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문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비로소 구원의 문이 되신 거예요. 현재 눈에 보이고 존재한다고 우기는 것들은 오히려 문을, 있는 문도 가려버리는 거예요. 어떤 목사 훌륭하더라, 어떤 성도 어떤 집사 훌륭하더라. 이것은 비워 있어야 할 자리를 그 인간이 땜질하는 겁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이야기는 내가 바로 주의 문을 지금 가리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저 어때요?’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명 없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 그 자리에서 치워 버려야 돼요. 그러면 치우는 방법이 뭐냐?방법은 주께서 알아서 다 챙겨줬습니다. 시편 41편 9절을 제가 보겠습니다. 참 인생을 살면서 이 말씀처럼 정확한 말씀이 또 있을까요?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럴 때 아멘, 나와야 돼요. 누가 배신하는가? 가까운 사람이 배신해요. 가까운 배우자로부터 해서 가까운 자식, 부모, 친구, 바로 내가 가깝게 지내는 자가 나를 배신하는 겁니다.왜 그렇게 하느냐? 주께서 배신하라고 가깝게 해주신 거예요. 왜 그렇게 배신하느냐? 내가 나를 배신을 안 하거든요. 이러니까 문제가 된 거예요. 자꾸 세상은 더럽다, 악하다, 하면서 나 자신은 계속해서 나는 나에게 신뢰하는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악하고 독종인지를 우리 자신은 그걸 애써 부인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를 좋게 보니까 자꾸 동정심을 유도하는 겁니다. ‘나 동정 받아야돼, 나 사랑받아야돼.’ 본인이 악한데 뭘 동정을 해줘요? 우리는 우리를 배신을 안하니까 주께서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배신하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해요. 우리는 배신당해도 쌉니다. 마땅하지요. 배신당했다고 불평할 가치 없어요. 오히려 배신당함이 다행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세상에 대해서 더 이상 기대나 미련을 갖지 않을 거거든요. 주님께서는 배신 당한분으로써 찾아오십니다. 그게 바로 사울에게 찾아올 때 그렇게 한 겁니다. 몇 번 이야기 했지만 또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지금 율법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자신도 모르고, 자아밖에 모르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그들도 천국 갈 수 있느냐? 그걸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거예요. 사울에게 찾아갈 때 사울을 배신자로 간주해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게 네 본성이고 마귀로부터 온 사명이 뭐냐?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 그게 마귀로부터 온 사명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요구르트병 거꾸로 하듯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놨어요. 좋은 게 나오는게 아니고 배신하는 그 속성, 근원적인 본질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배신 아닌 경우가 없게 만들어버려요. 배신 아닌 경우가. 그래서 궁극적으로 가룟유다처럼 내 자아의 양심, ‘나는 나를 지켜야 돼.’ 자아 지키기 위해서 애썼던 그 가룟유다 가는 그 길, 저주의 길과 전혀 다른 길로 지금 사도를 이끄십니다. 자, 이끄는 방법에 대해서 좀 난해하더라도 참아줘야 돼요. 거의 마지막이나 좀 참아주셔야 돼요.
인간이 관찰한다는 게, 인간의 자아는 인간의 관찰에서 나왔거든요. 관찰해서 자기가 상상해서 거울 보거나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상상한 그것이 나의 자아가 되거든요. 그래서 내 자아를 확인하기 위해서 거울도 보지만 자꾸 남들을 가까운 친구로 만들어서 “친구야 너 나 어떻게 생각해?” 말로 묻기도 하지만 딱 만나보면 알잖아요. 자꾸 사람들 만나는 것은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좋게 생각하느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럴 때 외롭지 않고 쓸쓸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다시말해서 쉽게 해서 남들을 만나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 싫어서 만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그냥 낯짝만 있기는 싫다는 거예요.
관찰을 할 때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설탕을 커피에 넣었더니 설탕이 커피 안에서 녹았다.’ 설탕을 커피에 넣었더니 설탕이 커피 안에서 녹았다. 그 말하고 ‘설탕을 커피에 넣으면 설탕이 커피 안에서 녹는다.’ 이 말이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다시 할게요. ‘설탕을 커피 안에 넣었더니 설탕이 커피 안에서 녹았다.’ 이 말과, ‘설탕을 커피 안에 넣으면 설탕이 커피 안에서 녹습니다.’ 이 말이 완전히 대비되는 반대되는 말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관찰하는 존재기 때문에, 나를 관찰을 통해서 규명하고 정립하는 존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설탕을 커피 안에 넣었더니 설탕이 커피 안에서 녹는 것은 내가 눈으로 관찰이 돼요. 그런데 그걸 원리로 삼아서 ‘설탕을 커피 안에 넣으면 설탕이 반드시 커피 안에서 녹는다.’ 이것은 나중에 자꾸 미루어지는 거예요. 나중으로 미루어지는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고, 어렵지만 중요한 이유가 되느냐 하면, 같은 제자인 도마는 요한복음 20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도마가 예수님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고 하는 말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28절에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찰을 넘어서는 거예요. 나의 관찰에서 나온게 아니고 나, 자아를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릴 때 뒤에 남아 있는 것, 주님이 하신 일 주님의 사명이 남아 있지요. 주님이 하신 일은, 네가 관찰해서 증거를 모은다고 해서 나를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너의 죄악의 한계다, 그 말이지요.
