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새언약의 반복이란 예수님의 시간의 침입

아빠와 함께 2022. 8. 13. 21:30

고린도전서 11:23-26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11: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새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은 사람을 천국과 지옥으로 가름하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이는 곧 인간의 그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께서는 기준으로 사용치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로운 행위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하는 것도 아니라 평생 악하게 산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에 대한 관심과 반응으로 결정됩니다. 왜 그래야 하나요? 그것은 새 언약 이외의 모든 기준들은 인간들의 행위를 뭉쳐서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전도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예배 참석해도 그것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해냄’에 있습니다. 반면에 ‘새 언약’은 인간이 해내지 못함이 취지입니다.

 

즉 인간들이 스스로 행할 수 있는 것을 수집하여 그것으로 천국에 입성하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물질의 정신화’입니다. 인간은 자기 생존을 위해 물질을 생산하고, 그 생산된 것을  교환하면서 사회라는 것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인간 사회에서는 물질 생산에 필요한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에 대한 염원같은 것을 담은 기념물들이 여기저기에 세워집니다. 옛날에는 피라밋이 그러 것이고 오늘날 같은 지극히 높은 고층건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대규모 예배당도 또한 ‘물질의 정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호사로운 저택이나 아파트 안에 온갖 귀한 것으로 채워놓는 것도 또한 이러합니다.이 ‘물질의 정신화’는 내세까지 넘보게 됩니다. 인간의 신체는 일시적이고 한시적으로 죽으면 허무하게 끝나버립니다. 따라서 영원한 내세를 고대하는데 바로 이 영원한 삶을 위해 아김없이 종교에다 물질을 퍼붓게 됩니다. 일종에 신에게 밑밥 던지는 겁니다. 설마 “좋은 바 받았으니 나에게 섭섭하게 하지는 않겠지”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바로 이런 행위를 천 년 이상 반복적으로 해온 민족이 있었으니 바로 유대민족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예수님이 제정하신 ‘새 언약’ 곧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들과의 충돌을 뜻한다는 것을 새겨봐야 합니다.

 

그들은 인간들이 해 낼 수 있는 것을 반복적으로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이요 무교절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새 언약을 선포하신 것이 바로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린양’을 죽여서 신의 노여움에서 벗어나는 그 약속 안에 반복적으로 들어와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 안에 들어오는 방식에 대해서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양을 잡으므로서 성사되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물질의 정신화’ 작업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다음의 두가지 근본 마음가짐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바로 “내가 과연 하나님이 생각하는 참된 인간인가?” 라는 점과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하면 나는 계속 살아남게 되지?”라는 식으로 행동에 나선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언약 안에서 다음과 같이 마음가짐이 달라져야 합니다. 첫째는, “참된 인간은 예수님이지 나는 결코 참된 인간이 아니다”. 둘째는, “나는 단지 한시적으로 사는 것이지 죽어가야 하는 과정이 마땅하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태도는 여기서 나오는 의미나 가치가 결코 인간의 자아 중심이 아닌게 됩니다.l 바로 예수님의 새 언약은 인간의 호응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옛적으로 주시던 그 언약 노선에 맞춘 예언 완성 차원에서 등장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12:42에 보면,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여호와의 밤’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이 세상 자체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데 그것은 이 세상이 깜깜한 밤이라는 입장에서 다루어진다는 겁니다. 곧 ‘시간의 반복’입니다. 인간 행위의 반복이 아닙니다. 시간 반복은 인간이 손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가만히 있다가 하나님의 일방적 평가에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의 밤’은 곧 하나님의 언약대로 세상 속에서 차질없이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그 전의 언약에 여기에 대한 암시가 있어야겠지요. 창세기 32장에 보면, 거기에 야곱이 나옵니다. 야곱은 살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이 참으로 가치있는 인간이라는 점을 증명이라고 하듯이, 형으로부터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얍복강에 배수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깜깜한 밤에 난데없는 자객이 등장했고, 야곱은 살기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해뜰쯤 되어 불현듯 상대가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해가 뜨려고 하니  나는 이 세상을 떠야겠다”고 말입니다. 야곱은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분이 바로 언약을 내려주신 하나님인 것을 말입니다. 이처럼 새언약은 사람 손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 찾아오신으로 진행되고 완성됩니다. 야곱은 거기서 새 사람이 됩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뀝니다. 신약 때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새언약의 반복이란 이처럼 예수님의 직접 개입으로 반복되는 시간의 침입입니다. ■ ‘물질의 정신화’로 치닫는 그 정신에 주님께서는 언약으로 마중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형식적으로 성만찬으로 구원의 효력을 내려는 소위 성만찬 행사가 무용지물이 됩니다. 하지만 ■무용지물이 된다할지라도 인간들이 하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옛사람은 언약에 의해서 전부 배설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배설물’이란 원래는 인간 내부에 자리잡은 것인데 외부에서 새로운 것이 밀고 들어오게 되면 자신의 자리를 빼앗겨 외부로 강제로 배출되어야 될 것을 말합니다. 즉 인간들이 교회에서 하는 기도와 금식과 성경공부와 예배와 찬양과 예배와 전도나 선교 같은 모든 것은 실은 그리스도의 침입으로 인해 외부로 튀어나온 배설물 같은 것으로 사람들은 본인들의 그러한 행위에 의미를 두게 됩니다. ■이는 곧 인간 자체가 배설물임을 증명합니다. 이처럼 새언약의 반복은 성도의 위치가 영원불변함을 알려주기 위해 사적인 야망과 욕심에 뭉쳐진 모든 행위들은 ‘죄’라는 이름으로 외부에 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현장이 바로 성도의 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 속한 새형상 입을 때까지 평생 배설물만 방출됨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