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씨와 밭

아빠와 함께 2022. 8. 11. 14:39

‘너희들은 광야에서 인간이라는 것을 포기를 해줘야 된다.’ 하는 겁니다. 광야라는 것이 그냥 땅만 광야가 아니고 인간도 광야가 되어야 해요. 같이 광야, 하나의 바람 부는 모래가 되어줘야 합니다. 그 광야에는 사람이 일체 없어야 됩니다. 사람이 일체 없어야 주님께서 만나라는 말씀을 주셔서 광야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을 새록새록 만들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거예요. 인간은 하나도 없고 흙덩어리밖에 없는 그 광야의 과정 속에서 주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끄집어 낼 때 그 인간은 전에 있던 인간은 아니에요. 전에 있던 인간은 인간을 위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새로 만든 인간은 인간되게 하신 분을 증거 하는 새로운 인간입니다.

흙인데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에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고 동거할 수 있는 그러한 놀랄만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진 인간으로 광야에서 새로 제조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만나는 옛날 애굽에서 먹던 그 음식이 아닙니다. 애굽의 뷔페식당에서는 절대로 만나가 안 나옵니다. 거기에는 만나라는 음식이 없어요. 김밥 옆에 탕수육, 그 옆에 잡채가 있는데 거기에 만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맛보았던 음식은 일체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음식을 제공하느냐, ‘너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야. 너는 더 이상 인간일수가 없어. 너는 죽어야 돼. 너는 흙이야. 네가 인간이라고 우긴다면 내가 너한테 건네줄 양식은 일체 없어.’  신명기 8장에 가면 만나를 음식이 아니라 말씀이라고 했지요. 말씀인데 겉모습은 마치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모양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소화기능에 결합되도록 먹을 수 있는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 말씀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너희는 나를 원망했었다. 원망을 계속 했었다.’가 재료로 포함되어 있는 양식이 하늘나라 주방장에서 천사들이 만들어서 준 것이 만나에요. 그것을 탁 깨보면 그 안에 ‘너희들은 끊임없이 나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가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저 괜찮은 밭이지요.’ 라고 나서지 마시고 그 따위 소리를 하지 마시고 밭은 그냥 침묵으로 일관해야 돼요. 수동적이에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밭은 그냥 씨가 왔을 때 말씀이 왔을 때 밭도 미처 알지 못하는 자신의 본연의 색깔이 등장합니다. 그 색깔과 개성과 특징들이 씨와 마주치면서 새롭게 돋아나지요. 어떤 밭이 어떤 밭인지 그 밭은 다 똑같아요. 똑같은데 씨가 일단 오게 되면 씨가 갖고 있는 색깔에 변색이 일어나면서 나만의 고유한 색깔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흰 백설기 한 가지 색깔로 하지 않고 형형색색으로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씨가 씨 답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 씨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30배, 60배, 100백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밭들로 인하여 이 예수님 씨가 얼마나 큰 고초와 희생과 어려움을 당했는가를, 예수님 자신의 고난당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밭들이 필요한 거예요. 이단들과 지옥 가는 사람들이 필요한 이유는 주님이 그들에게 혼나고 되게 시달림으로 말미암아 그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옥판결이 얼마나 합당한 판결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밭들이 필요한 겁니다.

 

 



