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주님 주시지않으시면 새로운 것이 없음을 날마다 헌 것을 내놓으며 고백하는 사람

아빠와 함께 2022. 8. 14. 00:23

천국을 갈 것인가 지옥을 갈 것인가 그 효력은 새 언약에 있다. 그것은 동의한다. 그런데 그 효력을 실제 21세기, 이미 2천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자동적으로 효과가 나오는 그 장치는 어떤 장치인가, 사람들은 그게 궁금한 거예요. 그게 왜 궁금하지요? 그 효과 받으면 본인은 천국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글쎄 그게 ‘물질의 정신 화’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새 언약의 취지를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런 겁니다.

 

모른다고 장담하는 당신의 그 근거가 뭐냐고 한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이유가 물질의 정신화하겠다는 그 집단에 의해서 죽었어요. 유월절을 반복하면 구원받는다, 그 집단에 의해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겁니다. 목요일 밤이 유월절 밤이지요. 무교절이라고도 하는데 목요일 밤에 제자들이 모였어요. 심지어 가룟유다까지 포함된 열 두 제자까지 모아놓고 예수님께서 빵을 각자에게 다 나눠놓고 먹으라고 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빵 하나를 쥐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빵이 없어요. 빵을 떼어서 줍니다. “내 살이니”라고 하면서 주지요. 너의 행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들이 먹는 떡은 일종의 분점 같은 것이고 본점은 예수님이 갖고 있어요. 본점에 대한 지점의 관계에요. 내 떡이니 너를 위해서 찢어지는 내 살이라고 하시면서 떼어 주고, 그 다음에 포도주를 따라 주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이렇게 했어요. 이 자리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변하지 않는 특징은 뭐냐? 예수님이 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구원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얼마나 모이고 얼마나 훌륭한 목사가 집례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셨느냐 하는 겁니다. 그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마가의 다락방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묘동이라는 이 동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집에 가면 구원 못 받고 교회 와서 성만찬 참석해야 구원 받는 것도 아니에요. 오후 2시 예배는 안 되고 11시 예배는 된다는 그것도 아니에요. 사찰 집사가 하느냐, 목사가 하느냐는 그것도 아니에요. 예배당의 어떤 질서와 구조를 잡는 것은 물질의 정신 화의 일종입니다. 일시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인간의 치열한 노력이에요. 종교라는 것이 그거예요. 일시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신에게 떡밥주고 뇌물 주는 거예요. ‘받아먹었으면 설마 나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신에게 뇌물, 어떤 제물을 바침으로서 신이 거기에 걸려들게 만드는 겁니다. 떡밥이죠, 떡밥. “아무도 안하는 헌금 내가 했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은 나를 섭섭하게 하지 마세요.” 그런 뜻이에요. “아무도 세우지 않는 이 예배당, 이 처소 세우고, 그리고 선교 헌금 제가 했잖아요. 그러니까 저를 섭섭하게 하면 안 됩니다.” 심지어 어떤 선교사, 어떤 수도자는 신을 자기 손아귀에 쥐기 위해서 고안해 낸 방법은 이겁니다. 신이 고생한 것보다 더 고생을 많이 하는 거예요. 일부러 문둥병 환자들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신이 고생한 것보다 더 많은 고생을 하는 겁니다. 뭔 뜻인가 하면, 신조차 못한 일을 본인이 해내는 거예요. 예를 들면, 자기는 천국에 갔는데 딸은 지옥에 가 있어요. 엄마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신이 하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신이시여, 이 천국의 입주권을 제 딸을 위해서 포기하겠습니다. 저는 지옥에 가고 지옥에서 고생하는 딸을 천국에 보내는 식으로 바꿔치기 합시다.” 말려도 안 됩니다. 딸은 천국 보내고 자기는 지옥 가겠다는 겁니다. 이 거룩한 사랑, 내리사랑, 희생적인 사랑, 이것도 신도 못할 사랑입니다. 그것까지 구상합니다. 그것까지 구상하는데 사실은 마음으로는 누구도 그런 구상을 다 하기 마련이에요. 자기는 천국에 갔는데 사랑하는 자식이 안 왔다 해 보세요. 천국의 삶이 그게 돌멩이 씹는 기분이지 그게 행복이겠습니까? 그게 만족스럽겠어요? 차라리 내 한 몸 희생해서 딸만 잘된다면 나는 지옥 가서도 행복하겠다, 이런 마음들을 능히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물질의 정신 화라는 겁니다. 내가 진짜 어떤 마음을 품은 것을 모르는데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보고, 신학을 하면서 ‘그래, 내가 원했던 것은 바로 이런 상태야.’라고 성경구절을 이용해서 정작 내속에 품고 있던 정신적인, 그 최종적인 형식을 어렴풋이 신의 이름, 예수 이름으로 자아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신봉하는 거예요.

