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했다는 말은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자기소유로 만들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것도 아닌 빈터에 주어지게 되면 그 약속 때문에 태어나야 될 사람이 따로 있고 생산될 사람이 따로 태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혈육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약속에 의해서 태어나는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달라요 ‘네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크게 오해했다' 하나님이 있고 그 다음에 약속을 주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먼저 주어지면 약속 안에 생소한, 생각도 못한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들어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전부 다 사기입니다. 그것은 성사될 수 없는 이야기예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자기궤도가 달라져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 인생 망쳐놓았으니 책임지세요.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됩니까?’라고 따지기 위해서 교회 왔다가 어느 순간에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을 받아버리면 ‘아,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구나.’라고 알 때 그 사람의 인생궤도가 달라져요.
그 궤도가 달라졌는데 옆 사람이 그것을 보면 미쳤다고 해요. ‘너무 못 먹어서 영양실조 때문에 머리가 완전히 돌아버렸구나.’ 하도 못 먹어서 헛것 본거지요. 옛날 동화에 그런 것이 나왔던가, 어떤 사람이 보이는 길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공중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어요. 꼭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E.T영화에 나오는 외계인처럼 공중을 향하여 자전거를 타고 가는 거지요.그런데 자전거라는 것은 보이는 길을 따라서 타고 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상식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전거를 타든 걷든 공중을 가게 되면 그 사람은 길이 없는 공중을 걸어가고 있는 겁니다. 나중에 보니까 거기에 길이 없는 것이 아니고 길이 나 있는데 그게 투명한 무지개다리였어요. 그 투명무지개 다리가 ‘착한 사람에게만 대여함’이라고 되어 있어요. 나쁜 사람은 그 길에 없어요. 착한 사람만 그 길을 가고 있어요. 궤도를 이탈해서 보통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니고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데 그 궤도가 뭐냐, 언약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말씀대로 산다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책임 하에 있는 제자와 하나님의 책임 하에 있는 백성 같으면 주의 말씀이, 주께서 그 사람보다 고집이 더 셉니다. 우리는 타고난 육적성향이 있어서 평범한 길, 돈만 있으면 갈 수 있는 여유 만만한 그런 길을 가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는 ‘그쪽 아니다.’ 해서 엉뚱한 길로 가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길이 아닌 곳을 가는 거예요. 공중을 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궤도를 이탈한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죄는 죄가 아니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먼저 죄라고 지적해 놓고, ‘죄구나’라고 알게 해 놓고 그 다음에 그 죄에 대해서 용서를 해줘요. 이해되십니까? 우리가 양심적으로 아는 그런 죄는 이스라엘에게는 죄 축에도 안 들어갑니다. 이방인들이 죄를 다 끄집어내서 ‘주여, 저는 이런 죄가 있고 이런 죄가 있으니까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연기를 하는 것이지 언약하고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죄를 아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바늘처럼 쑤시고 들어올 때 비로소 죄를 아는 거예요. 다윗 같은 경우에 무슨 죄냐, ‘나는 주께만 범죄 했다.’는 거예요. 일반인들이 보면 간음죄, 살인죄지만 다윗은 ‘오직 주께만 죄를 지었다.’ 합니다. ‘처음부터 내가 죄인인줄 모르고 왜 애초에 내가 잘난 인간인줄 생각했던고. 처음부터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을 안 한 그것이 바로 죄였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주께만 범죄 하는 존재로 태어난 그 사실을 모르는 그것이 죄였다는 겁니다.
