무니없는 이야기지요. 세상은 인간중심이지 예수님 중심이 아니거든요. 주님 뜻은 이거에요. “네가 만든 너라는 인간과 하나님이 만든 예수님과 누가 진실이고 누가 생명이고 누가 길이냐?” 하나님은 “내가 만든 예수님이 진짜 인간이고 나머지기는 가짜다.” 이걸 입증해 나가시는데 앗수르와 이스라엘을 동원시킨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모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하는 일이 너무나 터무니없이 들리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마귀한테 사로잡혀 살아간 그 이유 때문인줄 압니다. 우리에게 성령 주셨으면 이제 눈을 떠서 세상 편이 아니라 주님 편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