 

이런 짓을 한 선배가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유월절 목요일 저녁 잡수시고 그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다가 체포되어서 금요일 아침까지 가야바에게 있다가 아침 일찍 본디오 빌라도의 관저로 가서 재판받습니다. 그리고는 아침 아홉시에 십자가에 처형당해서 6시간동안 산채로 매달려 있다가 오후 3시에 운명하시고 무덤에 묻히십니다. 그리고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새 언약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인간이 흉내 낼 수 있는 성만찬이 아니라 인간이 아무리 해도 흉내 낼 수 없는 반복에 의해서 효과가 나옵니다. 그게 여호와의 밤이에요. 출애굽기 12장 42절에 나옵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여호와의 밤이라. 시간에 관한 문제입니다. 포도주스 준비하고 카스테라 준비해서 하는 그것, 저도 많이 했습니다. 참 많이 했어요. 그런데 누가 해도 그 여호와의 밤을 재현할 수 없습니다. 반복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개입시킨 밤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밤만 평생토록 겪어 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밤은 그런 밤이 아니에요. “토요일은 밤이 좋아.” 그런 밤이 아닙니다. 그 밤은 언약에 의해서 반복되는 밤입니다. 그 밤의 언약(출12:42)의 시작은 어디냐? 창세기 32장에 나옵니다. 야곱이 형과 대치해서 마지막 최후의 결전을 벌입니다. 얍복강에서 죽으면 죽겠다는 심정이죠. 형에게 일단 뇌물을 주고 만약에 형이 만약 그걸 거부한다면 형이 죽든 내가 죽든 해보자. 형은 저주의 원천이고 나는 축복의 원천이니까 야곱이 기어이 살아남아서 자기 복을 대대에 전수하겠다고 다짐을 하고 얍복강에서 버티고 있는데 밤에 낯선 자객이 등장했습니다. 형이 보낸 자객이라 여기고 야곱은 죽기 살기로 안 죽고 살아보겠다고 싸웠습니다. 난투극이 벌어졌지요. 그것이 야곱의 씨름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게 낮이 아니고 밤입니다. 상대방의 정체를 몰라요. 21세기의 오늘날 우리가 예수가 구원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원한다, 성령이 구원한다, 성경에 나오는 문자를 동원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정작 우리가 구원받기 위한 그분의 정체를 우리는 몰라요. 이름이 지저스인지 예수인지 둘 중 어느 것인지 몰라요. 히브리말로 해서 예수아인지 몰라요. 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어라 하는 것은 떠나고 난 뒤에야 붙여지는 이름이에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내 쪽에서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름의 의미란 어차피 내 쪽으로 귀환됩니다. 그래서 상대방으로 귀환되는 의미는 내 쪽에서는 모르게 되어 있어요. 나를 비난하고 가버리면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합니까? “너 잘났다!” 하면 갑자기 잘난 사람이 돼 버려요. 그런데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을 내가 나한테 이야기하는 것이지 그 사람 등에다 백날 해봐야 본인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항상 물질의 정신화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구원하면 될까, 를 내가 납득하고 내가 이해하고 내가 반복해서 행할 수 있는 범위를 내가 주워 모아요. 고물상 폐품 주워 모으듯이. 전부 다 고물들입니다. 나에게 의미가 되는 것 들, 누가 버리라고 하면 못 버려요. 내가 일곱 살 때 쓴 일기장이다, 이러고 못 버려요. 전부 다 자기에게 의미되는 것만 모은 거예요. “한물 간 원피스 이제는 버리지?” “안 된다. 이건 내 남편이 사 준 거다.” 전부 주워 모은 것은 나의 물질의 정신 화, 그걸 볼 때마다 옛날의 정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념될 만한 것들만 모아놓은 거예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에게는 의미가 있는데 나에게만 의미가 있지요, 나에게만. 그것은 구원의 효과가 없어요. 구원의 효과, 능력은 주님 쪽에서 나타나야 돼요. 내가 이름 붙이는 예수, 내가 이름 붙이는 여호와, 삼위일체, 그것은 백날 해봐야 소용없어요. 저쪽에서는 누군지를 몰라요.