유대인들은 전부 다 생각이 뭘 로 하나같이 뭉쳐져 있느냐?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을 지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건강한 밭이고 옥토 같은 밭이 되었사오니 이제 말씀만 하시면 무럭무럭 열매는 자라납니다.’라고 자부심을 대단하게 갖고 있던 그들이에요. 그런데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하면 8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네 종류의 밭이라는 아이디어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세계에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아이디어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씨가 떨어져야만 네 가지 색깔의 백설기로 나눠지는 것처럼 밭의 속성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외부에서 씨가 주어지지 않는 이상은 인간과 인간들끼리 비교해서 어찌되었든 단결할 수 있는 요소를 다 끄집어냅니다. 그 비교 기준이 기껏 해봐야 인간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기준을 뽑아냈다는 그 말입니다. 제가 외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겁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을 잘 믿고 못 믿는다는 그 기준이 어디서 나왔다는 말입니까? 인간들의 양심에서 나온 거예요. 그 놈의 양심이 발목 잡는 거예요. 우리의 양심을 도끼로 잘라버려야 됩니다. 양심 안 잘라내면 그 사람 천국에 못갑니다. 오늘 제가 과격한 말을 합니다. 이 이야기 하고 제가 독일 가고 싶습니다. 그 양심이라는 것이 뭔지 알아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에, 씨가 등장하기 전에 인간은 기껏 비교하는 것이 자기보다 더 착실하게 사는 사람, 테레사 수녀랄지 손 양원 목사랄지, 주 기철 목사,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 자꾸 눈에 보이는 인간들을 가지고 비교를 하는 거예요. ‘나는 못났는데 저 사람과 가까이 갔으니까 나는 더 훌륭하다.’ 그게 바로 들을 귀 없는 인간들, 볼 눈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씨를 봐라. 씨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봐라.’ 씨는 밭을 네 종류로 일방적으로 나눠버렸습니다. 씨가 떨어지기 전에 밭은 서로가 서로끼리 비교하다 보니까 공통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어요.네 가지 밭이 아니고 한 가지 밭이에요. 어떤 밭? ‘말씀을 지키면, 양심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밭. 이구동성으로 윤리 도덕적인 것, 그 기준으로 전부 다 하나가 되고 말았어요. 그 밭 밖에는 없습니다. 거기서 최전방에 선 사람이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입니다. ‘주여, 저 허접한 세리와 창기들 저런 것들은 저 뒤쪽에 있으니까 주께서 오실 때 우선 경건하기 짝이 없는 우리 쪽으로 오셔서 저쪽으로 빠지게 하옵소서.’ 이런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예수님도 인정한 바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해서 주님께서 그 당시의 구조와 질서를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를 하고 있었어요.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성화주의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 그 동네에서 놀았던 사람들이에요. 다 그 속에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한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제가 이야기했지요. 대구의 모 교회에 있을 때 그 교회 담임목사가 교회 올 때 양복입고 오라고 해서 한여름에 여름양복이 없으니 겨울양복 입고 왔다가 떠 죽는지 알았습니다.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한 거예요. 그렇게 시키는 대로 하니까 그 양복을 입고 왔다는 그 나라는 밭과 양복을 안 입고 남방 입은 저 밭과 우열을 비교해서 내가 신앙에 앞장선 밭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기본적이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서 선악과에서 일치되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럴 때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이고, 이 근호 청년선생은 착하기도 하여라. 우리는 저 사람 신앙 못 따라가.’ 어쨌든 못 따라가지만 같은 밭이잖아요.

이미 그는 한 종류라고 여길 때 주님께서 씨를 뿌릴 때 그 씨에다 ‘한 종류가 아니야. 네 종류야.’라고 내세우는 거예요. 그 네 종류의 밭을 구분할 때 그 열매 맺는 한 종류의 밭 말고 나머지 세 종류의 밭은 거기서 반발, 반발력이 나옵니다. 숨어 있던 반발입니다. 내가 양심대로 살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가운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저주시는 예수님의 씨 안에 들어 있는 용서와 사랑을 반발하고 모독하는 힘으로 작용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아주 강력하게 반발해요. 왜냐하면 그런 양심이 없으면 나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참을 수 없는 무관심. 만약에 그렇게 살아가는 내가 이것은 인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러면 나라는 것은 뭐냐,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참을 수 없는 무관심으로 대한다면 그동안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 봉사한 그 값은, 그 보상은 어디서 찾습니까? 찾을 길이 없잖아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때려죽이고 싶은 거예요.  

세상에, 그것이 복음을 욕되게 하고 그것이 복음을 저항하는 악마적인 생각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인간이라는 밭은 자기가 아무리 옥토가 되려고 스스로 시도해도 이 세 가지, 마귀가 와서 말씀을 가져가는 것, 두 번째, 사람이 심한 고난 받아버리면 하나님이고 예수고 나발이고 다 없다고 하는 것, 세 번째, 사람이 갑자기 여유가 생기면서 사업도 잘되고 부자 되면서 형편이 피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눈 돌리는 것, 이 세 가지의 힘을 이 썩어빠진 이 밭이 버텨낼 수 있습니까? 못 버텨 냅니다. 결국 이 세 가지 밭을 배치한 것은 ‘인간이 아무리 양심껏 바르게 해도 너는 그보다 더 센 힘인 고난과 세상의 육신의 안목인 유혹과 악마의 힘으로부터 눌려 있는 상태다. 그 눌려 있는 상태가 이 세상이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가 성경말씀 지키겠다고 철야기도하고 기도원에 가서 나무뿌리 뽑았다고 해서 그것이 뽑혀집니까? 백날 기도해 봐야 주님께서는 아주 참을 수 없는 무관심으로 일관해 버립니다. 주께서는 ‘제발, 제발 너라는 몸을 그냥 황토 흙으로, 들을 귀 없는 그 몸을 흙으로 만들어버리고 봐도 모르는 그 눈을 박살내 버려라. 아예 시체가 되고 황토 흙이 되어라.’는 말이지요.  