기껏 “하나님을, 예수를 믿을테니까 증거 주옵소서. 믿을만한 증거 주옵소서. 그거 수집해서 믿습니다, 하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전형적인 불신자에요. 가룟유다가 그렇게 살아갔던 겁니다. 똑같은 제자인데 예수님의 죽으심, 예수님이 창에 찔리고 못에 박힌 그것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당신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이야기하는거예요.
이럴 때 도마는 자아가 날라가 버렸어요. 나의 증거, 나의 관찰, 거기서 생긴 나, 자아라는 자체가 더이상 지킬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았어요. 주님이 내 자아를 대신하는 겁니다. 그걸 대신 죽었다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의 대신 죽음 앞에서 나의 죽음은 이제 시시한 문제에요. 그것은 문제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에 구걸할 필요도 없어요.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그걸 신앙이라고 하고 오늘 본문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 디모데전서 1장에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15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죄인을 구원하는 겁니다. 인간은 없습니다. 죄인밖에 없어요. 이미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생명나무 못갑니다. 나의 관찰을 믿지 않는 거예요. 나의 신앙, ‘50년, 60년 믿었다.’를 믿지 않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행한 것을 믿지 않는 겁니다.
친구. 나한테 배신당할 친구가 아니라 먼저 배신당했던 친구로써 후차적으로 찾아오시는 거예요. 요한복음 15장 13-15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인간의 자아는 배신할 때까지만 친구에요. 일가친척, 가족은, 배우자는 나를 배신 안 할 때만 남편이고 아내고 자식이에요. 부모가 돼요. 그런데 항상 배신은 유보적이에요. 언제 배신할지를 모르니까 갈 때까지 가보는 겁니다. 이제 배신당하고 난 뒤에는 울고불고 하면서 ‘꽃순이를 아시나요’ 이러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내가 한평생 어떻게 어려운 인생을 살았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굳이 그걸 알아야 돼요? “네 인생이나 내 인생이나 똑같이 죄인 중에 괴수인데 왜 동정받으려고 해? 왜 자꾸 너 동정받으려고 해? 꽃순이를 아십니까. 피나 알아라, 인간아. 피를 알아?”
주님은 이미 배신을 당했어요. 그리고 목숨을 버렸습니다. 모르는 것은, 내가, 네 자아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걸 알려주는 겁니다.
관찰은 주님이 관찰하는 거예요. 주님의 관찰이 믿어지는게 믿음이에요. 내 관찰을 믿는게 믿음이 아니고 주님께서 “너는 죄인 중에 괴수다.”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몰랐잖아요. 내가 가룟유다인지 몰랐잖아요. 내가 내 양심 지키고 내 가치 지킨다고 그게 주님의 배신으로 돌아갈지 몰랐잖아요. 사울이 그걸 몰랐습니다. 자기 딴에 율법 지키면 천당가는 줄 알았지요. 여호와 잘 믿으면 그것이 구원인줄 알았고, 그것이 배신인줄, 이땅에 오신 주님에 대한 배신인줄 몰랐지요. 갈라디아서 2장 21절 중요하니 다시 읽어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주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헛되지 하지 않기 위해서 죄인 중에 괴수인 우리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우리는 몰랐지요.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그런데 우리가 그걸 알게 됨으로써, 성령으로 알게 됨으로써 십자가의 사명이 구원되고 십자가가 살아나는 겁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오직 십자가만 살아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남 앞에 잘 보이는 자아 되기 위해서 얼마나 더럽게 살아오고 있습니까? 잘났다, 자랑질하기 위해서 아닌 척하면서 얼마나 위선 떨었습니까? 왜 그렇게 힘들고, 그렇게 무게 나가고, 스스로 괴롭게 하는 어리석은 생활 하는지, 이제는 그것 깔끔히 청산하고 십자가만 크게 자랑하는 사명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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