 

누군지는 모르는데 그분이 쳐들어오게 되면 갑자기 졸지에 나는 낮이 아니고 밤이 되어버립니다. 여호와의 밤, 인간에 소속된 낮과 밤의 그 밤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개입한 그 밤. 그 밤은 그 다음에 낮이 되더라도 밤으로 규정받을 수밖에 없게 하는 하나님의 개입, 침입, 그게 여호와의 밤이에요. 야곱은 “나는 살아 있다. 나는 더 살아야 돼. 나는 가치 있다.” 이것 때문에 싸웠습니다. 나중에 해 뜰 무렵 보니 자기가 싸운 분이 자기에게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죽이고자 했던 겁니다. 왜? 나의 가치를 사수하기 위해서. 결국 나의 가치를 사수하고 내 의미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나와 적이 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하나님, 그게 야곱이 경험했던 진짜 하나님이에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시고 살을 줄 때에 그것은 그 날 밤, 그동안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반복적으로 지키던 물질의 정신 화에 끼어드신 거예요. 제자들은 의미를 몰랐습니다. 제자들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도 의미를 몰랐어요. 오늘 본문을 가지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옛날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떡과 잔을 주시면서 새 언약을 세우신 그 날을 기념하자. 기념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지.” 이걸 공재설(共在說)이라 합니다. 성만찬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떡이 예수님의 살이고 이 잔은 주님의 피가 된다. 천주교에서는 “이 떡은 예수님의 살이다.” 동격으로 봅니다. 개신교에서는 “이 떡은 성령이 임하면 살이 된다.” 살이 된다(Become), 변형설을 이야기합니다. 둘 다 오늘 본문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론을 펼치고 있는 겁니다. 물질의 정신 화를 계속 반복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살과 피를 기념하게 하신 이유가 뭐냐? 우리 자신이 배설물이라는 거예요. 배설물이라는 것, 뭔가 안에 꽉 차 있는 게 뭔가가 외부에서 밀고 들어왔을 때 그 밀고 들어온 효과로 인하여 기존의 귀하다고 여긴 것들이 구차 없이 빠져나가야 돼요. 우리가 뭘 행함은 모든 것이 배설물이어야 돼요. 그래서 교회 나오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이런 것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주님이 계시니까 그것이 나오기 마련이에요. 배설물이라고 한자로 하니까 좀 느낌이 좀 덜 오는 것 같은데 똥이에요, 똥! 똥오줌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의,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 그 대목입니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밀어낸다는 것, 선교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성만찬하고, 새벽마다 성경 읽고, 뭐든지 하세요. 그 한 그것이 주께서 밀고 들어온 결과물로 ‘아, 이런 것들이 내 속에 꽉 찼구나.’ 하면서 그것이 빠져나오게 하면서 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라는 이 덩어리 자체가……, ‘배설물은 빠져나오고 나는 깨끗하다.’가 아닙니다. 나 덩어리 자체가 배설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왜? 나의 현장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옛날에 우리 집에 고모, 삼촌 다 합해서 열 세 식구가 함께 살았어요. 대구시 비산동 141번지 대성초등학교 앞에서 살았는데 우리 삼형제에 대한 삼촌들의 핍박이 말도 못했어요. 한참 숙제하고 있는데 삼촌 친구들이 와서 발길로 차면서 “나가, 나가!” 방은 하나 밖에 없으니까 삼촌이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는 “나가, 나가 놀아!” 우리는 쫓아내고 삼촌 친구들이 방을 차지하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는 삼촌 핑계대고 놀러가고. 주님께서 쳐들어오면 우리는 하던 것을 쫓겨난 상태에서 해야 돼요. 바깥에서 예배하고, 바깥에서 십일조하고, 바깥에서 선교하고 전도한다고 바빠요. 그런데 그것은 구원의 자리가 아니에요. 이것은 이미 내 중앙, 내 중심을 주님이 차지해서 이미 구원했음을 보여주는, 그래서 이런 것으로는 구원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배설물로서 평생 동안 무슨 꼼지락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예배당 짓고 넓히고 하는 그 모든 것. 주님의 침입이에요. 미키마우스 만화에서 미키마우스가 쥐잖아요. 고양이에게 쫓깁니다. 얼마 도망도 못가요. 분수대위로 도망을 치는데 마침 분수가 솟구쳐 올라왔어요. 그 물줄기위에 미키마우스가 올라가고 고양이는 그걸 쳐다보고 있어요. 미키마우스는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그저 있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미키마우스처럼 주님의 새 언약의 분수, 솟구쳐 오르는 물줄기 위에 우리를 딱 두는 겁니다. 물줄기가 잦아들면 우리는 또 회사가고, 장사하고, 그렇게 하지요. 거기서 나 자신의 정신 화, 나는 이렇게 위대하다는 것, 일시적이 것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 “주님, 뭘 또 해드릴까요? 밑밥 뭘 던져드릴까요?” 이러고 있는데 주께서 다시 분수위에 올려놓으면 맨 그 자리에서 또 발 구르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포지션이에요, 포지션. 구원의 포지션, 그게 새 언약이에요. 구원의 물줄기, 그 지점에서 내가 평생 하는 이 모든 것, 전직 대통령 죽는 것도 포함해서, 대통령 하든지 말든지, 사나 죽으나 관계없어요, 모든 것들이 전혀 내 영원한 영생과 멸망을 결정하는 기준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내가 무슨 짓거리를 해도 그것은 내 구원에 상관없는 짓거리를 하는 거예요. 소용없는 짓을 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데요. 그 이유가 뭐냐? 유대인들은 철저히 말씀 위주로 간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철저히 말씀 위주입니다. 바리새인의 경우는 “말씀을 생활화하자.” 그것을 구호로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말씀의 생활화, 말씀은 문자가 아니라 우리 생활로, 실천으로 나타나야 되고 그야말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걸 외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떤 행위를 통해서 내가 개과천선할 수 있는 구원방식은 마귀 적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우리는 썩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지 않고 우리가 아직도 뭔가 의미 있다, 가치 있다, 그래서 이것을 불교의 중들처럼 도를 닦으면 괜찮은 것으로 수리되어서 반짝이는 빛나는 것으로 되어서 다시 내 것으로 소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물질의 정신 화에요. 자동차 광택 내듯이 내가 광이 난다면 어떤 것도 아끼지 않겠다는 타고난 죄악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을 보기에는 정말 자기들 일에 초치는 경우로밖에는 안보인 거예요.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십자가사건입니다. 십자가분수에요. 그 십자가 분수가 오늘날 우리에게 반복해서 일어나게 되면, 예수님은 내 인생 초치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예수님을 반대했던 그 모든 사람들은 나의 변형체에 불과합니다. 바로 내가 주님을 반대한 겁니다. “내가 위대해지고자 하는데 네가 뭔데 방해하느냐? 교회 와서 인간 한 번 되어보겠다는데 네가 뭔데 나를 방해하느냐?” 그러면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네가 뭔데?”