 

어차피 70년 살아봐야 우리는 진흙 되잖아요. 인간의 아담이라는 몸 자체가 어차피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이길 수 없는 힘이 대기압처럼 인간을 누르고 있다는 것을, 그 누르는 힘을 모르고 있어요. 모르는 상태에서 기껏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최선을 다하여, 열심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맨 날 최선을 다 하래요.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누적이 돼요.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이만큼 했다 하는 그것이 마일리지 쌓이듯이 누적이 되는 거예요. 그 누적된 것은 반발로, 하나의 용수철로 작용을 해서 복음 전하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그렇게 비난을 하고 말이지요. 네 번째 밭은 그냥 멍청한 밭이에요. 자기가 옥토인지도 몰랐지요. 자기는 옥토가 아니니까요. 옥토라 하는 것은 씨가 갖고 있는 네 가지 기능 중에서 한 가지 기능, 옥토 될 밭에 열매를 맺는 기능이 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씨 안에 있다는 거예요. 씨가 밭을 만남으로서 밭이 옥토의 밭으로 돌변한 겁니다. 그렇게 할 때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나도 모르는, ‘나는 창세전부터 옥토 되어야 될 밭이구나.’ 하는 것을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때 비로소 노출되고 비로소 발현되는 겁니다. 외부로 형상화되어서 드러나는 거예요. ‘당신은 어떻게 열매를 맺었습니까?’ ‘몰라요. 다만 주께서 말씀이 임해서 그랬습니다.’ ‘말씀이 임했다는 그런 겸손한 소리 말고 당신이 기도해서 고난을 이겨냈잖아요.’ ‘아니요, 고난 못 이깁니다.’ ‘마귀를 쫒아냈습니까?’ ‘마귀는 나보다 더 셉니다.’ ‘그러면 세상 유혹을 이겼습니까?’ ‘유혹이라면 저는 환장하는 인간입니다.’ 어떤 것도 우리 힘으로 세상을 이겨서 주님 말씀 받아서 열매를 무럭무럭 맺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원래 ‘너는 옥토이어야 하는 밭’이에요. 옥토의 특징이 뭐냐, 씨가 씨만의 능력, 만나, 새로운 피조물 되는 그 모든 천국의 복음은 오직 예수님 안에 내장되어 있지 내 안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나는 그냥 수동적이었습니다. 그냥 나는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움직이신 것은 농부께서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저쪽과의 차이 남을 알지요. 저쪽을 바라보면서 ‘나는 훌륭하다.’가 아니라 ‘나도 저랬는데, 나도 마귀 들렸었는데, 나도 고난을 못 이겼었는데, 나도 힘들 때 베드로가 세 번이나 하나님을 부인했듯이 그렇게 하나님 욕하고 돌아섰었는데, 나도 세상 유혹에 정신없이 빠졌는데. 이제야 내가 구원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냥 자기가 만들어놓은 밭에 내가 알지 못한 채 숨겨놓은, 나에게 이러한 소식이 있는 줄을 미처 나도 몰랐던 그 속성을 말씀이, 복음이, 십자가 피가 와서 바깥으로 활짝 만개하도록 하는 조치를 평생토록 이끌어내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사람은 ‘천국이라 하는 것에서 씨와 밭이라는 용어를 참 잘 사용하셨습니다.’라고 공항에서 피켓의 의미를 아는 거예요. ‘세상은 밭이고 나는 씨다.’ ‘맞습니다. 이제 이해합니다. 우리는 수동적인 밭일뿐입니다.’라고 받아들이죠. 다른 인간들은 ‘우리가 죽었나? 우리가 지금 펄펄 살아서 우리가 할 수 있는데’라고 나오겠지만 주님께서 피켓 들고 ‘내 말씀은 옥토를 옥토 되게 하고 세상을 심판하는 권한은 밭에는 없고 나한테 있다.’고 외칠 때 ‘맞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심판주입니다.’라고 그 사랑을 반길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지키기 위한 말씀이 아니었고 사실은 모든 말씀, 모든 율법은 움직이는 율법인데 곧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이었고 모든 말씀이 그 예수님 한 몸을 위해서 그 한 몸이 증거 되기 위해서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예수님 몸으로서 움직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