먹고 살기 점점 힘들어지면서 자기 몸 둘 곳도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이 살아가는 이 방나라, 이 사람들에게는 그 나라 의를 구할 수도 없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도 없는 겁니다. 결국 오늘 이 말씀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수님 빼놓고는 이 말씀대로 산 사람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인가? 예수님 한 분만 구원받고 다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인가?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나옵니다. 스데반 집사가 성령을 받게 돼요. 이게 핵심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 예수님의 영을 받았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영을 받게 되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투명한 무지개다리를 건너면서 궤도를 이탈한다고 한 것처럼,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 안에는 하나님의 완성된 언약이 다 들어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된 그 능력으로 성령이 오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한 그 것이 온전하게 그냥 우리에게 사랑으로 담겨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가되느냐, 뭐든지 그냥 받기만 한 사람이 돼요. 스데반 집사의 경우 그 사람은 성령을 자기 노동으로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성령을, 천국 가는 것을 자기 노동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면 단지 성령이나 천국만 노동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나머지 모든 육적인 것까지 하나님께서 성령을 받아내는 하나의 바구니로, 발판으로 밑받침으로 미리 다 주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는 지금 그것에 대해서 걱정하는 나 때문에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깔아놓고 받아내기 위해서, 새로운 갓난아기를 받는 포대기 같은 역할로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의 그 모든 것을 주시고, 또 노동할 수 있는 이 힘, 이 모든 것은 진짜 보물을 받아내고 거기에 안치하기 위해서 주께서 깔아준 거지요.그것이 예수님의 영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받아내는 포대기로 우리를 사용하는 거예요. 솔로몬이 좋은 옷 입었습니다. 솔로몬이 철이 없을 때는 자기 옷 자랑했을 거예요. ‘너 복 받았나?’ ‘복 받았다. 이 옷을 봐라.’ 하지만 주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들풀이 솔로몬의 그 귀한 옷보다 더 영광스럽다.’ 했지요. 그것이 뭐냐, 풀의 경우에는 모든 DNA부터 세포 하나하나 전부 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겁니다. 그 풀잎 하나, 그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까지 다 하나님 것인데 솔로몬은 자기 더러운 몸 따로 있고 그 더러운 몸을 가리기 위해서 입은 옷, 그 정도……, 무슨 똥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똥이라는 그 정도 가방……, 그 정도, 그거 하나는 주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가 노동해서 소유했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들풀과 게임이 안 되지요. 들풀은 속속들이……, 우리가 들풀이 되면 우리가 베어지는 그것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위험한 발언이 나옵니다. 우리 힘으로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주께서 은혜를 주셔야 죄를 짓는데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주의 말씀에 의한 생산물입니다. 그 나라 의는 생산자도 필요 없고 판매자도 필요 없고 소비자도 필요 없어요.생산된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듬뿍 드러냅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그 나라 의, ‘주여……’, 인간 바깥에 있는 그 주의 세계가 궁금해야 됩니다. 그 나라가 궁금해요? 그냥 주기만 하는 나라, 우리는 그냥 받기만 하는 세계, 그런 세계가 어떤 나라인지, 그 세계는 무엇을 근거로, 주고 또 주고 무엇을 근거로 계속 주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희생, 예수님 자신의 사랑, 예수님 자신의 다 이루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를 하나의 포대기로 삼아서 이 허접스러운 우리의 모습,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죽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 하지만 이런 어설픈 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의 위대함, 강도도 창녀도 세리도 천국에 너끈하게 들어간다는 그 위대한 능력은 우리가 상상도 못하고 오직 예수님 혼자서 만들어서 주신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증거 하는 이 땅의 생산물이고 그것을 증거 하기 위한 주님이 만든 상품이에요. 그 때 우리 속에 주님의 새 언약, ‘다 이루었다.’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다 피어나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완전히 돌은 것예요. 정신 나간 거예요.
‘거기는 길이 아니야. 그리로 가면 안 돼.’ 하지만 우리도 가고 싶어 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말씀으로 이끌어 주니까 내가 가진 것 보다, 별로 가진 것도 없지만 주님께서 거저주신 그 사랑과 용서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것을 스데반집사처럼 목숨 바치더라도 증거 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돈 다발 주신 것도 아니고 비싼 옷이나 구두를 주신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것은 피요 자기 찢어진 살인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죄가 있는 자는 천국에 못 들어가기에 죄가 뭔지도 모르는 자를 죄 알게 하시고 그 죄마저 다 씻어주는 희생을 대신 치렀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거저 얻었사오니 이 귀한 보석 같은 영생을 보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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