 

야곱은 그날 밤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대신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줬는데 그 이름 안에는 축복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시작한 것이 야곱이라면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신약 때의 성도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새 이스라엘’이라고 해요.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사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한평생 나에게서 발현되는 모든 것들은 시작한 주님에게 중심자리를 제공하고 우리는 쫓겨나고 버림받아야 될 옛 나의 모습이 현재의 평생의 껍데기 같은 우리 인생입니다. 돼지껍데기만 껍데기가 아니에요.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것이 껍질에 불과한데 이게 서서히 죽어갑니다. 물론 갑자기 죽는 사람도 있고 차에 치어죽는 사람도 있지만, 혹은 80까지 살면서 늙어죽는 사람도 있지만 하여튼 죽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껍질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입는다고 했습니다. 그 작업의 혜택을 이미 입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날마다 자기 안에서 예수님의 개입이 반복되는 사람, 여호와의 그 밤이 반복되는 사람입니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새사람이라는 겁니다. 네가 생각하는 진선미를 총동원해도 파악이 안 되는 정말 새사람이라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새사람인가? 내가 하는 모든 것은 구닥다리인 것을 알게 할 정도로 새사람이에요. 뭘 내놓고 뭘 행해도 내가 행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강제로 하게 하셔서, “이게 바로 네 안에 들어 있던 배설물이야. 이게 악마의 찌꺼기야.”라고 내놓는 그 모든 것을 주님의 의미로 파악하는 그 사람이 새사람입니다. 주님의 반복, 주님의 반복되는 그 시간, 이것이 그 날 밤의 반복이에요. 떡 안 먹어도 괜찮고 잔 안 마셔도 괜찮고 성만찬 있으나 없으나 상관 없습니다. 뭘 해도 우리의 남은 평생을 “주여, 이것이 주에게 대들었던 그 찌꺼기입니다.”라고 내놓으신다면 그 능력은 여러분의 손을 넘어서는, 여러분 스스로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살아계신 주님이, 야곱에게 찾아왔던 그 주님이 여러분에게 찾아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줍지 않게 종교적인 흉내 내면서, 모방하면서 죽어서 좋은데 가기를 소망한 우리의 이 모습이 얼마나 개인주의적이며 이기적인 사랑이며 자기가치에 의지한 마귀적인 존재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주옵소서. 주께서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음을 날마다 헌 것을 내놓으면서 고백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내 생각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 체험  (0) 2022.08.15
우상숭배 하지 않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다  (0) 2022.08.15
새언약의 반복이란 예수님의 시간의 침입  (0) 2022.08.13
투명한 무지개다리를 건너  (0) 2022.08.11
씨와 밭  (0) 2022.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